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7

 

제 2 장

7

 

안해가 몇해동안 고심하던 연구사업을 포기하고 과학원으로 올라간 후에도 최성진은 성실한 남편답게 혼자서 어린 자식들을 돌보며 서툰 주부노릇을 한다. 성진기사는 요즘도 자기 가정의 고충을 내색함이 없이 공장의 자동화를 완성하려고 전심전력을 한다. 명철은 기사의 성실성이 무척 부러웠다. 청년의 그런 마음을 잘 알고있는 성진이도 그를 친동생처럼 여기면서 끔찍이도 보살펴준다. 오늘도 연통같이 길쭉한 도면말이를 옆구리에 끼고 공장구내길을 헐썩헐썩 걸어오던 성진은 명철이와 만나자 한참이나 장관우부위원장의 딸 은희와의 관계를 끈덕지게 따져물었다.

명철은 기사앞에서 문초를 받는 심정이 되여 진땀을 뽑다가 바빠 죽겠는데 별걸 다 꼬집어 판다며 픽 웃어버리였다.

지금 공장에서는 한동안 쭈그러들었던 자동선개조에 불이 달려 온통 기계를 해체해놓고 야단법석인 판에 엎친데덮치는 격으로 공장안팎을 완전히 일신하기 위한 생산문화사업까지 겹쳐 벌의 둥지를 헤쳐놓은듯 하다.

어디 쪼물짝하게 처녀들의 치마자락에 매달릴 형편이 되는가. 명철이가 짜장 사내대장부처럼 치부하며 우쭐해도 할말이 없는 때였다. 그는 아직도 제대군인기질이 물씬물씬 풍기는 청년인데다가 일깨나 제끼는 제관공이다. 푸접이 좋고 사람됨이 대바르다보니 처녀들속에서 인기도 이만저만하지 않다. 굳이 흠이라 하면 너무 더펄더펄하고 밸뚝시가 사나운것이라 할가. 하지만 쇠덩이를 주무르는 로동판에는 명철의 몸에 쩌들어배인 남아다운 성격이 걸맞고 금값에 나간다. 그러나 명철은 아무리 불깐 황소처럼 일밖에 모르며 처녀들을 거들떠보지 않는척 해도 때없이 대보름달처럼 떠오르는 은희의 얼굴을 막을길 없었다. 성진은 그의 마음을 뻔드름히 들여다보며 오금을 박아 말했다.

《명철이, 괜히 얼렁뚱당해버릴 생각일랑 말어. 이건 심중한 문제야.》

《성진형, 터놓고 말하면 나도 골통이 좀 아픕니다. 아무리 은희와 죽자살자해도 장관우부위원장이 땅땅 퇴방놓으며 잡아제끼니···》

명철은 마지 못해 자기의 불만을 터뜨리고 멋적게 덜미를 쓸어만졌다.

《내 그래서 하는 말이야. 은흰 욕심이 나는 체네지만 장관우부위원장이 간단한 사람이요? 동무네 사랑이 승산있는 놀음인지 모르겠단 말요. 은흰 어떤 립장이요?》

《우리사이도 끊지 못하고 아버지눈치도 보며 독틈에 끼운 탕관격으로 고달프게 살아가지요.》

《그럴거요. 은희도 맘고생이 많은가봐. 어제보니 얼굴이 홀쭉해졌더구만.》

명철이가 은희를 점찍어둔 후로 성진은 은희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같지 않았다. 성진은 어쩌다 공장구내에서 우연히 은희와 만나도 명철이만 못지 않게 그 예쁘장히 생긴 처녀를 살갑게 대해주는 사람이였다. 기사가 자기들의 사랑을 두고 마음을 쓰며 《흠》 하고 코김을 내불자 명철이도 속상해하는 시늉을 짓다가 퉁명스럽에 내뱉았다.

《제길헐, 내 차라리 은희를 단념해버리는게 어떨가요?》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줄 아나? 애당초 성사되지 못할 일이면 이제라도 관둬야지만 한번 맺은 사랑을 끊는다는게 목숨을 내놓는것만치나 힘든 일이요. 덤비지 말구 오늘이라도 은희와 만나서 심중히 의논해 보오. 은희도 똑똑한 처녀이니 궁냥이 있을게 아니요. 동무들의 일생문제인데 속대가 없이 시시하게 련애질이나 하지 말구.》

성진의 진정이 담긴 충고를 듣고난 명철은 어쩐지 가슴이 뻐근했다. 애당초 장관우부위원장의 손탁안에 단단히 쥐여있는 딸을 넘겨다본게 잘못된 일처럼 생각된것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랬다는데 정말 이제라도 잘 타산해보고 짝이 기울면 깨끗이 물러서는게 옳은 처사가 아닐가? 명철은 그렇게 혼자 강심을 먹다가도 은희와의 련정을 매정하게 끊어버리자니 자기 살점을 도려내는것 같아서 망설이게 되였다. 그렇다고 가망이 없는 일인걸 번연히 알면서 아리숭한 관계를 맺고 세월없이 무한정 시간을 끌수도 없다.

