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17

제 1 편

17

 

수련은 아버지를 비롯한 《무포》호 전체 선원들이 칼과 도끼 등으로 무장하고 결사전을 준비하고있던 그 시각 렬차에 몸을 싣고있었다.

집을 나온지 며칠만에 집으로 간다. 지금 수련이의 양복주머니속엔 집에서 보낸 한장의 전보가 들어있다. 전혀 뜻밖의 놀라운 소식이 씌여져있는 전보였다.

 

어머니 병 위급 급래

 

수련은 얼마전까지 아무렇지도 않던 어머니가 갑자기 앓고있다는것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을 믿지 않으려니 너무 외람된것 같기도 했다. 혹시 뜻하지 않은 일로 다치지 않았을가 하는 끔찍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시외전화로 먼저 알아볼념도 못하고 바삐 서둘러 떠난것을 후회하였다. 구석쪽에 머리를 기대고 반쯤 눈을 감고있다가 불현듯 허리를 폈다.

시외전화!··· 그 생각을 하니 모든게 명백해지는듯 했다. 어머니는 아직 한번도 딸에게 편지를 쓰거나 전보를 쳐보낸 일이 없다. 집에 전화가 있으므로 무슨 일이건 전화로 알리군 했던것이다. 그러고보면 전보를 친것이 의미심장한 계교로 느껴졌다. 전보를 쳐야만 수련이가 몸을 빼여 집으로 올수 있는것이다. 그러니 어머니는 무엇인가 일을 꾸미고있는게 틀림없다. 전번에 수련이를 만나보려 한다는 어느 간부이야기가 있었는데 그때문에 급히 부르는게 아닐가···

새벽 5시가 되였다.

정신없이 자고있던 손님들이 깨여나 세면장으로 오가거나 손짐을 챙기느라 부산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제 렬차가 서포만 지나면 이 선의 종착점인 서평양역에 이르게 되는것이다.

수련은 당반우에 얹었던 멜가방을 내려 앞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내들었다. 피로가 실린 커다란 두눈, 꽉 다물린 작은 입, 오똑한 코마루··· 수련은 손수건으로 눈아래쪽과 입언저리를 문지르고 다시 가방주머니에 거울을 넣었다. 그때 수련의 맞은편 창가에 앉아 두시간나마 끄떡없이 코를 골고있던 뚱뚱보사나이가 히죽이 웃으며 말했다.

《처녀동문 온밤 꼬바기 새우더군.》

마치 자기도 잠들지 않고있은것 같다. 수련은 잠자코있었다.

《무슨 근심거리라도 있는가부지?》

《안ㅡ 요.》

수련은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에게 말려드는 날엔 지꿎은 그 사람이 별의별 질문을 다 퍼부을것이다. 간밤에도 수련이 도중역에서 오르자 남달리 관심해주며 차안의 손님들이 곤히 자는것도 아랑곳않고 이것저것 지꿎게 캐여물었다. 어데 사는가, 비파거리 어느 아빠트인가, 직장은 어데 있는가, 혹시 관광총국에 있지 않는가, 어데선가 꼭 본것 같은데 텔레비죤소설에 출현한적은 없는가, 아니면 방송원? 극장안내원? 하고 닥치는대로 제보기엔 무척 어울릴상싶은 그런 직업들을 마구 불러대였다.

수련은 자기가 상화군병원약제사라는것을 말하고싶지 않았다. 자기를 남달리 보는 그 사람에게 수도에서가 아니라 시골군에서 사는 수수한 처녀이라는것을 밝히는것이 싫었다. 결국 그의 친절과 호기심이 귀찮아졌다. 하여 수련은 어느 기회에 가방속에서 《림상의전》을 꺼내들고 그 책에 정신을 파는듯 해보였다. 그제서야 뚱뚱보사나이는 그만 멋적었던지 약간 몸을 돌려 창틀에 머리를 기대고는 아주 수월히, 단숨에 잠들어버렸던것이다.

어느덧 서평양역이 가까와졌다. 렬차방송에서 중앙방송의 아침보도가 시작되였다. 요즘 매일과 같이 떠드는 《팀 스피리트 93》합동군사연습이 위험한 단계에서 추진되고있다는 소식이 먼저 나왔다.

