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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민의 현대 혁명력사에서 류례없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1995년의 나날 세계 대다수 대중보도수단들은 조선의 종말을 기정사실로 공포하고있었다.

미국의 강경보수세력은 자기들의 장래운명을 점쳐보면서 숨을 죽이고있는 세계의 진보적인류를 더욱 놀래울 자료를 언론에 제공하고있었다.

그리하여 언론들의 파장과 지면들에는 이때까지 극비에 붙여지고있던 대조선정책자료들이 실리게 되였다.

불과 한두달전 미중앙정보국 밀실에서 있은 보브 돌을 비롯한 강경보수세력의 중추적인물들의 비밀모의와 관련한 보도도 이미 세상에 공개되였다. 미국을 괴수로 하는 세계반동들은 승리에 완전히 도취하고있었다.

사회주의조선의 운명을 건질 힘은 이 세상에 없을것 같았다.

미국의 암시를 받은 남조선당국자들은 공화국북반부를 통합한 후의 《정치구조》를 짜느라고 병합된 도이췰란드에 비밀리에 이른바 《모사진》을 파견하였으며 우리 지역에 파견할 《도지사》임명놀음까지 새로 벌리였다. 《조미기본합의문》채택후 우리 나라와 거래를 시작하려던 외국의 투자가들은 모두 엉거주춤해버렸다.

한두해가 지나서 자기들의 패배가 명백해진 때 미국의 강경보수집단의 기본두뇌라고 하는 카네디기금 상급연구사 호케르는 《뉴욕타임스》지에 낸 글에서 《우리가 믿은것은 북조선을 휩쓸게 될 기아와 함께 김일성주석이 김정일령도자에게 넘겨준 간부팀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과 관련되여있었다.》라고 고백하였다. 호케르의 그 고백은 무근거한것이 아니였다. 왜냐하면 강경보수세력의 두목인 보브 돌은 비밀모의들에서 《북조선의 당정치국, 비서국 성원중의 대다수가 70살이상의 고령이다. 이들의 생리적수명이 끝나게 되면 김정일령도자는 더는 믿음직한 측근세력을 가지지 못할것이다.》라고 흰소리를 쳤던것이다.

우리 인민이 허리띠를 조이고 《고난의 행군》을 하고있던 1995년의 나날, 원쑤들이 《북침》전쟁연습을 미친듯이 벌리며 흰기를 들라고 포성으로 위협하고 식량을 실은 배들을 동서해에 정박하여놓고 《개혁》과 《개방》을 요구하며 포성없는 현대판 포함외교를 들이대고있던 그 나날에 세계의 대중보도수단들은 미국의 승리만을 전하였다.

보도들에서는 열손가락에도 안들 변절자들의 이름이 렬거되고 홍수에 밀려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간 사람들의 수자까지 합쳐 굉장히 떠들어대고있었으며 식량공급소들에 줄을 서있는 사람들의 수자를 밝히고있었다. 그때의 보도들에는 공장, 기업소들과 매개 가정들에서 자체로 살아나가기 위해 애쓰면서 사회주의국가를 도와나선 사실이 언급되지 않았다. 허리띠를 조이는 속에서도 유치원과 학교, 병원들이 문을 닫지 않고있으며 고령의 당과 정부의 간부들이 매 가정들을 찾아다니며 밥가마도 열어보고 싸가지고 간 점심밥도 나누어먹으며 늙은이들에게 담배를 권하고 지난날에 비하면 지금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무해준것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때의 보도들은 조선인민경비대 군인들이 금릉2동굴과 청류다리(2단계)건설, 평양ㅡ향산관광도로건설에서 매일 눈부신 성과를 올리고있으며 더구나 세계굴지의 대규모 금강산발전소건설이 진행되고있다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어쨌든 적은 떠들어댔으며 우리가 손을 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1995년 2월 25일 오진우가 사망하였다.

