제 2 장 1

 

제 2 장

1

 

자식들에 대한 걱정은 모든 부모들에게 있어서 굳어진 본능이다.

이날 밤 몰탈혼합기의 동음에도 끄떡않고 잠들던 림영찬이 딸의 방에서 새여나오는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듣고 깨여나게 된것도 그때문인지 모른다.

《싫어, 싫어.》

그 어떤 흉칙한 놈의 폭행에 맞서 싸우는듯 한 비명이 숨넘어가는 흐느낌으로 변하자 림영찬은 황급히 안해를 흔들어 깨웠다.

《무슨 일이세요?》

《어미란게··· 애가 소리치는것도 못 듣소. 어서 가보우.》

《그때문에 깨웠수?》

《가보라니까.》

《어이휴, 딸생각 끔찍도 하우다.》

잠시후 옆방에 갔다가 돌아온 안해는 무슨 중대소식이나 기다리듯이 이불을 제끼고 앉아있는 영찬을 보고 입을 싸쥐며 웃었다.

한때 《부르도젤》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성미가 드세차고 대틀진 남편이 다 큰 딸의 꿈때문에 신경을 쓰는것이 기막혀 웃는 웃음이였다.

《어쩌고있소?》

《어쩌긴요. 가위눌린거지요. 잠들었더군요.》

《헛, 무슨 꿈을 꾸길래 그래.》

림영찬은 멋적게 두덜거리며 누웠다가 불쑥 떠오르는 생각을 입에 올렸다.

《여보, 그 애가 바람든것 아니요?》

《무슨 망녕든 소릴···》

《망녕이라니?! 요즘 그 애한테 무슨 남자들 편지가 그리 많아.》

《무대배우니까 그렇지요. 연기에 대한 소감이나 의견을 써보내고··· 개중엔 색다른것도 있겠지요.》

《그게 문제라는거요. 당신 송재경이란 사람 알아?》

《한번 봤어요. 모스크바 세계청년학생축전에 갔을 때 사귄 사람이래요. 군대에서 사관장을 하는.》

《흠, 그렇군. 내가 본 그 사람 편지만도 열장은 넘어. 오늘 아침도 나가다 볼라니 신문통에 그 사람 편지가 있었소. 그저 볼게 아니요. 군대복무하는 사람이 무슨 여가에 그렇게 편지질이요. 그게 다 향옥이가 꼬리를 치니 하는짓 아니겠소.》

《어이유, 당신은 그 나이때 어쨌다구.》

《어쩌긴 어째?》

《다 잊어먹었어요? 근무시간에도 지부렁거리면서 검열입네 하고 집에까지 찾아다니구.》

《거야 임자에게 혁명적영향을 주어 우리 대렬에 끌어세우자는것이였지. 그통에 임자가 어떻게 되였어.》

《어휴, 제덕일가, 다 당에서 이끌어준 덕이지.》

안해의 대답에 림영찬은 소리없이 웃었다. 불시에 마음이 흥그러워진 그는 안해의 손을 슬며시 잡아 끄당겼다. 약간 거칠거칠한 손에서 옛날의 매츨하고 말큰하던 맛은 사라졌으나 가슴쩌릿할 정도로 정겹고 사랑스러운 손이다. 한때 이 손의 주인이 되려 얼마나 속을 태우며 진창길, 먼지이는 길을 걸었던가.

아득히 흘러가버린 40여년전···

치익- 기관차가 증기를 뿜어올리며 멈춰서면 농촌물산을 어물과 잡화 등속으로 바꿔진 보짐장사군들이 내리고 뒤이어 학생복에 까만 구두를 신은 처녀가 사뿐히 뛰여내린다. 처녀는 소똥과 짚검불이 널린 달구지길이 아니라 석양빛에 반짝이는 레루길을 따라 총총히 걸음을 옮긴다. 이윽하여 처녀는 산자드락으로 펼쳐진 과수원속으로 꿈같이 사라진다.

