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3

제 5 장

3

 

6월말의 어느날이였다. 출장차로 평양에 올라간 허필웅은 조선적십자종합병원을 찾아갔다.

어느 병원이나 면회질서는 엄격하다. 찾아가는 손님들에게는 불편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그것이 환자치료에서는 필수적인 규률과 질서이고 위생방역적인 요구여서 누구도 어길수 없다.

허필웅은 접수구에서 정해진 면회시간이 아니므로 거절당할수도 있다는것을 생각하고 자기가 성강의 봉화로 유명한 성진제강련합기업소에서 왔다는것, 성강의 유명한 처녀 고영란을 꼭 만나야 할일이 있다고 엄숙히 말했다. 다행히 접수구에 앉아있던 녀직원이 고영란을 잘 알고있었다. 녀인은 창유리에 바싹 키를 낮추고 들여다보는 장대한 사나이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아버지세요?》 하고 물었다. 허필웅은 별로 생각지 않고 《그렇소.》 하고 대답했다.

《글쎄 어쩐지 비슷하다 했더니···》 녀인은 정문으로 돌아서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며 밖으로 나왔다. 《고영란이야 우리가 잘 알지요. 협의회만도 얼마나 많이 했다구요. 거기선 정말 장한 딸을 두셨어요. 일 잘하고 인물 잘나고 성격도 활달해··· 유명할만 하지요 뭐. 그렇게 잘난 녀자가 하반신마비라니. 정말 어찌다 그런 병이 왔는지··· 그래도 너무 걱정마세요. 우리 과에서 제일 관심하는 대상이랍니다.》

좀 수다스러운 편이였다. 허필웅은 말 한마디 없이 줄곧 머리를 주억거리며 그 녀자를 따라갔다. 할 말도 없었거니와 그 녀인이 말할틈도 주지 않았다.

《참, 그런데 영란이 무슨 고민을 하고있는걸 아셔요?》

《고민?》

허필웅의 덩둘해진 표정을 놀라서 쳐다보던 녀인은 쓰거운듯이 입을 비쭉거리며 말했다.

《아버지라면서 그것도 모르세요? 딸이 고민을 하는데··· 그래서 치료가 더 힘들어지고있어요.》

《?···》

허필웅은 저도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조약돌처럼 말쑥하게 다듬은 그 녀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픈게 아니예요?》

허필웅이 머리를 흔들자 그 녀자는 말했다.

《병때문에 고민하는것만 같지 않아요. 혹시 사랑때문이 아닌지··· 이건 그저 내 생각인데··· 그럼 가서 만나보세요. 저기 포도넝쿨을 보세요. 거기 그늘아래서 밀차에 앉아있지 않나요. 보이죠?··· 난 그럼 근무중이 돼나서.》

《예, 어서 가보십시오. 고맙습니다.》

허필웅은 얼룩얼룩 그늘이 진 포도넝쿨아래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허리를 펴고 이쪽을 향해 눈겨눔하는 고영란에게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줄곧 접수구에서 근무를 서던 녀인이 말하던것과 장봉구의 일을 결부시켜보았다.

눈부신 정오의 해빛이 허필웅의 반나마 벗어진 대머리우에서 번들거렸다. 숨이 차오르고 걸음새에도 힘이 없었다. 큰길쪽에서 승용차의 경적소리들이 엇갈리는 속에 궤도전차가 요란스럽게 굴러갔다. 뜨겁게 달아오른 포장도로를 울리는 그 소리가 위혁적으로 커지더니 차츰 사라져갔다.

허필웅은 걸음을 멈추었다. 포도넝쿨밑에 있던 고영란이 가슴우에 맞잡고있던 손을 앞으로 내던치듯 하고는 이상한 소리로 부르짖었기때문이였다.

《부지배인동지!ㅡ》

밀차에 타고있던 고영란이 앞으로 넘어질번 하는것을 간호원인듯 한 녀자가 안아주었다. 연한 풀색의 줄무늬가 간 환자복아래에서 새하얀 발이 감추어져있는것이 얼핏 보였다.

비로소 허필웅도 영란이를 향해 마주달려갔다. 땀 흐르는 얼굴에 반가운 웃음을 가득 떠올리고 밀차앞까지 가서는 주춤 멈춰섰다가 두팔을 벌리고 금시 울음을 터뜨리는 영란이를 끌어안았다.

