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4

제 2 편

4

 

두달전에 새로 부임해온 광산당비서는 40대의 젊고 팔팔한 사람이였다. 손탁이 세고 내밀성이 있다는 평판인데 로동자들은 그가 사람들과 허물없이 대하며 또 그들의 말을 귀담아들을줄 아는 좋은 당일군이라고 했다. 그러나 희문은 아직 그와 마주앉아본 일이 없다.

키가 크고 눈이 억실억실한 광산당비서는 그를 기다리고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나오며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알게 되여 반갑습니다.》

당비서가 웃으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 친절한 미소가 먼저 그의 마음을 얼마간 눅잦혀주었다. 당비서는 림희문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허두의 가정형편이며 건강에 대한 질문도 없이 직방 이렇게 물었다.

《이게 아바이가 연구한것이지요?》

희문은 또 한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가 마주앉아있는 책상우에 오늘아침 황시우총국장한테 들고갔던 그 도면말이가 놓여있는것이였다. 그것을 집구석에 구겨던져버렸댔는데 어떻게 되여 여기에 와있는지 모를 일이였다.

《미광방전플라즈마에 의한 〈T강〉이온질화법》이라고 그가 품들여 먹으로, 커다란 각글씨로 쓴것이 눈에 밟혀오자 다시금 속이 떨려났다.

당비서가 손바닥으로 구겨진데를 정히 펴면서 또 물었다.

《연구사업에서 손을 뗀지 몇해나 됐습니까?》

《저··· 한 10년나마···》

그는 가까스로 이렇게 대답했다. 자기와 마주앉은 그 젊은 당일군의 웃음띤 얼굴을 긴장해서 쳐다보면서 그가 내밀어준 담배를 기계적으로 받아들었다.

《그럼 좀 물어봅시다. 전에 하던 그 연구사업이 왜 실패했습니까?》

이번에도 그는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해 손에 쥔 담배만 계속 주무럭거리고있었다. 그것을 몇마디로 설명한다는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저 솔직히 말해주십시오.》하고 당비서는 미소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고무해주며 말했다.

《원래 고집불통으로 소문났댔는데 지금도 주장하고싶은것이 있으면 다 말하십시오. 혹시 억울한 일이라도 있으면···》

《뭐 그럴리야··· 》

《그럼 실패의 원인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실험설비조건이 불비하고 기술적착오도 있었습니다.》

《알아본데 의하면 실험을 승인없이 제멋대로 했다던데···》

《그건 사실입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정당하게 제기해서 해결받을수 있겠는데··· 그때문에 림희문이란 사람은 법도 질서도 무시한 극심한 공명주의자라는 말까지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예. 그보다 더 험한 평도 있었습니다. 무서운 출세주의자라는···》

《사실 그랬습니까? 출세나 공명을 바래서 그렇게 자의대로 실험을 했습니까?》

《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융통성이 없는 외고집쟁이 곧은목으로서 기어이 성공하고야말겠다는 그 한가지 생각에만 집착하여 조직과 집단의 방조도 무시해버린탓에 그처럼 커다란 사고를 일으켰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가 이에 대하여 떠듬거리며 말하자 당비서는 더욱 신중해졌다. 잠시 침묵이 있은후 그가 물었다.

《그때 사고심의를 책임진 사람이 황시우총국장동무라던데···》

《예. 옳습니다. 그땐 소장이였습니다.》

《료해해보니 그가 이 연구쩨마의 성공을 믿지 못하고 행정적으로 실험을 중지시킨것이 박필규의 귀띔을 받고 그랬다는 말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

놀라운 일이였다. 어느새 그런것까지 다 료해했는가?··· 허나 웬일인지 그 질문에는 적당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10여년세월이 지난 오늘에 와서 남을 꺼들고싶지 않았다.

《박필규동무는 사고가 있을수 있다는 위구심때문에 본인에게 말해준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랬지요.》

《그런데도 실험을 했습니까?》

《예.》

《좋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애써오던 연구사업을 왜 포기했습니까. 나라의 국방력강화에 크게 이바지할 강철재료연구사업인데···》

림희문은 바싹 말라드는 입술을 혀로 감빨았다.

《실은 바로 거기에 저의 가장 큰 과오가 있다는것을 오늘에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하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허덕이듯 말했다.《사실말이지 제가 무슨 과학자이며 연구사이겠습니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저야말로 자기만을 위해 연구를 했던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야 교화소에서 나온후에도 연구사업을 계속했을게 아닙니까. 그런데 전··· 술만 마시면서 헛살았습니다. 친자식까지 저를 버릴 정도로 되였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준전시상태를 선포하신후 모두가 다 전쟁을 맞받아나가는걸 보면서··· 뒤늦게나마 가슴을 쳤습니다. 내가 왜 그걸 포기했겠습니까. 그걸 계속 연구했더라면 지금쯤 새로운 강철재료가 나왔을수도 있지 않습니까!》

광산당비서는 심각한 낯빛으로 잠자코 듣기만 했다. 희문은 잠시 숨을 돌리고나서 저으기 갈앉은 목소리로 계속했다.

