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4

 

제 2 장

4

 

꿈결에도 뵙고싶은 어버이장군님, 안녕하십니까.

위대한 수령님을 잃고 누구보다 슬픔이 크신 장군님께 편지를 올리자고보니 슬픔부터 앞서는것이여서 몇번이나 주저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황해남도 농민들의 심정이 하도 간절하여서 오늘은 마음을 다잡고 펜을 들었습니다.

아시다싶이 지난해 8월 31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도의 연백벌 여러 협동농장들을 현지지도하시였습니다. 그때 저는 수령님을 모시고 현지지도로정을 수행하는 영광을 지녔댔습니다. 밤을 지새우며 렬차로 배천역에 도착하신 수령님께서는 새벽부터 해종일 포전길을 걸으시였습니다. 그이께서 쏟아지는 불볕에 땀을 흘리며 벼포기당 알수를 손수 세여보고 농사를 잘 지었다고 치하하시던 일을 우리 농민들이 어찌 잊을수가 있겠습니까.

8월에 접어들면서 농민들은 그날의 수령님 모습이 자나깨나 떠올라서 그리움에 목메여 울고있습니다. 더구나 사무쳐오는것은 수령님께서 떠나실 때의 사연입니다. 인제는 저희들이 장군님을 모시고 농사를 잘 지을테니 년로한 몸으로 포전길을 더는 걷지 마시라고 간절히 말씀드리자 수령님께서는 우리 인민들이 흰쌀밥에 고기국을 먹게 하자면 포전길을 더 걸어야 한다시며 명년에 농사를 잘 지으면 연백벌에 다시 오겠다고 하시였습니다.

우리 도의 농민들은 수령님께서 남기신 그 약속을 생각하며 올해농사를 전에없이 열심히 지었습니다. 얼마간 수해를 입었지만 전반적인 농사작황은 지난해보다 훨씬 좋습니다. 수령님 가르치심대로 올해에는 수천정보의 논과 밭에 두벌농사를 하였는데 거기에서는 정당수확고가 10톤이 훨씬 넘습니다.

저는 최근에 수령님께서 다녀가신 협동농장들에 자주 나가봅니다. 그곳 농민들은 풍작을 이루면 수령님께서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남기시였지만 수령님을 다시는 모시지 못하게 되였으니 이렇게 안타깝고 절통한 일이 어데 있느냐면서 저를 붙안고 통곡을 터뜨립니다. 그러면서 수령님과 꼭같으신 장군님께서 오시면 한이 없겠으니 장군님께 청을 드려달라고 눈물로 저에게 하소연하였습니다.

어버이장군님.

인제는 천만가지 국사가 장군님 한분의 어깨우에 실리고있으니 시간을 내기 어려우시리라는것을 저도 압니다. 하지만 농민들의 심정이 하도 간절하고보니 거기에 저의 심정까지 합쳐서 삼가 청원의 편지를 올립니다.

조의식때 평양에 올라가 수척해지신 장군님을 뵈옵고 못 견디게 가슴이 아팠습니다. 부디 건강에 류의해주시기를 충심으로 바랍니다.

황해남도농촌경리위원회 위원장 허덕복 올림

 

편지를 읽은 김정일동지께서는 가슴 뭉클한 충격을 느끼시였다. 황해남도농민들의 심정이 사무쳐왔던것이다. 동시에 소박한 농촌녀인의 모습인 허덕복의 외양이 방불하게 떠올랐다. 그의 래력을 너무도 잘 알고계시였다.

어린시절의 허덕복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하나의 사연이 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1954년 4월 허덕복의 고향마을인 평양시 력포구역 소삼정협동조합을 현지지도하시였다. 만민의 축원을 받으며 편히 쉬셔야 할 자신의 탄생일이였다. 하지만 갓 조직된 협동조합사업을 추켜세우고 농민들을 잘살게 하려고 현지지도의 길을 걸으셨던것이다. 어른들로부터 그 사연을 전해들은 허덕복은 어린 가슴에도 수령님에 대한 경모의 정이 끓어올랐다.

