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9

 

제 1 장

9

 

석양의 빛발이 눈앞으로 짙게 던져주는 자신의 그림자를 밟으며 석홍범은 꿈길을 가듯이 걷고있었다. 줄곧 머리를 깊이 숙이고 기진한 걸음으로 자국을 옮기는 그가 어떻게 자기 집 방향으로 가는 길을 헛갈리지 않는지 알수 없었다. 곁을 스치는 사람도, 길을 비켜달라는 자전거의 종소리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주위세계를 망각해버린 머리속에는 형언 못할 상실의 괴로움만이 꽉 차있었다. 그리도 온넋을 다해 희망을 걸었던 가장 소중한것을 졸지에 잃어버린것이다. 자신의 지혜와 정열의 산아로 이 세상에 자랑스러이 태여나리라고 확신했던 초고압유압프레스는 여태껏 하나의 뚜렷한 형상으로 항시 머리속에 그려지면서 탐구의 기쁨과 희망, 생활의 활력과 의욕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오늘로써 그것을 잃었다.

마치도 첫사랑을 상실한것처럼 그렇게도 모질게 가슴이 아팠다. 하기는 청춘시절에 처음으로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할 때 련모하기 시작한 애인처럼 과학에 뜻을 두기 시작한 때로부터 머리속에 그리며 탐구의 노력을 기울여왔던 초고압유압프레스였다. 김책공업종합대학 기계공학부를 다니던 시절 유압공학의 첫 강의를 받을 때였다. 백발의 로교수는 현대기계제작공업에서 날로 확대되는 유압공학의 의의를 설명하던끝에 이렇게 말했었다.

《···현대유압공학이 도달한 첨단기술은 2 000기압이상의 압력에서 동작하는 유압중압기로 초고압유압프레스를 산생시켰습니다. 이 기계의 발명으로 인류는 초고압상태에서만 물리화학적변화를 가져올수 있는 생산분야를 개척했으며 금강석과 같은 매우 값지고 유용한 물질을 인공적으로 만들수 있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첫걸음을 떼기 시작한 우리의 유압공학은 아직 그것을 개발하지 못하고있습니다. 나는 동무들이 열심히 배워서 앞으로 멀지 않은 장래에 초고압유압프레스와 같은 유압공학의 첨단기술제품들을 훌륭히 제작해내리라고 믿습니다.》

교수의 기대어린 이 당부를 석홍범은 가슴깊이 새기였다. 유압공학에 대한 호기심과 커다란 과학적포부를 안고 대학에서 전공학문의 첫 강의를 받던 때에 받아안은 그 충격은 일생을 두고도 잊혀지지 않을것이다. 그는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 미래의 과학자로 자신이 이루어야 할 첫 목표를 초고압유압프레스에 두었다. 대학의 전과정을 최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과학원에 배치되기를 열렬히 희망했다. 그랬으나 예상밖으로 기계공업위원회 부원으로 배치를 받았다.

그해 겨울에 학창시절부터 사랑해오던 동창생처녀와 결혼을 하고 처가에서 살았다. 처가에는 아들이 없었다. 자식이라고는 뒤늦게 본 딸 하나뿐이였다. 처부모들은 사위를 아들맞잡이로 극진히 사랑했다.

신혼생활이 꿈같이 흘렀고 맡겨진 직책에도 점차 정을 붙이였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그처럼 사랑하면서도 포옹해보지 못한 련인처럼 초고압유압프레스가 지워지지 않는 동경의 대상으로 남아있었다. 책임일군들에게 과학원으로 보내줄것을 여러번 제기하였으나 승인되지 않았다.

그런데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1985년 8월 3일 과학기술을 더욱 발전시킬데 대한 로작을 발표하시였다. 석홍범은 로작을 읽으면서 얼마나 흥분하였는지 모른다.

석홍범은 자기의 지향이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야 할 운명적인 계기가 도래하였음을 확신했다. 그는 기계공업위원회 위원장을 다시 찾아갔다. 과학에 대한 자기의 열렬한 희망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오래동안 유압공학을 공부한 자료들을 가지고 갔다. 한배낭 잘 되는 학습장들을 보고는 위원장도 놀라와하였다. 그러면서 아쉬운 표정으로 미타한 대답을 하였다.

