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5

 

제 4 장

5

 

혜경이네 일행이 김책제철소로 떠난후 갑자기 장관우부위원장이 팔을 걷어붙이고 파철수집의 된바람을 일으키며 과따치는통에 강계시안의 공장들은 벌집을 헤집어 놓은것처럼 법석 들끓었다. 보나마나 강재때문에 골탕을 먹게 될건 불보듯 뻔하다, 공장을 빡 쓸어서라도 발전소건설에 필요한 강재를 시급히 걷어모아야 한다는 그의 목소리는 생산현장 그 어디서나 뜨겁게 울렸다. 사날 지나자 공장들의 구내는 쇠꼬챙이 한오리 찾아볼수 없을 정도로 반반해졌다. 그래도 파철예비를 찾아내라는 장관우의 벼락같은 요구는 그치지 않았다. 허명철이네 기계공장에 나타나서는 눈알이 튀여나오게 자재과장을 닦아세웠다.

《파철이 없다는게 말이 되오? 강계시 아빠트들에 나가보면 열에 한 집은 출입문을 철문으로 중무장했소. 헛간지붕에도 철판을 씌운 집들이 많구. 그게 다 동무네가 자재관리를 떨떨히 하여 새나간 철판이란 말이요. 우리는 그 보기도 싫은 철문을 몽땅 뜯어서라도 발전소를 건설해야 하오!》

장관우가 한바탕 으름장을 놓고 돌아서가는 모양을 아연히 지켜보던 허명철은 벙어리장갑을 낀 손으로 코밑을 쓱 문대였다.

(본때나는걸!)

명철은 산소통을 로케트포탄처럼 삐죽이 실은 손달구지를 밀고 제관장으로 다시금 스적스적 걸어갔다.

안변청년발전소건설장에서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겪었다고 뽐내는 그였지만 장관우의 기상에 압도되여 어깨가 축 처졌다. 저런 일군과 엇서며 은희를 사랑하다니··· 대관절 승산이 보이는 일인가? 하기야 내가 사랑이란게 뭔지 알고 은희를 맘속에 뒀던가. 남들은 일생의 길동무로 삼을만 한 사연이 있어 사랑한다지만 자기와 은희사이에는 아무런 특별한것도 없었다. 은희가 현이의 제일 가까운 동무이니 괜찮은 처녀일것이다. 그렇게 그의 눈에 비껴들기 시작한 은희는 지내보니 마음도 곱고 성격도 쾌활했다. 그밖에 다른 무엇이 있었던가. 그렇게 덜퉁하게 은희를 사랑한 명철은 자기의 찬찬하지 못한 성미때문에 졸경을 치루는 심정이였다. 은희가 녀성돌격대 중대장이랍시고 으시댔지만 그것도 두고봐야 할 일이였다. 은희의 말처럼 만사가 척척 제대로 되여주겠는지··· 제관장에 도착하여 성수가 나지 않는 일감을 붙잡고 씨근거리던 명철은 화김에 손에 쥐였던 함마를 훌 내던졌다.

(제길, 또 오작을 냈군.)

《명철이, 오늘은 왜 생콩씹은 상을 하구 그래. 은희와 다툼질이라도 한게지?》

한 작업반의 늙수그레한 제관공이 돋보기너머로 그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명철은 아바이가 어디서 얻어들은 소리를 탕탕 하는지 몰라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바이, 함부로 그런 말씀을 마시우다. 그렇지 않아도 장관우부위원장이 공장안에서 빙빙 돌아가는데···》

《원, 녀석, 겁두 많다. 군대물서껀 먹었다는게··· 일이 안될 땐 나가서 바람이나 쐬는게 좋아.》

명철은 슬그머니 제관장밖에 나가서 퍼더앉았다. 군대물을 먹었는데 겁이 많다구? 순간 돌멩이를 집고 내던지려던 명철의 손은 허공에서 굳어졌다. 몇발자국앞의 구내에 장관우와 마주 선 완성직장장이 허리를 갑삭거리며 귀맛좋게 엮어대였다.

