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3

제 2 편

3

 

음산한 날씨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흐릿한 태양이 길가의 먼지오른 눈더미들을 졸금졸금 녹여없애고 소나강기슭의 버들개지들은 봄물이 올라 부얼부얼해지기 시작했었는데 오늘은 구름이 낀 어둑시그레한 하늘아래 차고 눅눅한 바람이 어지러이 불어치고있었다.

저녁때 림희문은 생필직장에서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있었다. 썰렁한 집안에 들어가있을것을 생각하니 참을수 없이 마음이 울적해졌다. 집에 들어가선 무얼하겠는가?··· 남편의 마음속에 갈구리같은 발톱을 박고있는 무서운 고민을 누구보다 더 잘 알면서도 위로의 말 한마디 꺼내는것조차 저어하고 두려워하는 병약한 안해와 우두커니 마주앉아 무얼하겠는가?···

그의 집은 소나강을 낀 둔덕우에 일직선으로 늘어선 광산마을 주택들중 제일 끝에 있다. 남들과 다름없는 문화주택이나 겉모양부터가 벌써 낡아버린것이 알린다. 시꺼먼 그을음이 잔뜩 게발려있는 굴뚝, 습기때문에 떨어져가는 벽체, 뒤뜨락의 줄당콩대들조차 제멋대로 찌글써하니 자빠져있다. 그러나 이 모든것보다 더 그의 눈길을 아프게 끄는것은 창고지붕우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은 비둘기장이다. 아들 정산이 학교에 다닐 때 비둘기를 길렀는데 지금은 텅 빈 상자모양으로 버림받고 구멍마다에 칠했던 뼁끼색마저 다 날아버렸다.

아들 정산을 생각할 때마다 쑤시는듯 한 아픔이 가슴을 찌르는것을 어쩔수 없다.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그리도 사랑했건만 편지조차 한장 보내오지 않는다. 어린 시절 아버지때문에 겪은 그 많은 수치와 모멸감을 잊을수 없어 그리고 어머니를 병들게 하고 지금껏 술과 역증으로 괴롭힌것을 참을수 없어 마음속으로 결별해버린것이다. 하건만 림희문은 그 아들이 단 한번만이라도 자기의 남모르는 고민과 안타까운 심정을 리해해주기 바랐다. 단 한번만이라도 아들이 《아버지, 용기를 내세요. 난 아버지를 리해해요.》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들은 술취한 아버지를, 혹은 어머니한테 증을 내는 아버지를 아무말 없이 입을 꼭 다물고 이상한 눈빛으로 보군 했는데 그럴 때마다 림희문은 온몸에 찬서리를 뒤집어쓰는듯 했다. 아들은 군대에 나가는 그날까지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정산이 지금 군대복무를 어떻게 하고있는지, 준전시상태가 선포된 이때 어데서 무엇을 하고있는지··· 어머니한테까지 드물게 편지를 쓰는것으로 미루어 일이 시원치 않은것 같다. 학교에선 수재로 소문났었지만 군대생활이란 엑스와이방정식을 풀듯이 되는것은 아닌것이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림희문은 병색이 짙은 안해가 그림자처럼 힘없이 다가오는것을 보았다. 한손에 뜨물바께쯔를 들고있는것을 보아 뒤울안의 돼지우리에 가있었던 모양이다. 올해엔 기어이 100kg짜리 돼지 두마리를 인민군대원호물자로 보내겠다고 맘먹은 안해이다. 안해가 나직이 물었다.

《오늘은 어떻게 일찍 오셨수?》

《갱에 가려구. 거 방안의 안전모 좀 내다주. 간데라두.》

순간에 내린 결심이였다. 림희문은 전에 일하던 5.1갱에 들어가 이것저것 뒤거두매라도 해주며 잠시나마 쓰라린 마음을 달래고싶었다. 수더분한 로동자들속에 있으면 자기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버림받고 외로운 늙은이라는 생각을 잊을것 같았다. 그는 안해가 들고온 버들바가지안전모며 간데라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토방우에서 바람호스련결대묶음도 찾아쥐였다.

