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2

제 2 편

2

 

준전시상태가 선포된 그날 광산마을앞도로에서는 온밤 땅크들이 와릉거렸다. 그 숱한 땅크와 포들이 어데서 쓸어나와 어데로 달려가는지 알수 없었으나 땅을 흔들고 창유리를 드릉드릉 울리며 끝없이 가고 또 갔다. 와릉와릉하는 발동기소리와 사납게 찌걱거리는 쇠소리가운데 이따금 탕탕 기관포를 쏘아대는것처럼 배기가스를 내뿜는 소리가 섞이군 했다. 온밤 대기는 떨며 신음하였고 무시무시한 땅의 진동에 아낙네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남정네들은 교대작업을 하러 갱으로 갔거나 적위대복차림을 하고 어데론가 달려갔다. 늙은이들과 어린이들만이 집에 남아 끝없이 꼬리를 물고 지나가는 땅크와 포들의 발동소리에 귀를 기울이였다.

문밖에 나가 구경하며 셈을 세다가 지쳐버린 아이들은 잠자리에서 꿈을 꾸었다. 땅크를 몰아 적진으로 돌격해들어가는 꿈이였다. 늙은이들은 지나간 전쟁의 나날들을 회상하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말아물고 죽은 사람들과 지금껏 잊고있던 갖가지 전쟁터의 인상들을 더듬어보군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체험과 육감으로 전쟁의 발걸음소리를 분명히 들었고 피어린 싸움터에 풍기던 가슴을 허비는 포연과 비릿한 류혈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하여 그 밤 많은 늙은이들이 옛시절의 물날은 군복을 장농속에서 꺼내입고 집을 나섰다. 그 밤 광산당위원회는 인민군대복대를 탄원해온 전쟁로병들로 가득찼다. 담배연기도 꽉 찼다. 저저마끔 경쟁적으로 피워대는 담배연기때문에 눈이 쓰리고 숨이 탁탁 막히여 문풍지를 붙인 창문을 뜯지 않으면 안되였다. 문을 열자 막혔던 가슴을 활 열어젖힌듯 차고 눅눅한 바람이 확 쓸어들었고 뒤미처 땅크발동기의 우뢰소리가 또 덮치듯 밀려들었다.

그밤 전쟁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림희문도 밤새 궁싯거리며 밖에서 울리는 요란스러운 소음에 가슴을 조이고있었다.

그의 심정은 복잡하였다. 그 역시 전쟁을 생각하였으나 남들과 같이 총을 메고 달려간 전선길이 아니라 피비린내가 풍기던 위생렬차의 유개화차따위였다. 북방의 어느 간이철도역에서 운전조역으로 일하던 림희문이 처음 알게 된 전쟁의 모습은 바로 부상병들을 싣고 가다가 그 역에 멎은 위생렬차였던것이다.

그는 어릴 때 다친 다리가 나이들어 위축되면서 차츰 가볍게 절기 시작했는데 그때문에 군대에 나가지 못했다. 그것은 또 일생 그를 괴롭힌 마음의 상처로 되였고 성미를 괴벽하게 만든 근원으로 되였다.

끝내 잠자리에서 일어나앉은 그는 요새 사람들속에서 부쩍 인기가 오른 독초를 말아 가슴이 알알해나도록 빨고 또 빨았다. 준엄한 전쟁이 또 눈앞에 다가왔지만 이번의 전쟁은 더더욱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지금 림희문은 나이가 들어 갱에서 나온지 오래며 겨우 생필직장에서 간데라나 만들고있는 처지였다.

준전시상태가 선포되자 그는 광산마을의 청장년들이 적위대비상소집령을 받고 올리뛰고 내리뛰는것을 보았다. 전쟁로병들도 바삐 서두르며 서로 찾고 부르고 했다. 하지만 림희문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전쟁은 그를 뒤에 내버려두고 어덴가 멀리 앞으로, 조국과 인민의 운명이 판가름될 그 싸움터로 모든 사람들을 소리쳐부르고있었다. 그것은 아마··· 조국이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온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인가. 이렇듯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로 되고말았단말인가?!··· 한때는 전도유망한 연구사로서 사람들의 선망의 눈길도 받았던 그였으나 지금은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존재로 되고있었다. 어떻게 이 모양 이 지경으로 되였단말인가?··· 비로소 그는 자기의 과학적의지가 꺾인 때로부터 이 모든것이 시작되였다는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교화소에서 나온후 과학연구사업에 대한 온갖 욕망과 희망을 다 줴버리자 그의 삶 그자체도 빛을 잃기 시작했던것이다. 생활은 차츰 그를 남기고 의연히 앞으로 앞으로 줄달음쳐갔고 그는 자꾸만 뒤에 떨어지고있었다. 한때 같이 일하던 동료들을 만나도 그들은 전날의 림희문 대신 어데선가 빌려온것 같은 허름한 양복을 몸에 걸친 늙수그레한 사람, 안면은 있으되 어데서 어떻게 만났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의 색날은 사진을 들여다보듯 의아쩍어하는 눈빛이였다.

