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편 12

제 3 편

12

 

《수련아, 너 목소리 왜 그렇니 응? 한숨소린 또 뭐구? 어데 앓는덴 없니? 얘, 왜 말을 못하니?》

어머니가 시외전화로 하는 말이였다. 수련은 군병원 접수구앞에서 전화를 받으며 시들하니 웃었다. 어머니는 수련이가 한숨만 지어도 속이 한줌만해지는 모양이다.

《참 어머니두, 내 목소리가 뭐 어쨌나요.》

《수련아!》

《어머니! 지금 집에서 전화하세요?》

《아니, 난 지금 체신소에 와있다. 대극장 바로 옆에 있는 그 체신소말이다. 참 여기선 이제 리인모로인을 환영하는 연도행사가 있게 돼. 우린 대극장앞도로에 자리를 정했단다.》

《그래요?!··· 나두 거기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가?》

다음 순간 수련은 입을 다물었다. 그것이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싶다는 의미로 들릴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때문이다. 화제를 바꾸어야 했다.

《어머니! 그런데 어떻게 되여 시외전화를 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무심코 이렇게 물었으나 어머니의 소심한 목소리가 수련이를 불안케 했다. 어머니는 갑자기 활기를 잃고 약간 기여들어가는듯 한 목소리로 《뭐 그저 좀 알릴게 있어서···》하고 말했던것이다.

《어머니! 무슨 일인지 빨리 말하세요!》

수련이가 재촉하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네 외할아버지가 지금 여기 와계신다. 전승기념탑건설장에 지원물자를 가지고 오셨는데···》

《외할아버지가요?》하고 수련은 반갑게 부르짖었다. 《그럼 어서 외할아버질 바꿔줘요. 예?!》

《가만 수련아! 사실 내가 전화를 건건 말이다. 얘 내 말을 듣고 너무 놀라지 말아. 알겠지?··· 윤철소대장이 글쎄···》

말끝을 흐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수련은 날카로운 송곳에 찔리기라도 한듯 흠칫 몸을 떨었다.

《윤철동무가 어쨌다구요. 예?!》

《글쎄 그 윤철소대장이··· 병원에 후송되여왔다누나. 심한 타박상을 받았다는데···》

《예? 그래서요?···》

《부대에서 온 군관 한사람이 병원에 들렸다가 윤철소대장이 불러서 쓴 쪽지를 가져왔구나.》

그때 교환수의 목소리가 끼여들었다. 벌써 한통화가 다 끝났다는것이다. 수련은 다급히 접수구의 창구로 전화기를 끌어당기며 부르짖었다.

《그럼 한통화 더 부탁하자요!》

이어 어머니를 소리쳐 불렀다.

《어머니!···그래 어떻게 됐다구요?》

《집에 온 군관동문》하고 어머니는 여전히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더듬거렸다. 《웬일인지 긴 말은··· 안하더구나. 그저··· 윤철동무가 불러주어 받아쓴 쪽지인데 이걸 받으십시오! 하고는 훌 가버리지 않겠니. 그 이상 더 말하지 말라구 한 모양인지··· 윤철이 그 사람이··· 아마···》

《왜 그랬을가요? 그 동문 왜 아무 말도 말라구 했을가요. 예?》

《글쎄··· 그건 아마 내가 써보낸 그 편지탓이겠지.》

그제서야 수련은 어머니가 썼다는 편지생각이 났다. 수련이가 이제 약혼을 한다는것, 하지만 둘이 서로 변함없는 우정을 나누기 바란다는것, 집에 들리면 반갑게 맞겠다는 식으로 례절차려 쓴 매정한 편지였다. 그것을 상기하자 무엇인가 가슴을 비틀어대는듯 하였다. 수련은 낯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래서요? 그 쪽진··· 뭐라고 썼어요?》

《그저 몇마디만 써있더구나. 내 이제 그대로 읽어줄게. 응?···》

《예. 어서요!》

어머니는 쪽지를 펴느라고 잠시 부시럭거렸다.

