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1

 

제 1 장

1

 

머리를 추켜들고 빠른 속도로 솟구쳐오르던 대형려객기가 수평으로 날며 자기 항로에 들어섰다. 베이징을 떠나 평양으로 돌아오는 우리 나라 고려항공회사의 비행기였다. 비행기밑으로는 이따금 엷은 구름장들이 흘러갔다. 구름이 사라지면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도시와 마을들이 희미하게 륜곽을 드러냈다.

기창들로 찬란한 해빛이 따스하게 흘러들었다.

마음의 안정을 찾은 손님들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가볍게 울리는 발동기의 은은한 동음은 음악의 반주처럼 오고가는 대화에 활기를 더해주었다. 비행기소리가 은연중에 자유로이 창공을 날고있다는 유쾌한 기분을 깨우쳐주기때문일것이다. 구석구석에서 조선어와 중어, 영어와 로어로 주고받는 말소리들이 들리였다.

그러나 왼쪽의 세번째 좌석에 나란히 앉은 두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들은 일본을 다녀오는 우리 나라의 이름있는 금속공학자인 양영복박사와 그의 조수인 박치영연구사였다. 성긴 백발에 몸집이 체소한 양영복박사는 리륙할 때 매였던 안전띠를 아직 풀지 않은채 조는듯 눈을 감고있었다. 지그시 감은 눈까풀이 이따금 떨리는것으로 보아 그 무슨 아픔을 느끼는것 같았다. 강마른 얼굴에 병색이 돌았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박치영은 생기와 활력에 넘친 모습이였다. 얼굴에는 윤택이 흘렀고 기창을 겨눈 두눈은 영채롭게 빛났다. 처음으로 외국려행을 해본 그였다. 려행기간에 이웃나라들에서 보고 느낀 모든것은 그에게 이런저런 인상을 남기였다. 그는 양영복박사와 무슨 이야기이든 나누고싶었으나 잠이 든듯 한 로인에게 말을 걸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창밖으로 흐르는 광막한 우주공간과 아찔하게 내려다보이는 눈덮인 대지에 번갈아 시선을 주었다. 이제 얼마후이면 비행기려행이 끝나버린다. 8 000메터의 고공에서 하늘과 땅을 바라보는 특이한 광경을 머리속에 깊이 새겨두려는듯 박치영은 기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음―》

느닷없이 옆좌석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박치영은 머리를 돌리였다.

양영복박사가 얼굴을 찌프리며 눈을 감은채 앙상한 손으로 가슴을 쓰다듬었다.

《선생님···》

박치영은 당황한 기색으로 로인의 팔굽을 잡았다.

《선생님, 심장이 또 발작하는게 아닙니까?》

한껏 근심어린 목소리였다.

《리륙을 할 때부터··· 가슴이 활랑거리더니··· 끝내 띠끔거리누만.》

양영복은 힘겹게 눈시울을 벌려뜨며 다시 가슴을 쓰다듬었다.

박치영은 난색을 지으며 한숨을 삼켰다. 듣고보니 양영복선생은 여적 평온히 잠에 든것이 아니였다.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눈을 감고있었을뿐이다.

《안내원동무!》

박치영은 복도를 지나가는 안내원을 불러세웠다.

《우리 선생님이 불편해하시는데 무슨 대책이 없겠습니까?》

《왜 소동을 일으키오? 내 병이야 아는 병인데···》

양영복이 박치영을 가볍게 꾸짖었다.

날씬한 몸매에 진곤색제복을 단정히 입은 안내원처녀는 앞의자의 뒤주머니에서 비닐봉지를 꺼내들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멀미가 나시면 여기다 토하십시오.》

비행기안에서 몸이 불편하다면 그것은 대체로 멀미를 하기때문이다. 그래서 안내원처녀는 양영복도 멀미를 하는줄로 안 모양이다.

《아니, 나는 멀미를 하는게 아니요. 심장이 좀 나빠서···》

양영복은 처녀에게 안심을 하라는듯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랬으나 처녀는 더욱 표정이 긴장해졌다. 멀미라면 례사롭다고 할수 있겠지만 심장탈이라니 가볍게 대할수가 없다고 생각하는것 같았다.

《심장이 어떻게 아프십니까? 무슨 약이 필요합니까?》

처녀는 거듭 친절히 물었다.

