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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이슥해지자 랭기가 짙게 배인 어둠을 밀어내며 기세좋게 타오르던 모닥불도 어느덧 기운을 잃고 사그라져가고있었다.

삭정이 몇개를 던져넣고 불을 돋군 전상음은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웠다. 이름모를 아늑한 기운이 스며들어 온몸은 취할듯 한 기분에 젖어든다. 탁탁 장작이 타는 소리며 따거운 불기운, 지글거리며 타는 씁쓸하면서도 아릿한 송진냄새, 눈에 바라보이는 저기 검푸른 하늘, 거기에 걸려있는 크고 푸르스름한 달을 이따금씩 가리며 천천히 흘러가는 희벗한 그름더미들.

이것은 거의 수개월이나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를 괴롭히던 어수선한 주위의 모든것을 밀어내며 부드러운 안정과 무아경같은 세계만이 가득찼던 지난날을 불러일으키는것이였다.

음악의 첫걸음을 떼던 그때, 코뢰 분겐의 단조로운 선률음을 따라부르며 그속에 내재되여있는 야릇한 깊이를 감수하자 몸을 떨려 행복에 취해있던 소년시절, 파고들수록 미궁같이 갈래와 깊이를 알수 없는 음악세계여서 그앞에 막연함만 체험하던 사춘기시절, 청년시절의 첫걸음을 박력있게 내짚은 해방3주년 기념파티. 나는 그때 누구도 느껴보지 못한 커다란 쾌감에 싸여있었다.

이 상음의 연주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던 외국인들과 서울시민들의 흥분에 찬 모습을 보며 나는 드디여 인류공동의 언어로 말할줄 알게 되였구나, 음악이야말로 얼마나 위대한 언어인가 해서였다.

전상음은 마른침을 힘겹게 넘기며 팔베개를 풀지 않은채 한켠으로 돌아누웠다. 그런 내가, 장래에는 서울바닥이 아니라 세계의 한복판에 우뚝 서서 인류의 언어로 나의 세계를 마음껏 읊조리리라고 결심품었던 이 상음이는 지금 도대체 어떻게 하고있으며 어디로 가는것인가.

봉건왕조말기의 몰락한 량반가문에서 태여난 전상음은 어려서부터 궁중예술을 주관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서인지 음악예술에 대한 감수성이 남달리 민감했다. 그래서 상음은 전씨가문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온 집안이 그를 장래가 촉망되는 음악신동으로 여기고있었다. 허나 나이는 어쩔수가 없는지 그 시절 전상음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엄격한 음악교육보다도 장난에 정신이 더 쏠려있었다.

워낙 동갑이또래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체통에 승벽심이 강한 성격이여서 벌리는 장난 또한 여간 세차지 않았다. 동네아이들을 데리고 남의 집 참외밭을 결딴내지 않는가 하면 돌팔매싸움끝에 이웃동네 애들의 머리를 터쳐놓아 동네끼리 어른싸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여하튼 그때문에 집안사람들은 한시도 마음을 편히 가져보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그날도 놀음에 흠뻑 젖어 돌아가던 전상음은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하녀의 손에 이끌려 여느때없이 집에 일찍 들어섰다.

《게 앉거라.》

지은 죄가 있는지라 방안에 들어서며 구석에 늘쌍 세워져있는 회초리단을 힐끔거리며 보던 상음은 전에없이 엄한 아버지의 목소리에 그만 기가 질려 어깨를 움츠리였다.

《너 거문고줄은 왜 벗겼니. 벗겨가지고는 뭘 했느냐?》

아버지는 앞에 놓인 줄이 모두 없는 거문고를 가리켰다.

《어서 말하지 못할가.》

《투석놀이를 할 때 쓸 돌구럭을 만들려구.》

《네 지금 나이가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다. 상음아, 이 아버지에게 오늘 네 속을 어디 툭 터놓고 말해보거라. 너는 장차 뭘할 결심이냐?》

잠시후 아버지는 상음에게 말을 건네왔다.

