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6

 

제 1 장

6

 

붐비는 승용차들과 무궤도전차들, 뻐스들, 인도에 차넘치는 시민들의 물결··· 오늘도 수도 평양은 예나 다름없이 설레며 흥성거리고있었다.

늘쌍 자강도 두메산골의 가파로운 령길을 숨가쁘게 오르내리다가 초고층건물들이 수풀처럼 펼쳐진 번화가의 대도로에 들어선 태혁은 눈에 보이는것마다가 새롭게 느껴져 오래도록 차창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그는 수도의 서쪽관문에 현대적인 광복거리가 생겨난 이듬해 자강도에로 내려갔다. 그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러해가 흘렀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찾아올 때면 번마다 정든 고향집의 뜨락에 들어선것처럼 감회가 새롭고 마음이 평온해지는것은 자나깨나 한시도 잊어본적없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여기에 계신다는 행복감때문이였다. 아마도 그래서 이 어려운 고난의 행군시기에도 수도시민들의 발걸음은 저렇게도 활기에 차고 얼굴들에 밝은 웃음이 넘치는것이 아니겠는가! 널다란 신작로의 량켠에 화려하게 솟은 고층살림집들의 무수히 번쩍거리는 창문들과 상점, 식당들의 장식간판들··· 태혁은 그 활기찬 거리의 모습에 심취되여 저도모르게 전천탄광에서 있었던 괴로운 일을 가뭇 잊어버린 자신을 깨닫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였다.

태혁의 승용차는 옥류교를 지나서 동평양의 제일 아늑하고 조용한곳에 자리잡은 전력공업부마당으로 들어섰다. 아직 수도의 부위원회, 중앙기관 직원들이 퇴근하기엔 이른 때여서 별로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정확히 예견한 시간에 안성맞춤히 도착한셈이다.

큼직한 통유리가 거울처럼 알른거리는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니 오른쪽벽에 자그마한 접수구가 붙어있었다. 스물두셋 나보이는 접수실안의 처녀가 눈이 둥그래서 그를 내다보았다. 태혁은 어린 처녀앞에서 출입절차를 엄격히 지키며 겸손하게 신분증을 꺼내보이였다.

《리성하부부장동무를 만나려고 왔소.》

태혁은 그렇게 말하면 처녀가 리성하의 방에 전화를 걸어 손님이 찾아왔다고 알리던가 군말없이 들어가라고 할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처녀는 한참이나 신분증을 받아쥐고 꼼꼼히 들여다보다가 콩튀듯 의자에서 냉큼 일어나며 반색을 했다.

《아이, 자강도당 책임비서동지군요.》

태혁은 처녀가 감격하여 부르짖는 바람에 그를 의아히 마주 보았다. 아무리 자세히 뜯어보아도 낯이 설었다. 그가 잘못 보지 않았다는것이 곧 처녀의 말을 통해서 확증되였다.

《저··· 한가지 물어도 좋습니까?》

처녀는 태혁의 바쁜 걸음을 지체시키고있는데 대한 보상이라도 치르듯이 송곳이를 살짝 드러내면서 귀엽게 생긋 웃어보였다.

(원, 이런 성화라구야.)

태혁은 성가스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처녀의 깜찍한 웃음에 항복이라도 하듯이 너그럽게 응했다.

《뭔데 말하오.》

《제가 엉뚱한 질문을 한다고 웃지 마세요. 요즘 우리 청년동맹원들은 자주 도당책임비서동지에 대한 말을 하면서 떠들어댑니다. 책임비서동지가 부모없는 고아들을 이삼십명씩이나 집에서 키워주신다고요. 그애들과 하루세끼 죽이면 죽 똑같이 잡수신다는데 정말이예요?》

태혁은 처녀의 너무나도 당돌한 질문에 당황히 미소를 지었다.

《그건 어디서 난 소리요?》

《다들 그러는데 틀림없대요.》

《동무.》

태혁은 어이가 없어 허우대가 큰 몸을 접수구앞에 굽히며 가만히 말해주었다.