수련은 아직 이러한 보도에 찬찬히 귀를 기울여본적이 없다. 맞은편의 뚱뚱보사나이도 적들의 《팀 스피리트》훈련따위는 대수롭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고나서 안주머니에서 주패목을 꺼내였다.

《자 처녀동무, 오늘 어떤 좋은 일이 있겠는지 한번 맞혀볼가···》

그는 수련이를 향해 두툼한 입술을 비쭉하며 눈웃음을 치더니 주패장들을 탁우에 차례차례 뉘여놓기 시작했다. 가끔 혀를 차기도 하고 휘익! 휘파람을 묘하게 부는가 하면 뒤집어놓은 주패장을 손끝으로 멋지게 쪼아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수련이를 향해 눈웃음을 쳤다. 수련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또 성가신 화제를 꺼낼가봐 두려웠다.

《아니, 벌써 나가려구?》

그가 놀라서 묻는 말이였다.

《예.》하고 수련은 재빨리 대답했다. 《그만 머리가 아파서···》

렬차는 싸늘한 어둠속을 거침없이 질주해갔다. 레루이음짬에서 딱딱 마쳐오는 단조로운 차바퀴소리만 끝없이 되풀이되고있다.

(어머닌 지금 무얼하고있을가. 정말 내일때문에 불렀을가. 아니면 전번에 집을 나간것때문에 속이 얹힌것이 내려가지 않아 그랬을가?)

어머니한테 너무 모질게 군것 같은 생각이 든다. 딸의 장래를 위해, 행복을 위해 그토록 왼심을 쓰고있는 어머니인것이다.

짐을 든 손님들이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서평양역에 거의 다 온 모양으로 기적소리가 련이어 울렸다. 원방신호기의 파란 불빛이 눈앞을 휙 스치고 지나갔다. 철길너머 멀리 단잠에서 깨여난 아빠트의 창문들이 하나 둘 환히 눈뜨고있는것이 바라보였다.

얼마후 렬차는 멎었다. 호각소리가 길게 울렸다. 차에서 내린 손님들이 서둘러 개찰구쪽으로 밀려갔다. 수련은 멜가방을 손에 든채 덤벼치는 사람들에게 부대끼우며 반달음쳤다. 개찰구앞에 몰켜선 사람들속에서 수련은 자기와 마주앉아있던 그 뚱뚱보사나이를 만났다. 두손에 들가방을 하나씩 무겁게 들고있던 그 사람이 수련이를 보자 벌씬 웃었다.

《그보라구, 우린 또 만나지 않았소. 아무리 서둘러 봤댔자 사람은 제 걸음만큼 간다구.》

어정쩡한 철학이다. 수련은 이번에도 응수하지 않고 사람들 틈에 끼워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뒤따르던 뚱뚱보사나이가 빨리 가서 첫 뻐스를 타자고 독촉했으나 그저 머리를 가로저으며 대합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푸릿한 가로등불빛이 희끄무레한 새벽빛속에서 숨져가고있었다.

멀지 않은 조차장다리우로 건설자재를 실은 자동차들이 꼬리를 물고 달려갔다. 알싸한 먼지냄새가 찬바람에 실려 날아왔다. 수련은 대합실에 들어가 안내표가 붙은 벽가에 가서 공중전화기를 들었다.

집전화번호를 돌렸으나 한동안 삑ㅡ 삑ㅡ 하는 소리만 계속되였다. 그러자 불현듯 무서운 상상이 번개치며 등골로 쭉 오한이 뻗어나갔다. 정말이지 어머니 병이 중한것이라면··· 집에 없으면 병원에 가있는것이 틀림없다. 그러자 대번에 목이 잠기고 눈굽이 쿡 쑤시는것을 느꼈다. 수련은 집전화번호를 다시 돌렸다. 잠시후 잠내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공명판을 울렸다.

