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4

제 1 편

4

 

운봉산은 상화군과 이웃군의 린접에 자리잡고있는데 오각별모양의 기묘한 지세를 이루고있었다. 주봉을 이룬 산마루에서부터 사방으로 여러 갈래의 련봉들이 뻗어내리고 그 사이사이는 길고 험한 계곡과 골짜기로 이루어졌다.

지난해 9월, 군병원에서는 고려약제조실의 약제사 한성숙을 책임자로 하고 갓 배치된 수련이와 간호원 셋으로 조를 무어 여러날동안 운봉산기슭의 덕수리에 거처를 정하고 약초를 캐게 하였다.

그날도 그들은 운봉산에 흔한 삼지구엽초와 단너삼창출 당귀, 독할 등을 찾아 산발을 오르내렸다. 제일 극성을 부린것은 수련이였다. 아버지가 무역선선장이여서 동해안의 흥남과 서해안의 남포 등 도시에서만 자라온 수련은 련사흘째나 배낭을 절반도 채우지 못하다가 이제 겨우 미립이 트기 시작했던것이다.

수련은 오직 약초에만 정신이 팔려 날이 저무는것도 또 같이 간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것도 알지 못하고있었다. 풀숲을 더듬으며 잡관목을 헤치고 바위를 타고넘었다. 갑자기 싸리나무가지를 헤치다말고 굳어져버렸다. 무엇인가 단번에는 리해할수 없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순간 수련의 머리우로 커다란 락하산이 날아지나가더니 저 앞쪽 바위벼랑턱에 떨어져내린것이였다. 뒤따라 또 얼룩무뉘가 난 옷을 입은 사람이 락하산을 타고 떨어져내렸다. 그 순간 수련의 머리속을 스쳐간것은 반간첩영화의 한 장면이였다. 머리칼이 곤두 서고 온몸이 얼어드는것 같았다. 어슬무렵 깊은 산속에 떨어져내리는 락하산··· 그러나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서야 그들이 훈련하는 인민군락하산병들이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그저 훈련중이려니 하고 지나쳐버릴수도 있었으나 어떤 예감이 수련이로 하여금 좀더 다가가 살펴보게 했다. 한순간 갑자기 말뚝처럼 박혀서며 두손을 가슴우에 모두어쥐였다. 락하산을 타고내린 두사람이 바위벼랑 한끝에 가까스로 붙어있는것을 보았기때문이였다. 분명 먼저 떨어져내린 사람이 벼랑턱에 부딪쳤는지 두팔을 축 드리우고있고 다른 한 사람이 그를 어깨우에 떠받들며 죽기내기로 바위벽틈에 손톱을 박고있었다. 뒤에서는 커다란 락하산이 서로 엉키여 바람에 너울거리고있었다. 한사람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머리까지 푹 떨구고있고 그를 어깨로 떠민 사람은 안깐힘을 쓰며 무거운 몸을 끌어올리려 했으나 허사였다. 순간이나마 그가 맥을 놓는 날이면 둘 다 아찔한 계곡아래로 굴러떨어지고말것이다.

얼결에 비명처럼 터져나오는 소리를 손으로 막으며 수련은 어찌할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외마디 소리라도 지르는 날이면 그가 놀라 손맥을 놓을수 있는것이다.

부상병을 업은 군인은 무던히도 더디게 가파로운 바위턱을 톺아오르고있었다. 그런데 그의 머리우로 불과 한기장만 한 사이를 두고 바위틈에 뿌리박은 잡관목이 있었는데 손을 들어 우로 쑥 뻗치면 잡을수 있을 그리도 가까운 거리였다. 하지만 바위틈에 손톱을 박으며 필사적인 노력으로 한치 또 한치 톺아오르는 그 군인에게는 단 한기장만 한 그 거리가 지금껏 걸어온 인생의 길보다도 더 먼 거리일수도 있었다.

