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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열린 협의회가 끝나자 박철건은 군사대학동창생이 집으로 가자는 따뜻한 권고도 마다하고 바삐 청사를 나섰다.

《내리라구.》

박철건은 금시 떠날 준비를 하고 부르릉거리는 군용차앞에 다가가 운전사에게 일렀다. 그런 다음 운전석에 올라앉아 차문을 후려닫고는 영문을 몰라 눈만 떼꾼해있는 운전사에게 청사쪽을 손짓했다.

《작전부의 최문성중좌를 찾아가오. 내 말해놨으니까 그 사람네 집에 가서 식사를 하고 기다리라구.》

청사의 철문을 빠져나온 차는 전승광장 앞도로를 지나 10분가량 달려서 5월1일경기장에 도착하였다. 경기장을 에워싼 원형광장을 따라 차를 몰아가던 박철건은 3호 수문앞에 이르러 속도를 늦추며 차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아래우가 맞달린 새까만 운동복차림에 구명대를 멘 한무리의 아이들을 데리고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교양원을 보았던것이다.

《혜영선생은 저기 너럭바위에서 한창 애들 빨래를 하고있습니다.》

철건의 물음에 허리가 날씬하고 애티나보이는 그 교양원이 릉라도 북쪽끝을 가리키며 알려주었다. 변속기를 성급히 잡아당긴 박철건은 속도를 높여 차를 그리로 몰아갔다. 인차 앞시창너머로 눈에 익은 처녀의 자태가 나타났다. 심혜영은 흰 운동복바지에 역시 같은 색갈의 반팔샤쯔를 산듯이 받쳐입고 새하얀 손수건으로 머리를 꽁지고앉아 빨래질에 열중하고있었는데 그 모습은 물가에 핀 한떨기의 청초한 꽃같았다.

박철건은 속도를 죽이지 않은채 제동기를 꾹 밟았다. 유보도를 물어뜯는듯 한 마찰음이 호젓한 강반공기를 아츠럽게 째는 서슬에 어디선가 한무리의 새들이 일시에 화드득 풍겨날아오른다. 처녀도 깜짝 놀라 이쪽을 돌아보다가 빨래감을 손에 든채 엉거주춤 일어서는것이였다. 심혜영의 얼굴에는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박철건은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강반의 가까운 아래웃녘에 조개잡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 말하기가 불편스러웠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빨래들을 바께쯔에 담아들고 제잡담 앞서걸었다.

《날 따라오.》

박철건은 고가 높직하고 생김새가 투박한 차뒤에 이르자 바께쯔를 놓으며 처녀쪽으로 성급히 돌아섰다.

《왜 회답을 안해?》

《···》

《벌써 몇번째야.》

심혜영은 고개를 외로 틀며 박철건의 성난 얼굴을 외면했다.

《어서 말해, 이 박철건이를 기다리기가 힘들어졌는가, 아니면 대상자가 나섰는가. 사연을 똑똑히 알아야 할게 아니야.》

혜영은 천천히 고개를 바로 들었다. 처녀의 얼굴에는 애원하는듯 한 빛이 진하게 비끼였다.

《철건동지, 생활에선 때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말하지 말아야 할, 말하지 못할 경우가 있어요. 전 그걸.》

《좋아, 그럼 사연은 그 말하지 못할 경우인지에 밀어붙이자우. 난 한마디만 들으면 돼. 혜영인 이 박철건의 애인이 맞지?》

심혜영은 샤쯔단추를 채우며 눈을 내리깔았다.

《왜 대답을 못해, 왜.》

《···》

《그럼 남남인가?》

여전히 응대가 없었다.

《에익, 이걸 그저.》

박철건은 주먹을 들었다가 괜히 차체를 쾅 하고 후려갈겼다. 처녀는 움찔 놀라 몇걸음 뒤로 물러선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생각할수록 묘연하기만 하여 어처구니가 없었다. 씨근덕거리며 물면우에 드러난 바위부리를 한참 응시하던 그는 목단추를 끄르며 처녀쪽으로 돌아섰다.