《여보세요ㅡ 누구세요?》

《어머니!》 수련이 부르짖었다. 《나예요. 수련이예요!》

《수련아, 너 어데서 전화를 거니?》

《역에서요. 금방 도착했어요.》

《그러니 새벽차로 왔단말이냐? 그렇게도 빨리?!》

《어머니! 〈병위급〉이라고 하질 않았나요. 그래 지금 어떠세요?》

《오ㅡ 그거말이냐?··· 뭐 별일 없다. 이제 다 말해주지.》

《참 어머니두. 그런걸 난··· 괜히 속을 태우면서··· 차라리 전화라도 걸어주죠? 이 바쁜때에 글쎄···》

《됐다 됐어. 장창 바쁘지. 그건 그렇구 빨리 오기나 하렴. 너 배고프겠구나.》

그러자 불시로 피곤이 엄습해오는것을 느꼈다. 수련이 아무말없이 잠자코있자 말짱 잠이 깬 어머니의 목소리가 또 공명판을 지릉지릉 울렸다.

《수련아, 너 왜 그러니, 응?!》

《예. 곧 가요.》

수련은 시들히 대꾸하고나서 송수화기를 걸었다. 대합실을 나와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뻐스정류소로 걸어가려니 자꾸만 눈이 감기고 허리가 쑤시였다. 빨리 침대에 누워 한잠 늘어지게 자고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집에 들어서자 어머니가 별스레 반색하며 맞아주었다. 수련의 눈치를 흘끔흘끔 살피며 일생 다시없을 중대사때문에 거짓전보를 쳤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우선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고 그다음 한잠 푹 자라는것이였다. 성미가 뚝한 아버지와는 달리 상냥하고 재빠르고 알뜰한 어머니였다. 몸매 또한 날씬한데 나이에 비해 늙지도 않아 가끔 수련이조차 자기의 어머니를 놀랍게 쳐다보는것이였다. 동네사람들은 수련이가 신통히 제 어머니를 쏙 빼물었다고 말하군 했다. 지금 어머니는 구역관내의 밥공장에서 경리로 일한다. 한창나이 처녀시절엔 중학교 수학교원이던것이 오래전부터 건강을 구실로 교단을 떠났던것이다. 수련은 세수를 하고나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밥상을 차리던 어머니가 눈꼬리를 치뜨며 웃었다.

《참, 한가지 잊었댔구나. 네가 남포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너희 학년에 원명숙이라는 애가 있었지. 생각나냐?··· 거 왜 가야금을 타던 애 있지 않니.》

《오ㅡ 원명숙.》

《그애가 지금 교구양복점 재단사로 있더구나. 널 꼭 만났으면 하더라.》

《어머니.》하고 수련은 정색해서 물었다. 《그때문에 날 불렀어요? 거짓전보까지 치면서.》

《건 또 무슨 소리냐.》

《그럼 말해봐요. 거짓전보는 왜 쳤어요?》

외동딸인 수련이가 따지고들면 누구도 당해내지 못한다. 어머니는 하는수 없다는듯 수련이가 어렸을 때 그러던것처럼 코등을 살짝 눌러주었다.

《사실은 말야. 접대 내가 보여준 사진이 있지 않니. 왜 그 눈이 억실억실한 총각, 생각나지?··· 그 사람이 얼마전에 평양에 올라왔다. 원래 김책공대를 졸업하고 희천공작기계공장 현장기사로 배치됐는데 끝내 평양콤퓨터쎈터인가 하는데로 재배치받았구나. 아버지가 높은 간부여서 좀 힘써준 모양이다만 그 사람도 여간아니더구나. 의젓하구 똑똑하구···》

수련은 밥숟갈을 입에 문채 어머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지금 어머니의 생각은 온통 그에만 가있는것 같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딸의 혼사문제에선 이렇듯 극성스러운 법인지···

《난 싫어요.》하고 수련은 나직이 말했다. 《난 그런 사람 만나고싶지 않아요.》

《그런 사람이라니?··· 넌 아직 몰라서 그래. 그래두 그 윤철인가 하는 사람보다는···》

《그 동무가 뭐 어떻게요?》

《얘, 엇드레질말구 내 말 좀 들어. 넌 그래두 대학 최우등졸업생이지?》

《그 동무도 군관학교 최우등졸업생인데요.》

《그렇지만··· 그야 아직 소대장이구···》

《그럼 려단장이 될 때까지 기다리죠.》

《수련아!》

어머니는 의혹이 어린 표정으로 얄망스레 구는 딸을 쳐다보고있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서글픔이 담긴 질책의 눈길이였다. 그때 처음으로 수련은 어머니의 눈가에 뚜렷해진 주름살들을 스쳐보며 비로소 어머니도 늙기 시작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얼마간 수련이의 마음을 어수선하게 했다.

