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3

제 3 장

3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한낮때부터 눈이 푸실거리더니 돌연 구름이 걷히고 설핀 해빛이 창가에서 어룽거렸다.

얼마후 자기 방으로 들어간 허필웅은 창턱과 책상은 물론 마루바닥에 이르기까지 먼지가 한격지 올라앉아있는것을 뿌잇해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먼지들이 오늘 이때까지 이 방의 주인을 기다려왔다는것을 생각하면 느닷없이 그것마저 무척 소중하게만 느껴지는것이였다.

자기가 늘 앉군 하던 걸상에 앉아 송수화기를 들고 먼저 기억에 떠오른 번호, 성강의 구내자동번호를 돌렸다.

《여보시오.》 너무도 귀에 익은 목소리가 수화구에서 징징 울리고있다. 《생산부기사장입니다. 여보시오. 홍용기입니다.》

《여보, 나 허필웅일세.》

《아, 부지배인동지. 지금 어데 계십니까?》

《내 방에 와있네.》

《그렇습니까. 제 곧 그리로 가겠습니다.》

송수화기를 놓았다.

홍용기는 그가 직접 추천하고 보증까지 하여 처음 생산지령장으로 발탁한 젊은 기술일군이다. 설비부지배인이라는 직제에서 그 누구를 추천한다는것이 우습게 들릴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때 그의 의견을 당조직에서 중히 여겼던것이다. 결국 그는 생산지령장을 거쳐 오늘은 생산부기사장으로 일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일부 사람들은 그가 빈소리를 자주 한다고 시비하면서 홍용기라는 그의 이름을 《공용기》 라고 야유하고있으니 누구든 헐뜯기 좋아하는 그 속통바르지 않은 사람들이 허필웅 자기를 뒤에서는 《헌 필웅》 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수 있겠는가?!···

드디여 홍용기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섰다. 반가운 상면, 상봉과 작별에 의례히 있어야 할 목이 긴 병이 없는것이 유감일뿐이였다.

《부지배인동지,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주 왔습니까?》

《일이 있어서 왔네.》 하고나서 허필웅은 소란스럽게 한숨을 내그었다. 《그런데 이 방은 어째 아직두 빈방으로 있는건가, 엉? 여기 성강엔 부지배인을 시킬 사람두 하나 없단 말인가?》

《···》

아무 대답도 없다. 허필웅은 그가 측은해하는 눈빛으로 자기를 지켜보는것이 기분에 거슬렸다. 대뜸 화를 내며 소리쳤다.

《어째 그렇게 보나. 내가 불쌍해보여?》

《부지배인동지.》 하고 그는 조용히 말했다. 《지금 우린 대단히 힘든 고비에 있습니다.》

《지도검열 말인가? 그거야 늘 있는 일 아닌가. 생산이 잘 안되니 그렇지 생산만 늘어나보지비. 저저마끔 훈장을 달아주겠다구 내려오질 않나.》

《거야 그렇지요.》 이번에도 그는 조용히 수긍했다. 《그런데 부지배인동지, 지금 여기엔 한번 한다하면 끝까지 내미는 배짱있는 일군이 꼭 필요한데··· 생각이 없습니까?》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듣기 좋아한다. 자기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높이 사며 불러주는데야 어찌 골살을 찌프릴수 있으랴. 하지만 허필웅의 얼굴은 불시로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시꺼먼 눈섭이 사뭇 흠칫거리고 입술의 귀재기도 경련이 이는듯 떨리고있었다.

《뭐 날더러 다시 오라구? 이 허필웅이더러 나를 쫓아낸 사람한테 돌아와서 무릎을 꿇으란 말이지?··· 아니, 난 뭐 자존심도 없는 사람인줄 아는가? 절대 그렇겐 못해!》

그는 먼지오른 자기의 책상우에 손자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여기서 빨리 달아나고싶었다. 사람들이 보면 그가 자기 자리를 잊지 못해 찾아왔다고 뒤소리를 할수 있기때문이였다.