《이렇게 썼구나. 〈수련동무! 얼마전에 동무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받았습니다. 부디 행복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알려주려고 하는데··· 동무를 친누나처럼 따르고 그리워하던 림정산동무가 훈련도중 뜻밖의 일로 소대가 위험에 처했을 때 한몸바쳐 숱한 전우들을 구원하고 희생되였습니다. 그를 잊지 마십시오. 윤철.〉··· 이게 다야··· 수련아, 너 어째 그러니, 응?!》

수련은 눈앞이 아찔해지며 현기증이 나는것을 느꼈다. 저도모르게 접수구의 창턱을 팔굽으로 짚으며 가까스로 몸의 균형을 잡았다. 무엇때문인지 막 소리쳐 울고싶은 심정이였다. 그 전사, 수련이자신 모지름쓰며 벼랑에서 끌어올렸던 그 정산이 희생되였다. 그리고 윤철은 중태에 빠져 병원에 실려갔다. 실려가서 수련이에게 작별의 인사를 보내여왔다. 한가닥 기대와 희망도 다 버린 마지막 편지, 단 한마디 부탁만을 남긴 고별의 편지, 거기엔 아무런 호소도 은밀한 애원도 서운함도 애수도 분노도 없었다. 그저 단 한가지 부탁이 있을뿐이였다. 한 전사를 잊지 말라는 절절한 한마디 부탁이였다. 그런데 그 한마디 말속엔 얼마나 많은 의미와 기대와 당부가 들어있는것이랴! 위급한 순간 서슴없이 한몸그대로 육탄이 되여 내던질줄 아는 우리 당의 총쥔 전사들을 잊지 말라는, 그들을 무심히 보지 말라는 그리고 그들을 모욕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준절한 당부가 들어있는것이다.

뿌옇게 흐려진 눈앞에 정산의 얼굴이 떠올랐다. 윤철과 같이 그를 산에서 부축해내리던 때의 모습이였다. 피기가 가셔진 해쓱한 얼굴, 자기를 부축해가는 사람들조차 분간해보지 못하던 나어린 전사의 얼굴이였다.

그다음··· 와삭와삭 잡관목을 짓이기며 어둠에 싸인 산발을 걷고있던 윤철의 모습도 나타났다. 한마디 말도 없이 그의 뒤를 쫓아가며 헐금씨금거리는 수련이쪽은 돌아볼념도 않고있다. 그저 무작정 길아닌 길을 냅다 걷기만 하는 모습이였다.

《수련아!》하고 어머니가 또 불안해하며 물었다. 《왜 말이 없니 응?··· 얘, 내가 잘못했다. 너 나를 용서하지 응?···》

《···》

수련은 여전히 입을 꼭 악물고있었다. 두눈에서 끓고있던 눈물이 쭈ㅡ욱 흘러내렸다. 저도모르게 송수화기를 쥔 팔도 맥없이 스르르 미끄러져내리고말았다. 접수구에 앉아있던 간호원이 놀라서 쳐다보는것도 몰랐다. 다행히 오늘따라 접수구에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온 나라가 리인모로인의 귀환을 보려고 텔레비죤앞에 모여앉아있었던것이다.

내려뜨린 송화구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계속 울리고있었다. 벌써 세번째 통화가 이어져있었다. 얼마후에야 수련은 눈물어린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귀에 가져다댔다.

《수련아, 얘 수련아!》

외할아버지였다. 송수화기에서 울려나온 그 목소리는 별스레 더 석쉼하고 귀에 설게 들렸다. 엄하고 강직한 성격을 지닌 외할아버지 김윤필, 수련이를 제일 귀해하는 전쟁로병이다.

《수련아, 나다. 외할아버지다.》

《할아버지!》하고 부르짖는 수련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있었다. 《왜 인제야 오셨어요. 얼마나 보고싶었다구!》

《수련아, 내 네 에미한테서 다 들었다.》하고 외할아버지는 기침을 하며 말을 더듬었다. 《네 에미도 인젠··· 좀 정신이 드는가보더라. 내가 제때에 잘 도와주지 못했구나.》

《할아버지,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아니다. 얘 내 말부터 좀 들어봐. 내 어제 병원에 찾아가 그 사람을 만나봤구나.》

《예? 뭐라구요? 아니 할아버지가 윤철동무를요?》

《응. 병원의사들의 말이 심한 타박상을 입었지만 서너달후면 완쾌될수 있을것 같다누나.》

《그래요?!》

《응. 그처럼 훌륭한 청년을 잘못되게 할수야 없지. 병원에서 하는 말이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친히 그 동무를 꼭 원상회복시키라고 당부하셨다누나!》

《아니 장군님께서요?》

수련은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이렇게 부르짖고는 그만 입을 다물고말았다. 웬일인지 목이 잠기여 더 말이 나가지 않았다.

