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2

제 6 장

2

 

사람들이 정신없이 뛰여다녔다. 누군가 쓰러진 고영란을 둘쳐업고 뛰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며 왁왁 고아대였다.

《무슨 일인가, 엉?!···》

《가만, 누가 어떻게 됐다구?···》

《그런데 환자를 업고뛰는건 뭐야. 그렇게 들추어놓으면 어쩐다는거야, 엉?···》

《여, 왜 막아서?》

《동무, 정신나가지 않았어?···》

현장을 돌고있던 방송차를 막아서며 목터지게 고함치는 사람도 있었다.

《차를 세워, 빨리!···》

《무슨 일이요. 어째 그러오?···》

《추락사고가 났소. 2중판직장의 고영란이란 녀동무요.》

현장치료대의 의사들이 뛰여오고 얼마후엔 대형산소분리기건설공사의 책임자인 허필웅도 소문을 듣고 정신없이 달려왔다. 그런데 이미 고영란은 병원에 실려간 뒤였다.

허필웅은 머리를 쥐여뜯다가 좀전까지 고영란이 일했다는 팽창기조립장으로 올라가 함흥화학설계사업소에서 온 젊은 기사를 만났다. 그리하여 그한테서 어떤 고수머리청년이 찾아와 무어라고 싱갱이를 벌리더니 그런 끔찍한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장봉구이다. 그 개대가리같은 녀석이 또 나타나 일을 저지른것이 분명했다.

하여 그는 분노를 참을수 없어 소리질렀다. 마치 장봉구 그녀석이 눈앞에 서있기라도 한듯 으스러지게 틀어쥔 두주먹을 후들후들 떨며 울부짖었다.

《야, 장봉구 이놈! 너같은 놈 열이나 백을 주어도 고영란이하군 바꾸지 못해. 알기나 해? 이 자식아, 우리 영란이 잘못되기라두 해봐라. 내 네녀석 가랭이를 찢어놓을테다. 똑똑히 알아둬. 이건 빈소리가 아냐. 알겠어?》

그런데 허필웅이보다 먼저 장봉구를 찾아내여 혼뜨검을 낸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이전 해군사관이였던 제1강철직장의 용해공 박철진이였다.

 

×

 

그날 철진은 저녁무렵 기차에서 내린 어머니를 만나보고 옥영이를 찾아갔었다. 인제는 옥영이와 숨박곡질을 끝장낼 때도 되였다. 아니,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교대운전공처녀의 말에 의하면 옥영이가 어떤 총각을 만나러 새로 만든 《오작교》쪽으로 갔다는것이다.

처음엔 뜻밖의 일에 놀라 아무 의미도 없이 열적은듯 웃으며 어떤 총각이냐고 물으려 했으나 곧 입술을 깨물고말았다. 그렇게 묻는다는것은 곧 서옥영에 대한 불신으로 되기때문이였다. 하여 그는 땀자욱으로 얼룩진 얼굴을 손으로 벅벅 훔치며 걸음을 다우쳐갔다.

그러나 멀리 가지 않아도 되였다. 서옥영은 성구직장앞 이전의 연진늪, 새로 꾸린 못가에서 웬 고수머리젊은이와 마주서있었던것이다. 어둡기 시작했지만 그 녀자의 자태만은 사진에서처럼 또렷하였다. 마주선 사람이 고수머리라는것도 확연히 알렸다. 그런데 그들이 서있는 늪가야말로 얼마나 알뜰히 꾸려져있는가, 이전에는 시꺼먼 감탕만 고여있던 연진늪이 지금은 맑은 호수로 변하였다. 전진욱책임비서가 말하던 사랑의 못, 그 못가운데로 건너간 사랑의 다리 《오작교》··· 그것이야말로 서옥영이와 저 낯모를 고수머리총각을 위해 우정 만들어놓은것은 아닌지?···

철진은 새로 심은 가느다란 뽀뿌라나무에 기대선채 더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무연탄아궁이에서처럼 파란 불길이 날름거리며 타기 시작했다. 속이 타고 목구멍이 타고 혀바닥까지 타들었다.