《온밤 생각던끝에 이제라도 다시 연구를 계속할것을 결심하고 당위원회를 찾아오려고 생각했댔는데 우연히 저 소나골 군수공장에 내려오는 황시우총국장을 보고 찾아갔었습니다.》

《아니, 오늘요?》

《예. 아침에···》

《그래 그가 뭐라고 했습니까?》

《저··· 그는 믿으려 하지 않더군요. 하긴 그럴수밖에··· 그는 전날의 그 무서운 화재사고를 잊을수 없었을겁니다.》

《음! 그렇지만··· 도면이야 봤겠지요?》

《예. 보긴 합디다만···》

《···》

당비서는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 희문의 그늘진 얼굴에서 모든것을 다 읽었던것이다.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였다. 불현듯 당비서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면서 급히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출장을 가야겠는데 차시간이 다 돼나서··· 그럼 한가지 부탁합시다. 이 도면과 론문을 제가 좀 보아도 되겠습니까?》

《아니 이걸말입니까?》

《예.》

《?!···》

그는 놀란 눈빛으로 당비서를 쳐다보았다. 다시 미소를 띠우고있는 그에게서 무엇인가 좀 더 알아보고싶었으나 차시간이 급한것을 생각해서 먼저 일어섰다. 당비서는 미안해하며 말했다.

《안됐습니다. 그새 살아온 형편이랑 구체적으로 들어볼가 했었는데··· 집에 들리니 갱에 나갔다고 하더군요. 참, 부인도 만나봤는데··· 몸이 편치않은것 같더군요. 잘 돌봐주지 못해 안됐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는 진정 고마와 머리숙여 인사했다. 당비서는 문밖에까지 따라나오며 그를 바래웠다. 희문은 몸둘바를 몰라하며 허둥지둥 복도를 거쳐 현관문으로 나섰다. 어느새 밖은 어둑스레해졌다. 교대를 마친 로동자들이 문화회관쪽으로 밀려가고있었다. 주로 청년들이다. 오늘밤 광산청년들의 궐기모임이 열린다고 했었다.

날씨는 그새 더 차졌다. 비암산너머 먼 하늘가에서 별들이 떨고있었다. 산굽이쪽에서는 광차 구으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는 키높은 백양나무들이 둘러선 담장쪽으로 걸어갔다. 문화회관으로 가는 젊은이들이 한패 또 한패 떠들썩하며 마주오고있었다. 대체로 인민군대탄원에 대한 이야기들이였다. 그들가운데서 한 처녀의 목소리가 특히 귀에 익었다.

《나두 결의했어요. 오늘 초급위원회에 정식 제기한걸요!》

《그럼 압축긴 누가 운전하구?》

《명복이가 있잖아요?》

《그도 군대에 탄원했는데···》

《명복인 안돼요. 눈이 나빠서.》

《동무도 안돼!》

《왜요?》

《동문 어제 기철반장과 결혼식을 하자구 약속하지 않았어!》

《에구마! 이 동무가 정말!》

압축기운전공 창숙이를 둘러싼 젊은이들이 왁자하니 웃고 떠들며 문화회관으로 가고있다. 그들 역시 림희문을 지나쳐 누구 한사람 그를 관심하지 않으며 멀어져갔건만 지금 그는 그것을 아프게 생각지 않았다. 그는 멀어져가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결혼식은 언제 한대?》

《3월 9일!》

《그럼 오늘이게?》

《뭐? 오늘이 벌써 9일이야?!》

젊은이들과 같이 떠들썩한 웃음소리도 멀어져갔다.

그는 서둘러 비암산으로 올랐다. 오늘따라 빨리 집에 가고싶었다. 안해는 지금 무엇을 하고있을가?··· 병색이 짙은 안해의 얼굴을 생각하니 가슴이 쩌릿해졌다. 그 안해에게 때없이 증을 내고 퉁명스럽게 굴어온 림희문이다.

자기의 불같은 성미를 구실로, 자기의 실패와 마음속 아픔을 구실로 그 섬약한 녀인을 계속 괴롭혀왔다. 왜 그랬던가?··· 오늘도 역시 그랬었다.

