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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5월 평양고려호텔.

어디선가 멀리서 귀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참으로 애정겨운 부름이였다. 전상음은 두눈을 비비며 목소리가 난쪽을 찾아보았다. 상음씨, 나 여기 있어요 하고 찾는 소리에 돌아보니 곁에 있었다. 림진애였다. 그런데 진애는 옛시절의 그 모습 그대로 두가닥 머리태를 땋아늘어뜨리고 학생복차림에 수태를 머금고 서있었다. 늙지 않았구만. 나는 백발의 늙은이가 되여 지팽이에 육신을 의지하고있는데 나의 진애는 어떻게 처녀적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있을가. 진애, 날 용서해주겠지? 상음은 목메인 소리로 부르짖으며 두손을 내밀었다. 그 녀자도 생긋 웃으며 손을 기꺼이 내맡기려 한다. 그럼요, 끝내 저를 찾아오셨는데 라고 하며. 그때 불현듯 랑랑한 송수화기의 신호음이 들려왔다. 아쉽다. 전상음은 고운 꿈에서 깨여난것이 몹시 아쉬워 입을 다시며 엷고 부드러운 비단이불을 내리끌었다. 머리맡에 손을 뻗쳐 송수화기를 들어보니 림진우였다.

《아니, 몇시게 아직두 잠자리에 있나. 한가하구만.》

전상음은 벌컥 화를 냈다.

《내가 제집에 왔는데 잠을 어떻게 자든 무슨 상관인가.》

《제집? 허허, 하긴 그렇지. 이보게 상음이, 내 전화를 든건 다른게 아니라 자네 오늘 오후에 릉라도를 구경하겠다고 했다지?》

《허- 귀두 넓다. 그렇네. 한데 그걸 어떻게 알게 되였나?》

《현철만부국장(해외동포사업국의 일군)이 알려주더군. 안내를 자기네가 맡을수는 있지만 그래도 내가 하는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네. 방금 그한테서 전화가 왔댔어.》

《그래 – 》

전상음은 현부국장의 다심한 왼심에 마음이 후더워났다. 년초 화상상봉때부터 얼굴을 익힌 그여서 구면이였지만 이렇게까지 세심히 관심을 돌려줄줄은 몰랐다. 상음은 그를 통해 북녘사람들의 인정세태를 들여다보는듯싶었다.

《그래 몇시에 오려나?》

《고맙네. 일도 바쁜데 그만두게. 난 혼자 조용히 돌아볼 작정이였어. 섬두 구경하고 작품상도 구상할겸.》

《그렇나? 알겠네. 그럼 저녁에 공연구경을 잘하게.》

《그리하지. 아니아니, 잠간.》

전상음은 진우가 송수화기를 놓을가봐 덤벼치며 용건을 꺼냈다.

《자네 그제 한 약속(그제 저녁 진우네 집에서 식사하다가 전상음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페막공연이 끝난 뒤 《아리랑》창작가들과 출연자들을 만나게 해줄것을 부탁했었다.)을 잊지 않았겠지?》

《사람을 만나는것 말인가? 자네두 참, 잊을걸 잊어야지. 알겠어, 걱정말라구.》

송수화기를 놓은 전상음은 잠간 일어나앉아있다가 이부자리를 주섬주섬 거두었다. 묵직한 창가림을 밀어제끼고 창문을 활짝 여니 취할듯 한 5월의 봄내음이 삽시에 방안으로 밀려들어온다. 창가에 서서 청신한 아침기운을 한껏 들이마시며 한 10분가량 가벼운 운동을 하고난 그는 얼추 세면을 하고 아래층의 식당으로 내려갔다. 늦은 아침식사시간이여서 그런지 식당안에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다.

《여기루 오십시오, 전선생.》

문을 열고 들어서서 맞춤한 자리를 고르느라 주춤하댔는데 구석쪽에서 그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한주일전에 비행기에서 만난 라경운 사장이였다. 라경운은 무척 놀라는 상음에게 안전기획부에서 나와 재계에 발을 들여놓은지는 벌써 5년도 더 되였는데 그사이 경기가 괜찮았다는것, 자기가 북걸음을 한것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도 볼겸 북에 회사의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서라고 자랑삼아 이야기하였었다. 전상음은 그가 국정원의 일을 하는 인간이라는것을 모르고있었다. 라경운은 《아리랑》관광차로 북을 방문하는 남과 해외동포들의 동향을 감시하는것과 동시에 련북성향이 강한 사람들을 색출하는 사업을 총찰하고있었다.