《군대라? 흠- 무장이 되고싶단 말이지.》

《···》

《우리 바람이나 한숨 쐬자꾸나. 어서 일어나거라.》

가타부타 표현없이 그저 이렇게 되뇌이던 아버지는 움쭉 몸을 일으키며 밖을 가리키였다.

황혼이 짙게 깔린 봄날의 그 저녁, 전상음은 아버지와 함께 후원숲속을 오래동안 거닐며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아버지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자고로 이 나라의 력사는 때로 풍파를 겪어 이 동네앞 내물처럼 흐르기도 했고 사토속에 잦아드는 물줄기처럼 끊겨질번도 했지만 단군에 발원지를 둔 천운의 덕을 입어 도도창창한 대하처럼 자기를 잃지 않고 흘러왔다. 그런데 단군의 이름으로 존귀한 이 력사가 지금 어떤 치욕을 당하고있느냐. 수많은 명군주, 용인맹장, 순국지사들의 애국충정에 받들려 배짱 세게 흘러온 이 나라의 력사가 오늘 어느 지경에 이르렀느냐 말이다.

근년간만 살펴보아도 일국의 국모가 청청백야에 한갖 무뢰배에 불과한 사무라이들에게 시해당하지 않았는가 하면 머리통에 청관자, 홍관자를 두른 대신이라는자들은 속사포소리에 얼이 나가 나라를 다담상에 받쳐 통채로 팔아버리고도 눈섭 하나 까딱않고···

바야흐로 민족의 운명은 풍전등화인데 사처에 창궐하는것은 역적무리들뿐이요, 간신배들뿐이니 이 얼마나 통곡스럽고 가슴터지는노릇이냐.》

《···》

《지금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건지려고 독립항전의 기치를 든 애국의사들이 여기저기서 출몰하는가 하면 저기 대륙과 아라사에선 무슨 공산주의라는것이 흘러들어 폭력쟁전을 선동한다든데 형국이 참 이상하게 번져가고있다. 왜놈들과 싸울 대신 총대를 휘둘러 불쌍한 동포들에게서 돈이나 옭아내고 흑하에서처럼 같은 동포끼리 서로 죽일내기를 하고.

이제 그네들은 제절로 쇠락할거다. 단합의 저력이 없는데다가 성정이 모두 이지러지고 씨가 안먹었기때문이지.

무릇 어느 민족이든 강세와 렬세의 차이는 정신의 청초함에 달려있다. 민족정신이 정하고 깨끗하면 강세를 이룩하는것이고 반대로 무지하고 둔학스러우면 쇠하고만다. 목하정세에서 나라가 힘을 키워 독립을 자초하자면 폭력항전보다도 민족의 정신을 부활계몽시키는것이 선차이다. 말하자면 학도는 공부를 잘하여 조선의 이름을 만방에 떨치고 장공인은 세계으뜸의 상품을 만들어내고 이렇게 매 사람이 제 몫을 다하여 나라를 개명시켜야 일본과 대등한 위치에서 독립을 론할수 있다. 악이 악을 낳는 폭력으로는 절대로 독립을 성취할수 없다.

상음아, 허망한 꿈에 기대를 가지지 말거라. 너는 꼭 음악을 공부해야 한다. 앞으로도 같다. 일체 속세의 쟁론에 현혹되거나 귀를 기울이지 말고 음악을 꾸준히 전수하느라면 장차 너의 재능 하나만 가지고도 너의 명예뿐이 아니라 민족에게 영광과 자신심을 가져다줄수 있다.》

그 저녁에 다는 리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날부터 아버지의 말은 이상한 견인력을 가지고 그를 돌려세웠으며 미지의 음악세계를 파고들수록, 나날이 성장하며 주위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투영해볼수록 아버지의 말이 옳다는것을 시시각각 체험하게 되였다.

