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3

제 1 편

3

 

인민군장령이 탄 승용차가 멀리 달려갔을 때에야 수련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웬일인지 점점 더 걸음이 떠지고 어깨에 멘 가방도 갑절이나 더 무겁게 느껴졌다. 역에서 마을까지는 불과 십리안팎이건만 무거운 가방때문에 수련은 몇십리나 걷고있는듯 했다. 저녁차를 타고온것이 후회되였다. 작년 여름에 왔을 때에는 하루 세번 꼭꼭 역에서 멎는 렬차의 손님들을 위해 뻐스가 나와 기다리군 했는데 지금은 무슨 사정이 있어서인지 얼마전부터 뛰지 못한다고 한다.

수련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방을 바꾸어 메며 멀리서 호흡하듯이 껌벅거리고있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그 불빛들은 점점 더 추워지고있는 밤길을 걷고있는 수련에게 어서 오라 부르며 열심히 눈짓하고있었다. 저 많은 불빛들중 어느것이 외가집일가. 이제 내가 들어서면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가 얼마나 반가와할가!··· 하지만 여전히 걸음은 떠지고 어깨에 멘 가방은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어깨가 쑤시고 두발이 휘청거린다.

흔히 무슨 일에서나 목표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을 때가 제일 힘든 법이다. 수련은 다시금 불빛까지의 거리를 가늠해보며 입술을 옥물었다. 이게 무슨 꼴이람, 함흥약학대학을 졸업하고 상화군병원 약제사로 일하는 스물다섯에 난 처녀,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들모두가 깍듯이 존대하여 부르는 리수련선생, 그런데 지금 이만한 걸음에 허우적거리는 꼴을 보면 그들이 뭐라고 할가?···

어데선가 퉁퉁거리는 뜨락또르의 발동소리와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을은 멀리 있지 않다. 달음질쳐 걸으면 20분도 채 안걸릴수 있다.

콕콕 찌르는 찬바람에 뺨이 얼얼해났다. 그는 장갑낀 손으로 량볼을 싸쥐고 걸으며 지금쯤 어머니는 집에서 무얼 하고있을가 하고 생각했다. 수도 평양에서도 중심부에 속하는 비파거리에 그의 집이 있다. 13층 1호··· 약품접수차로 여러날 집에 머물러있던 수련은 바로 몇시간전에 려행가방을 둘러메고 집을 나왔다. 원래는 하루 더 묵어있을 작정이였지만 뜻밖의 일이 수련이의 생각을 돌려놓았던것이다.

지금쯤 어머니는 텅빈 집안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있을것이다.

늘 바다에 떠서 사는 무역선선장인 아버지도 없이 수심이 비낀 얼굴로 어둠속에 앉아있을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보니 별안간 가엾은 생각도 없지 않다. 하지만 다음 순간 수련은 도리질을 하고말았다.

(아니, 어머닌 너무 모질었어. 어머닌 그를 모욕할 권리가 없어!)

수련은 어머니한테 죄다 쏟지 못한 되알진 말들을 계속 이어가며 허척지척 어둠속을 걸어갔다.

(어쩌면 그럴수 있을가. 그처럼 순박한 그 군인동무를 문전에서 쫓아버리다니!··· )

그것은 전혀 예상치 않던 뜻밖의 일이였다. 그때 수련은 어머니와 같이 제 키보다 더 큰 삼면경대앞에 마주 서있었다. 어머니가 딸의 몸에 맞게 새로 지은 옷을 입히며 독촉을 했다. 어느 중앙기관에서 총국장을 하는 한 간부가 수련이를 만나보고싶어한다는것이였다. 일이 바쁜 간부가 나를 왜 만나려 하는가고 수련이 따져묻자 어머니는 《네 일때문에 그런다. 그저 그쯤 알고 가서 인사나 깍듯이 하렴!》하고 말했다. 그런 다음 아주 우연한 일인듯 경대앞에 놓여있는 화장품함을 열다가 그속에 있던 사진 한장을 꺼내였다.

