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3

 

제 5 장

3

 

허덕복은 저녁밥을 지어놓고 남편을 기다렸다. 최근에는 매일저녁 늦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남편이였다. 밀보리파종기창안에 몰두하기때문이라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허덕복은 남편보다 먼저 밥술을 드는 법이 없었다. 당그랗게 내외가 사는 집이여서 남편이 없으면 적적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평양에서 살다가 해주로 오면서 두 아들은 언니네 집에서 그냥 학교를 다니도록 하고 남편과만 함께 왔다. 녀자쪽이 책임적인 간부로 있는 집안에서는 다른 가정들과는 달리 남자가 녀자를 따라다니기마련이였다. 허덕복은 온 나라가 아는 농업부문의 책임일군이였지만 김용환은 이름없는 평범한 사람이였다. 사회적지위로 보면 아득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어디까지나 남자가 세대주였고 가장이였다. 허덕복은 집안에 들어오면 공손한 안해로서 남편을 존중하고 사랑하려고 의식적으로 애를 썼다. 두 아들도 자기보다 아버지를 더 존경하도록 교양했다. 여차하면 남편의 자존심을 건드릴수 있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언제나 책임적이고 분망한 사업에 짓쫓기며 살지만 가정일을 남편에게 떠맡기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동자질이나 빨래와 같은 일은 남편의 손을 빌리지 않았다. 출장을 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가정일을 도맡아하였다. 결혼을 한 첫날부터 이것을 가정생활의 원칙으로 여겨온 허덕복이였다. 그가 김용환을 알게 된것은 단발머리 분조장시절이였다.

분조장으로 임명되여 첫해에 벌린 일이 샘틀논에 암거를 하여 랭습피해를 받지 않도록 하는것이였다. 그해에 해토가 되자 분조원들을 불러일으켜서 크게 일판을 벌리였다. 그런데 분조원들의 힘만으로는 모내기전까지 일을 끝낼수 없었다. 분조원들속에서는 불평이 터지기 시작했다.

《새말간 단발머리가 분조장을 하다보니 어벌 크게 일판을 벌려서 올해농사를 망치게 되였네.》

《샘틀논에 모를 꽂지 못하게 되였으니 책상물림분조장 휘동에 따라나선 우리가 잘못이지. 나이든 축들이 처음부터 못하게 대를 세워야 하는것이였어.》

이런 뒤소리들이 돌아갔다. 그러한 귀먹은 비난보다도 현실적으로 모내기계절을 놓쳐버릴것만 같은 우려가 가슴을 아프게 짓눌렀다. 허덕복은 어느 하루 주변에 주둔하고있는 군부대를 찾아갔다.

나이지숙한 련대장을 만나서 암거작업을 도와달라고 애원하였다. 처녀분조장의 눈물겨운 애원은 련대장을 감동시켰다. 련대장은 한개 소대를 동원시켜주었다. 김용환은 그 소대의 1분대장이였다. 논판에 도랑을 째고 돌을 처넣어서 샘물이 곬을 따라 빠지게 하는 암거작업은 어렵고 품이 많이 드는 일이였다. 하지만 군대들이 동원된 다음부터 일자리가 푹푹 나고 작업장분위기가 달라졌다. 분조원들은 끌끌한 군인들과 어울려서 일을 하다보니 힘든줄을 몰랐다. 더구나 처녀들은 신바람이 났다. 흙과 돌을 다루는 험한 일을 하지만 옷매무시를 단정히 하고 작업장에 나타났다. 그들은 병사들 못지 않게 일손도 걸쌌다. 군인들과 맞들이를 들거나 삽질을 할 때면 짝지려고 하지 않았다.

《군대들이 오더니 우리 분조처녀들이 녀장수로 되였구나.》

암거작업을 반대하던 배나무집아바이가 히뭇이 웃으며 하는 말이였다.