어떻게 계단을 내렸는지 모른다. 쫓기듯, 도망치듯 사람들을 피하며 눈이 먼 사람처럼 허둥지둥 정문접수를 지나 공장구내로 들어갔다. 그 어떤 수치심과 모멸감에 가슴이 얼얼하였다. 자기의 사무실이 그대로 주인을 기다리고있는것을 본 첫 순간 가슴에 사무쳐오던 자부심과 자기의 손때묻은 모든것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이 갑자기 홍용기 그 사람의 말 한마디에 거품처럼 부글거리며 사라지던것을 쓸쓸한 마음으로 생각하였다.

자기로서도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수 없다. 홍용기가 《지금 여기엔 한번 한다하면 끝까지 내미는 배짱있는 일군이 필요한데》라고 했을 때 별안간 책임비서와 헤여지던 그날 밤 《책임비서동무가 있는 한 다시 돌아올 내가 아니요!》 하고 헌헌하게 내쏘던 일이 상기되고 지난날 책임비서와 더는 타협할수 없이 격렬해지던 감정과 자기의 마음을 상하게 하던 모든 일들이 일시에 눈앞에 떠올라 그만 걷잡을수 없이 불끈해졌던것이다.

경적소리가 거듭 울리더니 옆에서 차가 멎었다.

《안녕하시오? 어데루 가는지··· 타시오.》

기사장 송근우였다.

허필웅은 난처하였다. 밉살스러운 자존심이 또다시 그를 아프게 자극하고 무작정 뿌리치라고 꼬드기는것이였다.

《난··· 다 왔소. 여기 공업기술연구소에.》

《아, 그렇소?··· 한번 집에 들리오.》

《잘 가시오.》

그는 공업기술연구소로 급히 걸어갔다. 비로소 장봉구를 족치려고 윽별렀다는것을 상기하였다. 자기가 믿고 끌어갔던 장봉구, 수재형의 젊은 연구사가 간부댁을 넘보며 자기의 인생을 달리 설계하고있다는것을 과연 믿을수 있을가?··· 아니, 그 자식의 본성이 본래 그렇게 돼먹었을수도 있다. 제힘으로 운명을 개척할 생각은 하지 않고 힘있는 사람, 권력이 있어보이는 사람들에게만 붙어 살려는 너절싸한 자식이라는걸 그만 보지 못하고있었는지도 모른다.···

 

×

 

어슬무렵에야 허필웅은 자기가 지배인으로 일하는 운봉탄광에 나가있는 장봉구를 불러올수 있었다. 맨처음엔 아무 차나 빌려타고 직접 탄광으로 달릴 생각이였으나 전진욱이 자기의 차와 운전사는 물론 부지배인자리까지 고스란히 그대로 두고있다고 한것이 사실임을 확인하자 차마 그 차를 장봉구같은 녀석때문에 리용할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여 그는 즉시 탄광에 있는 장봉구에게 전화를 걸어 《차잡이》를 해서라도 저녁까지 꼭 제강소에 도착하라고 소리쳤었다.

드디여 애젊은 시절부터 수재로 소문이 난 총각, 둥실하게 생긴 얼굴에 늘 웃음을 띄우고 능한 언변으로 간부들과 처녀들의 관심을 집중하여 총아로 두드러진 유명한 《야금공학의 별》이 허필웅의 눈앞에 나타났다.

허필웅은 공업기술연구소의 부소장방에서 그를 맞이하였다.

