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8

 

제 2 장

8

 

(그럴수가 있는가? 그럴수가···)

태혁은 온밤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던 생각을 되씹으며 승용차의 유리창밖으로 흘러가는 새벽거리에 흐릿한 눈길을 던졌다. 성실이가 연구사업을 중단하고 떠나가버리다니?··· 그의 괴로운 마음속에는 재작년 이맘때 성실을 집에 초청하고 즐겁게 하루저녁을 보내였던 일이 어제런듯 다시금 생생히 비껴들었다. 현이가 사랑하는 정서적인 음악이 은은히 흐르는 그 화기애애한 좌석에서 성실은 장군님의 신임이 없었더라면 벌써 자기의 말썽많은 연구사업은 중단된지 오랬을것이라며 눈물을 머금었다. 인정에 끌리고 인정에 흐느끼는 성실의 속눈섭은 축축히 젖어있었지만 얼마나 인상적인 날이였던가. 태혁은 마치 땅속의 보물이라도 찾아낸듯이 성실이와 알게 된 일을 기뻐하면서 한집안의 식솔들처럼 밤가는줄 모르고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해도 성실이의 재능에 홀딱 반한 녀인마냥 살뜰히 손을 잡고 《연구사동무, 오늘밤은 우리 집에서 나와 함께 쉬자요.》하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산골녀성처럼 수집음이 많고 마음이 착한 성실이가 그말에 당황해 어쩔바를 몰라하자 안해는 자기네 집이 범의 굴인줄 아는가면서 상냥히 웃어보였다. 태혁은 그날밤 성실이가 옹색해할가봐 슬그머니 자기 사무실에 나와 의자에 앉은채 말뚝잠을 잤던 일을 상기하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였다. 평양경공업대학을 졸업한 성실은 이젠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였지만 몇달씩 남편에게 가정을 떠맡기고 실험실과 뙤약볕 내려쬐는 시험포전들에서 밤낮이 따로없이 연구사업을 한다. 성실의 그 마음이 기특하여 태혁은 갖가지로 생활상 애로가 많은 연구사를 도와주려고 무던히도 마음을 썼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진정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애쓴 보람이 없이 되고말았다.

태혁은 갑자기 승용차가 멈춰서는 바람에 흠칫 놀랐다. 웬일인가 했더니 운전사가 차문을 열어제끼며 고함을 쳤다.

《여, 죽지 못해 그래!》

누군가 교통질서를 위반하고 승용차에 깔리울번 한 모양이였다. 이런 때면 아무리 무던한 운전사도 사나와지군 하는데 그의 앞으로 다가온 작업복차림의 웬 청년이 제편에서 도리여 씨근벌떡거리며 만만치 않게 대들었다.

《말 좀 조심하시오. 난 도당책임비서동지와 만나야 한단 말이요!》

청년이 기세가 등등해서 덤벼들자 운전사가 또다시 그를 무섭게 지릅떠 봤다.

《이 친구 봐라. 썩 물러서지 못하겠어?》

《책임비서동지와 만나야 한다지 않소!》

《이거 정말··· 별 망나니같은 자식 다 보누만.》

운전사가 성이 나서 문을 쾅 후려닫았다. 그의 모욕적인 언사에 부아가 난 청년은 연신 불한숨을 몰아쉬였다. 꽉 틀어잡은 주먹이 후들후들 떨리고 눈에는 뿌연 물기가 어려 펀들거리였다. 그냥 떡 버티고 선 청년을 묵묵히 바라보던 태혁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운전사동무, 청년을 태우시오.》

《저 망종같은 녀석과 만나시겠습니까?》

《저렇게 억지를 부리는데 별수 있소?》

운전사가 급히 떠나려던 차를 멈춰세우며 문을 벌컥 열었다.

《동무, 오늘 운수가 좋아. 어서 타오.》

청년은 군말없이 차에 타며 태혁에게 굽벅 인사를 했다. 별로 미안해 하는 기색도 없는 그의 작업복에서 기름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도당에 당도한 태혁은 보름만에 자기 사무실 책상앞에 마주앉으면서 청년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아직 도당직원들이 출근하기전이여서 젊은이와 만날수 있는 얼마간의 시간여유가 있었다.