소학교와 중학교를 거쳐서 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한학급의 동무들 10여명과 함께 협동조합으로 진출했다.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자욱이 새겨진 협동조합에서 청춘의 삶을 빛내이려는 각오가 오래전부터 가슴속에 굳어진 그였다. 조합벌에 나간 첫날부터 열심히 일을 하였다. 조합에서는 몇달 안되여 그에게 분조장사업을 맡기였다. 비록 농사경험이 없는 나어린 처녀였지만 분조농사를 잘하려는 진심과 진정이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샘틀논에 암거를 하여 찬물을 뽑고 거름을 듬뿍 내여 척박하던 땅을 옥답으로 만들었고 집집마다 집짐승을 많이 길러서 그가 분조장일을 시작한지 몇년후에는 조합적으로 분배몫이 제일 많은 분조로 되였다. 제일 마지막자리를 차지했던 분조가 단연 첫자리를 차지했다.

1968년 전국농업일군대회가 열렸을 때였다.

허덕복의 토론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어린 처녀분조장이 우리 사회에서 교양을 받은 일군답게 다른 분조보다 못한 땅, 못한 사람들을 맡아가지고 우리의 의도에 맞게 일을 잘했다, 앞으로 잘 도와주어 훌륭한 일군으로 키워야 하겠다고 분에 넘친 치하와 믿음을 주시였다.

그후 허덕복은 더욱 분발하였다. 협동농장적으로 제일 뒤떨어진 분조를 맡아서 한해사이에 추켜세웠다. 그는 벌써 헌신적인 실천으로 농장원들의 본보기가 되고 따뜻한 진심과 진정으로 그들과의 사업을 능숙하게 할줄 아는 로숙한 분조장이 되였다.

그후 그는 협동농장 관리위원장으로 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23살밖에 안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기대가 그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1972년 2월에 있은 조선농업근로자동맹 제2차대회에 참가한 허덕복은 대회의 연단에서 관리위원장으로서 한 일을 가지고 토론하였다.

땅을 사랑하고 영농자재를 자체로 해결하며 농기계를 알뜰히 관리하고 축산과 과수업을 적극 장려하여 조합원들의 수입을 높이고 재산관리를 잘한 내용의 토론을 주의깊게 들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대단히 만족해하시며 기념촬영을 할 때 허덕복을 자신의 옆자리에 세워주시였다. 허덕복은 흐르는 감격의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수령님께서는 자꾸 울면 사진이 안된다고 하시면서 앞으로도 일을 잘해서 농촌테제를 관철하는데 앞장에 서라고 뜨겁게 고무해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이듬해에 그를 평양시 락랑구역협동농장경영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시였다.

허덕복은 그 직무에서도 일을 잘하였다.

그가 최고인민회의에 참가하여 토론을 했을 때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우리의 사회주의제도가 얼마나 좋고 우월한가, 단발머리처녀분조장이 협동농장 관리위원장으로, 구역협동농장경영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로력영웅,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돼서 토론하니 얼마나 좋은가, 나는 우리 시대에 세상에 태여나서 이렇게 교육을 받고 자란 일군을 제일 사랑하고 기쁘게 생각한다고 하시며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시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수령님의 기쁨이 그대로 자신의 가슴에 젖어드는것을 느끼며 허덕복을 미더웁게 바라보시였다.

그때로부터 10여년이 흘렀다.

당중앙위원회 농업부문을 보는 일군들중 한자리가 비게 되였다. 그 자리에 누구를 앉힐것인가를 두고 생각을 거듭하던 김정일동지께서는 허덕복을 머리에 떠올리시였다. 그래서 어버이수령님께 자신의 생각을 터놓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김정일동지가 적임자를 골랐습니다. 허덕복동무라면 그 직무도 책임적으로 잘할거요.》라고 하며 적극 찬성하시였다.

이리하여 허덕복은 당중앙위원회에서 사업하게 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1988년 1월 중순 금수산의사당에서 농업일군협의회를 조직하시였다.

지난해에 농사가 잘 안된 원인을 찾고 대책을 세우시기 위해서였다.

당중앙위원회와 정무원에서 농업부문을 책임진 몇몇 일군들이 협의회에 참가했다.

그들은 지난해 농사를 잘 짓지 못한데 대하여 심각히 총화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맨뒤에 앉은 허덕복을 띄여보시였다.

《허덕복동무가 지난해 농사가 왜 잘 안되였는지 말해보시오.》

허덕복은 조심히 일어나서 평소에 안타까와하던바를 말씀드리기 시작했다.

《지난해 농사가 잘 안된것은 영농연료와 자재를 제대로 보장해주지 못하였기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에는 비닐박막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저를 비롯한 일군들이 아래에 대한 장악과 지도를 짜고들지 못했기때문입니다.》

그의 토론은 아래실정을 꿰뚫고있는 오랜 경험자가 아니고서는 알수 없는 엄연한 현실의 반영이였다. 동시에 그것은 농업부문 책임일군들에 대한 예리한 비판이였다. 참가자들의 시선들이 그에게 쏠리였다. 수령님께서는 그의 토론을 적극 지지하시였다.