《지배인동지》 하고 장봉구는 목도리를 벗어들고 대충 머리를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무슨 일로 당장 오라고 했습니까. 설마 날 여기 시험소에 그냥 붙잡아둘 생각을 하신건 아니겠지요?》

《좀 생각해보구.》

《예? 그럼 기사장말이 나던것은요?》

《그거야 당위원회가 하지비. 헌데 말이야. 우리 탄광당위원회가 어째서 수재라구 하는 장봉구연구사를 찌글써보나했더니 글쎄 일리가 있더라니까.》

《예?》 장봉구의 역바른 두눈이 재빨리 돌아갔다. 《아ㅡ 아니, 지배인동지, 오늘따라 무슨 말씀을 그렇게···》

허필웅은 급기야 커다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책상우의 필갑과 잉크병이 튕겨나고 콤퓨터옆에 쌓아놓았던 종이장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얼어든 손을 입에 가져다 녹이고있던 장봉구는 너무도 급작스러운 벼락에 그만 어마득해서 손을 깨문것 같았다.

《이녀석, 바른데로 말해! 너 우리 영란이를 어째 배반했어. 엉?··· 그러구선 어떤 간부댁 딸허구 또 어쩐다메?》

그는 자기가 영란이를 친딸처럼 《우리 영란이》 라고 부르고있는것도 알지 못했다.

《아, 부지배인동지, 난 사실···》

《말해라. 바른대로 말해!》 하고 그는 뭉툭한 손가락으로 앞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그래 배반했어, 안했어? 그것부터 말해봐!》

장봉구는 당황하여 뒤걸음쳐가다가 벽에 부딪치고말았다. 허필웅이라는 사람이 이렇듯 범같은 사람인줄 알았으면 애당초 그에게 붙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짧은 한순간 그는 자기가 자칫하다가는 허필웅이라는 완력가에게 잡혀 태질을 당할수도 있다고 공포에 질려 생각한것 같았다.

《지배인동지, 난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마침내 그는 열을 올려 항변했다. 《내가 고영란을 어째 배반합니까. 예? 그 동무야 보름달같이 환하구 온 공장이 다 사랑하는 처녀인데 그가 날 배반했다믄 또 몰라두 내가 그 처녈 배반해요? 참, 어처구니두 없지. 청진시에 있는 어떤 간부댁에서 딸을 내세우면서 말을 낸건 사실입니다. 거기서야 내가 총각이라니까 혼사를 정하자구 청해왔던거구··· 헌데 그렇다구 해서 내가 청한것두 아닌데 날 죽일놈이라구, 이 장봉구가 그 처녀를 배반했다구 하면 이거야 너무하지 않습니까? 지배인동진 무턱대구 날 의심하구 조겨댈 생각만 하시는데··· 어디 좀 말해보십시오. 남들이 하는 말만 듣구 날 몰아주면··· 그러는 자신이 너무하다구 생각되진 않습니까?》

《···》

허필웅은 말문이 막혔다. 소낙비처럼 들씌워지는 장봉구의 일장연설에 그만 머리속이 뒤죽박죽이 되여버렸다. 어쩌면 이 장봉구가 루명을 쓰고있는지도 모른다. 재빨리 생각을 굴렸으나 도저히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가자, 오늘 영란인 1직이라더라. 가서 직접 쨈을 해보자. 할수 있지?》

《···》

장봉구는 뜻밖인듯 했다. 허필웅은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그의 어깨를 떠밀었다.