수련은 소스라치듯 했다. 뒤늦게야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고 급기야 앞으로 내달려갔다. 너럭바위에 이르자 벌벌 기다싶이 하여 아래로 내려가기를 했다. 드디여 잡관목가지를 틀어잡고 다른 한손은 머리도 들지 못하는 그 군인에게로 내뻗칠수 있었다.

《이걸 잡아요. 동무!》

부상병을 업은 군인이 가까스로 눈길을 들었다. 땀과 먼지로 얼룩진 시뻘건 얼굴이였다. 무섭게 충혈진 눈빛을 사납게 번뜩이는것이 아주 험상궂어 보였다. 그는 이발을 사려물고 끙ㅡ 용을 쓰더니 수련의 손을 틀어잡았다. 순간 수련은 하마트면 그에게로 끌려가 무시무시한 계곡의 밑바닥으로 굴러내릴번 하였다. 잡관목가지들이 뿌적거리며 밑뿌리채 뽑히는것 같았다. 그 가지를 꽉 틀어쥔 수련의 손은 불로 지지는듯 했다.

수련은 휘청거리며 《아!ㅡ》하고 쓰라린 아픔을 못이겨 부르짖었지만 죽기내기로 그것만은 놓지 않았다. 한순간 또 한순간이 피나는 모지름속에 흘러갔다.

드디여 부상병을 업은 군인이 무릎걸음을 하게 되였다. 그는 펑퍼짐한 바위등판에 기여오르자 부상병을 업은채로 그만 그자리에 어푸러지고말았다.

이윽토록 그는 바위우에 엎드린채 헉헉 단김만 내뿜었다. 그의 시뻘건 목덜미로 땀이 줄지어내리고있었다. 그때에야 수련은 그의 목깃에서 중위의 령장을 발견하였다. 그가 바로 윤철이였다.

한동안 너럭바위에 쭉 뻗어있던 윤철은 얼마후 몸을 일으키려다가 무너지듯 주저앉고말았다. 그리고 그는 수련이더러 좀 돌아앉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수련이 의아쩍어 하며 고개를 돌리자 손칼로 자기의 장딴지를 쨌다. 곁눈으로 그것을 스쳐본 수련은 불현듯 낯색이 질렸다. 그의 장딴지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피가 바위우에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엔 막 몸서리쳤다.

《왜 이러세요. 예? 이런 끔찍한 일을···》

수련이 몸을 떨며 부르짖자 윤철은 주머니에서 개인붕대를 꺼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런건 보지 않는게 좋습니다.》

《예?!》

《아까 벼랑턱에 오르면서 너무 힘주어 다리를 버텼더니 그만 쥐가 올라 그럽니다. 그러니 별수 있습니까. 갈길은 먼데··· 이렇게 해야 무더운 여름철에 찬물에 들어선것처럼 시원해지면서 다시 걸을수 있습니다··· 보지 마시오.》

《하지만···》하고 수련은 낯색이 질려 말했다. 《그런 끔찍한 일을··· 어서 돌아앉으세요. 내가 도와드릴게.》 그것은 거의 명령조에 가까운 어투였다. 윤철이 놀라는것을 보고 수련은 말했다.

《난 의사예요. 시키는대로 하세요!》

《?!···》

윤철은 돌아앉았다. 피가 잔뜩 몰렸던 그의 얼굴이 차츰 해쓱해지고있었다. 아까 험상궂게 생긴 사람으로 본것은 그가 죽기내기로 용을 쓰고있었기때문이리라. 수련이 자기의 가방앞주머니에서 소독약이며 붕대 등을 꺼내드는것을 지켜보고있던 그가 눈빛을 번쩍이며 수련의 두손을 꽉 움켜잡았다.

《마침 됐습니다. 의사선생! 이 동물 좀 봐주십시오.》

수련은 질겁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의 아귀 센 손아귀가 뼈마디까지 으스러뜨리는것 같았던것이다.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제야 윤철은 자기의 실수를 깨닫고 게면쩍어하며 말했다.