《영란이!》

《부지배인동지!》 영란이의 목소리는 어느덧 눈물속에 잠기였다. 《정말 나한테··· 나한테 오셨어요? 예?!》

《그렇잖구. 네가 아니믄 누구한테 왔겠니. 응?》

《부지배인동지, 고마와요. 이렇게 오실줄은 모르구··· 정말 고마와요.》

《너 무슨 소릴 그렇게 하니?》 하고 허필웅은 울고웃으며 어쩔바를 몰라하는 영란이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런데 무엇때문인지 목이 꺽 메여 제대로 말을 이을수가 없었다.《영란이가 뭐 남인가? 내 생명의 은인인 아버지를 봐서두 그렇구··· 또 우리 성강이 자랑하는 성강의 딸인데···》

《고마와요.》

영란이의 뒤쪽에 서있던 녀인도 위생복자락으로 눈굽을 찍고있는듯 했다. 지금까지 영란이가 탄 밀차를 밀어주며 이야기를 나누고있던 녀인이다. 누르끼레한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 어려있는, 간병원인듯 싶은 중년의 그 녀인은 웬일인지 허필웅이 가방을 열려고 하자 급히 머리를 돌리더니 뒤쪽으로 물러갔다.

《언니, 가지 마세요. 예?》

《아니, 난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어.》

허필웅도 가지 말라고, 여기 와서 같이 사과나 들자고 소리쳤으나 녀인은 손을 내저으며 황황히 사라졌다. 필웅은 머리를 기웃하고나서 사과와 복숭아, 도마도며 갖가지 당과류, 사이다 등 꾸려온것들을 내놓았다.

《고맙습니다, 부지배인동지.》

영란이의 그 말에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제발 그런 소리 이젠 그만해라.》

사이다병마개를 따며 병문안을 온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대수롭지 않게 습관적으로 물었다.

《그래 언제면 다 낫는다던?》

《글쎄요.》

《···》

그렇게 묻는것이 아니였다. 병원에서는 문안하는 인사말도 잘 골라하지 않으면 안된다. 더우기 하반신마비가 온 처녀에게 아무런 고려도 없이 감기에나 걸린것처럼 물어서는 안되는것이다. 하여 그는 얼굴을 찌프리며 헛기침을 했다.

《영란이야 물론 치료가 잘되겠지. 늘쌍 웃으며 사는 영란이가 그쯤한걸 이겨내지 못할가. 안 그래?···》

영란이는 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사탕봉지를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조용히 물었다.

《부지배인동지, 거기 성강에선 지금 어떻게 지냅니까? 역시 전투가 한창이겠지요? 그런데···》

다음순간 영란이는 불시로 깜짝 놀란듯 입을 딱 벌렸다.《참, 부지배인동진 다른데루 가셨지. 탄광지배인으루. 그런걸 알면서두 계속 부지배인동지라구 불렀으니 야ㅡ 이 고영란인 정말 덩지만 컸지 맹꽁이라니까.》

허필웅은 머리를 저었다.

《아니다. 난 이전처럼 불러주는게 더 좋다.》

《정말?》 처녀의 커다란 두눈이 의혹을 품고 허필웅의 얼굴을 유심히 더듬고있었다.《그럼 우리 성강에 다시 돌아오세요. 예?···》

《영란이도 그걸 바라니?》

《예, 그래요. 나두 인츰 공장으로 가겠어요. 정말 여기선 더 못견디겠어요. 막 미칠 지경이예요.》

무더운 날씨였다. 북방의 바다기슭인 쌍포지구에서는 아직도 긴소매샤쯔를 입고있지만 이곳 평양지방은 땡볕과 뜨거운 열에 허덕이고있었다. 먼 하늘가에서 백조와도 같이 두두룩한 가슴을 쑥 내밀고 헤염쳐오던 하얀 구름도 따가운 볕에 증발해버리는듯 점차로 희미해졌다. 필웅은 또 손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았다.