《퍽 늦으셨군요.》

식사를 끝냈는지 나프긴으로 두 입귀를 꼼꼼히 닦으며 그가 건네온 말이였다. 상음은 대답대신 머리를 끄덕여보이며 때마침 다가온 접대원에게 아침식사를 청했다.

《오후엔 참관도 없는데 뭘 하실 계획이십니까?》

《왜 그러나?》

《다른 의견 없으시면 윤이상음악쎈터에서 진행하는 정기음악회에 초청할가 하는데요.》

《자네가?》

《예, 전 북의 휘라모니예술에 대한 선생의 고견을 듣고싶어서 그럽니다.》

전상음은 이마살을 찡그리였다. 이 라경운이라는 인간은 만날 때마다 매번 산만무질서하고 저급한 이른바 예술관을 늘어놓으며 상음이와 동등한 급의 사람으로 자처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군 한다. 그는 라경운의 언행이 불쌍하다못해 이제는 넌덜머리가 났다.

《난 이미 봤네. 그리고 오후엔 계획이 있어. 릉라도를 돌아보려네.》

《아, 그러시다면 동행을 부탁합니다. 마침 저두 지사를 꾸려도 된다는 북의 허가를 받았는데 위치가 적중치 않아서 걱정하던중이지요. 릉라도가 대단히 멋있다면서요?》

이런 엉겅퀴같은 녀석이라구야. 북에 와서는 계속 붙어다니기를 요청하는 그였다. 전상음은 속으로 혀를 차며 대척을 않고 수저를 들었다.

술질을 몇번 하는 참에 문가에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왁 밀려들어왔다. 그들은 이 며칠사이에 평양시를 참관하며 낯을 익힌 남조선사람들이였다. 그들의 인상은 한결같이 밝지 못하였으며 개중에는 무엇이라고 불만을 터뜨리는이들도 있었다.

《저들이 왜 늦었는지 아나? 필경 저 사람이 또 일장의 식전연설을 해서 그럴걸세.》

전상음은 그들속에서 분명히 라경운이쪽에 대고 머리를 굽석하는 진바지에 동남아풍의 격자샤쯔를 받쳐입은 장발머리의 사나이를 턱짓했다.

《규률을 세우느라 그러겠지요. 원래 우리 〈한국〉사람들은 집단의식이 빈약합니다. 여기 와서 제멋대루 놀아대는걸 선생두 목격하셨지요? 북주민들한테 흉을 보이지 않을래도 그래 어느 정도 기강은 세워야 합니다.》

흔연히 대꾸하는 라경운이였다. 전상음은 가볍게 부정하였다.

《그렇지도 않더군. 자네 말과는 달라. 저 사람이 어제 뻐스안에서 뭐라고 일장훈시한줄 아나? 〈아리랑〉공연 가서 북주민들을 자극하는 발언 삼가, 공연관람시 사상성은 배제하고 예술성만 볼것, 마음에 드는 장면이라고 하여 사진기나 록화촬영기에 담는것은 절대 엄금, 이러더군.》

《어쩌겠습니까. 그 정도의 주의라도 환기시키지 않으면 국가안보의 기틀에 공백이 생기지 않겠나요. 그렇지 않아도 먼저 〈아리랑〉을 보고 간 사람들이 CD와 록화테프를 돌리며 홍보원노릇을 하는통에 민심이 전부 북으로 쏠려 정부는 골머리를 앓고있습니다. 안보관계자들도 아우성이지요.》

《허허- 그러니까 정치는 걸러내고 음악과 춤가락, 장식등과 조명만을 보라는건데?! 모를 소리다. 예술성 그자체가 주장이 되고 뜻의 표현으로 되는데 그걸 갈라보라고 권하다니. 이보라구, 이게 주장이 옳은가?》

《그러게 그만치 속을 도사려먹으라는 주의지요.》

《음- 비둘기 마음은 항상 콩밭에 가있다구 근본은 어딜 가지 않는구만. 국가안보를 위하는 갸륵한 념려를 들으니 역시 안기부출신이 달라.》

《아아, 선생님, 비꼬지는 말아주십시오. 여하간에 나야 〈대한민국〉의 하늘아래 사는 국민의 한사람이 아닙니까.》

《그럼 자네네 〈대한민국〉은 혈통이 무엇인가? 설마하니 이방족의 피가 흐르진 않겠지.》

《부탁입니다. 그만합시다, 선생.》

전상음의 헐치 않은 입심에 걸려들었다고 여겼던지 라경운은 손을 흔들며 화해조로 나왔다.