《동무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인재요.··· 아무튼 동무의 문제를 토론해보겠소.》

《위원장동지, 저를 기계공학연구소에 보내준다면 몇해안으로 초고압유압프레스를 기어이 만들겠습니다.》

석홍범은 열띤 어조로 장담했다. 사흘후에 그의 결심이 승인되였다.

석홍범은 오랜 숙원을 이루게 된 기쁨을 걷잡을수 없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사연을 말했을 때 세사람은 아연한 기색이였다. 그들에게 어느 정도 실망을 주리라는것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마치도 초상난 집처럼 누구나 서글픈 기색을 보이는데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장인인 강서원은 덤덤히 담배만 피우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을뿐 아무 말도 없었지만 울상이 된 장모는 왜 그런 결심을 했느냐고 거침없이 탓했다. 안해인 민옥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한껏 원망을 안고 쏘아보더니 이렇게 따지였다.

《당신은 나를 더 사랑하는가요? 아니면 과학을 더 사랑하는가요?》

석홍범은 어리석은 그 물음에 분기가 치밀었다.

《그러니 당신은 평성에 있는 과학원으로 나가는 나를 따라가기 싫다 그 말이겠소?》

날카롭게 따지고는 얼른 장인의 눈치를 살피였다. 무엄하게 그앞에서 큰소리를 친것이 미안했다. 금속공업부(당시) 부부장인 그만은 섭섭한 심정이 없지 않더라도 자기의 립장을 긍정해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돌아앉은채로 《조용들 해라.》 하고 한마디 부르짖었다. 어느쪽도 긍정하지 않았다. 다만 내의를 입은 둥실한 어깨가 급하게 오르내리고 군살이 덮인 덜미에 벌겋게 울기가 올랐을뿐이다.

석홍범은 그의 노기가 실은 자기에게 향한것이라는것을 알았다. 참기 어려운 침묵이 오래동안 흘렀다. 상심한 표정으로 이쪽저쪽의 눈치를 살피던 장모가 움쭉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앞을 나서서 옆방으로 건너가며 혼자소리로 서글피 뇌이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였다.

《저래서 사위란 남의 자식이라고들 하겠지···》

감각이 예민해진 사람만이 들을수 있는 가는 목소리였으나 석홍범에게는 자극적으로 크게 들리였다. 자신의 생활과 뗄수없이 가깝던 세사람이 아득한 곳으로 멀어져가는듯 한 환영을 느끼였다. 단란하고 화목하던 집안에 돌연히 불신과 불화가 생기였다. 수나롭게 흐르던 생활에 혼란이 일어났다. 옳고그른것은 그만두고라도 자기의 목적만을 추구한 나머지 그들 세사람을 괴롭힌다는 자책감에 가슴이 저리였다.

(가까운 앞날에 과학적성공을 이루는것으로 보답하겠으니 제발 오늘의 나를 리해해주시오.)

석홍범은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며 기계공학연구소로 왔다.

강민옥은 친정에서 2년이나 뻗치더니 지난해 가을에 마지못해 평성으로 따라나왔다.

작금년간에 새로운 연구소들이 창설되면서 과학지구는 주택사정이 긴장했다. 젊은 연구사들에게는 단칸짜리 단층주택밖에 차례지지 않았다. 가뜩이나 평양을 떠나기 싫어하던 안해는 위생시설과 상하수도시설이 지금껏 살아온 집보다 못한 단층집살림을 참기 어려워했다. 솜씨가 서툴러서 탄불을 죽이고는 다시 피울 엄두를 못내고 부엌에 우두커니 서서 한숨만 지었다. 그러다보니 새살림을 시작할 때부터 다툼이 빈번했다. 안해는 불편스러운 살림과 집안일에 모르쇠를 하는 남편을 두고 빈번히 원망을 터뜨렸다. 그때마다 남편은 그 귀공주같은 생활태도를 언제면 버리겠느냐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때는 서로 상대를 설득시키거나 교양해보려는 희망이 있었다. 여러달 지속되여온 다툼에 인제는 어지간히 맥이 진하였다. 상대의 뜻을 자기의 지향에 일치시킬수 있다는 희망마저 잃었다. 서로가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면서 별로 말을 건네지 않았다.