해종일 침목과 레루와 씨름하던 선로반 역부들은 한동안 처녀의 모습에 흘린듯 눈을 주다가도 약속한듯 영찬에게 시선을 옮긴다. 애젊은 선로공인 영찬이가 그 처녀에게 반했기때문이다.

《여, 암만 봐야 그림에 떡이다. 이제라도 사각모나 쓴다면 몰라도.》

이죽거리는 말들에 영찬은 입술을 사려물따름이다. 토요일마다 남포의 하숙집에서 집을 찾아 돌아오는 고녀생은 그의 온 마음을 송두리채 빼앗아버린 공주님이다.

무엇때문이였던가. 그와 자기사이에는 넘을수 없는 장벽이 있음을 알고있다. 매일 세끼 흰쌀밥을 먹는 과수원집 딸과 하루 두끼 강냉이죽으로 주린 배를 달래는 자기와는 아득한 차이가 있었기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사이에는 보통학교시절에 맺아진 깨끗한 우정이 있었다. 림영찬에게는 허리를 다쳐 운신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병구완에 쓰라고 남몰래 보내오는 려분이의 돈이 따뜻한 인정으로 가슴깊이 새겨져있었고 려분에게는 부랑아들의 시까슬림을 막아주는 림영찬의 드센 주먹이 고마움으로 새겨져있었다. 해방은 그들의 이러한 감정에 아지를 치고 꽃을 맺게 한 봄바람이였다. 가난한 사람들의 세상이 왔다는 사실로 하여 가슴이 부풀대로 부푼 림영찬은 그전까지 공상속에서만 그려보던 려분이를 두고 만리성의 꿈을 키우게 되였고 려분은 려분이대로 총각의 눈이 불덩어리처럼 타오르는것을 남다른 호기심과 두려움속에 마주보게 되였다.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새 조선 건설에 한결같이 떨쳐나서자는 위대한 수령님의 개선연설이 알려졌을 때 림영찬은 드디여 결심을 내렸다. 갓 조직된 보안대 대원으로 뽑힌 그는 난생처음으로 으리으리한 가죽장화에 모직군복(일본놈들이 버리고 간 장교복이긴 하였으나)을 입고 갈천집에 있는 려분을 불러내여 사랑의 첫고백을 하였다. 한번, 두번, 세번··· 2년후에 그들은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빈농출신의 보안대원과 중농출신의 고녀생과의 결합은 시대변화의 결실이였다.···

《여보, 자요?》

안해의 물음에 림영찬은 애틋한 추억에서 깨여났다.

《왜 그러오?》

《향옥이가 외삼촌에 대해서 자꾸 묻지 않아요?》

《신우에 대해?···》

《네. 아무래도 말해줘야 할것 같군요.》

《아직은 모르는게 좋아··· 입당할 때쯤엔 알게 하지. 그땐 내가 말해주겠소.》

림영찬의 기분은 졸지에 뿌옇게 흐려졌다.

희스름한 천정을 쳐다보는 그의 눈앞에는 추억속에 좀해 떠올리지 않던 사람의 얼굴이 그려졌다.

정신우가 그냥 살아있었다면 림영찬과 려분의 결합은 이루어지지 못했을런지 모른다.

려분이의 오빠인 정신우는 처음부터 림영찬이네와는 담을 쌓고 지냈다. 서울에서 음악공부를 하다가 해방바람에 귀가한 그는 남포시안의 《유산청년》들과 휩쓸려다니며 려분에게 접근하는 림영찬에 대해서는 쓴외보듯 하였다. 이로하여 그에 대한 림영찬의 감정도 좋지 않았다. 그때 민주선거를 파탄시키려 한 반동청년들의 책동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정신우와 한짝으로 돌아다니는자들이라는것을 안 림영찬은 정신우마저 체포하려 했다. 다행히도 보안대책임자였던 주성익의 반대로 체포까지는 하지 않았으나 이 일로 하여 림영찬과 정신우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였다.

그로부터 며칠후 정신우의 자살사건이 생겼다.