《걱정하지 마오. 나한텐 비상약도 있소.》

양영복은 넥타이가 흘러내린 옷깃사이로 손을 넣어 자그마한 수지통을 꺼내 열더니 흰약 한알을 혀밑에 넣었다.

《몸을 편히 등받이에 눕히십시오.》

안내원처녀는 의자에 붙은 자동단추를 눌렀다. 등받이가 뒤로 비스듬히 젖혀졌다.

《고맙소. 처녀동무, 이젠 됐으니 돌아가보시오.》

안내원처녀는 얼마후에야 자리를 떴다.

뒤로 젖혀진 의자등받이에 몸을 눕히고 두다리를 길게 뻗친 양영복은 다시 눈을 감았다.

박치영은 마음을 놓지 못하고 그를 지켜보았다. 고령의 나이에 심장발작이 거듭되면 위험할수 있었다. 동통이 가셔지고 평온한 잠에 들기를 바라며 가슴을 조이였다. 로인의 가슴에 보이지 않는 청진기를 대고 귀를 강구는것처럼 그의 숨결소리를 듣고있었다. 점차 숨결이 고르로와지기 시작했다. 얼굴에도 평온한 빛이 되살아났다. 박치영은 안도의 숨을 내불며 머리를 들었다. 그 순간 혼자말로 중얼거리는 양영복의 목소리가 들리였다.

《실패한 려행에 심장탈만 도졌으니···》

말끝을 채 맺지 못하는 그 목소리는 절통하게 울리였다.

박치영은 로인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눈은 감고있었으나 얼굴에는 고뇌가 비껴있었다. 심장의 아픔이 숙어들면서 또 다른 마음의 아픔이 로인을 괴롭히고있는것이 분명했다.

박치영은 무엇때문에 양영복박사가 그처럼 마음속으로 괴로와하는지를 알고있었다. 조국에 도착할 시간이 가까와올수록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난감한 처지를 두고 한스러워하는것이다.

지난해말에 양영복박사가 이끄는 연구집단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티탄합금생산기술을 개발했다. 20년간의 고심어린 탐구의 노력끝에 이루어진 성공이였다. 작년 12월에는 그 기술이 생산에 도입되였다. 9월제련소에서 본격적으로 티탄합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우리 나라 금속공업발전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하나의 획기적인 사변이였다. 그러나 생산된 티탄합금을 여러가지 형태로 만들수 있는 가공기술의 개발이 다음과제로 남아있었다. 그것은 누구도 손을 대보지 못한 전혀 생소한 과제였다.

양영복조차도 가공기술개발이 자기로서는 전혀 불가능하다고 실토했다.

과학원과 정무원에서는 여러차례의 토론끝에 가공설비만은 수입하기로 하였다. 그중 현대적이고 능률적인것이 최근년간에 일본에서 개발되였다고 하였다. 해당 부문의 일군들은 일본의 어느 한 회사와 구입계약을 맺았다.

가공설비를 접수하기 위해 양영복은 박치영을 데리고 일본으로 갔다. 박치영은 젊은 나이였지만 과학기술적판단과 추리가 누구보다 명민하고 예리했다. 현지에서 설비의 기술적성능과 작업공정을 환히 꿰뚫어보는데는 그의 총명한 머리와 밝은 눈이 필요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소에 온지는 몇년밖에 안되지만 티탄합금생산기술을 완성하는데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양영복은 박치영과 같이 똑똑한 조수를 두고있는것을 다행으로 여기였고 그만큼 그를 사랑하기도 하였다.

첫 며칠간은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는듯싶었다. 거래를 이어준 일군을 따라 회사에 가보니 듣던바대로 팔겠다는 티탄합금가공설비는 마음에 들었다. 소재가열로며 압착가공공정들이 고도기술로 완비되였다. 쌍방간의 면담이 계속되던 끝에 설비의 가격이 흥정되였다.

마침 그무렵에 니이가다항에 정박하고있던 우리 나라의 《만경봉》호가 나흘후에 떠나기로 되여있었다. 우리측에서는 그 배편으로 설비를 실어오려고 서둘렀다. 우리의 요구대로 회사측은 설비를 니이가다항으로 날라갔다.

그런데 다음날 천만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여적 상대를 하여오던 회사의 전무라는 사나이가 난색을 지으며 나타났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정황이 생겨서 부득불 판매계약을 취소해야 하겠습니다.》

판매계약을 취소하다니? 이것은 도대체 무슨 변덕인가? 양영복은 한순간 억이 막혀서 아무 말도 못했다. 한껏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비비고있는 전무를 뚫어지게 바라볼뿐이였다.

