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6

 

제 3 장

6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가? 평성을 떠나오는 양명심은 줄곧 그 생각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할머니가 보낸 전보에는 《조부 병위급. 급래》라고 씌여있었다. 최소한으로 글자를 절약하기 위해 짤막하게 쓴 전보문을 보고는 도무지 전후사연을 알수가 없었다. 과학원에 왔을 때만 해도 할아버지는 전에없이 활기에 넘쳐있었다. 연구소를 다녀가신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는 그후 귀중한 약재를 보내주셨는데 그 약효로 이따금 도지던 심장탈이 깨끗이 나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병세가 위급하게 되였을가? 심장병에는 심한 정신적타격이 병세가 악화되는 중요한 원인이다. 할아버지의 신상에 그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것이 분명하였다. 새롭게 연구사업을 하다가 참담한 실패를 한것이나 아닌지.··· 내처 근심에 싸여서 집으로 왔다.

《할머니, 어찌된 일이예요?》

방안에 들어선 양명심은 인사도 없이 대뜸 그렇게 물었다.

《네가 왔구나.》

시름겹게 앉아서 뜨개질을 하던 할머니는 손녀를 알아보고 일손을 멈추었다. 여느때라면 상봉의 기쁨이 너무도 커서 손녀를 얼싸안고 어쩔줄 모르던 할머니였다. 하지만 지금은 눈가에 어설핀 미소를 그리며 앉은채로 맞이했다. 다심한 감정을 표현할 마음의 경황이 없을것이다. 그래도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한줄기 미소를 바라보니 생각했던것처럼 할아버지의 병세가 시간을 다투리만큼 위급한것 같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지금 어데 계셔요?》

양명심은 눈을 허둥거리며 물었다.

《며칠간 제련소병원에 입원을 했다가 어저께 평양 적십자병원으로 실려갔다. 네가 한발 늦었구나.》

《심장탈이 도졌나요?》

《앉아라. 처음은 졸도를 했었는데 며칠간 치료를 받더니 좀 나아졌다.》

할머니는 그제서야 손녀의 손목을 잡아 자리에 앉히였다.

《왜 졸도를 했어요?》

《다 제탓이지. 글쎄 무슨 망녕이 들어서 공사장에 나가 당장 중지하라고 호통을 뽑았겠니?》

맥락없는 할머니의 푸념을 듣고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두눈을 깜박거리며 다그쳐물었다.

《무슨 공사장이였나요?》

《연구소에 있는 박치영이라는 젊은 사람을 너도 잘 알지?》

느닷없이 가슴이 설레였다. 멀리 떨어져서 그리움에 시달려온 처녀의 가슴은 애인의 이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러한 감정이 스스로 죄스럽고 부끄러웠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양명심은 할머니가 자기의 감정을 꿰뚫어볼가봐 겁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적 할아버지와 할머니앞에서 박치영과의 관계를 실토한 일이 없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 너의 할아버지는 그 사람을 기특하게 여겨왔다. 그런데 무슨 쪼간이 들었는지 둘사이가 버그러졌단다. 박치영이가 너의 할아버지밑에서 훌 뛰쳐나서 제련소에 나가 따로 연구사업을 하였다더구나. 공사판이라는게 다른게 아니라 그 사람이 연구한것을 설치하는 공사였지. 그런데 너의 할아버지가 하루는 연구소에 나갔다가 때늦게 그 소식을 듣고 공사판에 나갔단다. 거기서 박치영이와 다툼이 컸던 모양인데 그쯤만 해도 모르겠는데 당비서어른과도 대두리로 엇섰다더구나. 그러다가 쓰러졌지. 다 늙어빠진 령감이 가만히 있을 일이지. 제련소에서 하는 일에 삿대질을 할건 뭐겠니.》

양명심은 할머니의 그늘덮인 얼굴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말을 듣고는 사건의 전모를 리해할수 없었다. 그러나 갈피를 잡기 어려운 할머니의 말을 통해서도 알수 있는것은 할아버지와 박치영사이에 심한 모순과 대립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양명심에게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안타까왔다. 차마 그래서는 안되고 그럴수도 없는 일이 벌어진게 분명했다.