3. 1인민봉기나 6. 10만세시위를 놓고봐도 본의든 아니든 여하간에 민족사에 애꿎은 민중의 피가 흐르는것으로 끝나지 않았는가. 아버지의 말씀은 지극히 정당하다. 난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재능을 련마해서 꼭 빛을 보고야말테다. 그래서 나라의 영광을 떨치고 상처입은 민족의 마음을 화목과 안정의 멜로디로 위안해주리라.

전상음의 이 결심은 곧 실천에 옮겨졌으며 해방후에 만난 미국 시카고교향악단의 전속지휘자이며 스탠포드대학의 예술학교수인 캐써린 헤밀톤에 의하여 더욱 확고부동한것으로 굳어져갔다.

《당신은 동양인치고 보기 드문 재능을 소유한 사람이요. 그러나 시야는 작소. 협소합니다. 예술가는 마땅히 민족이 아니라 전인류를 위하여 복무해야 하오. 나와 함께 미국으로 갑시다. 가서 보면 알게 될것이요, 민족주의와 범인류적인것과의 차이를. 민족주의가 예술가의 재능과 자유를 얼마나 속박하는가를 말이요.》

이것은 캐써린교수와 사제지간이 된 후 어떤 자리에서 한담을 나누다가 상음의 음악철학을 듣고난 그가 저으기 불만스러워하며 털어놓은 말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상음은 헤밀톤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생활한 다섯달, 이 기간에 상음은 미국각지를 다니면서 아메리카대륙의 신흥음악사조와 서유럽의 음악에 완전히 심취되여버렸다. 결과 종래의 견해로부터 완전히 전향하여 헤밀톤의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였고.

미국려행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전상음은 배가의 노력을 기울여 재능을 련마하였다. 원래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서인지 인차 상음의 존재는 서울의 음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헤밀톤의 도움을 받아 진행한 해방3주년 기념공연에서의 성공적인 초연은 예술가로서의 그의 장래를 믿음직하게 담보해주었다. 전상음이자신도 앞으로의 더 큰 성공에 대하여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운명은 참으로 가혹하게 변해버리였다. 전쟁은 전상음의 온갖 화려한 꿈과 믿음을 하루아침에 뒤집어놓았던것이다.

아니다, 상음은 끙 하고 바로 누우며 입밖으로 부르짖었다. 비록 전쟁이 일어났다 해도 나의 앞길은 여전히 순조로울수 있었다. 캐써린을 따라 미국으로 가버리면 그만이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미국으로 가자고 권고하는 그의 편지를 받고도 북으로 가는 걸음을 선택했다. 왜 그랬을가. 외면할수 없는 진우나 진애의 극진한 설복? 아니면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공화국의 민중정책? 그럼 이것이 나의 운명의 순리를 뒤집어놓은 원인이였단 말인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어. 허나 명백한것은 더는 인위적인 운명에 순종하면 안된다는것이다. ···

《아직 눈을 붙이지 않으셨군요?》

귀익은 목소리에 전상음은 상념에서 깨여났다. 림진애였다. 그 녀자는 손에 든 장작단을 내려놓고나서 사그라져가는 모닥불을 손질하는것이였다.

《퍽 늦었구만. 진선생의 병이 아주 중해졌나보지?》

서울을 떠나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 대렬속에 부상자가 더러 생겨서 진애는 2명의 녀성과 교대로 저녁마다 그들을 돌보군 했다.