《려분아, 나는 이 세상살이가 싫어 떠나간다.》라는 쪽지를 남기고 정신우가 사라진 날 시내의 반동청년 셋도 행방을 감추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림영찬은 정신우가 그렇게 한데는 자기 책임도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정신우같은 사람들은 타도대상도, 독재대상도 아닌 포섭대상이며 혁명의 동력으로 된다고까지 하셨다는것을 알았을 때는 얼마나 후회가 컸던가. 시의 요직에 앉은 일부 나쁜놈들들이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책상서랍에 감춰놓고 돈깨나 있고 공부나 한 사람들을 다 친일파나 부르죠아로 몰아치며 바람을 일구던 세월이였다. 그런 바람은 인간에게도 혼돈과 방황을 가져온다. 정치의 힘은 거대하다. 옳은 령도의 정치는 사회와 인간을 부단히 아름답게 변모발전시켜나가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인간을 불행과 비극에로 떠밀어간다.

(정신우가 그냥 살았다면 지금쯤은 예술계의 한다하는 일군이거나 훌륭한 바이올린연주가로 되였을수도 있다.)

림영찬은 40여년전 해지는 과수원 비탈길에 앉아 무슨 《신세계》라는 음악을 타며 눈에 눈물이 글썽해있던 정신우를 그때와는 전혀 달리 련민속에 그려보았다.

(향옥이한테 그 사람 말을 해주긴 해야겠다. 오늘의 시대가 얼마나 좋은가를 깨닫게 하는 교양으로도 될수 있지. 그때 내가 지금 같았어도 그를 돌려세울수 있지 않았을가.)

림영찬이 이런 번민속에 허덕일 때 그의 딸인 향옥이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머니가 들어왔을 때는 잠든척 했을따름이다. 그는 스산한 꿈을 꾸었다. 그때 너무 놀란것으로 온몸에 진땀이 내배였고 봉긋하고 딴딴한 가슴속에서 뛰는 심장의 세찬 박동까지 손에 마쳐왔다.

처음에는 비행기를 타고가는 꿈을 꾸었다. 보라색구름과 찬란한 해빛속을 헤쳐가는 꿈이였다. 그런데 비행기는 사라지고 이즈마일로브호텔마당에 서있는가싶더니 온몸이 두둥실 뜨며 뭉게구름속에 올랐다. 손을 내뻗치니 햇솜같은 구름이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그렇게 날았다. 둥그런 태양을 마주 향해가며 손벽을 쳤다. 그런데 갑자기 돌개바람이 일며 검회색구름이 그를 에워쌌다.

향옥은 더럭 겁이 났다. 끝없는 어둠의 심연, 검은구름속에서 숨까지 막혀들었다. 그런데 그 구름속에서 가슴과 팔이 온통 털부숭이인 웬 남자가 껄껄 웃으며 나타났다. 악마의 둔갑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움츠리는데 그 털부숭이는 상아빛얼굴에 금발머리를 한 외국청년으로 변하였다. 그 청년은 싱글싱글 웃으며 향옥에게 날아왔다. 파란 눈과 뾰족한 코가 얼굴에 닿을 지경이였다. 향옥은 소스라치듯 놀라며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를 에워싼 구름은 바줄처럼 그의 몸을 동여매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 청년이 씽글씽글 웃으며 그를 그러안았다.

향옥은 비명을 질렀다.

《싫어, 싫어.》

그때 검은구름이 쩍 갈라지며 예술단 단장아바이가 나타났다.

그가 향옥이를 찾는 소리에 금발머리는 기겁하여 달아났다.

《단장동지.》

향옥이 그의 품에 안기며 눈물을 흘리다보니 그는 단장아바이가 아니라 새파랗게 젊은 인민군 사관장인 송재경이였다.···

(참 별난 꿈이였어.)

향옥은 꿈에서처럼 얼굴을 붉혔다. 전날 아침에 받은 송재경의 편지로 하여 생겨난 꿈이라고 생각했다.