《어디서 일하오?》

《기계공장 제관공 허명철입니다. 절 모르시겠습니까?》

태혁은 청년의 다부진 몸과 깎아세운듯 한 목덜미, 치붙은 눈섭밑에 옹이구멍처럼 또렷하게 박힌 눈, 보통 감때사납게 생기지 않은 청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디서 만났던 청년인가?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 모르겠소.》

《그럴겁니다. 벌써 10년세월이 흘렀으니까요. 전 도당책임비서동지가 정무원에 있을 때 함께 일한 허진규의 아들입니다.》

《으음?···》

태혁은 한손으로 안경테를 잡고 거뭇한 눈섭을 찡긋거리였다. 청년의 말은 그가 이미 잊어버린지 오랜 불쾌한 일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허진규로 말하면 이전에 그가 운성광산기계공장 지배인으로 내려갈 때 허위자료를 제기한 장본인이였다. 자기의 출세를 위해 상급에 아첨해 동지들을 교묘하게 깎아내린 야비한 인간, 일생을 잘 처세하며 살아온 그 허진규가 재작년에 철직되여 만포시 행정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내려가며 도당에 찾아왔던 일이 떠올랐다. 표면상으로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암암리에 그를 질투해온 허진규는 그날도 자기의 능숙한 너스레로 부끄러운 과거생할을 위장하면서 요령부득의 웃음을 짓지 않았던가. 그것이 예전처럼 겉발림한 웃음인지 아닌지는 귀신이나 알 노릇이였다. 그러지 않아도 할 일이 산더미같았던 태혁은 어느 하가에 그따위에 마음을 쓰랴 하는 대범한 태도로 허진규와 너그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물며 무엇때문에 그의 아들을 섭섭하게 대해주겠는가. 아들은 사내다운 멋이 있고 허진규와는 생김새도 완전히 딴판이였다.

《허명철이라··· 이제야 죄다 생각나는군. 아이때 보통강바닥에 짜하게 소문난 골목대장말이야. 괜히 우쭐렁거리며 싸움깨나 했지. 방금전에 내차 운전사와 뚜꿔댄것만 봐두 그 불망나니 명철이가 분명해.》

태혁은 애정에 겨운 눈매로 청년을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바람에 유년시절의 즐거운 추억속에 잠겨 어깨를 씰룩거리던 명철이가 제법 어른스럽게 말했다.

《철이 없을 때였지요. 전 지금도 현이어머니가 저때문에 속을 태우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현이동무가 학생소년궁전에서 예술체조를 배우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갈적이면 늘쌍 제가 데려다주는 일이 불안하여 걱정하댔지요. 저도 그때 왜 그랬던지 모르겠습니다. 남들은 망나니라구 해도 현이동무가 날 싫어하지 않으니 저도 누이동생처럼 아껴주었습니다.》

명철의 엉뚱한 말에 태혁은 빙긋이 웃었다. 성미가 우락부락한 청년의 가슴속에서 현악기의 아름다운 선률처럼 울려나오는 동심세계에 마음이 밝아지는것을 느꼈다. 아닌게 아니라 그때 안해는 현이때문에 걱정하며 만날 허진규의 아들과 섭쓸려다니지 말라고 타이르군 했었다. 그 일이 귀찮아서 한번은 현이가 《어머닌 몰라. 명철오빤 망나니가 아니야. 공부도 제일 잘해!》 하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생생히 기억되였다. 명철이가 군대에 입대한다고 바지런히 뛰여다니면서 위문품을 마련하는 현이를 곱지 않게 보던 안해의 불만에 가득찬 얼굴도···

《그래 언제 제대됐소?》

《작년봄입니다. 군사복무 전기간을 안변청년발전소건설장에서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주인이 바뀌였더군요. 아버지가 철직되여 만포로 이사를 가고 왕청같은 녀인이 절 맞아줬습니다. 전 그날 동무네 집에 가서 아버지의 과오가 무엇이였는가를 알고 장밤 술을 퍼마시며 분해서 울었습니다. 저희 부모들이 원망스러워 만포로는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평양에서 한 사날 빈둥거리며 다니다가 강계에 와서 현이동무의 도움으로 기계공장에 취직했습니다. 이번엔 현이동무가 고민에 싸인 저의 길안내를 해준 셈이였습니다.》

태혁은 자기 부모들의 떳떳하지 못한 생활때문에 수치를 느끼는 청년의 심정이 리해되여 고개를 끄덕이였다. 현이와 명철의 관계에서도 그들의 동심이 싹틔워준 깨끗한 우정을 새삼스럽게 감수하였다. 그러한 사실을 현이가 아니라 오늘 허진규의 아들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된 자신이 민망스러웠다. 하고 보면 그가 제품에서 태여난 딸에 대해서도 얼마나 많은것을 모르고 살아왔는가. 그러면서도 지금껏 그 딸의 아버지라고 생각해온 일이 어쩐지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후엔 부모들과 만나봤소?》