《수련아.》 외할아버지가 또 말을 이었다. 《내 윤철동무한테 네 얘기도 했다.》

《그래서요?》

바람새는것 같은 수련이의 속삭임에 외할아버지는 쿵쿵 기침소리를 내면서 말을 더듬었다.

《아무 말도 않더구나. 하지만··· 얘 수련아, 내보기에 그 사람은 너를 그리워하는것 같더라.》

《예?!···》

《이건 틀림없다. 그러니··· 꼭 한번 찾아가봐라. 그전에 할수만 있으면 먼저 전화라도 하렴. 네 목소리를 들으면··· 무척 반가와할게다.》

《그럴가요? 예?!》하고 수련은 입으로 스며드는 찝찌레한 눈물을 삼키며 속삭였다. 《그 동무가··· 날 용서할가요?》

《아무렴! 난 안다··· 그 동무야 총쥔 사람이 아니냐. 총쥔 병사들은 총대같이 마음도 곧고 굳센 법이란다. 그러니 어무적거리지 말구 오늘이라두 꼭 전화를 해라.》

《예. 하겠어요. 할아버지, 꼭··· 하겠어요.》

전화가 끝났다.

그러나 수련은 송수화기를 귀에 꼭 눌러댄채 그린듯 서있었다.

전류흐르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평양에서 외할아버지의 후더운 입김을 실어오는 소리였다.

그때였다. 2층계단우에서 한성숙이 그를 소리쳐 불렀다.

《수련이, 거기서 뭘해? 지금 리인모동지 판문점도착소식이 나오구있어, 빨리!》

《예, 알겠어요!》

수련은 송수화기를 놓고 2층계단으로 급히 뛰여올라갔다. 2층 휴계실에 병원직원들 거의 전부가 모여있었다. 다들 텔레비죤에 정신을 팔고있어 문소리에도 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화면에서 수많은 기자, 촬영가들이 리인모로인과 가족들간의 상봉을 찍느라고 붐비고있었다.

병색이 짙은 리인모로인의 얼굴, 언어장애로 하여 말도 제대로 번질수 없어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그 모습을 보자 가슴이 조여들었다. 극도로 쇠약해진 그는 40여년만에 다시 만난 안해의 손을 꼭 쥔채 천천히 머리를 좌우로 돌리면서 《아버지!》, 《할아버지!》하고 울음섞인 목소리로 찾는 딸과 손자손녀들의 인사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눈물어린 눈으로만 대답하고있었다.

이어 통일각에서 당과 정부의 간부들 그리고 각계층 대표들이 리인모로인을 맞이하였다. 수련은 리인모로인이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자기를 에워싼 사람들에게 겨우 이렇게 말하는것을 숨죽여 들었다.

《조국통일을 위해··· 힘껏 싸웁시다!》

수련은 그것을 귀로 들었다기보다 그의 입놀림을 통하여 겨우 분간하였고 보다 정확히는 방송원의 해설을 통하여 알게 되였을뿐이다.

《온갖 폭압을 박차고 위대한 수령님과 당의 품으로 리인모동지가 돌아온것은.》하고 마이크를 쥔 방송원도 눈물을 머금고 부르짖고있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승리이며 인민대중중심의 우리 식 사회주의가 필승불패이라는것을 과시한 하나의 력사적사변으로서 지금 7천만겨레와 온 세상 사람들을 흥분케 하고있습니다.》

통일각에 잠시 머물렀던 리인모동지를 태운 구급차는 수도 평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자동차행렬이 그뒤를 따랐다. 하늘에서는 직승기가 날았다.

수도의 거리들에는 수십만에 달하는 시민들이 환영연도에 나와있었다. 공화국기와 붉은기가 나붓기고 《위대한 수령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리인모동지를 열렬히 환영한다》, 《신념과 의지의 화신 리인모》, 《후대들에게 통일된 조국을 물려주자!》 등 크고작은 구호와 환영선전화들이 세워져있었다.

방송원의 말에 의하면 30여만명의 수도시민들이 수십리연도에 나와있다고 한다. 그들가운데 어머니와 외할아버지도 있을것이다.