송재경은 편지에 대학추천을 받게 되였다고 썼다. 향옥은 짧은 점심시간에 그에게 보내는 회답편지를 쓰면서 김일성종합대학 외문학부 아니면 외국어대학을 지망하는것이 좋을것 같다고 의견을 밝혔다.

향옥이가 그를 알게 된것은 모스크바축전때였다. 이즈마일로브호텔앞에서 《날라리춤》에 걸려들어 망신을 당한것은 두고두고 창피스러운 일이였지만 그통에 송재경을 알게 된것은 행운이였다. 해군사관장이며 중대사로청위원장인 송재경은 영화의 긍정역을 시키면 만사람의 호감을 살듯 한 사람이였다. 후리후리한 몸매에 늘 웃음이 감도는 총명하게 빛나는 눈, 유쾌한 성미에 해학과 기지가 풍부한 그는 중학교때 배운 영어지식을 자습으로 보충해 웬간한 회화는 곧잘 했다.

향옥이를 망신시킨 금발머리에게 영어로 답새기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후련하다. 향옥은 그때 어떻게 되여 그 망나니의 춤동작에 끌려들어갔는지 모른다. 지지 않겠다는 승벽때문이였는지.

《이 동무는 나의 애인이요.》

금발머리한테서 향옥을 떼여낼 때 송재경이 한 말이다.

금발머리는 그후에도 여러번 만났다. 나중에는 통성까지 하였다. 이름은 아이레스, 조선청년들에게 호감을 가지고있노라고 하였다.

(그래, 꿈에 본 금발머리는 바로 그 아이레스였어. 참 망칙스러운 꿈이야.)

향옥은 천정의 푸릿한 형광등을 쳐다보며 그때의 광경을 하나하나 그려보았다.

춤사건이 있은 다음날 아침 향옥은 송재경을 찾아가 만났다. 그때까지 수백명 대표들속에서 있는지 없는지 알지조차 못하던 사람이였으나 향옥으로서는 전날 저녁에 있은 일에 대하여 변명도 하고 거기서 벗어나게 한데 대한 고마움도 표시하려 했던것이다. 뿐만아니라 어덴가 그 나이또래의 청년들과는 좀 달라보이는 그에 대한 호기심도 바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향옥은 그에게서 쌀쌀한 정도이상의 모욕이라고밖에 할수 없는 푸대접을 당했다.

《아, 동무요?》하며 재경은 비웃는듯 한 웃음을 머금고 그를 훑어보는것이였다.

(나를 시시한 처녀로 아는구나.)

향옥은 모닥불을 쓴듯 얼굴이 화끈거렸으나 참았다. 자기가 결코 시시껄렁한 처녀가 아니라는것을 증명하고싶었고 자기를 깔보는 이 남자가 후날 곰살궂은 태도로 접근해오는 《꼬락서니》를 보고싶었던것이다.

향옥은 그때까지 알던 모르든 거의 모든 총각들에게서 선망과 애정가까운 눈길을 모으며 지내왔던것이다.

그는 분한 마음을 눅잦히며 친절히 말을 걸었다.

《저··· 한가지 미안한 부탁을 하자요. 앞으로 여기 있는 동안 저의 보호자가 되여줄수 없을가요? 저는 좀··· 겁이 많은 처녀랍니다.》

그 말에 송재경은 분명 놀라는듯 했으나 그럴사한 대답으로 응해나섰다.

《그럽시다. 누구나 동무의 보호자가 돼달라면 기뻐할겁니다.》

그리고는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교양은 있구나.)

분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 사그라졌다.

이렇게 되여 그들은 행사가 없거나 틈시간이 생기면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모스크바의 거리들도 함께 돌아보았다.

송재경은 아는것이 많았다.

