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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봉쪽 하늘자락을 물들이던 겨울해의 마지막잔광이 스러지였다. 경기장은 30분전에 켜놓은 각종 조명등으로 하여 대낮같이 밝아졌다. 손목시계에서 눈을 뗀 림진우는 대공무선전화기를 들었다.

《전체 주의. 음향실 시작합시다.》

특대형고성기들에서 《기다렸습니다》의 경쾌한 선률이 일제히 터져나왔다. 환영장으로 막을 올린 총시연회는 순탄하게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림진우는 눈앞에서 흘러가는 장면들을 깐깐히 살펴보았다. 매 작품들은 예상대로 응당한 수준을 보장하며 흘러가고있었다. 진우는 문득 교예장이 걱정스러웠다. 그러느라니 저도 모르게 교예장에 출연하는 배우들, 특히 외손녀의 준비상태를 확인하고싶어지는것이였다. 림진우는 쌍안경을 들었다. 강진호며 출연자들의 준비상태를 확인한 진우는 쌍안경을 돌려 한정미를 찾아보았다. 정미는 두팔을 엇가로 낀채 까딱않고 경기장바닥을 지켜보고있었다. 자세와 마찬가지로 얼굴빛도 사못 침착하였다. 역시 국제교예축전에서 거퍼 두번이나 금상을 받은 오랜 경험자다왔다.

저 애가 크게 달라졌어. 림진우는 쌍안경을 내리며 웃몸을 뒤로 제끼였다. 볼수록 외손녀가 대견스럽기만 하다.

원래 림진우는 정미가 물결날기에 직접 출연한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귀를 의심하였다. 외손녀의 성격으로 보아 반발심이나 의무감에 떠밀려 그랬을수도 있는것이다. 그러나 림진우는 인차 기울어지려는 믿음을 바로세웠다. 정미도 저네 동시대인들처럼 당의 품속에서 성장한 애이니 달리는 될수 없는것이다. 정미는 틀림없이 그 어떤 속된 감정에 못이겨서가 아니라 새롭게 살려는 정신적앙양에 북받쳐서 자진했을것이다. 진우는 꼭 이렇게 믿고싶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림진우의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어렵고 위험한 물결날기를 자진했을 때 정미는 류다른 흥분에 달아있었다. 이러한 감정은 스물네해를 살면서 처음 느끼는것이였다.

정미는 아픈 매를 든 외할아버지가 고마왔다. 사실 한정미는 외할아버지의 이야기에서 받은 충격이 커서 한동안 고민에 싸여있었으며 림진우를 원망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외할아버지가 옳게 말했다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평소에 한정미는 뭇사람들속에서 우월감이 정도이상으로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있었다. 정미 본인도 애써 그것을 부인하려들지 않았다. 정말 그렇지 않는가.

한정미의 량부모를 살펴보면 외켠쪽에는 조각과 회화, 무대와 영화예술을 비롯하여 공화국예술계에서 한다하는 예술가들이 많았으며 친켠쪽에는 당과 국가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하는 일군들이 적지 않았다. 본인을 놓고봐도 지난 시기 국제교예축전에 참가하여 금상을 두번씩이나 받은 공로로 공훈배우칭호를 받았으며 지난해 여름에는 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다.

생활측면에서도 정미는 부모들의 덕택으로 어려서부터 잔걱정 하나없이 살아왔다. 나라가 한창 고난의 행군을 할 때조차도 줄창 교예축전이며 순회공연차로 외국에 나돌아다녔으니 무슨 고생인들 해봤겠는가.

한정미는 인물면에서도 역시 자기를 인정하고있었다. 늘씬한 몸매에 탄력있는 행동거지, 평소에 미소조차 함부로 흘리지 않는 눈빛, 이와는 상반되게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친절하고 사교성이 진한 언행, 여기에 반해서 얼마나 많은 총각들이 정미의 주위를 맴돌았던가.

한번은 그를 검질기게 따라다니던 한 총각이 정미에게 애인이 있다는것을 알자 강진호에게 싸움을 걸어와 큰 소동이 일어난적도 있었다. (물론 다음날 저녁 무분별한 그 도발쟁이를 짓뭉개버리긴 했지만 그 일로 하여 강진호와 정미관계는 한동안 얼어붙어있었다.)