사랑하는 아들 정산이조차 아버지를 멀리하고 경원시했다. 아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연구사업에서 실패하고 우울증에 걸린 술주정뱅이, 병약한 어머니를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더부살이 군식구에 불과하였다. 가끔 아들의 눈길에서 자기를 꺼리낌없이 비난하거나 질시하는 빛이 드러날 때마다 그는 가슴이 흠칠 떨리는것을 느끼군 했다. 그렇다고 그 아들을 탓할수도 없었다. 그 아들이야말로 아버지가 교화소에 가있는동안 어린 가슴에 때이른 아픔과 수치와 눈물을 다 겪었던것이다.

하지만 림희문은 그 아들을 얼마나 사랑했으랴! 그가 대바르고 정직하고 또 남달리 지혜롭고 굳세게 자라기를 얼마나 바랐으랴!··· 그런데 아들 정산은 아버지라는 말조차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들 정산이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허락도 없이 들어선 한 불청객에 불과했다. 림희문은 이렇듯 사랑하는 아들에게서까지 버림을 받았다.··· 괴로운 생각들은 끊임없이 또 밀려왔다. 아무 두서도 없이 기다렸던듯 련이어 떠오르고는 사라져가고 사라졌다가는 금시 또 새로 가슴을 허비며 떠오르는것이였다.

땅크와 포차들도 온밤 끝없이 굴러갔다. 지심깊이에서 발파를 할 때처럼 바닥이 진동하였다.

안해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왜 눕지 않느냐고 하였지만 아무 대꾸도 없이 담배만 뻑뻑 빨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되였다는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이랴. 쓸모없이 되고 버림받은 늙은이, 인생의 이 내리막길은 언제 시작된것이였던가?··· 그를 재판소와 교화소에까지 이끌어간것은 새로운 강철재료를 얻기 위한 연구사업이였다. 그는 나라의 국방공업발전에 절실히 요구되는 열에 잘 견디고 잘 마모되지 않으며 삭음견딜성이 높은 정밀가공용 강철재료를 얻기 위하여 다년간 노력해왔다. 그것은 《미광방전플라즈마에 의한 〈T강〉이온질화법》이라는 연구론문으로 정식화되였다.

그런데 연구소에는 그와 비슷한 강철재료연구에 종사하는 박필규라는 연구사가 있었다. 림희문과 실력을 다투는 재능있는 연구사라고 널리 알려져있었는데 사업과 생활에서 눈에 띄우고 웃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데서 특히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있었다. 늘 웃는 얼굴을 하고있었으나 정의감에 불타오를 때에는 가까운 동료들의 과오와 실책을 수술칼처럼 철저히 해부하기도 했다.

림희문은 그와는 판 달랐다. 체소한 몸 그 어디서 그러한 숯불이 타고있는지 밤을 새워가며 공부하고 연구에 몰두하는가 하면 고집을 부리고 성을 내고 대판 싸우기도 했다.

연구소에서는 그들 둘이 승벽내기를 한다는 말이 돌고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연구쩨마가 류사한것때문에 특히 론의의 대상으로 되였다. 림희문의 연구가 앞섰으므로 먼저 여러차례의 실험이 진행되였는데 몇차례나 실패를 거듭하자 그의 리론적가능성마저 부정되였다. 당시 연구소사업을 지도하던 황시우는 박필규의 귀띔을 받고 그것을 공상적인것으로, 선진공업국가들에서도 리론적으로만 알고있는 미지의 쩨마로 단정하고 결연히 실험을 중지시켰다. 림희문에게는 보다 현실적인 직접생산공정과 물려있는 특수강열처리연구에 달라붙으라고 권고했다.