《됐어, 말하지 않아도 돼. 그런다고 그 숱한 부대장병들의 속을 다 알아맞히는 이 박철건이 혜영이 진속 하나 알아내지 못할것 같애? 명심해. 더는 묻지 않겠는데 왜 잊어야 하는가 난 그걸 꼭 알아야겠어. 한달 시간을 주겠으니 그 어간에 진속을 밝히오. 만일 내 말을 어길 땐 진짜 용서치 않겠어. 알겠지?》

박철건은 여전히 침묵하고있는 심혜영을 한번 지릅떠보고는 차에 올랐다. 그때 처녀의 안타깝고 애바른 부름소리가 들렸다. 그러건말건 철건은 차를 움직여 혜영의 앞을 지나쳐버리였다.

《철건동지!》

후사경으로 그를 부르며 어푸러지듯 따라오는 심혜영의 모습이 보이다가 이내 사라진다.

 

취침구령이 울리고 잠자리에 드는 부산스러운 소음이 잦아들었다. 이내 병실 여기저기서 코고는 소리며 잠꼬대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침대 하단 맨끝에 자리를 정하고 누운 박철건은 아까부터 잠을 이루지 못해 뒤치락거리고있었다. 모포를 정수리까지 올려덮었으나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지며 생각은 처녀에게로만 달리는것이였다. 누군가가 가만히 흔들어서 박철건은 목밑으로 모포를 내리당겼다. 며칠전에 군단정치부에서 조직한 강습에 참가하러 떠난 정치위원이였다.

《아니, 이 밤중에 어떻게?》

《쉬- 》

정치위원은 목소리를 낮추라는 뜻으로 입앞에 손가락을 세워들었다.

《아까 오후에 끝나서 그길로 오는 걸음입니다. 한데 오늘부터 3중대에서 전사생활을 한다는걸 깜박 잊었댔군요. 글쎄 그런것도 모르고 온 부대를 찾아 돌아다녔다니까. 그래 어떻게 되였습니까?》

《잘되였습니다. 우리가 제출한 작전전술안이 그대로 통과되여 올해 우리 부대의 동기훈련에 도입하게 되였습니다.》

《그건 참모장동무에게서 들어 알고있습니다.》

《그럼 뭘 말입니까?》

《아, 거 이쪽문제 말입니다. 처녀를 만나보았습니까?》

《밑에서 아직도 자지 않구 말하는건 누구요?》

별안간 상층 구석쪽에서 잠에 취한, 그러나 엄격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이거 안되겠군. 어쩐다? 밖으로 나가지두 못하겠구.》

정치위원은 랑패한듯이 중얼거리였다. 박철건은 웃몸을 세워들고 옆자리를 더듬다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였다.

《여기 들어오십시오. 마침 부분대장이 신병접수를 가서 옆자리가 비였습니다.》

정치위원이 잠자리에 들어오자 둘은 말이 새여나가지 않게 모포를 눈섭우까지 올려덮었다.

박철건의 이야기를 듣고난 정치위원은 왜 그런지 어깨를 조금씩 들먹이였다.

《남은 심각해서 말하는데 왜 웃습니까?》

《용서치 않겠다고 을러멨다는 얘길 들으니 부대장동지가 마치두 철부지총각애같이 여겨져서 그럽니다. 정말 용서하지 않을 작정입니까?》

《그럼 어떡합니까, 방도는 없지. 그저 해본 소리인걸요. 한데 정치위원동지, 동진 저보다 썩 생활선배니까 이런걸 잘 알겁니다. 집의 아주머니하군 련애로 삽니까? 련애를 하면서 곡절이 없었습니까?》

《글쎄, 우린 소개로 사는데 뭐 별로. 하지만 사느라면 의견상이가 더러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동무가 모호한 태도를 취하드란 말이지요?》

《변했습니다, 틀림없이 달라졌습니다. 그 처녀는 내가 알고있는 심혜영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를 달라지게 만들었을가.》

《부대장동지는 여전히 사랑합니까? 처녀를 믿는가 말입니다.》

한참 있다가 정치위원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박철건은 저도 모르게 격해서 목소리가 높아지는것도 느끼지 못하였다.

