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4

제 2 장

4

 

용해공들이란 쇠물을 녹이는 사람들, 뜨거운 불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금시 풀죽도 못먹은것처럼 맥이 없어 걸음이 떠지던 사람도 로앞에 서서 불이 훤해지기만 하면 불에 자극되여 판판 달라진다. 불같이 뜨거워지고 담차지고 격해진다.

그날 사고가 났을 때 철진은 처음 한순간 벅찬 공포에 휩싸여 입을 오무리고 비명을 질렀다. 무서운 폭음과 함께 로뚜껑이 달아나고 새파랗게 끓던 쇠물이 사방 휘뿌려진것이였다. 시뻘건 쇠물의 분수가 천정으로 활 뿜어지는것과 동시에 강철보를 후려친 가마뚜껑이 저쪽에 나가 떨어지고 철트라스로 날아오른 쇠물은 어느새 새까만 소낙비가 되여 퍼부어졌다.

모든것이 폭음과 화광속에 파묻혀 숨을 죽인듯 웅- 웅- 귀가 울리는데 어느새 담벽으로 달아났던 사람들이 목이 터져라하고 고아대였다.

《철진이, 뛰라!-》

《용세! 뭘해?》

난생처음으로 겪는 일이여서 철진은 그냥 녹아붙은듯 까딱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주걱으로 퍼던진것 같은 넙죽한 쇠물덩이가 어깨에 떨어져 아마직으로 짠 방열복(시도복)을 태우며 살가죽에 닿을 때에야 화닥닥 놀라며 몸을 털었다. 그리고는 저만치 앞에서 나딩구는 용세에게 달려가 장갑낀 손으로 그의 몸을 마구 후려쳤다. 불달린 용세의 작업복 앞자락에서도 픽픽 연기가 새여나왔다. 그런데도 용세는 가슴앞과 겨드랑이쪽의 불찌를 털어버릴 생각은 못하고 뱅뱅 팽이처럼 돌아가며 몸부림치고있었다.

《야, 허릴 펴라!》

정신없는 그를 붙들어 자기앞으로 돌려세우고는 방열복앞섶을 와락 찢으며 사정없이 털어대였다. 그러는 그의 뒤쪽에서는 언제 달려왔는지 조장이 자기의 팔소매로 철진의 어깨를 마구 문질러대고있었다. 철진이쪽이 더 위험했던것이다.

《야, 전 어떤지 알기나 해?》

바닥에도 쇠물이 뿌려져있어 발밑의 철판우에는 온통 크고작은 불꽃들로 가득차있었다. 작업용가죽구두가 칙칙거리며 성냥가치로 그어대듯 파아란 불을 팍팍 피우군 했다.

직장장이 달려오고 최진수《강철령감》도 달려왔다. 어느새 《강철의무실》의 의사들도 나타났으나 누구도 그들이 찾는 곳으로 갈념을 못했다. 사고라니, 도대체 상상이나 할수 있는 일인가?… 장군님께 다진 맹세를 관철하기 위해 1직부터 3직까지 매일 경쟁도표를 그리며 아글타글했는데 별안간 로가 폭발한것이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들이 서로 마주보며 고함치듯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거야. 엉?》

《과비등이요.》

《과비등? 산소취입을 지나치게 했다는거야?》

《그런것 같소.》

《아니요. 쇠물밑의 크링카가스가 포화됐던것 같소.》

《그럼 가마가 완전히 건조되기 전에 장입을 한게 아냐? 아니 욕심을 부려도 정도가 있지. 그렇게 로를 혹사시키면 어떻게 해, 엉?》

그들의 말을 통하여 철진은 경쟁그라프의 2만t을 위해 정신없이 일하면서 로가 혹사되였다는것 그리고 다른 한편 산소취입조절을 잘못하여 마치 사람이 음식을 지나치게 먹고 토하듯 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이럴 때 《폭발》이라 하는것은 로전체가 깨여져 날아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쇠물을 날려버렸다는것을 뜻했다.

