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5

 

제 2 장

5

 

멎어서있는 기차가 어제 평양역을 떠날 때 홈에서는 한동안 혼란이 일어났었다. 기차에 오르던 한 젊은이가 두 눈을 슴벅거리며 누군가를 여겨보더니 《비전향장기수다!ㅡ》하고 소리쳤던것이다.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그한테 쏠리였다. 비전향장기수라니, 그럼 리인모동지란말인가?··· 그런데 돌격대모자를 삐딱하니 눌러쓴 그 젊은이는 앞서올라간 자기 동료들을 마구 끌어내리기까지 했다.

《저길 봐. 저기 있잖아, 응. 옳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차에 올랐던 사람들까지 서로 다투며 머리를 내밀었다. 그런데 그때 홈에는 로인이 없었다. 중년나이의 리수진이 머리를 숙이고 방금 차에 오르려던 참이였다. 그 역시 비전향장기수라는 말에 번쩍 머리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배웅나온 친지들과 작별인사를 하는 사람들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돌격대모자가 그를 지나 달려갔다. 국제렬차칸으로 가는 한 중년녀인을 막아서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그 녀인이 비전향장기수란말인가?···

《선생님, 나를 모르겠습니까?》

돌격대청년의 청높은 인사말, 그러나 녀인은 기억이 없는듯 했다.

《아, 접때 방송야회를 하지 않았습니까!》 청년이 떠들었다. 《선생님이 아버지에 대해 울면서 말할 때 착 뒤줄에 앉아있었는데··· 김화순강좌장선생님이지요? 내가 잘못 보진 않았지요?》

《예, 옳아요. 헌데···》

《글쎄 맞다니까요. 여 동무들! 빨리 오라. 오라는데!》

사람들이 혀를 찼다. 어수선한 불평의 목소리들이 날아왔지만 돌격대청년은 사뭇 의기양양했다.

《선생님, 지금 어데로 가십니까. 아, 외국출장··· 그러니 비전향장기수들문제때문에 또 국제회의를 하는가부지요. 옳지요? 이번에 가면 온 세상에 대고 떠드십시오. 여 동무들, 인사하라구. 비전향장기수 김진서동지의 딸··· 대학강좌장선생님이야.》

비로소 모든것이 밝혀졌다. 수다스러운 청년이 그 녀인까지 비전향장기수로 불렀던것이다.

리수진도 생각났다. 비전향장기수 김진서동지의 딸 김화순, 신문과 방송들에 계속 출연해온 그 녀인을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한순간 후려맞은듯 했다. 변절자의 아들과 비전향장기수의 딸, 여기서 이렇게 가까이 서있게 된것은 운명의 지꿎은 장난인가, 필연인가?···

이번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김화순이 일행을 소개하고있었다. 자기의 동생인 김정순, 역시 비전향장기수인 김병택동지의 아들 김룡수, 한제완동지의 조카 백성건···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들며 질문의 소나기를 퍼붓고 고무하기도 했다. 남조선당국의 비인간적죄행을 격분에 넘쳐 토로하는 사람도 있었다. 회의에서 성과가 있기를 바라는 목소리들이 잇달아졌다.

《걱정마십시오. 아버님은 꼭 돌아오십니다. 우리 장군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문요. 리인모동지도 왔는데···》

《회의에 가문 세상이 다 듣게 웨치세요. 김영삼 그놈이 비전향장기수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찢어죽인다구요.》

김화순의 일행은 그 모든 격려와 부탁의 말들에 일일이 인사하느라고 바빴다. 홈에서는 마치 비전향장기수들의 귀환을 위한 자연발생적인 군중집회라도 가진듯 했다. 처음엔 군중과 같이 끌려가고 같이 소리치던 렬차원들이 호각을 불기 시작했다.

《빨리 차에 오르십시오. 발차시간이 다 됐습니다!》

김화순일행을 안내해가는듯 한 사람이 집회의 주인공들을 서둘러 끌고갔다. 모여섰던 사람들이 소리쳤다.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있던 사람들도 목청을 돋구었다.