《난 선생과 불필요한 론쟁을 하고싶지 않습니다. 더우기 여기 북에까지 와서 말이지요. 우리가 그런것때문에 척을 질 필요야 있습니까. 그런 얘기 그만둡시다. 전 아까 선생에게 건의한 문제나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정 동행하고싶다면 가세. 오후 2시쯤 해서 호텔현관앞에 나와있게.》

전상음은 일어서려는 그를 손짓으로 제지시켰다.

《그리고 한가지 부탁할것은 다시는 내앞에서 음악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릴 꺼내지 말아주게.》

《?!》

《음악이란 그의 력사를 졸졸 따라외운다고 해서 아는것도 아니요, 숱한 작품을 들었다고 해서 아는것도 아닐세. 한 소절을 들어도, 한 작품을 들어도 거기에 담겨있는 진정한 인간감정을 들을줄 아는 사람만이 그처럼 고결한 학문을 안다고 할수 있네. 알겠나?》

 

전상음은 해질녘이 가까이 되여서야 릉라도관광(그의 표현이다.)을 마치고 5월1일경기장으로 향했다. 그들이 얼마쯤 걸었을 때 라경운이 한곳을 가리키며 가보자고 하는것이였다.

그들에게서 한 열댓보쯤 떨어진 걸음길옆의 울창한 숲속공지에서 연분홍색꽃무늬를 수놓은 조선치마저고리우에 하얀 잠바를 어깨에 걸친 애젊은 처녀가 화가를 버티여놓고앉아 열심히 붓질을 하고있었다. 상음은 이 작자가 또 눅거리예술관을 늘어놓을가봐 신경이 갔다. 하지만 애어린 처녀화가가 무엇을 그리는지 흥미 동하는바가 없지 않아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둘은 처녀의 등뒤로 다가가 어깨너머로 화판을 들여다보았다. 소박한 기법으로 저녁노을이 부드럽게 비낀 청류벽을 그린것이랑 미루어보아 형태는 갖추어져있었으나 아직은 미완성품이였다. 가까이에서 인기척을 느낀 처녀는 붓을 든채로 고개를 돌렸는데 이국풍의 옷차림을 한 그들을 일별하고는 이상해하였다.

《우린 〈아리랑〉을 보러 온 사람들입니다. 지나가다가 호기심이 나서 그만, 실례했소이다, 아가씨.》

상음은 흰 중절모를 들어보이며 황급히 목례를 표시했다. 그들이 해외동포들이라는것을 알아차리자 처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비꼈다.

《괜찮습니다. 오늘 작업은 거의다 끝났으니까요.》

《그렇소? 제목은 뭐라 달려고 했댔소?》

해볕에 감스레하게 탄 처녀의 얼굴에 점직해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는 무척 부끄러워하며 붓을 화가에 얹어놓았다.

《〈노을비낀 청류벽〉, 릉라도에 들어와 댓달 훈련하면서 저녁노을이 하도 아름다워 그걸 담아보려고 했는데 재능이 모자라는지, 잘 안됩니다.》

《오- 〈아리랑〉에 참가하는거구만.》

전상음은 화가옆에 개놓은 까만 가죽장화며 은분을 바른 목군도, 군복의상을 곁눈질해보고나서 아는체를 했다. 그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처녀는 《아리랑》출연자였으며 무슨 칼체조무용수라고 했다.

《아가씨의 본직업은 무엇인가요?》

라경운이 끼여들었다.

《평양화장품공장 로동잡니다.》

《그림은 그려서 무엇에 쓰려고 하는지?》

《별다른 목적은, 그저 취미가 돼서.》

이제는 화제의 고삐가 완전히 라경운에게로 넘어간듯 했다. 그는 화제를 이리저리 몰아가며 처녀에게 질문의 소나기를 퍼부었다. 공장은 제대로 돌아가는가, 월수입은 얼마나 되는가, 집은 어디에 있는가, 전기는 오는가, 집세는, 물은, 식량공급은?

처음에는 의아해하면서도 말해주던 처녀였다. 그러나 질문이 별나게 번져가고있으며 당사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눈치챘는지 처녀는 또글또글 여문 대답을 하는것이였다.

《설애! 설애동무!-》

공지너머 숲속에서 여러명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날아왔다. 설애란 그의 이름인 모양이였다. 소리쳐서 동무들의 부름에 응답한 그는 화가를 접고 화구를 거두며 서둘렀다.