리인모동지가 타고있는 구급소생차를 향해 꽃다발을 흔들며 발돋음하고있는 저 사람들··· 혹시 텔레비죤화면에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비쳐지지는 않을가···

만세를 웨치며 팔을 내젓고있는 사람들의 울고웃는 모습들이 언뜻언뜻 지나갔다. 그들을 눈여겨보면서 수련은 생각했다. 지금 어머니는 마음이 어떠할가. 당을 따라 자기의 한생을 고스란히 바쳐 온 영웅전사를 어떤 심정으로 맞고있을가··· 구급소생차의 맑은 창가에서 환영하는 수도시민들을 눈물속에 내다보는 《신념과 의지의 화신》 리인모동지를 어떤 눈길로 바라보고있을가···

얼마전까지만 해도 자기의 딸에게 시대가 달라졌다느니, 사람들의 관점이 달라졌다느니 하면서 자기를 변명하던 어머니, 저 밝고 빛나는 거울앞에 자신을 비쳐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가··· 승용차들이 구급소생차의 꼬리를 물고 끝없이 잇대여졌다. 그속에서 차를 타고 달리는 텔레비죤방송원의 격정에 넘친 목소리도 눈물에 젖어있는듯 했다.

《보십시오. 시청자 여러분! 폭풍같은 환호성이 터져오르고 꽃바다, 꽃물결이 세차게 파도치는 이 거리를 보십시오.

지금 이 시각에도 저 남녘땅에서는 미제와 남조선괴뢰도당이 〈팀 스피리트 93〉합동군사연습의 총포성을 미친듯 울리고있지만 여기 혁명의 수도 평양의 거리들에서는 리인모동지를 맞이하는 감격의 환호성이 터져오르고있습니다. 정녕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께서 크나큰 심려와 로고를 다 바치시여 끝내 조국의 품으로 데려오신 민족의 장한 아들 리인모동지를 맞이하는 이 환호성이야말로 전쟁의 총포성을 짓누르는 승리의 축포성이 아니겠습니까!···》

수련은 환영행사가 끝날 때까지 두손을 가슴에 모두어쥐고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수련의 어깨를 붙안고있는 한성숙의 불깃한 얼굴은 온통 눈물에 젖어있었다. 흑ㅡ흑 소리내여 흐느끼며 격하게 속삭이기도 했다.

《우리 장군님께서 끝내 리인모동지를 데려오셨어. 그래서 사람들이 다 눈물을 머금고있는거야. 저걸 좀 봐. 저 사람들을!···》

머리가 하얀 한 늙은이가 꽃을 흔드는 모습이 피뜩 지나갔다. 쪼글쪼글한 그 늙은이의 두볼에도 눈물자욱이 진했었다. 한성숙이 또 목메여 속삭였다.

《야, 어쩌문!··· 정말 막 소리내여 울고싶구나. 어째 그럴가···》

그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눈물에 젖은 볼편을 마구 문질렀다. 그의 눈물이, 그의 울음섞인 목소리가 또 수련을 울먹이게 했다. 텔레비죤화면에 비쳐진 수십만 수도시민들과 같이 수련은 눈물의 환영연도에 참가하고있었다.

이윽고 리인모동지를 태운 차는 조선적십자종합병원 분원을 향해 멀어져갔다.

환영행사는 끝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자리에 못박힌채 또 무엇인가 계속될것처럼 기다리고있었다. 수련은 한성숙이 팔굽을 툭 쳐서야 흠칠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아깐 누구와 전화를 했어?》

《···》

수련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환영행사를 보느라고 깜박 잊고있던 외할아버지의 당부가 피끗 생각났다. 《네 목소리를 들으면.》하고 외할아버지는 말했었다. 그래 지금 당장 전화를 걸자. 하지만 병원에서 받아줄가. 환자한테 전화하는 법이 어데 있느냐면서 거절하면 어떻게 한다?!··· 그러나 중태에 빠진 환자에게 사랑하는 처녀가 먼곳에서 전화를 건다면 누가 거절하겠는가. 사랑의 목소리를 막아버릴 매정한 사람도 과연 있겠는가?!··· 그래, 나는 그를 사랑한다. 비록 한때는 미처 다 몰랐지만 인제는 깨달았다.

나의 사랑이 누구를 위하여 내 심장의 문을 열고있는지 비로소 알게 되였다.

수련은 이미 결심했었다. 하여 그는 애끓는 눈빛으로 한성숙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 체신소에 갔다오겠어요. 그래도 되지요?》

《체신소에? 거긴 왜?》

《장거리전화를 걸려구요. 윤철동무가 지금··· 심하게 다쳐서 11호병원에 후송되였대요.》

《윤철동무가?··· 아니 어떻게?》

《그건 좀 있다 말하자요. 인츰 갔다와서!》

수련은 벌써 2층층계를 뛰여내리고있었다.