이윽고 김용삼지배인까지 달려나왔다. 얼마전까지 이곳 1강철직장장을 하던 그였으므로 대뜸 사고의 원인을 알아보았다. 계획수행이 눈앞에 이르러 작업반별로 생산경쟁이 치렬해질 때 흔히 사소한 부주의로 이런 사고가 나군 한다. 하여 그는 자기가 데리고있던 사람들모두에게 처음부터 도끼눈이였다.

《반장은 어디 가 숨었어?》

반장은 지배인이 소리치는데도 잔등을 돌려대고 갈퀴같은 손으로 컴컴하게 질린 얼굴만 벅벅 문질러대고있었다.

《로장은 왜 안보여?》

《예, 여기 있습니다.》

《성표! 이게 뭔가, 엉?! 강철생산계획을 다 말아먹을려구 그래? 이걸 어떻게 책임지겠어?》

얼굴이 꺼멓게 질린 그를 대신하여 뒤늦게 나타난 《강철령감》 최진수가 말했다.

《지배인동무, 잘못은 내게 있수다.》

한때 영웅로장으로 소문이 뜨르르하던 《강철령감》은 지금 70고개를 썩 넘긴 고령이지만 교관으로서 1강철직장의 모든 크고작은 일들을 주관하는 인물이다. 한때 그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였고 지금도 련합당위원회 위원이므로 누구도 령감앞에서는 혀를 깨물며 어성을 낮추지 않을수 없다.

김용삼지배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고원인을 따져보구 단단히 문젤 세워야겠수다.》

《그래야지요. 정신이 번쩍 들게 조겨대겠수다.》

다음순간 《강철령감》은 자기 등뒤에 우두커니 서있는 사람들을 향해 눈알을 부라리며 소래기를 질러댔다.

《어째서 다들 벌레씹은 상이 돼서 그래? 빨리 로를 복구할 생각부터 해야지. 이보라구 로장, 언제까지 복구할수 있어?》

《오늘중으로 해야지요.》

《그걸 오늘중으로 해? 이전엔 사나흘씩 걸리던걸?》

《하면 될게 아이오?!》

《좋아. 그럼 해보자, 그런데 눈알은 왜 희뜩거려?》

로는 물론 온 직장이 달라붙었다. 교관들인 김두길, 안농식, 리광렬 그리고 무슨 허가성을 가진 사람들이 《강철령감》의 지휘하에 리성표로장과 같이 못쓰게 된 가마를 복구했다. 꼬박 24시간을 바쳐 쉴새없이 토론하고 한쪽으로는 때붙이고 수리하며 치료도 그자리에서, 밥도 역시 선자리에서 꽥꽥 소리치고 싸움질을 하며 먹었다. 시간을 아껴 토론한다는게 저마끔 소리치고 우겨대고 밸뚜시를 부리기도 했던것이다.

크링카만 해도 5t이나 들었다. 그 전투에서 철진은 로체를 복구하는 제일 어려운 일에 참가하였다. 반장이 추천하고 로장이 승인했다.

로를 복구하는 전투가 끝났을 때 《강철령감》이 철진이를 불렀다. 령감은 휴계실에 들어가자 비닐고뿌로 주전자의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물에 젖은 턱을 훔치는데 거무스레한 팔뚝에서 시퍼런 피줄들이 꿈틀거리는것이 보였다.

《용해공일이 힘들지?》 령감이 물었다.