이름있는 가문, 잔걱정 하나없는 생활, 드문 미모와 높은 명예칭호, 바로 그랬다. 하여 인간과 생활을 대하는 한정미의 태도는 늘 고자세였으며 정미는 이것을 응당한것으로 여기고있었다. 그런데 그토록 자부해왔던 그 모든것이 불현듯 외할아버지에 의하여 한순간에 허물어지고말았다.

《근년간에 네가 처신하는걸 가만히 지켜보느라니 내 오늘은 아프더라도 말을 좀 해야겠다.》

그 저녁에 외할아버지가 한 이야기였다. 한정미는 아연감을 금치 못했다. 부모의 경력을 처음 알게 된것이였다. 외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북으로 들어오다가 대학살만행이 벌어진곳에서 혼자 살아남은 소녀애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소녀애를 데려다키웠는데 그가 바로 어머니라는것이였다. 아버지 역시 1953년 7월에 있은 미제의 평양대폭격에 부모를 잃은 전재고아라고 하였다. 이런 그들을 당에서는 한품에 안아 친어버이사랑으로 돌봐주었으며 중학교과정을 마치자 김일성종합대학에 불러주었고 졸업후에는 나라의 외교일군으로 성장시켜주었다고 했다.

《이 외할아버지도 그래 친켠사람들의 근본도 다를바 없다. 우리는 모두 당의 품에 안겨서야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수 있었고 삶을 값있게, 보람있게 누릴수 있었다. 그런데 너는 근본을 잊고 자기를 특별한 사람으로, 타고난 행복자로 여기고있다. 정미야, 이 할애비에게 어디 말해보아라. 입당심의를 할 때 세포당원들이 네게 어떤 충고를 주더냐?》

한정미는 속이 찔끔하였다. 정미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세포심의에 참가한것은 사실이였다.

아니나다를가 그날 세포당원들이 준 충고는 지극히 엄했으며 내용은 거의나 한결같았다.

《우리 차례가 된것 같소.》

곁에 서있던 안전기사 민유남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정미는 그 바람에 상념에서 깨여났다.

정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나서 견인고리며 안전바를 재확인하려고 기재들을 손더듬하였다. 경기장바닥에서는 제3장 1경 《울림폭포》가 거의 끝나가고있었다. 그다음은 교예장 《락원의 노래》였다.

 

《배경대중심 148번이 또 늦게 펼쳤습니다. 벌써 세번째인데 이상합니다.》

울림폭포를 형상한 그림이 배경대에 나타나자 젊은 부연출가가 그의 귀전에 대고 속삭이였다. 진우는 알고있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이였다.

《울림폭포》가 끝나면서 각이한 조명빛으로 대낮같던 경기장은 점점 어두워지더니 이내 암전속에 파묻히였다. 노래선률이 가느다랗게 흘러나왔다. 음악은 차츰 증폭되고있었다. 그와 동시에 연보라색, 붉은색, 분홍색갈을 띤 강력한 조명빛이 어둠을 천천히 썰며 어느 사이에 등장한 출연자들을 비치기 시작한다. 자유락하, 탄력비행, 그다음이 포탄비행이다.

숨을 죽인 림진우는 눈부리를 한껏 모았다. 곧 포탄발사음을 형상한 요란한 전자북소리에 이어 경기장 2층 왼편에서 강진호가 새매같이 날아오른다. 10메터, 20메터, 50메터, 80메터, 95메터. 그 순간 아아-하는 우려에 찬 웨침소리가 진우의 귀전을 자극하였다.

이 장면을 연출석에 앉은 림진우네들만이 아니라 경기장의 좌우측수문앞에서 출연을 기다리는 사람들, 객석의 배경대에 앉아있는 학생들도 눈에 불초롱을 달고 주시하고있었으며 그들이 기겁한것은 진호의 비행거리가 위험계선에 이르렀기때문이였다. 강진호가 포물선을 그으며 밑에 드리워놓은 안전그물의 끝부분에 무사히 떨어지자 와- 하는 환성으로 뒤바뀌였다. 경기장은 신이 나서 웨쳐대는 각이한 소음(주로 배경대쪽이다.)과 함께 한여름의 소낙비와 같은 맹렬한 박수소리로 차넘쳤다.

《성공입니다.》

부연출가가 흥분을 참지 못하고 부르짖었다. 그렇다. 강진호는 해냈다. 하지만 아직은. 림진우는 애써 마음을 자제하며 외손녀의 출연을 기다렸다.