《아무렴, 자동선을 해야 하구 말구요. 우린 정말 머리털이 셉니다요. 생산은 계속 미누스인데 자동선이 제대로 돼줍니까. 이달에도 계획을 하긴 코집이 틀렸습니다.》

《여보, 촌령감같은 케케묵은 소린 그만하오. 생산을 잘하자니까 자동선도 하는게 아니요? 듣자니 요즘도 못돼먹게 자동선을 걸고들며 개별기대로 되돌아가자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장관우가 눈심지를 돋구며 되게 답새겨대자 바빠맞은 직장장의 입에서 또 발라맞추는 소리가 나왔다.

《그럴리 있습니까. 그건 걱정마십시오. 내가 몇해 직장장을 해먹겠다구 부위원장동지앞에서 허튼 소릴 하겠나요.》

장관우가 그 말을 들은척도 안하고 지배인실쪽으로 가버린후였다. 명철은 장관우의 뒤모습을 마뜩지 않게 흘끔 가릅떠보는 직장장을 향해 급히 뛰여가며 물었다.

《직장장동지, 성진형을 못봤습니까?》

《동문 왜 만날 성진형님, 형님 하면서 쫓아다녀? 그렇게도 할 일이 없어?》

직장장이 시펄뚱해서 꽥 소리를 쳤다.

《말두 못하겠나요. 직장장동진 별나군요. 성진형덕분에 자동선을 만들면서 개 닭 보듯 하니 말입니다.》

《여, 개뿔두 모르면서 뭘 그래? 자동선이 된대? 처가 평양으로 갔다는데 따라가기나 할것이지.》

명철은 직장장의 가시돋힌 말을 듣고 덤벼들듯이 내쏘았다.

《직장장동지, 그것두 말이라고 합니까. 남의 어려운 사정을 도와주지 못할망정···》

직장장은 그제야 자기의 실언을 깨닫고 얼굴이 벌개서 얼버무리였다.

《됐어됐어. 나도 그 사람이 녀편네없이 홀애비생활을 하는걸 보기가 딱해서그래. 어젠 먹을게 떨어져 위원의 친척집에 찾아갔다니 안됐거던···》

명철은 진심인지 침발린 소리인지 알수없이 말하고 돌아서가는 직장장을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장관우부위원장앞에선 굽석거리고 돌아서선 코방귀를 뀌니 자동선이 될게 뭔가? 순간 명철은 두주먹을 움켜쥐고 두리번거리다가 (이거 나중엔 갑산으로 가는 한이 있어두 내가 나서서 저 직장장의 요령주의뿌레기를 뽑아버려야지!) 하고 윽별렀다. 그 길로 명철은 은희네 녀성돌격대원들이 기초굴착작업에 달라붙은 발전소건설장으로 달려갔다. 누가 보건말건 상관할것 없었다. 그가 갑자기 건설장에 나타나서 헐떡거리는 모양을 보고 은희는 깜짝 놀라며 눈을 흘겼다.

《왜 왔어요? 남들이 다 보는데···》

《보면 뭐래? 급히 할 말이 있어 그래.》

《됐어요. 저기 가있어요. 인차 갈게.》

명철은 흥분하여 은희앞에서 어떻게 돌아섰는지 몰랐다. 작업장에서 멀찍이 자리를 피한 그는 작업복 목깃단추를 벗겨놓고 은희를 초조히 기다렸다. 잠시후에는 은희한테 팔소매를 잡힌채 세멘트창고뒤로 끌려갔다. 명철은 어이없어 웃었다.

《아니, 이거 벌써 이럴내기야? 막 휘두르면서···》

《그러지 않게 됐어요? 어서 찾아온 얘기나 해요.》

은희가 너무 급하게 구니 명철은 말이 나가지 않았다.

《아이 속상해!》

《말하지. 난 이제 동무아버지와 만나자구 해. 한번 본때를 보이자는거야. 공장안이 들썩하게!》

《그건 무슨 소리예요. 왜 흥분해서 이래요!》

《은희, 걱정을 꽉 놔. 모든 일이 잘될거야. 그리구 한가지 부탁이 있어. 기술준비실 성진형님이 어제 위원으루 식량구하러 갔대. 애들이 집에서 뭘 먹구있는지 모르겠어.》

명철은 작업복 웃주머니에서 얼른 돈을 꺼내주었다.