《아니요.》

《힘들어. 어째 힘들지 않겠나. 나라의 맏아들구실을 한다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 헌데 이번 로복구때 보자니 임자 일본새가 맘에 들더구만. 역시 제대군인이 달라.》

《고맙습니다, 칭찬해줘서.》

《칭찬이란 필요한거지, 등잔에 기름처럼. 그건 그렇구… 오늘밤 나와 같이 가보지 않겠나?》

《어데 말입니까?》

《ㅈ철공장일세. 오늘 거기서 또 새 ㅈ철시험을 하는데… 이번엔 성공할 자신이 있다더구만. 그럴 때 가서 용해공들의 이름으로 축하를 해줘야 할게 아닌가. 응?!》

《좋습니다.》

《강철령감》이 그런 일에 굳이 박철진을 고른것은 무엇때문인지?… 그러나 그들이 《ㅈ철》공장에 갔을 때는 이미 시험이 끝난 후였다. 이지러진 달이 바다기슭의 불꺼진 시험로를 퍼릿하게 비쳐주고있었다. 시험로옆으로 지나간 구내철길우에 한 처녀가 앉아있을뿐 나머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강철령감》이 다들 어데 갔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처녀는 급히 머리를 돌리더니 손등으로 눈언저리를 문질렀다. 울고있은것 같았다. 그러자 령감이 화를 냈다.

《다들 어데 갔는가구 묻지 않아.》

《예, 시험이 또 실패해서…》

《그래서?》

《저기 휴계실에서 토론을…》

《그-래?》

령감은 처녀가 가리킨 선별직장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피끗 눈길을 돌렸다.

《가만, 너 옥영이로구나. 응?… 그런데 어째 여기 나와 울고있는거니?》

철진은 한순간 숨이 꺽 막히고 얼굴에 피가 확 모이는것을 느꼈다. 그 녀자가 무어라고 대답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비로소 그 녀자의 동실한 어깨의 륜곽이며 달빛에 비쳐진 이마와 상큼한 목이 왜 처음부터 그리도 낯익어보였던가 하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서옥영!… 그 녀자를 이렇게 또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한때는 이름조차 알지 못하면서도 정녕 잊을수 없어 기를 쓰며 찾던 녀자, 하지만 얼마전 용세에게 끌려 그의 집으로 가던날 길가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엔 얼마나 놀랐던가. 처녀로 보았던 그에게 어린애가 달려있다는것을 알게 된 순간 얼어붙은것처럼 굳어져버린 그였었다.

그때부터 한사코 머리속에서 지워버리려고 애쓰던 녀자, 그리하여 날이 갈수록 그의 기억에서 차츰 소리없는 안개처럼 멀리, 저 멀리로 고즈넉이 사라져가던 녀자, 그런데 오늘 그 녀자와 여기 한적한 바다기슭에서 또 이렇게 마주서리라고 어찌 상상인들 했으랴.

하지만 오늘도 그 녀자는 철진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누군지 눈여겨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령감이 소리치고있다.

《야, 난 눈물이나 짜는거 질색이야. 그래두 남들은 옥영이를 ㅈ철공장의 꽃이요 뭐요 하더라만… 원, 알구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울보딱지였구나. 응? 제밀할!…》

령감은 진정 화가 난듯 했다. 허리를 펴고 일어선 옥영이를, 머리를 숙인채 손등으로 눈굽을 씻고있는 옥영이를 노려보며 또 거칠게 소리치는것이였다.

《꼴 좋다. 야, 그렇게 눈물이나 짤바엔 싹 걷어치워. 여기 나와있지 말구 집에 가서 애나 돌보란 말이야!》

《아닙니다.》하고 옥영이가 처음으로 령감을 마주보며 가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난 여기서… 성구알들을 구워야 합니다. 이제 연구사들이 또 나옵니다.》

《연구사들이 있는데 어째 그걸 네가 해야 돼?》

《그저 돕구싶어서… 저야 성구기운전공이 아닙니까?》

하늘에서는 이지러진 달이 구름속에 가리워지고 바다에서는 파도가 높았다. 누기찬 바람이 씁쓸한 바다의 냄새며 늪지대의 비릿한 냄새를 몰아왔다.

《이보게.》하고 령감이 철진에게 소리쳤다. 《임잔 어째 멍청해서 그러나, 엉?…》

괜한 화풀이였다. 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비로소 머리를 들고 자기를 쳐다보는 옥영이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있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령감은 철진의 팔을 잡아끌었다.