그가 중병을 앓고있다는것을 알게 된 때로부터 초조히 기다리고있던 적들은 조의식장과 영결식장에 나오신 김정일동지께서 슬픔에 잠겨 안경을 벗어들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시는 화면이 조선중앙텔레비죤에 비쳐지자 환성을 올렸다. 오진우를 전 세대의 대표자로 여기고있던 그들은 그의 서거를 저들이 바라고있던 사변의 서곡으로 여기였던것이다. 틀림없이 김정일령도자에게는 무서운 타격으로 될것이다, 자기가 의지하고있던 기둥이 뽑히게 되고 헤여날수 없는 궁지에 몰리게 되면 그이에게도 그 어떤 《변화》가 일어날것이다, 집권이후의 그의 정치신념인 계승에 바늘구멍만 한 짬이라도 생겨라! 적들은 그것을 학수고대하며 또 믿었다.

그러나 그이의 눈물을 전혀 다르게 분석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꼬박꼬박 일기에 적어넣고있던 이전 쏘련원수 드미뜨리 야조브는 조선중앙텔레비죤에 비쳐진 화면을 보고 이렇게 썼었다.

《그이의 눈물은 순수한것이다. 어머니는 자식의 죽음을 두고 그 어떤 리해관계를 가지고 우는것이 아니라 본능인 모성애로 우는것이다. 19세기 로씨야의 평론가 벨린스끼는 눈물을 리기주의의 산물이라고 하였다. 허나 오늘 김정일동지께서는 자신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신것은 아니다.》 후날 김정일동지의 로작 《혁명선배를 존대하는것은 혁명가들의 숭고한 도덕의리이다》가 나왔을 때 그 일기 여백에다 다음과 같이 더 써넣었다.

《미국량반들은 혁명선배들에 대한 그이의 도덕의리를 보지 못했단 말인가. 그들이 청맹과니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다. 반공광증에 미쳐난 그들이 이것을 의식적으로 외면했던것이다.》

오진우가 운명하기 몇시간전 김정일동지께서는 그를 또다시 찾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오진우의 살이 다 빠져서 앙상해진 손을 잡으시였다. 그러자 생명의 전류라도 흘러든듯 그는 의식을 차리였다.

그의 입에서 알릴듯말듯 이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고··· 맙습··· 니다.···》

무엇이 고맙다는지 앞뒤가 없어서 알아들을수 없는 소리였다. 침상곁에 둘러선 사람들, 총참모장 최광도 오진우의 부관도 담당의사도 낮이나 밤이나 그의 곁에서 떠나지 않던 딸도 그 소리를 장군님께서 자기를 찾아주시여 고맙다는 뜻으로 짐작할뿐이였다.

그러나 김정일동지께서만은 앞뒤가 없는 그 외마디소리의 뒤대사를 정확하게 그리고 감명깊게 느끼고계시였다.

바로 그 몇시간전에도 김정일동지께서 오진우를 찾으시였었다. 오진우가 의식을 잃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 오진우는 자기 손이 차지만 마지막으로 잡아보자고 하면서 김정일동지의 손을 잡았다. 그는 그때에도 고맙다는 말씀을 올리였다. 그는 그 말씀을 올리면서 두가지 이야기 즉 나이가 든 최중권상장을 제대시키지 않고 군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한데 대해서와 금강산발전소건설을 계속 하기로 한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환자의 손을 잡고있는 자신의 손에 힘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걱정마십시오. 원수동지, 최중권상장을 우리가 잘 돌봐주겠습니다. 그리고 금강산발전소도 념려 마십시오!》

오진우의 두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관자노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맥이 진한 그는 그것으로써 고맙다는 말을 다시 하였다.

그러나 이 순간 김정일동지께서는 그의 목소리가 아닌 전혀 다른 목소리, 우렁우렁하면서도 부드럽고 자애깊은 목소리를 들으시였다. 그것은 어버이수령님의 목소리였다. 그이의 눈앞에는 10년전일이 펼쳐졌다.

오진우는 뜻밖의 사고로 중태에 빠지였다.

급보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오신 김정일동지께서는 한창 망연자실하여 서계시였다.

수령님께서도 병원으로 찾아오시였다. 그 어떤 일에도 락담을 모르시던 수령님께서 머리를 흔드시며 숱한 싸움판에서도 죽지 않던 사람이 이렇게 죽다니 하고 비통하게 말씀하시였다.

이 순간 김정일동지께서 의사들앞에 나서시였다.