《무슨 까닭입니까?》 박치영이 물었다.

《당국에서 세관을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리유인즉 코콤에 저촉되기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통산성과 법무성에까지 제기했는데 끝내 승인을 받지 못했습니다.》

《코콤?!》

양영복은 저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흥분한탓으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국주의나라들이 조직한 대공산권수출조정위원회(략칭 코콤)에는 나토성원국들과 일본이 들어있었다. 그들은 사회주의나라들에 대한 전략물자와 고도기술봉쇄를 목적으로 이러한 기구를 내오고 일련의 수출금지항목을 제정했던것이다.

《저희들은 국가간의 무역이 아니라 민간급의 거래인것만큼 고도기술제품이라 하더라도 무사할줄 알았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코콤의 적용한계를 구체적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거래에 응하였던 우리 측의 불찰로 공연한 걸음을 하게 하였습니다. 참말로 미안합니다.》

상대는 머리를 가볍게 숙여보이며 량해를 구하였다. 세계 여러 나라와 거래를 하는 회사의 판매업무를 맡아보는 전무는 멀쑥한 용모에 사리와 례절도 밝은 사람이였다.

양영복은 가슴 한귀가 꺼지는듯 한 좌절감을 느끼며 무겁게 침묵했다. 듣고보니 회사측으로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정치적 고려보다 리윤추구를 앞세우는 회사는 설비를 한대라도 더 팔려고 했을것이다. 드러내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회사의 전무도 당국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있는것이 분명했다.

《당신의 딱한 립장을 리해합니다. 그런 정황이 조성되였다면 계약을 취소합시다.》

하는수없이 수긍했으나 가슴속에서는 참을수 없는 의분이 끓어올랐다. 만일 일본통산성이나 법무성의 관리가 곁에 있었다면 멱살을 거머쥐고 따지고싶었다. 이놈들아, 수십년간 우리 나라를 강점하고 저지른 과거의 죄악을 반성할 대신에 아직까지 우리에게 적대감을 고약스럽게 품고있는 네놈들을 력사는 용서치 않을것이다!

《양선생!》

숨을 몰아쉬며 창쪽을 응시하던 양영복은 상대의 친절한 부름소리에 머리를 돌리였다. 상대는 어느새 미안스러운 기색을 가시고 그 무엇을 기대하는듯 한 낯빛이였다.

《이번 일은 유감스럽게 되였지만 우리는 앞으로 코콤에 저촉되지 않는 한계내에서 거래를 계속하고싶습니다.》

《그것은 어떤것을 념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까?》

양영복은 무심히 물었다.

《북조선에서 생산되는 티탄합금을 우리에게 팔아주십시오. 북조선의 공업이 아직 티탄합금으로 가공한 제품을 대량 요구할만 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것으로 알고있는데 필요한 제품들은 우리 회사에서 가공해드리겠습니다. 귀측에서는 가공설비까지 도입하지 말고 원자재그대로 우리에게 파는것이 합리적일것입니다.》

《그러니 고도기술제품은 당신네가 만들고 우리는 거기에 필요한 원자재를 팔아달라는겁니까?》

양영복은 참을수 없는 모욕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점잖고 례절바른 사람으로 여겨지던 상대가 갑자기 딴사람으로 변신된듯싶었다. 마주앉은 그의 웃음기어린 해말쑥한 얼굴이 부릅뜬 눈앞에서 흔들리며 또 다른 한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와이샤쯔소매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팔에 토시같은 덧소매를 끼고 주산을 튀기던 일본사람, 눈앞에 현실적으로 앉아있는 일본인과 얼핏 환영속에서 떠오르는 일본인은 생김새와 차림이 전혀 비슷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이 순간에 두사람의 얼굴이 눈앞에서 겹치는것인가? 불현듯 청춘시절에 있었던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해방전 도꾜의 어느 리공과대학 금속물리학과에 다니던 때의 일이였다. 어느날 대학의 게시판에는 경리계의 공시가 나붙었다. 여러 학기 공납금을 내지 못한 학생들의 이름을 렬거한 공시였다.