한낮이여서 따뜻한 볕에 녹은 땅바닥은 질펀하였다. 수련은 포장하지 않은 골목길로 뛰여들었다. 울바자끝에서 모이를 쫏고있던 닭들이 후닥닥 뛰쳐달아났다.

어떻게 시작할가. 사정을 해서 윤철동무와 직접 말할수 있다면 무슨 말로 어떻게 시작하는것이 좋을가··· 어머니의 편지같은건 꺼들지도 않을 생각이다. 지금 이 마당에 와서 그런것을 상기시킬 필요는 없다. 중요한것은 윤철동무에게 마음속 진정을 변치 않을 사랑을 전하면 그만이다. 변명도 필요없고 설복도 필요없다. 설사 그가 그것을 받자하지 않는대도 좋다··· 수련은 자기가 윤철을 사랑하면서부터 그들이 목숨바쳐 지키는 조국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였고 조국과 자신을 결부시켜보게 되였다는것을 알고있었다. 바로 그들이, 윤철과 림정산과 같은 인민군병사들이, 그가 만나본 고사총중대의 녀성군인들이 수련이의 가슴속에 조국애로 통한 마음의 문을, 사랑의 문을 열어주었던것이다. 지금 비로소 수련은 자기의 사랑을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바쳐야 하는가를 깨닫게 되였다.

갑자기 수련은 못박힌듯 멎어섰다. 군체신소 계단아래의 커다란 우체통앞이였다. 수련은 숨을 할싹거리며 흐트러진 앞머리칼을 손으로 쓸어올렸다. 이제 병원에서 윤철이와 어떻게 되는 사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할가··· 환자를 전화로 찾는 실례는 거의 없기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순가. 길게 생각할것도 없다.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생각한것도 바로 그것이 아니였던가?!··· 수련은 계단을 뛰여오르자마자 문을 활 열고 안쪽의 간막이유리에 《전보, 전화》라고 쓴곳으로 갔다. 숨이 차서 할딱거리는 수련을 보고 접수원처녀가 먼저 무슨 급한 일이 생겼는가고 물었다.

《그래요, 급한 일이예요!》하고 수련은 가늘게 부르짖었다. 《평양에 있는··· ○○○중앙병원을 빨리 찾아야겠어요.··· 부탁해요!》

접수원처녀는 수련이의 창백한 그리고 땀이 보글보글 내돋은 이마를 놀라서 쳐다보고나서 더이상 묻지 않았다. 즉시 송수화기를 들어 평양을 찾는 소리를 들으며 수련은 《오늘의 신문》이라고 써붙인 간막이쪽으로 갔다. 그곳에 장의자가 있었지만 그앞에 서서 신문을 보면서, 아니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 장거리전화를 신청하는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전화가 걸리려면 한동안 기다려야 했다. 수련은 이제 전화로 하게 될 말들을 생각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했으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쿵쿵거리는 앞가슴을 간막이대에 꼭 눌러붙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첫마디 말을, 자기가 꼭 해야 할 가장 긴요한 그 한마디 말을 생각해내려고 애썼다. 자칫하다간 말도 못해보고 끝나버릴수 있다. 다시는 이런 기회를 만나지 못할수도 있다.···

수련은 지금 자기가 수은을 쥐고있는듯 한 심정이였다. 앗차! 하는 순간이면 그 수은이 손가락짬으로 다 새여버릴수 있다.

이윽고 전화가 련결되였다. 수련은 간막이의 유리밑에 낸 구멍으로 송수화기를 넘겨받자 《여보세요!》하고 목이 잠긴 소리로 급히 부르짖었다. 그러자 안쪽에서 지켜보던 접수원처녀가 저쪽에서 말할 때까지 좀 더 기다리라고 했다. 참을수 없이 지루한 시간이 또 얼마쯤 흘러서야 저쪽에서 아주 나어린 처녀의 목소리가 《○○○병원입니다. 말씀하세요!》하고 노래부르듯 말했다. 수련은 덤벼치며 1외과병동을 찾아달라고 했다.

1외과병동은 인차 나왔다. 만사에 태평일상싶은 아주 느릿느릿한 녀성의 목소리가 누굴 찾는가고 물었다.