《잘 가십시오.》

《성과를 빕니다!》

《잘 싸우세요!》

돌격대청년은 우쭐했다. 김화순일행이 차에 오르는것을 거들어주고서야 뒤쪽의 자기 차칸으로 냅다 달려갔다. 그에게 보내여지는 호함진 웃음소리는 곧 다정한 치하와 정찬 롱담으로 번져갔다.

《괜찮은 총각이지요?》

《돌격대원아이오. 씨원씨원하지비.》

《여, 젊은 친구. 우리 차칸으루 오라구!》

《재미있겠어. 저런 사람과 있으문···》

리수진은 승강대손잡이를 잡고 김화순일행이 오른 앞쪽만을 바라보고있었다. 렬차원처녀가 문을 닫으라고 발을 구를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한렬차에 올랐으나 가는 길은 판판 다른 두사람, 변절자의 아들은 아버지의 망령에 쫓기여가고 비전향장기수의 딸은 아버지의 위훈에 받들려가고··· 그렇다. 그들은 아버지의 영광에 받들려 아버지를 목메여 부르며 가건만 지금 그는 아버지를 저주하며 인생의 막바지에 굴러내리고있는것이다.

드디여 기차가 출발했다. 두번째 기적소리가 비내리는 상공을 길게 찢었다. 비에 젖어 번들거리는 두줄기 레루가 멀리 아득히 뻗어있었다.···

 

기차는 오래 달리지 못했다. 가다가는 멎고 가다가는 또 멎고··· 폭우가 쏟아지는 앞길에 무수한 장애가 겹치군 했다. 끝내 한밤중엔 영 멎어서고말았다. 천정에 매달아놓은 전등이 한순간 죽은 물고기눈알처럼 벌거우리해지더니 아예 눈을 감고말았다.

사람들이 왁짜하니 떠들어댔다. 갑자기 무시무시하리만큼 시퍼런 섬광이 차창밖에서 펀뜩이자 일시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금시 눈알을 빼간듯 캄캄했다. 누군가 숨이 막혀 헉ㅡ 하고 흐느끼는데 돌연 《따당!ㅡ》하는 천둥소리가 터졌다. 숨죽여 그 소리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몸을 떨었다. 리수진의 맞은편 창밑에서 잠들고있던 로파가 오리처럼 몸을 털며 가느다랗게 물었다.

《어째 기차가 안가오? 밤새 이러구 있을게 아이오?》

새까만 어둠속에서 한 청년이 대꾸했다.

《아따 할머니, 내가 이미 말해주지 않았시오. 기차는 가지 못해요. 무슨 사달이 났시오.》

《어이구, 그럼 어떡허우?》 로파가 울상이 되여 말했다. 《며느리 해산날이 래일인데 이를 어쩌우. 예?》

로파의 그 말에 수진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며느리의 해산날! 녀자들의 해산이 얼마나 무서운 진통을 동반하는것인지 수진은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안해가 몇번 류산을 거듭하다가 급기야 저세상으로 가버린이래 그는 해산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치는것이였다.

비소리가 더욱 세차졌다. 저 끝쪽에서 렬차원이 뭐라고 소리쳤다. 기차가 느릿느릿 전진해오는동안 복도바닥에까지 사람들이 꽉 들어찼으므로 입구에서 소리치고는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이 떠들었다.

《이자 뭐라구 했소. 무엇이 끊어졌다구?》

《글쎄 송전선인지 철다리인지···》

《뭐라구요. 철다리가 끊어졌다구요?》

《전기가 끊어졌대요. 송전탑이 넘어졌다나봐요.》

맞은편 창밑의 로파가 일어섰다.

《그럼 난 어쩌라는거요. 에? 다 끊어지문 어떡허우?》

그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 상필이, 차잡이라두 할가?》

《이 비속에 자동찬 뭐 다닐것 같애?》

담배불들이 펑끗거렸다.

《좀 나갑시다.》

누군가 커다란 배낭을 메고 지나갔다. 시큼한 땀내와 써레기냄새가 물씬했다. 그가 나가는 앞쪽에서 한 녀인이 기겁하여 부르짖었다.

《조심하세요. 앓는 애가 있어요!》

그러나 벌써 잠들었던 아이를 커다란 배낭으로 욱박아놓은듯 했다. 목쉰 울음소리가 터졌다. 등받이에 기대서있던 사람이 라이타를 켰다.

