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6

 

제 4 장

6

 

성실은 벌써 한달가까이 과학원에 출근한다.

무엇때문에?··· 그 자신도 모른다. 이젠 누구도 그의 연구사업을 믿는 사람이 없다. 새로운 과제를 맡길것이다. 어차피 그렇게 될것이지만 과학자인 그의 량심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지루히 시간을 끌고있는가.··· 성실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흘러보내는 나날이 천추같았다. 하루빨리 이 허무한 생활이 끝장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누구도 그에게 관심하는 사람이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였다. 어제 실장은 연구소에 성실의 문제를 다시 제기했는데 기다리라는 말밖에 들은게 없다고 했다. 성실은 농업위원회와 연구소 부소장의 부당한 처사를 생각하면 울고라도 싶었다. 그 랭담한 인간들때문에 자기의 연구사업을 진심으로 돕던 사람들까지 애매하게 피해를 당하지 않았던들 연구사업을 포기했을가? 괴로운 마음은 그뿐만이 아니였다. 성실은 리미액연구사업을 하는 기간 가정부인으로서 안해다운 구실도 변변히 못했다. 1년 12달 가정을 떠나 노상 실험실과 실험포전들에 나가살다싶이 한 성실의 눈앞에는 평양으로 떠나오기 앞서 남편이 《당신은 리미액연구사업을 관두면 두번다시 과학연구사업을 못해! 과학자로서의 당신의 인생은 끝장나고마오.》하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던 모습도 다시금 눈물겹게 떠올랐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남편의 그 충고가 백번 옳았다고 생각되였다.

(내가 너무 경솔했어.)

성실은 그런 나약한 자신에 대한 후회로 잠 못 이루다가 잠간 눈을 붙인사이 꿈까지 꾸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4살난 영남이가 자기를 보고도 별로 반가와하는 기색이 없다가 《엄마, 〈땅크〉 사완?》하고 물었다.

언제부터 영남이가 졸라대는 완구를 사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늘쌍 깜빡 잊군 한 성실은 당황히 아들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영남아, 다음번엔 꼭 사줄게》

《거짓말! 엄만 리미액밖에 몰라.》

성실은 꿈에서 한 아들애의 말이 너무도 가슴에 맺혀 울적한 마음에 잠겨있다가 오늘 아침에야 연구소 부소장이 불러 그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부소장은 이미 리미액연구사업을 제껴놓은 일군의 태도로 틀지게 앉아서 말했다.

《동무도 알다싶이 지금 어느 농장에서나 복합미생물비료에 대한 호평이 대단하오. 이제 균을 확정배양하고 생산체계를 세우자면 10년이 걸려도 될지말지 한 리미액을 구태여 연구할 필요가 있겠소?》

성실은 여태껏 자기의 연구사업을 반대한 사람들의 판에 박힌 설교가 역스러워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복합미생물은 이미 1980년대에 어느 한 나라 과학자들이 연구개발한 성장촉진제였다. 그후 복합미생물에 의한 농업생산은 세계적추세로 되고 그 나라는 그 성능이 좋은 미생물비료의 유일보유국으로 되였다. 그들은 10년도 못되여 또다시 복합미생물보다 농작물들의 성장에 훨씬 효과적인 미생물을 발견하여 련이어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성실은 그 사람들이 독점하고 거액의 폭리를 노리는 바로 그 새로운 미생물을 자체로 만들기 위해 3년동안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나라 학자들은 조선에서 리미액을 연구한다는 말을 듣고 당신네야 복합미생물도 사서 쓰지 않는가, 어방도 없는 꿈을 꾸지 말고 리미액종균을 팔아주겠으니 당신네 나라에서는 흔한 물만 쓰라고 하였다.

하지만 성실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배심으로 자기의 연구사업을 내밀어왔다.

그런데 왜 이렇게도 제 사람들까지 한사코 앞을 막아나서는지 알수 없었다.