《돌아가자구. 오늘은 일이 글렀어.》

령감은 《ㅈ철》시험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찾아갈 생각이 없었다. 자기는 위안이라는걸 모른다고, 그저 소래기를 지르는것밖에 모른다면서 구내철길을 따라 오던 길을 돌따서 터벅터벅 걸었다. 몹시 기분이 좋지 않은것 같았다. 괜히 애꿎은 서옥영이만 자꾸 욕했다.

《그게 우는걸 보니 영 속이 좋지 않아. 울긴 왜 운다는거야? 새 ㅈ철이 뭐 그렇게 쉽게 나올가? 그렇게 우는걸 보면 힘들게 일하는 책임비서랑 연구사들 마음이 언짢을게 아냐.》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따르는 철진을 돌아보았다.

《참, 자넨 저앨 모르지? 임자네 작업반 용세네 이웃에서 살아.》

령감은 철진의 팔목을 잡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님자두 이자 봤겠지만 정말 인물곱구 맘씨도 비단결같다네. 그런데… 아버지가 법적제재를 받은담부터 웃음을 잃고 산다네.》

《아버지가요?》

《그렇네, 저 옥영이 아버진 이 공장 부기사장이였는데 인물 잘나구 기술도 높은 사람이였어. 흠이라면 무서운 고집불통인데 일단 맘먹고 달라붙으면 누구도 어쩌지 못했다는거야. 그러다가 몇해전 그 사람이 무슨 새 기술혁신안을 시험한다면서 와짝 떠들다가 그만 숱한 설비들을 구워먹었네. 큰 폭발사고가 일어났거던. 그러니 어찌 됐겠나. 다들 일솜씨가 걸싼 사람이라고 아쉬워했지만 법적추궁은 면할수 없었지. 참 아까운 사람일세.》

《그럼 저 동무 아버진 아직…》

령감은 무겁게 한숨을 내그었다.

《그래, 아직두 한해는 더 있어야 한다던지.…》

《…》

그들은 한동안 아무말없이 걷기만 했다. 찬바람에 잔등이 오싹오싹했다. 무엇인가에 자꾸만 발이 걸채이군 했다.

《그런데?》

별안간 철진이 걸음을 멈추었다. 머리속에 떠오른 하나의 생각에 숨길을 딱 멈추더니 가쁘게 물었다.

《그럼 그 애는요? 수림이말입니다.》

《수림이?》 령감도 놀란듯 했다. 《님자가 어떻게 그 애 이름까지 다 아나?》

《저 그건…》

《음- 알수도 있지. 용세네 이웃집이니까.… 그건 그렇구.… 수림이 그 앤 고아야. 저 옥영이가 데려다 키우는 앨세.》

《예?》

《원 놀라긴! 우리 시대에 그런 일이 뭐 한두가지라구?… 사실 수림인 저 회전로직장 청년동맹비서의 딸이였네. 그런데 그 청년동맹비서가 몇해전 로속에 들어가 수리작업을 하다가 잘못되였네. 갑자기 머리우에서 내화벽돌이 무너져내렸다질 않나. 그때 그 사람이 비켜라!하고 소리치며 그걸 제몸으로 막았다네. 사실 저 회전로라는게 겉보기와는 달라서 그안에 들어가보면 사람의 키 두배가 넘는다네. 거기서 떨어지는 수백장의 뜨거운 내화벽돌을 한몸으로 막았으니… 어찌 됐겠나. 그런데 얼마후 그 사람 처가 또 잘못되였네. 피덩이같은 수림이를 남겨놓구 말일세.》

