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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혜영은 철건이 탄 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에도 한참이나 그린듯이 서있었다. 맥없는 걸음으로 너럭바위에 돌아온 혜영은 빨래감을 집어들었으나 좀처럼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박철건을 보자 잊어버리려고 덮어두었던 지난 일들이 하나둘 머리를 들고 되살아나고있었던것이다. 심혜영은 멍하니 앉아 그것을 더듬어보기 시작하였다.

눈내리는 미술박물관의 뒤도로에서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눈 이후 한주일이 멀다하게 잇닿는 박철건의 편지를 읽으면서 이성의 문을 두드리는 사나이의 열정을 느끼며 아릿한 행복감에 취해있던 처녀, 심혜영은 그 손기척을 들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문을 열어주려는 자기를 발견하고 어느날엔가 갑자기 질겁하여 펜을 놓아버렸다.

그들사이에 불같이 오가던 편지가 끊긴지도 석달이 퍼그나 지난 어느날, 이날도 밤늦게까지 강의안작성(그때 심혜영은 실습차로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한 농촌소학교에 나와있었다.)에 골몰하던 혜영은 누가 찾아왔다는 기별을 받고 밖을 나섰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키가 꺽두룩한 박철건이 온 얼굴에 내돋은 땀을 연신 훔치며 떡 버티고 서있었던것이다.

《아니, 여길 어떻게?!》

《독립임무수행중에 혜영이네가 여기 나와있다는것을 알고 찾아왔소.》

《!》

박철건은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단박에 들이대는것이였다.

《한마디면 돼, 나를 사랑하는가?》

《···》

《좋아.》

팔굽까지 소매를 걷어붙인 철건은 근육이 울근불근 드러난 팔을 쑥 앞으로 내밀었다.

《동무가 넣은 피를 몽땅 뽑아버리오.》

《?!》

《어서.》

박철건은 독수리처럼 사납게 눈을 굴리며 다그어댔다. 혜영은 가슴우에 두손을 모두어잡고 뒤걸음쳤다.

《철건동지!》

《못하겠단 말이지. 그럼 내가 하지.》

앞가슴에 메고있던 자동보총을 뒤로 제낀 박철건은 총창집에 손을 가져가며 이발을 앙다물었다. 순간 원인모를 인력에 떠밀려 나는듯이 뛰여든 심혜영은 드러내놓은 철건의 팔을 감싸잡았다.

《그러지 말아요.》

《놔, 이걸 놓지 못해? 뭐 우정관계로만, 동지관계로만 남아있자구? 난 잊어버리기로 결심했어. 잊자문 내 몸에 남아있는 혜영이걸 싹 뽑아버려야 해.》

《안돼요, 이러면 안돼요.》

《그럼 뭐야, 대답해.》

《난 사실, 전 사실 동지를.》

심혜영은 뒤의 말은 입속으로 뇌이다싶이했다. 그다음 온몸은 폭풍같은 힘에 휘감겨 안기였고 시큼한 땀내며 총부혁의 메마른 프로필렌냄새가 뒤섞인 거치른 숨결이 미쳐왔다. 머리우에서는 박철건의 환희에 찬 목소리가 먼 하늘에서처럼 들려왔다.

《그래야지, 이건 연분이야. 혜영이, 이 연분이 어제오늘 시작된건 아니야. 너의 피가 내 몸에 흘러든 그날부터 이미 맺어졌던거야. 그 무엇으로써도 사지 못할 고결한 마음, 그걸 가지고있는 혜영이를 내놓고 철건이 누구와 일생을 같이한단 말인가.

난 혜영이도 나를 사랑하고있다는걸 알고있었어. 다시말해봐, 크게. 심혜영이는 군인 박철건이를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그래요, 사랑해요. 철건동지의 고지식하고 순박한, 당의 위업을 한생 총대로 받들겠다는 동지의 지향에 전 감동되였어요. 혜영인 영원히 철건동지의 심장속에 남아 한생을 드팀없이 살도록 피를 더해주고 숨결을 더해주는 길동무가 되겠어요.》

그의 풀떡이는 가슴에 얼굴을 묻고 행복에 겨워있던 심혜영은 희열에 넘쳐 부르짖듯이 속삭였다.