《부소장동지, 물론 우린 복합미생물비료만으로도 얼마든지 농사를 지을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 오늘과 같이 어려운 시기에 한푼의 외화도 투자하지 않고 우리의 기술과 원자재로 보다 유익한 미생물을 만들어쓰자는겁니다. 저도 이 연구사업이 힘에 겹습니다만 가능성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건 좀 더 두고 봐야지 않습니까?》

《성실동무, 너무 고집하지 마오. 우리도 동무의 문제를 심중히 토론했소.》

부소장의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얼굴에서는 랭기가 풍겼다.

《아닙니다. 부소장동지의 말씀이 진실이라면 무엇때문에 저의 연구사업을 돕고 지지하던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줍니까. 동지들이 당한 그런 가슴아픈 일만 없었어도 전 연구사업을 포기하려고 맘먹지 않았을것입니다. 전 리미액의 전망이 암담하여 물러선건 결코 아닙니다.》

《건방진 소리 마오.》

부소장이 성실의 반발에 열이 올라 책상을 탕 쳤다.

《동무, 괜히 누굴 걸고들지 말고 동무처신이나 똑바로 하오. 동무가 강동군농장의 논판에 리미액을 쳤지만 무슨 소득이 있소? 3년동안 연구했다는 리미액이 아무런 효과도 없잖소!》

《그건 리미액을 뿌린 이튿날 소낙비가 와서···》

《그따위 떨떨한 소린 하지도 마오. 농업위원회 과학기술국에선 왜 되지도 않을 리미액을 치게 하는가구 왁작 떠드오. 정말 동무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을 지경이요. 자강도 농촌경리위원회 한 처장은 뭐라는지 아오? 리미액때문에 다른 비료 못친다고 동무를 빨리 데려가라고 야단이요. 그래서 동무를 불러올린거요.》

《아닙니다!》

성실은 너무도 악이 받쳐 고함을 질렀다.

《여기엔 리미액연구사업을 중단시키려는 무서운 모략이 숨어있습니다!》

《모략이라구? 동무, 제발 소가 웃다 꾸레미 터질 소린 하지도 마오.》

낯빛이 푸르딩딩해 일어난 부소장은 가방을 끼고 방에서 훌쩍 나가버리였다. 성실은 너무 무참하여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쩌면 이럴수 있는가? 어쩌면··· 두손으로 얼굴을 싸쥔 그는 복도로 와락 뛰쳐나갔다. 부소장도 한때 과학에 종사하던 사람인데 이렇게도 과학자의 고충을 몰라줄수 있는가. 성실은 자기의 연구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때문에 고심하던중 지난봄 강동군 농장의 논에 리미액을 시험적으로 뿌리고 자강도에 들어가서 장강, 중강, 고산진을 비롯한 여러개 군의 농작물에도 적용해보았었다. 두석달이 지나자 확실히 리미액을 도입한 포전의 벼와 강냉이들의 작황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성실은 너무 기뻐 때식도 잊고 시험포전들에 나가서 살다싶이 했다. 장강에서 중강까지 이삼백리 잘되지만 그길을 북나들듯 뻔질나게 오갔다. 꼭두새벽에 장강을 떠나 인심좋은 운전사들이 로상에서 자동차를 태워주면 다행히 차신세를 지고 그렇지 못한 날에는 도보로 중강에 당도했다. 편리화의 신발창이 떨어져 새끼오라기로 동여매고 절룩절룩 걷군 한 때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런데 유독 강동군 농장만은 감감 무소식이여서 관리위원장에게 전화로 알아보니 별반 효력이 없다는것이였다. 성실은 이틀후에야 중앙기상수문국에 부탁하여 리미액을 뿌린 날 밤 평양일대에 소낙비가 내린 사실을 알게 되였다. 리미액은 소낙비에 희석되여 버린게 틀림없었다. 그 엄연한 증거가 있는데도 부소장은 주견이 없이 남의 장단에 춤추며 리미액연구사업을 중단시키려고 몸살이 나게 소동을 피운다.

