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6

 

제 7 장

6

 

봄은 무르녹고있었지만 북남관계의 눈석이는 시작되지 않고있었다.

2월중순 평양에서 열린 공화국정당, 단체련합회의에서 남조선의 정당, 단체들에 보내는 편지를 채택하였으나 련합회의의 제안과 편지를 받고도 새로 들어앉은 《정권》은 북과 남이 단합하여 자주적으로 민족의 출로를 함께 열어나가자는 호소에 대답을 피하고있었다. 따라서 비전향장기수들의 송환을 촉구하는 강력한 호소에도 거부적이였다.

달라진것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예견치 못한것은 아니였지만 김영삼역도의 말로에서 교훈을 찾고 민심을 따르는척 추파라도 던질줄 알았던 권형일은 분개하지 않을수 없었다. 드디여 남조선의 《통일부장관》이 첫 반응을 보였는데 그것이 또 권형일을 아연케 했다.

《북과의 대화를 서두르지 않겠다.》

《상호주의를 남북관계에서 근본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상호주의라는 새로운 틀로써 비전향장기수문제도 다루어야 한다.》

《비전향장기수들 송환을 우리 사회 일각에서 보면 지나친 양보라는 비난이 많다. 정부차원에서 이를 거론하는것은 시기상조이다.》

남조선의 새 집권세력은 바로 이렇게 처음부터 김영삼의 전철을 밟기 시작했다. 또다시 언론의 드센 포화를 들씌워야 했다. 그리하여 권형일은 그에 대한 갖가지 대응책을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언제 잠들었던지··· 전화종소리에 깨여났을 때는 이미 창가에 푸릿한 새벽빛이 어리고있었다. 그는 재빨리 시계를 들여다보고 눈언저리를 힘껏 문질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찾으신다는것을 직감했던것이다. 그런데 그이께서는 지금 어데 계실가. 천리밖 현지지도의 길에서 전화를 걸어주신것은 아닐가?···

《권형일 전화받습니다.》

《아, 마침 방에 있었구만.》 그이의 쇠소리섞인 음성이 진동판을 저릉저릉 울렸다. 《지금 무얼 하고있습니까?》

《장군님, 제가 그만 잠들고있었습니다.》

권형일은 잠내나는 자기의 목소리가 죄스러워 송수화기를 꽉 틀어쥐였다.

《뭘 그럽니까.》 그이께서 따뜻하게 말씀하시였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였다니 나도 마음이 놓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비서동무가 늘 무리하게 일하기에 전화를 걸가 말가 망설이던 중입니다.》

《장군님!》 권형일은 어느새 목이 메였다. 《사실 강인덕(남조선의 〈통일부장관〉)의 〈상호주의〉궤변을 어떻게 답새길가 하고 생각하던 중에 깜박 잠들었습니다. 어느새 날이 밝는줄도 모르구···》

《그들이 들고나온 〈상호주의〉라는게 뭐 별게 아닙니다. 7. 4공동성명에 천명되여있는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을 외면하고 북남관계를 등가교환에 기초한 상업적관계로 만들려는 입비뚤어진 소리입니다. 되게 다불릴 필요가 있습니다.》

《예. 장군님, 되게 다불리겠습니다.》

《원래 권비서야 강타명수이지. 당장 묵사발을 만들겠다고 을러대면서!···》

그이께서 소리내여 웃으셨지만 권형일은 얼굴이 화끈거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장군님께서는 지난날 권형일이 비전향장기수들을 데려오는 문제에서 남측의 비인간적만행에 대한 폭로, 규탄에만 열을 올렸던것 등을 암시하셨기때문이였다.

《장군님.》 그는 말을 떠듬거렸다. 《그들이 비전향장기수들문제까지 〈상호주의〉원칙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또···》

《또 강타를 먹인다는겁니까?··· 물론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문제의 본질을 까밝히는것이 중요합니다. 말하자면 〈상호주의〉의 진속이 무엇인가 하는것인데 그건 바로 그것이 그 무슨 〈새로운 틀〉도 〈원칙〉도 아닌 장사보따리에 불과하다는 그것입니다.》

《장사보따리!》하고 권형일은 저도모르게 되받아 외웠다. 그 한마디 말씀속에 남측의 반통일적, 반민족적정체가 압축되여있는것이였다. 그는 저도모르게 청을 돋구어 말씀드렸다.

《장군님, 그 〈장사보따리〉를 풀어 낱낱이 발가놓겠습니다.》

《옳습니다. 그것이 조국통일을 위한 〈새로운 틀〉이 아니라 새로운 걸림돌이라는것,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문제를 장사군의 론리로 흥정하는것은 엄중한 매국행위, 배신행위라는것을 까밝혀야 합니다. 그러되 비전향장기수들문제를 비롯하여 조국통일과 관련된 문제를 두고 남조선당국자들이 진심으로 나설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를 묻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의 공개질문장같은것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궁극의 목적은 도수높게 때리는 그자체에 있는것이 아니라 그들이 제 정신을 가지고 나오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언제든 이걸 잊지 마시오.》

《예, 알겠습니다. 장군님!》

그는 장군님께서 이것으로 전화를 끊으실줄 알았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잠시 무슨 생각에 잠기신듯 하였다. 고요한 새벽, 지금 장군님께서는 어데 계실가. 새벽이슬 내리는 최전연초소일가 아니면?··· 이윽고 장군님께서 다시 말씀을 이으시는데 그 음성은 젖어있는듯 싶었다.