그것을 슬쩍 들여다보고나서 어머니는 눈웃음치며 수련에게 내밀었다.

《참 잊을번 했구나. 수련아, 이 사진 좀 보렴!》

무심결에 사진을 받아든 수련은 고수머리에 얼굴의 선이 굵고 암팡지게 생긴 한 청년과 눈길이 마주쳤다. 사진속의 그 청년은 바로 때를 기다리고있었던듯 찌르는듯 한 눈길로 곧추 수련이를 쳐다보는데 첫눈에도 그가 사내답게 대범하고 굳센, 뭇처녀들의 선망어린 눈길을 모을 총각이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웬일인지 속이 후두둑했다. 그리고 영문을 알수 없으나 그 청년의 범상치 않은 눈빛이 자기를 꼼짝못하게 하는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수련은 오늘 자기를 만나고자 하는 그 간부와 이 청년간에 무슨 련관이 있으리라는것을 깨달았다.

《그래 어떻니?》

어머니가 물었다.

수련은 사진속의 청년을 재빠른 눈길로 또 한번 스쳐보았다.

《미남자이군요.》

《그ㅡ래?!》하고 어머니가 반색했다.

《그러니 네 마음에 든다는거지? 응?!》

《글쎄요. 그거야···》

바로 그때 초인종소리가 울렸다. 수련은 저도모르게 손을 등뒤에 돌려 사진을 감추었고 어머니는 눈살을 찌프리며 복도로 나갔다. 잠시후 그쪽에서 두런두런하는 말소리들이 들려왔다. 어떤 남자의 목소리였는데 어데선가 들어본것 같았다. 그러나 수련은 더는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손에 쥐고있던 사진을 경대우에 놓고는 거울에 비쳐진 자기의 모습을 새삼스레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전혀 화장을 모르던 수련이다. 희맑은 살갗에 깨끗하고 섬세한 륜곽을 지은 수련의 얼굴은 아직 화장품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수련은 자기가 입고있는 투피스(어머니가 새로 산 옷인데 앞섶엔 금빛 브로치까지 달려있었다.)를 꽁꽁 여미여보고 또 몸매를 훑어보았다. 가느스름한 팔과 다리때문에 좀 여윈것처럼 보이는게 흠이랄가··· 그러나 얼마전까지 몸에 배여있던 녀학생티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단아하고 조용하고 아릿다운 한 처녀가 의미깊은 눈길로 자기를 감상하고있었다. 왼쪽 오른쪽으로 머리를 돌려보고 어깨너머로 슬쩍 곁눈질도 하는데 돌연 어머니의 웃고있는 얼굴이 거울속에 뛰여들었다.

《곱구나. 쑥 빠진게!··· 》

어머니의 그 말에 수련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누가 왔됐어요?》

《오ㅡ 그저··· 웬 군관이···》

《군관이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집을 헛갈렸더구나.》

《그래요?》

어머니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재빨리 말했다.

《아이구 벌써 두시가 넘었구나!··· 조금만 기다려. 내 인츰 차비할게.》

아직도 젊었을 때의 미모를 그대로 지니고있는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옷을 갈아입는동안 수련은 거울을 내주고 창가에 갔다.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고있던 수련의 두눈이 굳어졌다.

아래쪽에서 고개를 잔뜩 뒤로 젖히고 올려다보고있는 한 군관이 낯이 익었다. 순간 심장이 흠칠하였다. 수련은 그 군관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은채 소리쳐 물었다.

《어머니! 이제 왔던게 누구라구요?》

《내 말하지 않던! 그저 웬···》

아래쪽에서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보던 군관은 흘러내린 전투가방을 바로 메며 큰길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머니, 이제 왔던게 윤철동무지요? 예? 그가 왔댔지요?》

수련이 따져묻자 어머니는 낯색이 질렸다.