손녀의 내심을 알바없는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 마음쓰지 말아라. 큰 병원에 갔으니까 할아버지 병세야 나아지겠지. 내가 전보를 쳤다니까 너의 할아버지는 펄쩍 뛰더구나. 연구사업에 바쁜 너를 불렀다고. 그러나 내 그 령감속을 몰라서? 병석에 누운 몸이여서 너를 무척 보고싶어했단다. 평성으로 돌아가던 걸음에 평양에 들려서 꼭 할아버지를 찾아가봐라.》

《알겠어요, 할머니.》

《지금 쉬쉬하는 뒤소리들이 돌아가는데 너의 할아버지는 탈도 탈이지만 뒤가 무사치 못할것이라고들 한단다.》

《어째서요?》

《만장앞에서 당비서어른에게 탕탕 큰소리를 쳤으니 그게 어디 보통일이냐. 그래서 하는 말들이지.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런 다툼이 있었다고 해서 옥맺힌 마음을 가질 당비서가 아닌것 같더라. 너의 할아버지가 현장에서 쓰러졌을 때 선손을 써준것도 그 사람이고 적십자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도록 주선을 한것도 그 사람이다. 나는 령감이 집에 들어온 후로 여러번 당비서를 상종해보았는데 사내답고 인정깊은 사람이더라. 그런 당비서에게 삿대질을 하며 호통을 쳤다는 령감을 진심으로 나무라고싶었다. 그런데 괘씸한것은 박치영이 그녀석이다. 우리 집에 와서 밥축도 내리만큼 냈고 너의 할아버지한테서 배우리만큼 배우기도 한 사람이 아니냐. 그런데 어쩌면 그럴수가 있느냐 말이다.》

《그 동무가 어떻게 했나요?》

양명심은 그런 물음이 불쑥 치밀어오르는것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 묻기가 두려웠다. 아니, 두려운것이 아니라 그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형언 못할 수치감으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무작정 박치영을 비호하고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할머니, 그 동무는 그런 사람이 아니예요!》

그렇게 부르짖고싶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입밖으로 터져나오지 못했다. 누구에게 향한것인지 딱히 설명할수 없는 울분의 혼란속에서 왕청같은 말을 하였다.

《할머니, 나 배고파.》

《너 아직 점심을 못 먹었니?》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은 렬차칸에서 점심을 먹고 왔다. 박치영에 대한 할머니의 비난을 더 듣고싶지 않던 나머지 얼결에 배가 고프다고 했었다. 부엌에 나갔던 할머니가 인차 밥상을 챙겨왔다.

《내 저녁에 네가 좋아하는 만두를 빚어줄라. 지금은 찬밥으로 간단히 요기를 해라.》

소반에는 할머니가 점심에 먹다남긴 골숨한 밥사발과 호박장에 풋고추가 올랐다. 할아버지도 안계시다보니 할머니는 혼자서 대충 끼니를 에우며 지내는것 같았다.

양명심은 별로 먹고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배가 고프다고 했으니 밥상에 마주앉을수밖에 없었다.

《합숙밥에 늘 배가 고프지?》

수저를 잡는 손녀를 지켜보던 할머니는 측은한 음성으로 물었다.

《괜찮아요.》

《너도 이젠 나이가 차리만큼 찼는데 어서 시집을 가야지. 언제까지나 합숙밥을 먹을수야 없지 않니.》

할머니는 근심스레 중얼거렸다. 여느때라면 그 다심한 권고에 응석기어린 목소리로 《할머니, 걱정말아요. 내 일은 내가 처리할테니.》하고 응대했을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권고가 명치끝에 짜릿한 자극을 주어서 아무 말도 못했다. 내 일은 내가 알아 처리할것이라고 확신을 가지게 하던 박치영이 바로 할머니의 비난과 불만을 사는 대상이였기때문이였다.