《이제 곧 위대한 수령님께서 탄생하신 태양절을 맞게 되는데 그 준비사업을 잘해야 하겠습니다. 어버이수령님이 그리워 세계각국에서 찾아오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고 특히 해외동포들속에서 간절한 청이 많이 들어오고있습니다. 우리 수령님과 연고관계가 있는 동포들은 물론 새로운 인생길을 택한 사람들도 다 오게 해야겠습니다. 빈틈이 없도록 해주시오. 그럼 저녁에 다시 만납시다.》

권형일이 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고 간것은 한밤중이였다. 그때에야 현지지도의 먼길에서 돌아오신것이였다. 그이의 몸에서는 먼 현지지도의 길에서 배인 봄날의 숲과 해토무렵의 땅냄새가 풍겨오는듯 했다.

그 시각 장군님께서는 전화를 걸고계시였다. 탁자우엔 태양절을 맞으며 조국을 방문하는 해외동포들의 명단이 놓여있는데 그것은 이미 권형일도 보아준것이였다.

《그러니 변절자의 딸이여서 명단에 넣지 않았다는겁니까?》

그이께서 전화로 말씀하시는데 준렬하신 어조였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선 안됩니다. 그는 변절자의 딸이기전에 지리산의 딸, 빨찌산의 딸이였습니다. 동무들도 그 녀자에 대한 자료를 보지 않았는가?!···》

권형일은 비로소 모든것을 깨달았다. 장군님께서는 지금 조아라에 대하여 말씀하시는것이였다. 비전향장기수 김진서의 딸, 화순이 네데를란드에서 만나본 녀자, 그에 대하여 장군님께 보고드린것도 권형일 그였다. 그런데 권형일은 어느새 그 녀자에 대하여 잊고있었다. 해당 부서에서 조국에 오게 될 해외동포들의 명단을 작성한것을 깐깐히 따져보면서도 조아라가 빠져있는것을 알지 못했다.

목구멍으로 뻑뻑한 경련이 치밀어올랐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나는 왜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던가?!···

《생각해보시오.》 장군님께서 계속하시는 말씀이였다. 《그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알지 못하고 빨찌산들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자기 아버지가 변절자라는것을 알자 그 죄많은 인간쓰레기와 영영 결별하였습니다. 자기 어머니의 성을 가지고 변절자를 피해 멀리 외국으로 달아난것을 보시오. 그러한 그가 어떻게 아버지의 죄악에 찬 과거를 책임진단말인가. 한생 치욕에 몸부림치며 숨어살아온것만도 모자라서 어머니조국마저 차버린다면 그 녀자의 운명은 얼마나 비참해지겠는가!··· 일부 편협한 인간들때문에 오명을 쓰고 눈물과 고통속에 숨져간 사람들을 생각해보시오. 얼마나 가슴아픈 일이요. 그리고 조아라는 수많은 지리산빨찌산들을 알고있습니다. 김진서로인을 비롯한 비전향장기수들과 이미 지리산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비전향장기수들을 하루속히 조국의 품에 안아오기 위하여 모든 력량을 묶어세우고있는 때 한 동포녀성의 힘까지 합치는것이 좋으면 좋았지 나쁠것이 무엇인가. 그리하여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을 위한 대행진에 한사람이라도 더 참가시키는것이 무엇이 나쁜가?··· 인간을 사랑해야 합니다. 진실한 사랑, 뜨거운 인정으로 더 많은 동지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이 오가고 뜻이 통하고 마음이 합쳐질 때 힘이 커지는것입니다. 사랑이 식으면 혁명을 못하오. 내가 늘 말하는것이지만 혁명은 곧 사랑이요. 가장 진실하고 뜨거운 동지적사랑이란말이요!···》

잠시후 그이께서는 《좋소, 그렇게 합시다.》라고 하시며 전화를 끊으시였다.

한 일군의 옹졸한 생각때문에 가슴이 저리신듯 했다. 원주필로 탁자를 두드리며 괴로움에 찬 음성으로 나직이, 혼자말씀처럼 뇌이시였다.

《얼마나 편협한가. 과연 이렇듯 정치적편견때문에 사람들의 희망이 짓밟혀야 한단말인가. 이렇게까지 가슴이 좁아지고있단말인가?!···》

권형일은 더이상 참을수 없어 손끝으로 옷깃을 잡아다리며 말씀드렸다.

《장군님,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그건 제가···》

그이께서 눈길을 드시였다.

《비서동무도 그 명단을 보았습니까?》

《예, 보았습니다. 장군님, 보면서도 조아라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사실 전··· 명단을 작성한 그들처럼 응당··· 그럴 자격이 없는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마 잊고있은것 같습니다.》

《솔직하니 좋습니다. 우리 여기서 또 한번 교훈을 찾읍시다. 우리 수령님께서 반공으로 한생을 살아온 사람들까지 뜨거운 민족애, 인간애로 포섭하고 참된 삶에로 재생시켜주신 위대한 은정을 언제든 잊지 맙시다. 사랑으로 민족을 안아야 합니다. 뜨거운 사랑만이 문을 엽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문도 통일의 문도 뜨거운 사랑, 진실한 사랑만이 열수 있다는것을 잊지 마시오.》

권형일은 밀물처럼 흘러드는 뜨거운 격정에 잠겨 《경애하는 장군님!》하고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