《잠간, 아가씨.》 라경운이 한발 나서며 처녀를 불렀다. 《한가지만 더 물어봅시다. 분명히 〈아리랑〉에 무보수로 출연하지는 않을테니까, 무엇을 받습니까? 받는것이 있겠지요?》

《있습니다.》

《오, 아무렴, 그렇겠지.》 라경운은 희색을 띠우며 다우쳐물었다. 《쌀을 줍니까?》

아연해하는 처녀였다.

《그럼 수당금?··· 것도 아니면 무엇으로 지불합니까? 돈으로 보상해주기는 만무할게고.》

《영광입니다.》

《영광이라뇨?》

라경운이도 그랬지만 상음이 역시 리해가 되지 않아 어리둥절해있었다. 처녀는 화판을 어깨에 멘 다음 얼굴에 띠운 가소로운 빛을 거두더니 이렇게 또박또박 그루박는것이였다.

《위대한 장군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그분께 우리가 준비한 〈아리랑〉공연을 보여드리는 그것이예요.》

《!》

《설애양, 아가씨, 거기 서시오. 아, 잠간만.》

라경운은 처녀를 따라 몇걸음 옮기며 불러세우려 했으나 그는 공연구경 잘하십시오하고 인사를 남기고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총총히 가버렸다.

《자넨 무슨 언행이 그렇게 거치르나?》

상음은 그를 책망했다.

《한시절의 외교관경력에 나이도 어지간하고 이젠 점잖은 사장님인데 듣기가 막 민망스럽구만.》

《뭐, 귀등으로 넘기십시오. 호기심이라는건 때로 사람을 주책머리없게 만든답니다. 한데 선생, 이자 들으셨지요? 설애양이 대답하는걸 말입니다.》

《그게 어쨌다고 그러나?》

《판에 박은, 에- 아가씨의 대답이 어쩐지 인위적인감이 든단 말입지요.》

《자넨 암만 봐야 실업가같지 않아. 임자야 공연구경 잘하고 돈이나 벌어 은행구좌를 채우면 될텐데 뭘 그다지나 이죽거리며 험담질인가.》

그는 언행을 제꺽 수정했다.

《제 지나친 모양입니다. 하기야 이런것도 잘 알아야 북에 기업을 순조롭게 펼수 있지요.》

상음은 쓰거워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언제 봐야 능갈치며 표리부동하게 처신하는 라경운의 언행이다. 이자는 도대체 이따위 너절한 처세를 어디서 배웠을가.

9년전 겨울 어느날, 호텔에 찾아와 위협하던 살기띤 거동은 찾아볼래야 찾아볼수 없다. 하긴 안기부출신이니까 그 속통머리야 누굴 주겠는가. 하지만 전상음은 경기장 3호수문앞에서 그만 자제력을 잃고 하마트면 큰소리를 칠번 했다. 의상인지 구명대를 메고 지나가는 한 유치원꼬마(리강이다.)를 불러세워놓고 몇살인가, 힘들지 않는가, 공부랑 제대로 하는가고 물으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라경운이 또 끼여들며 들어보나마납니다, 누가 시킨걸 입에 올리겠지요 라고 내뱉은 말에 불쾌감이 왈칵 치밀었기때문이였다.

전상음은 시시각각 라경운이가 마냥 밉살스러웠고 단장으로 막 후려갈겨주고싶기도 하였다. 북부조국의 국민정서가 어떤것인가는 이 며칠사이에 참관하였던 주체사상탑이며 천리마동상, 인민대학습당, 개선문을 비롯해서 북이 창조한 석조문화 하나만을 음미해봐도 얼마든지 알수 있는것이 아닌가. 이것은 백성을 하늘처럼 여기고 그에 충실하려는 김정일국방위원장님의 정갈한 복무정신이자 위원장님의 자주정신이 낳은 창조물이다. 한편으로는 민족의 새 력사를 창조하고 이끌어온 절세의 민족적영웅을 숭배하는 국민적감정정서의 산물이기도 하고.

북주민들은 확실히 그분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있다. 이건 나의 말이 아니라 정신병자처럼 북을 헐뜯고 비방하는 미국과 서방도 한결같이 인정하는 점이다. 그런데 이들이 누가 시켜서 이런 말을 하겠는가. 쓸개빠진 녀석···

잠시후 경기장에 입장한 전상음은 지정된 좌석을 찾아들어가 앉았다. 한 10분가량 지나가자 봉화대밑의 길다란 전자막에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보러 오신 여러분들을 열렬히 축하합니다. 반갑습니다.》 라는 글자가 현시되기 시작했다.