챠이꼽쓰끼며 똘쓰또이, 고리끼의 동상을 보고는 그들이 창작한 작품에 대하여 흥미진진하게 말했고 붉은광장에서는 로씨야의 10월혁명으로부터 쏘독전쟁까지의 력사도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어떤 영화광고앞에서는 쏘련이 서방문화의 침습속에 있다고 수정주의 력사에 대해서도 일장《강의》를 하였다. 그런 때면 향옥은 순진스러운 학생의 태도를 취했고 (실지 그때는 학생이 된듯 한 기분속에 있었다.) 때로는 어떻게 그처럼 많은걸 아는가고 묻기도 했다. 그러면 재경은 눈섭을 찌프렸다.

《교실책상에서 졸지 않았다면 누구나 다 아는것이지요.》

이런 속에서 재경은 향옥이가 바란대로 《곰살궂어》졌고 (향옥이가 그렇게 봐서인지···) 향옥의 가슴속에 맺혀졌던 《보복심리》도 사라져갔다.

조국에 돌아왔을 때는 재경을 집에까지 초청하여 외간남자들한테 보이지 않던 자기의 방구경도 시켰다. 향옥은 그때 처음으로 재경에게서 수집음 비슷한 빛을 엿보았다. 갖가지 화장품들을 벌려놓은 화장대며 여러상의 그림들을 붙인 방가운데서 송재경은 어색스럽게 두릿거리며 의자에 앉을념도 하지 못했던것이다.

헤여질 때 특별한 약속들은 없었지만 서로 편지를 나누기로 하였다. 약속대로 재경은 부대에 돌아간 즉시 편지를 보냈고 향옥이 역시 회답을 썼다. 그 이후 한달에 한번씩 편지가 오기도 하고 서너달 건너뛸 때도 있었는데 향옥은 편지를 받고서야만 회답을 쓰는 《원칙》을 지켰다. 향옥은 그의 편지를 별로 기다리지 않았으나 편지를 받군 할 때마다 좀 특별한 말들, 향옥이가 이따금 총각들한테서 받군 하는 은근히 가슴뛰게 하는 말들이 써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으로 성급히 피봉을 떼군 했다. 그렇지만 오늘까지 그의 편지엔 간단한 문안과 일 잘하고 건강하라는 당부밖에 없었다. 향옥이 역시 그 비슷한 내용으로 회답을 썼다. 그런 면에서 어제 온 편지는 좀 이례적이라고 할수 있었다. 대학추천을 받았는데 어데 가면 좋겠느냐고 물었다는것은 자기에 대한 남다른 믿음과 기대를 표시한것으로 생각되였기때문이였다.

(나에 대한 그 동무의 감정은 어떤것일가. 그저 평범한 동무로? 그렇다면 나는?···)

향옥은 이런 생각을 굴리다가 빙그레 웃으며 모포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지난밤에 무슨 꿈을 꾸었니?》

아침밥상에 마주앉으며 림영찬이 향옥에게 물었다.

입연지가 지워질가봐 조심스레 밥을 떠넣던 향옥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광복거리건설현장에 나간 꿈을 꾸었어요.》

《그런데 고함질은 무엇때문이였냐?》

《일이 잘 안되니 그랬지요. 참 아버지, 광복거리건설은 언제까지 끝내나요?》

《그걸 몰라서 묻니? 수령님 탄생 80돐전에는 기어코 끝낸다.》

《아니?! 세계청년학생축전때문에 앞당겨진다고들 하던데···》

《앞당겨야지.》

《축전은 5∼6년 간격으로 하게 되니만치 늦게 잡아도 90년안으로는 거리가 일떠서야 될것이예요.》

《허허, 네가 박사다.》

《아버지, 노는 소리가 아니예요. 진영오빠도 그러잖았어요.》

《얘, 축전! 축전! 하고 바람찬 소리만 하지 말고 건설부부장의 딸답게 똑바로 알아두거라. 광복거리는 어디 문수거리나 락원거리와는 대비도 안된다. 빠리나 싱가포르를 찜쪄먹는 거리란 말이다. 무슨 축전때문에 하고말고 하는것도 아니고, 또 그때문에 92년에 될것이 90년에 되는것도 아니야.》

《아버진 정말··· 그럼 왜 요전날 진영오빠앞에서 그런 소린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나요.》

《허허, 그는 너같은 철부지가 아니야. 다 알고도 남음이 있지. 참 진영이가 올 때가 되지 않았니?》

《올 때가 아니라 벌써 왔어요. 어저께 도착했대요.》

《근데 왜 우리 집엔 나타나지 않니. 너한텐 알리던?》

《안요.》

《그러니 넌 일은 안하고 그가 오는것만 탐문한 모양이구나.》

《사로청원으로서의 응당한 관심이지요 뭐.》

향옥은 제풀에 발씬 웃고는 살갑게 말을 이었다.