《그건 꽝포야 꽝포!》

《어마나!》

처녀는 멀리서 웅글게 울려오는 대포소리같은 태혁의 말을 듣고 손등으로 커다랗게 벌린 입을 가리웠다.

《그 코흘리개들을 이삼십명이나 모여놓으면 우리 집이 콩나물시루가 되게? 내 그래서 새빨간 거짓말이라는거요. 우리 강계엔 부모없는 아이들을 데려다 키워주는 육아원, 고아원이 있소. 모두 합해서 사백명가량되니 그 애들한테 소속된 부모, 취사원, 의사들도 약차하오. 식당노르마로 말하면 우리 집 수준같은건 어방도 없소. 그애들한테는 아직 강냉이죽도 먹이지 않았거든. 그런데 내가 뭣때문에 제 집에다 수두룩히 끌어다놓고 고생시키겠소. 그렇잖아?》

태혁은 빙긋이 웃고 이젠 들어가도 되지 않겠느냐는 시늉으로 눈을 끔벅였다. 처녀는 쌍까풀진 두눈이 올롱해서 그를 쳐다보다가 눈물이 글썽해서 말했다.

《책임비서동지, 어서 올라가보십시오. 부부장동진 방에 계십니다. 방금전에 금속공업부 부장동지가 만나고 돌아갔으니까요. 방은 어딘지 아십니까?》

처녀가 비로소 생긋 웃으면서 물었다. 어찌도 사랑스러운지 그의 복성스러운 량볼을 쓸어주고싶었다.

《그래, 알구 있소.》

태혁은 처녀가 두손으로 친절하게 돌려주는 신분증을 받아 잠바 웃주머니에 넣고 리성하의 방으로 찾아가면서 생각했다. 리성하부부장도 저 귀여운 처녀처럼 자기를 적극 도와나서면 얼마나 좋을가 하고··· 아무튼 어려운 걸음을 했지만 이만하면 마수거리가 괜찮은셈이였다. 리성하도 자강도태생이니만큼 아무리 전력이 긴장해도 자기의 딱한 사정을 들으면 모른다고 딱 자르지는 않을것이다. 태혁은 그러지 않아도 이전에 정무원에서 사업할 때부터 리성하와는 자주 상종하며 친밀하게 지낸 사이였다. 오늘까지 그들의 관계가 가깝게 유지되여온것은 전적으로 태혁의 안해 신숙경의 덕분이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지난 조국해방전쟁때였다. 당시 후방병원 간호장이였던 신숙경이가 담당한 호실에 강계출신의 포병소위가 입원해있었다. 금방 전선에서 호송되여왔을 때만 해도 전혀 회복될 가망이 없다고 했던 중상자였다. 세차례나 어려운 수술을 이겨내며 구사일생으로 소생한 소위는 무서운 고민을 안고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목숨은 건졌으나 전선으로 다시 나갈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린것이였다. 온통 붕대로 둘러감은 그의 얼굴은 늘쌍 찌푸둥했다. 강계사람들이 유순하다지만 그는 매일밤 뜬눈으로 밝히면서 몸부림쳤다. 그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번뜩이면서 의사에게 달려들어 《나를 왜 살렸소!》라고 무례한 언사를 퍼붓는 바람에 병원안에는 자주 소동이 일어났다. 저러다가 정신착란이 일어나지 않을가 싶어 진정제를 먹이려고 해도 소위는 간호장쯤은 우습게 여기며 약봉지를 방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렇게 사납게 굴던 소위가 한번은 신숙경의 손을 잡고 전투장에서 물러서게 된 자기의 분한 마음을 토로하며 황소의 영각같은 울음을 터뜨리자 그 광경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후 소위는 후방병원이 놈들의 폭격을 당한 날 불타는 입원실안으로 뛰여들어가 환자들을 구원하다가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소위가 남기고간 전투가방안에는 고향의 어머니한테서 받은 한장의 편지가 소중히 간직되여있었다. 승리하고 꼭 살아서 돌아오라는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이 담겨있는 편지를 읽은 숙경은 얼굴을 싸쥐고 흐느꼈다. 그때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신숙경은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부대가 강계에 주둔한 기간 잠간 짬을 내여 소위의 고향집에 들려보았다. 류동산밑의 나지막한 동기와집, 울바자도 없는 뜨락안에서 포병소위의 동생이 군복차림의 낯선 처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군수공장에 다니는 어머니는 맏아들이 전사한 소식을 받은 후로 공장에 나가서 살며 집으로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유별나게 머리가 크고 눈망울이 부리부리하게 생긴 동생은 신통히도 형의 얼굴을 비껴닮아 숙경을 놀라게 하였다. 동생은 그날 이전에 형이 그런것처럼 숙경의 손을 잡고 눈물이 그렁해서 애원했다. 형의 원쑤를 갚을수 있게 군대에 입대시켜달라고!··· 그의 절절한 부탁을 들어줄수 없는 숙경은 가슴이 아팠다. 그때 열다섯살밖에 되지 않던 소위의 동생, 그가 바로 리성하부부장이였다··· 리성하는 자기의 인생에 한순간 얼핏 비꼈다 사라져버린 후방병원 간호장을 잊지 않고있다가 몇해전에 공화국창건절날 김일성광장의 초대석에서 감격적으로 만나 통성을 했었다. 이튿날 리성하부부장의 집에서는 태혁의 부부를 초빙하고 요란한 성찬까지 마련하였다. 신숙경은 그 뜻깊은 좌석에서 어제날의 더벅머리 강계청년이 우리 나라 《전력부문의 왕!》이 되였다고 환성을 올리였다.