《어데 심하게 다치지 않았는지··· 빨리 이 동무부터 좀···》

《됐어요. 걱정마세요.》

수련은 의식잃은 전사를 꼼꼼히 진찰했다. 락하산을 타고내릴 때 어덴가 부딪쳤는지 별다른 상처도 없이 의식을 잃고있다. 윤철은 수련이 필요한 구급대책을 세우는것을 지켜보다가 《고맙습니다. 의사선생!》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어떻습니까. 의사선생, 위험하진 않겠지요. 예?》

《걱정마세요.》

다음 순간 수련은 약간 얼굴을 붉혔다.

《의사선생, 의사선생 하지 마세요. 전 이자 갓 대학을 나왔을뿐인데··· 그저 수련이라고 불러주세요.》

《예ㅡ》

그럴 때의 윤철은 어린애와 같이 순진한데가 있었다. 가무스레한 살결에 코마루가 날카로운, 흔히 날파람있게 생겼다고 하는 그런 부류의 젊은 군관이였다. 녀자들앞에서 주눅이 들군 하는 순수하고 가식을 모르는 젊은이같다. 그런데 수련이야말로 이렇듯 정직하고 대바르고 강인한 젊은이를 꿈꿔온것이 아니였던가?···

그러나 그날 수련은 인상적인 그 소대장과 별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못하였다. 부상당한 전사를 같이 부축하여 산에서 내릴 때에도 서로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는 몇마디를 주고받았을뿐··· 땅거미지는 산길은 가파로왔었다.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헐떡거리며 달려오는 병사들과 만났다. 윤철의 정찰소대 대원들이였다. 그들은 위급한 순간 자기네 소대장과 부상당한 전사를 도와준 수련에게 거듭거듭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담가를 만들어 거기에 부상당한 전사를 눕히고 떠나갔다. 떠나가면서 또 저저마끔 청을 돋구어 웨쳤다.

《고맙습니다. 의사선생!》

마지막으로 소대장 윤철이 《정말 고맙습니다. 그럼 안녕히!》하고 말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수련이 역시 한손을 쳐들며 《잘 가세요!》하고 속삭이는듯 했다.

골짜기의 밤은 불시로 찾아드는 법이다. 하늘을 덮은 구름장들로 하여 어둠은 더욱 짙어졌다. 바삐 서둘러야 했다. 수련은 오던 길로 되돌아섰다. 그러나 첫걸음부터 싸늘한 불안에 허둥지둥했다. 그래도 무작정 앞으로 앞으로 내닫다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잔등을 훑어내리는 차디찬 전률에 온몸을 떨며 헉ㅡ 하고 흐느꼈다. 비로소 그는 자기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낯선 골안에 들어섰다는것을 깨달았다. 가슴이 얼어들고 머리칼이 쭈볏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부지불식간에 입술을 꽉 악물며 목구멍에시 금시 터져나오려던 울음섞인 고함소리를 도로 삼켰다. 바람이 불 때마다 등판우의 떨기나무들이 말라버린 잎사귀들을 흔들며 와슬렁거렸다. 어느덧 싸늘하고 무시무시한 어둠이 빈틈없이 수련의 온몸을 휘감아버렸다. 수련은 거의 절망적으로 사방을 휘둘러보며 허우적거렸다. 윤철소대장과 같이 부상당한 전사를 부축해올 때 왜 길을 잘 살펴보지 않았던가 하는 뼈저린 후회에 몸부림쳤다. 밤이 온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했던가!···

어둑컴컴한 골안에서 우ㅡ 우ㅡ 하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울려왔다. 쏴ㅡ 숲을 흔드는 세찬 바람소리가운데 울려온 그 소리는 짐승의 울부짖음같기도 하고 사람의 목멘 통곡소리같기도 했다.《우 ㅡ 여 ㅡ 우 ㅡ》하는가 하면 얼마후엔 좀더 가까이 《우 ㅡ 여ㅡ 우ㅡ 우ㅡ》하고 웅글게 메아리쳐왔다.