《애가 앓는가요?》

《예, 갑자기 열이 나면서···》

애젊은 녀인이 예닐곱쯤 나보이는 처녀애를 꼭 껴안고있었다. 눈물에 젖은 해쓱한 얼굴··· 불이 꺼졌으나 수진은 그쪽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한시간, 아니 그보다 더 이전부터 그의 눈길을 끌던 녀인과 딸이였다. 수심에 찬 녀인과 눈을 감고 콜록거리던 처녀애··· 무엇이 그로하여금 그쪽으로 자주 눈빗질을 하게 한것인지··· 풀색원피스를 입고있는 그 녀인은 서른을 갓 넘겼을가 말가 했는데 해쓱한 얼굴에 비낀 슬픔과 번민의 그림자만 아니라면 무척 아릿다와보였을것이다. 꼭 어데선가 본것만 같아 아무리 기억을 더듬었으나 생각나지 않았다. 흔히 첫눈에 마음끌리는 녀자들이 어데선가 본것처럼 생각되는 법이다. 하여 그는 애써 그쪽을 보지 않으려 했었다. 그런데 애가 앓는다니··· 자리가 없어 서있는 그네들을 빤히 보면서도 한사코 버티고앉아있은 자기가 너절하게 생각되였다. 사실은 자신의 처지를 두고 고민하고있었지만.

그는 일어나 그쪽으로 다가갔다. 마침 누군가 전지불을 휘딱거리며 뒤따랐다. 수진이는 처녀애를 끄당기며 녀인에게 말했다.

《자, 저기 자리가 있소.》

억지로 끌어다 자리에 앉히자 녀인은 손에 감싸쥐고있던 수건으로 눈굽을 훔쳤다.

《고마와요. 국장동지.》

《···》

그는 놀라서 굳어졌다. 어둠만 아니라면 어리광대모양으로 입을 항 벌리고있는 그의 얼빠진 모습이 사람들을 웃기게 했으리라.

녀인이 속삭였다.

《아까부터··· 인사하고싶었지만 국장동지가 모르시는것 같애서 그만 두었습니다.》

《그럼 거긴?···》

《한봉숙이라고 합니다. 몇번 보셨을거예요. 류정총국 부총국장댁에서··· 그 집 며느리였지요. 인젠 다 지나간 일이지만.》

또다시 입을 딱 벌렸다. 류정총국 부총국장이라면 그의 스승이였고 또 수진이를 유혹하고 파멸에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비로소 모든것이 석연해졌다.

어데선가 본것같던 그 모습 그리고 유성만부총국장댁 며느리가 집을 뛰쳐나갔다는 소문을 들은것도··· 앞 못보는 딸애를 안고나갔다는 그 집 며느리가 바로 이 녀인이란말인가, 그래서 아까부터 이애가 이상하게 보였던것인가? ···

소리도 없는 번개불이 다시 어둠을 불태웠다. 순간 그는 한봉숙의 땀에 젖은 풀색원피스와 그속에서 내비친 통통한 어깨의 륜곽이며 하얀 어깨띠까지도 분간해본듯 싶었다. 머리가 온통 뒤죽박죽이였다.

처녀애가 신음했다. 한봉숙이 딸애를 껴안았다.

《설미야, 아프니?··· 조금만 참아, 응?》

딸애의 이름이 설미였다. 수진이 그애의 이마를 더듬어짚었다.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설미는 그저 앓는 정도가 아니라 혼수상태에서 가릉가릉하며 허덕이고있었다.

《애를 왜 이 지경 만들었소. 에?》

그로서도 깜짝 놀랄만큼 큰소리가 나왔다. 언제한번 큰소리를 모르던 《얌전때기국장》이 노기에 차서 부르짖었다.

《노상 비를 맞고 추운데서 자다보니···》

《참 한심하오!》

그는 설미를 안고 녀인도 잡아끌었다.