《영란이, 병치료도 신심이 중요한거야.》

《나두 압니다. 그래서 못난이처럼 아무때나 웃고 떠들어대군 하지만···》 하고나서 고영란은 무안한듯 얼굴을 붉히며 혼자말처럼 속삭이는것이였다. 《정말 못견디겠어요. 그래서 전번날 책임비서동지가 오셨을 때두 말했어요.》

《책임비서? 언제 왔댔니?》

《무슨 회의에 오셨다면서 열흘전엔가 들렸어요.》

《그래?》

처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것은 분명 즐거운 회상의 하나인듯싶었다.

《그때 책임비서동지가 말해주는데 인츰 대형산소분리기를 옮겨온다든지··· 그런 말 들어보셨어요?··· 영천에서 가져다 설치하는데 그래서 전기로마다 새〈ㅈ철〉을 먹이구 산소까지 꽝꽝 쏴주면 강철생산을 정상화하는건 문제없대요.》

《넌 여기 병원에 와서두 강철이구나.》

《어쩌겠어요. 우리야 유치원때부터 깡이요 강철이요 하는 소리만 들으며 자랐는걸요.》

《흠ㅡ》

허필웅은 주름이 깊은 눈시울을 실룩거리고있었다. 날을 따라 시들어가고있는 그의 얼굴은 쓸쓸했고 꾹 다물고있는 입가에는 나른한 비애가 어려있었다.

《영란이, 내 말 들어.》 하고 그는 눈을 쪼프리고 처녀는 보지 않으면서 나직이 시름겹게 말했다. 《여기선 말야, 딴 생각말구 병치료만 해야 돼.》

그러자 처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면서 어린애처럼 가냘프게 말하는것이였다.

《책임비서동지가 여기 병원원장선생이랑 당비서동지랑 다 만나본 다음 나를 두어달내루 꼭 퇴원시킨다구 했어요. 책임비서동진 성진제강련합기업소의 이름으로 나의 치료를 부탁했다나요. 글쎄 저같은게 다 뭐라구 성강의 이름으로 부탁한다는겁니까. 예?》

《영란이야 그럴만하지 뭐. 헌데 두어달내에 퇴원하게 된다는건 누가 한 소리지?》

《병원당비서동지가 나두 있는 자리에서 우리 책임비서동지께 직접 말해주었어요. 우리 장군님께서 제일 크게 믿으시는 성강이구 또 책임비서동지가 직접 부탁을 했으니 성강의 딸을 어떻게 하나 두달내로 꼭 퇴원시켜 보내리다 하고 약속하지 않겠나요.》

《?···》

믿을수 없는 일이였지만 허필웅은 말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처녀의 모습을 눈여겨보았을뿐이였다. 아직 마비가 풀리지 않고있는것이 분명한 영란이의 오그라든 무릎에 눈길을 주었다가 저도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외면하고말았다.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그저 아픈 정도가 아니라 눈물이 나서 견딜수 없을 지경이였다. 하반신마비라는 이 뜻밖의 불행도 그 장봉구때문에 생긴것이 아닐가? 이렇듯 좋은 처녀를 못 쓰게 만든게 그 녀석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그 너절사한 녀석이 자기의 약혼녀를 버리고 얼마전 청진시의 한 간부댁 딸과 같이 돌아친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더더욱 가슴이 얼얼해났다. 그 녀석탓이다. 그 자식이 우리 영란이를 이렇게 만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생각은 여기서 혼란되였다. 어쩌면 그 녀석을 내가 못쓰게 만든건 아닌가?··· 그 녀석은 오직 이 허필웅이라는 사람만 믿고 허필웅의 꽁무니에만 붙어다녔었다. 이 허필웅이라는 사람을 통해 자기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던것이다. 조직보다도 허필웅이라는 나 개인을 더 믿었었다. 하다면 그런 생각을 그 녀석의 머리속에 주입시킨것은 과연 누구인가?···

이러한 생각으로 하여 그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것을 가까스로 참고있었다. 자기의 혼란된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영란이의 얼굴에 다시금 눈길을 박았다.

그새 고영란은 눈에 띄게 축가있었다. 환하던 얼굴에 그늘이 지고 하얀 조약돌마냥 매끈하던 살결에 윤기가 없어진것이 알렸다.

늘 웃음이 남실거리던 두눈에도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을 이어가고 마음을 도사리는 필사적인 고뇌의 흔적이 력연하였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배신당한 사랑, 그것이 처녀의 가슴을 란도질하고있을것이다.

