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2

 

제 3 장

2

 

류은혁이 마중나갔던 남부군이 덕유산을 떠나 산청군을 거쳐 지리산자락의 거림골과 중산리입구에 이르렀을 때 김진서는 여전히 도당학교에서 래일의 초급지휘관들과 군 및 면의 기층당조직들에서 활동할 사람들을 가르치고있었다. 어느날 정대천이 비지땀을 흘리며 달려와 그에게 말했다.

《남부군이 도착했네. 도착성명이 굉장해!》

그것은 남부군이 중산리입구의 시천(덕산리) 삼장지서와 덕산경찰지서를 공격하여 박살낸것을 두고 한 말이였다.

덕산리는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어구로서 교통의 요충지이며 산청지역의 정치, 경제중심이여서 적들은 수많은 중무장경찰을 배치하고 지서의 외곽에는 물홈을, 안쪽에는 사람의 키를 넘는 토성으로 견고한 방비진을 폈다. 그것도 부족하여 남부군이 가까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고 토성의 맨 안쪽에 통나무바자를 세우고 성곽의 모퉁이마다 망루를 세웠다. 토성안에 2개의 콩크리트화점을, 지서의 뒤산에는 토목화점 2개를 설치하고 교통호마다 엄개를 씌웠다.

앞에는 물살빠른 남강이 또 천연의 방선이 되여있어 실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것을 남부군이 박살냈던것이다.

《사흘동안이나 포위공격을 했구만. 전번 비행기들이 날치던걸 동무도 봤지?》 정대천이 흥분하여 떠들었다. 《그것들이 경찰을 지원했던거네. 그렇지만 별수 있나. 남부군이 박격포로 답새기면서 놈들을 개미떼처럼 짓뭉갰거든. 무혈점령했다네. 무혈점령!··· 공격전투에서 한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았으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응? 왜 가만히 있나. 난 막 몸살이 나서 죽겠는데.》

비로소 정대천이 왜 그토록 흥분하여 열을 올리는지 리해되였다. 인민군중대장이였던 그는 총포성이 벼락치듯 하는 전투장을 갈망하는것이였다. 도당학교의 군사교관으로서 얼마나 중요한 사업을 맡고있는지 잘 알고있는 그였지만 전투의 포성이 그를 못견디게 유혹하고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더욱 자주 실지 전투로써 학생들을 교련하기 시작했는데 남부군의 엄엄한 기세에 부근의 적들이 죄다 달아났으므로 매번 헛물만 켰다.

하지만 그때문에 속을 앓을 필요는 없었다. 대군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남부군을 뒤쫓아온 적들과 새로 투입된 무력이 떼구름처럼 지리산을 둘러싸고있는것이였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그때 사령관 리현상은 여러날동안 잠을 못자고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대오안에서 갖가지 억측들이 있었지만 보통대원들은 그저 엄중한 정세때문이라고만 믿고있었다. 후에 알게 된바이지만 회의차로 먼저 떠나왔던 리현상이 부대를 맞이했을 때 그에게 보고한것은 부사령관 리진범이였다. 응당 보고를 했어야 할 제2의 최고지휘관 박종하가 눈에 띄지 않았다. 이미 가회지서전투에서 전사하였는데 본부성원들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게 했던것이다. 지리산의 호랑이, 남부군의 백전지휘관, 공화국영웅(남부군이 남하할 때 평양방송으로 정령이 발표되였다.)인 쾌남아 박종하, 리현상이 제일 믿고 아끼던 사람이 더는 모습을 보이지 않자 리현상은 며칠사이에 핼쑥해졌다.

 

×

 

남부군이 지리산에 도착한지 1주일이 지난 어느날 김진서는 도당학교(일명 군정대학)의 제강과 교련, 운영에 대한 경험과 대책적의견을 모아가지고 거림골로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때 거림골에서는 남부군의 군정간부들과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당 및 유격대지휘관들의 련합회의가 열리고있었다.

김진서는 그 회의에 제출할 보충보고를 가지고가게 된것이다.