《갑시다.》

《가다니요. 어데로말예요?》

《가서 의사선생을 찾아야지. 렬차방송으로 불던가··· 어쨌든 갑시다.》

사람들을 밀치며 문쪽으로 나갔다. 잠들고있던 사람들이 증을 내였지만 마구 헤집고나가지 않을수 없었다. 승강대어구까지 나가자 온몸이 땀으로 질벅했다. 녀인도 매한가지였다.

《인젠 어떻게 하시겠어요?》 한봉숙이 숨찬 소리로 물었다. 《전기도 끊어졌는데···》

리수진은 또 한번 드센 주먹에 귀통을 얻어맞은듯 했다. 뻥해졌다. 참, 전기가, 송전선이 끊어졌다구 했지, 이런 얼간이라구야!···

《미안해요. 국장동지, 저때문에···》 한봉숙이 딸애를 안으려했다. 《설미야, 이리 와.》

《어쩔려구 그러오?》

《참고 기다려야지요. 아무때건 전기가 오면···》

《정신나간 소리!》

그는 밖으로 불안스러운 눈길을 던졌다. 먼 야공에서 번개불이 펑끗거리며 어둠을 짓태웠다. 밤바람이 세찼다. 땀에 젖은 몸이 오싹해질 지경이였다. 설미가 기침을 터쳤다. 콜록콜록 맥없이 그리고 괴롭게 신음하는 그 소리를 그저 듣고만 있을수 없었다.

《갑시다. 밑에 내려가 차칸마다 돌아가며 소리쳐봅시다.》

《···》

한봉숙은 겁먹은듯 세찬 비줄기를 내다보았다. 오래 생각할것이 없었다. 수진이는 또 녀인을 잡아끌었다. 승강대에 기대서있던 돌격대청년들이 혀를 차며 쑤군거렸다. 줄기찬 비속으로 내리는 수진이와 녀인을 마치 자살을 결심하고 나선 사람들처럼 보는것 같았다.

바람은 선뜩선뜩 했어도 온몸을 적시는 비줄기는 후더웠다. 수진은 설미를 안고 로반을 따라 나갔다. 아무 유리창이나 두드려대며 《여보시오, 여보시오!》 하고 소리쳤다. 누구든 반응을 보이면 창턱에 바싹 붙으며 목터치게 웨쳤다.

《그 안에 의사선생이 없나 알아봐주시오. 예, 의사선생! 애가 죽어갑니다.》

창밖을 내다본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으랴.

번개불이 펑끗거릴 때 비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이 창유리에 붙어 기괴한 소리를 지르고있는것이다.

《여보시오, 아 여보시오!ㅡ》

뒤쪽에서 한봉숙이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쓰라린 설음에 목이 메여 허우적거렸다.

《됐습니다. 구ㅡ 국장동지, 제발 그만두십시오.》

《그건 무슨 소리요?》

《아, 제발··· 난 못견디겠습니다. 못견디겠어요.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그런 소리 마오. 정신나간게 아니요?》

《국장동지, 난 정말···》

《난 국장이 아니요.》 수진의 목소리도 떨리고있었다. 《아니란말이요. 철직됐소. 다신 그렇게 부르지 마오!》

비청거리며 또 앞으로 나간다. 이번엔 차칸마다 뒤져볼테다. 사람들을 지르밟으며 나갈테다. 잠든 사람들을 다 두들겨 깨우며 소리칠테다!··· 그는 자기가 지리산빨찌산 연고자들을 찾아헤매던 끝에 피할길없는 오욕의 진구렁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고 몸서리치던 일을 상기했다. 그렇지만 인제는 다 끝나고말았다. 변절자 아버지때문에 수치와 저주만을 받게 된 이 몸, 더이상 창피할것도 저어할것도 없다.

바로 그때 뒤쪽에서 그들을 소리쳐 불렀다.

《이보세요. 이리 오세요. 여길요!》

렬차원처녀가 소리치고있었다. 구원의 희망이 그 애되고 챙챙한 목소리에 있었다. 그가 녀인과 같이 저벅저벅 자갈을 밟으며 가자 상호등을 든 려객전무가 손을 잡아 끌어올려주었다.