《늦어오시겠수?》

《모르겠소.》

《오늘은 좀···》

《왜 그러오?》

《저···》

《빨리 말하오.》하고 림희문은 증을 냈다.

《난 시간이 없소.》

안해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됐어요.》

입속으로 잦아드는 그 목소리에조차 화가 났다. 그는 안전모를 눌러쓰며 좁다란 울바자사이길로 나섰다. 안해는 여전히 그 자리에 못박혀있었다. 남달리 일찍 세여진 머리칼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얼마후 그는 5.1갱앞에 이르렀다. 갱입구에는 소나골군수공장에서처럼 완전무장한 적위대원이 서있었는데 그가 《아바이, 어디로 갑니까?》하고 물었다. 희문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갱에 들어가려구. 헌데 그건 왜 묻나?》

《교대시간두 아닌 때 갱엔 왜 들어갑니까?》

《아 내 여기서 일하던 사람이야. 갱에 들어가 뭘 좀 도울려구··· 준전시때가 아닌가!》

《안됩니다.》

《뭐?》

젊은이는 어깨에 메고있는 총을 추슬러올렸다.

《준전시이기때문에 안됩니다. 갱장동지 승인없인 일체 외부인원은···》

《외부인원이라니?》

《아바이, 비켜서라요. 말시키지 말구···》

희문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등골로 차디찬 오한이 흘러내렸다. 그 젊은이의 말에는 아까 황시우총국장이 암시한것과 같은 무서운 의미가 들어있었다.

그래, 지금은 준전시이다. 전시법이 적용되는 준엄한 시기, 그런데 전시법이라는게 뭔지 알기나 하는가?!···

날카로운 아픔에 숨이 넘어가는듯 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이제는 제가 일하던 갱에조차 들어가지 못하게 되였단말인가···

그때 굴아구리앞의 인차곁에서 이쪽을 보고있던 광산후방부의 송지도원이 다가왔다. 그는 사업에 능한 후방일군다운 미소를 담고 적위대원을 향해 두눈을 끔뻑이였다.

《동무! 이 할바이 어째 모르오? 아 거 온 광산이 다 아는 연구사아이오!》

그는 제잡담 림희문을 잡아끌며 말했다.

《나 아이문 못들어갈번 했지비, 갑시다. 내 마침 지원물자를 가지구 갱에 들어가려던 참이요.》

림희문은 어정쩡해 서있는 적위대원에게 대충 눈인사를 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송지도원이 인차쪽에 대고 소리쳤다.

《여, 순옥동무, 또 한사람 있소!ㅡ》

키낮은 인차에서 운전공처녀가 머리를 내밀었다. 벌써 윙ㅡ 하는 소리가 그속에서 울려나오고있었다. 그들이 차에 오르자 인차는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시꺼먼 굴아구리가 마주왔다. 다음순간 인차는 그속으로 곧추 굴러들고 어느덧 캄캄한 어둠이 주위를 꽉 채우기 시작했다. 뒤에 남은 굴아구리가 항아리만 하게, 이어 십전짜리만 하게 작아지더니 그마저 어둠속에 묻혀버리고말았다. 차바퀴소리만이 떠들썩했다. 레루이음짬을 타고넘는 딱딱한 충동에 뼈마디들이 지끈거렸다. 굴천정우의 전기줄에서 시퍼런 섬광이 펀뜩거릴 때마다 림희문은 처음 굴에 들어서는 사람처럼 어깨를 흠칫거리군 했다.

송지도원이 무슨 말인가 꺼냈지만 그는 못들은척 했다. 송아무개라고 하는 이 사람은 좀 수다스럽고 허풍기도 없지 않은데 광산마을사람들이 다 그를 좋아했지만 림희문만은 그를 질색하였다. 그럴만 한 사연이 있는데 그것은 몇해전 어느 마가을날 밤에 있은 일이였다.

그날 림희문은 우연히 렬차에서 박필규를 만난뒤여서 울적한 기분으로 돌아오고있었다. 기차에서 내려 광산마을까지 걸어오는도중 이 송지도원을 만나 같이 걷게 되였다.