자강도발전소건설련합기업소 지배인으로부터 전력공업부 부부장으로 승진한 리성하는 행정일군일뿐아니라 과학자로서의 능력과 재능을 겸비한 남다른 장점을 소유하고있었다.

지금도 리성하는 전력공업부 부부장의 책임적인 직무를 맡아보면서 짬짬이 나라의 전력공업발전에 보탬이 될수 있는 가치있는 론문들을 발표하는 일군으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그의 명석한 두뇌와 열정에 탄복해마지 않는 동료들중에는 일찌기 40대부터 부부장의 앞머리카락이 성글어지기 시작한건 밤마다 자기 집 서재에 구겨박혀 머리를 혹사한 후과라고 즐겨 말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다.

태혁이도 언제인가 리성하가 자기의 때이른 탈모증을 귀찮게 여기며 조심히 대머리를 쓸어만지자 《부부장동문 아직도 젊었군. 그래도 사람들이 부부장동무의 대머리속에 전국의 발전소들이 다 들어있다고 부러워하던걸.》하고 웃어준 일이 있었다.

태혁의 말에는 조금도 과장이 없었다. 실제상 리성하는 전력부문의 거장답게 높은 실무에 능숙한 사업수완을 소유한 흠잡을데 없는 일군이였다. 리성하는 남달리 성격도 호방하여 자기 부문만이 아니라 다른 부문일군들과의 교제범위와 안면도 넓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태혁은 그러한 리성하에 대한 기대도 크거니와 막다른 형편에서 벼르고 찾아온 걸음인것만큼 어떻게 하든지 전천탄광의 전력문제만은 기어코 해결받을 결심이였다.

마침 일이 뜻대로 되려고 그러는지 2층복도로 올라가자 리성하가 자기 방에서 나오다가 그를 먼저 알아보고 큰소리로 반겨맞았다.

《원 이런! 책임비서동무가 어떻게 오셨습니까?》

태혁은 한팔을 버쩍 쳐들고 다가오는 리성하의 손을 마주 잡으며 빙긋이 웃었다.