한집에서 부부생활을 하지만 남편은 남편대로 온넋을 기울이는 탐구의 고민이 있었고 안해는 안해대로 두고온 옛 생활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천정이 낮게 드리운 크지 않은 그들의 살림방에는 신혼생활의 행복이 넘칠 대신에 서로 다른 고민이 무겁게 드리워있었다. 그러나 석홍범은 초고압유압프레스가 성공하는 날이면 안해의 불평도 가셔질것이고 자기들의 생활에도 밝은 서광이 비껴올것이라고 확신했다. 실상 안해도 그날을 위하여 모든것을 묵묵히 참아오고있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순탄치 않은 과정을 밟으며 생활상의 헐치 않은 대가를 초고압유압프레스개발을 위한 길에 치르어왔다.

그런데 그 모든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석홍범은 절통한 심정에 막 태질을 하고싶었다. 갑자기 쇠가 갈리는 아츠러운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피끗 돌아보니 달려오던 화물자동차가 제동이 걸린 바퀴를 끌며 코앞에서 멈춰섰다. 그제서야 좌우를 살피지 않고 건늠길 복판에 들어선 자신을 깨달았다. 눈앞이 아찔한 느낌과 함께 등골로 식은땀이 쭉 흘렀다.

《여보, 죽자고 그래!》

허우대좋은 중년의 운전사가 차문을 벌컥 열고 급히 땅우에 내려섰다. 금시 달려들어 따귀라도 칠듯 한 기세였다.

《미안합니다, 운전사동무!》

석홍범은 흙빛이 된 얼굴로 공손히 사과했다.

《멀쩡한 사람이···》

운전사는 부릅뜬 눈을 껌벅거렸다. 실신을 했거나 술에 취한 사람으로 알고있었던 모양이다. 멀쩡한 사람이 어찌하여 차가 달려오는줄도 몰랐는가? 성난 눈길로 석홍범을 올리훑고 내리훑고 하더니 아무래도 영문을 알수 없는지 한걸음 다가서며 따지고들었다.

《동문 도대체 어데서 뭘하는 사람이요?》

《기계공학연구소 연구사로 일합니다.》

《아, 그렇소?!》

대뜸 운전사의 표정과 말투가 달라졌다. 그 급격한 변화에 석홍범은 의아해했다. 혹시 기계공학연구소와 그 무슨 인연을 가진 운전사가 아닌지?···

《학자선생이 과학적사색에 깊이 빠진걸 보니 성공을 하겠소. 앞으로 좋은 기계를 만들어내시오.》

운전사는 빙긋 웃어보이고 차를 몰아갔다.

석홍범은 눈굽이 화끈 달아올랐다. 따귀를 맞아도 할말이 없는 자기였다. 그런데 운전사는 이쪽의 미친듯 한 행동을 제나름으로 좋게 풀이하고 고무적인 인사까지 보내여왔다. 그를 통하여 학자들에 대한 우리 인민의 기대와 믿음의 크기가 헤아려졌다. 그 헤아림의 감정이 충격적으로 안겨올수록 좌절당한 연구사업이 절통하고 부끄러웠다. 아, 나는 과연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슴속에서 저도 모르게 절망적인 부르짖음이 터져나왔다. 대답을 기다리듯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르게 열린 공간으로 무심히 흘러가는 흰구름장만이 시야에 안겨올뿐이다.

그는 어느덧 집에 이르렀다.

《여보, 오늘은 탄불이 죽지 않았소?》

민옥은 부엌에서 감자를 깎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전에 없던 살틀한 물음이 이상스레 여겨졌을것이다. 제시간에 퇴근을 하는것도 이상스러웠을것이다. 그는 놀라운 눈길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쪽을 유심히 내다보았다.

《연구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석홍범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웃음을 거두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부엌아궁이에 눈길을 주었다. 열어놓은 공기구멍으로 벌거우리하게 불빛이 내비치는것으로 보아 오늘은 탄불이 제대로 피는것 같았다. 허황한 욕망을 앞세우던 나머지 부질없이 여태껏 안해를 고생시켜온듯 한 죄스럼이 가슴에 밀려들었다. 그래서 되도록 헌헌한 기색을 지어보이려고 하였다.

《탄불 때는 묘득을 드디여 얻은게로군. 그게 다 생활의 귀중한 지식이요.》

속빈 소리로 쓸쓸히 한마디 던지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석홍범이 새살림을 펴면서 구해놓은 책상과 나무의자가 놓여있었다. 안해는 이사를 올 때 부엌세간 몇가지와 이불 한채만을 가져왔다. 그밖의 가구는 아무것도 날라오지 않았다. 앞으로 새로 짓기 시작한 아빠트가 완공되여 거기서 살게 될 때 친정에서 마련해준 가구들을 가져오겠다고 하였다. 일리가 있는 소견이여서 그것을 두고는 조금도 달리 생각하지 않았다.