《한번 집에 찾아가고 싶더군요. 저도 인간이니까요. 그러나 만나지 않았습니다. 저라도 일을 꽝꽝해서 아버지를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도 사람들앞에서 떳떳하게··· 그게 답니다.》

태혁은 (이 녀석이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구만.)하는 생각이 들어 그를 덤덤히 바라보았다. 좋게 보면 대바르게 자랐다고 할가. 아이때부터 세차기로 소문난데다가 군대물까지 먹고왔으니 베짱이 자랄대로 자란것만 같았다. 이상한것은 한동안 아무 말없이 앉아있는 그의 눈에 아까 운전사한테서 모욕적인 말을 들었을 때처럼 영문모를 눈물이 어려있는 일이였다. 청년은 그런 자신이 불만스러운듯 팔소매로 코밑을 쓱 문대고 불한숨을 내쉬며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제가 책임비서동지를 찾아온건 다름이 아니라··· 저에겐 사랑하는 처녀가 있습니다. 어지간히 큰 간부의 딸입니다.》

태혁은 청년의 그 말에 크게 충격을 받고 담배를 붙여물었다. 혹시 이 청년이 나의 딸 현이를 사랑하는게 아닐가? 그런데 명철은 다름아닌 허진규의 아들이다. 보나마나 그래서 나와의 《담판》이 필요했을것이였다. 태혁은 둬모금 담배연기를 들이켰다가 길게 내뿜었다. 한순간에 단마디 명창으로 결정짓기에는 너무나도 심각한 딸의 문제였다. 단지 그가 청년을 마주보기가 멋적은 기분속에서 또다시 명확히 의식한것은 허진규와 그의 아들은 판이하게 다르며 현이가 이 청년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딸의 사랑을 막아나설 권한이 자기에게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였다.

《그런데 제가 철직당한 사람의 아들이라는것이 우리의 사랑을 막아나섭니다. 저희들한테는 도당책임비서동지의 보증이 필요합니다. 저도 자존심이 있는 인간입니다.》

태혁은 청년의 요구에 어처구니가 없어 그만 담배를 성급히 눌러껐다. 지금은 그의 사랑에 시간을 허비할 사이가 없음을 명철이가 알아들을만 하게 말해주고싶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한 청년의 일생문제라면··· 하는 생각이 다시금 청년을 외면할수 없게 만들었다. 사랑의 본질은 정신의 불이라고 하지 않는가! 청춘기에 뜨겁게 타오르는 그 불이 꺼져버리면 명철이도 마음의 상처를 입고 허둥지둥 청춘시절을 보낼지 모른다. 이 소중한것을 소중하게 여길줄 모른다면 명철의 눈에는 도당책임비서가 일만 일이라고 하는 딱딱한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을것이였다. 두번다시 나를 믿고 찾아오지도 않을것이다.

《그 보증이 누구한테 필요하오?》

《제가 사랑하는 처녀의 부모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우리 가정에는 딸을 맡길수 없다고 합니다. 시시해서 사랑이고 뭐고 싹 다 집어던지려 했는데 현이동무가 그것두 사랑인가고, 동무가 그런 한심한 사람인줄은 몰랐다면서 오히려 절 규탄합니다. 그 처녀가 자기와 제일 가까운 동무인데 참을수 없다면서요. 까놓구 말해서 전 아이때부터 현이동무의 말엔 꼼짝 못하는 바보입니다.》

태혁은 그만 허파에 바람찬 소리로 허허 웃었다. 명철이가 너무나도 솔직하게 현이와의 관계를 방불히 드러내보였기때문이였다.

《모를 소리요. 지금 동무의 아버지도 자기 사업을 하지 않소?》

《아닙니다. 어디서 허튼 소리를 듣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그 처녀의 부모들은 제가 현이동무를 사랑하지 못하는것도 아버지때문이라는것입니다. 그들은 현이동무와 저하구 사이엔 사랑보다 몇곱절 더 뜨거운 우정이 얽혀져있다는것을 리해하지 못합니다. 우정으로 사랑을 뛰여넘을순 있어도 사랑이 우정을 초월할수 없다는 인생진리를 모릅니다.》

《그 처녀의 부모들이란 누구요?》

씨알이 박힌 명철의 말에 감동이 된 태혁이 엄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행정위원회 장관우부위원장입니다.》

《뭐라구?···》

태혁은 놀란 눈길로 청년을 마주 보았다. 이 풋내기 청년이 다년간의 생활을 거쳐 그가 충분히 파악한 도행정위원회 부위원장 장관우의 인간됨을 혹평하는 일이 가소롭게 생각되였다. 자강도가 오늘의 곤난한 형편에서 공장, 기업소들의 생산도 보장하며 근근히 인민생활도 유지해가는것은 도행정위원회 장관우부위원장이 틀고앉아서 완력있게 사업을 내미는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손탁이 드세고 책임성이 높은 반면에 관료기가 심하여 뒤소리를 듣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이제 발전소건설에서 주인구실을 하게 될 사람도 다름아닌 장관우였다.