조금 있다가 객석전체가 이상하게 술렁댔다. 경기장을 둘러보던 전상음은 객석의 류다른 분위기를 감촉했다. 그는 원인을 알아보려고 눈과 귀를 도사렸다. 다음순간 상음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맞은편관람석으로 사람들이 질서있게 입장하는것을 발견하였던것이다. 객석이 술렁댄것은 그때문이였다.

그는 쌍안경을 들었다. 아, 학생들이군. 저뒤에서 구경을 해야 보이나, 관람조직을 잘못했어. 아무리 사람이 많기로서니 저런 좌석까지 표를 팔아주면 안되지. 상음은 공연이 끝난 다음 진우에게 전화를 걸어서 의견을 상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데 락하산병들처럼 등엔 뭘 잔뜩 지고있노. 그게 도대체 뭐게 앉아서도 끌어안고있을가.

참, 내가 이거 착실하게도 오지랖이 넓구만. 전상음은 쌍안경을 내리우며 중얼거렸다. 나야 공연을 기분좋게 구경하면 되는데 이들이 하는 일에 무슨 훈시질을 하겠는가.

안경을 벗어든 그는 눈등을 꾹꾹 누르고나서 자리를 고쳐앉았다. 그때 갑자기 애어린, 그러나 경기장을 들었다놓는 야!- 하는 함성과 함께 거대한 방수천을 잡아 접치는듯 한 소리가 터졌다. 흠칠 놀란 상음은 급급히 안경을 들어끼였다. 학생들이 차지한 맞은편의 관람석이 회백색으로 되여버렸다. 그다음 또다시 야!-하는 함성이 울리며 푸른색으로 바뀌더니 빠르게, 좀 더 빨리, 혹은 천천히, 혹은 무게있고 웅장하게 속도를 조절하며 변화무쌍한 장면을 펼쳐놓는것이였다. 그속에는 중학교명칭들도 있었고 일곱색형상도 있었으며 특대형 《아리랑》글자도 있었고 지어 해학적인 장면들도 있었다. 장면이 바뀌울 때마다 자부심이 함뿍 어린 애어리고 생신한 함성소리와 배경책을 접치는 소리가 박력있게 터져올랐다.

전상음은 뇌리가 휑하니 들려 그것을 정신없이 지켜보다가 관람석으로 머리를 돌렸다. 관람석은 번쩍이는 카메라의 섬광으로 가득차있었다. 마치 하늘의 별무리가 일시에 내려앉은것 같았다. 장발머리가 그렇게도 주의를 주었건만 그의 일행도 저저마다 사진기를 내들고 카메라의 초점을 맞춘다.

《저게, 저게 대체 뭔가?》

상음은 곁에 앉은 라경운에게 물었다. 그도 어리뻥뻥한 인상을 짓고 배경대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글쎄요, 나도 잘···》

그는 좌측에 앉은 처녀안내원에게 묻는듯 한 눈을 돌렸다. 안내원이 설명을 하려댔는데 그옆에 앉아있던 가슴근육이 류달리 불룩하고 한때 유술을 했는지 쩍 뻐그러진 어깨에 귀가 오그라진 체육인풍의 젊은 청년이 큰소리로 말참네를 하는것이였다.

《배경대입니다, 북이 자랑하는 학생배경대.》

《그럼 저게 특대형전자막이 아니라 분명히 사람이 하는거란 말이요?》

《눈으로 보시구두 그럽니까. 옳습니다. 사람이 하는거지요. 인원이 수만명이나 된다던지. 저 애들은 지금 저들의 〈무력시위〉를 하고있는중입니다.》

《〈무력시위〉?》

《예,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저런 일을 해낼수 있나?》

《왜 못해요. 북이 마음먹으면 못하는것이 있나요.》

청년은 앞좌석에 장발머리가 앉아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큰소리로 떠들어대는것이였다. 상음은 전자막이 아니라 학생배경대라는것을 실물로 확인하였지만 그래도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인차 《아리랑》공연이 시작되였다. 전상음은 몸자세를 편안히 하며 공연에 집중했다. 환영장이 끝나자 경기장전체가 어두워지더니 배경대 자막에 서장 《아리랑》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그다음 이어지는 푸른 물결을 젓는 노대, 가요 《눈물젖은 두만강》의 구슬픈 선률.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배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던 그 배는 어데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

 

세세년년 머리우에 무겁게, 진하게만 드리워오던 어둠이였다. 그놈은 마침내 이 땅을 칠칠야밤으로 꽉 에워싸버리더니 넋과 얼까지 빼앗으려든다. 시줄에 담아, 가락에 담아 님을 찾으며 애달프게도 하소했건만 님은 어디에도 없었고 바라면 바랄수록 기승사납게 내려누르는것은 거무턱틱한 어둠뿐이다. 때로는 의분에 넘친이들이 여기저기서 의기를 떨치며 일어섰건만 님다운 용력과 위상이 모자라 한계절의 꽃처럼 스러지군 한다. 그러기를 몇번, 그러기를 몇해였던가.