수련은 치를 떨었다. 다음 순간 헉ㅡ 하고 흐느끼면서 정신없이 어둠속을 내달았다. 나무가지에 걸려 비틀거리고 돌부리에 걸채이다가는 또 무엇에 할퀴였다. 허우적거리며 아무것이든 손에 잡으려 했으나 그만 나무등걸에 무릎을 짓쪼았다. 뼈가 으깨여지는듯 했다.

《아!》

혀를 깨물며 솟구치는 눈물속에 고통스레 부르짖었다. 그러나 허벅지쪽으로 쭉 뻗어오른 그 모진 아픔보다도 머리칼이 곤두서게하는 공포심은 더더욱 참기 어려웠다. 다시 벌떡 일어나 또 들구 뛰려고 했다. 그 몸서리쳐지는 무시무시한 통곡소리만 피할수 있다면 벼랑우에서라도 굴러내릴것 같았다.

그 순간 멀지 않은 앞쪽 경사면에서 잡관목을 마구 짓이기는 발자국소리가 났다. 수련은 공포에 질려 숨도 쉬지 못한채 얼어붙고 말았다. 무엇인가 성급하게 그를 맞받아 돌진해오고있는것이다.

돌멩이들이 굴러내리고 나무가지가 뚝뚝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시꺼먼 형체가 비탈면에서 미끄러져내리는데 어느새 헉ㅡ 헉ㅡ 하는 가쁜 숨소리가 가까와왔다.

수련은 꼼짝도 못했다. 심장은 얼어붙고 온몸을 뒤흔드는 쩌릿한 전률에 머리칼이 아파날 지경이였다. 바로 그때 무서운 웨침소리가 수련의 눈앞 몇발자국앞에서 터졌다.

《수련동무ㅡ 우!ㅡ》

그 순간 수련은 굵직한 몽둥이에 후려맞은듯 했다. 숨이 꺽 막히고 가슴을 우벼내는듯 한 모진 아픔에 허덕이다가 급기야 《으흑!》하고 신음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시꺼먼 형체가 헐금씨금 다가오더니 금시 쓰러지려는 수련을 부축해주었다. 아니 부축한다기보다 우악스럽게 꽉 붙들어주었다. 그러나 수련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것 같았다. 무서운 공포속에서 헤여져나온 안도감에 세찬 바람소리마저 홀연 사라져버린것 같이 생각되였다. 차츰 헝클어졌던 호흡이 서서히 갈앉기 시작했다. 그때 꾸르릉! 하고 머리우에서 우뢰소리가 울렸다. 수련은 깜짝 놀라며 머리를 들었다. 다음 순간 자기를 붙들고있는 윤철을 밀쳐버리며 흠칫 물러섰다. 어인일인지 눈뿌리가 아뜩해졌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내가 지금 예서 무얼하고있는가?··· 급작스러운 수련의 태도에 윤철은 놀란듯 했다. 어쩌면 무안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침묵, 어색하고 고통스러운 침묵··· 불현듯 이 무서운 그리고 죄스러운 이 침묵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숨이 막혀 죽을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수련이 말했다. 거의나 입속말처럼 가까스로 짜낸 말이였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윤철이 떠듬거리며 말했다. 《뒤늦게야··· 이고장 태생이 아닌 동무가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멜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해요.》

두번째로 수련이 한 말이였다. 그에게서 땀냄새가 풍겨왔다.

험한 산길을 뛰여오느라고 땀에 흠씬 젖어버렸을것이다.

《갑시다.》

윤철이 명령하듯 말했다. 그리고는 어둠속으로 씨엉씨엉 걸음을 옮겼다. 수련은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르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를 악물고 걸음마다 부딪치고 할퀴우고 걸채이면서 아무말없이 앞서가고있는 윤철에 대하여 야릇한 반감까지 품으며 허청허청 따라갔다. 숨을 헐떡거리며 금시 주저앉고싶은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철은 마치 처녀가 무서워 도망치기라도 하는듯 했다. 수련은 차츰 호흡이 거칠어지다 못해 목에서 겨불내가 나고 눈이 뒤집히는것 같았다.