《그래 장관우부위원장을 만나봤소?》

《안만났습니다.》

《그건 왜? 길고 짧은거야 대봐야 알지. 이제라도 만나보오.》

《싫습니다. 책임비서동지, 더두말고 저하구 사진을 한장 찍어주십시오. 사진기는 제가 가져왔습니다.》

명철은 비위가 좋게 작업복안에서 사진기를 꺼내여 책상우에 놓았다.

태혁은 뜻밖의 요구에 덤덤히 앉아있었다. 이것이 젊은이들의 사랑을 위한 일이면 싫건좋건 응하는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넌지시 물었다.

《이게 내 보증이란거요?》

《그렇습니다. 도당책임비서동지가 저같은 송사리와 찍은 사진을 보면 장관우부위원장도 눈이 휘둥그래질것입니다. 이 친구가 허진규의 아들이 맞긴 맞아 하구말입니다. 이 사진은 저의 사랑과 인격, 생활을 지켜주는 증거물로 영원히 남을겁니다.》

태혁은 그 말에 드디여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움쭉 일어났다.

《좋소. 동무의 사랑도 성공시키고 장관우부위원장의 마음도 돌려세워보자구!》

《고맙습니다.》

부쩍 사기가 오른 명철이 어느새 책상우에 자동사진기를 세워놓고 렌즈의 초점을 맞춘 다음 얼른 태혁의 옆에 와서 붙어섰다. 조용한 방안에서 사진기가 저 혼자 스르륵거리며 돌아가더니 이어 찰칵소리가 났다. 청년이 그렇게도 바라던 사진이 마침내 성공적으로 찍혀진것이였다. 그제야 태혁이가 청년이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갈아입지 못한 일을 아쉬워하자 명철은 기쁨에 한껏 부풀어올라서 요란스레 말했다.

《저에겐 이 기름때 묻은 작업복이 제격입니다. 그래서 오늘아침 일부러 현장에서 일하던 차림으로 찾아왔습니다. 전 돌아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명철은 굽벅 인사를 하고 으시대며 방에서 힝 나가버리였다. 특별한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저 사진 한장이 명철에게 저렇게도 큰 기쁨, 힘으로 된단 말인가. 태혁은 이제 명철이가 저 앙양된 기분으로 자기의 사랑도 쟁취하고 장차로 사람들의 총애를 받는 제관공으로 억세게 자라날것임을 의심치 않으며 금방 그가 바람처럼 사라진 문켠을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오늘래일로 당장 중소형발전소건설과 관련한 중요한 문제들을 토의하고 전투에 진입하기 위한 실제적인 대책들을 취하면 정신을 차릴사이 없이 법석 들끓게 될것이지만 그 복잡한속에서도 태혁은 자기가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것이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임을 명철의 생활을 통해 다시금 절실히 깨닫게 되는듯 싶었다. 그렇다. 중소형발전소건설도 바로 이렇게 사람들을 인정으로 묶어세우며 그들의 심장을 발동시키지 않고서는 밀고나가지 못한다. 태혁은 한동안 그런 심각한 생각에 잠겨 방안을 거닐다가 장관우를 찾아갔다.

늘쌍 도안의 대소사를 도맡아안고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장관우의 사무실에서는 아침부터 큰소리가 울려나왔다. 그는 태혁이가 방안으로 들어선줄도 모르고 기계공장지배인 주병호와 마주앉아서 한창 역정을 내는 중이였다. 장관우에 못지 않게 배짱이 드센 주병호지배인은 무슨 일때문인지 오늘은 경우가 몰린 사람처럼 박통같은 머리를 숙이고앉아서 뿌옇게 욕사발을 먹었다. 그가 먼저 태혁을 알아보고 일어나서야 장관우도 인사를 차리였다.

《책임비서동무가 오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잔뜩 열이 오른 장관우의 목소리는 거세게 울렸다.

《이번에 장군님께서 우리 도에 큰 과업을 맡겨주셨다지요?》

《그건 어디서 들었소?》

《말두 마십시오. 벌써 만포세멘트공장에 성간군화물차들이 콱 덮였습니다. 선손을 써서 발전소건설에 쓸 세멘트를 빼내려구···》

태혁은 지난 밤 12시가 넘어서야 성간을 떠났는데 만포세멘트공장에 성간군 화물차들이 들이닥쳤다는 말에 입이 딱 벌렸다. 성간군당책임비서 홍덕이 겉보기엔 느려빠진것 같아도 날쌔다는건 짝이 없었다. 여하튼 이미 성간에는 불이 달렸다니 마음이 흡족했다.