《마음놓고 수술칼을 대시오! 환자가 인민무력부장이란 사실을 잊어야 합니다. 립회는 내가 서겠소!》

수술이 진행되였다. 그것은 째고 붙이고 하는 수술이 아니라 인체의 모든 기관을 새로 만들어낸것과도 같은 기적적인 창조였다.

그 기적이 어디서 온것인가를 잘아시는 수령님께서 김정일동지의 손을 잡고 말씀하시였다.

《고맙소!》

그후 쏘련군대의 원수병원에서 후유증에 대한 치료를 받고 돌아오는 오진우를 비행장에서 맞이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완쾌된 몸을 보시자 너무 기쁘시여 어서 김정일동지에게 귀를 잡고 절을 하라고 하시면서 크게 웃으시다가 《김정일동무, 고맙소. 정말 고맙소.···》하고 목이 메여 말씀하시였다.

그 오진우가 끝내 눈을 감았다. 병원에서 돌아와 몇시간후에 병원원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김정일동지께서는 오래도록 어깨를 들먹이시였다.

너무도 긴 시간 찾지 않는것을 이상히 여겨 곽무선이 슬며시 집무실로 들어갔다가 가슴이 섬찟하게 놀랐다. 그이의 두눈은 시뻘겋게 충혈되고 집무탁우에는 으스러지게 틀어쥐여서 부러진것이 분명한 마찌크가 놓여있었다.

미국의 정책작성자들은 혁명선배를 존대할데 대한 그이의 로작을 야조브가 일기에 쓴것처럼 결코 외면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그 로작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눈을 주어 구절구절 파보았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되고 우리 공화국을 압살하는데 혈안이 된 그들은 아전인수격의 판단 즉 그것을 전 세대가 끝나가는데 대한 위기의식의 반영으로 속단하였다. 물론 혁명선배인 전 세대는 김정일동지께서 의거하고계시는 큰 기둥이였다. 오진우의 경우는 그이의 오른팔이라고 할수 있었다. 언제인가 그이께서는 오진우를 데리고 사진을 찍으신 일이 있는데 그때 그는 오른쪽에 서라는 그이의 말씀을 마다하고 왼쪽에 서면서 말하였다.

《저는 장군님의 왼쪽팔에 불과합니다.》

《아닙니다. 무력부장동지는 나의 오른팔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김정일동지께서는 그를 오른쪽에 세우고 사진을 찍으시였다.

1974년 우리 당 력사에서 특별한 의의를 가지였던 정치국회의에서는 김정일동지를 정치국위원으로 추대하였다.

그날 정치국회의에 참가하였다가 집으로 돌아온 오진우는 밖에서 벌어지는 일체의 사실을 나타내지 않던 전례를 깨뜨리고 《됐다! 이젠 됐다!》라고 하면서 이날 있었던 일을 발설함으로써 가족들을 깜짝 놀래웠다.

이런 오진우를 잃은것은 그이께 있어서 만회할수 없는 손실인것만은 사실이였다. 그러나 나무는 죽어도 서있는다고 오진우를 포함한 전 세대는 끝나도 귀중한 혁명정신을 남기는것이다.

오진우는 림종때에 1211고지에서 함께 싸운 전우들, 인민군대안에서 몇명 남지 않은 전쟁로병들을 부탁하였고 자기가 수령님의 뜻을 받들고 해온 금강산발전소건설을 걱정하였다. 미사려구를 모르고 작전도에 화살을 그어가듯이 실천적인 말만을 하는데 습관된 그의 이 당부는 단순한것이 아니였다. 그것은 후대들이 전통과 계승으로 살며 전통과 계승으로 승리하라는 전 세대의 의사를 대변하는 의미깊은 조언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오진우와의 영결식이 끝나고 대성산혁명렬사릉에서 내려오는 즉시 장례식에 참가하였던 각 군종, 병종 사령관들과 군부대사령관들을 최고사령부의 회의실에 부르시였다.

회의장에 들어와 앉은 장령들은 그이께서 나오시기를 긴장하게 기다리였다. 그들은 최근 미국에서 전 회계년도보다 1. 8% 더 많은 군사비지출이 강경보수파의원들의 주장대로 비준되였으며 뉴욕에서 경수로제공실무회담이 중단되고 미, 일, 남조선사이에 동방의 《나토》라고도 할수 있는 3각군사동맹이 결성된 사실을 알고있었다.