《됐어요. 어머니.》하고 수련은 한결 너누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두 뭐가 뭔지 모르겠어. 정말 지금은 그저 빨리 자고픈 생각밖에 없어.》

어머니의 얼굴에 비껴가던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지고 두눈이 따뜻이 빛났다.

《그럼 빨리 먹고 한잠 자거라.》

어머니는 딸의 어깨를 꼭 눌러주고는 출근준비를 하려고 급히 나갔다.

 

×

 

수련을 깨운것은 전실에 놓인 전화기였다. 그러나 수련은 달콤한 피로에 잠겨 따뜻한 이불속에서 일어나고싶지 않았다. 받지 않으면 그만두려니 했는데 누군가 지꿎게도 계속 종을 울리고있다. 하는수 없이 전화를 받으니 어머니였다. 급한 일이 있어 점심시간에 못들어가니 혼자 점심을 먹으라는것이였다. 수련은 그러마하고 또 이불속으로 기여들어갔다.

실컷 잤다. 인제는 누워있는것이 더 힘들어질 그때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귀에 선 녀자의 목소리였는데 자기를 원명숙이라고 한다. 아침에 어머니가 한 말도 있고 해서 수련은 그가 자기의 고등중학교동창임을 알고 반갑게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는 이어 그새 살아온 일들이며 직장과 주소, 가정과 남편, 옛동창들 소식 등 련달아 질문의 소나기를 퍼부었다. 그쪽에서 웃으며 말했다.

《수련아, 뭐 그럴게 있니. 좀 마주앉아 얘길 해보자꾸나. 네 문제도 의논할겸.》

《내 문제?》

《응, 그래. 나두 다 들었어. 네가 상화군병원에 배치받았다는걸. 에그ㅡ 그게 어디 될 말이니. 인물곱구 공부잘한 대학졸업생이 군병원 약제사라니. 얘얘, 너 그렇게 숙맥같이 굴줄은 몰랐구나야. 어떻게 해서든 평양에 배치받았어야지.》

《그렇지만···》

《됐어, 됐어. 요 새침떼기, 내가 널 모를라구. 예나 지금이나 고집스럽구 꽁한 네 성미야 어디 가겠니. 아무튼 만나서 얘길 좀 해보자. 수련이를 무슨 연구원같은데 뽑아올리게 힘써줄 사람이 있어. 알겠지?》

《?···》

수련은 금시 가슴이 두근거리는것을 느꼈다. 연구원같은데 뽑아 올린다구? 그렇게 힘써줄 사람이 있다구?··· 수련은 저으기 게면쩍어하면서도 은근스레 직장을 어떻게 찾아가면 되느냐고 물었다.

《아ㅡ 아니, 우리 직장 말구. 오래간만에 만나는데 맨숭맨숭 앉아있겠니?··· 너 은하수식당 알지? 제창 거기루 오렴··· 응, 5시까지, 내 기다릴게.》

약속한 시간이 가까와오자 수련은 어머니가 사준 새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 영광역에서 내려 음식점거리로 종종걸음을 하며 오가는 사람들을 새로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저들이 바로 수도평양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구럭을 든 녀인, 상점유리창을 기웃거리는 늙은이, 깔깔 웃으며 걷는 처녀들, 어린애를 안고가는 젊은부부, 수련이를 지나치다가 다시 뒤돌아보는 청년, 모두가 활기있게 서두르며 가고있다. 서두를 필요가 없는 늙은이들과 그들의 손에 이끌려가는 어린이들만이 바쁘지 않다. 늙은이들은 지금껏 걸어온 한생을 돌이켜보며 추억을 벗할 때가 되였고 어린이들은 먼 인생길을 위해 아직 걸음새도 든든히 다지고 더 많이 보고 듣고 익혀야 하기때문이다.