《네가 한다는 연구사업은 어떻게 돼가느냐?》

외롭게 지내던 할머니는 손녀가 밥상에 마주앉았다는것도 생각지 않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싶어했다.

《잘돼가고있어요.》

양명심은 밥술을 멈추고 상긋이 웃어보이였다. 사실 그의 연구사업은 놀라울 정도로 전진을 보고있었다.

《너의 할아버지는 저 꼴이 되였는데 너라도 연구사업이 잘된다니 반갑구나.》

할머니는 주름진 눈가에 느슨한 웃음을 그리였다. 과학자의 안해로 한생을 살아온 할머니는 과학적성과를 무엇보다 기뻐할줄 알았다. 그러나 그에게 최근에 이룩한 과학적성과를 말해줄수는 없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리해하지 못할것이다. 하늘과 땅처럼 엄청난 지식수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다정한 부부로 평생을 살아왔다는것이 어쩌면 이상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 네 연구사업은 거의 끝을 보느냐?》

《아직은 시작에 불과해요.》

《뭐 잘돼간다면서?···》

할머니는 의문스레 바라보며 미간에 주름을 모았다. 손녀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여기는상싶었다. 어떻게 말해주어야 할가? 양명심은 지나온 나날을 더듬으며 생각했다.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강령적인 가르치심을 받은 후에 새로운 방법으로 연구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초고압유압프레스 본체부분을 맡았다. 적어도 15 000t의 힘이 실리는 본체의 안정성을 강철기둥만으로 보장하자면 그 부피와 중량이 굉장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도 특수한 강철띠로 본체에 예비장력을 보강해주고있었다. 한때 연구사업을 포기하게 된것은 바킹재료와 함께 그 특수재질의 철띠를 우리 나라에서 생산하지 못하기때문이였다. 양명심은 우리 현실에서 가능한 방법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어느 하루 깊은 모색에 포로된채 건설장옆을 지날 때였다. 굉장한 무게의 블로크를 들어올리는 기중기의 쇠바줄을 무심히 쳐다보는 순간 무엇인가 머리속에서 번쩍 섬광이 이는듯 한 느낌을 받았다. 같은 굵기의 철봉이나 철띠라면 기중기의 쇠바줄이 감당하는 장력을 도저히 이겨내지 못할것이 아닌가. 가는 쇠줄묶음은 같은 체적의 철봉이나 철띠보다 몇배의 큰 장력을 가진다. 가는 쇠줄로 프레스의 본체를 여러번 감는다면?··· 그런 착상이 떠오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연구실로 급히 돌아와서 력학계산을 하여보았다. 가능하다는것을 확인했을 때 막 환성이라도 터치고싶었다. 그길로 기계공학연구소장을 찾았다. 설명을 듣고난 소장은 좋은 착상을 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과학자에게는 그처럼 날카로운 직감력이 중요하오. 뉴톤이 땅에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법칙을 발견한것이나 플레밍이 접시우에 낀 곰팽이에서 포도알균이 죽는것을 보고 페니실린을 발견한것도 모두 그렇다고 할수 있소.》

《아이참, 소장선생님, 나를 뉴톤이나 플레밍의 발견에 비교하다니요?》

《발견의 결과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경위의 류사성이야 부인할수 없지 않소.》

석홍범은 그 사실을 듣더니 너무 기뻐서 어쩔줄을 몰라했다. 누구에게나 양명심의 착상에 깔린 물리학적리치는 쉽게 리해되였다. 과학연구사업에서는 기초원리로부터 포착된 단순한 방법이 첨단기술제품의 제작에서조차 가장 어렵고 복잡하다고 생각되는 난문제들을 쉽게 해결하는 경우가 있었다. 문제는 기초원리를 자유롭게 활용하여 목적을 달성할줄 아는 과학자의 독창적인 구상력과 예민한 직감력에 있는것이다. 양명심은 석홍범에게 감회깊이 말했다.

