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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봉언저리에서 감돌던 새벽안개가 걷히면서 릉라도공원숲속에는 불깃한 아침해빛이 진하게 비쳐들기 시작했다. 숲속은 뭇새들의 울음소리며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들로 활기를 띠였다.

숲속길을 벗어난 림진우는 차를 대기시켜놓은 1호수문으로 돌아가려다가 유보도에 내려섰다. 기척없이 잔잔한 강물, 신선한 물비린내를 풍기며 피여오르는 물안개, 아늑한 고요, 그러나 강변의 이 모든 아침 정취도 도무지 기분을 가볍게 하지 못했다.

며칠전에 림진우는 해외동포사업국의 한 일군을 만났다. 그가 찾아온것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 관광선발단에 망라되여 조국을 방문하게 되는 한 재미동포가 진우와의 화상상봉을 요청하였기때문이였다.

《전상음이라고 선생과는 소꿉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라던데 어떻습니까. 선생의 구면지기가 옳습니까?》

《전상음이?》

림진우는 홀연 비수같은것에 가슴을 쿡 찔리우는듯 한 예리한 아픔에 절로 신음소리를 내였다. 이어 솟구치는 격한 감정에 온몸의 피가 말라드는것 같았고 머리가 어지러워났다.

《아니,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어데 편찮으십니까?》

그의 얼굴이 어찌나 백지장처럼 질렸는지 일군은 당황해서 어쩔바를 모른다. 림진우는 손을 흔들어 일군을 안심시키고나서 물고뿌를 들었다.

《옳습니다, 소꿉시절의.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아- 옳긴 옳구만요.》 림진우를 긴장하게 지켜보던 일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일전에 미국에서 사는 〈아리랑〉동포관광선발단성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던중에 진우선생이 〈아리랑〉 총연출가라는것을 알게 되였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만나게 해줄것을 부탁했습니다.》

《그 사람이 이때까지 어데서 살았답니까?》

《미국에서 음악가생활을 하면서 살아왔더군요. 정말 미안합니다, 미리 마음속 준비를 시켜야 하는걸. 이젠 됐군요. 얼마나들 기쁘겠습니까.》

《···》

림진우는 볼근육이 솟도록 어금이를 지그시 앙다물며 주먹을 꽉 틀어쥐였다. 후안무치하고 뻔뻔스러운 인간. 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되려 미안하오. 그런데 부국장동무, 나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 리유에 대해서는 지금, 이제 이야기해주겠습니다. 아마 내 얘기를 그대로 전해주면 그 량반은 충분히 납득할것입니다.》

림진우는 이야기했다. 그는 감정을 누르느라 자주 말을 끊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난 일군은 한참이나 무거운 표정을 짓고 그린듯이 앉아있다가 뜨직뜨직 입을 열었다.

《음- 언제면 우리 민족은 이런 비극을 끝장내겠는지.

리해는 됩니다만 진우선생, 어쩌겠습니까. 상봉을 요청했을적에는 그도 생각이 여북 많았겠습니까. 저는 그저 선생이 다시한번 심중하게 생각해보고 결심해줄것을 권고합니다.》

그가 돌아간 뒤 림진우는 아무 일도 못하고 거의 한나절이나 번거로운 상념속에 들어있었다.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왔던 전상음의 뜻밖의 소식,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전상음이, 그러니까 자네가 나를 만나고싶단 말이지, 다름아닌 나를. 진우는 혼자소리로 중얼거리며 아래입술을 지그시 감쳐물었다. 걸음을 멈춘 그는 허리에 두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지나간 일들이 삽시에 떠오르며 전처럼 또다시 그를 못 견디게 괴롭히는것이였다.

전상음은 진우와 소꿉시절동무이기도 하고 성장해서는 같이 고생하면서 예술가의 길을 걸은 곡진한 벗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에 건너가 고구려무악을 전수하던중 음악이라는 외피를 쓰고 조선사람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한다는 죄명으로 경찰에 잡혀갔다가 모진 고문으로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도 시름시름 앓다가 두달후에 세상을 하직했고. 하여 진우네 부모들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여버린 상음의 신세가 하도 불쌍하여 동네어른들과 토론끝에 그를 집에 데려왔다.

그 시절 림진우네는 어렵게 살았다. 서울에서 물지게장사를 하며 근근히 생활을 유지하던 아버지가 어느 여름날 차사고로 돌아가자 생계의 무거운 짐은 어린 진우에게 지워졌다. 그때부터 진우는 서울거리를 누비며 물을 팔아 생활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진우, 늘 이렇게 살수야 없잖아?》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야?》

《〈속수지년〉이라구 우리 이젠 몸을 삼가하고 마음을 담을만 한 나이인데 노상 물만 져다팔며 아까운 날을 보낼거 있니? 어떤 뜻을 세우는가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는데.》

《그럼?》

《무엇이든 목표를 세우자꾸나. 난 아버지처럼 음악가가 되겠어.》

《아쟁을?》

《그건 싫어, 고리타분해서. 그게 뭐야? 비행기가 날고 자동차가 왕왕 다니는 시대에, 한옷을 입고 돗방석을 깔구앉아 곰팡내나는 굿가락타령이나 하고. 난 피아노연주가가 될테야.》

이것은 어느날 밤 지친 몸을 끌며 집으로 돌아오다가 상음이 불쑥 림진우에게 한 말이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궁중음악가였던 아버지에게서 교육을 받아서인지 유식했고 특히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있었다.