실내옷을 갈아입고 돌아서는데 책상우에 놓인 외국의 유압기술문헌들과 그것을 발취한 학습장이 눈에 뜨이였다. 그러자 방금 안해에게 꾸며보이던 기분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짜릿한 아픔이 가슴을 훑었다. 숨진 아기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였다. 얼른 외면을 하였으나 몇번이고 새겨보며 밑줄을 그어가던 페지들이 눈앞에 얼른거렸다. 그 무슨 다른 일에 신경을 쓰면서 잠시나마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싶었다. 그냥 우두커니 앉아서 고뇌에 시달리다가는 미칠것 같았다. 일감을 찾아서 방안을 두리번거리는데 문득 안해의 부탁이 생각났다. 안해는 며칠전에 고장난 다리미를 고쳐달라고 했었다.

《여보, 고쳐달라던 다리미가 어데 있소?》

부엌으로 통한 문쪽에 머리를 돌리고 물었다.

《왜 그러세요?》

의혹이 짙은 안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탁을 할 때에는 귀등으로 스치던 남편이 그것을 찾는게 이상스레 여겨졌을것이다.

《고쳐달라고 하지 않았소?》

방안에 올라온 안해가 벽장에서 다리미를 꺼내주며 두눈을 깜박거렸다.

《오늘은 어찌된 일이예요? 해가 서쪽에서 뜨는게 아니예요?》

《나도 이제부터는 세대주구실을 해보자는거요.》

석홍범은 반가와하는 안해의 얼굴을 마주보며 비죽이 웃었다.

《이거 아무래도 오늘 저녁엔 내가 한턱 내야 할가보군요.》

《그럴 생각이라면 식료상점에 가서 술이나 한병 사오지.》

안해는 이상한 기미를 감촉한것 같았으나 내색하지 않고 정겹게 웃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오가는 다정한 웃음이 소중하여서 서뿔리 이쪽의 내심을 헤치며 그것을 지워버리고싶지 않은 모양이다.

안해는 행주치마를 벗어놓고 상점으로 갔다.

석홍범은 책상뽑이에서 나사틀개를 찾아들고 다리미를 고치기 시작했다. 다리미뚜껑을 열고 가열판에서 구슬같은 사기애자속에 들어있는 전열선을 들어보니 끊어진 곳이 제꺽 나타났다. 그것을 이어서 제자리에 끼운 다음 뚜껑을 조립하고 전기를 넣어보았다. 다리미에 제대로 열이 왔다. 이렇게도 손쉽게 고칠수 있는것을 미루어온것이 자못 후회되였다. 지금에 와서는 안해의 모든 불만과 불평이 자기의 잘못처럼 여겨졌다. 연구사업의 실패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자기 반성의 감정을 불러왔다.

얼마후에 술병을 사들고 안해가 돌아왔다.

《과학평의회가 있었다더군요.》

조심히 말을 건늬는 안해의 얼굴에 그늘이 비꼈다.

《어디서 들었소?》

《식료상점에서 양명심동무를 만났댔어요.》

안해는 그 처녀에게서 저간의 사연을 들었을것이다.

석홍범은 안해를 마주보기가 거북하여서 창쪽으로 머리를 돌리였다. 금시 안해의 입에서 쌓였던 원망이 터져나올것이다. 참담한 실패로 끝나버리는 남편의 과학적열망때문에 여태껏 그로서는 비싼 대가를 치르어왔다고 할수 있다.

(온 집안이 그렇게 말렸는데도 뿌리치고 과학원에 나오더니 당신 꼴좋게 되였구려! 내 뭐랬어요, 과학탐구의 길이 당신이 생각하는것처럼 순탄한 길이 아니기때문에 함부로 들어서서는 안된다고 몇번이나 말했어요? 오늘의 결과는 당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말해주고있어요!)

거침없이 이런 말이 쏟아질줄 알았는데 련민의 정이 느껴지는 가는 한숨소리가 들릴뿐이다. 이런 순간에 자기 감정을 앞세우며 가뜩이나 괴로와하는 남편의 마음을 들쑤셔놓을만큼 교양없는 녀자는 아니였다.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하겠어요?》

안해가 조용히 물었다.