《지난날처럼 앞선 나라들의 기술에 포로되여있었다면 기중기 쇠바줄을 보고도 그런 생각을 못했을거예요.》

《옳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남의것을 굽어보는 담력과 주체적인 방법론을 우리들에게 안겨주셨기때문에 동무도 그런 착상을 할수 있었을겁니다.》

석홍범자신도 그 담력과 방법론을 가지고 연구사업에 매진하고있었다.

그렇기때문에 그의 말이 공통된 체험속에 생활적진실감을 가지고 가슴에 안겨왔다.

연구소에서는 그 착상을 실현하기 위한 토론회가 있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전보를 받고도 인차 올수가 없었다. 이틀이나 늦어지다보니 할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밥상을 물리고난 양명심은 금속공학연구소를 찾아갔다. 손관식소장을 만나서 구체적인 사연을 들었다. 손관식은 박치영을 두고 할머니보다도 더 격분해하였다. 공명심과 허영에 들떠서 의리도 도덕도 저버린 사람으로 규탄했다. 이야기도중에 박치영에 대한 그의 감정이 드러날 때마다 얼굴에 모닥불을 들쓰는듯 하였다. 자신이 그 누구에게서 비난과 모욕을 당하는것보다도 몇배로 더 부끄럽고 가슴이 아팠다. 그만큼 박치영의 존재는 여태 양명심의 순결한 가슴속에 소중히 자리잡고있었던것이다. 그는 손관식의 말처럼 박치영이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이라고 할수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러나저러나간에 박치영은 티탄합금가공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헌신했으며 그가 개발한 기술을 공업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설비공사를 하고있지 않는가? 하지만 랭철히 판단해보면 부인할수 없는 잘못이 박치영에게 있다는것을 속일수 없었다.

양명심은 그를 조용히 만나기 위해 저녁에 합숙호실을 찾아갔다. 박치영의 호실문앞에 이른 양명심은 잠시 서있었다. 흥분이 앞서는 가슴을 진정해야 했다.

잠시후에 출입문을 두드렸다.

《아니, 동무가 어떻게?》

문을 열고 나타난 박치영은 반가움과 놀라움이 엇갈린 표정이였다.

《할아버지 병세가 위급하다는 전보를 받고 왔어요.》

순간 박치영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스쳤다. 할아버지의 병세를 두고 스스로도 마음에 켕기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그들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드물게 이루어지는 상봉때마다 그리움을 터치며 달려가고 달려오며 두손을 맞잡군 했으나 지금은 어색한 공기가 둘사이에 떠돌았다. 박치영은 책상앞의 의자에 앉고 양명심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와보니까 그사이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군요.》

대각으로 서로 마주보던 끝에 명심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무얼 념두에 두고 하는 말이요?》

《지난 봄에 왔을 때 나는 동무가 할아버지와 지혜를 합쳐서 새롭게 연구사업을 하리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동무는 할아버지를 등지고 연구소를 뛰쳐났더군요. 여지없이 신의를 저버리면서···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요?》

《명심동무, 나는 신의를 저버린것이 아니요. 자신이 무르익힌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그런 용단을 내렸던거요. 과학원의 동의를 받고··· 달리는 할수 없었소!》

박치영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나는 동무가 할아버지의 립장에서 그 일을 가지고 원망하는것이 섭섭하오. 연구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사사로운 관계를 무시할줄도 알아야 하지 않소? 그런 용단이 없었다면 나는 오늘의 성공을 보지 못했을거요.》

《나는 모든걸 깊이 알아봤어요. 동무의 그 성공은 두고봐야 알거예요. 동무는 우리 할아버지가 질투나 시기심을 가지고 부정한다고 하였다는데 어쩌면 그런 억측을 들고다닐수가 있어요?》

《그래 말하자는게 뭐요?》

《숱한 사람앞에서 우리 할아버지를 비난하며 돌아다니는 동무를 나는 도무지 리해할수가 없어요. 동무때문에 할아버지의 병세도 악화되였어요.》

양명심은 맺고 끊듯이 말했다. 박치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듯 쓴입을 다시며 삑 돌아앉아버렸다. 그러한 태도에 양명심은 참았던 울분이 치밀어올랐다. 오래간만에 만난 이 기회에 정다운 감정을 나눌 대신 이런 마찰을 가져온것이 그지없이 안타깝기도 하였다. 가슴속에서는 모순된 감정이 뒤엉키며 회오리쳤다. 몇번 숨을 몰아쉬던 그는 박치영을 노려보며 부르짖었다.