명철은 두루 심중이 복잡하던차에 성진의 당부대로 이날은 밤이 이슥하여 북문교아래의 조용한 유보도에서 은희와 은밀히 만났다.

그들의 아름다운 추억이 깔려있는 강변길이였다.

올해 정초 바로 여기 북천강가에서 두 젊은이의 첫 사랑이 망울졌었다. 명철은 유난히도 푸근한 그 인상적인 겨울밤 햇솜같이 푸실푸실 성글게 날아내리는 눈송이를 즐겨맞으며 은희와 함께 흰 눈덮인 강기슭을 걷고 또 걸었던 일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날 흥분한 김에 장갑도 끼지 않고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숫눈을 차며 다급히 달려온 은희··· 아버지를 닮아 꽤 오지랖이 넓고 성격도 쾌활한 은희와 남다른 인연을 맺게 될줄이야 상상인들 했던가. 사실은 그들의 사랑에 다리를 놓아준 사람은 다름아닌 현이였다. 명철은 꿈많은 학창시절과 군사복무의 나날에 사귄 친우들이 많지만 녀동무는 유일하게 현이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쩌다 한번씩 현이의 편지를 받은 때면 《귀뿌리 빠진 날》만큼이나 기뻐서 날뛰였다. 그에게는 현이가 소꿉시절의 소중한 동무이자 순결무구한 우정의 상징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군사우편으로 날아온 현이의 편지를 받고 꿈쩍 놀랐다. 뚱딴지같이 편지의 글줄들에 련정비슷한 감정이 미묘하게 흘렀다. 현이가 웬일인가? 그제야 꼼꼼히 살펴보니 어딘가 없이 현이가 쓴 편지같지 않았다. 틀림없는 현이의 필적이였지만 흉내를 낸것처럼 서툴다는것이 대뜸 알리였다.

개성이 또렷한 현이의 부드럽고 차분한 마음도 느껴지지 않았다.··· 명철은 제대되여 기계공장에 입직한 후에야 그때 장기간 대학통신수업을 떠난 현이를 대신하여 은희가 장난삼아 엉뚱하게 써보낸 편지였다는것과 그럴만 하게 두 처녀가 자매처럼 다정히 지낸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처럼 가까운 사이에도 서로의 비밀이 따로 있어 은희는 자기 동무가 명철에게 은근히 애정을 품고 편지거래가 잦은것으로 옥생각했다는것이였다. 은희의 그러한 오해로 명철이가 받은 회답편지를 다른 사람이 썼다는게 들짱나고 그것이 재미나는 웃음거리로 되여 특별히 명철의 호감을 샀던 《장난군처녀》 은희··· 현이와 가까운 처녀이면 의례히 자기 마음에도 들리라 생각했었는데 사귀여 보니 정말 그랬다. 은희는 청년들이 득실거리는 공무직장 청년동맹비서로 선출된 활달한 처녀였다. 결국 명철은 현이와 제일 친한 처녀를 일생의 둘도 없는 길동무로 삼은 셈이였다. 그때 그들의 숫저운 사랑에는 은희아버지의 허락도 그가 정무원에서 철직되여 내려 온 사람인 허진규의 아들이라는 께름한 감정도 섞여있지 않았다.··· 오늘도 은희는 아버지의 완력에 눌려 마음고생하는 티가 없이 제편에서 먼저 명철의 팔을 살짝 끼며 생긋 웃었다.

《왜 갑자기 만나자고 했어요?》

은희는 유보도우로 둬발자국 옮기다가 갑자기 홱 돌아서며 응석이라도 부리듯 졸라댔다.

《어서 말해봐요.》

《그저···》

명철은 마지못해 무뚝뚝히 대답했다.

《에- 뚝쟁이같이 그게 뭐예요?》

은희가 곱다랗게 눈섭을 찡그리는데도 그의 구겨진 얼굴은 좀처럼 펴이지 않았다.

강계미인으로 소문난 처녀들속에서도 유별나게 인물이 두드러진 은희와 사랑을 약속했다가 남남사이처럼 정을 끊고 갈라지려니 가슴이 뭉청 내려앉는것 같았다. 하기야 은희도 나의 이런 괴로운 마음과 별다를게 있겠는가. 아마 이제와서 아던정 보던정 없이 헤여지자고 하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기절해버릴런지 몰랐다. 하지만 전혀 승산이 보이지 않는 사랑이면 정이 더 깊어지기전에 깨끗이 단념하는게 옳다. 혹시 은희가 나때문에 꽃다운 청춘을 망쳐버릴런지 누가 알겠는가. 명철은 혼자속으로 그렇게 단단히 벼르면서도 정작 은희와 만나자 떡심이 풀려 한참이나 물소리만 철썩거리는 강변을 터벅터벅 걸었다.