《진선생은 일없어요. 오던 길에 애한테 들리다나니.》

《그 앤 좀 어때?》

《첨엔 울기만 하면서 전혀 곁을 안 주던 애가 죽을 받아먹는걸 보니 마음이 안정되는것 같아요. 한데 애가 무서움을 타는건 여전해요. 어디서 바스락소리만 나도 깜짝깜짝 놀라겠지요. 그때 애의 눈빛을 보면 도무지 어린애같지 않아요.》

《그 나이에 끔찍한 참변을 직접 목격했으니 자률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그럴거야. 피여났다니 됐구만. 애를 안구올 땐 다들 걱정했는데···

진애, 이젠 너무 자길 혹사하지 말어. 홀몸도 아니잖아. 그러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 힘들어하는데 진애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겠어.》

《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다들 도와주니 오히려 미안하기만 해요, 상음씨.》

진애는 언뜻 생각이 나는지 이렇게 불러놓고는 품속을 뒤적이는것이였다.

《자, 어서 들어요. 배고프지요?》

얼결에 진애가 내민것을 받아든 전상음은 불현듯 코끝이 시큰해났다. 아이주먹보다 조금 큰 두알의 군감자. 이건 필경 진애의 저녁밥이였으리라. 원래 한알씩 차례졌는데 진애는 임신부여서 한알을 더 줬을것이다.

《매번 이러면 진애는 어떻게 해?》

정말 그랬다. 체집이 커서 남보다 더 배고픔에 헐썩거리는 상음에게 진애는 종종 자기의것을 남겨두었다가 주군 했다. 림진애는 상음이 내미는것을 밀막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까 영자언니가 뭘 좀 줘서 난 일없어요. 어서 들어요.》

···쉬임없이 홀러가던 구름더미들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별들이 무수히 빛나는 검푸른 대공에는 크고 아름다운 달만이 그린듯이 까딱않고 걸려있었다. 숲속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름모를 밤새의 울음소리며 또다시 기분좋게 탁탁 튀며 타오르는 모닥불만 아니였다면 삼라만상은 태고의 적막속에 깊이 잠들어있는듯싶었다.

아! 좋은 밤이다! 전쟁만 아니라면 얼마나 쾌적한 밤인가! 전상음은 자기의 팔을 베고 누운 진애를 애정에 넘쳐 바싹 끌어안았다,

《이것봐, 진애. 자?》

《아네요.》

《무슨 말이든 해. 어쩐지 이밤을 그저 보내기는 싫구만.》

무슨 이야긴들 안했겠는가. 둘은 서로 다정하게 화제를 이어가며 지나간 일들을 회상하였다. 전상음은 진주만에서의 일본의 대승리를 경축하는 음악회때 림진애를 겁탈하려 했던 일본군해병대장교를 때려눕히고 자기가 류치장에 갇히자 상음이 죽으면 뒤를 따르려 했다는 진애의 말을 듣고서는 끝없는 행복감에 도취되였었다.

부지중 림진애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그래?》

그 녀자는 말없이 상음의 손을 끄당겨 자기의 배에 가져다댔다. 무엇인가 꿋꿋한것이 푸들거리는 느낌이 손바닥에 마쳐온다.

《애가 노는것 같애.》

《그래요. 해산달이 돼오니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이래요. 빨리 나오고싶어 그러는가봐요.》

《!》

《상음씨.》

그 녀자는 전상음의 뺨에 더운 입김을 내불며 속살거렸다.

《인츰 아버지가 되겠는데 뭘 바라죠? 아들? 딸?》

《아무거면 뭐래. 어떻게 키우는가에 달려있지.》

《그래도 남자들은 아들을 더 바란다면서요.》

《글쎄, 그렇긴 한데.》

《봐요. 호- 이러다 딸이라도 낳으문 어쩌나.》

《허튼 걱정.》

그는 림진애의 길동그란 귀를 아프지 않게 당겨주었다.

《딸이문 어쨌다는거야? 아들맞잡이루 귀하게 키워내면 되는거지.》

《그럼 앞으로 뭘 시킬 생각이예요?》

상음의 꺼칠한 볼부위를 장난삼아 매만지며 잠시 말이 없던 진애는 한발 더 들어갔다.