《그래, 그 사람이다.》

《예?!···》 수련은 한순간 얼어붙은듯 했다. 다음 순간 벌써 그의 얼굴엔 타는듯 한 모지름이 스쳐갔다.

《그런데 어머닌··· 나한테 그런 거짓말을···》

《얘 수련아.》

《그래 뭐라구 했어요. 그 동무한테 뭐라구 했나말이예요?》

《아니 난 그저···》

《어서 말해요. 어머니, 뭐랬다구요?!》

《그저··· 없다구 했다. 널 찾기에··· 요새 며칠 와있다가 방금 병원으로 도로 갔다구···》

《예? 뭐라구요?!》 수련의 엷은 입술은 분노의 눈물로 하여 바르르 떨렸다.

《어쩜 그렇게··· 어쩜 그럴수 있어요?!···》

다시 창가로 돌아섰으나 윤철의 모습은 끝없이 흘러가고 흘러오는 사람들의 물결속에 묻혀 자취를 감추고말았었다.

어머니가 다가와 딸의 어깨를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얘, 수련아, 난 너를 위해서 그러는거야. 솔직히 말해서··· 너하군 어울리지 않아!》

《그럴수도 있겠죠.》

《그리구···》

순간 수련은 어머니에게 더는 말을 말라는듯 한팔을 내저으며 부르짖었다.

《됐어요. 어머닌··· 너무해! 집에 찾아온 사람을··· 문밖에서 그렇게 쫓아내다니··· 어머닌 그를 모욕했어요. 그리구 나두··· 됐어요. 다치지 말아요!》

이렇게 되여 끝내 총국장과 만나기로 한 시간을 어기게 되였다. 전화로 알아보니 총국장은 출장을 떠나는데 한 사날후에야 올거라고 했다. 어머니는 그때까지 기다려주었으면 했지만 수련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리하여 수련은 자기한데 남은 그 하루를 상화군으로 가는 도중역에서 내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보내기로 맘먹은것이였다.

드디여 다 왔다. 반쯤 열려있는 삽짝문을 안으로 밀고 들어가니 토방우에 옹크리고있던 검둥개가 두귀를 발딱 세우며 을러메듯이 으르렁거렸다.

부엌문이 열리며 외할머니가 머리를 내밀었다.

《게 누가 오셨수?》

수련은 가방을 벗으며 어푸러질듯 문앞으로 다가갔다.

《할머니, 나예요. 수련이가 왔어요!》

《아니 뭐 수련이가?》 외할머니는 치마자락에 발을 걸채이며 밖으로 나섰다.

《어디 어디!··· 응?! 정말 수련이가 왔구나!》

며칠만 떨어져있다가 만나도 기쁨에 몸을 떠는것이 할머니들이다.

후들후들하는 손으로 수련이를 붙안고 얼굴을 들여다보던 외할머니가 드디여 그를 방안으로 잡아끌었다.

《그새 더 고와졌구나. 응?!··· 그동안 앓진 않았니? 이젠 군병원에 정이 붙었니?》

《예, 그럭저럭··· 이번엔 집에 볼 일이 있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도중에서 내렸지요 뭐. 갑자기 할머니가 보구파서···》

《잘했다. 그래서나 또 만나보지 도무지 두 정거장 사이를 두고 있는데두 만나기 힘드니··· 그래 집에선 다 잘있니? 네 애빈 지금두 소금바람을 맞구있겠지?》

무역선선장인 아버지가 지금도 바다에 떠있느냐 하는 소리였다.

수련은 시무룩이 웃으며 이제 며칠내로 돌아올것 같다고 했다.

《에그ㅡ》하고 외할머니는 혀를 찼다. 《오뉴월 솜버선이라더니 네 에미 신세두 참! 》

《됐어요. 할머니, 그래두 남들앞에선 늘 아버지자랑만 하시면서.》

《그럼 어쩌겠니. 미워두 제 사윈걸!》

참나무처럼 단단하고 말수더구가 적은 외할아버지와는 달리 부지런하고 웃기 잘하고 쉴새없이 돌아치며 잠시도 입을 다물지 못하는 다변한 성미인 외할머니는 언제나 자기의 기쁨을 소란스럽게 표현하군 했다.