석홍범은 서서히 고개를 돌렸으나 입을 열지 못했다. 자기에게는 지금 아무런 출로도 없는것처럼 생각되였다. 숨막히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제 연구집단 연구사들이 우리 집으로 온대요. 명심동무도 뭘 사들고 오려고 식료상점에 들렸다는데 거기서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더군요.》

《그들이 뭘하러 우리 집에 온단 말이요?》

그 물음에 화답하듯이 문밖에서 걸걸한 남자의 목소리와 여럿의 발자국소리가 들리였다.

《계십니까?》

귀에 익은 물리학연구사의 목소리였다.

석홍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문밖을 내다보았다. 말대로 연구집단에 망라되였던 연구사들이 모여왔다.

《왜들 이렇게?···》

석홍범은 어정쩡한 눈길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왜들 이렇게라니? 지금껏 얼굴을 맞대고 지혜를 모아오던 우리 집단이 해산되는 슬픈 날인데 맨숭맨숭하게 그저 지낼수야 없지 않습니까. 회포도 나누고 새로운 결의도 나누어야 할것 아닙니까.》

키가 꺽두룩하고 눈꼬리가 쳐들린 물리학연구사가 흔연한 표정으로 너스레를 놓았다. 연구집단의 해산이 범상히 여겨지기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괴로움을 눙쳐볼셈으로 그러는지 그 흔연스러운 표정과 헌헌한 목소리의 진속은 알수가 없었다.

《어서 들어들 오시오.》

석홍범은 아무튼 손님들을 반가이 맞이했다. 지금껏 연구사업을 함께 하여온 동료들과 오늘의 괴로움을 나누고싶기도 하였다.

저마끔 들고온것을 부엌에 내려놓던 연구사들중에서 누구인가가 주부에게 한마디 건늬였다.

《아주머니, 과학자의 안해들이란 성공의 기쁨보다 실패의 괴로움때문에 술상을 차려야 하는 때가 더 많지요. 제꺽 안주를 좀 끓여주시오.》

연구사들이 방안에 들어와앉았다. 연구집단의 성원들중에서 가정부인 두명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 시간에 저녁을 지어야 할것이다. 양명심은 녀성들을 대표하기라도 하듯이 혼자 참가했다. 그는 과학자합숙에서 독신생활을 하고있었다.

부엌에서 기름냄새가 고소하게 풍겨왔으나 방안의 공기는 무거웠다. 누구나 그늘진 표정들이였다.

석홍범이 푹 가라앉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찾아와주어서 고맙습니다. 연구집단이 무어진 그날부터 동무들은 모두 초고압유압프레스개발을 위해서 많은 수고를 바쳐왔습니다. 연구사업분담이나 조직사업에서 서툰것이 많았지만 동무들은 나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중에는 처음부터 가능성여부에 의혹을 가졌지만 나의 장담에 이끌려서 연구집단에 들어온 동무들도 있습니다. 그런 동무들도 그후에는 희망을 가지고 맡겨진 전공분야의 문헌들을 열심히 조사했습니다. 연구집단이 해산된 오늘에 와서 지난날을 돌이켜보는 나는 진심으로 동무들에게 사의를 표하고싶습니다. 동시에 동무들앞에 면목이 없습니다. 나때문에··· 나때문에···》

석홍범은 갑자기 목이 메여와서 머리를 떨구었다.

《책임연구사동무, 너무 자신을 괴롭히지 마시오. 이럴것 같아서 우리가 찾아왔습니다.》

곁에 앉은 물리학연구사가 석홍범의 무릎을 두드리며 하는 말이였다. 석홍범은 마음을 진정하려고 눈을 슴벅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특별히 자기를 위로하려고 하는 그의 태도에 위선적인것이 깔려있는듯싶어서 불쾌한 감정이 치밀었다. 림수봉부원장을 찾아갔을 때 그의 이야기를 듣고 느꼈던 배신감이 되살아났다.

《오늘부터 나는 책임연구사가 아닙니다.···동무는 이미전에 부원장을 찾아가 우리 연구집단에서 나가겠다고 했더군요. 진작 그런 생각이였다면 부원장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먼저 말했어야 하지 않습니까?》

석홍범은 때와 장소를 가리며 자기 감정을 숨길줄 몰랐다. 언제나 직선적으로 자기의 의사와 주장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성미였다. 다른 사람들도 물리학연구사에게 의혹과 격분의 시선을 보냈다. 여태껏 한마음한뜻으로 연구사업을 하여왔다고 생각했던 자기네 연구집단안에 이런 배신적인 일이 있다니?! 그를 뚫어지게 쏘아보던 재료학연구사가 따져물었다.