그뒤에 이러저러한 기회를 통해 박철건은 혜영에게 미리 마음속 준비를 갖추게 하려고 그러는지 군관가족생활이 어떤것인가를 자주 말해주군 하였다. 특히 부대장으로 된 이후에는 편지때마다 그 내용을 강조하군 했다.

혜영인 손풍금도 노래도 잘하는데다 인정이 많아서 우리 병사들이랑 군관가족들이 좋아할거야. 기름튀기 잘하고 김치랑 맛있게 담그는거랑 솜씨를 보이오. 참, 앞으로 부대군인가족예술소조의 총지휘는 혜영이가 해야 할것 같애. 지금 참모장동지네 아주머니가 하는데 내 보기엔 영 아니야. 이러기도 했고.

꽤 견디여낼가, 군사훈련도 해야 하고 또 부대는 고정살림을 못하고 계속 이동하는데다가 돼지랑 염소를 길러야 해라고 걱정스러워하기도 했고. 철건은 그러다가도 끝은 노상 이렇게 맺군 하였다. 하지만 혜영인 이악하니까 마음 놔.

심혜영은 갑자기 밀려드는 련민의 아픔에 눈물이 솟구쳐나와 손등으로 두눈굽을 훔쳤다. 잊지 못할 지난 일을 더듬느라니 불쑥 박철건의 괴로와할 모습이 선했던것이다. 혜영은 종내 빨래를 다하지 못하고 일거리를 거두었다.

아동장출연자들이 거처하고있는 경기장 지하층의 널직하고 건조한 3호실에 들어서니 영아의 로할머니가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올해들어 여든일곱살인 할머니는 허리도 꼿꼿하고 걸음이 발랐으며 기력이 아주 좋아 백발의 머리칼만 아니라면 60대처럼 보였는데 아이들의 후원에 여간한 열성이 아니였다. 오늘도 할머니는 두부와 감자를 섞어 끓인 국을 두바께쯔나 들고나온 걸음이였다.

《힘든데 나오셨군요.》 심혜영은 빨래감이 든 바께쯔를 내려놓으며 로인에게 인사했다. 《영아가 세게 앓는다지요?》

귀가 약간 먹어 옆에서 크게 말해줘서야 내용을 알아차린 할머니는 다짜고짜 혜영이를 한켠으로 끌었다.

《앓는다네, 암, 세게 앓아. 여기가 아예 깨져버렸다니까.》

늙은이는 이러며 혜영의 허리아래부분을 툭툭 쳤다. 영아의 엉덩판이 또 어찌된 모양이였다.

《어제 집에 갈 땐 일없었는데요, 할머니.》

《아니, 밤부터 끙끙대더라니 물어보니까 깨졌대. 오늘 아침엔 근본 일어나앉지 못하구 와짝 열까지 나네.》

영아 할머니는 사실 증손녀에게 깜박 속고있었다. 어제 훈련을 하면서 강이가 잘못 다루어 떨어지는 바람에 전보다 크게 엉덩판을 바닥에 쪼아대여 어지간히 아픈것은 사실이였다. 그러나 영아가 아픔을 과장한데는 온 하루 강이의 어깨에 올라가 공기교를 해야 하는 다음날훈련에 참가하기가 싫어서였다. 하느라면 필경 못해서 두세번은 떨구겠는데 그걸 어떻게 당하겠는가. 그래서 영아는 어제 밤과 오늘 아침에 엄살을 부리며 집안에 하나밖에 없는 자기 《부하》인 로할머니를 들볶아대였던것이다.

《그래서 내 선생한테 이전부터 말하자는것이 있었는데 선생, 거 뭬라던가. 응, 옳지. 시험이겠다. 선생, 그 시험을 다시 쳐서 골라주지 않겠나?》

말뜻을 몰라 기웃거리는 심혜영의 거동을 보며 혀를 차던 할머니는 형용까지 해보이며 튕겨주었다.

《아, 거 있지 않나. 누가 이렇게 뚱뚱하구 힘이 세나 시험을 쳐서 우리 영아짝패를 골라달란 말일세. 원래애는 틀렸어. 암, 틀리구말구. 방아다리같은 몸집을 가지구 가을무우만 한 우리 애를 무슨 수로 들어? 어림없지, 안되네.》

그제야 사연을 알아차린 심혜영은 웃으며 늙은이를 안심시켰다.