그때 저 앞쪽의 늪가에서 서옥영의 목소리가 느닷없이 날카롭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말이라구 해요? 동무가 약혼녀인 영란이를 버리구 어느 간부댁 딸과 같이 돌아칠 때부터 우린 다 알고있었어요. 그런데 그 간부댁에서 쫓겨나니까 이제 와선 영란이가 받자 하지 않아 그랬다구요? 동문 정말 비렬하군요. 영란이를 죽게 만들고도 무슨 할 말이 있다는거예요?》

철진은 비로소 옥영이가 마주하고있는것이 지금 온 공장이 떠들썩하는 그 고수머리연구사 장봉구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어떻게 되여 옥영이가 저따위 녀석과 마주설수 있단 말인가?··· 철진은 그 어떤 고약한 심보를 가진 사람도 사랑과 믿음을 주면 새롭게 갱신된다는것을 길지 않은 자기 생활을 통하여 수차 체험했었다. 사회에서 말썽을 부리던 사람들이 군사복무과정에 새롭게 태여나는것을 여러번 보았던것이다.

그러나 죽어도 자기 악습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사랑과 믿음의 배신자들이 그러하다. 밤에도 한생토록 가슴에 지니고 살 열렬하고 정찬 사랑에 대하여 아름다운 시구절처럼, 노래가락처럼 뜨거운 입김을 내불며 읊조리다가도 날이 새면서 열이 식으면 어느덧 하품을 하고 마주보기 열적어하며 간밤의 약속을 입에 물고 피우던 담배대처럼 스스럼없이, 아낌없이, 무정하게 재털이에 비벼 꺼버리는자들, 그런자들이 우리들속에도 있다. 지금 옥영이가 마주서서 헛되이 열을 올려 그 무엇인가를 단죄하고있는 저 고수머리연구사 장봉구와 같은자들이 바로 그러하다.

박철진은 두사람에게로 걸어갔다. 어찌나 격동되였던지 그의 몸 어데선가, 으스러지게 틀어쥔 주먹에서인지 아니면 단단한 어깨에서인지 뼈마디소리가 우적거리는듯 했다. 그러나 서로 마주서있는 두 남녀를 헤치고 장봉구앞에 나섰을 때 그의 입가에는 랭소같은것이 떠올라있었다.

《네가 온 공장에 소문을 낸 장봉구야?》

박철진은 왼쪽눈시울을 바르르 떨고있었다. 목소리는 나직하나 거칠고 몰풍스러웠다.

《왜 말을 못해? 난 하나강철직장 용해공 박철진이야. 내 장봉구란 연구사가 얼마나 너절한 자식인가 하는 말 많이 들었댔는데 정작 이렇게 만날줄은 몰랐다. 그래 만난김에 좀 물어보자. 너 군대 나갔댔어?》

《동문 또 누구요? 도대체 어쩌자구 다들 쫓아다니며 못살게 구는거요?》

장봉구가 비실비실 뒤걸음치며 겁에 질린 소리로 부르짖었다.

《하ㅡ 못살게 군다?··· 이게 어디서 놀아먹던 자식이야!》 어느새 박철진은 장봉구의 둥실한 어깨를 움켜잡고있었다.《어서 말해봐. 군대에 나갔댔나 묻지 않아?》

서옥영이 철진의 팔에 매달렸다.

《이러지 마세요. 그러다가 일을 치면 어쩌자구. 예?··· 정말 어쩌자는거예요?》

《말해봐 군대 나갔댔어?》

《못 나갔댔소. 헌데 그게 어쨌다는거요?》

《어쨌다는건가? 야, 이 자식아. 너 군대에두 못 나갔댔으니까 그따위 너절한 놈이 됐지? 그래 성강이 자랑하는 처녀를 배반하구두 뭐가 어쨌어? 네가 바라던 그 잘난 간부댁에나 가서 흥청거리며 살것이지 여긴 왜 또 왔어?》

《이걸 놓소. 이걸···》 하고 장봉구는 억센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해 몸부림쳤다. 《이건 좀 놓구 말합시다. 예?》

철진은 그의 멱을 놓았다.

《그럼 말해봐. 여긴 뭣하러 왔어. 응?》

장봉구는 한동안 아무말 없이 괴롭게 기침소리를 터치며 박철진이 움켜쥐였던 목을 우로 좌로 돌려보고있었다. 마치 목대가 부러지지 않았나 확인해보는듯 하였다. 이윽고 그는 멀리 대형산소분리기건설장의 불빛에 비쳐진 박철진의 모습을 눈여겨보더니 갑자기 수닭처럼 덤벼들 자세를 취하였다.