성실은 과학자의 꿈과 량심을 짓밟히며 사느니 차라리 학계를 떠나 마음 편히 땅 파는 일이라도 하고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그는 당장 밤차로 떠날 작정을 하고 일찌감치 시내의 완구상점으로 찾아갔다.

어제밤 꿈속에서 영남이가 《어머닌 리미액밖에 몰라.》하던 말이 생각나 눈물이 고여올랐다. 내가 이렇게 중도에서 집어던질 연구사업을 위해 3년동안이나 어린것들을 버리고 드달려다니였던가. 완구상점에서 문을 닫기전에 부랴부랴 서둘러 영남이가 그리도 좋아하는 《땅크》를 사서 가방안에 넣고도 성실은 기쁜 마음보다는 서러움이 앞서 발길을 옮기지 못했다.

평양ㅡ만포행렬차는 연착이 되여 이튿날 한낮이 훨씬 지나서야 강계에 도착하였다. 장밤 렬차에서 시달리고 집에 들어선 성실은 또다시 뜻하지 않았던 일에 깜짝 놀랐다. 7살난 딸애가 방바닥에 누워있는 제 동생을 마구 흔들다가 성실이가 나타나자 왕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야ㅡ 영남이가···》

《영남이가 어떻게 됐다는거야?》

성실은 가방을 내던지고 방으로 올라가 영남이를 덥석 안았다. 어린것의 머루알같던 눈동자는 정기를 잃고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얘가 왜 이래?》

《아침부터 배아프다며 막 울었댔어》

《영남이가 뭘 먹언?》

성실은 다급히 물었다. 겁에 질린 딸애는 말 못하고 엉엉 울기만 하였다. 성실이가 재차 안타깝게 큰소리를 질러서야 딸애는 눈물을 흘리며 고간안의 자루를 들고왔다.

《엄마, 영남이가 불쌍해. 엄마가 감춰둔 이 쌀로 밥해줬어.》

《뭐라구? 이안에 무슨 쌀이 있다구 그래?》

성실은 지난 봄에 네댓kg 구해온 쌀을 아껴가며 아이들에게만 먹인 일이 떠올라서 얼른 자루목을 열어보았다. 그때 말끔히 먹어버린줄로 알았던 쌀이 자루밑굽에 한줌도 되나마나 하게 남아있었다. 몇달동안 누기찬 고간안에서 쌀은 시커멓게 썩어 곰팽이냄새가 풍겼다. 내가 그렇게도 쌀고생을 하면서 이걸 잊어버리다니··· 철없는 딸애가 그 썩은 쌀도 쌀이라고 제동생에게 밥을 해먹인 일이 죄다 자기 잘못같았다. 다 내탓이야! 가정을 팽개치고 온통 연구사업에만 정신이 팔려버렸던 성실은 기가 막혀 눈물을 쏟다가 방에서 와락 뛰여나갔다. 다급한 생각에 쫓겨 동진료소로 달려간 그가 왕진을 청하고 다시 돌아오니 영남은 눈을 멍히 뜬채로 그냥 누워있었다. 성실은 아이옆에 꿇어앉아 《영남아, 영남아!》하고 부르짖다가 뒤따라 방으로 들어온 늙수그레한 동의사를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선생님, 우리 영남이가 왜 이래요? 영남이가···》

로인은 방바닥의 자루옆에 흩어진 썩은 쌀알들만 덤덤히 바라보았다.

《애한테 저걸 먹였구만.》

《내가 출장간사이에 딸애가 글쎄···》

《애아버진 없소?》

《있어두 밤낮 공장에 나가 살다보니··· 그렇게 됐겠지요.》

성실의 말을 들은둥만둥하며 로인은 어느새 영남의 곁에 침착히 붙어앉아 침치료에 여념이 없었다. 의술이 용하기로 소문난 로인의 침이 효력을 봐선지 얼마후엔 영남의 눈시울이 가늘게 떨었다. 동진료소의 간호원이 점적대를 들고 급히 들어와 점적을 할 때에는 눈이 말똥해서 어머니를 알아보았다.