열정과 박력을 읊조리던 음악은 서정 짙은 선률로 바뀌였다. 앞서의 조명빛도 은백색으로 변하며 경기장의 바른편 지붕밑에 있는 자리길의 출발선을 비친다. 인차 깊은 새벽의 보름달만 한 조명빛속에 한정미가 등장했다. 어둠속에서 봄밤의 소낙비를 련상시키는 한차례의 긴 박수소리가 부드럽게 풍겨올랐다. 정미의 성공을 기대하며 그를 격려하는 《아리랑》참가자들의 박수소리였다. 얼마전부터 물결날기에 출연하는 미인처녀가 국제교예축전의 금상수상자, 세계교예계의 공중종목에서 녀왕으로 불리웠던 유명한 교예배우이며 림진우총연출가의 외손녀라는것이 알려져 그에 대한 《아리랑》참가자들의 관심과 기대는 류달리 컸다.

곧 《물결》의 자리길을 따라 백설같이 희디흰 선녀옷을 입은 한정미가 엷고 긴 날개를 하늘거리며 날기 시작했다. 정미의 우아하고도 침착한 형상을 보니 물결날기도 포탄비행처럼 결과가 좋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역시 국제교예무대에서 활약하던 금상수상자가 달라. 자세나 비행수법, 음악성을 비롯한 모든 형상들이 균일하고 안정되여있거던. 괜찮아, 정미의 동작을 뚫어지도록 주시하던 림진우는 기분이 좋아 저도모르게 음- 하는 외마디소리를 내였다.

 

림진우의 평가는 옳았다. 속도의 신축성, 선녀다운 우아하고 유연한 날기형상, 각이한 길이와 높이를 가진 자리길을 능숙하게 타고나가는 로련한 수법, 한정미는 맡은 형상과제를 나무랄데가 없이 정확하게 수행하고있었다. 그의 형상이 어찌나 완벽하고 아름다왔던지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던 사람들속에서, 특히 정미와 제일 가까운 위치에 있는 배경대의 학생들속에서 자주 경탄이 흘러나왔고 이따금 박수소리도 간간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른다. 한정미가 물결날기에 출연할 결심을 품기까지 어떤 심리적고충을 겪었으며 또 그간 어떤 일들이 있었댔는가를.

그랬다.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 한정미는 랭철한 눈으로 자부해온 모든것을 투영해보았다. 우리 집안이 과연 지체높은 가문이였던가. 아니였다. 우리 부모는 고아들이였으며 그들을 데려다 키운 외켠, 친켠의 어른들도 이 나라사람들 대개가 그런것처럼 근본은 평범한 로동자, 농민들이였다.

그러면 네가 받은 높은 명예칭호는 오직 너의 노력의 산물이였는가. 물론 나에게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재능이라는것이 있긴 하다. 허나 이것 역시 내세워주고 이끌어주는 손길이 없었다면 빛을 내지 못했을것이다.

인물이 삐여나게 곱다는 그것도 마찬가지다. 어느 책엔가 이런 글이 씌여있었어. 사람의 두뇌를 서고에 비긴다면 일부 얼굴고운 녀성의 두뇌는 소학교교재 몇권만 딩구는 빈 서고나 같다. 왜냐하면 미 하나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인생을 편히 살수 있다고 자인하고있기때문이다. 이런 부류의 녀성들의 두뇌에는 사회의 진보에 이바지하겠다는 의식은 고사하고 타인에 대한 자그마한 배려조차 없으며 있다면 오직 허영과 자고자대, 나약성만이 한질씩 빼곡이 차있다고 말해야 할것이다 라는.

어쩌면 이 글은 나와 같은 처녀들을 빗대놓고 쓴 글일수도 있어. 나의 량심이 서슴없이 너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외적인 미가 곧 한 인간의 전체를 평가하는 자막대기는 아닌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고상하고 깨끗한 정신적미, 조국을 알며 시대와 인민을 알고 그에 충실히 복무하려는 자의식이 아니겠는가.

사랑에 대하여서도 검토해보았다. 쓰거웠다. 이제 와서는 그 언젠가 공연을 마치고 귀국할 때 비행기안에서 진호에게 순회공연기간 유럽청년들에게서 받은 편지이야기를 하며 그의 속을 아프게 찔러놨던 일까지도 유치하게 상기되여 얼굴이 달아오르는것이였다.