드디여 김정일동지께서 최광차수를 데리고 주석단에 나오시였다. 그이와 나란히 앉았던 최광이 그이께서 넘겨주는 타자친 종이장을 받아들고 천천히 걸어서 연탁앞에 나섰다. 그는 젊은 시절의 챙챙한 목소리를 되살리려고 애쓰면서 최고사령관명령서를 대독하였다. 그것은 조선인민군 각 군종, 병종군부대들이 금강산발전소건설장의 중요구간들을 하나씩 맡아서 해제낄데 대한 명령이였다. 모든 장령들이 이 뜻밖의 명령에 어리둥절해지기도 하고 의아해하기도 했다. 현지에서 무력부장의 장의식에 참가하기 위하여 평양에 왔다가 회의에 참가한 심철범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회의장에 들어오면서 정세를 우려했고 솔직히 공사의 운명도 생각했다. 그런데 일은 정 반대로 되였다. 그는 명령서를 접하고나서 공사에 대한 자신의 립장이 아직도 철저하지 못하며 동요가 있다는것을 의식하였고 그 어떤 경우에도 한번 내리신 결심을 무조건 관철해나가시는 최고사령관동지의 의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였다. 그러나 그는 최고사령관동지의 의지가 무엇에 기초하고있는지도 그리고 그이께서 매일, 매 순간 서거하신 수령님과 마음속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혁명선배들의 유언을 하루 한시도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였다.

최광의 명령랑독이 끝나자 김정일동지께서 마이크를 앞으로 끄당겨놓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시였다.

《이 공사는 수령님의 유훈입니다. 동무들이 금방 장의식에 참가하였지만 오진우동지는 그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정세를 운운할건 없습니다. 공사를 하다가도 달려나가 답새기면 됩니다. 그만합시다!》

금강산발전소건설을 최단기간에 끝낼것을 결심하시면서 이미 그이께서는 무엇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조선말이 아니라고 하시였다. 이것은 공사지휘를 새로 맡게 된 심철범장령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신념과 의지에 대한 피력이였다.

당시로서는 가능한것이란 하나도 없었다. 공사는 고사하고 사회주의조국의 운명자체가 문제로 되고있던 때였다. 몇해가 지나서 불가능이 가능으로 전변되여 공사도 완공되고 사회주의의 운명도 수호되였을 때에야 사람들은 자기들의 모든 승리와 성과의 근저에 령도자의 신념과 의지가 놓여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것이였다.

그러나 아직은 누구도 그것을 모르고들있었다.

사람들은 최중권과 심철범의 갑작스런 교체를 두고 공사지휘의 《능력》을 론했고 지어는 최고사령관동지의 신임도를 운운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당사자자신들도 그러루하게 생각하고있었다.

그러나 최고사령관동지 자신께서는 이 인사변동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시였다. 전쟁로병인 최중권장령은 전선동부에 필요해서 소환했고 심철범장령은 그의 후임으로 군사대학 최우등졸업생인 젊은 장령이 배치됐기때문에 공사지휘로 돌려놓았을뿐이다. 이 인사교체에서 류의한 점이 있다면 그들의 경력을 다시 좀 알아보신것이였다.

그것도 최중권에 대해서는 현재 생활에 대해서만 알아보시였는데 그에 의하면 8남매의 자녀들이 매달려있어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이래 생활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였다. 간부일군이 그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장령은 금방 아침상을 물리고 출근한 후여서 방안에 그가 받았던 아침상이 그대로 놓여있었는데 거기에는 시루에서 썰지 않은채 그대로 꺼내놓은 큼직한 강냉이빵 한덩이와 김치와 콩나물종지 하나가 놓여있었다고 했다. 이 보고를 받고 그와 식사를 함께 할 때마다 느끼군 했던 감정이 살아나서 마음이 좋지 않으시였다. 그는 언제봐도 줴기밥이면 줴기밥, 강냉이국수면 강냉이국수 가리지 않고 달게 들군 했던것이다.