비가 온 뒤끝이였다. 길이 험했다.

림희문은 내키지 않았으나 풋낯이나 아는 후방부지도원이 별스레 각근히 굴며 자꾸 캐묻는 바람에 자기의 연구론문에 대하여 한두마디 설명해주던것이 차츰 열을 올리게 되였다. 송지도원은 여러 부문에 상식이 있는 사람으로서 림희문의 설명을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그는 림희문의 팔굽을 잡고 진창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주며 열심히 묻고 감탄하는데 이따금 꺼지게 탄식하기도 했다.

《아, 할바이, 어째 그런걸 가만 놔두오? 한바탕 해봐야지비, 에 에ㅡ 그런것들은 주두리를 틀어놔야 하오!》

광산에 내려온 이래 아직 이처럼 정열적인 청강생을 가져보지 못한 림희문은 진창에 빠지는것도 개의치 않고 열심히 목이 쉬도록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있었다. 얄궂은 그 떠벌이가 무슨 수작질을 어떻게 했는지 온 광산마을사람들이 그 무슨 《련금술》이란 말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중세기의 련금술사들이 동이나 연에 무슨 물리화학적충격을 가하여 금과 은을 만들려 했던것처럼 림희문이 플라즈마불길로 특수강을 만들려 했다는것이다.

말은 옳은데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린 그 《련금술》에 문제가 있는것이다. 어떤 희떠운 녀석은 림희문을 만나 《아바이, 련금술을 연구했다는게 정말이예요?》하고 묻기까지 했다. 원 빌어먹을, 우라질녀석같으니라구!···

그 송지도원이 지금도 말을 걸고싶어 속이 쑤시는 모양이였다. 인차가 흔들릴 때마다 이쪽저쪽으로 기울어지는 림희문을 붙들어주면서 히죽거리고있다. 인차의 간데라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둥글넙적한 그의 얼굴이 얼른거렸다.

《할바이, 접때 기록영화에서 본 그 특수포말이오. 그게 5백리밖까지 때릴수 있다는게 정말이요?》

림희문은 손을 내저었다. 소란스러운 인차안이여서 무슨 소린지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의미였다.

《잘 알면서두 뭘 그러오.》하고 송지도원이 또 검질기게 늘어붙었다. 《거 속사포같은거두 있었지비. 포탄이 막 련발루 나가는거 말이오. 아 할바이야 어째 모르겠소!》

광산마을에선 유독 그만이 함경도사투리로 말하는데 오늘따라 림희문은 그 지방사투리에조차 막 넌덜머리가 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이사람, 계속 할바이 할바이 할텐가?》

《아아 이 할바이?!》

림희문은 아예 돌아앉고말았다. 인차의 간데라불빛에 드러나는 우둘투둘한 굴벽만 바라보고있으려니 쓰라린 애수가 다시 되살아났다. 차디찬 물줄기가 흐르는 굴벽이 끊임없이 마주 달려왔다. 물이 즐펀한 암벽, 그밑에 얼기설기 늘여진 케블선과 압축공기배관들, 오랜 동발목에 허옇게 돋아있는 버섯들, 이 모든것들이 다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이 광산마구리에 처음 들어서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인제는 《할바이》취급을 당하며 갱에서 나왔고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존재가 되고말았으니··· 인생은 멀리도 왔건만 그가 남긴 발자취는 저 멀리 아득한 그 시절에 끝나버렸던것이다.

차츰 인차가 속도를 죽이자 환한 전등불이 그의 두눈을 때렸다.