《그런데 넌?》

《나? 글쎄.》

《이것 봐, 진우. 넌 무용을 하는것이 좋겠어.》

《그건 뭘 보구 그러니?》

《전에 최승희무희의 흉내를 내는걸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넌 원래 힘이 세지 않니. 무용이란 예술감각하구 체력이 동반되여야 하거던.》

상음의 말은 사실이였다. 워낙 뼈대가 굵고 체집이 좋은데다 아버지를 잃은 후 생활전선에 뛰여든 림진우는 물지게장사를 해먹으려면 우선 신체가 튼튼해야 한다는것을 자각하고 매일 이악하게 몸단련을 하군 했다.

신새벽에 일어나 근처의 경북중학교까지 달리기를 하고나서 랭수마찰을 하였으며 평행봉, 철봉도 눈동냥으로 익혀두어 운동대에 올라서면 기계체조선수 못지 않을 정도로 능란하게 하군 했다. 어린 나이에 비해 체격은 또 어찌나 멋있었던지 한번은 단골집의 딸인 리화녀전학생이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에 비유하며 장문의 련애편지를 보내여 진우를 당황하게 만든적도 있었다.

《글쎄. 그런데 돈이 어데 있니?》

《우리 손으로 벌자꾸나, 물도 더 길어팔고,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우린 인생을 무지렁이처럼 살면 안돼. 뜻을 가지고 살아야 해.》

그리하여 그들은 그날부터 《뜻》을 가지고 살기 시작했다. 물지게도 곱으로 메였고 서울역에 나가 하역도 하였으며 때로는 행상군의 짐을 메다주러 백여리길을 걷기도 했다. 결과 전상음은 부민관의 피아노연주가에게서 개별교수를 받게 되였으며 진우는 누이동생 진애와 함께 개인이 운영하는 야간무용전습소에 다니게 되였다.

허나 그것은 불과 한두달, 세상은 그들이 자기의 《뜻》을 실현하게 놔두지 않았다. 돈때문이였다. 야간무용전습소의 비용은 그런대로 눅었지만 상음의 수업료가 엄청나게 높았다. 그래서 진우네 오누이는 다니던 무용전습소를 그만두었다. 차라리 셋이 벌어 한사람을 공부시키는것이 나았던것이였다.

그 어간에 무슨 일인들 겪어보지 못했으랴. 애면글면 일했으나 나날이 높아가는 수업료를 대지 못해 어느날엔가는 진애가 자기의 피를 팔아 보탠적도 있었다.

《진우, 진애, 정말 잊지 않겠어. 내 꼭 으뜸가는 피아노연주가가 되여 진우랑, 진애의 정을 꼭 갚겠어. 진애를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녀자로 만들어주겠어.》

그날 허탈로 자리에 누운 진애의 곁에 끓어앉아 오열에 어깨를 떨며 부르짖던 상음의 목소리는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그 일이 연고로 돼서인지 후에 그들사이에는 애정이 싹텄다. 전상음이 하숙집을 구해서 나간 이후 류다르게 오가는 그들사이를 진우가 눈치챘을 때에는 벌써 장래의 일까지 약속한 정도에 이르렀다. 나중에 진애는 전상음의 권고를 좇아 다시 다니던 무용전습소를 그만두고 조률공부를 하게 되였다.

혈연이상으로 그렇게 가까왔던 우리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한것은 과연 언제부터였던가. 8. 15해방이 되여서부터일것이다. 그때 그들은 각자가 하는 일들에 대하여 서로 비난의 감정을 품고있었다. 림진우가 미국인교수에게서 수강을 받으며 정치와 예술의 분리, 예술지상주의와 미국문화를 숭배하는 상음의 견해를 불쾌하게 여겼다면 전상음이는 《단독선거》반대투쟁을 비롯한 반미, 반리승만정치활동에 정력적으로 몸을 담그는 진우를 두고 비리성적인 예술가라고 힐난하였다.

한 인간의 진가를 알려면 고난앞에 세워보라는 말이 있다. 그뒤에 일어난 조국해방전쟁이야말로 매개 인간의 정치적신념만이 아니라 륜리도덕적진가를 가르는 무서운 시험장이였다.

1950년 여름 인민군대의 서울해방과 더불어 조직된 남조선문예총산하 무용가동맹 부위원장사업을 하던 림진우는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시작되자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으로 무어진 전선경비사령부협주단에 망라되라는 지시를 받고 맨나중에야 북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일행에는 물론 전상음이며 진애도 있었다. 순천근방에 이르러 본대오와 합류했을 때 그들은 그만 이 지역에 투하된 적항공륙전대와 조우하여 소조로 분산해서 행동하게 되였다.