《왜 그래요. 갑자기 만나자하구선 암말도 없이···》

은희가 앞을 막아서며 안타깝게 팔을 마구 잡아흔들어서야 명철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은희, 날 원망하오!》

《네? 그게 무슨 말이야요.》

은희가 깜짝 놀라며 두손으로 가슴을 싸쥐였다.

《나같은 잠뱅인 애당초 은희하구 상대가 되지 않는건데··· 내가 잘못했소.》

《아니, 누가 뭐랬어요?》

은희는 눈앞의 일이 믿어지지 않는지 구붓한 눈섭을 치켜올리며 또다시 다급히 물었다.

《누군 누구겠소. 다들 그래. 은희가 나보담 몇백배로 낫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소.》

명철은 어떻게 해서나 은희를 설득시키려니 자기의 자존심같은건 안중에 두지 않고 마음먹은대로 툭 터놓고 말했다.

《설사 그렇다면 어떻다는거예요?》

《난 제몸값두 모르고 렴치없이 은희를 맘고생시킬수 없어. 은희의 아버지도 우리의 사랑을 한사코 막아나서는데··· 아무리 애써도 안될 일이면 이제라도 동무한테 량해를 구하고 헤여질수밖에 없단 말이요.》

《그게 정말이예요?》

《정말이요.》

《뭐라구요?》

은희는 대뜸 눈물이 글썽하여 흘겨보다가 달려들어 종주먹으로 명철의 가슴팍을 다듬이질하듯 마구 두드려대였다. 그리고는 강물이 출렁이는 어둠속으로 정신없이 달려가는 바람에 명철은 기겁하여 얼른 뒤쫓아가서 그를 와락 그러안았다. 잔뜩 골이난 은희는 그를 힘껏 떠밀치며 반두안에 든 고기처럼 요동을 쳤다. 연약한 처녀의 몸에 그런힘이 있다는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제길 기운이 세다는건··· 명철은 꺾쇠같은 팔로 은희를 꽉 껴안고섰다가 처녀가 잠잠해 진 후에야 숨을 후 내쉬였다.

《왜 죽고싶어서 그러오?》

《그따위 달콤한 말은 듣기도 싫어요!》

명철의 뚝심에 맥을 싹 다 뽑은 은희가 눈물이 가랑가랑해서 또 한번 흘겨보았다.

《은희, 괜히 성내지 말고 내 말 들으라구. 동무만 괴로운줄 알어? 나한테도 고통스러운 마음은 있어. 이전에 우리 아버지가 정무원에서 일하며 출세욕에 빠져 애매한 사람들을 함부로 걸고드는 바람에 도당책임비서도 피해를 입었지만 난 창피해서 동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 서로 사랑한다면서말야. 지금까지 동무의 아버지가 왜 우리 사랑을 완강히 반대한줄 아오? 바로 우리 집안의 그 너절한 내막을 잘 알고있기때문이요. 그러고보면 동무아버지를 나쁘다고 할수도 없잖아?》

명철이는 자기 가슴속 진심을 송두리채 퍼내며 눈굽이 축축히 젖어드는것을 느꼈다. 이상하게 은희만이 좀전과 달리 싸늘한 눈길로 그를 지켜보고있었다.

《이제 와보니 동문 정말 졸장부였군요.》

《뭐라구? 그래 내가 아무리 사내대장부라도 그 엄연한 사실을 어떻게 부정할수 있어?》

은희는 눈물 한방울없이 눈살이 꼿꼿해서 쳐다봤다.

《명철동무, 동문 말해주지 않았지만 난 벌써 아버지한테서 그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어요. 그게 도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어요? 동무의 아버진 아버지고 우린 우리란 말이예요. 난 아버지가 딸의 이 마음을 리해해주지 않는게 속상할뿐이예요. 그런데 동문 뭐예요. 제발 남자로 생겨 속대없이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아요. 그래 현이아버진 우리의 사랑을 반대할것 같아요? 난 늘쌍 그 생각만 하면 아버지의 악설도 무서운줄 몰랐어요.》

명철은 갑자기 은희의 맵짠 말에 뒤통수가 뗑해나는것을 느꼈다. 자긴 왜 그 생각을 못했던지 알수 없었다. 명철이 자기가 뭔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한참이나 물결이 거뭇거뭇 뒤번지는 강물을 향해 멍청히 서있다가 돌아다보니 은희는 어둠속으로 혼자 달려가고있었다. 명철은 그를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맨땅에 펄썩 주저앉으며 두손으로 머리를 꽉 움켜잡았다.

(그래. 은희의 말이 옳다. 난 확실히 소갈머리가 막힌 놈이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