《난 변함이 없습니다. 제 언젠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 몸엔 그 동무의 피가 흐른다고. 난 혜영이를 믿습니다.》

《허허, 병사들이 깨겠습니다.》 정치위원은 철건이 몸을 움직이는 통에 흘러내린 모포를 끄당겨 다심하게 여며주었다. 《그럼 됐습니다. 그 믿음이 중요한거지요. 처녀의 갑작스러운 태도를 미루어보아 터놓지 못할 곡진한 사연이 있는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가면 알게 되겠지요.》

《거 정치위원동진 여느땐 좋은 의견을 잘 주던데 오늘은 어떻게 된겁니까? 강건너 불보듯 하면서. 이게 뭐 순 사랑이 깨지구말구에 귀착된 문제입니까?》

박철건은 의외로 범상한 그의 태도에 불만을 터뜨렸다. 그래도 정치위원의 언행은 여전했다.

《알지요, 최고사령관동지께서 주신 명령을 수행하는 문제라는것을 말입니다. 좋은 생각은 후에 떠오른다는데 부대장동지, 그러니 그 문제는 그만 밀어두고 이젠 우리 눈을 붙입시다.》

정치위원의 진중한 권고에 철건은 더 입을 열지 못하고 모포를 뒤집어썼다. 박철건이보다 나이가 썩 우인 그는 철건을 부대장으로 깍듯이 대하면서도 생활에서는 빈구석이 있을세라 웅심깊게 세심히 봐주군 했다. 그래서인지 박철건은 가끔 그가 정치위원이라기보다 무던한 맏형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정치위원동지가 저렇게 나오는걸 보니 무슨 방도가 있는 모양이다. 그는 내심 자기를 위안하며 돌아누웠다. 눈을 감았으나 아까처럼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또다시 생각은 심혜영이에게 달리였고 처녀에 대한 원망이 부걱거리며 괴여오르는것이였다, 어쩌면 그가 그럴수 있는가.

박철건이 심혜영을 알게 된것은 그가 속한 련합부대가 한창 쌍방훈련을 진행하던 몇해전 겨울 어느날이였다. 그날 철건은 《적》종심깊이 침투한 특수구분대의 지휘를 인계받을데 대한 임무를 받게 되였다. 그가 탑승한 비행기는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였으나 철건은 뜻대로 락하하지 못하였다. 골짜기의 교차기류를 만나 왕청같은데로 떠밀려갔던것이다.

그 과정에 철건은 쀼죽쀼죽한 벼랑부리에 타박상을 입고 두다리가 골절되였으며 잔등에 박힌 예리한 돌쪼각때문에 상당한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고말았다. 그러던중 피끗 정신을 차린 그는 가까스로 지도를 꺼내여 현위치를 확정해보았다. 그가 누워있는 곳은 희천시 부성근방의 인적드문 청천강기슭이였다. 가물거리는 의식을 힘겹게 다잡은 박철건은 자동보총을 들어 허공중에 련발사격을 한 다음 다시 쓰러지고말았다. 후에 기억에 남은것은 방수포우에 누운 자기를 누군가가 끌고가고있으며 소란스러운 강물소리와 함께 이따금 후각에 미쳐오는 물비린내에 향긋한 머리비누냄새가 섞여있는것을 미루어 그가 녀성이라는것을 짐작했을따름이였다.

박철건은 이틀만에야 의식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눈을 떠보니 군병원 입원실이였다. 병원의사들이 루루이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하는 철건에게 진짜 은인이 누군가를 말해주었다.

이름은 심혜영, ××중학교 졸업반 학생. 방학이 되여 외할머니네 집에 놀러 왔던 처녀는 미역을 감으러 나왔다가 인사불성이 되여 강기슭에 쓰러져있는 철건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리진료소까지 홀몸으로 끌고왔는데 수술설비가 없어 후송하자고보니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도중에 불상사가 일어날수 있는 정황이 조성되였다. 이것을 알게 된 녀학생이 제 피를 뽑아 철건에게 넣어주었다고 하였다.