거림골에서 그는 처음으로 리현상과 여운철, 리재명, 리진범, 김흥복, 차일평 등 소문으로만 알고있던 군정간부들을 보게 되였다. 《지리산의 호랑이》로 소문이 들썩했던 박종하참모장도 만나게 되리라고 기대했었지만 그는 없었다.

비가 내리고있었다. 지리산의 령봉들과 록음우거진 골짜기들이 비에 젖고있었다. 산죽으로 이영을 얹은 지휘처의 막사들도 하염없이 내리는 비줄기에 흠씬 젖어버렸다.

회의는 오랜 시간 계속되였다. 진서는 풀더미처럼 대충 만든 초막에서 이제나 저제나 하고 자기를 부르기만 기다리고있었다. 그러나 날이 저물도록 누구도 그를 찾지 않았다. 그를 오라고한 도당위원장 박영발조차 까맣게 잊고있는듯 했다.

그때 초막으로 한 녀자가 들어섰다. 미군녀복을 입고 권총까지 차고있는 하정례였다. 열병을 앓은 후과인지 매골같이 앙상했는데 눈빛까지 사무럽게 번뜩이고있어 꼭 현대판 마녀같이 느껴질 지경이였다.

《아직두 회의가 안끝났어요?》

누구에게라 없이 묻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았다. 눈길은 여전히 회의가 벌어지는 산장쪽에 견주어져있었다. 얼굴의 비물을 손으로 훔치고 옷자락을 문질러 물을 빼면서도 초막안쪽은 스쳐볼념도 안했다. 가까이에서 역시 산장쪽을 내다보고있는 진서조차 알아보지 못하고있었다. 하는수없이 진서가 먼저 말했다.

《정례동무, 잘 있었소? 나요, 김진서.》

《진서동지가?》 처녀는 머리를 돌렸다. 《그렇군요. 책임강사동지. 참 오래간만이예요.》

그렇게 반기는것같진 않았다. 부지중 호- 하고 한숨을 내긋는데 그러자 처녀의 모습은 또 돌변했다. 처음 만났을 때 가늘고 긴팔을 내던지듯 하며 악수를 청하던 기백있고 야멸찬듯 하던 하정례가 아니였다. 죽음을 앞둔 병자와 같은 허약함과 애써 지탱해오던 정신력까지 무너져버린 한 녀자가 눈앞에 서있을뿐이였다. 그것이 진서의 가슴을 아프게 허비였다.

《몹시 축갔구만.》

《예.》

《고생이 많았겠지요?》

《예.》

《그새 어디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3련대에서 싸웠어요. 청년련대··· 잘 아시죠?》

《그럼. 3련대라면야 내가 지구사에 있을 때부터 잘 알지요.》

《남들처럼 행군하고 전투하고··· 죽을 고비도 많이 겪었어요. 동지들이 날 아껴주고··· 그새 나도 많이 변했죠. 옛날의 하정례가 아니예요.》

《그런것 같소. 헌데··· 너무 지쳐보이는군요.》

《그렇게 됐어요. 난 지금··· 막 무서워요. 이렇게 무서워보긴 처음이예요.》

처녀는 머리를 돌렸다. 어느새 밖은 어두워지고 비소리만이 소연했다. 비로소 회의가 끝난듯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쓸어나왔다. 누군가 초막으로 달려와 소리쳤다.

《군정대학서 온 동무가 여기 있소?》

《예, 접니다.》

《갑시다. 리선생이 부르시오.》

리현상사령관을 두고 하는 말이였다. 진서는 그를 따라 산장으로 들어갔다.

오래전 어떤 일본인 목재상이 나무를 채벌하러 와서 며칠 묵어있었다고 하는데 통나무로 지은 작고도 아담한 집이였다. 리현상은 구리로 만든 가스등을 마주하고 앉아있었다. 점잖아보이는 사람이였는데 얼굴이 길사한것과 부처마냥 귀가 큰것이 인상적이였다. 떼떼권총을 배허벅에 차고있었지만 소문에 듣던것처럼 강의하고 과묵하고 치밀한 빨찌산사령관이라기보다 교사같은데가 더 많았다. 손끝으로 안경을 밀어올리며 그가 물었다.