특별히 즐거운것은 작업의 쉴참에 산기슭의 풀밭에서 벌리는 오락회였다. 군인들중에는 별의별 재간둥이가 다 있었다. 예술단 배우들이 무색할정도로 노래를 잘 부르거나 춤을 잘 추는 병사, 손기가 얼마나 날랜지 주패장으로 관중을 깜짝 놀래우는 병사, 즉흥시로 사람들의 가슴을 들먹이게 하는 병사···

농촌의 처녀들이라고 그들에게 뒤질소냐. 저마끔 나와서 목청을 뽑고 춤가락을 펼치는데 그들에게 언제 저런 재간이 있었던가싶었다. 뭐니뭐니해도 볼만 한것은 병사와 처녀가 짝을 지어 2중창이나 쌍무를 펼치는 모습이였다. 어쩌면 그리도 소리가 잘 어울리고 춤가락이 조화로운지, 이따금 서로의 눈길을 마주치며 웃음을 보내는 모습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훈훈하게 덥혀주었다. 분조장 덕복이도 분대장 용환이와 어깨를 붙이고 2중창을 하였는데 세번이나 재청을 받았다. 언제 시간이 흘렀는지 알지 못했다. 30분정도로 예견했던 오락회가 두시간을 넘었다.

이날은 어쩌는수없이 하루계획을 끝내지 못한채 해구멍을 막았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줄 모른다더니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인가싶었다. 덕복은 속이 상했다. 하루라도 앞당겨 암거작업을 끝내야 씨붙임을 순조롭게 할수 있었다.

그날 저녁 덕복은 밥술을 놓기가 바쁘게 삽을 들고 작업장으로 나왔다. 계획했던 작업을 끝내지 못한 이 저녁은 자리에 누워도 잠이 올것 같지 않았다. 마침 그날은 초저녁부터 달이 밝았다. 샘틀논에 이른 덕복은 물도랑을 파기 시작했다. 오락회때 용환이와 2중창을 하던 순간의 달콤하면서도 가슴뿌듯하던 기분이 되살아나면서 힘겨운줄 몰랐다. 크지는 않으나 담차보이는 몸에 번듯한 이마, 영채로운 눈, 고집스럽게 날이 선 코, 류창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던 단정한 입술, 억세여보이는 아래턱··· 용환의 모습이 눈앞에 얼른거렸다. 래일 휴식시간에는 그와 무슨 노래를 함께 부를가? 어쩐지 래일에는 오늘보다 더 조화롭게 화음을 이룰것 같고 호흡을 더 잘 맞출것 같았다. 아무튼 오락회시간이 오늘처럼 한정없이 길어지지 않게 채심을 해야겠어. 삽날턱을 오른발로 힘있게 누르며 흙을 듬뿍 떠서 퍼냈다.

《게 누구요?》

저쪽에서 울리는 물음소리에 와뜰 놀라며 허리를 폈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고있었다. 덕복은 가슴이 두근거려서 대답을 못했다. 희미한 달빛속에 형체를 드러내는 사람은 용환이였다. 어깨에 삼을 멘것으로 보아 그도 도랑을 파려고 오는것 같았다.

《아, 분조장동무였구만.》

용환이도 이쪽을 알아보았다.

《내 이럴줄 알았다니까.》

바투 다가선 그는 히뭇이 웃었다.

《분대장동무가 어떻게···》

덕복은 숨을 몰아쉬며 묻는듯 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용환은 얼핏 서운한 기색을 지어보이며 퉁명스레 응대했다.

《어떻게라니? 내 이럴줄 알았다질 않소.》

분조장이 이밤에 잠들지 못하고 작업장에 나올줄 알고 도와주러 나왔는데 그 심정을 몰라준다는 뜻이였다.

《분대장동무, 고마워요.》

덕복은 상냥하게 웃어보이였다.

그들은 함께 도랑을 팠다.

《분조장동무는 일을 시작한 시간이 퍼그나 흘렀겠는데 인젠 좀 쉬오.》

다심한 정이 배인 용환의 말이였다.