《엄···마, 왜··· 이제야 완?》

말 못하는 성실의 눈물방울이 영남의 볼우에 떨어졌다. 성실은 그 눈물을 닦아내고 자기의 볼을 꼭 갖다대였다. 오래간만에 만난 아들의 볼은 싸늘했다.

《영남아, 왜 이렇게 차니?》

《엄만 따뜻해··· 다시 가지마.》

《안간다. 가지 않으마.》

《엄마, 〈땅크〉 사완?》

《사왔다.》

성실은 가방안의 완구를 얼른 꺼내여 아들의 가슴우에 놓아주고 마구 흐느꼈다. 영남의 눈귀에서도 자그마한 이슬방울이 반짝였다. 그것은 영남이가 남기고 간 마지막 생명의 불꽃이였다. 하지만 한뉘 미생물밖에 모르며 살아온 성실은 그런줄도 몰랐다. 영남은 점적바늘을 꽂은지 30분도 못되여 잠자듯이 다시금 눈을 소르르 감았다.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오싹해진 성실은 의사의 팔을 잡고 영남이를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동의사는 잠자코 앉아서 한숨만 내쉬였다.

《아주머니, 병을 너무 길렀소. 아이는··· 잘못됐수다.》

《아니예요.··· 그럴수 없어요.》

성실은 아들의 조용한 얼굴을 넋없이 바라보았다. 영남이는 자고있다. 자는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좀전보다 아들의 볼이 더 찼다. 숨진 아들의 량볼과 이마를 쓸어만지며 눈물을 흘리던 성실은 그제야 곡성을 터뜨리였다.

《아니··· 아니예요. 우리 영남이가 죽다니··· 그럴수 없어요!》

성실은 갑자기 영남이를 와락 그러안았다. 누가 자기의 품에서 어린것을 빼앗아 갈가봐 겁난듯이 그렇게 꽉 껴안았다. 그리고는 아들을 안은채 정신을 잃고 까무라쳤다. 밤중에야 겨우 의식을 차린 성실은 《우리 영남이가··· 영남이가···》하며 방안을 두릿두릿 살폈다. 그러나 영남인 없고 머리를 푹 떨군채 우두커니 앉아있는 남편의 모습만 흐릿하게 보였다. 영남이가 어디로 갔는가요?··· 성실의 넋빠진 물음에 남편은 아무 대꾸도 없었다. 말없이 담배만 피우는 남편, 지독한 술냄새··· 미칠것만 같았다. 성실은 밖으로 와락 뛰여나갔다. 생눈을 뽑아가도 모를 어둠이 갑자기 그를 에워쌌다. 성실은 자기 몸을 꽁꽁 묶어놓는듯 한 어둠을 뿌리쳐버리듯이 휘청거리는 서슬에 토방에 무르팍을 찧고 풀썩 엎어졌다. 뼈가 바스라지는것 같은 아픔에 이발을 사려물고 악을 쓰며 일어섰다. 그의 입안에서 다시금 울음이 터져나왔다. 성실은 목구멍을 찢어발기는듯 한 슬픔에 태질을 하며 얼굴을 싸쥐고 제 정신같지 않게 절뚝거리는 다리를 옮겨디디면서 뒤산을 향해 달려올라갔다. 이 캄캄한 산중의 땅속에 영남이가 묻혀있다는 절망감이 그의 마음속에서 눈물을 동이로 퍼내였다. 영남아!··· 성실은 애간장이 마르게 부르짖으며 향방없이 여기저기로 달려다니였다. 그는 두손으로 잡관목을 마구 헤치면서 정신없이 그밑의 땅을 눈더듬해보았다. 어디, 어디에 영남이가 누워있는가? 아들의 곁에 앉아 온밤 그를 지켜주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싶어 꺽꺽 눈물을 삼키며 허둥지둥 찾아다니느라 나무가지에 얼굴이 할퀴고 치마자락이 찢어지는줄도 몰랐다. 수림을 와스스 흔들어대는 차디찬 밤바람에 실려 어디선가 우워ㅡ 우워ㅡ 승냥이의 울음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성실은 느끼지 못했다. 무심한 하늘에서 뭇별들만이 그의 슬픔을 알아주듯이 오돌오돌 떨고있었다. 한치앞도 가려볼수 없는 산등성이와 골짜기에 나딩굴다가 다시 일어나 땅바닥을 샅샅이 훑던 성실은 실성한 녀인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내가 영남일 죽였어. 내가!···》 하고 넋없는 소리를 질렀다. 순간 그는 어망중에 문득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마침내 희미하게 생흙을 덮어놓은 자리가 눈에 띈것이였다. 성실은 맨손으로 피가 터지게 흙을 파헤쳤다. 그러다가 또다시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자기가 산으로 올라올것 같아서 남편이 일부러 그렇게 흔적을 만들어놓은게 분명했다. 집으로 돌아온 성실은 영남이를 내놓으라며 남편의 가슴을 마구 쥐여뜯었다.