《책임강사동무지요?》

잔잔한 목소리였으나 대뜸 상대를 휘여잡는 저력이 느껴졌다. 45살난 미남형의 이 사령관은 깍듯했다. 그 누구에게도 반말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단정한 자세로 조용히 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배워주는가, 학생들이 그것을 다 소화하는가 하는것들을 물었다. 그옆에 앉아있는 사람은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리재명 제1부정치위원이였고 불빛을 등지고 구석쪽엔 차일평이 서있었다.

리현상이 리재명에게 더 물을게 없는가 하는 의미의 눈빛을 던졌으나 그는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고있었다. 대신 차일평이 불빛이 미치는 곳으로 나서며 당건설과 당활동, 맑스주의고전의 폭력론에 대하여 력설하기 시작했다. 그가 대단한 리론가이며 열정적인 웅변가라는것이 알렸다. 그가 무엇때문에 별안간 열변을 토하게 됐는지 알수 없었다. 서른대여섯 나보이는 그의 다부진 몸전체가 맑스주의고전의 명제들로 땅땅 빚어진듯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제때에 맺고 끊을줄도 알았다.

《저는 더 물을게 없습니다.》

사실 그는 하나도 물은게 없었다. 한바탕 훈시를 쏟아놓았을뿐이였다.

《좋습니다.》 리현상이 말했다. 《래일 회의안건에 당학교확대문제도 넣읍시다. 부대들에 지금 초급지휘원들이 절실히 요구되는만치···》

그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문이 열리며 최동환이 들어섰던것이다.

《사령관동지, 장홍지구사 3련대 문화지도원 하정례동무가 찾아왔습니다. 사령관동지를 꼭 만나야 한다면서···》

하정례는 벌써 문가에 들어와있었다. 최동환이 눈꼬리를 치뜨고 사납게 쏘아보았으나 어느새 처녀는 가스등앞으로 나서고있었다. 비에 젖은 옷자락에서 물이 줄지어내렸다.

《선생님!-》

리현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나왔다.

《하정례라고?··· 어찌된 일이요. 아 이렇게 변하다니··· 하정례가 맞긴 맞아요?》

앙상하니 여윈 처녀의 얼굴에서 불빛이 흔들렸다. 가스등의 파아란 불빛때문에 하정례는 꼭 무덤속에서 나온 사람같았다.

《선생님! 정말 그리웠습니다. 선생님이랑 강사령이랑···》

처녀의 어깨에 가닿던 리현상의 손이 멈칫하더니 맥없이 내려졌다. 그러나 처녀는 아무것도 못보는듯 눈물로 목메인 속삭임에 숨가빠할뿐이였다.

《사실 그때 저도 같이 가고싶었습니다. 괜히 못나게 굴면서도··· 가고싶었어요. 그런데 강사령이··· 얼음장같다고··· 난 묻고싶습니다. 선생님, 내가 정말 얼음장같이 보이느냐고 강사령 그분께 따져묻고싶습니다.》

리현상의 얼굴도 해쓱해졌다. 동그란 안경알속에서 내다보던 두눈이 사뭇 고통스럽게 껌벅이였다.

별안간 들이닥친 무거운 침묵속에서 리현상의 목소리가 신음소리처럼 들려왔다.

《정례동무, 그건 내가··· 대답해주지요, 박종하참모장이 동물 얼마나 생각했다구··· 그건 그저···》

《아니 선생님, 그분께 묻고싶습니다. 직접··· 그분은 지금 어데 계시나요. 왜 한번도 보이지 않습니까?···》

처녀가 묻고싶어한것은 바로 그것이였다. 그것을 묻고싶어 사령관에게까지 뛰여든것이였다.

진서는 숨을 죽이고있었다. 이제 어떤 대답이 나올지 생각만해도 무서워났다. 좀전에 하정례가 《···난 지금 막 무서워요. 이렇게 무서워보긴 처음이예요.》라고 하던 말의 몸서리치는 의미가 뼈속깊이 파고들었다. 그는 비록 한번도 만나본 일이 없었지만 지리산의 호랑이, 남부군의 영웅남아 박종하가 인제는 여기에 없다는것을 상상할수 없었다. 하기에 두손을 꽉 부르쥐며 돌부처마냥 굳어져있었다.