《일없어요. 우리 일을 도우러온 군대동무는 일을 계속하는데 농장의 주인인 내가 일손을 놓고 쉬면 되겠어요.》

《그렇다면 동무는 주인이고 나는 나그네란 말이요?》

저으기 성난듯 한 용환의 목소리였다.

덕복은 응답없이 삽질만 하였다.

《손님격으로 동무네 일을 돕는데 그친다면 내가 이 저녁에 여기로 나오지도 않았을거요.》

《그래요. 실상 군대동무들은 우리 농장원들보다 더 주인다운 태도를 가지고 암거작업을 해왔어요.》

《나를 주인으로 여기는 이상 미안해말고 좀 쉬시오. 낮에도 보니까 동무는 다른 분조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더란 말이요. 내 혼자 마저 파낼테니 삽을 놓소!》

용환이가 덕복의 삽자루를 잡았다. 하는 품이 고집을 부린다면 성을 낼상싶었다. 덕복은 하는수없이 삽을 들고 도랑에서 나왔다. 용환이가 걱정을 하리만큼 몸이 지치기도 했다. 만일 이 저녁 혼자였다면 이미전에 쓰러졌을는지도 모른다. 땀이 흐르던 몸이 식어들면서 추위를 느끼였다. 낮에는 호듯호듯한 봄볕이 무르녹다가도 밤이면 살얼음이 질 정도로 기온이 내려가는 이무렵이였다. 덕복은 산기슭에 가서 삭정이를 한아름 주어왔다. 그사이 용환이는 도랑을 다 팠다.

그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마주앉았다. 우릉우릉 타오르는 불길이 두 청춘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들은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지나온 과거와 앞으로의 희망을 터놓았다. 알고보니 용환은 동해안 산간마을태생인데 중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농사일을 하다가 군대에 입대했다. 앞으로 제대되면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겠다고 하였다. 다같이 협동벌에서 한생을 보내려는 공통된 지향이 두 청춘을 더욱 가깝게 하였다. 모닥불이 사위여가자 그들은 다시 일어나 일손을 잡았다. 돌을 날라다가 깊숙이 판 도랑에 처넣고 그우에 흙을 덮어야 했다.

힘이 진한 덕복은 무거운 돌을 들다가 놓쳐버리면서 오른손 손가락을 상했다.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뼈는 상하지 않았지만 피부에서 피가 흘렀다. 용환이가 달려왔다.

《많이 상했소?》

용환은 덕복의 상한 손을 덥석 잡고 성냥갑의 화약종이를 찢어서 상처에 붙이고 자기의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여 싸매주었다. 덕복은 자기의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가 용환의 흰 손수건을 붉게 물들이는것을 얼없이 바라보았다.

《분조장동무는 쉬시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지쳤소.》

명령조로 다짐을 한 용환은 제 혼자 나머지 작업을 끝냈다.

덕복은 이날 밤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으나 잠들지 못했다.

어느새 상처의 아픔은 사라져버리고 얼얼한 느낌만이 남아있을뿐이다. 그대신 손수건을 싸매주던 용환의 살뜰한 손길이 남겨준 촉감은 생생히 되살아났다.

그로부터 한주일후에 암거작업이 끝났다. 오랜 세월을 두고 랭습피해를 받던 샘틀논이 옥답으로 되였다. 군대들이 부대로 돌아가는 날 분조에서는 그들을 위해 작별연회를 차리였다. 식사를 끝내고 헤여질 때 분조원들은 누구나 작별의 서운함을 누르지 못했다.

덕복은 네귀에 꽃수를 놓은 손수건을 용환에게 주었다. 자기의 손가락상처를 싸맸던 용환의 손수건을 대신하여 주는것이여서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피에 젖었던 손수건은 몇번을 빨아도 흔적이 지워지지 않았다. 용환은 처녀가 준 새 손수건을 오래도록 펼쳐보더니 더듬는 어조로 말했다.