《허덕복동무와 같이 솔직해야 하고 고지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현실에 맞는 옳은 정책을 세우고 옳은 조치를 취할수 있습니다. 저 동무가 제기한 문제들은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될 중요한 문제들입니다.》

회의에서는 영농자재와 연료보장계획을 정확히 세우고 제때에 보장하기 위한 대책이 강구되였다.

참으로 허덕복은 당의 신임에 진정을 바쳐 보답할줄 아는 녀성일군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당앞에서는 외교를 모르고 진실만을 터놓았다.

회의가 끝난 후 수령님과 장군님사이에는 이런 대화가 오고갔다.

김정일동지가 참으로 적임자를 천거했소.》

《그 동무야 수령님께서 분조장때부터 키우신 일군이 아닙니까.》

2년후 김정일동지께서는 허덕복을 당중앙위원회에서 농업부문을 보는 책임일군으로 임명하면서 어느 한 책임일군에게 교시하시였다.

《천리마시대에는 길확실, 리신자와 같은 선구자녀성들과 같이 일하였다면 지금은 관리위원장도 하고 현실속에서 일한 허덕복이와 같은 솔직하고 진실한 녀성일군들과 함께 일하고있습니다. 나는 우리 시대에 수령님과 함께 일하는 그런 진실하고 이악한 녀성일군을 알게 되고 같이 일하게 된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서해갑문이 완공된 후 황해남도의 물문제를 풀수 있는 가능성이 조성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서해갑문-신천, 강령, 옹진물길공사, 서해갑문-장수호, 례성강물길공사, 서해갑문-은률, 과일군물길공사를 설계하고 그 일을 틀어쥐고 내밀어야 할 주인인 도농촌경리위원장을 물색하시였다. 그러다가 이악한 녀성일군인 허덕복을 내려보내면 물길공사도 할수 있고 황해남도농사도 추켜세울수 있다고 생각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도 수령님의 생각을 적극 지지하시였다.

이리하여 허덕복은 황해남도농촌경리위원장으로 조동되였다. 무거운 과업을 받아안고 생소한 고장에 내려가서 낯선 일군들과 일하게 된 그는 처음부터 드세게 사업을 내밀었다.

그러한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황해남도 시, 군당책임비서, 인민위원회 위원장, 경영위원장들과 함께 허덕복을 금수산의사당으로 부르시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간곡히 당부하시였다.

《황해남도에서 농사를 잘하지 못하고있습니다. 연백벌도 잘하지 못합니다. 황해남도농사를 추켜세우기 위해 이번에 물길공사를 세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중앙당에 있던 허덕복이를 황해남도농촌경리위원회 위원장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런줄 알고 모두 합심해서 일을 잘해야 하겠습니다.》

그후 도내 일군들은 합심을 해서 탈곡이 끝나는 즉시로 수만명을 물길공사에 동원시켰다. 하지만 그들의 힘만으로는 어려운 과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는 군부대들을 물길공사에 동원시켜주고 정무원에서 필요한 설비와 자재를 지체없이 보내주도록 해당한 조치를 취하시였다.

그리하여 이듬해 4월 15일까지 세개의 물길공사가 성과적으로 끝났다.

이 기간 허덕복은 하루도 쉼없이 물길공사장에서 침식을 하며 현장지휘를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모든 건설자들에게 감사를 보내면서 교시하시였다.

《황해남도에서 진행한 물길공사가 기본물길에다 가지물길까지 합치면 거의 2천리나 됩니다. 참으로 방대합니다. 이것을 몇달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에 해낸다는것은 기적입니다. 자본주의나라들에서는 돈을 주고도 이렇게 못합니다. 나는 매우 만족하게 생각합니다.》

물문제가 완전히 풀린 황해남도의 농사에서는 전변이 일어났다.

지난해 도의 농사작황은 전례없이 좋은편이였다. 그리하여 8월 31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른 지방의 현지지도에서 쌓인 피로도 풀 사이없이 평양에 도착한 그날 밤에 황해남도로 떠나셨던것이다.

수령님께서는 새벽부터 저녁늦게까지 연백벌의 여러 협동농장들을 돌아보면서 커다란 기쁨속에 새로운 비약을 일으킬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명년에 농사를 잘 지으면 다시 와보겠다는 약속도 남기시였다.

