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9

 

제 5 장

9

 

승강대의 손잡이를 잡고오던 장년의 사나이는 렬차가 채 멎기도전에 홈에 내려섰다. 영림땅을 한시바삐 밟아보고싶은 심정이 간절하여서 이 시각을 무척 기다려온듯싶었다. 틀진 체구에 눈매가 부리부리한 그의 얼굴에는 감회의 빛이 짙었다. 뒤따라 내린 다른 손님들은 나들문으로 빠지려고 역사쪽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는 홈에 멈춰선채 움직일줄을 몰랐다. 추억의 자취를 더듬는듯 사위를 유정한 눈길로 둘러보고있었다.

그는 바로 한해전에 이 역을 떠나갔던 황석태였다. 제련소의 모든 종업원들과 금속공학연구소의 학자들에게 마음의 용서를 빌며 떠나갔던 그밤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던것이다. 뼈저린 자책과 후회속에 남몰래 떠나갔던 그를 이 역두에서 바래준것은 안해와 제련소 지배인뿐이였다. 서글픈 애수와 고독감이 소리없이 스며드는 가슴을 움켜쥐고 전기로의 화광이 하늘을 물들이는 제련소쪽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며 렬차에 오른 그밤에는 영원한 리별처럼 생각되였다. 그러나 생활의 흐름은 그를 또다시 이 도시에 떠밀어주었다. 그는 작별의 순간에 그러했던것처럼 상봉의 지금에도 제련소건물들의 지붕이 멀리 보이는 시내복판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저물어가는 석양이 시내의 상공에 아낌없이 여광을 뿌려주었다. 그 빛에 녹아버린듯 전기로의 화광은 작별의 그밤처럼 선명히 보이지 않았다. 그대신 굴뚝과 로들에서 뿜어올리는 연기와 증기가 구름처럼 창공에 날리였다. 로들에서 울리는 동음도 은은히 들려왔다. 사랑하는 노래의 선률처럼 무척도 귀에 익고 가슴에 정다운 창조의 음향이였다.

《손님, 나오십시오.》

나들문에서 차표를 받던 안내원처녀의 목소리였다. 번쩍 정신이 들어 돌아보니 마지막손님마저 나들문으로 나간 뒤였다. 황석태는 땅우에 놓았던 가방을 들고 출구로 향했다. 그는 처녀에게 차표를 주면서 공손히 사과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그 순간 처녀의 걀쑴한 얼굴에 놀라는듯 한 기색이 얼핏 스치였다. 황석태는 나들문을 지나 층계를 내려섰다.

《그전 당비서가 아니야?》

《그 사람이 옳소.》

등뒤에서 속삭임소리가 들리였다. 묻는것은 처녀의 목소리였고 대답하는것은 청년의 목소리였다. 청년은 손에 기발을 들고 역구내에서 나오던 젊은 철도역원일것이다.

《그런줄 알았으면 인사라도 드릴걸··· 오히려.》

《인사는 무슨 인사!》

《우리 아버지가 그러는데 로동자들을 위해서는 일을 많이 하셨대.···》

처녀는 무슨 말인가를 이어가는듯 했으나 거리가 멀어져서 더는 들리지 않았다.

황석태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고싶었으나 못 들은척 하고 내처 걸었다. 얼굴을 가리우려고 밀짚모자를 깊숙이 내려썼다. 자기는 적지 않은 사람들의 얼굴을 모르지만 그들은 여러해동안 제련소 당비서로 일하였던 자기를 알아볼것이다. 그들중에는 처녀의 아버지처럼 옛 당비서에게 좋은 인상을 품은 사람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앞에 얼굴을 드러내기가 부끄러웠다. 머리를 숙이고 길옆으로 비켜서서 시내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낮동안 쏟아지던 해볕이 설피여지자 선선한 느낌이 들었다. 선기가 내리기 시작한 초가을이였다. 황석태는 눈길을 들어 저 멀리 하늘가를 바라보았다. 서켠에 기운 해는 지평선끝에 산봉우리처럼 솟아오른 구름장변두리를 감빛으로 물들이며 그속으로 잠겨들고있었다.

제련소에 이른 황석태는 지배인을 찾아갔다. 퇴근시간이 지났으나 류명식은 자기 사무실에 있었다.

《아니, 이게 누굽니까?》

뒤짐을 지고 무슨 생각에 잠겨 창밖을 바라보던 지배인은 방안에 들어서는 황석태를 알아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낮동안 쉴새없이 찾아오는 사람들과 번거로운 일에 시달리던 그가 잠간이나마 숨을 돌리는 때인듯싶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황석태는 밀짚모자를 얼른 벗어들고 마주 걸어오는 지배인의 손을 잡았다.

《그래, 언제 왔습니까?》

《지금 오는길입니다. 영림땅에 들어서니 다른 사람들한테는 얼굴을 드러내기 무엇해서 직방 지배인동무부터 찾아왔습니다.》

황석태는 진정을 말했다. 함께 일을 할 때에는 류명식과 의견대립도 많았지만 헤여진 후로는 제련소사람들을 생각할 때마다 먼저 떠오르던 지배인이였다.

《자, 저기 앉읍시다.》

황석태는 류명식이 이끄는대로 창가옆 쏘파에 앉았다. 그는 옆에 앉은 류명식의 모습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살갗이 윤택한 얼굴에 반가운 미소를 담고있는 류명식은 여전히 건강한듯싶었다. 그는 닫긴깃양복을 입고있었는데 황석태에게는 그 차림도 무척 눈익은것이였다. 여러해전부터 선기가 내리기 시작하면 그 양복을 입군 했었다. 한해전 그대로의 류명식을 보게 되니 정회가 더 깊었다.