《잘 알겠어요. 할머니, 앞으로 그런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난 그저 선생만 믿겠네.》

그래도 안심치 않은지 돋보기너머로 심혜영의 안색을 살피며 다짐을 두는 할머니였다.

오후에 혜영은 빵이며 사이다, 과일이 든 구럭을 들고 봉화산려관뒤거리에 있는 영아네 집을 찾아갔다.

《아이구 이런, 괜스레 아프단 말을 해놔서 바쁜걸음을 시켰구만.》

문을 열자 할머니가 수선을 떨며 반겨맞았다. 로인은 혜영의 손에서 구럭을 받아들며 방안에 대고 소리치는것이였다. 《이 애 영아야, 선생님이 오셨다. 얼뜬 나와 인사하렴.》

심혜영이에게 나부시 인사를 하던 영아는 뒤따라 강이가 들어오는것을 보자 혀를 빼쭉 내민다. 둘러보니 늦은점심을 하댔는지 까만 1인용 밥상에는 삶은 닭알이며 김치, 아직도 구미를 돋구며 김을 올리는 동태국과 찰밥이 거의나 손이 가지 않은채로 놓여있었다.

《글쎄 너무도 아파서 입맛을 통 젖혔다니. 아침도 안먹었는데 점심밥두 전혀 술질을 안하네.》

《누가 아파서 그러나, 몸이 계속 나니까 그러지. 할만 아무것두 모르면서 피.》

밥상을 한켠에 치우며 보를 씌우는 할머니에게 토달거리며 입나발을 부는 영아였다.

《에끼 이놈우 자식, 몸이 가을무이같이 부딩부딩해도 멕히면 그냥 먹어야 돼. 녀잔 코흘리개적하구 체네때를 내놓고는 몸낼 기회가 없어, 에그, 저게 내 말귀를 알아나듣겠는지. 그러니까 밤낮 오빠 좋은 노릇이나 하지.

쟤 오빠두 〈아리랑〉에 참가하는데 무슨 배경대라던지. 그것두 한창 클 때니까 먹새가 좋아서 제걸 먹구두 동생밥을 종종 거덜내군 하네.》

《에이, 씨.》

영아는 한바탕 로할머니에게 해보고싶었지만 심혜영이네가 있어 어쩌지 못하겠는지 속상해서 뚱뚱한 몸을 흔들어댔다.

혜영은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가볍게 웃었다. 증손녀를 마치 다 큰 딸처럼 대하는 로할머니의 말투가 우스웠다.

《영아랑 강이랑 오늘 이 자리에서 솔직히 말해봐요.》 병상태며 여러 이야기가 오고간 끝에 심혜영은 정색해서 자리를 고쳐앉았다.

《지금 동무들때문에 아동장훈련이 잘 안되여 선생님이랑 로할머닌 안타깝기만 해요. 동무들중 한 동무가 자리를 바꾸어야 훈련이 제대로 될수 있어요. 자, 말해봐요. 누가 양보하겠어요?》

어느 아이도 대답할념을 안하고 뿌루퉁해앉아있었다. 두 아이의 눈치를 번갈아보던 할머니가 하도 답답해나서인지 강이에게 먼저 은근한 목소리로 권고한다.

《강이는 꼬투리를 단 사내인데 아무래도 네가 속을 써야 할가부다.》

그러자 어린것은 깜실깜실한 얼굴을 도고하게 쳐들며 단마디로 내쏜다.

《싫어요.》

《에그 고집두, 꼭 하늘소 뒤발통 한가지로구나. 한데 넌 이렇게 몸이 약하지 않니.》

《씨, 선생님은 가만있는데 할머닌 왜 자꾸 날 보구 그러나요? 내 몸은 약하지 않아요.》

리강이는 어깨며 잔등을 쓸어주는 할머니의 손길이 싫은지 몸을 털면서 마뜩지 않게 내뱉았다. 이때까지 무슨 말을 하나 초조해서 강이만 쳐다보던 영아는 그만에야 실쭉해서 삑 돌아앉는다. 심혜영은 속상했다. 이 애들은 언제까지나 뻗댈셈인가. 도대체 영문을 모를 일이였다. 애들문제가 물망에 올랐을 때부터 진속을 알고싶어 물었지만 강이도 영아도 채워놓은 자물쇠 한가지였다.