그는 쓰리다못해 칼로 저미는것 같은 아픔을 견디기 어려워 킁킁 코를 울리고 아무 의미없이 호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마침 손칼이 더듬어졌다. 다행이였다. 그것을 꺼내자 후들거리는 손으로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부지배인동지.》 하고 고영란이 나직이 말했다. 《너무 속쓰지 마세요. 난 이겨낼수 있습니다.》

어느새 고영란의 커다란 두눈에서는 따가운 불빛이 흔들리고있었다.

《아무렴, 영란이야 이겨내구말구.》 어쩐지 목소리가 떨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힘을 내야 해. 영란이 꼭 다시 일어서게 돼.》

그는 힘주어 말했으나 처녀는 여전히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을 굴리고있었다.

《처음엔 괴롭구 고통스러워 눈물만 났지만 인젠 견디여낼수 있어요. 병원에서 나같은것때문에 열번, 스무번 협의진단을 하고 의사선생들이 밤잠을 자지 못하는걸 보면서 어떻게 하나 일어서야 한다고, 일어설수 있다고 믿게 되였습니다. 아직도 마비가 풀리지 않고 감각이 오지 않아 속상할 때도 많지만··· 일없어요. 정말 이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그저 가슴아픈게 있다면···》

영란의 커다란 두눈에서 또다시 불빛이 흔들리였다. 그 무엇인가를 상기하고 마음을 도사리는것이 분명했다. 허필웅은 숨을 죽이고 제발 자기가 애써 피하는 그 아픈 소리만은 하지 말았으면 하고 속으로 빌었다.

《있다면··· 아픈게 있다면 그건···》 영란이는 상상속의 그 누군가를 눈겨눔하며 말을 이었다. 《참 지배인동지야 아버지같은분이구 또 이 영란이의 일을 너무도 아시니까 하는 말이지만··· 생각할수록 기가 찹니다. 어떻게 돼서 내가 말공부쟁이한테 속았을가 하는 생각을 하면 정말 분하기도 하구··· 내가 어째 그런 머저리짓을 했을가요. 예?!··· 정직하고 좋은 사람들도 많은데 하필이면 그 사람한테··· 부지배인동지, 말해주세요.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그래도 난 다 바쳤는데··· 내 마음 진정을 깡그리 다 바쳤는데··· 그것이 잘못일가요? 다 바친것이?···》

필웅은 숨도 쉬지 못하는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였다. 가슴저미는 련민의 정과 가장 깨끗한 처녀의 진정을 짓밟은 비렬한 자식에 대한 사무치는 증오로 가슴만 풀떡거리고있었다.

《이렇게》 하고 영란이는 계속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나자신이 얼마나 가련해뵈는지··· 그러면서도 참 이상하잖아요? 왜 자꾸만 믿어지지 않을가요? 그런 일이 정말 있긴 있었던가? 내가 어째서 배반당했을가. 무슨 리유로?··· 혹시 이제라도 그 사람이 찾아오면 난 뭐라구 하나? 그가 정말 그렇게 나쁜 사람일가. 마음을 고쳐먹구 오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면서··· 다 잊어버리자구 해도 어째 그런지···》

그런즉 영란이는 아직도 그 녀석을 잊지 못해하는것이다. 처녀의 가슴 밑바닥엔 아직도 그에 대한 그리움이 쪼각이나마 남아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사람의 정이란 참 얄궂은것이로구나. 그따위 녀석을 오늘까지도 잊지 못해하다니?!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하반신마비로 움직이지 못하는 처지여서, 자기의 앞날이 어둡게만 보이는 처지여서 한때 정을 주었던 그 사람이 가끔 머리속에 떠오르는것은 아닐가? 그럴수도 있다. 그 자식이 딴 녀자의 꽁무니를 따라 성강에서 떠나갔다는것을 아직 모르고있으므로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게 되는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필웅은 쓰라린 마음으로 생각을 굴리고있었다.