네번째 순서에 양영복의 이름도 있었다. 참을수 없는 치욕의 눈물속에 바라보았던 글발이여서 그 순서는 물론 그 무슨 역스러운 감정을 가지고 이름자들을 휘갈겨쓴듯 한 필체까지도 아직 기억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공시의 마감에는 제 기한내에 밀린 공납금을 전부 바치지 못하면 출학처분을 한다는 경고가 덧붙여있었다. 무거운 걸음으로 경리계를 찾아간 양영복은 절박한 사정을 저저이 이야기하며 기한을 좀 더 연기해달라고 간청했다. 주산을 튀기던 경리계의 한 작자는 이렇게 응대했다.

《학생의 사정이 어렵다는것을 아오. 나는 학생이 학비를 벌기 위해 철도역에서 짐군노릇도 하고 남의 집 변소도 쳐내는것을 여러번 보았소. 그런데 그처럼 힘겹게 공부를 해서는 뭘하겠소? 나는 일본에 와서 고학을 하는 조선학도들을 보면 가긍한 생각이 드오. 조선이나 만주를 포함한 대일본제국의 번영에 필요한 과학기술인재는 우리 내지의 선발된 학도들만으로도 충분하오. 그런데 학생은 공연히 고학을 하면서 본인이 고생을 하는것은 말할것도 없고 학비미달로 우리 대학의 경영에까지 지장을 주고있단 말이요!》

그자의 길쑴한 얼굴에는 안타까운 동정의 빛이 흘렀다. 제 푼수를 모르는 바보의 불쌍한 정상을 바라보는듯 한 표정이였다.

양영복의 눈에는 총칼을 휘두르는 왜놈경찰이나 헌병보다도 그자의 몰골이 몇배로 더 가증스럽게 비끼였다. 폭력으로 가해지는 육체적아픔은 참을수 있었다. 그러나 자기의 인격과 민족의 존엄에 가해지는 정신적모욕은 참을수 없었다. 분별을 잃을만큼 의분이 치밀었다.

《이놈아, 무엇이 어째? 네놈들의 두뇌가 우리한테 필요한 과학기술을 해결해준다고?》

양영복은 무섭게 달려들며 그자의 면상을 후려쳤다.

그 다음날 그는 대학에서 쫓겨났다.···

그때 골수에 사무쳤던 기억이 현실과 교차되고있다. 그때로부터 반세기이상의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어쩌면 아득한 옛시절 대학의 경리계원과 지금 마주앉은자의 뇌까림이 신통히도 그 의미가 같을가? 선심이나 동정을 보내는듯 한 표정까지도···

《왜 그리 놀라십니까? 조선의 현 공업실태를 볼 때 티탄합금을 원자재 그대로 우리에게 파는것이···》

일본회사의 전무는 갑자기 이상해지는 이쪽의 낯빛을 의아스레 살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양영복은 자제력을 잃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주먹이 부서지도록 앞탁을 내리쳤다.

《똑똑히 알아두시오! 우리는 어제날의 조선사람이 아니요!》

그리고는 심장발작으로 졸도해버렸다.

양영복의 돌발적인 행동에 일본사람은 그만 어리둥절했다. 면담의 흐름으로 보나 외교관례로 보면 양영복의 행동은 리해할수 없는 상식밖의 무례한것이였다.

해쓱하니 질린 얼굴로 양영복을 부축하던 박치영조차도 그가 어찌하여 그토록 격분에 몸부림쳤는지 알지 못했다.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간 양영복이 의식을 차리고 그 사연을 들려주었을 때에야 리해가 되였다.

그후 며칠간 총련의 도움으로 병원에서 안정치료를 받은 후 양영복은 박치영과 함께 귀국의 길에 올랐다.

어느새 비행기는 발해만상공을 날고있었다.

양영복은 여전히 두눈을 깊이 감고 뒤로 젖혀진 의자등받이에 편안히 몸을 눕힌채 움직이지 않았다. 리륙할 때의 충격으로 쑤시던 심장의 아픔이 점차 가셔지는것을 느끼며 안정에 잠겨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만은 그렇지 않았다. 조국이 가까와올수록 일본에서 받은 충격과 빈손으로 돌아가는 허전함이 더욱 마음을 괴롭혔다.

안내원처녀가 우리 나라의 화보와 신문들을 날라왔다.

《선생님, 아직 몸이 불편하십니까?》

오른손에 신문을 받쳐든 안내원이 양영복에게 묻는 말이였다.

양영복은 흔연해지려고 애쓰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그리였다.