사위스러운 그의 인생길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였다. 그는 참지 못하고 눈에 띄게 다리를 절면서 여러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대판 싸움을 벌리던 끝에 누구의 승인도 받지 않고 몰래 실험을 계속하다가 대화재를 일으켰다. 결국 승벽을 부리던 박필규는 아무런 연구실적도 없이 그후 실장으로, 연구소 부소장으로 계속 승진의 일로를 걸었지만 림희문은 오랜 교화생활끝에 버림받는 존재로 되고말았다.

인제는 자기의 불우한 처지에 습관되여버린지도 오래다. 하지만 온 나라에 준전시상태가 선포되고 온밤 전쟁의 굉음이 땅바닥을 진동하고있는 이때에 와서 그는 몸부림치지 않을수 없었다. 거꾸로 굴러가는 자기의 인생길을 이제라도 멈추고 되돌려세우고싶었다.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는것이 이 전쟁에 한몸 바치는것으로 되는가?··· 총을 메고 전선에 나갈 나이도 지났다. 오직 하나 과학연구사업으로 나라에 보탬을 주는 길밖엔 없다. 그것을 왜 여태껏 줴버렸던가. 오늘까지 연구를 계속해왔더라면 지금쯤 새로운 무기생산에 절실한 강철재료를 완성했을수도 있지 않는가?!··· 그는 정신없이 머리를 쥐여뜯었다. 자기 인생의 제일 크고 무서운 과오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는듯 했다. 그걸 줴버리다니, 재판과 교화생활로 해서 한생의 꿈과 목적도 다 포기하다니, 결국 사람들로부터, 친자식에게서까지 버림을 받게 되지 않았는가···

땅크발동기들의 거센 동음은 샐녘에야 멎었다. 아침에 일어나 큰길쪽으로 나간 림희문은 얼어붙은 땅에 찍힌 그처럼 많은 무한궤도자국을 허리굽혀 일일이 살펴보았다. 길우의 크고작은 돌들에도 긁히고 할퀴우고 무겁게 짓눌린 자국들이 찍혀있었다. 과연 이것이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를 남기고 간 전쟁의 발걸음이란말인가! 불현듯 당위원회를 찾아갈 생각이 났다. 거기에 가서 지난날의 자기 과오와 새로운 결심에 대하여 터놓고싶었다.

바로 그때였다. 방송차가 가고있는 그쪽에서 하얀 승용차가 마주오고있었다. 이곳 광산마을에서는 드물게 보는 사치한 승용차였다. 집쪽으로 걸음을 옮겨가던 림희문은 그 차가 옆을 지나칠 때 우연히 차안에 탄 사람을 보게 되였다.

한순간 그는 그자리에 딱 굳어져버리고말았다. 누런 털모자에 검은색 락타직외투를 입고 무심히 밖을 내다보고있는 그 사람은 바로 황시우총국장이였다. 그러나 그는 림희문을 알아보지 못한것 같았다. 그럴수밖에 없다. 이제는 10여년세월이 흘렀고 초췌한 늙은이로 변모된 림희문을 그가 어떻게 알아본단말인가.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희망이 미소를 던져준것이 아닌가. 준전시상태선포로 새롭게 출발하려는 그에게 때마침 구원의 손길이 마주온것이 아닌가!··· 림희문은 하얀 승용차가 먼지발을 일으키며 멀리 달려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있었다. 지금 황시우총국장이 소나골 군수공장으로 가고있으리라는것을 그는 의심치 않았다. 먼저 거기로 가자, 그는 알아줄것이다, 그리고 연구사업을 자신이 직접 밀어줄수도 있다.

맵짠 아침이였다. 아니 솜옷도 입지 않고 길가에 나와있기때문에 그렇게 느껴진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추위와 흥분으로 하여 턱을 떨고 이발을 떡떡 맞쪼으며 집으로 뛰여들어갔다. 궤짝을 뒤졌다.

그속에서 낡은 도면말이며 연구론문들을 꺼내여 가방에 넣었다. 안해가 놀라서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안하고 급히 차비를 했다.

하여 그는 갔다. ···소나골은 골입구가 병아구리처럼 좁은 반면에 안으로 들어가면 드넓은 골안이 나지는데 그 한가운데로 강물이 흐르고있다.