《박동무, 그게 사실이요?》

물리학연구사는 여기가 질린듯 일순 굳어지더니 용케도 본래의 웃음진 표정을 살리며 변명조로 대답했다.

《문헌조사가 깊어지자 불가능하다는것이 뻔했지만 성공의 기대를 버리지 않는 동무들앞에서 차마 그런 말을 할수 없었습니다. 그 일이 노엽다면 나를 용서하시오.》

창문을 활짝 열어놓았으나 부지런히 피워대는 여럿의 담배연기가 방안에 자욱했다. 방금전에 켜놓은 백열등은 뿌옇게 빛을 잃었다. 밖에는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멀리에서 개구리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주택지구의 길건너에 벌판의 한끝이 잇닿아있었다. 과학지구에 농촌의 밤정서를 날라오던 유정한 개구리울음소리가 지금은 방안에 서린 괴로운 정적의 의미를 더욱 강조해주었다.

석홍범을 동정의 눈길로 이윽히 바라보던 양명심이 조심히 침묵을 깨쳤다.

《석동무,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우리 나라에서도 고질금속재료나 특수합성수지재료들을 생산하게 될 날이 올거예요. 그때에 우리모두 연구집단을 다시 무어서 훌륭한 초고압유압프레스를 개발하자요.》

석홍범은 그를 마주보았다. 막연한 소리를 한다는 생각에 앞서 순간적인 희망에 귀가 번쩍 열리였다.

《언제면 그날이 옵니까?》

얼결에 급히 묻고나서야 어리석은 질문이였다는것을 깨달았다.

《나는 우리 나라 공업의 발전전망을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그날은 멀지 않아 올거예요.》

멀지 않다는것이 도대체 몇년을 념두에 두고 하는 말인가? 5년?··· 아니면 10년?···

《명심동무는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이요?》

《아직은 결정을 못하고있어요.》

《내가 동무의 자리에 섰다면 이제라도 애인이 기다리는 금속공학연구소로 옮겨가겠습니다.》

양명심은 가볍게 얼굴을 붉힐뿐 응대가 없었다.

부엌에서 찾는 안해의 목소리에 석홍범은 일어섰다. 얼른 눈치채고 뒤따라 일어선 양명심이 그를 제지시켰다.

《앉아있으라요.》

손님이라 하더라도 부엌심부름은 녀성인 자기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것 같았다. 양명심은 부지런히 음식을 날라들였다. 두리반에 오를것이 다 오르자 민옥이가 나타났다.

《변변치 않지만 즐겁게 나누세요.》

그는 상냥히 웃으며 말했다. 부엌일에 돌아치며 흠뻑 땀을 흘린 얼굴이였으나 전등에 비낀 그의 자태는 숨길수없이 우아했다. 처음 와보는 사람들은 주부의 아름다운 용모에 황홀해하였으며 어쩐지 불편스러운 단층집살림에는 그 용모가 어울리지 않는것처럼 생각되였다.

《이곳 살림에 고생스러운 점이 많겠습니다.》

물리학연구사가 측은히 건늬는 말이였다.

《괜찮아요, 점차 익숙되여갑니다. 그런데···》

흔연히 응대하던 민옥의 말꼬리가 흐려지더니 목밑에서 잦아들었다.

석홍범은 피끗 그를 쳐다보았다. 뒤를 잇지 못하는 안해의 심정이 가슴에 안겨왔다. 불편스러운 생활보다도 이 저녁에 여지없이 실패한 남편과 그 동료들을 위하여 술상을 차려야 하는 마음의 고통이 클것이다. 기어이 성공을 한다던 남편의 장담을 확고히 믿으며 모든것을 참으려고 했던 그도 오늘 격심한 타격을 받았을것이다. 어쩌면 부엌에서 남모르게 눈물을 머금고 음식을 끓였을것이다. 다시 부엌으로 내려가는 안해를 추연히 지켜보던 석홍범은 두리반우의 잔들에 넘치도록 술을 따랐다.