《아니, 어지간히 진정되였소.》

《신문을 보시렵니까?》

《물론.》

양영복은 의자등받이에 젖혔던 몸을 바로세우고 신문을 받았다. 안내원은 곁에 앉은 박치영에게도 같은 신문을 주었다. 여기저기서 화보와 신문을 번지는 소리가 들리였다. 그대신 기실안에는 정숙이 깃들었다. 누구나 화보와 신문을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신문을 펼쳐든 양영복은 돋보기를 찾아서 코등에 걸었다. 신문의 활자들이 시야에 안겨들었다. 그 내용을 읽기에 앞서 그 무슨 반가운 상봉이라도 하는듯 한 감정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조국을 떠난후로 처음 보게 되는 우리의 당보였다. 그동안 조국에서는 어떤 변화들이 있었을가?

어제호의 하루신문에서 지난 20여일간의 소식을 다는 알수 없을것이다. 그렇다는것을 알면서도 조국의 소식에 궁금하던 심정을 모두 풀어버릴듯 한 기대를 가지고 글줄을 더듬었다. 신문에는 새해(1988년)벽두부터 사회주의건설에서 위훈을 떨쳐가는 각지 근로자들의 로력투쟁소식이 실려있었다. 특별히 눈에 띄우는것은 광복거리, 릉라도경기장, 양각도축구경기장, 국제영화관건설소식이였다. 평양에서는 명년에 있게 될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앞두고 전례없는 건설이 벌어졌다. 그 많은 건설대상들이 인제는 마감단계에서 추진되고있었다.

《이처럼 힘찬 투쟁이 벌어지는데 그동안 우리는 려비만 쓰면서 헛되이 세월을 보냈구만.···》

양영복은 신문에 눈길을 준채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선생님, 이번 려행이 우리에게 아무런 소득도 없는것은 아니였습니다.》

박치영은 들고있던 신문을 무릎우에 내려놓고 이쪽으로 머리를 돌리였다.

양영복은 놀라운 눈길로 박치영을 쳐다보았다. 불쾌한 일만 당하고 빈손으로 돌아오는데 그 무슨 소득이 있단 말인가?

박치영은 의아해하는 양영복의 시선을 느끼며 헌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는 이번에 많은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처음으로 외국려행을 해본 인상을 념두에 두고 하는 말인가?》

《그것만이 아닙니다. 설비를 보고 과학기술적인 지식도 새롭게 얻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동무라도 소득이 좀 있다니 반가운 일일세.》

양영복은 박치영을 미덥게 바라보며 대견한 미소를 그리였다.

《손님여러분, 곧 평양비행장에 착륙하게 됩니다. 착륙준비를 갖추어주십시오.》

고성기에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박치영은 서둘러 양영복의 허리에 안전띠를 둘러주고 의자를 뒤로 젖혀주었다.

 

×

 

《양선생일행을 고중환부부장동지가 만나겠답니다. 이제 곧 당중앙위원회로 갑시다.》

비행장에 마중을 나온 일군의 말이였다.

고중환은 당중앙위원회에서 과학사업을 맡아보는 책임일군이였다. 그가 다른 나라에 갔던 대표단을 돌아오는 즉시로 만나는 일이란 흔치 않았다.

티탄합금가공설비의 구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으며 양영복과 박치영은 차에 올랐다.

반시간후에 그들은 고중환과 마주앉았다. 고중환은 환갑을 바라보는 지숙한 나이에 키가 후리후리하고 얼굴이 길쑴한데 그의 사려깊은 눈매와 세련된 언행은 어딘가 모르게 학자풍의 인상을 짙게 풍기였다. 하긴 젊은시절의 한때를 대학교단에서 보낸 그였다.

양영복의 경과보고를 주의깊게 듣고난 고중환은 시선을 앞상에 떨어뜨리며 상심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쪼프린 눈가장자리에 어두운 그늘이 비끼였다. 좀해서는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였지만 지금은 내심의 실망감을 어찌할수 없는 모양이다.

《일이 그렇게 되였군요. 티탄합금가공은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그처럼 큰 관심을 돌리시는 문제인데···》

잠시 숙였던 머리를 들며 고중환은 양영복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채 끝내지 못한 그의 말이 안타까운 눈빛에 실려있었다.

양영복은 응대를 못하고 얼굴을 가볍게 붉히였다. 티탄합금가공설비를 사오지 못한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여태껏 생각해왔다. 그러나 고중환의 시선에 부딪치고보니 면담석상에서 폭발적으로 격분을 터뜨렸던 자기의 불찰로 일이 튄것만 같은 자책감이 머리속을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