나이가 지숙해보이는 한 간병원녀인은 녀학생이 모르고 떨구고간 수첩까지 들려주는것이였다. 록색수지뚜껑을 한 수첩의 첫 갈피를 번지니 눈이 까맣고 량볼에 보조개가 옴폭 패여 아주 귀염상스럽게 생긴 애어린 처녀의 사진이 끼워져있었다. 박철건은 더운 숨을 내뿜으며 수첩을 가슴에 꽉 눌러붙였다. 내 언제든 꼭 만나서 인사를 하리라.

그후 철건은 외할머니를 통하여 그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집이 신의주에 있으며 중학교를 졸업하였다는것밖에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던중에 박철건은 김일성군사종합대학으로 가게 되여 대대인계준비를 하느라 거기에 관심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넓고도 좁은것이 세상이라더니 이것은 박철건이네의 경우를 념두에 둔것은 아닌지. 그는 지금도 자기와 혜영이 관계를 생각하면 이 말이 늘 떠오르군 한다. 그도 그럴것이 2년이 지난 겨울 어느 일요일, 미술박물관에서 그와 면바로 만나게 될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때 박철건이네 소대는 새 학년도 첫기훈련판정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3일간 표창휴가를 가게 되였다. 철건은 몇몇 동무들과 이전부터 별러오던 평양시구경을 하기로 작정하였다. 아침 일찌기 시내로 들어와 계획했던 대상들을 돌아보고 미술박물관에 도착한것은 오전 11시가 거의 될쯤해서였다. 고색이 짙은 력사화며 궁중회화작품이 전시된 1층을 돌아보고 2층에 올라간 그들은 한무리의 처녀들과 마주치게 되였다. 대학생처녀들이였다.

피가 뛰는 한창시절의 총각들인지라 박철건이네는 해설원의 지꿎은 눈총과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처녀들에게 집적거리며 동행하다싶이 그림을 보게 되였다.

《여 철건이, 이거 뗌뻬라화 맞지?》

전연군단에서 대대참모장을 하다가 온 최문성이 그의 팔소매를 끄당기였다.

《그런데 이 처녀동무들은 아니래. 어서 말해주라우. 동무네 모르지? 이 박철건동무로 말하면》

《가만있어.》

박철건은 팔을 꽉 잡아당겨 그의 헤픈 입을 제지시켰다. 그리고는 시선을 집중하였다. 그는 한 처녀를 유심히 뜯어보고있었다. 키가 자그마하고 귀염상스럽게 생긴 그 처녀는 일행의 화제에 끼우지 않고 조금 떨어져서 수첩에 무엇인가 열심히 적고있었다.

낯이 익다. 까만 눈, 인상적인 보조개. 어디서 보았던가. 뒤돌아선 철건은 품속에서 슬며시 수첩을 꺼내들고 사진이 있는 갈피를 번졌다. 순간 심장이 후두두 뛰였고 숨이 막히는듯 했다. 그 처녀다. 나의 생명을 구원해준 고마운 처녀 심혜영이. 그러니까 대학에 갔구나. 그는 북받치는 기쁨을 감추려고 얼굴을 돌리며 수첩을 덮었다.

《먼저들 가게.》

박물관을 돌아보고 밖으로 나왔을 때 철건은 그들에게 말했다.

《아니, 옥류관에서 국수를 먹으면서 오후일정을 짜자더니?》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그래. 리해해달라구.》

《정 이러긴가, 조직자가 빠지면 우린 어찌라는건가?》

《기껏해야 한시간 걸려. 인차 온다니까, 자 자.》

실뚱해있는 그들을 억지로 떠밀어보내고난 박철건은 반대켠으로 멀어져가는 녀대학생들쪽으로 걸음을 다우쳐갔다.

《저-》

일시에 고개를 돌리던 처녀들은 박철건의 눈길이 심혜영에게 가있는것을 띄여보자 서로 마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다.

《전 동무를 만나 할 얘기가 있습니다.》

《아는 사이니?》

심혜영의 옆구리를 툭 치며 곁의 처녀가 물었다. 혜영이 영문을 몰라 부정하자 례의 그 처녀가 한걸음 나서면서 보호자연하며 따지려드는것이였다.