수련은 방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할아버진 어데 가셨나요?》

《에그ㅡ》 외할머니는 수련이 벗어놓은 솜옷이며 목도리 등을 벽에 걸면서 말했다. 《그 령감 로병분조를 무은 담부턴 통 집에 붙어있는 시간이 없구나. 오늘두 새로 일군 개펄논에 거름을 실어낸다면서 일찌감치 저녁을 잡숫구 나갔는데 아마 또 샐녘에나 들어올게다.》

《아이참! 무슨 급한 일이라구 그렇게···》

《그럴만 한 사정이 있는가보더라.》

《그래요?》

수련은 얼핏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그 누구보다도 수련이를 귀애하는 외할아버지이다. 지금도 앉은뱅이책상 맞은켠 벽에 걸려있는 사진액틀에는 승마바지에 번쩍거리는 장화를 신고 옆구리의 권총집우에 한손을 얹고있는 전쟁때의 외할아버지 김윤필의 사진이 들어있다.

그 사진속의 외할아버지는 위풍을 돋구느라 그랬는지 어깨를 쭉 펴고 지내 엄숙한 표정을 짓고있는데 외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그가 신은 번쩍거리는 장화나 혁띠 그리고 승마바지조차도 다 남의것을 빌린것이라고 한다. 공병군관이였던 그는 늘 소금발이 돋아 잔등에 세계지도가 그려진 물날은 군복에 너덜너덜 찢겨지고 앞코숭이가 터진 장화를 신고다녔다는것이다. 그 시절 남강마을에서 제일 예쁜 외태머리 처녀였던 외할머니가 다리복구장에서 처음 만난 외할아버지는 영 볼품이 없는데다가 꺼칠하고 별스레 늙어보이는것이 도무지 총각같지 않더라는것이였다.

그러나 그 외할아버지를 외할머니는 얼마나 극진히 섬기고 공대해왔으랴. 떠들썩 소란을 피우다가도 외할아버지가 쯧쯧 하고 한번 혀를 차기만 해도 단번에 입을 다물고 공손해지군 했다. 하기에 어머니는 수련이가 고집을 부리고 따벌같이 내쏠 때면 《원 저게 어떻게 꼭 외할아버질 닮았을가!》하고 혀를 내두르군 하였다.

외할머니는 수련이 시장하겠다면서 급히 부엌으로 내려갔다.

저녁을 먹고나서도 수련은 외할머니의 무릎에 바싹 다가앉아있었다. 이야기는 새라새롭게 이어지면서 끝이 없을듯 했다. 군대에서 비행사로 복무하는 외삼촌 소식, 여러 친척들, 이웃들 소식, 외할아버지네 로병분조며 수련이가 일하는 군병원 그리고 온갖 세상사와 떠도는 소문, 지나간 옛일 등 가장 평범하고 특별한 의미가 없는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긴요하고 사연깊고 마음써지는 이야기들이였다.

세대간의 관계에 있어서 늙은이들은 흔히 자기의 아들딸들보다도 손자손녀들과 더 가까우며 통하는 법이다. 그것은 인생의 량극에 서있는 그들 두 세대간에만 통하는 그 순진함과 가식을 모르는 솔직성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야기도중에 외할머니가 불쑥 《얘, 수련아, 너도 인젠 시집갈 때가 되였는데 어디 봐둔 총각이 없니?》하고 물었다. 수련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방금 대학을 나왔는데 어디 그럴 새가 있어야지요?》

그러자 외할머니는 한쪽구석에 켜놓은채로 있는 텔레비죤의 소리를 낮추며 성미그대로 떠들어댔다.