그늘진데 없는 사람들의 활기에 찬 모습이 오늘따라 수련이의 마음을 별스레 더 번거롭게 했다. 그도 저 사람들처럼 매일 이 거리를 지나 직장에 가고 저 처녀들같이 웃고 떠들며 수도에서 살고싶었다. 그라고 왜 이 훌륭한 창광거리와 화려한 극장, 상점, 지하철과 유원지, 인민대학습당과 연구원 등이 있는 수도의 생활을 바라지 않겠는가. 사람이란 노상 아무런 리기심도 없이 책대로만 살아갈수야 없지 않는가. 여기 수도의 의학과학원에서 연구사업을 하며 적으나마 의료보건사업에 보탬을 준다면 그것이 왜 자기를 위한것만이겠는가?!··· 아무튼 자기를 정당화할수 있는 근거들은 얼마든지 있다. 이제 와서 수련은 거짓전보로 자기를 불러온 어머니의 처사도 당연한것으로 생각했다. 누군가 자기를 위해 힘써줄 사람이 있다고 하던 원명숙의 말이 또 귀전에 쟁쟁했다. 누굴가, 명숙이 말한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가. 그는 무엇때문에 나를 도와나서겠다는걸가···

얼마후 수련은 은하수식당의 지하층계를 내려 적갈색의 유리문으로 들어섰다. 대번에 꿈의 세계와 같은 후덥고 아늑한 실내의 분위기에 잠겨들었다.

등황색의 불빛이 안개속에서처럼 희뿌옇게 실내를 감싸고있고 붉은색전등이 자극적으로 껌벅거리는가 하면 어데선가 연록색의 불빛이 물결치듯 고요히 흘러오기도 했다. 그 황홀한 빛의 세계에로 록음기에서 흘러나온 경음악이 심산의 물소리마냥 섞여들었다.

크고 작은 유리구슬이 줄줄이 드리운 구석쪽 간막이안에서 원명숙이 마주나왔다. 명숙은 그새 유족한 생활에 습관된 가정부인답게 풍만한 육체에 우아한 동작까지 몸에 밴 녀인이 되여있었다.

《수련이, 이게 얼마만이냐. 응?!》하고 명숙은 옷본보기책에 찍힌 녀자다운 모습으로 반색을 했다. 《그런데 어쩜 이리도 예뻐졌을가!》

수련은 한순간에 벌써 자기가 상상하던 기쁨과 즐거움이 멀리 메아리처럼 사라져가는것을 느꼈다. 자기와 마주선 그 녀인에게서 전날의 애교많던 맵시쟁이 녀학생의 모습을 찾으려고 헛되이 애쓰면서 수련은 중얼거렸다.

《정말 이게 명숙이 맞아?··· 어느새 이렇게···》

다음 순간 수련은 입을 다물고 주춤거렸다. 명숙이가 나온 간막이안의 식탁에서 허리를 펴고 일어서는 한 청년을 띄여본것이였다. 어데선가 꼭 본것 같은 모습이였다.

《참 인사들 해요.》하고 명숙이 수련의 손을 잡고 간막이안으로 잡아끌었다. 《오빠, 오빠가 보고싶어하던 그 수련동무!》

키가 크고 눈이 억실억실한 청년이 한발 앞으로 나섰는데 그 순간 그의 넥타이핀에서 새파란 불빛이 부서졌다.

《원명길이라고 하오.》

남성중음가수와 같은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어리둥절해진 수련이에게 눈인사를 하며 자리를 권하는 그의 태도는 점잖고 또 거만해보이기도 했다. 명숙이가 수련이의 솜옷이며 목도리를 벗겨 간막이걸개에 걸어주었다.

《어서 앉으십시오.》

원명길이 하는 말이였다. 수련이 몸둘바를 몰라하자 명숙이가 재빨리 귀속말을 했다.

《뭘 그러니. 그저 알고지내자는건데.》

비로소 수련은 이 원명길이라는 사람이 바로 어머니가 보여준 사진에서 낯을 익힌 청년이라는것을 깨달았다.

이 상봉의 리면에는 무엇인가 깜찍한 계교가 들어있는것이 분명했다. 당장 자리를 뜨고싶었으나 그 어떤 무력감이 그를 꼼짝 못하게 했다. 수련이를 훑어보며 재삼 자리를 권하는 원명길의 태도에는 무엇인가 처녀의 숫된 마음을 바싹 끌어당기는 자력같은것이 있었다. 다들 자리잡고 앉았다.

접대원이 다가오자 원명숙이 서둘러 안내표에 찍힌 료리명들을 이것저것 짚었다. 접대원은 물러갔다. 그때까지 아무말 없이 고개를 약간 숙일사하고 앉아있으려니 수련은 입술이 타드는듯 했다.