심철범은 량강도 풍산내기였다. 풍산이라면 김형권동지와 김정숙동지의 활동지역으로서 항일혁명의 영향을 많이 받던 고장이였다. 강건너에서 울려오는 항일의 총소리를 들으며 자란 그는 열혈청년이 되자 총을 잡을것을 열망했다. 그의 이 열망은 광복후에 이루어졌다. 그는 보안간부훈련소를 거쳐 인민군대의 지휘관이 되였으며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최고사령부 련락군관으로 하루에도 수십수백리를 그야말로 갈범처럼 달리였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적후에 떨어졌던 그는 단신으로 사선을 넘어 최고사령부가 자리잡은 고산진으로 찾아왔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키가 작고 애티가 나는 그를 매우 용맹하다고 하면서 품에 안고 어깨를 쓸어주시였다. 수령님의 관심속에 련대, 사단의 책임적인 작전일군으로 자랐으며 군부대 참모장이라는 장령급의 중책을 맡게 되였다. 그는 근 20년간 이 중책에 있으면서 부대관리와 방어축성물구축, 지휘관들의 작전지휘능력을 높이는데 특출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경력에는 재미나는 일화도 있어 김정일동지께서는 혼자서 미소를 지으시였다. 그중 하나의 이야기는 귀밀밥만 먹다가 입대한 그가 무드기 담긴 흰 쌀밥그릇을 보자 《야, 흰쌀밥이다!》하고 소리쳐서 식사대렬을 웃기였다는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소위의 군사칭호를 받던 때의 이야기였다.

그는 열여덟살에 소위로 되였는데 하늘을 날것만치나 기뻤다. 간부부에 불리워가서 새끼별 하나가 박힌 금빛령장을 타가지고 나온 그는 한시가 급해서 중대로 돌아오던 도중 강냉이밭속에 들어가서 그것을 어깨에 달고 나왔다는것이였다. 웃음속에 이러한 사실을 읽어가던 김정일동지께서는 극히 최근의 생활자료 하나에 깊이 류의하시였다. 자기 차 운전사를 두명이나 연거퍼 갈아치웠다는것이다. 찌링그에 뭘 좀 실어서 사택으로 가져갔다는것이 리유였다. 심철범은 《수만대군을 먹여살릴 책임을 지고있는 나다. 그런데 너희들은 날 뭘로 만들자는거야?》라고 소리쳤다고 했다.

그의 집생활을 같은 풍산내기인 부인이 터밭농사를 해서 유지하고있었다. 생활비와 식권을 내놓는 법이 없기때문이였다. 노상 관하부대에 내려가 사는 심철범은 병사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 어김없이 식권을 떼놓았다. 그것도 실지 소비한 끼수보다 여러장씩 더 내놓군 하였다. 그러니 집에 내놓을 식권이 있을리 없었다.

그의 집에 평양에 사는 유치원또래의 손자애가 와있었는데 솜저고리의 팔꿈치와 신발을 기워신고 다니였다. 사택마을의 아이들이 《야, 〈꽃제비〉가 왔구나!》하고 놀려주어 본의아니게 애를 울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러한 자료를 놓고 해당일군들은 최중권이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생활이 청렴결백하다.》라고 한마디를 달아놓았다.

그러나 김정일동지께서는 《당의 령군체계가 확고히 섰다.》든가 《군사과업수행에 무한히 충실하다.》는 평정보다 그 한마디를 더 무겁게 여기였고 그것으로 해서 그들에 대한 믿음이 더해지시였다. 이 어려운 때 장령들이라고 특전을 바라지 않고 병사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그들이야말로 그 어떤 역경속에서도 운명을 같이 할 참다운 동지들이 아닌가! 최중권이나 심철범을 옮겨놓으면서 그들의 경력을 알아보신것은 단지 미더운 동지들에 대하여 더깊이 알자는데 목적이 있었을뿐이였다. 인민군대의 모든 병사들이 일당백인것처럼 모든 지휘관들 역시 그러하였다.

그이께서 보건대 특히 그들의 생활은 눈물겹도록 청렴하고 결백했다. 조국해방전쟁이 끝난 때로부터 지금까지 전사들의 병영은 달라진것이 많지만 지휘부건물들만은 그렇지 못했다.