이때 림진우가 속한 일행에서 행방불명자가 생겼는데 그는 다름아닌 전상음이였다. 비발치는 탄막속을 헤치며 일행이 그리도 찾고찾던 상음이, 살아서 곧 뒤따라올것이라고 믿어마지않았던 그가 며칠후 뜻밖에도 미군직승기를 타고 머리우를 떠돌 때 진우는 자기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공화국의 운명은 시간문제라면서 일행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대며 《자유세계》에로의 의거를 설교할 때 진우는 억이 막혀 그저 가슴만 쥐여뜯었다.

제 몸의 피까지 뽑아 수강료를 대준 사랑하는 처녀, 해산을 앞두고 굶주림과 병고에 쓰러져 담가에 실린채 사경에서 헤매는 안해를 버리고 일신의 안위를 위하여 도주한 상음의 비인간적인 행동에 분노를 금할수 없어서였다. 그리고 어두운 과거를 불문에 붙이고 재생의 길을 열어준 공화국을 배반한 전상음이라는 인간이 한없이 증오스러워서였다.

림진우는 그날 추격하는 적들과의 총격전에서 어깨와 복부에 부상을 당했다. 한주일이 지나서는 덕천으로 넘어가는 알일령고개밑에서 사랑하는 동생 진애가 숨을 거두었고.

운명직전에 림진애는 굳어져가는 납빛얼굴에 한줄기의 홍조를 간신히 피워올리며 상음이를 찾았다.

《식량 구하러 갔나보지요?》

뭐라고 대답해주랴.

《오빠, 상음씨에게 미안하다고, 부디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전해줘요. 그리고 이것도···》

림진우는 동생이 내미는것을 받아들었다. 천으로 지은 조률기주머니를 풀어보니 그속에는 쪼들쪼들하게 말라들어 새알만 해진 군감자 서너알과 한줌가량의 닦은 강냉이가 들어있었다. 남보다 곱은 먹어야 할 임신부인 제 몸은 생각하지 않고 늘 배고픔에 헐썩이는 상음이를 위하여 자기 몫에서 남겨모은것이리라. 아! 상음이, 너 이놈. 또다시 미칠듯 한 증오가 들뛰였다.

림진우는 진애의 뜬 눈을 감겨주면서 억울하게 요절한 사랑하는 누이동생의 명복을 빌기에 앞서 전상음에게 저주를 퍼부었으며 어느때든 만나면 용서치 않으리라는 독한 마음을 굳혔다.

전후에 림진우는 상음이로 하여 또 한번 크게 마음속 상처를 입었다. 나쁜 놈들이 진우를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 도주한 전상음이와 련관시켜 정치적으로 박해하였던것이다.

세월의 흐름은 강하다. 세월은 마치 강물처럼 쉬임없이 흘러가며 칼끝같이 세웠던 그 마음을 부단히 씻어내여 이제는 기억에도 삭막하게 만들어놓은것 같았다. 그러나 전상음이 여적 살아있었으며 오늘은 상봉까지 요청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그것은 다시 형체를 시퍼렇게 드러내며 림진우의 가슴을 못 견디게 괴롭히는것이였다.

내 혹시 지나친게 아닐가. 림진우는 걸음을 천천히 떼옮기며 자문자답을 해보았다. 그의 표현대로 상봉을 요청했을적에는 그가 몇십년전의 전상음이 아닐수도 있지 않는가. 하긴 그동안 무엇을 하며 살았고 어떤 모습을 하고있는지 한번 만나서 알고싶은 호기심 비슷한것이 들기도 했다.

아니, 진우는 소스라치며 자기를 다잡았다. 만난다는것은 상음이를 용서한다는것인데 아무리 세월이 흘러간들 그때문에 입은 정신육체적상처를 내가 어찌 잊을수 있단 말인가. 설혹 그가 달라졌다 해도 마찬가지일것이다. 그렇다 하여 오늘에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문득 승용차경적소리가 들려왔다. 몇걸음앞에 그의 승용차가 와 서있었다. 림진우는 차에서 내리는 운전사를 의아해서 바라보았다.

《아침 첫시간에 교예극장에 가자고 하셨길래 차를 준비해놓고 사무실에 가보니 총연출가동지가 안계셔서, 제 짐작이 맞았군요.》

아, 그렇지. 림진우는 머리를 끄덕이는것으로 그의 말을 긍정했다. 어떻게 할가. 승용차에 다가간 진우는 차문을 열다말고 망설이였다. 몇분동안 그러고있다가 종내 매듭을 짓지 못한 림진우는 자신없는 목소리로 운전사에게 일렀다.

《방향을 바꾸자구. 교예극장엔 나중에 들리기로 하고 국제전신전화국에 먼저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