《무고하셨소? 부부장동무.》

《저야 뭐 일년열두달 재채기 한번하지 않는 강질인걸요. 책임비서동무의 심장질환은 어떤가요?》

태혁은 자기도 별반 관심하지 않고 지내는 건강을 걱정해주는 리성하가 무척 고마왔다.

《일없소. 그럭저럭 견딜만 하구만.》

그들은 한동안 서로 손을 잡은채 놓지 못하고 마주 서있었다.

《얼굴색이랑 시원치 않군요. 자강도인민들이 고생한다는 말은 자주 듣지만 책임비서동무까지 이럴줄은 몰랐는걸요.》

《내라고 다를게 있겠소.》

《책임비서동문 언제봐도 여전하시군요.》

오래간만에 찾아온 태혁이와 허물없이 인사말을 나누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 리성하는 창가의 긴 쏘파를 가리키며 량해를 구했다.

《잠간만 여기에 앉아 계십시오. 제길 요즘은 우리 일이 아예 말이 아닙니다. 엉망이라니까요.》

《어서 맘놓고 가서 볼일을 보시오.》

리성하가 방에서 나가자 태혁은 담배를 꺼내여물고 방안의 여기저기에 눈길을 던졌다.

책상우에 무질서하게 쌓여있는 두툼한 책들, 담배꽁초가 수북이 찬 파르스름한 유리재털이옆에는 시허옇게 재티가 흩날린대로 있었다. 이전에는 리성하의 사무실이 이 정도로 어수선해보인적이 없었다. 그때와 너무도 대조되게 잘 거두지 않은 방은 리성하도 어딘가없이 마음의 안정을 잃고 되게 들볶이우는 일군임을 말해주는듯 했다. 맞은켠에는 그 무슨 거대한 작전지도와도 같은것이 벽의 옹근 한면에 요란하게 붙어있었다. 한참 자세히 바라보니 전국의 수력발전소들과 화력발전소들의 배치, 송배전망들의 분포상태가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기록되여있는 세밀지도였다. 푸른색, 암갈색의 지형표식들과 등고선, 크고 작은 강하천의 위치를 표식한 선들, 화살부호들로 가득찬 지도만이 이 크지 않은 방이 나라의 전반적인 전력을 통솔하는 사령실이나 다름없으며 그가 전력공업부문의 무시할수 없는 실력자임을 여실히 보여주는듯 싶었다.

얼마후 리성하가 비대한 몸에 혈색이 불깃한 얼굴을 하고 방으로 급히 들어오며 쾌활하게 말했다.

《이거 정말 안됐습니다. 빈방에 귀빈을 너무 오래 혼자 앉혀놔서··· 여간 인사불성이 된것 같지 않군요.》

리성하는 두드러져나온 이마와 떡 벌어진 어깨우의 실한 목덜미를 손수건으로 문지르면서 태혁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별소릴··· 난 부부장동무가 문전축객을 하지 않은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기는 사람이요. 요즘에야 전력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들로 이 방의 문짝이 불이 날 지경이겠는데말이요.》

《아무리 그렇기로 책임비서동무를 박대했다가 현이어머니한테 뺨맞자구요?》

리성하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통쾌하게 웃고나서 《그래 현이어머니는 잘 있습니까? 이따금 평양의 맏딸네 집에 나들이를 오겠는데 나한테도 좀 들리라고 하시지요. 이러다가 자칫하면 얼굴도 잊어먹겠군요.》라고 즐거움에 차서 말했다.

태혁의 안해 신숙경을 화제에 올린 리성하는 한결 낯빛이 밝아졌다. 전쟁때 형이 전사한 후 자기 가정을 위안하려고 강계의 초라한 동기와집으로 찾아와준 간호장에 대한 고마움을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있는 그였다.

《말두마시오. 딸네 집이 다 뭐요. 이젠 년로보장나이가 되여 집에서 돼지를 치느라 꼼짝달싹할 사이가 없이 돌아가오.》

그 말에 리성하는 어처구니없어 하며 태혁을 쳐다보았다.