실상은 시내물보다 더 큰 정도이나 옛날사람들이 소나강이라는 정다운 이름을 붙여주었다. 옛날옛적 소나라는 마음씨 착하고 인물고운 처녀가 소경이 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주려고 이곳 깊고깊은 골막바지에까지 찾아왔었다. 소나는 신령스러운 약수를 찾아 열아홉군데나 샘을 팠는데 그 샘물들이 모여흐르는것이 바로 오늘의 소나강이라 한다.

군수공장정문에는 무장한 보위대원이 버티고서서 엄격하게 출입을 통제하고있었다. 림희문은 접수실에서 자기가 짐작한바 그대로 황시우총국장이 준전시하의 군수공장 생산투쟁을 지휘하기 위하여 내려왔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를 만나러 왔다는 말에 접수실의 보위대원처녀는 의심쩍어하는 눈빛으로 그를 훑어보면서 총국장동지와 어떤 사이인가, 친척벌이라도 되는가 하고 따져물었다. 림희문은 긴 설명을 피하고 그저 자기 이름을 대면 그가 만나줄것이라고만 했다.

전화를 걸자 안에서 받는 남자의 목소리가 총국장동지는 현장에 나가있다고 했다. 림희문은 썰렁한 대기실의 장의자 한끝에 옴츠리고 앉아 무려 2시간동안이나 인내성있게 기다렸다. 그의 정상이 측은해보여서인지 보위대원처녀가 사방 전화를 걸기 시작하였다. 공무동력직장과 가공직장, 주물, 조립, 완성··· 이렇게 추격전을 벌린끝에 드디여 총국장과 전화가 련결되였다. 황시우는 림희문이 찾아왔다는 말에 어지간히 놀란것 같았다. 몇번이나 곱씹어 되묻고서야 이제 한시간후 지배인실에 가겠으니 시간맞춰 거기에 들여보내라고 했다.

한시간후 림희문은 눈에 띄게 다리를 절름거리며 지배인실로 들어갔다. 너렁청한 방이였다. 량수책상과 쏘파, 집단군사령관의 작전대로도 쓸만 한 긴 탁자가 가운데 있고 여라문개의 의자들이 그 량쪽에 주런이 놓여있었다.

황시우는 지배인이라고 짐작되는 사람과 마주앉아 무슨 문건철을 뒤적거리고있었다. 림희문이 들어서자 황시우는 누군가 마구 쥐여 뜯어놓은것 같은 성긴 눈섭을 잔뜩 치켜올리고 한참동안이나 그를 뜯어보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웅근소리로 물었다.

《아니 이게 희문동무가 옳긴 옳소?》

장대한 체격을 가진 황시우는 그새 틀진 간부답게 목소리도 더 굵어진듯 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마주왔을 때 비로소 림희문은 그에 비해 너무도 늙고 추레해진 자기를 의식하였다.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졌다.

《정말 몰라보게 됐구만.》 황시우의 말이였다. 《그새 앓지는 않았소? 집에선 다 잘있구?··· 참 애들이 몇이더라?!··· 에 에, 세월이란 참, 희문동무가 벌써 이렇게 되다니. 그래 무슨 일로 날 찾아왔소. 손에 듣건 또 뭐구?··· 아 물론 연구사인 희문동무가 비닐벽지나 안구 다니진 않겠지.》

그때까지 림희문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지배인이 전화로 총국장의 식사준비를 알아보는것 같았다.

《저··· 이건.》하고 림희문은 눈보라를 삼키는듯 숨을 헐썩거리며 가까스로 말했다. 《이전에 연구하던 그 〈T강〉실험도면인데··· 》

《이전에 연구하던거?》

황시우가 놀라와했다. 그럴수록 림희문은 마음이 조급해지고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예. 저··· 미광방전플라즈마에 의한 〈T강〉이온질화···》

그는 말끝을 채 맺지 못하였다. 황시우의 성긴 눈섭이 우로 쳐들리고 두툼한 입술이 버긋이 벌려지는것을 보았던것이다.