《일 끝나문 이걸루 시장에 가서 아무거나 사가지구 성진형집에 갖다줘! 거기서 다시 만나자구.》

《알겠어요.》

은희는 명철의 주머니에 돈을 도로 넣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버진 왜 만나요?》

《그건 걱정말라지 않어. 자, 그럼!》

명철은 몇발자국 뛰여가다가 은희에게 꽉 움켜쥔 주먹을 힘있게 흔들어보였다. 그 길로 장관우와 만나려고 공장청사를 향해 달려가는 명철의 마음은 세차게 울렁거리였다. 근 1년나마 로동생활을 하지만 오늘처럼 공장을 위해 자기도 무엇인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할수 있음을 가슴뿌듯이 느껴본적이 없었던 그였다. 이제 이 명철이를 문문한 제관공으로 보던 사람들은 눈이 휘딱 뒤집힐거다! 조금후 공장청사안에 들어선 명철은 장관우가 지배인실에서 사업토의중이라는 말을 듣고 밖에 나와 이제나저제나 그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장관우는 이삼십분 잘 지난후에야 청사문밖으로 나오다가 굽벅 인사하는 명철의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부위원장동지, 만날수 있습니까?》

《동문 누구요?》

명철은 자기의 아래우를 훑어보는 장관우의 눈길에 온몸이 고드름처럼 꼿꼿해지는 감을 느끼다가 기운차게 대답했다.

《공무직장 수리공입니다.》

《난 시간이 없소. 무슨 일때문인지 간단히 말하오.》

《부위원장동지, 전 아까 부위원장동지와 완성직장 직장장이 나누는 말을 듣고 분격했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는데 그들은 자동선개조를 믿지 않습니다. 증거가 있습니다. 직장장동진 자동선을 설치할 때 떼여낸 수동기대들을 아직도 보관해두고있습니다. 그 귀신단지 같은것을 끼고앉아있는데 자동선이 될게 뭡니까. 전 그따위 고물단지를 몽땅 파철로 실어가자는것을 제기합니다.》

장관우는 한손으로 턱을 모지락스럽게 움켜잡았다. 땀구멍이 숭숭 뚫린 그의 량볼이 푸드득 떨렸다.

《그게 정말이요?》

《그렇습니다. 부위원장동지, 전 자동선도 만들고 강재문제도 해결하자는겁니다.》

《좋아! 동무의 말대로 당장 그 골동품같은 수동기대들을 파철더미로 실어가자구.》

장관우는 쾌히 응하고 명철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두려는것처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됐소. 동문 가보오.》

명철은 좀 당황했다. 도대체 이게 장관우부위원장이 나한데 할수 있는 말의 전부란말인가? 하지만 그까짓건 큰 문제가 아니였다. 조금후 주병호지배인과 함께 완성직장에 나타난 장관우는 직장장을 닦아세우면서 엄하게 따져물었다.

《여보. 직장장, 동무 수동기대를 어따 감춰뒀소?》

《예?》

직장장의 눈이 대뜸 휘둥그래졌다.

《똑바로 말하지 못하겠소?》

《저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가 뭐요. 아직두 그따위 고물짝 같은 수동기대를 끼고앉아서 자동선을 시비질하는걸 내가 모르는줄 아는가!》

《아니, 그건 누가 그럽디까?》

직장장이 덫에 걸린 짐승처럼 잔뜩 열이 올라서 씨근거렸다. 명철은 가슴속이 뜨끔해났다. 이제 직장장이 자기한테 행패질할것임은 불보듯 뻔했다. 그러나 장관우는 직장장을 파김치가 되게 재차 다몰아댔다.