《왜 그러십니까? 학생동지, 용건이 뭐인지 여기서 말하세요. 음- 이성문제 내놓고는 우리가 힘껏 도와드릴수 있어요.》

《이성문제? 젠장, 동무가 상관할건 하나도 없소.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말고 갈길이나 가란 말이요.》

박철건이 버럭 증을 내자 처녀는 실쭉해서 아래입술을 삐쭉 내민다.

《어마나, 큰소리는 왜 쳐요. 아니문 되는거지.》

그다음 제 동무들에게 뭐라고 속살거렸는지 처녀들은 일시에 웃음을 터뜨린다.

박철건은 처녀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혜영에게 다가갔다.

《저를 모르겠습니까?》

《?》

《2년전 청천강기슭에서 피투성이가 되여 쓰러져있던 한 륙전대군관을 구원해준 일이 있지요?》

《아!》

처녀는 수첩을 떨어뜨리며 불시에 터져나오는 탄성을 막으려는듯 두손을 입에 가져갔다.

《그럼 동지가 그때.》

《그렇습니다.》 허리를 굽혀 떨어진것을 주어든 철건은 심혜영에게 내밀었다. 《바로 제가 동무의 구원을 받고, 동무의 피를 수혈받고 소생한 륙전대원 박철건입니다. 지금은 김일성군사종합대학 학생이구요.》

《그런데 저를 어떻게 알고, 어떻게 알아보았습니까?》

《수첩을 떨구고 갔더군요. 그속엔 사진도 있었습니다.》

《그 수첩이 거기에··· 난 그런줄도 모르고.》

박철건은 처녀의 수첩을 꺼내들고 갈피를 펼쳐 사진을 뽑아내였다.

《내 동무를 찾느라 숱한 품을 들였댔습니다. 그렇게 훌 가버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자, 수첩을 받으십시오.》

《저, 사진도.》

《이건 제가 평생 간직하고있겠습니다.》

혜영은 긴 속눈섭을 들어올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 동무의 은혜를 어떻게 잊겠습니까. 혜영동무도 내 경우를 당하면 나처럼 행동하였을것입니다.》

《고맙습니다. 근데 그 사진은 하나밖에 없는 중학교 졸업반시절의 독사진이고 또···》

《애인이 아닌 사람이 가지고있는것이 싫다는거지요? 좋습니다. 그럼 가지고있다가 동무가 시집갈 때면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때 혜영동무의 남편이 될 그 사람에게 동무가 얼마나 훌륭한 녀성을 길동무로 택했는가 이걸 꼭 말해주겠습니다.》

처녀의 얼굴에 홍조가 발깃하게 피여올랐다.

눈내리는 잊지 못할 그날, 박철건은 대학기숙사까지 함께 걸으며 처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미역을 감다가 가까운 여울목에서 갑자기 련발로 터지는 총소리에 깜짝 놀랐다는것, 그래서 황황히 나오댔는데 자동보총을 안고 물가에 쓰러져있는 박철건을 발견했다는것, 끌고갈 때 무거워서 혼이 났다는것. 그때의 심정을 처녀가 털어놓자 박철건이도 스스럼없이 터놓았다, 의식이 가물거리는 속에서도 어떤 녀성일가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고 하였다. 회복된 다음 은인을 찾지 않는다고 전우들에게서 무던히도 타매를 받았다고 했다.

처음 만나다나니 오간 화제는 대체로 이러한것들이였으나 그때 그들은 자기들의 가슴속에서 이미 련정의 불길이 조용히 타오르기 시작했다는것을 썩 후에야 알게 되였다. 그런 심혜영이 어쩌면 갑자기 알쑹달쑹한 태도를 취하는것인가.

이 시각 철건은 이성문제는 자기가 다 아는것처럼 강진호에게 훈시질한것이 못내 후회되였다. 그보다 근심스러운것은 얼마전 최고사령관동지앞에서 올해중에 꼭 장가를 가겠다고 대답올린 그것이였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한숨을 꺼지게 내불었다. 이밤 잠들지 못하고있는 사람은 박철건부대장만이 아니였다. 정치위원도 그 문제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