《아버지, 그건 그렇구요, 오늘 진영오빠를 찾아요. 저녁식사를 우리 집에 와 하라고.》

《네가 전화를 걸면 안되느냐.》

《내가 걸면 별래요.》

《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부탁한것 있거던요.》

《무슨 부탁?》

《비밀이예요.》

《너 또 언젠가처럼 시시나한 옷가지따위를 부탁한건 아니냐?》

《안예요.》

《그럼 뭐냐?》

《브로치.》

《브로치?!》

림영찬은 씹고있던 무우김치쪼박이 목구멍에 걸려들었다. 꽃유리사발을 들어 빨간 고추가루가 점점이 떠있는 김치국물을 단숨에 절반가량 들이켰다. 뻘겋게 질려가는 그의 얼굴을 띠여본 려분이가 향옥에게 힐난하듯 쏴붙였다.

《네가 철딱서니가 없구나. 국가공무로 가는 사람한테 그따위 잡것을 부탁하다니 말이 되니? 처녀가 그런 치레거리에 눈이 팔리면 천해진다.》

《아이, 엄만··· 우리 동무들이 달고다니는것 못 봤어요?》

《그렇다해도 외국것이 똑 제일이냐?》

《엄만 좌경이야. 사치품이나 녀자들의 장식품은 남들이 쓰지 못하는걸 써야 빛이 나요.》

《너 그걸 말이라고 하니. 사로청에서 그만큼 교양을 받았으면 지각이 있어야지.》

림영찬은 모녀간의 언쟁이 다툼질로 되는것을 보며 껄껄 웃었다.

《됐소, 됐소.》

《됐다니 무슨 말이예요. 얘 머리에 쉬가 쓰는데.》

려분이가 눈살을 찡그리며 내쏘았다. 그래도 영찬은 얼굴에 그려진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결혼초기의 영찬은 안해의 옷차림과 장식에 굉장히 신경을 쓰며 무슨 색다른 반지를 끼거나 화장을 조금만 진하게 해도 《부르죠아취미》라고 공박했다. 하여 려분은 언제 한번 치장을 번뜻하게 해보지 못하였다. 전쟁때는 전쟁이라는것으로, 전후복구건설시기에는 모든것이 부족한 때라는것으로 몸하나 가리우는것으로 만족하였다.

그사이에 젊은 시절은 다 흘러가버렸다. 영찬은 안해의 귀밑머리에 흰서리가 앉는것을 볼 때마다 한시절 자기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고싶어하는 녀성고유의 취미를 눌러버린것을 애달피 후회하군 하였다. 그 후회와 째지게 가난했던 어린시절의 여한은 딸이나마 남부럽지 않게 번듯이 내세우고싶은 욕망으로 바꿔졌다. 지금에야 무엇이 부족되는가. 옛날 부모들이 못다 누린 봉창까지 하여 한껏 떨쳐입고 즐기거라.

영찬은 딸의 요구라면 무엇도 마다하지 않았다. 딸에 대한 지나친 편애에 안해가 잔소리를 할라치면 《어찌겠소. 부모들이야 자식들을 위해 사는것이 아니요.》하는 식으로 밀막아버리군 했다.

전쟁때 아들을 폭격에 잃고 홀로 키운 딸이라 아버지로서의 애정이 더 극진한지도 몰랐다. 영찬은 지금 뭔가 딸에게 교훈적인 충고를 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합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열지 못했다.