그래, 나는 사랑에서도 진실하지 못했어. 평소에 나는, 한정미는 만족하지 못하다, 허나 강진호는 만족할것이며 행복할것이다, 강진호에게는 내가 과남하니까 라는 견해를 가지고 진호동지를 대하지 않았는가.

그럼 너의 우정관은? 모르겠다. 너의 동지관은? 역시 같다. 그럼 너의, 아니아니 그만두자, 한정미는 도리머리를 저으며 랭철한 투영을 단념해버리고말았다. 파고들수록 역스러웠으며 모멸감에 자기를 주체하기가 힘들었던것이였다.

괴로왔다. 고통스러웠다. 외할아버지며 강진호, 교예장출연자들앞에 마주서기가 두려워났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인 박철건이며 심혜영이들에게 죄스러웠다. 나는 왜 이때까지 이것을 모르고 살아왔는가. 어째서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이것을 알게 되였는가.

괴로움과 번민속에 날이 흐르던중 어느날 한정미는 박철건이 꼭 만나서 할말이 있다는 전갈을 받게 되였다. 철건에게로 찾아간 정미는 아주 의미깊은 조언을 들었다.

한정미는 못내 섭섭했다. 정미는 박철건에게서 엄격한 충고 한마디라도 받고싶었다. 못해도 친구인 강진호를 극구 옹호하는 말 한마디라도 듣고싶었다. 그런데 박철건은 그에 대해선 일언반구 하지 않고 그저 사업얘기만, 그것도 공식적인 어조로 말한다. 동지적부탁이라고, 친구래서가 아니라고 하며.

그러나 한정미는 박철건의 부탁을 받게 되자 심중에서 자기로서도 놀라운 어떤 각오와 결심이 생기는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포탄비행과 물결날기에 직접 출연하려는 진호의 비장한 결심, 조선로동당 입당청원.

장마철의 웅뎅이물처럼 흐려져있던 정신이 단번에 번쩍 맑아져왔다. 이상한 흥분이 강렬하게 온몸을 뒤흔들며 그 어떤 고상한 행동에로 그를 떠밀었다. 옳다. 그것이다. 내가 새롭게 산다는것을 증명할수 있는것은 오직 그것뿐이다. 한정미는 번민을 털어버리고 분연히 일어섰다. 자기가 할바를 깨달았고 당원 한정미가 서야 할 위치를 드디여 깨달았던것이다.

안다는것과 행동에 옮긴다는것은 거리가 멀다. 깨달은것을 실천하자면 자기를 다몰아 가다듬는 칼끝같은 의지가 있어야 하는것이다. 한정미는 체득했으며 실천했다. 비록 다른 사람에게는 범상한것으로 보일수도 있었지만 정미는 그래도 무관하였다. 시대를 알고 인민을 알았으며 주요하게는 우리 당 조선로동당을 알았다는것, 《아리랑》과 더불어 이것을 알았다는것은 사실 얼마나 큰것인가.

한정미는 뭇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계속 날았다. 갱생의 희열에 넘쳐 떳떳하게, 인생을 성실히 살 의지를 가지고 새롭게.

밑에서는 여전히 그를 격려하는 박수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마침내 한정미가 출연을 끝마치고 내리자 기다린듯 우뢰같은 《소낙비》가 그에게 쏟아져내렸다.

장해, 괜찮아, 덧옷을 가져다주라, 더운 물, 빨리 마싸지, 자, 여기로. 삽시에 처녀를 둘러싼 사람들이 칭찬하고 념려해주고 축하해준다. 와당탕 퉁탕 하며 누군가가 발판을 뛰여올라오는 서슬에 다들 돌아보았다. 강진호였다. 그의 한손에는 빨간 장미꽃 한송이가 들려있었다. 누구보다 정미의 성공에 흥분한 사람은 아마 그였을것이다. 강진호는 가쁜숨을 몰아쉬며 처녀에게 한발 다가섰다.

《수고했어.》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정에 넘친 말투였다. 왜 그런지 눈물이 불쑥 나왔다. 한정미는 진호의 동가슴을 꽉 떠밀치며 쏘아붙였다.

《비켜.》

어찌나 세게 밀었는지 강진호는 꽃을 떨구며 몇걸음 밀려나며 중심을 잃고 기웃기웃했다. 그 바람에 웃음보가 터졌다. 진호도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었다. 한정미는 볼편에 맺힌 눈물을 닦을념도 하지 않고 발길이 닿는대로 총총히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