《자, 듭시다.》

그는 목을 젖히고 단숨에 마셨다. 독한 술이 짜릿하게 식도를 자극하며 답답하던 가슴속으로 시원히 흘러들었다. 두어순배 연거퍼 잔이 돌았다. 그러자 전신에 퍼지기 시작한 취기와 더불어 억눌렸던 울분이 끓어올랐다.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그리도 고심참담한 노력과 아낌없는 열정을 바쳐왔건만 무엇때문에 연구집단이 중도에서 해산되고 이 순간의 고배를 마셔야 하는가?

《동무들, 실컷 마십시다.

우리는 부끄러울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노력과 지혜가 모자라서 성공하지 못한것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제작재료가 없기때문입니다. 참으로 그런 재료를 아직 생산하지 못하는 우리 나라의 뒤떨어진 공업이 원망스럽습니다. 우리에게도 필요한 설비와 재료가 보장된다면 남들이 뽐내는 그 어떤 최첨단기술도 쉽게 개발하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수 있을것입니다! 머리를 높이 들고 마십시다!》

연구사들은 들었던 잔을 허공에 멈춘채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석홍범의 돌발적인 부르짖음에 어리둥절했다.

물리학연구사가 주걱턱을 번쩍 들더니 정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업수준이 뒤떨어졌다고 해서 자기 조국을 원망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것이 아니지요. 발전된 다른 나라의 연구조건을 동정하는것은 더구나 옳지 않습니다.》

석홍범은 지금껏 좌석의 분위기를 흥겹게 하려고 애쓰던 그가 이처럼 자기 말에 예리한 분석을 가할줄은 몰랐다. 연구집단에서 남먼저 몸을 빼려고 선손을 쓴 사실을 비난했더니 마침 반격을 가할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는가? 말꼬리를 잡고 걸고드는것은 두번다시 없는 비렬한 일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낯빛을 살피였다. 자기에게 쏠린 다른 시선들에도 불만의 빛이 어린듯싶었다.

석홍범은 갑자기 긴장해진 좌중의 낯빛에서 엄중히 분석될수 있는 잡소리를 자기가 꺼리낌없이 줴쳤다는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안타까운 나머지 얼결에 그런 말을 했으니 달리 생각지 말라고 너그러운 리해를 구하고싶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의 량심을 속이는 비굴한짓이다. 평소의 생각이 취기의 흥분속에 표현되였을뿐이다. 그는 그러한 자신에게 도전하듯 떳떳이 말했다.

《나의 발언이나 행동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지겠습니다. 동무들은 이에 대해서···》

《석동무!》

녀성의 날카로운 부름소리에 말을 끊었다. 처음은 안해의 목소리로 착각했다. 그런데 안해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부엌에 있었다. 석홍범은 목소리의 임자를 찾으려고 놀란 눈길로 사위를 둘러보았다.

《석동무, 진정하세요. 동무는 자신을 자제할줄도 반성할줄도 몰라요!》

양명심이 상기된 낯빛으로 부르짖고있었다.

석홍범은 좀처럼 자기 존재를 드러낼줄 모르던 저 처녀가 많은 남자들이 둘러앉은 좌석에서 이렇게 나올줄 몰랐다. 참말이지 예상할수 없는 일이였다. 뚫어질듯 마주보는 처녀의 눈에는 석홍범에 대한 의분과 함께 사태가 더 크게 번지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대가 비껴흘렀다. 뜻하지 않은 일에 굳어졌던 석홍범은 눈길을 떨구었다.

《동무들, 미안합니다.··· 자, 마십시다.》

그는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성급히 마시였다.

어색해진 방안의 공기는 가셔질줄 몰랐다.

《난 몸이 불편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잠시후에 물리학연구사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뒤따라 다른 사람들도 일어섰다.

석홍범은 굳이 만류하지 않았다. 손님들을 문밖까지 바래우고 돌아온 안해가 어수선해진 방안에 홀로 앉아있는 석홍범에게 안타까이 원망을 터뜨렸다.

《당신은 왜 그렇게 분별없이 처신을 하나요? 부엌에서 다 들었어요. 세상 령리한것 같으면서도 제일 어리석은 바보가 당신이예요.》

《이러나저러나 나를 정확히 리해하는 사람은 역시 당신이구려. 옳게 말했소, 나는 바보요.》

석홍범은 안해를 거들떠보지 않으면서 절통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겹쌓인 자기 환멸의 고통속에서 새여나오는 그 목소리는 민옥에게 눈물이 날만큼 애절하게 들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