리재명이 앞으로 나섰다. 리현상을 대신하여 조용히, 떨리는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우리가 그를 잘 보필하지 못했소. 한달전 가회지서전투때 그만···》

천둥이 터진듯 했다. 파아란 섬광이 두눈을 때린듯 하정례는 류달리 긴 팔을 들어 그 강렬한 빛을 막으려 했다. 다음 순간 조용히 이어진 리재명의 목소리는 폭우쏟아지는 천왕봉에서 울려오는 메아리처럼 웅글게 덮쳐들었다.

《놈들을 단숨에 박살내고 전리품을 거두다가 숨어있던 패잔병놈이 쏜 총탄에··· 희생되였소. 그렇지만··· 아직은 몇사람만이 알고있소.》

《?···》

누군가 휘파람소리같이 신음하였다. 그러나 하정례는 아니였다. 그 녀자는 번개불에 맞은듯 굳어져있었다. 온몸이 숯불처럼 타는듯 했다. 한순간 시뻘겋게 타오르다가 꺼멓게 죽어 숯덩이처럼 굳어져버린듯 했다.

이윽고 처녀는 용케도 자기를 걷잡고 몸을 돌렸다. 천근만근 무거워진 발을 꿈속에서처럼 옮기며 문쪽으로 가더니 가늘고 긴 팔을 축 내려드리우고 돌아섰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아프신 마음을 제가 또 허벼놔서···》

가스등불이 몸부림쳤다. 열려진 문으로 습기를 머금은 찬바람이 휙 쓸어들었던것이다. 잠시후 문이 닫겼다. 하정례가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어둠속으로 빠져나간것이였다.

리현상이 무너지듯 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첨부터 알았어. 그때문에 온줄을··· 참 독한 사람들이지. 서로 사랑하면서도 내색은 않고···》

그는 안경을 벗어들고 뜨거운 입김을 유리알에 퍼부었다. 그리고는 김진서를 향하여 신음하듯이 입을 열었다.

《따라가봐줘요. 하동무한테.》

밖에서는 세찬 바람에 나무숲이 쏴- 쏴 몸부림치고있었다. 비방울이 후두둑 후두둑! 동안뜨게 뿌려치고 웅크렝이 같은 골안에서는 나무잎 썩은 냄새며 싸늘한 랭기가 몰아쳐왔다.

하정례는 어둠속에 외로이 서있는 자작나무가지를 붙안고있었다. 나무가지가 휘청거릴 때마다 볼품없이 여위여 좁아진 처녀의 어깨우에서 비방울이 후두둑거렸다. 끝내 작은 가지 하나가 꺾어졌다. 놀란듯 꺾어진 가지를 들고 묵묵히 내려다보는 처녀의 모습은 차마 쳐다보기 딱할 정도로 초췌하고 처량했다.

꺾어진 가지에서는 하얀 진액이 흘러나왔다. 이 지방 사람들이 녀인들의 속병에 특효가 있다면서 봄이면 하얀 껍질을 칼로 도려내여 받아마시는 거자수(거자나무진액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였다. 그 거자수가 정례의 마음속아픔도 말끔히 가셔줄수 있으면 좋으련만!··· 진서는 이렇게 생각하고있었다.

돌연 처녀가 몸을 홱 돌렸다. 자기를 지켜보는 진서의 눈길을 알아차린것 같았다. 진서는 처녀의 마음속을 훔쳐보다가 들킨것처럼 흠칠했다. 그러나 처녀는 아무말없이 또 눈길을 어두운 밤하늘에 옮겼다. 구질구질 내리는 비속에서 쓰라린 공허에 신음하고있을뿐이였다.

《정례동무.》

진서가 불렀으나 꼼짝하지 않고있다.

진서는 처녀에게 다가섰다.

《정례, 나도 동무가 얼마나 괴로와하는지 잘 알고있소. 그렇지만···》

처녀는 머리를 저었다. 비물이 흐르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이렇게 될줄 알았어. 아니, 알았던것 같애. 그때에 벌써···》

처녀는 자기자신에게 무엇인가를 확신시키고있었다. 비통하고도 싸늘한 목소리였다.

《그때 왜 따라가지 않았을가···. 같이 있었으면 달리 될수도 있었을걸···》

진서가 또 힘들게 입을 열었다.