《빨리 공장에 가야겠는데.》 하고 영란이 또 말했다. 《이렇게 꼼짝하지 못하니 그리운 사람들 생각만 자꾸 나구··· 학교때 선생님들이랑 동창들, 우리 2중판직장동무들이랑 자꾸만 생각납니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면 압연공으로 꽝꽝 일하던 때가 얼마나 좋았는가하는 생각에··· 그냥 땀흘리면서 일하던 때가··· 정말 그때처럼 한바탕 땀흘리며 일해봤으면···》

《얘, 듣기 싫다.》 하고 허필웅은 갑자기 쿡 찌르는듯 한 아픔에 눈섭을 실룩거리면서 어성을 높였다. 《넌 마치 다시는 공장에 돌아가지 못할것처럼 말하는데··· 그러면 안돼. 영란인 성강처녀이지? 성강처녀가 병과 맞서 마음이 약해지면 되겠어?··· 기어이 싸워서 이겨야 돼.》

《내가 하는 말은》 하면서 영란이 머리를 저었다. 《그런게 아니라 빨리 공장에 돌아가고싶어 그러지요 뭐. 공장에서처럼 일하는 재미도 모르구 여기 엎디여있자니 막 미칠 지경입니다. 그래서 그냥 공장으루, 성강으루 갈 생각만 하는거예요.》

별안간 고영란의 내려깐 눈시울밑에 눈물이 고이는것을 발견하고 허필웅은 저도모르게 숨을 죽였다. 무엇때문일가. 이제 또 아픈 소리를 하면 난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영란은 눈물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손등으로 그것을 닦더니 긴 한숨속에 이렇게 말을 이었다.

《부탁합니다. 부지배인동지, 부지배인동지두 꼭 성강으로 돌아오십시오. 우리 공장사람들이 내남없이 부지배인동질 다 좋아하는데 가긴 어째 가겠습니까. 나두, 아버지가 없는 나두 지배인동지가 없으니 얼마나 속이 좋지 않은지··· 부지배인동지가 날 고와하시는것처럼 나두 부지배인동질 아버지처럼 따르는데 공장에 없으니··· 섭섭하기 그지없습니다. 물론 나같은게 다 뭐길래 어른들 일에 간참하는가 하구 욕하실줄 압니다만··· 부지배인동지, 제발 이 영란이 말도 좀 들어주세요. 장봉구 그 사람처럼 사람들의 말밥에 오르구 웃음가마리가 되는 일이 없게 해주세요. 예?! 그래서 이 영란이가 딸자식처럼 진심으로 부탁하는것이니 제발 제집으루, 우리 성강사람들한테루 다시 돌아와주십시오.》

허필웅은 자기가 깎은 사과를 손에 쥐고 굳어져있었다. 요즈음 날마다 시간마다 추근스럽고 끈덕진 생각에 얽혀 자꾸만 왼심을 써온것이 바로 그에 대해서가 아니였던가? 무엇을 생각하거나 무슨 일을 하거나 끊임없이 심신을 괴롭히고 추연하게 한것도 바로 이 처녀, 허필웅이 친딸처럼 사랑하는 고영란이 말하는 바로 그것이 아니였던가?··· 강철의무소의 녀의사 홍지순도 그렇게 말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안타깝게 말했었다.

《부지배인동지, 믿어지지 않아요. 날더러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어요. 불을 안고 살아야 한다고, 장군님께서 바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그래야 쇠물이 펄펄 끓는다면서··· 불이란게 바로 정이라고,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이구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라고, 나같은 녀자가 바치는 그 마음도 성강의 쇠물을 끓이는데 큰 보탬이 된다고 얼마나 흥분해서 말씀하셨어요. 그러시던 부지배인동지가 훌쩍 공장을 뜰줄이야··· 제발 이제라도 생각을 돌리세요. 예?!》

이러한 회상에 잠겼던 그는 입술을 꽉 다물고 영란이의 눈길을 피하였다. 아무말없이 자기가 손수 깎은 사과를 넘겨주었다. 무엇때문인지 눈굽이 저려들고 가슴이 옥죄여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성미가 올곧지 않고 밸통머리 사나운 이 허필웅은 결국 이 꼴이되였다 치더라도 어인 일로 운명은 이렇듯 인물곱고 맘씨 또한 곱고 어질고 순박하고 일 잘하는 처녀에게, 제일로 훌륭한 처녀에게 이렇듯 무서운 불행을 안겨주는것인가?···

《왜 그러구 있어. 먹지 않구?》

《예, 먹겠어요.》

어찌된 일인지 영란이는 고개를 수굿하고 입으로 쓸어드는 뜨거운 눈물과 사과를 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