《동무가 과학적으로는 성공했는지 모르겠으나 도덕적으로는 의리를 지킬줄 몰랐어요!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동무를 믿고 동무의 재능을 대견스레 여겼기때문에 외국에 갈 때에도 동무를 데리고 갔댔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의리를 저버리는것이 부끄럽지 않아요?》

《나는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소. 다만 흘러온 생활이 어쩔수없이 양선생과 학술적인 대립을 가져오게 한거요. 나도 그 대립이 괴롭소. 하지만 어찌겠소. 그 대립에서 어느쪽이 정당한가는 이미 현실로 확증되였소. 솔직히 말해서 양선생과 의견상이가 시작될 때부터 나는 늘 명심동무를 생각했댔소. 그런 대립이 있다는것을 알게 되면 동무가 어떤 태도를 취할것인가 하고 말이요. 나는 동무가 공정한 눈으로 사태의 진실을 꿰뚫어보고 내 립장을 리해할것이라고 믿어왔소. 그런데 정작 만나고보니 섭섭하구만.》

양명심은 섭섭한 기색이 실려오는 박치영의 눈길에 부딪치자 금시 오열이 터져오를듯싶어서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좋게 생각을 하려고 하여도 부인할수없이 박치영에게 잘못이 있었다.

《무엇보다 동무에겐 우리 시대 과학자의 옳바른 립장이 서있지 않아요. 동무에겐 자기 이름을 떨쳐보려는 조급한 명예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동무가 처음 학술적발기를 한 때로부터 지금까지의 전과정이 이것을 보여주고있어요.》

《나의 발기와 지향을 함부로 헐뜯지 마시오!》

박치영은 주먹을 떨며 소리쳤다.

《나는 헐뜯는게 아니라 동무가 진심으로 자기를 돌이켜볼것을 원할뿐이예요. 나는 동무가 그런 사람인줄은 몰랐어요.》

《그러니 지금에 와서 드디여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되였다 그 말이요?》

박치영의 노기어린 표정에 비해서는 말꼬리를 잡고 되묻는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높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서리찬 랭기가 풍기였다. 마주보는 눈길에도 랭혹한 빛이 흘렀다. 양명심은 섬찍한 예감을 느끼며 응대하지 못했다. 박치영이 여전한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하긴 동무가 나에게도 사내의 자존심이 있다는것을 여태 모르고있은게 분명하오. 나도 지금에야 동무를 새롭게 알게 되오. 할아버지를 무작정 옹호하기 위해서는 애인조차 함부로 모욕할 용기를 가진 녀자라는걸 비로소 알게 되였단 말이요.》

양명심은 참을수없이 억울하고 분하였다.

《나는 맹목적으로 할아버지를 옹호하는게 아니예요! 동무의 태도가 잘못되였다는것을 명백히 깨닫기때문에 말하는거예요. 그런 충고를 하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고나 있어요? 동무는 전혀 자신을 돌아볼줄 모르는 사람이예요!》

《나는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없소. 모든것이 정당하기때문이요. 나의 성공에 축하를 보낼 대신···》

박치영은 억이 막힌듯 코날개를 벌름거리며 씨근거리다가 다시금 랭담한 표정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명심동무, 명백히 알아두시오. 나에게도 용기가 있소. 과학을 위해서는 사랑까지도 단념할 용기가 있단 말이요!》

《뭐라구요?》

양명심은 정수리에 타격을 받는듯 한 아찔한 느낌속에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눈앞이 캄캄해왔다. 전신의 피가 혈관에 얼어붙는듯 했다. 몸의 균형을 잃고 지칫거리던 그는 자신을 수습하고 울부짖었다.