별안간 나무등걸에 걸채였다. 수련은 《악!ㅡ》하고 두손으로 발등을 누르며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윤철이 멎어섰다. 천천히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잡으시오.》

역시 명령하는 투였다. 수련은 말없이 그가 내민 손을 밀어버렸다. 신음소리를 씹어삼키며 가까스로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됐어요.》

《혼자 걸을수 있겠습니까?》

《가자요!》

또 한동안 아무말없이 걷기만 했다. 마치 원쑤진 사이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까닭모를 고까운 생각에 눈물이 쑥 솟구쳐오를 지경이였다.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걷고있는 이 사람, 바로 그와 부상당한 대원을 도와준 수련이였건만 그리도 기를 쓰며 앞서가다니!··· 걸음마다 그에 대한 노염과 반감을 덧쌓으며 이를 옥물고 따라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먼데서 야밤의 길손을 부르는듯 하나의 작은 불빛이 가물거렸다. 불빛이다!··· 수련은 마치 외할머니의 옛말에서 듣던 기괴한 불빛을 눈앞에 보는듯 한 심정이였다. 옛말에서는 그런 불빛이 가물가물 멀어지다가 또 가까와지고 가까와지다가는 또 아득히 멀어지면서 불행한 길손들을 놀래우고 꼬드기며 정처없이 끌고가는것이였다. 그런데 얼마후 그 불빛은 둘, 셋으로 또 여라문개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가슴조이는 옛말에서처럼 누군가를 부르는 웨침소리도 가늘게 들려왔다.

윤철이 먼저 걸음을 멈추었다.

《동물 찾고있군요.》

《?!···》

수련은 점점 더 또렷해지는 불뭉치들을 야릇한 심정으로 멀거니 보기만 했다. 웬일인지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맥없이 주저앉아버리고싶을뿐··· 가까와오는 그 불빛들이 수련의 두눈을 따갑게 불태웠다. 웬일일가. 어째서 마음은 허전해지는것일가. 지금 내가 바라는것은 과연 무엇일가?···

《그럼.》하고 윤철이 또 말했다. 《난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수련은 몸을 떨었다. 헤쳐진 목깃으로 찬바람이 스며들어 땀이 밴 잔등을 작고 예리한 얼음침으로 콕콕 찔렀다.

윤철이 머뭇거렸다. 무엇인가 더 할 말이 있으면서도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바재이는듯 했다. 그것은 무슨 말일가, 무엇을 더 말하려 하는것일가, 마지막으로 한번 더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려는것일가?··· 다시 윤철의 호흡이 거칠어지는듯 했다. 목에 걸린 무엇을 꿀꺽 삼키며 한발 다가섰는데 순간 수련은 또 한번 흠칫했다. 그 어떤 무서운 위험을 의식하면서 어둠속에서 번뜩이고있는 그의 두눈을 공포에 질려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윤철은 격한 숨결을 퍼부으며 이상해진 목소리로 나직이 그리고 매우 힘겹게 속삭이는것이였다.

《주소를 대주겠습니까?》

···

그때부터 윤철은 편지를 보내오기 시작하였다. 정찰소대에 대하여 수련이 구원해준 전사(그의 이름은 림정산이라고 했다.)에 대하여 그리고 고향과 정든 동무들, 앞날의 소박한 희망에 대하여 써보냈다. 수련은 난생 처음 그 례사롭고 평범한 이야기들이 적혀있는 총각의 편지를 남모르는 갖가지 의미와 뜻으로 해석해보며 읽군 하였다. 물론 거기엔 아직 사랑이라던가 미칠듯 한 그리움이라던가 하는 겉발린 정열의 표현들이 적혀있지 않았지만 그 수수한 말들엔 더 많은 의미가 들어있었다.