《제 외삼촌이나 엄마가 열광적인 련공분자들이니 애가 태여나면 마르쿠스의 제자로 키워야지. 참, 도이췰란드에 류학보내는게 어때? 그럼 나중엔 맆크네히트나 로자 또는 제트낀 클라라가 될수 있거던.》

《응- 롱담 그만해요.》

림진애는 응석을 부리는것처럼 몸을 흔들며 그의 볼을 꼬집어주었다. 전상음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크게 웃어댔다. 오래간만에 시름놓고 웃어보는 그였다. 어찌나 오래 들먹거려댔는지 배가 막 아파났다.

《그만 웃어요. 자, 이젠 대답해요. 롱담 말구, 어서요.》

림진애는 상음의 품에 바싹 다가붙으며 지꿎게 바른대답을 요구했다.

《진애, 우리 애는 아버지처럼 아니, 아버지의 키를 릉가하는 대예술가가 되여야 해. 그렇지?》

말없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긍정하는 진애였다.

그 녀자는 행복에 겨워 이제 태여날 아이를 큰 예술가로 키우자면 어머니의 교육이 자못 중요하다는것을 력설하는것이였다.

《상음씨의 뜻대로 애를 키우자면 조기교육을 잘 줘야 해요. 그건 아마 내 몫일거예요. 이태리에서는 아이들의 음악적감수성을 높여주려고 태아때부터 라 음을 들려주고 음악감상도 시킨다지요? 애를 낳으면 난 태아적에 못한것까지 합해서 조기교육을 해주겠어요. 단음청음부터 9화음계렬까지. 참, 화성문제풀이법까지는 아무래도 내가 맡아야겠군요.》

《진애가 그래주면야 아이의 발전속도가 한결 빨라질거야. 원체 아이의 지능지수는 어머니의 두뇌, 어머니의 교육과 상당하게 련관되여 있으니까.》

《한데 산통이 언제 올가. 순조롭게 해산했으면 좋겠는데.》

시종 화기연연하게 흘러오던 화제는 갑자기 여기서 뚝 끊기였다. 둘다 침묵속에 밤하늘만 시름겹게 쳐다보았다. 전상음은 화제를 이으려고 부러 애쓰고싶지 않았다. 진애가 무척 근심스럽게 말끝을 흐리자 엄혹하고 랭랭한 현실이 자각되며 기분이 침울해났던것이다. 진애도 마찬가지일것이다.

《진애, 진애는 내 안해지?》

한동안 지나서 전상음이 먼저 입을 뗐다. 그는 의아해하는 그 녀자의 눈길을 피했다.

《그럼 내 의견을 들어봐. 진애가 해산을 순조롭게 하기 위해서도 그래 우리 얼마간 마을에 내려가있으면서 대세를 관망해보는게 어때? 지금처럼 어수선한 형국에 이런 길을 계속 가다가는 어른도 아이도 객귀가 되고말아. 우리에게 먹을것이 있나, 이 마가을날씨에 몸을 감쌀 변변한 옷가지가 있길 하나.》

《순천에 가면 퍽 나아질거예요. 오빠말이 거기에 기본대오가 있대요.》

《순천이 뭐 이웃동넨가. 글쎄 한 백리걸음쯤 된다니까 멀지야 않지. 하지만 거기라고 편안할것 같애? 이 깊은 산속까지 들어와 마을을 도륙 낸 〈국군〉이 순천에 벌써 당도하지 않았다고 장담할수 있어? 우린 산길을 타지만 그들은 트럭을 타고 대도로로 가고있잖아. 순천에 기본대오가 있다고 해도 같지. 진우군의 말을 들으면 거기서 또 만포까지 가야 한다는데 진애나 내겐 이게 얼마나 황당한노릇인가 말이야.》

《상음씨, 여기까지 고생하며 끝내 왔는데 이제 와서 왜 그래요? 곁에 영자언니랑 옥순아주머니가 있기때문에 해산하는건 그리 힘들지 않을거예요. 조금만 참자요, 네?》

《그렇게는 못해.》

전상음은 팔을 빼며 벌떡 일어나앉았다. 그 서슬에 진애도 따라일어났다.