철진이는 숨도 쉬는것 같지 않았다. 저도모르게 두손을 꽉 움켜잡으며 령감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어린 수림이를 길주서 산다는 친척이 데려간다구 했지. 다들 그렇게 알았는데 글쎄 저 옥영이가 처녀의 몸으로 맡아키울줄이야. 옥영인 주체철을 위해 목숨바친 청년동맹비서의 딸인데 여기 아버지가 일하던 공장에서 키워 대를 잇게 해야 하지 않는가고 하면서 고생고생을 다하며 키워온다네. 정말 쉽지 않은 일이야. 제가 낳은 친딸인들 그렇게 극진하겠나. 어찌나 정을 쏟았는지 수림인 한시도 떨어지지 않겠다고 발버둥일세. 그리구 옥영인 또 수림이가 후에라도 친엄마가 아니라는걸 알게 될가봐 제발 말이 나지 않게 해달라고 사정을 해서 공장사람들은 물론 이웃들도 비밀을 지켜준다네. 나도 ㅈ철공장 당비서한테서 듣고야 알았어. 그때부터 저 애만 보믄 왜 그런지 자꾸 눈물이 날것만 같은게… 정말 이상한 일이지? 눈물을 왜 난다는건가?!…》

《…》

철진은 여전히 숨이 막힌듯 허덕이고있었다. 벅찬 경련에 가슴이 뻐근해져서 얼굴의 볼편을 자꾸만 실룩거렸다. 서옥영, 주체철의 꽃!… 생활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것인가. 그리고 이 생활을 창조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훌륭한것인가!…

시서늘하고 습한 바람이 바다에서 불어오고있었다. 가을이 가까와오고있는것이다.…

 

×

 

열흘이 지났다. 그날은 수림이가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이여서 철진이는 우정 시간을 내여 병원에 갔다.

수림이는 정문계단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고있었다. 철진이 나타나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비실비실 뒤걸음쳐갔다. 철진이가 정을 줄수록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유심히 살피는가 하면 겁을 집어먹고 묻는 말에도 대답을 안했다. 새로 나타난 제대군인 박철진의 강파로운 인상때문에 그가 자기의 사랑하는 엄마를 해칠가봐 무서워하는것인지도 모른다. 한번도 수림이는 그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

《수림아, 이리 온. 내가 널 데리러 왔다.》

《?…》

여전히 수림은 뒤걸음치고있다.

《엄마가 날더러 부탁했어. 엄만 오늘 시간이 없거던.》

《?…》

《자, 나와 같이 가자. 응?…》

《?…》

어린것의 뾰조름한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있다. 이것은 그 애가 지금 막 울려고 한다는것을 의미했다. 하여 철진은 그 자리에 선채 손만 내밀었다.

《수림아, 무서워 말아. 난 좋은 아저씨야. 너하구 친하자는거야.》

《싫어, 난… 싫어!》

그 애가 처음으로 한 말이였다. 울음섞인 그 목소리가 철진의 가슴을 아프게 지졌다.

바로 그때 옥영이가 등뒤에 나타났다.

《엄마!-》 마침내 수림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옥영이에게 달려가 안겼다. 《엄마, 나 무서워.》

옥영이의 눈길이 철진에게 던져졌다. 동문 뭐예요, 왜 애를 울리는거에요? 하는 힐난의 눈길이였다.

《아- 안됐습니다.》하고 철진은 당황하여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난… 수림이와 친하자구.…》

《?…》

옥영이는 아무말없이 수림이를 안고 일어섰다. 한번 더 힐끗 눈길을 주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옥영이도 그를 기억하고있었다. 사실 맨처음 이마를 맞쪼았을 때 옥영이의 눈에 비쳐진것은 해군복을 입은 그 제대군인이 입술을 찌긋하고 웃던 모습이였다.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당황했음에도 불구하고 번뜩이는 눈빛만은 당돌하고 무모하기까지 했었다. 그런 젊은이이기에 수림이 입원한 병원에 자주 다니며 옥영이와 마주설 기회만 노리는것이 아닌가. 옥영이 피하면 피할수록 그는 더 극성이였다. 그 눈빛도 나날이 더 불타고있다.

그들은 병원정문을 나와 좁은 골목길을 걸어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철진이가 막무가내로 서옥영을 따라갔다고 해야 할것이다.