거기엔 군복입은 한 젊은이의 가식을 모르는 깨끗한 마음과 순수한 꿈과 억센 성격이 들어있었다. 수련이도 편지를 썼다. 그러자 이번엔 윤철과 전사 림정산 그리고 숱한 정찰병들이 한꺼번에 편지를 보내여왔다.

부소대장 길덕수, 무전수 최윤두, 분대장 김광찬, 대원들인 장성부, 김명길··· 낯모르는 그 전사들이야말로 얼마나 소박했던가. 그들이 표시한 감사의 마음이야말로 또 얼마나 뜨겁고 진실했던가!··· 그러던차에 윤철이 뜻밖에도 수도 평양에 들릴 기회를 가졌고 흔치 않게 차례진 그 기회를 놓칠수 없어 용기를 내여 수련의 집에 찾아왔었다. 그러나 그는 기대와 달리 어머니의 랭대를 받고 문전에서 쫓겨나고말았다. 편지를 통해 수련이가 약품접수차로 평양에 와있다는것을 알고왔는데도 없다고 했다. 그밖에 또 무슨 말들이 오갔는지 아직 수련은 다는 모른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무엇인가 뜨끔하니 깨무는것 같이 속이 얼얼해난다. 반쯤 열린 문으로 머리만 내밀고 그와 몇마디 다급히 나누었을 어머니, 그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가. 놀람이였을가, 분노였을가, 아니면 쓰디쓴 경멸이였을가?···

외할머니는 수련이 하는 말을 끝까지 다 듣고나서 단마디로 이렇게 말했다.

《난 그 사람이 좋구나!》

수련이 소리내여 웃기 시작하자 외할머니는 혀를 찼다.

《웃을 일이 아니야. 나두 네가 평양에 갔으문 해서 네 애비가 손을 쓰지 않는다구 욕두 했지만 이제 듣구보니 윤철이같이 좋은 사람을 놓칠수야 없지 않니. 언제 한번 같이 오려무나.》

《예?!》

수련이 놀라는것을 보고 외할머니는 웃었다.

《왜 그럼 안된다던?··· 같이 와서 할아버지랑 만나보면 좋지 않겠니. 할아버지 성미엔 제창 약혼식을 하자구 할게다.》

《어마나!》

외할머니는 잠시 눈웃음치며 마주보다가 이어 정색해서 말했다.

《하긴 지금 그렇게 한다는건 새빠진 일이지. 지금 어느때라구··· 너두 알겠지만 요새 또 정세가 대단히 험해진다더라.》

외할머니는 텔레비죤의 소리를 높였다.

《저 소릴 들어보렴. 미국놈들이 전쟁을 일으키려구 또 지랄발광이구나.》

텔레비죤에서는 방송원이 남조선에서 벌어지고있는 도발적인 전쟁책동에 대하여, 《팀 스피리트 93》합동군사연습에 투입되고있는 각종 군사장비들에 대하여 준렬히 단죄하고있었다.

외할머니가 혀를 끌끌 차며 《암만 어째봐야 바위돌에 대못 박기지.》하고 중얼거렸으나 수련은 잠자코 눈을 내려깔고있었다. 여전히 그의 생각은 다른데 가있었다. 그 어떤 엄중한 정세도 아직 수련에게는 불안과 아픔을 주지 않았다. 매해 계속되여온 침략과 전쟁의 위험도 아직은 수련이를 건드리지 않고 그를 스쳐갔던것이다.

이날밤 수련은 꿈을 꾸었다. 대학동창들과 같이 아버지가 타는 1만t급 무역선 《무포》호에 올라 불빛 휘황한 어느 도시로 떠가는 꿈이였다. 그런데 아무리 조타를 돌려도 배는 빙그르 돌기만 할뿐 목적한 해안도시에로 곧추 나가지 않았다. 해안도시의 부두에서는 어머니가 손을 저으며 어서 오라고 웨쳐대고있는데 그곁에 서있는 아버지는 무엇때문인지 계속 웃기만 했다.···

한밤중에 눈을 떠보니 새벽 3시였다. 외할아버지는 그때까지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