무용수니까 좀 남달리 차리고싶어하는 심정이야 리해해야지 하는 생각에다가 2년전 건설대표단으로 유럽 도시들에 갔다가 프랑스제 화장품 한조를 사다줬던 일이 껴묻혀 갈마들며 따끔하게 타이를 말이 없었기때문이였다.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고 한껏 너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꼭지를 떼였다.

《얘야, 어머니말 그르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우선 대외사업에 나간 사람에게 그런 물건짝부탁을 한다는것이 애당초 잘못된것이고 다음으로 부탁한다는것이 그따위 노리개니 문제가 있다. 너를 깊이 모르는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하겠니. 허영에 차고 외국것을 넘보는 사람으로 볼게 아니냐.》

《아버지야 제가 그렇지 않은걸 잘 알지 않으세요.》

《거야 그렇지. 하지만 이번 일은 잘못했다. 진영인 내가 부르마. 그동안 못 보기도 했거니와 외국갔던 소식도 들어야지.》

림영찬에게 있어서 류진영은 친아들과 다를바 없는 사람이였다.

1951년 1월 패주하는 미제침략군을 추격하던 림영찬이네는 뜻밖의 횡재판에 부닥치게 되였다.

방금 점령한 적의 사단본부주변에서 군수창고 하나를 발견했던것이다. 거기에는 림영찬의 공병중대에 절실히 필요한 폭약과 도화선, 공병도끼, 점화기따위들은 물론 레손통(미군야전식료품)과 잠주머니, 지어는 비행기바퀴 같은 《잡동사니》들까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림영찬이네가 그 창고를 《정리》하며 중대에 필요한 《쟁기》들을 골라보고있을 때 주성익사단장이 탄 차가 들이닥쳤다.

그는 《쟁기확보》에 눈이 벌겋게 단 림영찬을 불러 평양출발을 준비하라고 했다. 로획한 기밀문건들을 보위성정찰국에 갔다바치고 돌아오는 길에 몇가지 물자들을 공병국에서 받아올데 대한 과업을 주고난 주성익은 얼어터진 입술을 꽉 깨물고있다가 무겁게 말을 떼였다.

《동문 이번 길에 집에 다녀와야겠소.》

《집이라니요?!》

《동무네 집사람이 아이를 하나 맡아 키우게 해야겠소.》

사단장은 차에 앉았던 군의를 불렀다. 군의가 안고있는 모포퉁구리속에는 생명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가냘픈 존재가 꼼틀락거리고있었다. 물오르기 시작한 작은 앵두알같은 코가 모포깃속에 오똑 솟아 쌕쌕 숨을 내불고있었다.

《시체더미속에서 살아남은 애요.》

패주하게 된 적들은 이곳 마을주민전체를 민주선전실에다 몰아넣고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집단학살을 감행하였다. 아이는 그속에서 유일하게 생명을 잃지 않았던것이다. 부부인듯 한 중년남자와 녀인의 품속에 든 아이는 종주먹을 열심히 빨고있었다고 했다.

어떻게 무사히 가져가는가?

공병중대는 하나같이 재간둥이들이다. 기발한 안들이 나왔다. 출발준비가 끝났을 때 주성익이 다시 왔다. 그는 100㎏짜리 장약통우에 우산, 술잔, 화살표식(중요화물에 쓰이는 표식부호)이 그려지고 《이 통을 발견한분은 즉시 뚜껑을 열고 해당 사항에 따라 성의를 표시하기 바람. ×사단 사단장》이라는 글발까지 써져있는것을 보고 눈이 둥싯해졌다. 림영찬이 은근한 만족속에 공기구멍을 촘촘히 뚫러놓은 뚜껑을 열자 주성익은 느슨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아이는 미군잠주머니와 모포로 두세번 감싼데다가 승용차바퀴 내피들을 구명대처럼 총총히 덧씌워놓았다. 그리고 네귀퉁이 짬에다는 우유가루봉지들을 박아넣었다.