《분조장동무, 나는 제대되면 동무네 분조에 와서 농사를 짓겠소. 그때 받아주겠소?》

《받아주지 않구요. 꼭 오세요.》

덕복은 기쁨에 넘쳐 응수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그것이 사랑의 약속으로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해 샘틀논에는 풍년이 들었다. 농장적으로 제일 작황이 좋았다. 분조원들은 벼가을을 하면서 암거작업을 도와준 군대들을 생각했다. 그들과 함께 벼가을을 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용환이가 속한 부대는 한달전에 다른 지방으로 옮겨갔다.

여러해가 흘렀다.

허덕복은 관리위원장을 거쳐서 락랑구역협동농장경영위원회 위원장으로 되였다.

산하 협동농장들의 풀베기정형을 종합하던 무더운 여름날이였다. 접수실에서 소삼정협동농장에 배치된 제대군인이 찾아왔다고 했다. 보름전에 협동농장들에 제대군인들이 배치되여왔던것이다. 그들중 몇명은 고향으로 가겠다고 찾아왔던 일이 있었다. 필경 지금도 그런 용무를 가진 제대군인이 찾아왔을것이라고 생각하며 접수원에게 로동과로 보내라고 하였다.

잠시후에 출입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세요.》

응답을 하고 머리를 수굿한채 문건을 정리했다.

《위원장동지, 만날수 있습니까?》

저으기 흥분된 목소리가 울리였다.

허덕복은 그 목소리에 놀라며 머리를 들었다. 이게 누구인가! 방안에 들어선 사람은 김용환이였다. 여러해가 흘렀지만 첫눈에 알아보았다. 튕겨나듯 의자에서 일어나 급히 다가갔다.

용환은 그때까지 거수경례를 한 차렷자세로 서있었다. 마치도 상관의 쉬엿구령을 기다리는것 같았다.

덕복은 바지혼솔에 뻗친 그의 손을 덥석 잡고 쏘파로 이끌었다. 용환은 손수건으로 이마에 돋은 땀발을 씻었다. 작별할 때 꽃수를 놓아주었던 그 수건이였다! 여러해가 흘렀지만 생생한채로 남아있었다. 고이 간직해온 그 손수건이 많은것을 말해주었다. 덕복은 옛시절의 추억이 눈앞에 떠오르며 짜릿한 정회에 젖어들었다. 용환은 손수건을 무릎우에 펼쳐놓은채 방안을 둘러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왜 만나지 않겠다면서 로동과로 가라고 했습니까?》

시선을 딴곳에 겨누고 묻는 물음에는 노여움이 풍기였다.

《미안해요. 동무가 찾아온줄은 몰랐어요. 우리 구역에 배치되여 올 때 왜 나한테 들리지 않았나요?》

《나는 동무가 여적 분조장으로 있는줄 알고 소삼정협동농장으로 직판 내려갔습니다. 동무를 한시바삐 만나고싶어서 구역에는 한시도 머물러있지 않았습니다.》

《그곳 협동농장에서 내가 여기로 옮겨왔다는걸 알았으면 진작 찾아왔어야지요.》

덕복은 때늦게 오늘에야 찾아온 그가 진심으로 야속했다.

《평범한 농장원이 구역협동농장경영위원회 위원장동지를 만나러 온다는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보니 마지막으로 위원장동지를 만나보고싶어서 용기를 내여 오늘 찾아왔습니다.》

용환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덕복은 놀라며 다급히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렇게 훌 떠나갈 사람이 우리 구역으로 왜 자원해왔어요?》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나는 동무가 여적 분조장을 하는줄로 알고 왔던것입니다. 헤여질 때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약속했지요, 우리 함께 농장벌에서 한생을 보내자고. 나는 지금도 농장벌에 서있는 사람이예요. 분조장시절과 조금도 다름없이 말이예요. 어서 대답해보세요. 동무의 눈에는 내가 그전과 달라진 다른 녀자로 보이는가요?》

용환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다른 녀자로 보입니다. 전날의 분조장이 아니라 오늘의 구역협동농장경영위원회 위원장으로 된거야 엄연한 사실이 아닙니까.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나는 동지가 그렇듯 중요한 직책에서 사업하게 되였다는것을 알았을 때 축하의 감정보다 자신을 두고 실망했습니다. 우리들사이에 넘지 못할 장벽이 있다는것을 깨달았기때문이지요. 내가 그 장벽을 부시고 옛정을 되살리려고 한다면 동지의 립장이 딱해질것입니다. 나는 실상 자신보다 동지를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것입니다.》

덕복은 애모쁘게 손수건을 구겨쥐는 용환의 눈가에 물기가 어리는것을 보았다.