언제부터였는지 모른다. 어느때부터였는지 누가 알랴. 저기 하늘아래 첫 동네라 불리우는 백두산우에 새별이 떴다고, 그 별이 곧 어둠을 가셔버릴것이라는 전설, 불쌍한 이 땅의 중생들이 하도 가엾어서 하늘이 님을 내려보내주셨으니 불원간 머리우에 태양빛이 쏟아져내릴것이라는 소문. 그것이 정녕 소문만이였고 전설만이였던가.

아니였다. 새별은 분명히 떴고 떠서는 가장 강한 인력과 크기로 빛을 뿌리며 어둠을 태워버릴 성전에로 사람들을 불렀다.

님은 사랑과 믿음, 의분과 헌신에 주리고주린 그들을 품에 안아 불굴의 투사로 키워냈으며 이들을 이끌고 먹밤을 가셔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성전의 승리자가 되여 민족사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고.

제2경 《조선의 별》, 제3경 《내 조국》, 경은 이렇게 련속 잇달으며 새로운 화폭을 펼치였다.

하, 이런 맵시쟁이들 봤나. 공연의 장면, 장면에 연연히 흐르는 참신한 뜻을 새겨가며 보던 전상음은 타악기리듬에 맞춰 취주악대가 등장하자 안경을 고쳐썼다. 하나같이 이쁜것처럼 출연자들이 수행하는 동작 또한 그러했다.

《안내양, 이제껏 보여준 부분은 김주석님의 업적을 칭송한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럴테지, 현대조선민족사에 김일성주석님에게 비할만 한 정치가가 어디 있을라구. 상음은 내속으로 공감하며 안경을 추슬러올렸다.

또다시 암전이다. 자막에 《내 조국의 밝은 달아》라는 제목이 새겨지였다. 그다음 울리는 사색깊은 음악선률, 그를 타고 흰 안개발처럼 천천히 흘러들어오는 출연자들. 배경대자막은 달빛에 잠겨있는 철령의 산발, 굽이굽이를 도는 차불빛들을 형상하고있었다. 암만 눈을 밝히고 봐야 주인공이 누군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상음은 조심스레 또 물었다.

《미안하오만 안내양, 이 작품의 주인공은 누굽니까?》

《달입니다.》

《달이라구요?》

상음은 어정쩡해있다가 되물었다.

《달이 〈아리랑〉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출연자들도 등장하고 저기 무슨 령인지 웬 차량들도 가고있는데, 참, 저 차량들에는 누가 타고있길래 예술작품에 형상하고있습니까?》

《전선길을 가고있는 저 야전차에는 우리 장군님께서 타고계십니다. 출연자들은 인민을, 한편으로는 달빛을 형상하고있고 우리 인민들은 장군님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을 저 달에 말하고있습니다. 달만이 오직 그분이 가시는 길이 얼마나 험한가를 알고있으니까요. 그래서 달을 주인공으로 내세운겁니다.》

《!》

《좀더 보시느라면 리해가 충분히 되실겁니다.》

그래도 잘 깨도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공연을 보지 않고 계속 캐물을수는 없는노릇이였다.

2장 1경이 끝났다. 동시에 조명이 확 밝아오는 속에 경기장을 울리는 야!-하는 애된 환성이 울려퍼지며 아이들이 앞으로 왁 달려나온다.

객석의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웅성거림, 번쩍거리는 카메라의 섬광들. 전상음은 방금전의 의문을 풀 사이조차 없었다. 대번에 천진란만한 동심에 이끌려 들어갔던것이다. 저런, 저런, 넘어지겠군. 원 녀석들두, 밥알만 한 녀석들이 어떻게 교육받았길래 저리도 잘할가. 천명두 더 되는 애들이 하나같이 일매지고 귀엽게 하잖아. 가만, 가사가 좋구만. 야영을 떠나는 아이들보고 차창에 손저어주시네, 저 멀리 언덕엔 하얀 등산모, 달리는 차창에 어리네, 장군님은 전선으로, 아이들은 야영소로.