《죽어간다는게 누굽니까. 오, 이애?··· 자 여기 의사선생이 있지 않습니까. 참 손님두, 그런거야 렬차원한테 부탁해야지요.》

려객전무가 상호등을 높이 들었다. 생김새가 비슷한 두 녀인이 렬차원과 함께 서있는것이 보였다. 순간 수진은 주춤했다. 이렇게 또 만나다니··· 비전향장기수 김진서의 두 딸이 그를 기다리고있은것이다. 김화순과 그의 동생, 그 동생이 의사선생이였다.

《아니예요. 전 유치원 원장입니다.》 김정순이 말했다. 《그렇지만 맘놓으세요. 의사자격도 있으니까요.》

언니인 김화순이 수진에게 물었다.

《애아버지세요?》

수진이 어망결에 뒤쪽의 한봉숙이를 돌아보는데 김화순은 려객전무에게로 몸을 돌렸다.

《승무원실이 어떨가요. 거기서 보게 합시다.》

여러사람이 들어가기엔 승무원실이 비좁았다. 김화순이 상호등을 받아들고 동생인 정순이 설미를 진찰했다. 주의깊게 맥을 짚고 열을 재고 눈까풀도 뒤집어보고나서 그 녀자는 말했다.

《급성페염이예요. 그런데 이를 어쩌나, 출장을 떠나면서 아무것도 못가지고왔으니.》

김화순이 말했다.

《손님들한테 부탁해볼가?》

《그게 좋겠어요, 언니!》

문밖에 몰켜있던 사람들이 떠들었다.

《우리가 말해보지요.》

《페염에 쓰는 약이면 되겠지요?》

《아스피린, 페니실린, 마이싱!··· 알겠지?》

《꿀도 있어야 해. 나두 페염을 앓아봤는데말이야···》

《됐어, 가서 약이나 얻어오자구.》

김정순이 설미를 다시 진찰해보며 수진에게 말했다.

《병이 심하군요. 아버지랑 있으면서 이렇게 될 때까지 놔두다니··· 큰일날번 했어요.》

이런 판에 무슨 말을 할수 있으랴. 수진은 시뚝이 입을 다문채 눈길을 내려깔았고 그를 스쳐보던 한봉숙은 흠뻑젖은 옷때문에 봉긋하게 부풀어오른 앞가슴을 두손으로 꼭 누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새 사람들이 약을 가지고왔다. 돌격대청년이 선참으로 비집고 들어왔는데 김화순자매에게 또 한번 굽석 인사를 했다.

《수고하십니다. 선생님, 제가 약을 구해왔습니다. 자요!》 청년은 문앞에 있는 녀인도 끌어들이였다.

《뭘 그러시우, 아주머니, 어서 내놓으라요.》

《에그ㅡ》 녀인이 돌격대청년을 곱게 흘겨보았다. 《아까와 그러는줄 아나. 물엿이랑 더러 섞어놔서 그러지. 이런 꿀도 약이 될가요?··· 어쩌겠수, 장사질이란게 눈속임두 좀 있수다레.》

돌격대청년이 손끝으로 모자를 밀어올리며 입을 쩍 벌리고 웃어댔다. 꿀병을 들고온 녀인을 툭 치며 《하ㅡ 이 아주머니, 막 고와죽겠어.》 하고 떠들었다. 그통에 수진은 문밖으로 밀려났다. 사실 더 이상 그가 할 일도 없었다.

문밖의 담배불들이 그를 못견디게 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으나 물이 질벅한 담배갑이 뭉그러질뿐··· 그는 벽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어쨌든 인제는 한숨돌리게 되였다. 설미는 차츰 피여날게고··· 그러면 그네들은 제갈 길을 갈것이다. 이렇게 쉼없이 가고 또 가는것이 인생이 아닌가. 그 길에서 잠간 만나기도 하고 영영 헤여지기도 하고··· 헌데 그들은 어데로 가는것일가.

차칸에서 만났던 이 리수진같은것은 곧 잊고말것이다. 그럴수밖에··· 그래도 그네들이 어데로 가는지 알고싶었다. 그자신은 구성공작기계공장에 들려 결재를 못한 자재처리를 한다음 자강도로 가야만 하니 다시는 그네들을 보지 못할것이다.