서옥영은 작은 입을 꼭 다물고있는데 가무스레하고 뽀얗던 얼굴이 해쓱해져보였다. 수림이 몇번 뭐라고 종알거렸지만 듣지 못한것처럼 한번도 대답을 안했다. 수림이를 꼭 껴안고서 땅바닥만 내려다보며 걷고있는것이 마치도 감때사나운 한 젊은이가 뒤에서 자기들 모녀를 해치려들가봐 피해달아나는듯싶었다.

《엄마.》 수림이가 또 울먹거렸다. 《나 무서워. 저 아저씨 자꾸 따라와!》

《…》

《또 따라와!…》

그러자 옥영이는 더는 참을수 없는듯 걸음을 멈추고 철진에게 직방 내쏘았다.

《동문 제대군인이지요?》

《그렇소.》

《너무하다구 생각되진 않나요?》

《아니, 천만에! 난 수림이의 친구가 되자는거요. 정말이요.》

《동문 정말 무례하군요.》

《아니 그런게 아니요.》 철진은 손을 내저으며 바삐 서둘렀다.

《날 그런 사람으로 보지 마오. 난 이미… 결심했소. 기어이 수림이 아버지가 되겠다고 말이요.》

서옥영은 별안간 태질을 당한듯 했다. 한순간 경련적으로 후두두 떨고 자기가 꼭 껴안고있는 수림이의 옷자락을 깨물더니 갑자기 그에게로 머리를 홱 돌리였다. 그리고는 퍼런 빛이 돌만큼 해쓱해진 얼굴을 쳐들고 새된 흐느낌소리같이 부르짖었다.

《이보세요. 제발 부탁인데 날 더이상 괴롭히지 말구… 여기서 곧장 돌아가주세요. 예?》

그가 하도 절망적으로 하는 말이여서 철진은 속이 섬찍했다.

《괴롭힌다구요?… 그렇다면 좋소. 돌아가지요. 당장!》

전날의 해군사관 박철진은 단순하면서도 억세고 결패있는 사내였으므로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숨길줄 몰랐다.

《우린 어느땐가 꼭 마음이 통할게요. 어쨌든 난 그렇게 믿고싶소. 자 그럼…》

그러나 즉시 발걸음을 돌린것은 아니였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머뭇거리는데 무엇때문인지 서옥영의 거동이 이상하게 느껴지는것이였다.

《왜 그러오?》

《…》

옥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엇이라고 대답한단 말인가? 심장을 물어뜯는것 같은 아픔과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보이지 않은 고민을 어찌 한두마디로 다 말할수 있단 말인가?… 옥영은 허덕이고있었다. 핑- 흐려지는 눈으로 고집스러운 제대군인총각을 바라보며 소리없이 흐느끼고있었다. 어인 일로 이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쏟는것인지 그자신도 알수 없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어린 수림이도 엄마를 따라 징징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철진은 시꺼먼 눈시울을 슴벅거리며 굳어지고말았다.…

거칠고 우악스러운 남자도 슬피 우는 녀자의 눈물에는 가슴이 젖는 법이다. 철진은 어리뻥해진 자기의 머리를 무엇인가 콕콕 바늘끝으로 찌르는듯 뾰족한 아픔을 느꼈다. 하여 그는 바싹 말라드는 입술을 혀로 핥으며 다급히 말했다.

《아니 이거 왜 이럽니까. 제발 그러지 마시오. 내가 가면 될거가지구.… 예?》

《가주세요.》 옥영이 눈물로 속삭이였다. 《그리구… 다신 오지 마세요. 제발!》

다음순간 옥영은 수림이를 꼭 껴안으며 급기야 몸을 홱 돌려 달아났다.

집집의 터밭에 심은 강냉이들이 울바자와 키를 견주고있었다. 그 강냉이들사이로 옥영의 자태가 얼씬거리는것을 바라보면서 철진은 자기의 마음이 구깃구깃 구겨지는것을 느꼈다. 무엇때문인지 돌연 목구멍에 그득 차오르는것을 꿀꺽 삼키며 그는 돌아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