드디여 갱구내에 들어선것이다. 련결장치가 덜커덩거리더니 곧 인차는 멎었다. 그는 인차에서 내리자바람으로 수다스러운 송지도원이 말을 걸기전에 서둘러 광차레루가 깔린 어둑컴컴한 갱도로 걸어갔다. 다행히 송떠벌이는 지원물자를 부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림희문은 간데라를 내려놓고 성냥을 켰다. 그러자 펑!ㅡ 하면서 붓초리같이 하얀 불길이 곧추 뻗어나왔다. 그는 천천히 담배까지 말아물고나서 걸음을 옮겼다. 갱도바닥은 질척질척하였다. 간데라불빛이 벽밑으로 흐르는 도랑물을 얼추 비쳤다. 그는 구수한 담배연기와 함께 싸늘한 갱도속의 찬공기와 아릿한 곰팡내를 맘껏 들이마시며 뚤렁뚤렁 석수가 떨어지는 갱도속으로 계속 걸어들어갔다.

얼마쯤 걸어들어가니 차츰 귀에 익은 압축기의 동음이 분명해졌다.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지면서 굴바닥까지 가볍게 흔들었다. 굽이진 갱도벽을 에돌자 압축기장이 나졌다. 림희문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요란한 압축기동음에 귀가 멍멍해지고 온몸이 그 진동파에 따라 부르르 떨려났다. 기계기름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때 기대옆에서 기름걸레를 쥐고 허리를 펴던 압축기운전공 창숙이가 반가운 소리를 질렀다.

《아이, 아바이 오셨군요. 어떻게 여길다?》

《뭘 좀 도울 일이 없나 해서···》

《그래요?》

어느새 달려온 창숙이 그의 손에서 바람호스련결대들을 받아들었다.

《이렇게 오실줄은··· 정말 고마와요.》

창숙은 그를 갱도안쪽에 널로 막아놓은 작은 휴계실로 이끌었다. 문을 꼭 닫으니 귀가 멍멍하던 소음이 한결 죽어들었다. 창숙은 통나무로 만든 의자를 그에게 권하며 마침 말동무가 생긴것을 기뻐하는듯 잰 말씨로 시작하였다.

《정말 때맞추 가져왔어요. 이자두 북마구리 120에서 바람이 약하다구 막 고아대질 않겠어요.》

《120에서? 오ㅡ 기철반장말이지.》

《예, 얼마나 우둘렁대는지··· 뭐 어쨌는지 알아요?··· 〈동무,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아오? 준전시란말이요!··· 그런데 동무때문에 생산이 떨어져보오. 동무가 책임져야 하오!〉 뭐 이러면서 글쎄··· 아유, 꺽쇠같은게, 그런다구 뭐 누가 꿈쩍이나 할줄 알구.》

림희문은 속이 뭉클해났다.

자기를 반갑게 맞아주었을 뿐아니라 그처럼 친근하고 정답게 구는 창숙이 더없이 고마왔다.

《창숙이, 내 이제 거기 가볼가?》

《어데 말예요?》

《거기 기철반장네쪽 말이지. 북마구리 120까지 가면서 바람새는데가 있나 살펴보자는거야.》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창숙은 길게 생각해보지도 않고 잘라 말했다. 《그저 한번 호통을 빼본걸거예요. 정말 바람이 새면 아직 가만히 있겠어요? 아마 막 잡아먹으려 들거예요. 어떤 꼭재라구!··· 그러니 아바인 여기 앉아 좀 쉬세요. 내 제꺽 일지를 정리할게요. 그담 주유작업하는거나 좀 도와주세요.》

《음, 그러지.》

《참 잘됐어요. 아바이가 있어서··· 헌데 아바이, 왜 그러세요?》

림희문은 고개를 돌리며 한손을 내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눈알이 좀 때끔거려서···》

그는 담배를 말아 불을 붙여물고서 창숙이 모르게 한쪽 팔소매로 눈굽을 닦았다. 고마운 창숙이, 정에 주려사는 림희문에게 있어서 창숙은 가장 가까운 친지나 다름없었다.

그는 담배연기를 깊숙이 들여마시며 또 한 처녀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아직은 이름으로만 알고있는 처녀, 아들 정산이네 소대장 윤철의 동생 윤화옥이다. 올해 스물한번째 봄을 맞는다는 처녀, 그는 화옥이가 남달리 예쁘장하고 사랑스러우리라는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 애가 써보낸 편지의 글줄마다에 그 고운 마음씨와 밝고 명랑한 기질이 그대로 드러나있었다.