《고향에 가서는 무슨 일을 합니까?》

류명식이 물었다.

황석태는 제련소를 떠난 후 자기 생활의 경위를 허심히 이야기했다. 조용히 듣고난 류명식은 저으기 감심한 표정이였다.

《그러니 그 나이에 과학지구건설돌격대 대원이 되였단 말이지요.》

지배인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렇게 물었다.

《헌데 제련소에는 어떻게 왔습니까?》

《나는 돌격대에서 자기의 전직을 숨겨왔습니다. 그런데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과학원에 나오셨다가 만나주신 후에 내가 무얼 하던 사람이라는것을 과학원에서도 알게 되였습니다. 그렇게 되자 나에게 딱한 부탁이 떨어졌습니다. 9월제련소에 가서 과학연구용유색금속자재를 해결해오라는것입니다.》

《원래 계획에는 얼마나 물려있습니까?》

《연구용자재다보니 그 량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껏 한번도 제 량을 받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고 황석태는 지표와 수량을 말했다.

류명식은 움쭉 일어서서 책상모서리로 다가가더니 전화로 판매과장을 불렀다. 그리고는 다시 교환수에게 자기 집을 찾아달라고 하였다. 그는 황석태쪽을 피끗 쳐다보더니 수화기에서 안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여보, 전 당비서동무가 왔소. ··· 한시간후에 집에 함께 가겠소.··· 그런 걱정말고 집에 있는걸 가지고 성의껏 차리오. ··· 그점에서야 더없이 소탈한 사람이라는걸 당신도 알지 않소.》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류명식에게 황석태는 미안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와 부인한테까지 페를 끼치나봅니다.》

《페가 아니라 소원을 풀게 되였다고 그 사람도 기뻐합니다.》

《소원이라니요?》

《잊었습니까?··· 황동무가 제련소를 떠나던 날 저녁에 뭘 좀 차렸댔지요. 그런데 내가 그만 황동무와 미리 약속을 해두지 못했던 탓에 일이 튀지 않았습니까? 그때 일을 두고 집사람도 두고두고 섭섭해하였습니다.》

그 순간에 판매과장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머리가 정수리까지 벗어지고 하관이 퍼진 얼굴에 안경을 쓴 50대의 일군이였다.

《과장동무, 오래간만입니다.》

황석태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반갑습니다.··· 지금 어데 계십니까?》

두사람의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지배인이 판매과장에게 물었다.

《왜 지금껏 과학원에 제 량대로 유색금속자재를 주지 않았소?》

《수출용을 계획보다 더 보장해야 하기때문에 조절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판매과장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확신하며 떳떳이 대답했다.

《심히 잘못되였소. 과학연구보다 더 중요한 대상이 어데 있소. 이달에 들어와서는 원래 계획보다 생산이 높아진것만큼 지금까지 미달된 과학연구자재를 전부 보장해주시오.》

《지배인동지, 그건 안됩니다.》

《어째서?》

《증산된 량은 금속공업부에서 추가수출용으로 벌써 눌러놓았습니다.》

《아무튼 과학연구용은 무조건 보장하시오!》

《오늘 낮에도 강서원부부장동지가 저한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수출용으로 눌러놓은것은 절대로 다른데 주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말 말고 사무실에 되돌아가서 판매계산서를 가져와 비준받으시오.》

지배인이 명령조로 말했다.

판매과장은 쭈밋거리였다.

《왜 서있소?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소?》

그제서야 판매과장은 돌아섰다. 출입문을 나서는 그를 성난 시선으로 지켜보던 류명식은 표정을 바꾸며 황석태에게 머리를 돌리였다.

《어떻게나 처세술이 능한지 다루기가 말짼 사람입니다.》

판매과장이 결재문건을 가지고 다시 나타났다.

류명식은 책상에 마주앉았다. 판매과장이 펼쳐놓은 문건을 훑어보던 그는 과학원에 보내줄 자재량을 손수 써넣고 수표를 하였다. 그리고는 힘주어 말했다.

《동무가 책임적으로 2~3일내에 과학원에 실어보내시오. 나는 래일 아침 광산에 나가 그곳 일을 며칠간 보고오겠소. 그렇기때문에 퇴근시간이 지났지만 문건결재를 지금 하지 않으면 안되였소. 돌아가시오.》

그날 밤 황석태는 지배인의 집에서 환대를 받았다. 갑작스레 찾아가다보니 특별한 음식은 없었다. 그러나 주인내외의 친절한 대접에 마음이 즐거웠다. 도수높은 술을 몇잔 나누고나서 황석태는 이렇게 고백했다.

《···여기서 해임된 이후에 내가 새롭게 깨달은것의 하나는 인간에 대한 리해를 깊이 가지게 된겁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진실한 혁명동지이고 벗인가를 알게 되였단 말입니다.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나는 당비서로 있을 때 지배인동무를 좋지 않게 여겼댔습니다. 내앞에서 떳떳이 자기 주장을 세운것은 두사람이였지요. 한사람은 지배인동지였고 다른 사람은 양영복박사였습니다. 함께 있을 때에는 의견대립과 감정마찰이 심했지만 철직되여 헤여진 후로는 늘 지배인동무와 양영복박사가 그리워지더란 말입니다.》

그들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란히 자리에 누운 후에도 이야기를 계속했다. 황석태는 지배인에게서 궁금하던 제련소사람들의 소식을 들었다. 양영복박사가 건강한 몸으로 연구사업에서 크게 전진을 이룩했다는 소식이 무엇보다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