《난 동무가 무슨 권리로 나를 모욕하는지 모르겠지만 한가지만은 말해줄수 있소. 지금 이런저런 소문이 나돌고있긴 해도··· 알아두시오. 사랑하는 사람들사이에선 본의아니게 오해도 생기고 억측도 있는 법이요.》

《뭐 오해? 억측?》

《그렇소!》 장봉구도 승이 나서 떠들었다. 《난 고영란일 정말 정열적으로 사랑했소. 그런데 우리들사이에 별치 않은 오해가 생겨 소리가 좀 났던거요. 그런 일이야 아무 집에나 다 있을수 있는게 아니요? 그래서 난 다시 결합되기를 바라서 찾아왔단 말이요. 그게 뭐가 나쁜가? 사실 공장에 다시 돌아오려구 한것두 그래, 약혼녀인 고영란이와 정식 가정을 이루려고 한것두 그래 뭐가 어쨌다구 다들 떨쳐나서서 이렇게 떠들어대는가 말이요? 누가 그럴 권리를 주었소. 날 심판할 권리를 누가 주었나 말이요. 예, 누가?》

철진은 장봉구의 열화같은 언변에 그만 입을 딱 벌린채 굳어져있었다. 그러나 다음순간 남들이 하던 말을, 장봉구가 어느 간부댁딸과 같이 돌아가다가 그 집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상기하자 얼굴에 확 피가 끓어올랐다. 여전히 도전적이고 뻔뻔스러운 그를 보려니 불을 삼킨듯 목구멍이 타들고 숨이 칵 막혔다.

《거짓말!》 하고 그는 휘파람소리같이 부르짖었다. 《네가 사랑이 뭔지 알기나 하구 그따위 헛나발이야? 뭐 가정을 이루겠다구? 누가 너따위와 가정을 이루겠대?》

《모욕하지 마시오. 동문 도대체 무슨 권리루···》

장봉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분노한 박철진이 다시 힘껏 멱을 조이며 늪쪽으로 끌어내기 시작한것이였다.

《권리가 있다. 있어!··· 너같이 너절싸한것들을 모욕할 권리가 있어. 너 같은것들을 시궁창에 처박을 권리가 있단 말야.》

다음순간 장봉구는 이상한 비명소리와 함께 뒤쪽의 늪속에 첨벙 빠져들어갔다. 철진이 그를 허궁 들어 내던진것이였다. 헉!ㅡ 하는 소리와 함께 퍼릿한 달빛이 내린 물속에 시꺼먼 형체가 쑥 빠져들더니 잠시후 먼저 머리가 솟아오르고 이어 온몸을 솟구친 장봉구가 한팔을 허우적거리는것이 보였다.

얼결에 늪의 찬물을 먹었는지 입에 들어찬것을 푸푸 내뿜기도 했다.

너무도 급작스러운 일에 깜짝 놀란 서옥영이 두손을 앞가슴에 모아쥐고 가늘게 부르짖었다.

《아니, 어쩜 그렇게?··· 그러다가 사람을 쳤다구 걸기라도 하면 어쩌자구?···》

《사람을 친게 아니라 비도덕을 친거요. 다시말하면 도덕적인 심판이지. 더러운것들은 그저 짓밟아버려야 해!》

《그래도 어쩌믄··· 가서 도와줘야 하지 않아요?》

그러나 옥영은 늪가로 한발자욱도 내짚지 못하였다. 박철진이 그 녀자의 팔목을 세괃게 틀어잡았던것이다.

《놔두오. 죽지 않아. 저런건 아마 우물에 빠뜨려도 드레박에 매달려 올라올거오.》

아닐세라 물참봉이 된 장봉구가 엉기엉기 기여나오더니 오한이 나는듯 오리처럼 으스스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크낙한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거쉰 소리로 울부짖었다.

《가만두지··· 아ㅡ 않겠어. 저ㅡ절대 가만두지 않아. 이제 너들을 신소하지 아ㅡ않나 두고봐라.》

《신소?!》 하고 철진이 맞받아 소리쳤다. 《야, 장봉구! 너 이런 말 들어봤어? 아이가 떠들면 매를 맞구 개가 너덜거리면 범이 물어간다는 말!··· 그리 알구 입이나 다물구있어. 네가 암만 떠들어도 너 같은 자식 위해줄 사람 여기 성강땅엔 하나두 없어.》

철진은 다시 그쪽으로 가려고 움씰하는 옥영이를 힘껏 잡아끌었다. 너무 세괃게 팔목을 틀어잡은탓인지 서옥영이 가늘게 신음소리를 내는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따위 녀석 돌아보지도 마오.》 하고 그는 장봉구에 대한 혐오와 증오로 하여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그깐놈 상관하지 말라는데! 아마 다신 이 성강땅에 얼씬거리지 못할거요.》