《림희문아버님에게.》

정성들여 곱게 박아쓴 화옥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였다.

《아버님!

윤철소대장을 아시지요? 저는 바로 그 소대장의 동생 윤화옥입니다. 오빠에게서 림정산동무의 부모님들이 곁에 가까운 살붙이 하나 없이 외로이 지낸다는 말을 들었어요. 더우기 어머님은 자주 앓고계신다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편지로나마 정산동무의 부모님들께 문안을 드립니다.

아버님, 이제부터 자주 편지를 쓰겠어요.

미리 알려드리는데 전 더펄이예요. 아무때나 웃고 떠들고 쉴새없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종일 입을 다물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집에선 나를 귀뚜라미라고 한답니다. 지금 나는 우리 군직물공장에서 직포공으로 일하고있어요. 사로청초급단체위원장이구요. 나이는 스물하나.

마침 우리 공장에서 인민군대원호물자를 싣고 그쪽으로 가게 되는데 갔다오던길에 한번 찾아뵙겠어요. 잠간이나마 만나서 낯도 익히고 정도 붙이고··· 아버님과 어머님도 반가와하리라고 믿어요. 그렇지요?

그럼 오늘은 이만 쓰겠어요. 부디 건강하세요.

윤화옥 씀》

이 길지 않은 편지를 그는 몇번이나 읽었으랴. 보풀이 나도록 읽고 또 읽으며 몇번이나 속으로 눈물을 머금었으랴.

성미가 괴벽스러워 늘 인정에 주려있던 그였고 그때문에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증만 내며 괴로움을 주던 그였다. 하여 그의 친아들 정산이마저 아직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데 난데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처녀가 《아버님에게》라는 다정한 부름으로 그를 찾았던것이다.

지금도 그는 담배연기를 걸탐스레 삼키고 그 편지의 글줄들을 맨처음부터 다시 더듬으며 생각해본다.

언제쯤 올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가, 편지에 씌여있는것처럼 웃고 떠들며 노래하며 나타날가?··· 저 창숙이와 키도 비슷할테지, 우리 화옥이, 우리 귀뚜라미는?···

그때 전화종소리가 요란스레 울렸다. 림희문이 머리를 돝려보자 어느새 의자 한끝에 앉아있던 창숙이가 손을 내밀며 입을 비쭉거렸다.

《꺽쇠반장일거예요, 보나마나!》

처녀는 송수화기를 들자 련발사격처럼 내쏘았다.

《왜 자꾸만 성화예요? 예, 이번엔 또 무슨 트집이예요?》

그쪽에서 뭐라고 했다. 순간 창숙은 얼굴이 구운 가재빛으로 물들었는데 어찌나 당황했던지 거의나 울상이 되여버렸다.

《어마나! 난 또 120굴진소대장인줄 알구··· 미안합니다. 아, 아닙니다. 예, 압축기공··· 예?··· 지금 여기 와있습니다. 예, 바꾸랍니까?》

창숙은 림희문에게 송수화기를 내밀었다.

《당비서동지예요. 아바일 찾아요.》

《뭐?》

그의 두눈이 굳어졌다. 당위원회에서 찾을 리유란 없는데··· 무엇때문일가, 혹시 창숙이 잘못 들은건 아닐가?···

림회문이 송수화기를 들자 그의 숨소리를 듣고 저쪽에서 먼저 말했다.

《제 당비서입니다. 희문아바이지요?》

《예, 제가···》

《아바이, 중요한 일이 있어 그러는데 이제 인차가 나올 때 나오십시오.》

《제 말입니까?》

《예, 만나서 얘기합시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전화가 끝났지만 꼼짝도 하지 않고있었다. 누구도 그를 찾는 사람은 없었는데··· 뿌옇게 돌가루가 얼룩져 있는 그의 얼굴은 어수선해지고 두눈은 공허해졌다. 창숙이가 놀라서 무엇인가 물었지만 그는 그것도 알지 못하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