《여기에 앉으십시오.》

태혁은 부위원장이 권하는 의자에 앉으며 안경을 추슬러올렸다.

《동무들도 앉소. 그러니 내가 구태여 장관우부위원장한테 찾아온 용건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구만.》

《웬걸요. 전 우리 도에서 6개월동안에 중소형발전소건설의 본보기를 마련한다는것밖에 모릅니다.》

《그거면 됩니다. 여기선 무슨 일이 있었소?》

《다른게 아니구···》

장관우가 주병호를 흘끔 쳐다봤다.

《기계공장의 일이 망태기가 돼서 싫은 소릴 하던 참입니다. 책임비서동무가 출장간사이 자동선이 어디 한걸음이나 추진돼야지요. 설계를 담당한 최성진기사는 가뜩이나 안해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니 일이 될게 뭔가요. 참, 리미액연구사가 평양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습니까?》

《알구 있소.》

《래년 농사는 리미액으로 잘 지어보자고 했던 일도 틀려지구. 안팎으로 골탕을 먹는셈입니다. 자동선이 실패하자 굼떠도 수동기대가 제일이라는 잡소리들이 나오지 않나. 정말 죽여줍니다. 공장이 맥을 춰야 발전소도 건설하지요?》

한참이나 얼굴이 시뻘개서 푸르락거리고 난 장관우는 성이 좀 풀리는지 나직이 숨을 내쉬였다.

《내 워낙 우는 소릴 딱 질색하는 사람인데··· 저 지배인동무네 일때문에 성격을 배리겠다니까요.》

장관우가 기계공장지배인을 마뜩지 않게 흘겨보며 허구프게 웃었다.

《아무렴 장관우부위원장이 그렇게야 되겠소. 보나마나 지배인동무도 속이 상할거요.》

《예. 부위원장동무가 죽일놈 살릴놈 하구 욕질하지만 저도 속이 탑니다. 어젠 너무 화가 나서 최성진이 보구 강계 일등미인을 붙여주겠으니 아예 처와 갈라지고말라구 했습니다.》

주병호지배인이 롱으로 한 말이였지만 태혁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오··· 그래 뭐랍디까?》

《허참, 홀아비살림에 구데기가 쓸어도 새끼들이 둘씩이나 달렸는데 리혼이야 어떻게 하겠는가고 웃더군요. 그리군 내 손을 덥석 잡아쥐고서 〈지배인동무, 내 처때문에 개망신을 했지만 자동선은 꼭 완성하겠으니 맘 놓으시우.〉하더군요.》

성실이네가정의 불행이 올데갈데 없는 사실이였지만 태혁은 그 말에 눈굽이 시큰해지는것을 느끼며 장관우를 바라보았다.

《됐습니다. 우리한테 곤난한 일이 어디 한두가지요. 그 이야긴 그만하고 기본문제를 의논해봅시다. 이전에 중소형발전소건설에 참가한 기술자, 기능공들이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합니까?》

《그때 일은 제가 좀 관여했기에 아는데 별반 남아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중소형발전소건설대장은 황천객이 된지 오래구 부대장을 하던 림준이라는 동무가 이 주병호지배인네 공장기술준비실에서 기사로 일합니다. 소문난 기능공인 최덕삼로인도 기계공장에 있구요.》

《최덕삼?···》

태혁은 귀가 번쩍 열리였다.

《〈강계싸움대장〉 로인말이요?》

《예, 기능공으로서는 그 귀신같은 로인의 재간을 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좋소. 래일아침 도당에서 건설과 관련한 협의회가 있는데 그 두 사람을 꼭 참가시켜야겠습니다. 구체적인 실무문제는 그때에 토론하기로 하고 부위원장동문 이제 곧 내 방으로 갑시다.》

잠시후 그의 사무실에서는 도당 긴급집행위원회가 열리였다.

회의에서 태혁은 자강도의 전체 당원들과 로동계급에게 주신 장군님의 과업을 전달한 후 우선 강계시와 장강군, 성간군을 발전소건설의 시범단위로 선정하고 도지휘부를 구성하였다. 발전소건설에서 나서는 기술자, 기능공 선발, 발전설비, 자재보장사업은 집행위원회 위원인 장관우가 책임지고 내밀기로 사업분담을 했다. 그리하여 장관우는 이번 전투기간 누구보다도 어려운 중임을 담당하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