그는 옥영이를 이끌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자, 빨리 가기요. 내 오늘 동물 얼마나 찾았는지 아오? 그런데 여기 시꺼먼데서 저따위 녀석과 마주서있다니.》

《이보세요. 날 어데로 끌고가는거예요. 예?》

《가면 알게 돼.》

진득진득한 어둠이 송령천기슭을 덮고있었다. 봄철이라지만 아직도 밤은 찼다. 송령천에서 물안개가 피여오르는듯 했다. 서옥영은 산산하고 아릿한 봄밤의 대기를 정신없이 들여마시며 그가 끄는대로 숨이 차서 따라갔다. 무엇때문인지 이전처럼 발버둥치지도 않았고 제발 놓아달라고 애원하지도 않았다. 인제는 그가 장봉구를 그랬듯이 옥영이 자기마저 물속에 처넣어도 꼼짝하지 못할것만 같았다. 몸도 마음도 허락하고 송두리채 맡겨버려서 속이 텅 비여버린것 같은 공허한 심정이였다.

철진은 단 한순간도 옥영이의 손을 놓지 않았다. 송령천다리를 건느고 지휘부건물을 가까이하면서 가로등이 비치고 오가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정문쪽의 투광등불빛속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자기쪽으로 더 바싹 당기기까지 했다. 그럴수록 옥영은 숨이 차오르고 얼굴은 화끈거리다못해 눈보라를 들쓴것처럼 때끔거리는것을 느꼈다.

《인젠 놓으세요. 제발···》

《안돼. 다신 놓아주지 않겠소.》

애젊은 보위대원이 두사람을 놀라서 바라보고있었다. 마치 그들 두 남녀가 어느 외국영화의 화면에서 불쑥 빠져나오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는듯 덩둘한 표정으로 두눈만 사뭇 슴벅거리고있었다.

《고난의 행군》에 이어 강행군을 하고있는 어려운 이 시기 수수한 로동자들의 도시이며 사치를 모르는 철의 도시인 여기 쌍포지구에서 남녀가 팔을 끼고 눈부신 투광등빛을 맞받아나가는것은 도저히 있을수 없는 일로, 보기에도 새망스러운 일로 여기고있기때문일것이다. 그러건말건 철진은 옥영이의 손을 꼭 잡은채 두눈을 디룩거리는 애젊은 보위대원의 앞을 거침없이 지나갔다.

정문에서 합숙까지는 멀지 않다. 합숙에 이르자 서옥영은 가슴이 옥죄여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불시로 웬 처녀의 천연색사진을 들고 앉아있던 박철진의 어머니가 눈앞에 떠올랐다. 그 어머니가 옥영이 자기를 측은한 눈빛으로 여겨보던것도 생생했다. 하여 그는 발을 벋디디며 멈추어섰다.

《난··· 싫어요. 인젠 돌아가겠어. 날 놔줘요.》

《그러지 마오.》 박철진이 조용히 말했다. 《여기까지 따라오구선 갑자기 왜 그러오?》

《집에 가야겠어요. 난···》

《집엔 같이 갑시다. 그저 여기 잠간 들렸다 가면 되오. 저기 내방에서 지금 옥영이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소.》

《그럼 또 우리 수림이를?》

《수림이도 있구···》

별안간 옥영은 그한테 속히운것 같은 느낌에 저도모르게 주먹을 입에 가져가며 깨물었다. 어리숙해서 따라서던 자기의 가슴에 던져진 하나의 작은 조약돌, 그것이 이토록 가슴을 아프게 때릴줄은 몰랐었다.

《동문··· 끝까지 날··· 괴롭히지 못해 그러는데···》 하고 옥영은 그에게서 싸늘하게 식어버린 손을 빼내면서 숨찬 목소리로 허덕이였다. 《동문 도대체 뭐예요. 결혼을 하기루 했다면서 계속 우리 수림이를 끌어당기면··· 어쩐다는거예요. 예?》

《내 이미 말하지 않았소. 수림이 아버지가 되겠다구···》

《보기 싫어. 정말 너절해요. 아까 장봉구 그 사람과 다른게 뭐가 있어요? 비렬한 사람!》

어느새 박철진의 집게같은 손이 옥영이의 팔목을 다시 꽉 틀어잡았다. 아까 장봉구도 그렇게 틀어잡고 물속에 처넣었었다.