《이렇게 하면 웬간한 폭풍에 날려도 아이는 끄떡없을겁니다.》

림영찬이네는 비행기폭격으로 하여 생겨날수 있는 불상사까지 예견했던것이다.

주성익은 흡족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였다. 이에 자신심을 얻은 림영찬은 아이의 가슴팍에 꽂아놓았던 종이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저희가··· 지나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종이에는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아이를 발견한 사람은 즉시 아이어머니들에게 젖을 얻어 먹이던가 우유가루를 풀어먹이라는 내용과 해당 당, 정권기관에 알려 남포시 갈천리 18반 정려분에게 보내달라는 부탁을 써넣었던것이다.

정자로 박아쓴 글의 내용을 훑어본 주성익은 언 볼을 매만지다가 껄껄 웃더니 림영찬의 어깨를 탁 쳤다.

《머리가 잘 돌아.》

편지를 쓴 사람의 이름을 사단장 주성익이로 한때문인것 같았다.

《수표를 해주시겠지요.》

《그래. 수표를 해야지.》

주성익은 림영찬이 뽑아드는 만년필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주머니에서 도장을 꺼내들었다.

《우리 장군님께선 이런 중대편지들을 보내실 때면 꼭 인장을 누르셨소.》

림영찬이 로획품 스리쿼타에 올라앉았을 때 주성익은 폭격에 조심하라는 당부를 다시 하고 지나가는 소리처럼 말했다.

《가면 젖어머니도 좋아할테지.》

림영찬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주성익이 수많은 군관들속에서 유독 자기한테 아이를 맡긴 리유가 짐작되였던것이다. 전쟁첫달에 아들을 폭격에 잃은 림영찬이네 불행을 잊지 않고있었기때문이다.

《저··· 아이 이름은 어떻게 등록하랍니까?》

《적당히 하지. 아니, 생각해둔게 있지 않아?》

《네, 우리 동무들이 지어놓은것은 있습니다.》

《무언데?》

《류진영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류가란 버들 류지.》

《저··· 흐를 류라고 했습니다. 강물처럼 진격해가는속에서 얻어진 꽃봉오리란 의미에서 류진영으로···》

《그게 괜찮겠소. 새로운 류가가 생겼구만.》

주성익은 뒤좌석에 놓인 궤를 어루더듬다가 주머니를 뒤지더니 쑥스러운 얼굴로 뚜껑을 열고 거기에 두툼한 돈뭉치를 집어넣었다. 그간 모아가지고있던 생활비같았다.

전후에 주성익은 평양에 올 때마다 림영찬의 집에 들렸다. 그때 림영찬은 제대되여 건설대학에서 공부하며 안해와 보통문아래 단층집에서 살고있었다.

주성익은 집에 오면 늘 아이와 함께 한식경이나 놀다가 가군 하였다. 림영찬은 그가 아이를 몹시 귀여워하는데 감심하였고 언젠가는 아이를 그한테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진영이가 인민학교에 입학하게 되였을 때 주성익은 뚱딴지같이 아이를 학원에 보내라고 하였다.

《아이를 훌륭히 키우자면 임자나 나는 안되겠어. 쓸어만지기만 해서야 어떻게 튼튼한 역군으로 키울텐가.》

하여 진영은 그의 말대로 학원에 갔다. 그리고 주성익이 기대한대로 진영은 사로청중앙위원회(당시)의 책임일군으로까지 성장하였다.

이날 림영찬은 출근하기 바쁘게 류진영을 전화로 찾았다. 그런데 진영의 방은 비여있었다. 몇번 전화를 걸다가 교환을 찾아 물어보니 회의중이라고 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와 전화를 다시 걸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회의가 그리도 길담.)

향옥의 든장질에 놀아난것 같아 더 전화를 걸지 않기로 마음먹었을 때 사로청에서 소집하는 긴급협의회에 참가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퇴근무렵인 오후 다섯시부터 하는 회의라고 했다.

(또 타산안토론이겠지.)

림영찬은 내키지 않는 걸음이였으나 진영을 만난다는데서 위안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