《오늘은 좀···》

아까 안해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무엇때문에 그렇게 말했을가. 오늘이 무슨 날이게?··· 3월 9일 화요일, 별안간 그는 무엇인가 명치끝을 아프게 찌른듯 몸을 흠칠했다.

3월 9일, 오늘은 바로 안해의 생일날이다!···

생일, 사람마다 자기의 이름이 있듯이 생일이 있고 누구나 다 그것을 기억에 새겨둔다. 이름이 사람의 인격을 상징한다면 생일은 바로 그의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생일을 기념하고저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누구나 다 제일 가까운 사람들, 남편이나 안해, 자식과 부모들이 그것을 잊지 않고 기념해주기를 바라는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랜 세월 그것을 잊고 살아왔었다. 그런것을 생각하기엔 너무도 큰 아픔이 자기를 짓누르고있다고 여겨왔었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령마루로 올랐다. 봄이 시작되였지만 아직도 눈무지들이 다 녹지 않고있는 먼 소나골에서 누기찬 랭기가 밀려오고있었다. 저 아래쪽 골안을 따라 길게 늘어선 마을에서 개짖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림희문은 숨을 톺으며 작은 불빛이 내비친 자기집을 내려다보았다. 힘없는 안해처럼 겨우 호흡하듯이 깜박거리는 작은 불빛이였다.

그는 이제껏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애달픈 심정에 가슴이 젖어드는것을 느꼈다. 광산당비서와의 담화로 하여 그의 마음속에서 자취없이 꺼져가던 인정의 불씨가 되살아나는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간데라의 불빛이 어둠을 헤치며 앞서갔다.

그는 먼저 식료품상점으로 갔다. 상점문을 닫은지 오래리라는것을 뻔히 알면서도 차마 빈손으로는 집에 들어갈수 없었던것이다. 상점에 가서 무엇을 사야 하겠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가서 보자. 사정을 말하고 뭐든지 좀 꾸려달라면 누군들 거절하겠는가!···

예견했던것처럼 상점문은 닫겨있었는데 다행히 안쪽 사무실에서 가는 불빛이 새여나왔다. 상점점장이 판매원과 같이 장부를 펴놓고있는것이 들여다보였다. 문을 두드리니 처녀판매원이 나와서 곱지 않은 눈길로 그를 흘겨보며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처녀에게는 말하기 쑥스러워 점장을 좀 만나야겠다고 했다. 판매원이 들어가고 한동안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키가 크고 몸이 마른 40대의 녀인인 점장이 나왔다. 림희문을 알아보자 점장이 먼저 말했다.

《왜 또 술때문에 오셨어요?》

《?···》

순간 림희문은 자기가 하려고 했던 모든 말마디들이 다 사라지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것을 느꼈다. 점장의 그 한마디 말이 자기의 루추해지고 구접스러워진 처지를 낱낱이 드러내보인것이다. 입술이 타들다 못해 목구멍까지 칼칼해났다.

《어서 말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는지···》

점장이 독촉했다. 밖의 날씨가 차서 어깨를 잔뜩 오그리며 몸을 떨기까지 했다.

《아ㅡ 아니.》

그는 허둥거리며 몸을 돌려 도망치듯 했다. 뒤에서 점장이 무어라고 소리쳤지만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허겁지겁 꿈속에서처럼 어둠을 헤쳐가며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인가, 결국 이렇게 볼썽사나운놈이 되고말았는가 하고 신음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얼마후 집에 들어서니 바느질감을 손에 들고 앉아있던 안해가 소리없이 일어나 간데라며 안전모를 받아들었다. 여느때처럼 말없이 그저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움직일뿐이였다.

방 아래목에 하얀 상보를 덮은 밥상이 챙겨져있었다. 그는 아무말도 않고 상앞에 퍼더버리고 앉았다. 안해가 부엌에 나가 더운 국을 떠담고 들어왔다.

상보를 벗기니 정성을 들여 알뜰하게 차린 저녁상이 나타났다. 그가 좋아하는 모두부, 콩나물, 첫물인 달래도 있다. 명태자반, 닭알부침··· 특별히 눈에 띄게 준비했다는 인상을 피하려 한것 같다. 그러나 모든것이 이채로와보였는데 특히 밥그릇옆에 놓인 술잔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불현듯 목이 메는것을 느끼며 겨우 입을 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그의 물음에 안해는 반쯤 고개를 돌리며 나직이 말했다.

《요즘 당신이 너무 곤해하길래 좀···》

안해는 이 말도 미리 준비해두었던 모양이다. 눈가의 잔주름이 오늘따라 유별나게 더 깊어보인다. 그 구슬픈 기색이 어린 얼굴에 떠오르는 한줄기 애석의 빛을 보니 가슴이 쓰렸다. 안해는 자기의 생일을 아직 한번도 기억해본 일이 없는 남편이 야속하였을것이다.