피로했다. 아무데나 구겨박혀 잠을 자고싶었다. 그런데 상호등을 든 김화순이 그를 찾았다.

《근심마세요. 제때에 치료를 했으니 다 잘될거예요.》

그 녀자는 수진이 딸애때문에 몰래 울고있는것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였다.

낮고도 부드러운 그리고 정찬 그 목소리, 훌륭한 아버지, 불굴의 비전향장기수를 아버지로 가지고있는 이 녀인은 얼마나 행복한가!··· 눈굽이 저릿저릿해지는것을 참을수 없었다. 때마침 설미를 안은 돌격대청년과 한봉숙이 의사선생 정순이와 같이 나왔다.

《이대로는 안되겠어요.》 정순이 말했다. 《당장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위험해요. 뜨끈한 방에서 땀을 내면서 치료해야 할텐데···》

그러자 돌격대청년이 또 끼여들었다.

《아, 선생님, 여기서 조금 가면 마을이 있습니다. 진료소도 있구요. 언제 기차가 떠날지 모르는 판에 우물거릴게 있습니까.》

어느새 청년은 수진에게 설미를 안겨주었다.

《자, 빨리요. 아무 집이나 두드려보십시오. 제꺽 도와줄겁니다. 그렇구 말구요.》

수진이 미처 입을 열새도 없었다. 당황해하는 한봉숙이도 끌어가며 계속 떠들었다.

《자, 자. 빨리요. 기차야 놓치면 뭐랍니까. 애를 살려야지요. 원 이렇게 꾸물댄다구야, 그러니까 애를 이 모양 만들었지요?》

어쩌는수없이 그한테 끌려 승강대를 내렸다. 무어라고 할 말도 없었다. 자기도 한 손님에 불과하다고했더라면 이 사람들모두를 노엽혔으리라. 그를 대신해줄수 있는 사람은 저 돌격대청년말고도 얼마든지 있는것이다.

김화순자매가 소리쳤다.

《조심해서 가세요!》

돌격대청년도 지지 않았다.

《그럼 부탁합니다!》

마치 자기 딸애를 부탁하는듯 했다. 수진은 어벙벙해서 차에서 밀려내린 한봉숙이를 대신하여 소리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고맙습니다!》

여럿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김화순이 상호등으로 철뚝밑을 밝혀주었다. 여전히 퍼붓는 비발, 허둥지둥 따라선 한봉숙이 뭐라고 했으나 듣지 못했다. 상호등불빛도 더는 따라오지 못했다.

 

×

 

한봉숙이 그의 팔소매를 끄당겼다.

《됐습니다. 그만 돌아가주세요. 정말··· 고맙습니다. 잊지 않겠어요.》

수진은 계속 걸어갔다. 길 아닌 길, 잡관목들이 발에 걸채이고 앞쪽에서는 물소리가 세찼다.

비는 왜 이다지도 많이, 진저리나게 퍼붓는것인지··· 한봉숙이 또 붙들었다.

《이보세요, 난···》

수진이 걸음을 멈추었다.

《아주머니, 정말 그러길 바라오?》 몰풍스러운 어조였다. 《저 물소릴 듣지 못하오? 이 밤중에 강물에 빠져 죽을려구 그래?》

다시 걸으려니 한봉숙이 그한테 매달렸다. 그런데 이번엔 전혀 다른 의미에서였다.

《고맙습니다. 국장동지, 뭐라구 해야 할지··· 말해주세요. 진심이겠지요? 우릴 끝까지 도와주시겠지요?··· 난 막··· 겁이 났어요. 미안해서 그만 돌아가달라고 하면서두···》

수진은 아무 말없이 설미를 추슬러올리며 되는대로 걸어갔다. 심장을 스쳐가는 전류와도 같은 충격, 야릇한 불안, 어쩐지 싱숭생숭하고 애처로운 느낌이였다. 이것도 인연인가. 안해를 여읜후 처음으로 젊은 녀인과 밤길을 걷고있다. 앞에서 무엇이 기다리고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대관절 나는 누구와 같이 가는가?··· 이 녀인은 바로 그한테 불행의 첫 불찌를 던져준 유성만 부총국장의 며느리였다.