《얘, 삶은 호박에 이 안들 소리일랑 하지두 말아. 체네총각 눈이 맞는데 무슨 그럴 새가 있구 없구가 있어?》

《아니 할머닌 몰라서 그래요. 대학에선···》

《글쎄, 모르긴 하겠다만 그런건 다 때가 되면 저절루 되는 법이야. 우린 전쟁때 뭐 그럴 새가 따루 있어서 폭격통에두 서로 만나고 한줄 아니?》

《참, 그 얘길 좀 해줘요.》하고 수련은 외할머니의 한쪽 무릎을 마주 끌어안았다.

《어떻게 할아버질 알게 됐는지. 예? 어서요!》

《그저 가다오다 우연히 알게 됐지. 전쟁때였으니까.》하고 외할머니는 돋보기와 바느질감을 끄당겨갔다.

《그 령감이 어쨌는지 아니. 글쎄 다리복구장에서 나를 몇번 보더니 하루저녁 갑자기 성이 나서 날 불러대지 않겠니. 다리밑으로 오라는거야. 얼굴이 시꺼매서!··· 내가 겁에 질려 조심조심 다가가자 나를 쏘아보면서 대뜸 한다는 소리가 〈동무, 나한테 시집오지 않겠소?〉이러는거야. 원, 통판 알지두 못하는 사람이··· 내가 도망을 치려구 하자 이 팔을 꽉 틀어잡는데··· 아이구머니나! 무슨 집게루다 꽉 집어놓는것 같았어. 난 그만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질렀는데 또 그가 〈소리지르지 마오!〉하고 엄포를 놓는 바람에 입을 다물구말았지. 그때 난 이 사람한테서 웬만해선 빠져나가지 못하겠구나ㅡ 하는 생각이 들더구나. 뭐 괜히 성이 나서 시꺼먼 볼을 후들거리구 씩씩거리는게 위불없는 곰이야 곰!··· 무엇때문인지 코가 다 찌부러져보이는데 그 무서운 사람 뚝심을 내가 무슨 수로 당해내겠니. 그런데 그는 또 〈동무 왜 말을 못하오. 나를 기다려주겠소. 어찌겠소?〉 하고 따져묻겠지. 난 끝내 아무 말두 못하구 벌벌 떨기만 했어. 그래 어떠냐. 이게 바루 우리가 알게 된 사연이란다. 이게 다야. 보다싶이 시체 청년들이 생각하는 그런 까다롭구 복잡한거라군 하나두 없어!》

수련은 거의 경탄에 가까운 심정으로 아직 옛시절의 용모가 조금 남아있는 늙은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보나 외할머니는 엷은 입술에 가벼운 비양조의 미소를 띠우고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하군 하는데 그의 말을 들으면 흘러간 한생이 다 유쾌하고 재미난 일로만 엮어져있는듯 했다. 사실 전쟁때 미국놈폭격에 어머니와 남동생까지 잃었지만 아직 한번도 외할머니는 추억의 페지들을 눈물의 언어로는 읽으려 하지 않았다.

그때문에 온 집안이 그리고 온 동네가 외할머니를 좋아하는것 같다. 사람이 자기의 과거를 이야기할 때 밝은 웃음과 즐거운 추억을 먼저 상기한다는것은 좋은일이다. 그러한 한생은 결코 후회되지 않을것이며 남부럽지 않을것이다.

《그런데 얘 수련아.》하고 외할머니는 돋보기 너머로 수련이를 건너다보았다. 《너 오늘 참 별나구나. 무슨 일이 있은게 아니냐? 너 아까부터 줄창 무슨 생각을 하구있니?》

《뭐 아무것두 아니예요.》

이제 와서 수련은 집에서 있은 일을 말하고싶지 않았다. 외할머니와 마주 앉으니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던 노여움과 안타까움이 어느새 연기처럼 사라져가는것을 느꼈다.