《가자, 거기 가서 실컷 연설을 해봐.》

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짙었다. 마주보이는 1강철직장의 전기로가 퍼릿한 화광으로 어둠을 밀어내며 웅웅거리고있었다. 그 빛을 등뒤에 받으며 허필웅은 자기가 무엇때문에 이렇듯 애틋한 정을 다 쏟으며 영란이를 사랑하는것일가 하고 생각하였다. 자기생명의 은인이며 친구였던 그의 아버지를 생각해서인가?··· 물론 그것이 첫째일것이다. 그리고 고영란은 온 공장이 사랑하는 처녀이다. 허필웅은 자기의 친아들조차 그 처녀와 견줄념을 하지 못했었다. 그처럼 환하게 생기고 발랄하고 담차고 정열적인 처녀에게 가장 적실한 총각이, 인물 잘나고 지혜롭고 깨끗한 총각이 나서기를 바라마지 않았던것이다. 그리하여 수재로 소문난 장봉구가 영란이의 심장을 틀어잡았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아무런 아쉬움도 없이 당연한 일로 여겼었는데··· 이 어인 일인가?··· 그 영란이를 장봉구가 실지로 모욕하고 배반했다면 단박에 골통을 까부시는것도 주저하지 않을것 같았다. 그리고 배반당한 영란이의 처지를 생각하면 억이 막혀 눈물을 걷잡지 못할것이다. 그런 생각만 하여도 저절로 눈물이 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우리 성강사람들은 절대 너절하게 살수 없는 사람들이다. 강철로동계급은 사랑을 해도 끝까지 진실하게, 불같이 해야 한다. 그와 반대로 어떤 너절싸하고 비루한 자식이 나타나 진실한 처녀를 욕되게 한다면 당장 전기로속에 집어넣어 새로 끓여내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그는 저도모르게 자기를 여전히 성강의 대가정에 속한 사람으로 《우리》라는 부름속에 줄곧 포함시키며 생각을 굴리고있었다.

그들은 송령천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갔다. 성강에서는 강철구역과 《ㅈ철》구역을 가르는 다리로서 언제나 오가는 사람들이 그칠새 없다. 지금도 한무리의 녀인들이 떠들어대며 다리를 건너오고있다. 어찌된 일인지 허필웅은 걸음을 늦추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였다.

《우리 집 나그네 있잖소야.》 목수건을 꽁꽁 동인 녀인이 하는 말이였다. 《막 밉어죽겠다니.집에 들어오믄 손가락 하나 까딱 아이하오.》

가운데 끼워있는 아낙이 큰소리로 끼여들었다.

《어느 집 나그네나 다 같구같지비. 그저 술, 술! 한다니까.》

《우리 집 나그넨 말이요. 술을 끊으라구 못살게 구니까 어쩌는지 아오?》하고 일행중에서 제일 목소리가 챙챙한 녀인이 웃으며 떠들었다. 《술이란 속에 낀 때랑 다 씻어내리는 보약중의 보약이라나. 그러면서 〈이봐, 귀한 손님을 맞거나 큰 연회랑 할 때 서로 잔을 찧으며 축배를 드는거 봤지? 술이 오죽 좋으면 그걸루 건강을 축원하겠나 말이야.〉라고 하지 않소야!》

《야― 어디 그뿐이오? 우리 나그넨 말이지비···》

거리가 멀어지면서 그다음 말은 더 들리지 않았다. 남편들을 헐뜯는것 같으면서도 커다란 애정을 담아 터뜨리는 노죽과 익살이였다. 허필웅은 자기 집 사람이라면 이럴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할가하고 생각하였다.

《우리 집 나그넨 말이오.》하고 자기 집 사람도 말할런지 모른다. 《한번 아이 한다믄 그만이라니. 그래서 여태 일해오던 공장두 훌쩍 뜬게 아이겠소?···》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허필웅은 상상속의 안해에게 욕설이 나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공장을 떴다는게 무슨 자랑이야? 자기 초소를 끝까지 지키지 못한게 그리두 자랑스러워?··· 그는 침을 퉤퉤 뱉았다. 장봉구가 털모자의 귀덮개를 내리는것을 보고 괜히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빨리 가자고 독촉했다.

이후부터 그들은 2중판직장까지의 먼길을 한마디 말도 없이 갔다. 한밤중의 추위와 삭풍이 그들을 쉴새없이 몰아갔다. 그리하여 늘 허필웅과 마주할 때면 뒤설레를 치며 끝없이 쑤왈거리기 잘하던 장봉구도 입을 꾹 다물고 두세걸음앞에서 전쟁터에서 잡힌 포로마냥 허둥지둥 걸어갔다.

천정이 높은 2중판직장의 건물에 들어서니 네기의 가열로중 아직은 두기만이 불길을 내뿜고있었다.

그쪽에서 밀려온 후끈한 공기가 얼어들던 그의 얼굴을 달구고 철판을 때리는 메질소리와 기계들의 동음에 귀가 먹먹하였다.