《윤철동무를요!》하고 수련은 소리쳤다. 《엊그제 후송된 소대장동무가 있죠? 정찰소대장! 그 동물 좀 바꿔주세요.》

《여보세요!》 저쪽의 목소리가 엄격해졌다. 《그 동문 중환자예요. 아예 운신도 하지 못하는 환자를 바꿔달라구요?》

수련은 속이 덜컥했다. 윤철의 상태가 중태라는것은 그도 알고있는터이다. 그가 겁내는것은 저쪽에서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놓는 날이면 모든것이 아무 보람도 없이 끝나버릴것이기때문이였다.

《여보세요, 저··· 여보세요!》

《동무, 소리치지 말아요. 좀 조용히 말하면 안되겠어요?》

《예, 예. 그렇게 하죠, 부탁합니다. 선생님! 전 그 동무에게 꼭 해줄 말이 있는데요. 어떻게 좀···》

《도대체 동문 누구예요?》

《예, 전···》한순간 수련은 세차게 입술을 깨물었다. 《상화군병원 약제사예요. 예, 이름은 리수련, 그ㅡ 그 동무의 약혼녀예요!》

《그ㅡ 래ㅡ 요?!》

저쪽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곁에 있는 누군가와 뭐라고 하더니 잠간 기다려달라고 했다. 수련은 송화구를 통해 울려오는 분명치 않은 말소리며 찌륵찌륵하는 소리로 미루어 전화기를 옮겨가는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자 또다시 속이 한줌만해지고 약간 벌려진 입술은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말을 할수 있을가? 아니 아무 말 없어도 내 말만 들어주면 된다. 중요한것은 그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도리질을 한다면? 《난 그 동물 모릅니다.》하거나 《아니 필요없습니다. 그만두십시오.》라고 한다면?··· 그럴수도 있지 않을가··· 이미 모든것을 포기해버린 그 동무가 뭣때문에 이제 와서, 중태에 빠져있는 지금에 와서 별안간 딴사람과 약혼한다는 처녀의 말을 들어야 한단말인가.··· 동정어린 말이나 듣자고 그가 전화를 받는단말인가.··· 이렇게 생각되자 숨도 쉴것 같지 못했다.

《이보세요!》

수련은 흠칠 놀랐다. 다음 순간 저쪽에서 그를 찾는다는것을 알자 《예!》하고 웨치듯 했다.

《이보세요. 미안하지만···》 저쪽에서 낮게 속삭였다. 《윤철동문 지금 매우 상태가 나빠요. 그에게 말을 시킬수 없어요. 정신적충격을 주어도 안되고···》

《예?···》

수련은 가슴이 졸아들다 못해 막 비틀리는것만 같았다. 이게 웬일인가. 그러니 윤철동무가 거절했다는것인가? 그래서 바삐 변명하는 소리인가··· 아득히 멀어져버린것 같은 저쪽의 목소리가 또 수련이를 찾았다.

《이보세요, 왜 말이 없어요. 제 말이 들려요? 예?》

《예. 듣고있어요.》

《그러니 아무것도 묻지 말아야 해요. 그저 고무적인 말만 해주세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예!》하고 수련은 숨가삐 부르짖었다. 《알겠어요. 시키는대로 하겠어요. 정말이예요!》

또다시 전화기를 끌어가는듯 했다. 두런두런하는 말소리가운데 줄을 좀 더 당기라고 하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마침내 윤철의 침대머리맡에까지 가닿은듯 했다. 저쪽에서 말했다.

《이보세요. 말씀하세요.》

수련은 대바람에 눈굽이 쑤시고 목이 칵 메였다. 말을 하려고 했으나 혀가 굳어져버려 입을 열수가 없었다.

《윤철동무!》하고 마침내 목소리를 터쳤다. 《나예요. 수련이예요!》

《···》

아무 기척도 없다. 송수화기를 통해 울려오는것은 먼 공간을 파헤쳐오는 가늘고 석쉼한 그리고 말할나위 없이 고통받는 윤철의 괴로운 숨소리뿐이였다.

《윤철동무!》하고 수련은 눈물이 끓는 눈으로 먼곳의 그를 더듬어 찾으며 부르짖었다. 《동무를 사랑해요. 일생 변함없이··· 사랑하겠어요. 윤철동무, 내 말이 들려요?··· 동무를 사랑해요. 사랑해요!···》

수련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입으로 쓸어드는 눈물을 씹어삼키며 목메여 흐느끼고야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