용환은 그동안 우리의 관계를 두고 깊이 생각을 굴리던 끝에 찾아온것이 분명했다. 그를 어떻게 리해시키고 어떻게 설득시켜야 할것인가? 덕복은 자기의 심정을 표현할 말을 찾을수 없었다. 가슴속에서 불뭉치같이 뜨거운 그 무엇이 치밀어오를뿐이다.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부르짖었다.

《동무는 나를 찾아왔는데 내가 죽기라도 했어요, 딴곳으로 가기라도 했어요?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데 나를 버리고 어데로 간단 말이예요!》

불이 이는듯 한 눈길로 쏘아보았다. 용환은 말없이 벌떡 일어섰다. 이쪽의 심정을 꿰뚫어보려는듯이 똑바로 마주볼뿐이였다. 그는 한동안의 침묵끝에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건 뭐 위원장으로서 평범한 농장원에게 하는 추궁인가요?》

《아니예요. 위원장으로서가 아니라 약속을 배신당한 처녀의 심정을 터놓는거예요, 알겠어요?》

《알겠소!》

부르짖음과 함께 용환은 돌발적으로 덕복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오른손에서 전날의 상처흔적을 찾기라도 하려는듯이 찬찬히 여겨보았다. 덕복은 달밝은 봄밤에 암거작업을 하다가 상처입은 그 손을 손수건으로 싸매주던 용환의 모습이 떠올랐다. 감미로운 감정으로 가슴이 설레이는것을 황홀하게 느끼였다.

얼마후에 용환은 돌아갔다.

그의 출현은 덕복의 신상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처럼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덕복은 혼기를 놓쳤다고 할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어깨우에 새롭게 실린 구역협동농장경영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직책의 중하가 사생활에 신경을 쓸 겨를을 주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구역관내의 농업을 추켜세울것인가? 모든 사고가 그 하나의 생각에 집착되였다. 하지만 용환의 출현으로 자기의 결혼문제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어쩔수없이 용환에게로 끌리는 감정을 다잡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와 결혼을 한다면 그 사실이 남들의 눈에 어떻게 비낄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자기가 용환이와 결혼을 한다면 그것은 례외적인 일로 사람들의 말밥에 오를수 있었다. 혹자는 위원장이 혼기를 놓친 로처녀다보니 평범한 농장원총각한테 시집을 간다고 할수도 있었다. 물론 내막을 모르고 하는 소리일것이다. 비록 나이는 많은편이지만 덕복에게는 시와 구역의 기관들에서 일정한 직위를 가진 대상자들이 적지 않게 나타났다.

하루는 김옥순이 조용히 불렀다. 그도 가두녀맹원들과 함께 농장에 나와 지원사업을 하고있었다. 그래서 김옥순도 구역협동농장경영위원회에 들렸던것이다.

《위원장,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야. 농사일만 일이라고 하지 말고 시집도 가야지. 어버이수령님께서도 동무가 농사에만 전심하면서 언제까지나 독신으로 지낸다는걸 알면 걱정하실거야. 그래서 내 맞춤한 총각을 하나 소개해주려고 그래.》

친어머니처럼 진정으로 살뜰한 심정이 어린 김옥순의 말이였다.

덕복은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나직이 응대했다.

《고맙습니다.》

《혁명박물관에 한개 부서책임자로 있는 총각인데 제대군인에 당원이고 김책공대를 졸업했지. 내 보기에는 동무와 짝이 어울릴것 같은데 본인생각은 어떤가? 내가 권고하면 그 총각은 군말없이 응할거네. 조용히 만나보지 않겠나?》

이쯤 나오고보니 덕복은 자기 심정을 헤쳐보이지 않을수 없었다.