《가부간 책임비서동문 유명하군요. 평양에 있을 때 예술체조를 시킨다던 딸 현이를 자강도에 데리고가서 공장 선반공으로 집어넣질 않나. 이젠 부인마저 돼지사양공으로 만들었군요. 정말 가부장적인 모범세대인걸요.》

태혁은 자기를 집안의 굉장한 독재자처럼 몰아대면서 나무람하는 리성하의 말에 허허 웃어버리였다.

부부장이 서로 허물없는 사이여서 아무렇게나 험구를 씌우며 비난해도 년로보장을 받고 집에서 놀고있는 안해가 돼지를 기르는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였다. 이전에 딸 현이가 예술체조에 취미를 가지고있었던건 사실이지만 그 애가 강계기계공장에 취직한것도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선택한 직업이였다. 그런 현이여서 태혁은 여간 딸을 기특하게 여기지 않는데 리성하의 입에서 왕청같은 불만이 터져나오니 웃을수밖에 없었다.

《결국 도당책임비서의 〈벼슬자리〉에 어울리게 제 집사람들을 호강시키라는 말인데··· 부부장동무의 권고에 넘어갔다가 우리 집안이 비단보자기에 싼 개똥처럼 될것 같지 않소?》

《됐습니다, 됐습니다.》

태혁의 걸죽한 입담에 말문이 막혀버린 리성하가 기겁하여 손을 활활 내저었다.

《아무렴, 제가 책임비서동무의 능변을 당해낼라구요. 이젠 저한테 찾아온 용건이나 이야기하시구려.》

《앙갚음을 당하지 않을가-》

태혁이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뭐 말하나마나 뻔하지 않소. 전력공업부 부부장을 찾아왔을적에야 다른 일이 있겠소?》

《물론 저도 대체로 짐작은 합니다만···》

태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쏘파의 등받이에 몸을 젖히였다.

《부부장동무야 자강도에 고향을 둔 사람이니 잘 알지 않소. 온통 산밖에 없는데다 공장들은 멎어서고 작금년에 연거퍼 큰물피해까지 입어 형편이 험악하오. 모두들 변변히 먹지 못하지. 살아있는것이 기적이요. 기대앞에서 쓰러지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하오. 사흘전엔 장군님께서 희천공작기계공장의 실태를 보고받고 너무나 가슴아파서 공장으로 찾아오셨소.》

《그게 사실입니까?》

리성하가 꿈쩍 놀라며 그를 쳐다봤다.

《그날 장군님께서 어떤 괴로운 마음을 안고 돌아가셨는지··· 눈물이 나서 이루 다 말할수 없소.》

두 일군은 침울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태혁은 가슴속의 공허, 절망감을 참기 어려워 담배를 붙여 물었으나 소태를 씹는것처럼 입안이 썼다. 쏘파에서 엉거주춤 일어난 그는 둬모금 피우다만 담배불을 재털이에 눌러끄고 도로 앉았다.

《우린 죄진 심정이요. 어떻게 하든지 도안의 인민들을 먹여살려야겠는데··· 며칠전엔 전천탄광이 침수되여 그곳 탄으로 겨우 돌아가던 지방산업공장들까지 다 멎어버렸소. 전력이 보장되여야 물을 퍼낼게 아니요. 전천탄광이 생산을 못하면 우리 도의 형편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어려워질수 있소. 아무래도 부부장동무가 좀 힘써줘야 할것 같소.》

워낙 남한테 구차스런 소리를 하기 싫어하는 태혁은 생겨먹은대로 투박하게 말하고 턱밑을 쓸어만졌다. 뭐든지 되면 되고 안되면 안된다, 그처럼 결단성있게 일처리하는 그의 성미를 모르지 않는 리성하는 무척 조심스러워하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도행정위원회 부위원장이 전화를 해서 알고있었습니다.》

《그렇소?》

태혁은 그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있었다.