《떠들지 마오.》

그리고는 무작정 합숙안으로 잡아끌었다.

어데선가 처녀들의 호들갑스러운 웃음소리가 터졌다. 혹시 우리 두사람을 보고 웃어대는것은 아닌지?··· 옥영은 더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헉헉 흐느낌소리만 내뿜으며 그한테 끌려갔다. 발버둥치고 소리쳐 울고싶었지만 머리도 들지 못하고있었다. 도대체 나를 끌고가서 어쩌자는거야?···

어두운 계단을 올라 2층 박철진의 방에까지 어떻게 끌려들어갔는지 모른다. 불이 환했다. 그런데 방 한구석에 크고작은 짐짝들이 무져있었다. 그 짐짝 하나를 깔고 두사람, 한 늙은이와 어린 수림이가 앉아서 무슨 그림책을 보고있었다. 아니, 그림책이 아니라 무슨 학습장을 펴들고있는데 그 책갈피에 여러장의 사진들이 끼워있는것이 옥영의 눈에 띄였다.

《엄마!》 수림이가 캐들거렸다. 《여기 아저씨책에 내 사진이랑 엄마사진이랑 다 있다.》

수림이가 손에 들고있는것은 언젠가 성구직장 영예게시판에 들어있던 옥영의 사진이였다. 수줍음을 타는듯 약간 고개를 외로 돌릴사 하고 조용히 소리없이 웃고있는 옥영의 천연색사진, 그 사진이 붙어있는 동안 옥영은 영예게시판앞을 지날 때마다 눈도 들지 못하고 도망치듯 하군 했는데 어느날엔가 그 사진이 없어졌다고 부문당비서가 야단을 친적이 있다.

어린 수림이가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엄마, 왜 우나?》

《원 애두, 내가 울긴?》

《울지 마. 응, 엄마?》

그러자 늙은이가, 철진의 어머니가 허리를 펴고 일어서더니 옥영이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옥영이라지?··· 울지 말라구.》

아무런 가식도 없는 부드럽고 정찬 음성··· 불시로 치밀어오르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여 옥영은 입술을 깨물며 머리만 세게 흔들었다. 어찌하여 다들 내가 울고있다고 보는것일가. 어째서 다들 나를 울리지 못해 이러는걸가?···

《우린 오늘》 하고 박철진의 어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가져온 짐까지 다 수림이네 집에 옮겨가기루 했다. 저 사람이 차까지 준비했다누나.》

《예?···》

《난 이미 우리 조직에도 다 보고를 했소.》 박철진이 빙긋이 웃으며 끼여들었다. 《오늘부터 당장 서옥영이와 새살림을 펴겠다고 하니까 우리 용해공들이 다를 얼마나 좋아하던지··· 왜 오늘까지 질질 끌었는가고 막 야단치겠지. 그래서 뭐 다른 구실은 없구 해서 난 강철생산이 정상화된 다음 그때 가서 결혼식을 하려구 생각했다니까 문제를 그렇게만 보지 말라나. 새가정을 이루고 두사람의 뜨거운 정까지 합쳐 전기로의 불을 지피면 더 좋지 않는가 하더란 말이요. 그러면서 우리〈강철령감〉이랑 로장동무랑 저저마끔 자기가 결혼식을 차려주겠다는거요. 정말 강철로동계급이 다르긴 다르다니까. 불을 다루는 사람들답게 대바르구 속이 크구 인정은 또 얼마나 뜨거운지···》

《?···》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옥영이에게 박철진은 다시금 따뜻한 미소를 보냈다.

《이것으로 옥영이는 내 사람이 됐구 수림이는 또 내 딸이 됐소. 어머니, 그렇지요?》

박철진의 어머니는 잔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엷은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애 에미는 내 맘에도 든다.》

《보라구. 그래서 내 끝까지 옥영이를 끌어당긴거요. 이게 바로 군대식이요. 끝까지 돌격해서 점령하고야마는!··· 자 수림아, 어떻니, 너두 좋지?》

《응, 나두 좋아!》 수림이가 생글거리며 자기를 둘러싸고있는 사람들을 빙 돌아보았다. 《이제부턴 엄마랑 아저씨랑 다 같이 살지? 야, 좋다!··· 엄마두 좋지?》

옥영은 아무말도 못하고 입술만 깨물고있었다. 다시 찾은 삶, 다시 찾은 사랑, 그것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것인지 저 철딱서니없는 어린것이 어찌 다 알수 있으랴···

박철진이 창문을 열어젖히더니 밖에 대고 소리쳤다.