《저에게는 이미 몇해전에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하고 용환이와 얽혀진 사연을 이야기했다.

흥미있게 듣고난 김옥순은 감심한 표정이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 내 동무의 사람됨을 다시 보게 되누만. 다른 녀자라면 오늘의 동무로서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그 총각의 결심을 지지했을수 있지. 동무는 아무리 직급이 높아도 땅처럼 소박하고 진실한 대지의 딸이야. 대지의 딸이 대지의 아들한테 시집을 가는거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사랑이야 물건을 팔고사는 흥정놀음도 아닌것만큼 서로 상대의 인격에 반하면 그만이지 직위의 차이에 구애될것이 없지 않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동무들의 사랑을 소중히 아껴줄거네. 복잡하게 여러 생각말고 용환이라는 총각과 인차 결혼을 하게.》

《고맙습니다.》

덕복은 감격했다. 녀투사의 지지와 고무를 받고보니 번거롭던 상념이 깨끗이 정화되는듯싶었다. 더는 흔들림이 없이 용환이와 결혼을 하리라는 결심이 굳어졌다.

결혼후에 덕복은 농업대학 통신수업을 받았고 용환은 기계대학 농기계학과를 졸업했다.

오늘에 와서 돌이켜보아도 덕복은 청춘시절에 자기가 택한 사랑의 선택이 옳았다고 확신했다.

성실한 남편의 방조와 고무가 없었다면 오늘의 자기가 있을수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가정들이 대체로 그러한것처럼 그들부부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금슬이 더 좋아졌다. 해주로 이사를 온 후로는 집안에 그들 두사람뿐이기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염없이 추억에 잠겼던 덕복은 문밖에서 나는 기침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남편의 기침소리가 분명했다. 자기가 왔다는것을 알리려고 인기척을 내는것이다. 덕복은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싱긋이 웃으며 방안에 들어선 용환은 저녁을 차려놓고 보자기를 덮어놓은 밥상을 보더니 말했다.

《내 요사이 일이 바빠서 늦어 들어오군 하는데 앞으론 저녁식사를 먼저 하오, 배고프겠는데.···》

《내 혼자서야 무슨 맛에 저녁밥을 먹겠어요.》

그들은 다정히 마주앉아 저녁을 먹었다.

덕복은 낮에 있은 협의회를 머리에 떠올리며 물었다.

《당신이 창안하는 밀보리파종기를 올해 씨붙임전으로 여러대 만들수 있다지요?》

《그런 말을 어데서 들었소?》

《오늘협의회때 당신네 지배인이 그렇게 토론을 했어요. 내가 들으라는듯이 당신의 이름을 찍어가면서 자랑을 했어요.》

《그 사람이 엉큼한데가 있거던. 며칠전부터 나를 통해 당신의 힘을 빌어서 필요한 자재를 해결하려고 했소. 내가 들은체를 안하니까 오늘은 그런 수를 썼구만.》

《왜 들은체를 안했나요?》

《도농촌경리위원회 위원장이야 당신이지 내가 아니지 않소. 결혼한 첫날부터 나는 베개밑송사질을 꼬드기는 사람들을 좋지 않게 여겨왔소.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느껴왔단 말이요.》

《지내 자존심이 강하군요.》

《나도 사내가 아니요. 간부처를 데리고사는 사내가 자존심도 없다면 어떻게 되겠소.》

《하긴 자존심이 없는 남자였다면 나는 실망했을거예요.》

그들은 진담인지 롱담인지 알수 없는 대화를 다정히 주고받았다.

덕복은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이미 말했지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인민들의 식량문제를 깊이 고심하시면서 우리 도에 올해 만정보 이모작과제를 주시였어요. 그 과제수행에서 당신이 창안하는 기계는 중요한 의의를 가지지요.》

《나도 그걸 잘 알기때문에 요즘 창안을 부쩍 다그치고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