그때였다. 성실은 눈에서 불이 번쩍 일었다. 남편이 넙적한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되게 후려쳤다.

《아니? 당신이···》

성실은 두손으로 자기의 얼얼한 볼을 감싸쥐고 눈물이 그렁해서 남편을 쳐다보았다. 아직 남편한테서 싫은 소리 한번 들어본적이 없는 성실은 눈앞의 일이 믿어지지 않았다.

《당신이 이렇게도 나약한 녀자요? 이래서 당신이 연구사업도 중단하지 않았는가 말이요!》

성실은 아무런 항변도 못했다. 남편의 성난 눈에서 번뜩이는 눈물이 너무나도 많은것을 말해주었다. 그것은 나약한 안해에 대한 불만이자 남편의 가슴속에서 뜨겁게 끓어번지는 사랑이였다. 그러나 성실은 평범한 나날에는 모르고 지냈던 그 행복한 감정속에 오래 잠겨있을 사이가 없었다. 눈앞이 가물가물 흐려지는것을 느낀 성실은 방구석의 완구를 집어들며 《여보, 이걸 같이 묻어줘요. 영남이가 가지고 놀게···》하고는 방바닥에 꺼꾸러졌다.

그가 다시 의식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남편이 곁에 없었다. 그의 몸에 포근히 덮여있는 담요와 베개에서만이 남편의 변함없는 마음이 따스히 느껴졌다. 머리맡의 종이장에는 《당신의 부탁대로 했소. 너무 락심마오. 아무튼 우리는 이 슬픔을 딛고 일어서야 할 사람들이 아니오. 난 공장으로 나가오.》라고 또박또박 씌여져있었다. 종이장을 쥔 성실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남편이 자기에게서 무엇을 바라는가를 그토록 절통하게 깨달은것이였다. 성실은 자기의 연구사업에 귀여운 아들을 바친 녀성이였다. 사랑하는 아들의 생명과 바꾼 연구사업인데 내가 그 소중함을 알지 못하고 주저앉다니?··· 남편의 말이 옳았다. 이 뼈를 깎아내는듯 한 슬픔을 딛고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 일어서야 한다! 부소장이 자기의 연구사업을 중단시켰지만 무슨 상관인가? 내가 이만한 난관을 이겨낼 각오도 없이 과학연구사업에 발을 들여놓았던가. 과학원을 떠난다고 연구사업을 못한다는 법도 없다. 리미액의 성공을 위해 너무도 큰것을 잃어버린 성실은 이발을 사려물고 당장 강동군농장으로 찾아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부소장은 리미액이 아무런 효력도 없다고 쓴 웃음을 지었지만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지 않다는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리라 강심을 먹었다. 부소장이 제아무리 소낙비에 리미액이 씻겨버린것을 부인해도 성실은 반드시 그 엄연한 사실을 실증해주는 증거를 보게 되리라고 믿었다. 가다가 중도에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찾아가자! 그것만 확증되면 그 누가 리미액의 연구사업을 헐뜯어도 신심을 가지고 다시금 연구사업을 힘있게 내밀수 있었다. 금방 아들을 땅에 묻고 또다시 연구사업에 나서는 자신이 미친 녀자처럼 생각되였으나 성실은 남편에게 자기의 새로운 결심을 말한 다음 그밤으로 평양행렬차에 올랐다. 그가 강동군농장에 도착한것은 이튿날 거의다 저물어가는 해질무렵이였다.