《신성한 과학을 명예욕의 리용물로 모독하지 마세요. 차라리 명예를 위해서 사랑도 저버릴수 있다고 고백하는게···》

《무엇이 어째?》

박치영도 벌떡 일어섰다. 아픈 곳을 찔리운듯 얼굴이 해쓱하니 질리였다.

양명심은 도저히 그를 설득시킬수 없다는것을 깨달았다. 격렬한 다툼이 계속되다가는 돌이킬수 없는 무서운 일이 벌어질듯 싶었다.

《지금은 더 말을 못하겠어요.··· 래일 저녁에 떠나겠으니 역전에 나와주세요. 그때 하고싶은 말을···》

정녕 이렇게 쉽사리 헤여질수 없다는 생각으로 눈물이 솟았다. 전등빛에 반짝이는 그의 눈물을 본 박치영은 갈린 목소리로 수긍했다.

《나가겠소.》

그도 마음이 편안치 않은지 의자에 주저앉으며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였다.

양명심은 설음과 격분이 뒤엉키는 가슴을 부여안고 그의 방을 나섰다. 방금 벌어졌던 모든 일이 꿈을 꾼것처럼 허무하고 맹랑하게 여겨지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보고 온 박치영의 모습, 얼굴을 싸쥐고 괴로와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도 지나치게 흥분했던 나머지 결김에 그런 가혹한 말을 했던것이 아닐가? 그의 자존심에 손상을 주리만큼 내가 지나쳤던것은 아니였을가? 그런 사람인줄 몰랐댔다는 자극적인 말을 내가 왜 했을가?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아픈 말을 할수 있다는것을 그는 왜 리해하지 못할가? 정말이지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인지 여러갈래로 의문이 떠오르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였다.

이튿날 저녁이였다.

양명심은 영림역에 나와 박치영을 오래동안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얼른 차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승강대에 서서 나들문쪽을 휘둘러보았다. 그 무슨 급한 일로 때늦게 그가 달려올것만 같았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박치영은 보이지 않았다. 렬차바퀴에서 제동기 풀리는 소리가 들리였다. 마치도 그 음향이 자신의 가슴속에 남아있던 미련을 토막토막 끊어버리는것처럼 초조한 심장을 아프게 울려주었다. 기적을 울리며 렬차가 속도를 놓기 시작했다. 어느새 서켠에 기울었던 저녁해는 자취를 감추고 대지우에 밝은 빛을 뿌려주던 한낮의 여운인양 잔광만을 하늘가에 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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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난 박치영은 다시 현장으로 나가려다 말고 합숙호실로 향했다. 잠시라도 침대에 누워서 허리를 펴고싶었다. 요사이 마감단계에 이른 설비조립을 돌보느라고 어지간히 몸이 지쳤다. 하루 두세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낮에 밤을 이어가는 긴장한 나날이 흘렀다. 매일 현장에서 쪽잠을 자며 지내다보니 며칠만에 호실에 들어섰다. 어쩐지 방안의 전경이 서먹하게 느껴졌다. 현장에서 생활한 이 며칠사이에 애용하던 침대며 의자가 낯설어진듯 했다. 침대우에 걸터앉았을 때 그 까닭을 깨달았다. 호실을 비우게 된 마지막 저녁에 이 방안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던것이다. 현실로 믿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격렬한 다툼이 그 저녁에 있었다. 괴로움과 노여움에 이지러진 명심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졌다. 명심은 바로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 자리에 앉아서 그리도 애모쁜 마음으로 나에게 원망과 의분을 터뜨렸지. 나는 책상앞에 놓인 저 의자에 앉아서 항변을 하였고··· 시운전의 날을 눈앞에 둔 황홀한 기쁨을 안고 설비조립에 온넋을 기울이다보니 괴롭고 가슴아프던 그때의 일을 지난 며칠간은 머리속에서 어지간히 지워버릴수 있었다. 연구성과가 생산에 도입되는 커다란 경사에 비하면 명심이와의 관계는 하찮은 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현장의 들끓는 분위기에 휩싸여있을 때와는 달리 호실에 돌아온 지금에는 그 저녁의 불쾌하던 기억이 어쩔수없이 되새겨졌다. 그 이튿날 명심을 배웅하려 역에 나가지 않았던것은 지내 매몰스러운 일이 아니였을가? 그는 나에게 더 하고싶은 말이 많다고 하였는데··· 그가 더 하고싶은 말은 무엇이였을가? 내 입에서 잘못했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설득시키려고 했을가? 아니면 자기쪽에서 지나쳤다고 용서를 빌려고 했을가? 그것은 알수 없다. 아무튼 그를 배웅하러 역으로 나가는것은 남자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단 말인가? 숱한 사람이 축하를 보내오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명심에게서 그처럼 랭혹한 비판을 받을줄은 꿈에도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누구보다 나의 연구성과를 기뻐해야 할 명심이가 예상과는 정반대의 립장에 서는것을 보았을 때 아연하지 않을수 없었다. 어떤 경우든지 앞으로도 그에게 그 무슨 용서를 비는 일은 없을것이다. 사랑하는 남자의 놀라운 과학적성과보다도 할아버지의 그릇된 립장을 맹목적으로 옹호해나서리만큼 명심은 어리석은 처녀였을가? 참말이지 그를 새롭게 알게 된듯싶었다. 설사 그와의 관계가 영원한 결렬에 이른다고 하여도 서슴지 않겠다. 내가 지향하는 인생의 목표는 과학탐구이지 사랑이 아니다! 설사 사랑에서 가슴아픈 상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청춘시절에 있을수 있는 하찮은것이다.···