《누가 말했건 무슨 상관이요. 앞에서 자동선을 한다고 갑삭거리구 돌아앉아선 딴 꿈을 꾸는 동무같은 사람이 있어 자동선이 안되는거요! 이게 말로는 당에 충성을 한다고 부르짖으며 딴 장난질을 하는 놈들의 행동과 다른게 뭐요?》

장관우의 벽력같은 말에 곁불맞고 컴컴히 서있는 지배인을 흘끔 곁눈질해본 직장장이 그제야 시르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했으면 고칩시다.》

《당장 그 귀신단지 같은 수동기대들을 몽땅 파철로 바치고 자동선을 냅다 미오!》

장관우의 불호령이 떨어진후였다. 공장안은 불난것처럼 복닥소동이 일었다.

완성직장은 긴급지령을 받고 달려온 대형화물차들과 낮교대를 마친 로동자들로 뒤덮였다. 한꺼번에 이삼십대 잘되는 수동기대들을 운반한다는게 보통역사가 아니였다. 벌써 처리해버렸어야 할 페기물을 끼고있다가 들볶는다며 완성직장장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는 사람, 이제야 자동선을 하는것 같다고 쾌재를 올리는 사람, 별사람들이 다 있었다. 그래도 완성직장장은 옆에 장관우가 떡 버티고서서 지켜보니 귀먹은 시늉을 하며 분주히 돌아쳤다. 땀을 뻘뻘 흘리며 명철의 앞으로 휙 지나가던 직장장은 《동문 이 공장사람이 아니요?》하고 역증을 내였다. 멍청히 서있지 말고 일손을 도와나서라는 말이였다. 그렇지 않아도 속이 근질거려 겨우 참고서있던 명철은 《일이 멋들어지게 돼가는걸!》하고는 일판에 뛰여들어 제관공의 솜씨를 톡톡히 보였다. 장관우의 앞이라 갑절이나 기운이 펄펄 났다. 둬t 잘되는 기대를 쇠관우에 태우고 냅다 미는 그의 어깨에서는 구들장같은 근육이 불끈불끈 살아올랐다. 명철은 한참 팥죽땀을 철철 흘리며 일하다가 누군가 내미는 고뿌의 랭수를 꿀꺽꿀꺽 마시였다. 돌아다보니 현이였다. 현이가 어떻게?··· 현이는 자기네 녀성들도 총 동원됐다면서 그의 귀에다 대고 《명철동무, 은희 아버지가 대만족이야!》하고는 까르르 웃었다. 명철은 이날밤 바삐 돌아치느라 그처럼 살뜰한 현이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했다. 밤 9시가 거의 되여 작업을 끝내고 모두들 제가끔 흩어져갈 때였다. 작업복을 벗어 얼굴의 땀을 훔치며 (이젠 성진형님의 집에나 가야지.) 하던 명철은 그만 우뚝 굳어졌다. 그의 앞에 담벽처럼 막아선 장관우가 아까같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동무, 가공직장 수리공이라고 했지?》

《예.》

《이름은 뭐요?》

《김갑돌!》

명철은 갑자기 생각안나서 되는대로 주어대고 작업복을 단정히 입었다.

《사람은 똑똑한데 이름이 개판이로구만. 김갑돌이 뭐야?》

《고쳐야 할가 봅니다. 참, 전 부위원장동지의 딸 은희동무와도 잘 압니다.》

《그렇군. 동무 오늘 아주 큰 일을 했소. 제대군인이요?》

《그렇습니다.》

명철은 사기가 나서 대답하고 나서 (아무리 무서워도 은희의 아버지겠지.)하는 생각이 들어 씽긋 웃었다.