《때가 되면 속에서 저절루 눈물이 끓지. 그때가 와야 진짜 처녀가 되는거야.》

외할머니의 의미깊은 이 말에 수련은 벙긋 웃음을 머금었다. 어떤 즐거운 기억이 그의 머리속에 떠오른것이였다. 그러자 수련의 입가에 떠오른 애틋한 미소에서 그리고 꿈을 꾸는듯 한 그의 눈빛에서 외할머니는 무엇인가를 느낀 모양이였다. 외할머니가 물었다.

《그게 누구니?》

《예?》

《지금 네가 생각하는 그 사람말이다.》

수련은 놀라서 외할머니를 찬찬히 쳐다보았다. 아마도 늙은이들의 가늘게 좁혀뜬 눈길에는 그들만이 가지고있는 인생의 경험과 남다른 감각이 들어있어 모든것을 환히 꿰뚫어보는것 같다.

《할머니, 난 아직두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어떤게 사랑인지··· 참 이렇게 말하니 좀 우습죠? 다 큰 처녀가··· 대학까지 나왔다는게···》

수련은 잠시 입술을 깨물고있다가 나직이 계속했다.

《그런데 요즘··· 한 군관을 우연히 알게 됐는데··· 정찰소대장이라나요.》

《음ㅡ》

외할머니가 호기심 가득히 쳐다보자 수련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떠듬거렸다.

《뭐 별다른 일은 없어요. 그저 우연히 만나 알게 되구 편지나 주고받았을뿐인데··· 그마저도 어머니가 반대하는통에···》

《네 에미가? 그건 왜?》

《약학대학을 나온 녀자가 산골군관사택에 가서 돼지나 치겠는가 하는거죠.》

《원 저런! 군관사택마을에선 뭐 약제사를 못한다던?》

《어머니생각이야 뭐··· 어떻게 해서라도 날 평양에 끌어올리자는건데···》

《평양?!》

외할머니도 그 말엔 무엇인가 걸리는것이 있는듯 했다. 수련이 함흥약학대학을 졸업하고 상화군병원에 배치받았으므로 어머니가 안달복달하고있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평양에 올라가구싶은거야 네가 더하겠지.》 외할머니의 말이였다.

《안그러냐?》

《···》

수련은 얼굴을 붉혔다. 외할머니의 그 말이 자기가 애써 감추려 하고 변명해오던것을 면바로 찔렀기때문이였다.

외할머니는 바느질하던 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겨있다가 갑자기 소리를 낮추어놓은 텔레비죤화면에 눈길을 보냈다. 하늘을 나는 인민군추격기편대의 장쾌한 모습이 거기에 비쳐지고있었던것이였다. 아마 비행사로 복무하는 맏아들생각이 나는 모양이였다.

《우리 나라에선 군대가 제일이야!》하고 외할머니가 말했다.

《우린 군대를 아끼구 존경하구 사랑해야 돼!》

《···》

수련은 이번에도 응수를 하지 않았다. 텔레비죤화면을 아무 생각없이 바라볼뿐이였다. 그는 생각했다. 군대를 아끼고 존경하고 또 사랑하는것과 군대한테 시집을 간다는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런데 지금 문제로 되고있는것은 수도에서 사느냐 영영 산골에 파묻히고마느냐 하는 그것이다. 아직 한번도 수련은 수도 평양과 떼여놓고 자기의 인생을 생각해본적이 없다. 하지만 윤철은? 그와의 인연은 어떻게 하는가?!···

여전히 텔레비죤화면에서는 음악과 함께 산발을 주름잡아 달리는 땅크며 돌격에로 내달리는 병사들의 모습이 흘러가고있었다.

수련은 외할머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잇대여지는 산발, 흔하디흔한 이 나라의 산과 골짜기, 가을철답게 울긋불긋 화려하게 단장한 릉선들··· 윤철동무를 처음 만난곳도 저런 골짜기가 아니였던가? 그날도 먼 산봉우리너머엔 저녁노을이 비껴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