최중권이 새로 가게 된 군부대만 해도 그 지휘부건물이 1960년대에 지은 낡은 건물이였고 대장이라는 가장 높은 급의 장령이 들게 될 (최중권은 군부대 사령관으로 발령받으면서 대장의 군사칭호를 수여받았다.) 그의 방에는 그 시기에 만든 책상과 투박한 철궤가 그대로 놓여있었으며 그 나무문틀에는 부대자체로 만든 불투명한 유리가 끼여있었다. 그가 들 사택은 그때에 지은 목조건물, 소박한 서너칸짜리 단층이였다. 이러한 집에서 이름있는 장령들이 살았다. 하지만 그들은 사생활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실상 그들의 집은 전사들의 땀내가 나는 병실이였고 지휘처는 전호속이였다. 사무실에서만 맴도는 일부 책상주의자들이 인민군지휘관들의 이 생활기풍, 투쟁기풍을 따라 배워야 할것이였다. 당일군도 행정경제일군도 누구나가 다··· 그리하여 온 사회를 정예화, 강군화해야 할것이였다.

선군정치를 펼쳐가실 결심이신 김정일동지의 군대의 모든 장병들에 대한 믿음은 거의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이였다. 이것은 그이의 온 생애를 통하여 이루어진것이였다.

조국해방전쟁이 터진 날 한낮에 김정일동지께서는 내각청사 옥상에 올라가시였다. 거기에는 몇명의 인민군전사들이 쌍신고사총 한대를 걸어놓고있었다. 그것이 정부청사를 지키는 대공무력의 전부였다. 하지만 무섭지 않으시였다. 어리신 그이의 귀전에는 그날 새벽 미제침략군이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다는 내무상의 전화를 받고 《미국놈들이 우리 조선사람들을 잘못보았소.》라고 하신 수령님의 말씀이 떠나지 않고있었다. 이틀후에는 청소한 우리의 항공대가 황주계선으로 날아들던 미제의 《하늘의 요새》라는 《Bㅡ29》를 격추하였다. 그 비행기를 떨군것이 나어린 비행사였다. 그는 자기의 비행기가 변변치 않아 남의 비행기를 빌려타고 올라가 그처럼 장한 일을 하였다. 련이어 인민군대의 서울해방, 주문진앞바다에서 미제의 중순양함 격침, 어느날엔가는 새로 개발한 미제의 직승기를 나포하였다. 청소한 인민군대였지만 그 위력은 실로 대단한것이였다. 그때 그이께서는 정규무력건설을 기념하여 진행된 첫 열병식을 눈앞에 그려보며 그 위력의 원천에 대하여 생각하시였다.

열병광장에서 터져오르던 《김일성장군 만세!》의 함성, 그것은 항일의 전통을 이어받은 수령결사옹위정신의 힘있는 시위였다. 그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조선인민군창건 60돐에 최대규모의 력사적인 열병식이 진행되였다. 최고사령관이 되시여 처음으로 진행된 이 열병식은 수령님으로부터 일체 무력을 인계받으시는 이관식이기도 했다. 여기서도 기본정신은 혁명의 수뇌부결사옹위였다.

같은 날 금강산발전소건설장 지하갱도에서도 하나의 이채로운 열병식이 있었다. 앞뒤가 붕락으로 막힌 한㎞ 구간에는 한개의 련대가 갇혀있었는데 밖으로 나올수 없었던 그들은 평양에서 진행되는 열병식을 시청할수 없었다. 련대지휘부에서는 토의끝에 평양과 같은 시각에 자체로 열병식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열병대오를 편성하였다. 중대마다 광차를 앞세우고 기수가 붉은 기발을 들고 그우에 섰다. 총대신에 착암기와 정대, 함마를 어깨에 멨다. 련대에 와있던 군부대 선전대원들이 취주악을 울리고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칼날같은 청돌이 깔린 갱도바닥을 쾅쾅 밟으며 보무당당히 행진해나갔다. 공기가 희박한 갱내는 숨이 헉헉 막히였으나 아랑곳없이 《결사옹위》, 《결사관철》이라는 구호를 웨치였다.

광차 몇개를 맞붙여놓고 널판을 깐 《주석단》우에 서있던 련대장과 정치위원이 열병대오를 축하하였다. 지휘관들은 손을 들어 건군절을 맞는 그들을 축하해주고 그들자신이 고동구호를 웨치였다.