《난 진우군이나 진애와는 달리 공산북에 아무런 사상적공감이나 생활적미련이 없는 사람이야. 한데 이 상음이 왜 북으로 가는 길에 올랐는가. 오직 사랑과 우정때문이야. 이런 내가 어째서 제 처가 당장 해산이 림박하게 된걸 보구 그냥 속수무책으로 보고있기만 하겠어.》

전상음은 그 녀자의 두어깨를 꽉 틀어잡으며 진애의 눈가까이로 제얼굴을 바투 가져다댔다.

《진애, 넌 내 안해야. 그러니 무조건 나를 따라야 해. 내 당장 진우군을 만나서 리해시키겠으니 래일 나와 산을 내리자구. 알겠지?》

림진애는 대답대신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안된다구? 어째서.》

《오빠가 승인할리 만무하겠지만 나도 량심에 꺼리껴서 차마 그렇게는. 다들 험한 고생을 하면서두 우릴 위해주느라고···》

《뭐라구? 량심?》

전상음은 그 녀자의 어깨를 밀치다싶이 놓으며 신음소리를 뿜었다.

《아예 조직규률이라고 표현하지, 조직규률이라고. 으음- 그러니까 그 알량한 이데올로기가 제 남편이나 아이보다 더 중하단 말이지.》

《상음씨, 난.》

《그만해.》

흑- 하는 흐느낌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진애가 두손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먹이고있었다. 마음이 약해지며 한숨이 나갔다. 전상음은 진애를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그 녀자의 어깨에 한손을 얹으며 우울하게 뇌이였다.

《됐어, 진정해, 진정하라니까. 가야지 뭐, 눈 먼 장님처럼 진우군의 손에 이끌려 진애의 손을 꼭 잡구.》

허나 전상음은 끝내 북행길을 가지 못하였다. 가지 않았다고 표현해야 정확할것이다. 순천근방에서 적항공륙전대의 습격을 받아 일행이 뿔뿔이 흩어졌을 때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가 체포된 전상음은 그것을 기회로 여기고 북으로 들어가는 걸음을 포기해버렸던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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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나는 그때 오직 자기만을 위하여 친구며 안해도 자식도 버리고 가버렸었다. 이런 내가 이제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만나며 설사 만난다 해도 그네들이 어떻게 나를 용서할수 있겠는가.

어둠이 내리덮이는 창가에 서서 오래동안 괴로움에 잠겨있던 전상음은 문기척소리가 나자 그리로 몸을 돌리였다. 문가에는 새하얀 반팔샤쯔에 까만 나비넥타이를 맨 중년의 주택관리인이 서있었다.

《선생님, 〈대한민국〉 국정원에서 손님 한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내 전에 그 사람이 오면 돌려보내라고 하지 않았소?》

《선생님의 말씀을 전달했습니다마는 그래도 꼭 만나뵈워야겠다고 합니다. 긴히 중대한 문제를 상의할것이 있다고 합니다.》

《중대한 일?》

전상음은 입가에 엷은 조소를 띄우며 되받았다. 분명히 2002년 6월 서울에서 개최하는 월드컵경기대회 개페막음악작품의뢰때문에 왔을것이다.

《가서 말하시오, 무슨 일이든 이 상음이는 만나고싶지 않아한다고.》

《예, 알겠습니다.》

관리인은 머리를 굽석하고나서 금박으로 화려하게 테를 두른 편지봉투같은것을 내밀었다.

《이건 캐써린 헤밀톤씨의 부인이 보내온것인데 선생님이 수락하시면 알려달라고 전해왔습니다.》

그것은 래달에 열리게 될 캐써린을 추억하는 음악회초청장이였다.

《참가하겠단다고 알려주시오.》

전상음은 초청장을 받아 펼쳐보고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