《뭐 거북해할건 없어.》하고 명숙이 말했다. 《우리 오빤 이미전부터 수련이를 알구있어. 자강도 산골에 배치받았기때문에 평양으로 옮길 때까지 말을 안냈을뿐이야. 또 수련이도 새삼스러울건 없을텐데··· 사진을 봤지?》

《···》

수련은 왜 그런지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하여 참을수 없었다.

갖가지 향기로운 음식내마저 그를 심히 자극하여 휘휘 머리를 돌게 하는듯싶었다. 자기와 마주앉은 원명길이 겉멋을 부리지 않고 별스레 친절을 표시하지 않는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는 마치 녀자들과 마주앉아 서로 눈치를 봐가며 귀맛좋은 소리나 소곤거리는것을 아주 천하게 여긴다는듯 한 태도였다. 그 무심한 거동,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어투 그리고 얼핏 스쳐보군 하는 찌르는듯 한 눈빛 등 이 모든것이 녀성들과의 성공적인 교제에서 터득한, 하여 인제는 몸에 밴 습관이라는것을 아직 수련은 알지 못하고있었다.

《참 수련인 상화군병원에 배치받았다지?》하고 명숙이 오빠있는쪽으로 의미있는 눈길을 던지며 말했다. 《어쩜 그럴수 있을가, 대학 최우등졸업생을 군병원약제사로 배치하다니. 하지만 뭐 일없어. 이제 의학과학연구소라든가 어데 수련이 맘나는데가 있으면 말해. 그럼 우리 아버지가 힘써줄수 있어.》

《쓸데없는 소리!》

원명길이 그 특징적인 성량이 풍부한 목소리로 나무랐다.

《뭘 그래요. 오빠! 난 수련이를 위해 그러는건데··· 나도 이제 의사선생신세랑 지구··· 그럼 뭐 나쁠게 있어요?》

《의사선생신세를 지지 않을수록 좋아!》

《아유. 장담말아요. 오빠!··· 그러다 이제 우리 수련선생신세를 톡톡히 지게 될지 알겠어요?!》

《뭐 그럴리야. 아직 한번도 젖은 수건이나 알약따위는 모르고 살아왔는데.》

어느새 식탁이 꽉 찼다. 주고받는 말들은 유치했어도 식탁의 료리들은 훌륭했다. 얼핏 보매 누구인가 자기의 정신적빈곤을 풍성한 식탁으로 메우려 한것 같다. 맥주도 나왔다.

《이건 청량음료야.》 먼저 명숙이가 제앞에 놓인 잔을 들면서 애교있게 눈웃음쳤다. 《수련이, 무엇을 위해 들가?》

그는 이미 그 대답도 준비해두었던 모양이다. 한팔을 쑥 내밀며 《자, 우리의 상봉과 우정을 기념하여!》하고 웃으며 말했던것이다.

수련이도 잔을 쫗지 않을수 없었다. 잔들이 기분좋게 쟁강거렸다. 원명길이 내민 잔에 손을 가져가며 처음으로 눈길이 마주쳤을 때 수련은 무엇때문인지 가슴이 후두둑 뛰는것을 느꼈다. 그를 거부하고 뿌리치려 하면서도 어쩔수 없이 끌려가는 이 무서운 호기심,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수련은 처음 한모금을, 이어 명숙이의 강권에 못이겨 또 한모금 두모금을 같이 마셨다.

경음악이 울려퍼졌다. 울긋불긋한 불빛들이 그 음악선률에 맞추어 들뛰기 시작했다. 수련은 가슴속으로 흘러드는 뜨거운 피의 흐름을 의식했다. 명숙이가 료리점들을 집어주었다. 수련은 그의 친절에 대한 인사로 무슨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불쑥 꺼냈다는것이 그의 남편과 가정에 대한 질문이였다. 흔히 가정을 이룬 많은 녀성들이 싫증을 느끼지 않고 얼마든지 끝없이 이야기할수 있는 화제였다.

명숙이 웃어대며 떠들기 시작했다.