동화상으로 바닥형상을 받쳐주던 배경대가 글자들을 현시하였다. 상음은 황급히 시선을 거기에 주었다. 하 이런, 눈이 열개라도 모자라겠군. 바닥을 보문 배경대를 놓치고 배경대에 주의를 돌리면 바닥을 못보겠구, 참 안타까운 일이로다. 그러던 상음은 글자를 따라외우고는 무릎을 쳤다. 밝게 웃어라?! 암, 그렇지. 활짝 웃어라! 그렇구말구.

그때 아이들이 처음대형으로 결집하더니 앞선에 달려나와 두손을 높이 들어흔들며 콩콩 뜀뛰기를 하는것이였다. 경기장에는 아이들의 애틋한 정이 함뿍 어린 웨침소리가 울려퍼졌다.

《우리의 아버지 김정일장군님!-》

객석전체가 스스로 일어나 요란한 박수갈채를 보낸다. 이어 울리는 노래소리.

 

비바람 창가에 몰아쳐오고

찬서리 내린다 해도

귀여운 아이들아 두려워말아

아버지가 계신단다

포근한 너희 요람 지켜주신다

온 나라 아이들을 보살피신다

김정일장군님은 우리 아버지

아 아버지

···

 

애들이, 북의 주민들뿐이 아니라 애들까지 김정일국방위원장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이 위대한 아버지가 자기들의 요람을 지켜주신단다. 음, 지극히 깊은 뜻이 담긴 노래이군. 김정일국방위원장님께서 얼마나 인정과 사랑이 많은분이시였으면 애들까지 그분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겠는가. 전상음은 아까 《내 조국의 밝은 달아》를 볼 때 들었던 의문이 어느 정도 풀리였다.

그다음의 장, 경들은 1990년대에 공화국이 벌린 간고한 투쟁, 그 근저에 뿌리박힌 정신력을 형상한것들이였다. 거기에는 승리의 철학을 푼것도 있었고 대홍단의 감자바다며 토지정리를 하여 천지개벽을 이룩한 자랑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울림폭포(상음은 이 폭포이름을 처음 듣는다.)를 들어 민족문화의 계승을 노래한것, 교예장과 기구체조의 형상을 빌어 조선사람의 강의한 의지와 집단력을 과시한것, 최첨단과학기술에서 패권을 쥐려는 강렬한 야심과 지향을 형상한것들도 있었다. 전상음은 고압적인 기상과 의미가 단도직입적인 출연자들의 집단무도(2장4경 《조선의 태권도》)장면을 보면서 피끗 상기되는것이 있었다.

《백악관은 북한에 초강경메쎄지를 보내는 한편 북에 대한 정보수집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있습니다.》

누가 그랬던가. 오, 매킨지씨였어. 미국이 이라크전쟁을 준비하면서도 북의 반응에, 특히 인민군의 움직임에 고도로 촉각을 세우고있는데 한가지 실례를 놓고봐도 알수 있다는것이였다. 일설에 의하면 두달전 정찰위성이 인민군 한개 부대가 장갑차에 분승하고 대낮에 기동하는것을 포착한적이 있었다고 한다. 확인해보니 그 부대는 북인민군이 자랑하는 최정예특수전부대들중의 하나였는데 1년전에 전선동부에 전방배치되여있다가 어디론지 감쪽같이 사라져버려 그의 행방을 찾고있던중이였다고 하였다. 기동을 추적해보니 목적지는 평양 릉라도라고했다.

혹시 매킨지씨가 입에 올리던 부대가 이들이 아닐가? 하지만 저들이야 태권도인들이 아닌가. 호기심이 동해난다. 상음은 인차 그것을 비웃었다. 아서라, 괜한 호기심. 누구들이 출연하여 무도를 하든 《아리랑》을 해치려는 악과는 끝까지 해보겠다는 주장이야 지당한거 아닌가.

공연이 점점 고조에 이르면서 객석도 그에 용해되여버리고만것 같다. 공연이 시작될 때에는 서로 눈치를 봐가며 말도 촬영도 삼가하던 동행자들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된셈인지 대담해져서 촬영기도 서슴지 않고 내들지 않는가 하면 감탄사를 련발하고 일어서서 박수를 치는것이였다. 그들을 통제하던 장발머리도 맡은 일을 감감 잊은것 같았다. 처음엔 눈을 부라리며 주의를 주더니 지쳐버렸는지 아니면 저도 공연을 보고싶었던지 아예 관심을 돌리지 않는것이였다. 오직 라경운이만이 무표정한 얼굴로 공연흐름을 대하고있었다.