《여보, 희문동무.》하고 황시우가 말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그 연구쩨마야 이미 오래전에 과학적담보가 없는것으로 결론되지 않았소. 또 후엔 동무자신이 다 포기했다구 하는 말을 들은것 같은데···》

《예, 그랬습니다. 그런데··· 》

《그런데 또 들고오는건 뭐요, 에?··· 참 동무두. 그 고집은 여전하구만. 그새 좀 달라졌는가 했더니 원!··· 그래 동문 끝내 그 플라즈마불길에 자기자신을 다 태워버리고야말 심산이요? 그걸 또 나한테 들고오다니!···》

《총국장동지, 그래도 총국장동지야 이 연구쩨마에 파악이 있지 않습니까!》

《여보, 나보다도 특수강을 전문하는 그 사람들을 먼저 찾아갔어야지. 참, 지금 연구소 부소장을 하는 박필규도 있지 않소. 한땐 희문동무랑 서로 실력을 다투었댔지. 안그렇소?··· 그 동무가 지도하는 연구소조가 이번에 또 성과를 올렸소. 그를 찾아가보오.》

《···》

희문은 대답을 못했다. 그러지 않아도 언젠가 박필규를 우연히 만난 일이 있었다. 비좁은 렬차칸에서였다. 그때 박필규는 자기의 연구사업(실은 그가 데리고있는 연구사들의 연구사업이였지만)에 대하여 한바탕 자랑을 늘어놓다가 뒤늦게야 림희문이 일체 연구사업을 포기하고 생필직장에서 간데라나 만들고있다는 말에 그는 그까짓 고달픈 연구사업에 또 머리를 디밀겠는가, 낚시질이나 하며 편안히 여생을 보내는 편이 낫다고 열심히 설득시키려 했었다. 그날의 쓰디쓴 기억이 생생한 림희문이여서 무어라고 할말이 없었다.

《그러니 한번도 만난 일이 없는게구만?》

황시우가 묻는 말이였다.

《언젠가 한번··· 만나긴 했습니다만···》

《그렇소? 그래 그가 뭐라고 하오?》

《그는··· 이제 와서 또 연구사업을 시작하겠는가 하면서 그만두라고···》

《그것보오. 옛 친구들도 그렇게 말하는데··· 그게 다 우연치 않단말이요. 명심해 듣소!》

희문은 불시로 피곤이 몰려드는것을 느꼈다. 지난밤 한잠도 자지 못한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황시우의 시원하게 넓게 퍼진 희멀끔한 이마를 쳐다보면서 이 사람은 역시 조금도 달라진데가 없구나 하고 생각했다. 여전히 그는 책임을 두려워하고 자신이 직접 손을 대거나 자신이 직접 맡아안으려 하지 않는것이다. 여전히 그는 처세술에 능한 박필규같은 사람, 간부들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하고 남의 재능을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아하는 그런 사람을 높이 사고있는것이다.

지배인이 황시우더러 식사하러 가자고 말했다. 순간 희문은 거기서 물러서면 다시는 기회가 차례지지 않으리라는것을 깨달았다. 서둘러야 했다. 하다못해 다시 만날수 있는 리유라도 만들어야 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황시우의 팔소매를 덥석 붙잡았다.

《총국장동지, 한마디만 더 들어주십시오. 예? 부탁합니다.》

《뭐요. 어서 말하오.》

《그새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고··· 전에 제가 실험을 하던 그때에 비해볼 때 실험설비조건도 대단히 개선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래서 한번만 더 실험해볼수 있게 좀···》

《또 실험을? 어데서?》

《저··· 여기···》

《뭐ㅡ요?》 황시우의 굵은 목에서 퍼런 피줄들이 두드러졌다.

《이 동무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구만, 응?··· 그만큼 알아듣게 말했으면 됐지 아직두 뭐가 뭔지 모르겠소? 여보! 내 동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집구석에 박혀 좀 가만히 있소. 자기가 교화출소자라는걸 잊지 마오. 에?··· 지금은 준전시때야. 전시법이 적용되는 그런 때란말요!》

《?···》

순간 림희문은 숨이 꺽 막히는것을 느꼈다. 무엇인가 뜨끔하니 심장을 깨물어놓은것 같았다. 입을 벌리고 숨도 쉬지 못한채 그는 비틀거렸다. 죽은 사람같이 해쓱해진 그의 얼굴을 보고 놀란 지배인이 그를 부축해주려고 했다. 그는 손짓으로 지배인을 멈취세우고 가까스로 몸을 돌렸다.

출입문까지는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까지의 예닐곱발자국을 이를 악물고 식은 땀을 흘리며 걷지 않으면 안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