갑자기 앞서가던 장봉구가 뒤걸음쳤다.

《어째?》

허필웅이 사납게 눈을 부라리자 그는 울상이 되여 손짓했다.

《저―기 지배인동지가···》

《그런데 어쨌단 말이야?》

그때 허필웅은 지배인이 고영란이 일하는 기대앞에서 직장장과 열심히 손짓, 몸짓을 섞어가며 무엇인가 토론하는것을 보았다. 장봉구가 뒤걸음친것은 저로서의 까닭이 있을것이다. 허필웅은 짐작되는바가 있어 우악스럽게 그의 팔소매를 틀어잡고 그쪽으로 사정없이 끌어갔다.

먼저 지배인이, 다음은 고영란이 그들 두사람, 허필웅과 그가 끌고오는 장봉구를 알아본것 같았다.

그네들이 놀라서 바라보자 로앞에 서있던 직장장은 물론 다른 압연공들도 허필웅과 장봉구 두 사람에게 눈길을 던졌다.

허필웅이 먼저 걸음을 멈추었다. 불빛앞에 서있는 고영란의 모습에, 비록 땀에 젖었어도 여전히 맑고 환한 얼굴모습에 그만 눈굽이 쿡 쑤시였던것이다. 그가 이전부터 제일 사랑하고 못내 자랑하던 친딸과도 같은 성강처녀의 모습이였다.

그와 함께 《포로》로 끌려온 장봉구도 미욱스럽게 입을 쩍 벌리고 그쪽을 바라보고있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해쓱해지고 벌려진 입술은 물고기마냥 소리없이 벙긋거리고있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고영란이를 소리쳐부르려 하나 도무지 소리가 나가지 않아 모지름쓰는듯 한 표정이였다.

《자 말해봐.》 하고 허필웅이 배고동같이 웅글은 목소리로 욱박았다. 《배반하지 않았다구, 너절하게 놀지 않았다구 사람들앞에서 말해보란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현장의 소음때문에 그가 하는 말을 듣지 못했지만 영란이만은 감각으로 알아차린듯 했다. 시뻘건 불덩이를 끌어내다가 주춤거리는것이 알렸다. 다음순간 흘낏 이쪽을 바라보며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자기의 마음속을 쩌릿하게 스쳐가는 아픔을 털어버리려 모지름쓰는듯 했다.

지배인 김용삼이 무엇인가 짐작하고 이쪽을 바라보다가 언짢은 표정으로 무어라 말하려는데 갑자기 고영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앞에 섰던 장봉구가 급히 뒤걸음을 치는데 머리우에 겨우 붙어있던 털모자가 철판을 깐 바닥에 떨어졌다. 허필웅이 그를 꽉 틀어잡지 않았더라면 망아지처럼 껑충 뛰여 달아나고말았을것이다.

《어째 말을 못해? 엉?!》

《···》

장봉구는 커다란 수치심으로 하여 피가 머리로 솟구치고 눈앞이 아찔하여 허우적거리고있었다.

그러건말건 허필웅은 고영란의 억실억실한 두눈과 실팍하고 허여멀쑥한 몸전체가 웃고있는듯 률동적으로 흔들리고있는 모습을 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그 처녀가 얼마나 아픈 그리고 얼마나 괴로운 마음을 웃음으로 가무리는가를 헤아려보려니 거쿨진 사나이인 그자신 어느새 눈물에 젖어버리는것이였다.

그렇다, 그는 저도모르게 소리없이 울고있었다. 마음속으로 친딸처럼 여기는 고영란의 상처입은 쓰린 마음을 생각하니 울지 않을수 없었다. 사랑의 배신자에 대한 치미는 분노는 물론 드센 주먹으로 비루하고 너절싸한 녀석들을 한바탕 두들겨패고싶은 강렬한 충동도 짜디짠 그 눈물속에 잠겨버리는듯싶었다.