저녁노을에 찢어진 구름장들의 가생이가 한창 피빛으로 붉게 물들어가고있었다. 성실은 마치도 자기의 가슴속 상처에 엉켜붙은 선혈을 바라보는것처럼 처절한 심정에 잠겨 넋없이 서있었다. 그아래의 무연히 펼쳐진 논판들은 텅 비여있었다. 벌써 가을하여 벼를 몽땅 거둬들인것이였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을가? 휑뎅그렁한 논판은 그의 귀중한 연구사업을 묻어버린 황무지와도 같았다.

(내가 이렇게 헛걸음을 하자고 천리길을 찾아왔는가?)

성실은 잠시 그런 뼈저린 생각에 눈물이 솟아오르는것을 느끼다가 편리화를 신은채로 논판에 뛰여들었다. 비록 가을한 논판이였지만 벼그루들은 남아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긴장해서 벼그루를 살펴보았다. 벼대들이 실하지 못하고 아지치기도 시원치 않았다는것이 알렸다. 다른 논판에 가봐도 마찬가지였다. 성실은 다시금 뿌리의 발육상태를 관찰하려고 벼포기를 힘껏 잡아채였다. 논판에 단단히 박힌 벼그루는 좀체로 뽑히지 않았다. 여기저기 뛰여다니며 겨우 찾아낸 꼬챙이로 한참이나 땀투성이가 되여 논판을 파헤쳐서야 간신히 뿌리를 뽑아냈다. 예견한대로 여느 논의 벼보다 뿌리가 길고 빛갈도 희읍스름했다. 리미액을 적용한 농작물에서 일반적으로 찾아보게 되는 장점이였다. 단지 발육이 왕성하지 못할뿐이였다. 비에 씻겨내린 가슴아픈 후과였다. 부소장이 이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는가? 리미액반대자들의 가혹한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듯이 성실은 꽉 움켜쥐였던 벼뿌리를 논판에 힘껏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다시금 다른 벼그루를 뽑아들고 뿌리의 발육상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벼뿌리를 한줌 움켜쥔채 논뚝에 나와 풀썩 주저앉았다.

아, 저주로운 소낙비! 하지만 그보다 가증스러운것은 자기의 연구사업을 무작정 짓밟아버리는 사람들이였다. 성실은 저도모르게 괴여오르는 눈물을 훔치며 그만 움쭉 일어났다. 그가 이날 시외뻐스를 타고 과학원합숙으로 찾아갔을 때는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지고있었다. 강계로 내려간지 사오일도 못되여 다시 나타난 성실의 흙매닥질한 옷이며 신발을 보고 호실처녀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서 쳐다보았다. 금방 과학의 문전에 들어선 이 풋병아리같은 처녀들이 성실의 마음속에 피덩이처럼 엉켜붙은 고심을 어떻게 알수 있겠는가. 성실이가 오늘 이 합숙으로 찾아온것도 다름이 아니였다. 래일 당장 과학원일군들과 결판을 보고 괴로운대로 학계를 떠날 마음이였다. 리미액미생물의 성공을 위해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이튿날 조용한 시간에 소장을 찾아가려니 어쩐지 자꾸만 망설여지면서 홀로 남몰래 한숨만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