《정례동무, 너무 자신을 괴롭히지 마오.》

처녀는 신음했다. 마치 진서가 목을 졸라매기라도 하는듯 손을 들어 그를 막으며 가늘게, 애처롭게 속삭이였다.

《늦었어. 영영···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는데 왜 그랬을가. 만나면 그를 뿌리치고···》 한순간 진서를 여겨보며 뜨거운 입김을 내뿜었다. 《그랬어요. 뿌리치고 거부하고··· 말해주세요. 왜 그랬을가요. 예?!》

진서가 그에 대해 답을 주지 못하리라는것을 깨닫고는 추운듯 몸을 옹송그렸다.

《미친년이지 뭐예요. 갈데없는!··· 하지만 난 보여주고싶었어요. 내가 달라진걸 그한테 꼭 보여주고싶었는데··· 그렇게 가다니요. 천하를 호령할것같던 그가 그렇게···》

마침내 처녀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진서도 괴로움을 참아내기 어려웠다. 처녀를 위안해주고 힘이 될 고무적인 말 한마디라도 해주고싶었으나 그런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잠자코 기다리는 편이 더 낫지 않을가?··· 사랑의 아픔이 비틀어짜내는 눈물은 닦아주지 않는 법이다. 사랑! 하정례는 박종하를 사랑하고있었다. 사랑을 멸시하고 죽음을 찬미해온 정례가 지난 1년간 변함없이 사랑하고 그 사랑이 키워온 싹을 남모르게 소중히 지니고있었다.

진서는 처녀를 지켜보면서 사무치는 련민의 정에 목이 꺽꺽 막히는것을 느꼈다. 처음엔 이 처녀가 그를 몹시 거슬리게 했었다. 찢어진 소리만 내는 《망가진 축음기》를 고쳐주어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방도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는지 분명해진듯 했다. 처녀의 마음속에 진실하고 참된, 순수한 사랑이 숨쉬고있는것을 발견했던것이다.

《정례동무.》

진서는 또 말을 잇지 못했다. 처녀가 손을 들어 막으며 계속했다.

《얼음장같다고 했어요. 날더러··· 얼음장같다면서 제발 좀 웃으시오라고 했어요. 그가 얼마나 나를 사무럽게만 봤으면 그랬을가요. 끝내 그는 내가 달라지고있는걸 못보구 갔어요. 그게 더 가슴에 맺혀··· 참을수 없는거예요. 강사령이 날 밉게 보았으니··· 말해보세요. 거기서두 날 미친년처럼 보았지요. 그렇지요?》

《정례, 누구도 동물 밉게 보질 않소. 정말이요. 동무가 환자들을 위해 피땀을 바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물 친누이, 친어머니처럼 따랐는지 다는 모를거요.》

비물이 흐르는 처녀의 얼굴에서 움푹 꺼진 두눈이 번득이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 사람은··· 영영 가버렸어요. 나를 떼놓구···》

《이겨냅시다. 정례동무, 너무 괴로와말구.》

진서의 그 말에 처녀는 깜짝 놀란듯 했다.

그처럼 쉽게, 단순하게 말하는것에 아연해지고 증오심까지 품게 됐는지도 모른다. 천천히 물러서며 속삭이였다.

《됐어요. 더는 위안하려들지 마세요.》

처녀는 그를 에돌아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그 처량한 모습이 진서의 두눈을 아프게 했다. 처녀를 쫓아가 돌려세우고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꺼먼 어둠이 곧 처녀를 삼켜버렸다.

진서는 오래도록 한자리에 못박혀있었다. 머리우에 떨어진 비물이 그의 두볼을 타고 목덜미로, 잔등으로 흘러내렸다. 하정례가 가엾고 눈물겹도록 사랑스럽기도 했다. 잃지 마오, 정례. 사랑을 잃으면 견디지 못하오. 동무도 인젠 잘 알테지. 증오만으로는 살수 없다는것을, 사랑하기에 증오한다는것을!···

비는 온밤 지리산자락을 적시며 주룩주룩 내렸고 바람도 온밤 무성한 숲을 흔들며 잠 못 들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