《이제 영아에게 물어봐도 같을거예요. 선생님이 이자 말해줬지요? 누구든 양보를 해야 한다고. 그런데 왜들 말을 안 들어요? 강이부터 말해요. 왜 그래요?》

《···》

머리를 푹 수그리고있던 리강이는 심혜영이 자기를 지명하며 재촉하자 억울한듯 고개를 버쩍 쳐들고 혜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린것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였다. 강이는 울먹이며 웨치듯이 말했다.

《아버지장군님을 제일 가까운데서 뵙고싶어 그럽니다. 선생님, 난 다른 자리로 안 가겠습니다. 이제부턴 힘이랑 키워가지구 영아동무를 떨구지 않겠으니 다른 자리로 보내지 말아주십시오.》

《!》

무엇인가 후더운것이 훅 치밀어올랐다. 무엇을 더 말하랴. 어린것의 진심을 안담에야, 영아 로할머니도 감심이 되였는지 저고리동정을 들어 눈굽을 찍으며 중얼거리였다.

《에그, 요즘 애들속은 그저 어른 한가지라니까. 됐다, 됐어.》

 

해가 저물녘에야 영아네 집을 나선 심혜영은 강이의 손목을 잡고 봉화산려관으로 향했다. 혜영은 려관까지 가는 동안 줄곧 자책감에 싸여있었다.

사실 심혜영은 지금까지 강이를 그만하면 잘 돌봐왔다고 자인하고있었다. 정말 그렇지 않는가. 혜영은 어린것과 정을 두터이하려고 있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고향에서 자모들이 제 아이들을 만나러 후방물자를 가지고올 때면 애가 외로와할가봐 무척 왼심을 썼고 아프면 밤을 새워 머리맡에 앉아 정성껏 간호해주군 했다. 함께 할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기도 했으며 다심한 정을 기울여 다른 애들에게 짝지지 않게 철따라 새옷을 해주군 했다. 그 어간에 무슨 고생인들 안했으며 말을 듣지 않는 아이때문에 남몰래 돌아앉아 흘린 눈물은 또 얼마나 되였던가.

그 애바른 진정을 알아서인지 강이도 차츰 류다른 태도를 가지고 무슨 일이 조금만 생겨도 그에게 달려와 의지하군 했다.

멀었다. 혜영은 부끄러웠다. 아이를 육친의 정으로 돌봐주었다고 하여, 그래서 누구보다 남다르게 따른다고 해서 어머니가 되는것은 아닌것이다. 일찌기 부모를 잃어 조숙하지만 나이는 속일수 없는 철부지라고만 여겨왔던 강이. 이런 어린것의 가슴속에 이렇듯 깨끗한 정신세계가 간직되여있었다는것을 모르는 내가 어머니라는 세상 귀중한 이름, 그 귀중한 자격을 벌써 함부로 가질 생각을 하다니.

아낌없이 바쳐야 한다, 더 아낌없이. 그러자 심혜영의 뇌리에는 사랑하는 애인이 당하고있을 고충이 다시 생각되는것이였다. 철건동진 얼마나 괴로와할가. 이제라도 사실을 말해줄가.

아니야, 그러면 안돼. 그이는 보통 군관도 아니고 한개 부대를 당앞에 책임진 지휘관이며 그래서 가정에 신경을 쓰게 하지 말아야 할뿐더러 그 이상으로 사업을 적극 도와야 하는것이다. 그런데 부모없는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살겠다는것은 리기적이고 죄스러운 일이 아닌가. 사연을 알게 되면 워낙 인정이 많은 그이는 당장 받자 하겠지만 그러면 안된다. 나는 그이를 사랑한다. 하지만 정말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이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우리는 헤여져야 하는것이다.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 해··· 그러나··· 생각은 또 한고패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다.

철건동진 사연을 알기 전에는, 안다 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거야. 난 어쩜 좋담. 독하게 먹었던 결심이 흔들리는것을 종시 바로잡지 못한 심혜영은 번민을 단념하고 어린것의 온몸을 바싹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