《술까지 있구···》

그는 떨리는 손으로 상밑의 병을 들었다. 눈굽이 쿡 쑤시여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병을 기울여 잔에 붓고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들었으나 역시 아무 말도 못하고 쭉 마셔버렸다. 또 한잔 넘치게 붓고나서 안해를 쳐다본다. 여전히 안해는 반쯤 고개를 돌린채 방바닥만 내려다보고있었다. 해쓱한 얼굴 한쪽이 파리해보인다. 그는 두번째잔도 단숨에 비우고말았다. 그러자 점차 속이 뜨끈해지는것이 알린다.

《오늘 당비서동지가.》하고 안해가 조용히 입을 열었는데 눈길은 여전히 땅바닥에 떨군채였다. 《집에 오셨댔는데 집살림에 대해 세세히 알아보더군요. 당신의 연구사업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참 좋은 분이더군요.》

《···》

그는 아무말없이 잠자코 기다렸다. 속에 들어간 술이 내장벽을 덥히며 점차 넓게 퍼져가는것을 느낀다.

《만나보셨수?》

《응.》

또 한잔 가득 부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것을 밥상우에 그대로 놓고 물끄러미 안해를 바라보았다. 젊어 한때는 아련하던 안해였건만 지금은 몹시도 늙었다. 그들 내외는 아직 령감, 로친 하고 부르지 않았어도 세월이 남긴 고뇌의 자취는 너무도 짙었다. 어느덧 몸이 쪼들고 어깨가 쑥 삐여지고 흰머리칼이 한벌 덮이기 시작하였다.

불쑥 안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여느때처럼 무슨 구실을 만들어 부엌에 나가있으려는것 같다. 그는 안해의 팔소매를 잡았다.

《앉소.》

안해는 엇비듬히 이마를 파고지나간 주름살을 모으며 그를 불안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여보, 오늘은 당신두 한잔 들구려.》

《예?》

안해가 오한이라도 나는듯 몸을 떠는것을 보니 가슴이 저려났다.

《미안하오.》하고 그는 목구멍에 가득 차오르는것을 삼키며 뜨직뜨직 말했다. 《나는 오늘이 당신 생일인줄도 모르구···》

《정말 나같은 못난이와 살면서 고생 많이 했지. 그런줄 알면서두 따뜻한 말 한마디 해준 일 없으니···》

순간 안해의 두눈에 눈물이 핑 어리는것을 보았다. 그 역시 목이 메여 말이 잘되지 않았다.

《여보, 어서 드오.》

파리한 안해의 얼굴에 모진 경련이 스쳐가는듯 했다. 별안간 안해는 손바닥으르 입을 막으며 헉ㅡ 하고 오열을 터쳤다. 가늘고 좁은 어깨가 바르르 떨리고 밑에 놓인 한손은 장판바닥을 허비고있었다.

그렇다. 순박한 사람들이 바라는 정이란 그렇게 많은것도 아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진정어린 말한마디면 되는것이다. 단 한번만이라도 양보하고 리해하고 도와주면 되는것을!··· 그런데 그는 한 꼬물의 정을 주는데도 얼마나 린색했던가. 따뜻한 정으로 돕기는커녕 이 세상 제일 귀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얼마나 무심하고 모질었던가!···

그는 안해의 떨리는 손에 잔을 쥐여주었다.

《자, 어서 한모금만 드오.》

술잔이 흔들렸다. 안해는 잔을 들고 눈물이 끓는 눈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맑은 눈물이 방울방울 술잔에 떨어졌다. 안해는 입귀를 비틀며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참고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은채 한모금 마셨다. 흘러간 세월에 고이고 쌓인 설음과 눈물도 함께 마셨다. 한모금 또 한모금··· 그러다가 별안간 소스라치듯 흐느끼며 잔 든 손을 내뻗쳤다. 림희문은 그것을 받아 상우에 놓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연깊은 침묵, 회오와 가책이 눈물속에 끓고있는 애틋한 침묵이였다. 그때 방바닥이 가볍게 진동했다. 상우의 술잔이 흔들거렸다. 어느 채굴장에서 발파를 하는 모양이다. 이윽고 림희문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매일밤 갱에 나갈가 하오. 다들 전투를 벌리는데 할수 있는껏 도와야지 않소.》

안해는 말없이 고개만 끄떡이였는데 주름깊은 눈가엔 아직도 진한 눈물이 피여있었다.

또한번 방바닥이 진동하였다. 이번엔 좀 더 큰 발파였다. 림희문은 흔들거리는 술잔을 들어 안해가 남긴것을 단숨에 쭉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