한때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유성만, 직업을 바꾸어 부총국장으로까지 되였다. 그가 수진에게, 옛 제자한테 건설용철근과 쇠바줄 등을 간절히 부탁하여 해결해주었는데 어떤 연고로 해서인지 무역항으로 옮기다가 기차충돌사고를 빚어냈다. 그것이 화근이 되여 검찰소가 붙고 안전부에서도 조사를 《심화》시키는 과정에 그가 변절자의 아들로서 《경력을 위조》한 자라고 락인되였다. 46살에 이르도록 조용히, 꾸준히 달려온 인생렬차가 궤도에서 탈선되여 심연의 밑바닥으로 굴러내린것이다. 그리고 그 심연의 밑바닥에서 역시 유성만댁을 뛰쳐나온 이 녀인을 만나게 되였으니 이것을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사품치는 골개강이 앞을 막았다. 그는 설미를 버쩍 들어올려 그애의 두다리가 자기의 목을 감게 했다.

《내 머릴 꼭 잡아야 해.》

한손으로는 설미의 다리를 그러쥐고 다른 손으로는 녀인을 잡아끌었다.

《건너갑시다. 마을이 멀지 않은것 같소.》

드디여 물속에 들어섰다. 골개강물이 대번에 그들의 정갱이를 휘감고 허리춤까지 잠그었다. 앞 못 보는 설미도 무서움을 느낀듯 했다.

《엄마!ㅡ》

비소리와 골개물소리가 기세를 올리고 발밑의 개바닥이 꺼져들어갔다.

《엄마!ㅡ》

어깨우의 설미가 버둥거렸다.

《오, 설미야. 엄마 여기···》

별안간 한봉숙이 물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설미에게 말해주느라 수진이한테 매달리던 손을 놓았던것이다. 아츠러운 비명이 순식간에 물속으로 사라지자 수진은 《이보!》라고 웨치며 팔을 내뻗쳤는데 그만 허공을 그러쥐고는 비틀거렸다. 다음순간 세찬 물살에 떠밀려 그도 역시 설미와 함께 사품치는 탕수속에 빠져들어갔다. 휘파람소리와도 같은 설미의 비명, 입과 코로 쓸어든 흙탕물, 머리속에도 물과 흙모래가 들어찬듯 했다. 다행히 설미만은 꼭 잡고있었다. 물속에 태질을 친듯 설미는 울지도 못했다.

《설미야!ㅡ》

누가 웨쳤는가, 물에 빠진 짐승이 울부짖은것인가?··· 그런데 애어머니는 어데로 사라졌는가?···

《설미야!ㅡ》

바로 지척에서 시꺼먼 형체가 너분적거리고있었다. 엉기엉기 기여오며 울고불고하는데 설미를 찾는 부르짖음도 기괴한것이였다. 수진이 역시 허우적거리며 녀인의 어깨를 힘껏 잡아일으켰다.

《아주머니, 나요. 여기 설미도 있구···》

녀인이 달려들었다. 《설미야, 내 딸아!》 하고는 미친듯 설미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설미도 다시 울기 시작했다.

병든 소녀, 공포에 질렸던 설미는 울음소리도 미약했다. 소란스러운 물소리, 비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미친듯 한 녀인의 울음소리··· 수진이 제때에 허둥거리는 녀인을 껴안지 않았더라면 갑자기 밀려온 나무그루터기에 떠박질릴번 하였다. 제대로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그래도 나간다. 인제는 셋이서 한덩어리가 되여 허우적인다. 수진은 자기의 팔뚝이 온통 물에 젖어 미끈거리는 녀인의 가슴을 휘감고있는것도 알지 못했다.

비줄기는 더더욱 세차졌다. 쏟아져라, 미친듯 퍼부어져라, 벼락을 치겠으면 치고 맘대로 하려무나!···

발밑에서 풀숲이 와삭거렸다. 이윽고 진창길을 밟고갔지만 한동안은 그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멀지 않은 곳에 농가가 한채 어둠속에 웅크리고있었다. 그 밤의 마지막번개불이 번쩍일 때에야 그는 줄당콩장대들과 싸리바자안쪽의 터밭이며 장독들을 가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