《참 수련이, 너도 이제 겪어보면 알겠지만말이야. 녀자가 가정의 행복을 유지하자면 우선 우둘렁거리는 남편을 굴복시켜야 해. 남자들이란 다큰 애기들이나 같아서 이따금 동무들이 왔을 때나 체면을 세워주면 돼. 왜냐 하면말이야···》

명숙은 말하며 먹어대고 원명길은 가소롭다는듯 웃으며 식탁의 빈잔들을 자꾸 채웠다.

《아니야. 가정이란 의무와 약속이야.》하고 마침내 듣다 못해 원명길이 끼여들었다.

《우리 시대 가정의 기초엔 바로 의무와 약속이 놓여있어야 해. 수련동무, 어떻습니까. 내가 말하는 의무와 약속이란 바로 동지적협조정신을 의미하는것인데 그것이 제일 중요한것이 아닐가요?》

후날 수련은 그때 자기가 무슨 말로 어떻게 대답했던지 종시 기억해내지 못했다.

원명길은 굵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갖가지 인생문제며 사랑과 가정에 대한 자기의 철학을 시내물처럼 끝없이 이어갔다.

끝내 수련은 눈을 감고야말았다. 명숙이 그의 어깨를 껴안으며 《너 왜 그러니. 어디 말째니?》하고 물었다. 수련은 머리가 휘휘 돌고 속이 메슥메슥하여 더는 참을것 같지 못했다.

《가야겠어. 난··· 정말 미안해요.》

그러자 명숙은 그를 안아일으키며 원명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오빠, 부탁한 차가 와있나 나가봐요. 어서!》

이윽고 수련은 명숙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섰다. 밖은 이미 어두웠었다. 원명길이 동생을 거들어 수련이를 차에 태웠다. 명숙은 앞좌석으로 옮겨갔다. 잠시후 승용차는 갖가지 현란한 불빛으로 장식된 창광거리를 누비며 달려갔다. 수련은 자기가 어데로 실려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원명길의 굵은 팔뚝이 자기를 받쳐주고있다는것을 가까스로 의식했을뿐이였다. 몇번이나 그것을 밀어내려고 헛되이 애쓰다가 그만 맥이 진하고말았다.

드디여 불같이 달아오른 뜨거운 손바닥이 어깨를 휘감고있는것을 느꼈다. 수련은 소스라치듯 했다. 숨막히는 흥분에 온몸의 피가 길길이 뛰여오르는듯 했다. 자기의 몸에 닿는 지꺼분한 느낌에 몸서리치며 그는 무섭게 속삭이였다.

《차를 세워요!》

차가 멎었다. 명숙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왜 그래 수련이! 이대로는 집에 못가. 우리 집에 가서 좀 머리를 식혔다 가자. 한시간후엔 차로 보내주겠어.》

수련은 아무말 없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순간 눈앞이 핑 돌고 목구멍 가득히 욕지기가 치밀어오르는것을 느꼈다. 가까스로 혀를 깨물며 앙버티고있으려니 목구멍이 죄여들어 숨을 쉴수가 없었다. 명숙이가 밖에 나와 그를 붙안으려고 했다. 그 순간 수련은 가늘게 부르짖었다.

《다치지 말아!》

날카로운 부르짖음이였다. 그것이 어찌나 낮고 새되고 서리발같이 예리하고 독살스러운것이였던지 명숙은 쳐들었던 손을 까드린채 굳어져버리고말았다.

수련은 콕콕 찌르는 찬바람을 헉헉 마시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걸어가면서 이를 악물고 참을길 없는 혐오와 구역질나는 느낌으로 자기자신을 매질하고 저주하였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어찌 되여 내 이런꼴이 되고말았느냐?··· 아니 그 누구의탓도 아니다. 나자신이 그걸 바랐고 찾아갔던것이다. 순간의 유혹에 끌려 이 모양, 이 꼴이 되여버린것이다. 아아! 만약 이런 꼴을 아버지가 보신다면··· 얼마나 놀라고 또 슬퍼할것이냐. 그리고 그 동무가, 그 윤철동무가 이걸 안다면 뭐라고 할것인가··· 진저리치며 물러설것이다. 그자리에서 침을 뱉고 돌아설것이다. 그리고 더는 돌아보지도 않을것이다. 더는!···)

언제부터였는지 그의 눈가에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있었다. 수련은 그것을 씻지 않았다. 달려오는 차들의 전조등불빛이 그 진한 눈물을 순간순간 번뜩이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