《그런데 부위원장동지, 한가지 더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뭔데 어서 말하오.》

장관우는 어떤 어려운 문제를 제기해도 다 풀어줄듯 한 너그러운 태도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자동선설계를 담당한 최성진기사가 식량난때문에 몹시 고생합니다. 부위원장동지도 아시겠지만 기사동지의 안해는 리미액연구사업을 포기하구 평양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래도 성진기사는 자동선때문에 자리를 뜨지 못하다가 어제 식량을 구하려 위원으로 갔습니다. 기사동지의 생활상 애로를 좀 풀어줬으면 합니다.》

장관우는 알겠다는 시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성진동무의 집이 어딘지 아오?》

《압니다.》

《저기 내 차에 타오.》

《예- 에?》

명철은 갑자기 머리가 뗑해졌다. 지금쯤 성진기사의 집에 은희가 가있겠는데 어쩐다? 그렇다고 꽁무니를 뺄수도 없는 일이여서 망설이던 명철은 (에라, 모르겠다. 내가 왜 물러서? 맞받아 나가구 볼 판이야.)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럼 갑시다. 기사동지집에 은희동무도 가있습니다.》

《뭐, 우리 은희가?》

장관우는 어떻게 된 감투끈인지 몰라서 명철을 힐끗 쳐다봤다. 명철은 시치미를 뻑 따고 능청스럽게 둘러쳤다.

《예, 은희동문 아버지가 늘쌍 자동선때문에 걱정하는데 자긴 기사동지를 도와드린게 없다면서 퇴근시간이 되자 그리로 찾아갔습니다.》

명철은 말해놓고보니 그럴듯 해서 환성이라도 지르고싶었다. 장관우의 얼굴에서도 더이상 의혹의 빛을 찾아볼수 없었다. 딸의 마음이 기특해서인지 입을 꾹 다물고있다가 승용차가 서있는 곳으로 돌아섰다. 그들이 탄 승용차가 북천강을 끼고 한참 달리다가 도안전국뒤의 단층마을에 당도했을 때였다. 명철은 승용차가 멈춰서자 한발 먼저 최성진의 집으로 뛰여들었다. 부엌일을 하던 은희가 깜짝 놀라면서 가슴을 움켜잡았다.

《아이참, 왜 이렇게 간떨어지게 놀아요?》

《은희, 놀라지 마오. 동무아버지가 왔소.》

《네?》

명철은 덴겁하여 머리수건을 벗어쥐는 은희를 붙잡고 다급히 말했다.

《놀라지 말라는데! 머리수건두 쓰구. 자, 이렇게···》

《난 몰라. 아버지와 만나겠다더니 여기론 왜 데려왔어요?》

《챠 이런! 부위원장동진 가정방문을 왔단 말이요. 은희가 여기에 있다는것두 다 말했으니 마음을 푹 놓소.》

명철은 그쯤 은희를 진정시켜놓고 얼른 밖으로 달려나갔다.

《부위원장동지, 이 집입니다. 은희동무가 와있습니다.》

명철이 집안의 은희가 들으라고 일부러 큰소리로 말하자 은희는 제법 부엌일을 하던 차림으로 달려나와 아버지를 맞았다. 장관우는 딸의 안내를 받아 부엌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뭘 하느냐?》

《아이들에게 장국을 끓여주댔어요. 글쎄 애들이 이틀동안이나 저걸루···》

은희는 눈물이 글썽해서 부뚜막에 세워놓은 불룩한 자루를 바라보았다.

《저게 뭐냐.》

《말즙풀이예요. 기사동지가 위원으로 떠나며 반되박되게 구해온 강냉이가루에 말즙풀을 섞어 끓여먹었대요. 모두들 자동선은 만들겠다면서 너무 무정해요.》

은희는 그 무슨 항변처럼 말하고 벽을 향해 돌아섰다. 방안에는 기사네 애들이 은희가 사온 빵을 손에 쥐고 햇병아리들처럼 맞붙어 앉아서 장관우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나도 가슴아프다. 너희 지배인한테 기사의 가정을 잘 돌봐주도록 단단히 얘기하겠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명심해둬라. 이 고난의 시기 남들이 풀죽을 먹을 때 기사도 말즙풀을 먹으며 자동선을 만들면 그게 더 떳떳한거야.》

은희는 축축히 젖은 얼굴을 돌려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무슨 할말이 있어 그러는가 했더니 장관우의 어깨우에 떨어진 흰머리카락을 집어 자기의 까만 머리우에 조용히 얹었다. 마치 아버지와 말없이 괴로움을 나누는듯 한 은희의 그 갸륵한 모습을 보고 명철이도 그만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