허덕복이 편지에 쓴바이지만 수령님의 그 약속을 생각하며 황해남도농민들이 올해농사를 얼마나 알심있게 지었으리라는것은 짐작이 가는 일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허덕복의 래력을 상기한 끝에 그의 이름과 관련된 사연도 떠올리시였다.

그의 이름은 원래 복덕이였다. 수령님께서는 그를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지만 늘 복덕이가 아니라 덕복이라고 부르시였다. 언젠가 허복덕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면서 수령님께 말씀올리였다.

《어버이수령님, 제 원래이름은 복덕인데 어찌하여 거꾸로 덕복이라고 부르십니까?》

수령님께서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나라와 인민에게 덕을 주는 복덩이가 되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지.》

허복덕은 교시의 의미를 가슴깊이 새기였다. 나라와 인민에게 참으로 덕을 주는 일군으로 살려는 불타는 각오와 함께 자기의 이름을 덕복이로 고쳐불리우고싶은 갈망이 끓어올랐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본인의 심정을 수령님께 보고드리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전국의 농업일군들을 데리고 사동구역 장천협동농장을 돌아보시였다. 우리 과학자들이 새로 육종한 키낮은벼와 새로운 콩을 일군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였다.

이날 복덕이가 황해남도농사형편을 수령님께 보고드린 뒤에 수령님의 책임서기가 말씀드리였다.

《어버이수령님, 황해남도농촌경리위원회 위원장 허복덕동무가 이름을 허덕복이라고 고쳤습니다.》

수령님께서는 허복덕을 바라보며 《좋아, 복덕이보다야 덕복이가 더 좋지. 덕이 있어야 복이 있는 법이야. 좋아, 오늘부터 모두 덕복이라고 부르게 하자. 오늘부터는 허덕복이야.》 하고 장천벌이 떠들썩하게 웃으시였다.

사람의 이름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그 사람고유의 징표이다.

허덕복은 이날을 계기로 수령님과 장군님께서 그처럼 크나큰 믿음과 기대를 보내주시는 혁명전사로 이 세상에 두번다시 태여나는듯 한 감격을 느꼈다고 한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여적 손에 들고있던 편지를 집무탁에 놓고 빙그레 웃으며 입속으로 뇌이시였다.

《허덕복.》

생각할수록 어버이수령님께서 훌륭히 키우신 녀성일군이다.

지금도 어느 농장벌에서 농민들과 함께 일하면서 어버이수령님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머금고있을 그의 모습이 방불히 그려지셨다. 수령님의 현지지도기념일을 앞두고 그때를 추억하며 그리움에 사무친 연백벌농민들의 심정이 가슴뭉클하게 헤아려지셨다. 마음 같아서는 한달음에 연백벌로 달려가고싶으시였다. 하지만 보다 중요하고 무거운 력사의 중하가 자신의 어깨우에 실려있었다. 아무리 생각을 굴려보아도 자신께서는 시간을 낼수가 없으시였다. 책임서기를 부르시였다. 지체없이 책임서기가 집무실에 들어섰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책임서기에게 교시하시였다.

《황해남도농민들이 어버이수령님의 현지지도기념일을 앞두고 수령님을 그리워하던 나머지 나더러 연백벌에 내려와달라는 청원을 하여왔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올해농사를 잘 지으면 다시 가시겠다고 그들과 약속을 남기셨던것입니다. 그런데 동무도 아다싶이 나는 이즈막에 도무지 몸을 뺄수가 없습니다. 나대신 당과 국가, 군대의 책임일군들이 연백벌에 나가 농민들을 고무해주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지난해 수령님께서 그리하셨던것처럼 일군들이 밤차로 떠나서 31일 새벽 배천역에 도착하도록 조직사업을 면밀히 하여야 하겠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생전에 남기신 약속을 지켜드리고 념원을 실현하는것은 수령님의 전사들인 우리의 도리이고 의리입니다.

황해남도당에도 미리 련락을 하시오. 그리고 농촌경리위원회 위원장 허덕복동무에게는 내가 편지를 감사히 받았다고 전하시오.》

《알았습니다.》

책임서기가 돌아갔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우리 인민들에게 흰쌀밥에 고기국을 먹이시려는 념원을 안고 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농업전선의 사령관이 되여 농사일을 돌보신 수령님의 로고를 오래도록 생각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새로운 혁명적경제전략을 내놓으면서 농사제일주의방침을 첫자리에 놓으시였다. 우리는 수령님의 이 유훈을 실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