한편 장봉구는 여전히 벌려진 입술을 벙긋거리는데 가까스로 새여나온 신음소리는 그 누군가에 대한 알지 못할 분노와 앙갚음에 대하여 하소하는듯 했다.

《어째 말을 못해?》하고 허필웅은 거칠게 부르짖었다. 《아까는 큰소릴 쳤더랬지? 자기는 절대 처녀를 배반할 그런 사람이 아니라구 을러댔었지? 그런데 여기선 어째 말못해. 당장 빵짱날 일을 가지구 땅땅 큰소리치더니. 엉?》

하지만 그리도 언변이 좋던 장봉구도 입이 얼어붙어버렸는지 목구멍에서 가릉거리는 소리만 새여나오고있었다. 그러자 말 못하는 그를 대신하여 이번에도 고영란이 장난꾸러기같이 사뭇 즐거운 그리고 괴로움과 모멸이 섞인 애매하고 아리숭한 웃음을 또 터치였다.

《부지배인동지, 인젠 됐습니다. 그 사람 놓아주십시오. 그런 사람한테서 뭐 들을 소리나 있겠다구요?》

현장의 로동자들모두가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지 짐작하였다.

허필웅은 그를 잡았던 손을 놓았다.

비로소 놓여난 장봉구는 풀이 죽어 시드레한 얼굴로 한두걸음 내짚다가 다시 몸을 돌려 허리를 굽히더니 바닥에 떨어뜨린 털모자를 집어들었다. 마치 쇠물로 부어 만든 투구인듯 무겁게 들더니 그것을 가슴에 껴안은채 커다란 철문으로 허우적거리며 갔다. 숱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번씩이나 무엇에 걸려 비칠하였다. 그다음··· 재빨리 철문밖으로 사라졌다.

조용해졌다. 로에서 윙윙거리는 소리만이 한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이상하게 전류처럼 스쳐갔다. 김용삼지배인이 다가오더니 언짢아하는 표정으로 허필웅을 눈여겨보며 말했다.

《너무하지 않았습니까? 사람들 보는데서 내놓고 모욕을 주다니. 젊은 사람의 인격도 봐줘야지요. 에?》

《지배인동무.》하고 허필웅은 결이 나서 소리쳤다. 《그런 배신자는 톡톡히 망신을 당해봐야 하오. 우리 성강이 자랑하구 사랑하는 순수한 처녀를 모욕하구 배척한 그 너절한 녀석한테 무슨 인격을 론한단 말이요?··· 그런것들은 우리 강철로동계급속에 끼워있을 자리가 없단 말이요.》

김용삼이 놀라와했다.

《그 사람이야 인젠 제강소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부지배인동무가 데려갔으니···》

허필웅은 성급히 팔을 내저었다.

《도루 보내겠소. 그런 사람 내겐 필요없소.》

언제부터였는지 잠시 중단되였던 작업이 시작되여 웅웅거리는 소리와 떵떵 철판이 울부짖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직장장이 지배인에게 다가와 아까부터 토론하던 회전로의 철판가공문제를 꺼냈다.

하여 그들은 어느새 허필웅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서로 상대방의 귀전에 입을 가져가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허필웅은 그때에야 비로소 지금 여기서 자기의 존재도 애매하다는것을 느꼈다. 무엇인가 거북스럽고 부자연스러운것이 많았다. 하여 그는 저도모르게 천천히 뒤걸음쳐갔다. 이윽고 몸을 돌려 장봉구가 사라지던 그 철문으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빠져나갔다.

다음날 그는 장봉구를 떨궈놓고 혼자서 탄광으로 떠났다. 마침 성강에서 그쪽으로 가는 차편이 있어 광차제작에 필요한 강제를 싣고갈수 있었다. 대단한 소득이다. 인제는 광차제작문제도 다 풀렸으므로 코노래를 부르며 가야 하겠으나 어찌된 일인지 그는 줄창 심사가 편안치 않아 눈살을 찌프리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