《아리랑》은 어느덧 통일장에 이르렀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경기장, 한줄기의 희푸른 조명빛, 남성설화자가 공기방석식무대를 타고나오며 절규에 찬 설화를 읊는다.

 

이 세상 이 하늘아래

오직 단 하나의 갈라진 땅 갈라진 나라

갈라진 아리랑민족이 있다

반세기가 넘는 분단세월에 백발이 된 어머니가

아들의 모습조차 알아볼 길 없고

헤여진 아들이 젖먹여 키워준 어머니마저

몰라보게 된 이 비극의 땅

예로부터 화목하게 살아온 우리 민족이

하루아침에 생때같이 갈라져

남남이 되여가는 이 땅

 

세계의 량심이여 대답해보라

외세가 가져다준 이 비극으로 하여

우리 아리랑민족이 언제까지 이렇게

갈라져 살아야 하는가

 

번쩍이는 번개불, 번개불, 떠가는 재빛구름, 시체빛의 들판, 광풍에 휘말려설레는 갈대숲, 허둥지둥 달려가는 아들, 백발을 흩날리며 마주오는 어머니, 허나 분계선철조망때문에 더 가지 못하고 멈춰선다. 어머니는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뿌리고 아들은 땅을 치며 목놓아 절규한다.

바닥은 악을 상징하는 어둠의 광란에 수난당하고있었다. 지난 세기 초엽부터 이 민족을 지지리도 억누르던 어둠이였다. 그것은 님의 힘에 의하여 걷힌지도 옛날이였다. 그렇다고 먹밤은 우리에게 없었는가. 정녕 어둠은 영영 가셔졌단 말인가. 아니였다. 탈을 바꾼 그것은 이 땅을 둘로 갈라놓은것도 성차지 않아 내 민족이 피땀으로 만들어놓은 북녘땅의 좋은 세상을 해치고싶어 조석으로 달려들고 번진 해 없이 달려들지 않았는가. 허나 안될 일, 우리의 힘은 그때처럼 여전히 살아있고 그 힘을 이끄는 님은 여전히 우뚝 서있으니 어둠이 어찌 이 땅을 삼킬소냐. 저것을 보라, 배달의 땅을 기어코 삼키려고 야차같이 날뛰던 어둠이 산산이 흩어지는것을. 저것을 어디 보라, 우리 조선이 희고 푸른빛을 띠며 기운차게, 싱싱하게 되살아나는것을.

객석전체가 술렁거렸다. 사람들은 떠들썩하며 박수를 치고 카메라를 들이댄다.

불시에 배경대에서 야!-하는 함성이 터져올랐다. 배경대는 함성과 보조를 맞추며 새로운 글자를 련달아 박력있게 형상하고있었다.

피줄도 하나!

언어도 하나!

이 땅도 하나!

애국도 하나!

6. 15공동선언 만세!

통일의 문은 우리 민족의 손으로!

그 다음엔 노래, 노래선률이 뒤따랐다.

전상음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그만이 아닌 전체 객석이 다 일어섰다. 일어서서는 손을 흔들며 박수를 치며 따라불렀다.

경기장은 삽시에 노래 《우리는 하나》로 끓어번졌다.

 

하나 민족도 하나 하나 피줄도 하나

하나 이 땅도 하나 둘이 되면 못살 하나

긴긴 세월 눈물로 아픈 상처 씻으며

통일의 환회가 파도쳐설레이네

하나 우리는 하나 태양조선 우리는 하나

 

통일장이 막을 내리자 5월1일경기장 상공을 아름답게 장식하며 터져오르는 축포, 축포, 온갖 장식등과 전광의 군무, 바닥에 그려지는 연푸른 지구의, 그것을 중심으로 륜곽이 드러나는 특대형꽃바구니, 배경대에 새겨지는 글자.

《절세의 애국자 김정일장군!》

《무궁번영하라, 김일성조선이여!》

드디여 종장이 끝났다. 출연자들전체가 바닥에 등장하고있었다. 그들모두가 객석을 향하여 손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또다시 경기장을 진감하는 박수소리, 노래소리, 여기저기서 번뜩이는 섬광빛들.

상음은 도가 넘는 흥분때문에 정신이 휑하니 들리는것 같았다. 숨이 가빠났으며 몸이 도대체 있는지, 없는지 감각하지 못하였다. 그저 뇌리에는 이런 충격적인 표현들만 떠돌뿐이였다. 인간세상에서 상상할수 없는 사변이 일어났다, 새 대륙을 발견한것 같은 거대한 일이 일어났다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