《여, 용세!··· 빨리 짐을 나르자.》

그에 대한 대답으로 휘파람소리가 길게 울렸다. 아까부터 1호합숙마당에서 화물자동차와 짐을 날라줄 사람들이 기다리고있은것이 분명했다. 밤이여서 옥영이가 그들을 보지 못했던것이다.

이윽고 쿵쿵거리는 발자국소리로 복도를 울리며 용세라고 불리우는 애젊은 용해공과 또 두사람이 들어왔다.

날라야 할 짐은 많지 않았다. 어머니까지 보따리를 들었으므로 용세라는 총각은 짐짝대신에 좋아서 어쩔줄을 모르는 수림이를 안고나갔다.

두사람만이 남았다.

옥영은 여전히 입술을 꼭 옥문채 두눈을 내리깔고 말뚝처럼 박혀있었다.

《갑시다.》 하고 박철진이 말했다. 《옥영이, 왜 그러는거요? 그래 끝끝내 엇드레질을 해보자는거요?》

《···》

옥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도 없었다.

적막이 방안을 꽉 채우고있었다. 눈부신 섬광이, 번개불이 번쩍한것 같은데 점도록 우뢰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납덩이같이 무겁고 시꺼먼 공허로 하여 귀가 멍해질 지경이였다.

마침내 박철진이 그 녀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자구, 옥영이, 인젠 나만 믿으면 돼.》

《그러니》 하고 옥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가냘프게 물었다. 《그러니 날더러··· 어떻게 하라는거예요?》

《그걸 몰라서 묻소?···》 철진은 어처구니가 없는듯 소리내여 웃더니 별안간 낯을 찡그리며 말했다. 《진심으로 사랑하면 돼. 끝까지 진심으로! 알겠소?》

《···》

옥영은 머리를 저었다. 한생을 끝까지 진심을 바쳐 사랑한다는것은 말로 하는 언약이 아니기때문이였다. 그것은 넓은 가슴과 뜨거운 심장만이 말해주는것이라고 믿고있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어느새 박철진은 머리를 젓고있는 옥영이를 힘껏 끄당겨 자기의 가슴에 다그어안았다. 그리고는 불길처럼 뜨거운 입김을 옥영의 귀전에 퍼붓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지만 끝까지 사랑하면 돼. 그게 기본이요. 난 어제 고영란이라는 그 동무의 불행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정말 많은것을 생각했소. 나와 옥영이에 대해서 말이요. 사람이 한번 언약을 했으면 죽으나사나 끝까지 지켜야지 제 리속만 채우면서 사랑의 언약까지 짓밟는다면 그게 무슨 사람이겠소. 짐승이나 다름없지. 난 다른건 다 몰라. 하지만 군사복무를 하면서 그것만은 똑똑히 알게됐소. 당과 수령, 조국에 대한 충실성은 자기의 부모처자, 동지들에 대한 사랑에서부터 시작된다는걸 말이요. 날 믿소. 옥영일 끝까지 사랑해주겠소. 정말이요. 옥영이, 이제 다 잘될거요. 우리 두사람이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고 또 자기 공장과 자기 맡은 일을 사랑하고··· 그러면 되는거요. 그러면 진짜로 행복한거요.》

그 소박한 말마디들이 왜 그토록 가슴을 세차게 울려주는것인지?···

옥영은 펀뜩 정신을 차렸다. 인제는 이 박철진이라는 제대군인 총각과 생의 끝까지 함께 걸어야 한다는것을 깨달았다.

《참!》 박철진이 한손으로 이마를 쳤다. 《제일 중요한거 말 못했구만. 응?》

《그게 뭔데요?》

《옥영이, 기뻐하오. 아버지가 며칠내로 돌아온다는구만. 내 다 알아봤소. 건강도 좋구 기분도 좋대. 그럼 아버지가 돌아오는 날로 식을 하자구. 우리〈강철령감〉이 그렇게 결론했어.》

《?!···》

너무도 벅찬 흥분에 옥영은 허덕이였다.

박철진이 다시금 그를 꼭 안아주었다.

《얼마나 좋소. 우리의 생활은!···》

《···》

여전히 옥영은 가쁘게 숨쉬고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한순간 옥영은 자기의 마음속으로 밀물처럼 쓸어드는 뜨거운 격정을 이기지 못하여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박철진이 아무리 꽉 껴안았어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