박치영은 번거로운 상념을 뿌리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공연히 호실에 들렸던 자신을 후회하며 현장으로 나갔다. 오늘 밤에는 불활성가스류출장치를 설치하기로 되여있다. 다른 모든 공정들이 그러했지만 그 장치도 기술조작이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기술지도를 하여야 했다. 그는 어둠에 잠긴 구내길로 걸음을 다그쳤다.

며칠후 마침내 시운전의 그날이 왔다.

황석태와 류명식을 비롯한 제련소 책임일군들이 나왔다.

박치영은 한껏 긴장한 마음으로 돌아치며 설비의 공정들을 확인하였다. 시운전을 눈앞에 둔 초조와 흥분이 그를 사로잡고있었다. 그러나 그날의 시운전은 실패했다. 다섯개의 티탄합금소재를 련속 가공해보았으나 어느것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다. 프레스에 눌리우면서 례외없이 균렬이 생기였다. 연구집단성원들과 조작공들은 실망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단번에 성공을 하겠소. 실패한 원인을 찾고 퇴치하면서 앞으로 더 가공해봅시다.》

황석태는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버린 박치영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무했다. 하지만 박치영은 아무런 응대도 못했다. 실험실적으로는 가능했지만 공업적으로는 참으로 불가능하지 않을가 하는 우려가 지울수없이 가슴에 서려들었다. 아무리 부인하려고 하여도 현실적으로 인정하지 않을수 없는 기술적난점이 있다는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양영복박사의 주장이 되새겨졌다. 그의 목소리가 먼곳에서부터 가까이로 울려오는 뢰성처럼 순간마다 공포감을 더해주며 뇌리를 때렸다. 특별히 머리속을 파고드는것은 우리의 티탄합금조성이 다른 나라들의것과 다르다는 견해였다. 희토류금속이 매우 적은 량으로 포함되여있지만 그것이 가공의 기술적조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부인할수 없었다. 고도로 자동화된 공정을 공업적단계에서는 손로동으로 대신할수 없다던 그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시운전을 거듭하면서 그 난점들을 극복할수 있는 묘술을 찾을수 있지 않을가? 아니, 기어이 찾아내야 한다! 첫날의 실패에 이렇게 동요하다니··· 박치영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여러 사람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리는것을 보았다.

《걱정마시오. 다시 몇번 시운전을 하느라면 성공할거요!》

호기있게 부르짖고는 자기딴에도 그 장담이 의심스러워서 사람들을 외면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