김정일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의 수뇌부를 결사옹위하자!》 그러면 《주석단》앞을 지나는 대오가 그 구호를 받아 웨쳤다. 이렇게 행진을 한 대오는 곧장 작업장으로 향하였다. 그리고는 착암기로 구멍을 뚫고 발파를 하였다. 꽝꽝! 하는 폭발소리는 그대로 《축포》소리였다. 격동된 군인들의 입에서는 《혁명의 수뇌부를 결사옹위한 오중흡7련대를 따라배우자!》는 웨침소리가 울려나왔으며 어떤 군인들은 자기 련대를 오중흡7련대라고 자랑스럽게 부르기도 하였다. 그후 전군에 오중흡7련대칭호쟁취운동의 불길이 일어났는데 이들의 련대가 이 선구자들중의 한개 련대로 된것은 두말할것도 없다.

이렇게 전군에 수령결사옹위정신이 나래치게 되였으며 이것은 인민군대의 사상정신적지주로 되였다. 김정일동지께서 믿으신것은 인민군대의 이 정신이였으며 이 정신이 선발된 한두 군인들속에서가 아니라 대중적인것으로 되리라는데 대하여 믿어의심치 않으시였다.

이러한 믿음은 1990년대에 들어와 더욱 확고한것으로 되였다. 터지는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 전사들을 구원한 90년대의 첫 영웅 김광철, 수령님의 초상화를 구원하기 위하여 불속에 뛰여든 전사, 구호나무를 화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자기 몸이 그대로 숯덩이가 된 수십명의 군인영웅들의 자폭정신, 육탄정신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비행사였던 길영조는 불붙는 비행기에서 탈출만 하였더라면 얼마든지 살수 있었지만 자폭으로써 수령결사옹위정신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영웅들의 정신이 오늘 금강산발전소건설장에서 바로 대중적인 영웅주의로 되고있는것이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금강산발전소건설장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을 창조하여 온 나라를 들끓게 하려는 자신의 전략적의도가 백번 가능하며 반드시 현실로 되리라는데 대하여 믿어의심치 않으시였다. 그이께서는 명령서하달을 끝내고 심철범을 따로 만나 무엇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조선말이 아니라고 다시한번 강조하면서 그를 믿는다고 고무해주시였다.

집무실로 돌아오신 김정일동지께서는 문득 잠시 쉬시려고 앉았던 창곁의 쏘파에서 일어나 집무탁우에 놓여있는 몇건의 문건중에서 하나를 집어드시였다. 그것은 총정치국에서 올려온 지휘관들의 당생활자료를 묶은것이였는데 그이께서는 이미 한번 보고 접어놓은듯 한 페지를 펼쳐드시였다.

이해의 첫날 자신에게 큰 고무를 주었던 김동환의 당생활자료가 주목되여 다시 읽으시였다. 문건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김동환은 자기 아들이 입대한지는 불과 반년밖에 되지 않지만 군복을 입은 이상 비겁하게 행동한것은 용서할수 없다고 하면서 그 책임은 어려서부터 아들의 의지를 단련시켜주지 못한 자신에게 있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대책적의견으로 총정치국은 신입병사들의 의지단련에 각별한 주의를 돌리겠다고 하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김동환의 아들을 만나보고싶은 생각이 불쑥 드시였다.(약자를 강자로 만들면 되는것이지.)라고 마음속으로 뇌이시며···

잠시후 김정일동지께서는 만수대예술극장으로 가시였다.

《고난의 행군》과 함께 독자적인 정예단으로 탄생한 조선인민군 공훈합창단은 돌격의 나팔수가 되여 준엄한 영웅적돌파전에로 사람들을 불러일으키고있었다.

그들의 공연을 한번 보고나면 적의 아성을 무자비하게 들부시며 한바탕 불을 토하는 군단포의 세찬 포성을 듣는것처럼 심장이 쿵쿵뛰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늦은 밤이였다.

그러나 합창단의 전체 성원들은 아직 퇴근하지 않고 새로 나온 노래를 련습하고있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객석 한가운데 조용히 앉아 그들이 부르는 노래에 귀기울이시였다.

 

우리가 틀어잡은 총검마다엔

장군님 보위해갈 맹세가 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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