리성하의 시들한 말투로 보아 장관우부위원장에게 어떤 대답을 주었겠는가 하는것만은 어렴풋이 짐작할수 있었다.

《정말 딱하군요. 장관우 부위원장은 자기 사무실에서 전화로 부탁했는데··· 책임비서동문 이렇게 불원천리하고 찾아왔으니말입니다.》

《그게 무슨 큰 문제요.》

《저도 전화로 부탁했다고 해서 해결해줄걸 안해줄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사무실에 앉아 전화질이나 하는 일군이 있으니 책임비서동무가 이런 걸음을 한것 같은데··· 마음이 썩 좋지 않군요.》

《그건 공연한 오해요.》

태혁은 가뜩이나 찾아온 일이 될지말지한 판에 장관우부위원장까지 비호해나서려니 여간 진땀이 나지 않았다.

《내가 전력문제때문에 평양으로 올라온걸 알고있으니 걱정이 돼서 전화를 했을거요. 부부장동무와는 학창시절의 동창이고 막역한 사이가 아니요! 괜히 부위원장동무를 탓하지 말구 우리 일이 되는 방향에서 의논해보기요. 하루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탄광은 구원될 가망이 없소.》

태혁은 그로 하여 초래될 후과에 대해서는 구태여 중언부언하지 않았다.

방바닥에 눈길을 박은 리성하는 두손을 힘주어 깍지꼈다. 투실투실한 손가락마디들에서 으득으득 아츠러운 소리가 났다. 리성하는 마치도 전천탄광에 필요한 전력이 아니라 자기 체내의 마지막힘을 짜내려고 모지름쓰는 사람같았다. 그것을 괴롭게 지켜보던 태혁은 부질없이 시간만 끄는것 같아 마지막으로 타협안을 내놓았다.

《정 막부득이한 경우엔 말이요. 난 도안의 다른 공장들에서 전천탄광에 전기를 끌어올수 있는 림시조치라도 취해줬으면 하오.》

《다른 공장의 생산을 죽인다는 말인데 정무원에서 승인하겠는지··· 토론해봅시다.》

《미안하오.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해서···》

《뭐, 거기만인줄 압니까. 지금은 어디서나 눈만 뜨면 전력을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목청을 돋과댑니다. 정신을 차릴수 없을 지경입니다. 하지만 전력이 있어야지요. 정말 죽여줍니다. 동무네 전력공업부가 떨떨히 일하여 나라의 경제를 망쳐먹는다고 욕지거리를 퍼붓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압니까.》

리성하가 허거프게 웃으며 좀전처럼 손가락마디에서 소리가 나게 다시금 두 손을 꽉 비틀어잡았다. 그의 말을 들어봐선 도무지 전력문제가 풀릴수 있는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안타까우니 그럴테지. 아무튼 전력문제는 해결해야 하지 않소.》

《지금 상태에서는 암담합니다. 책임비서동무도 잘 알다싶이 우리 나라 발전소들은 대체로 전후에 다른 나라들에서 들여온 설비인데 사람의 수명에 비기면 로화기에 처해있는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설비들이 불량하여 자기 출력을 내지 못하지만 우린 속수무책입니다. 이전에 사회주의시장이 운영되던 때와 달리 요즘은 발전기의 설비를 하나 교체하자고 해도 적들이 방해책동을 놀아서 부르는게 값입니다. 아이보다 배꼽이 더 큰격이 되고말았지요. 얼마전 장군님께서는 이런 실태를 료해하시고 놈들의 악랄할 경제봉쇄와 압력에 대처하여 어떻게 하면 전력문제를 시급히 풀수 있겠는지 토론하고 보고할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행군의 간고한 시기이지만 이번 기회에 장군님의 결론을 받고 대담하게 태천발전소와 안변청년발전소 2계단공사, 새로 보천발전소건설을 내밀기로 큰 마음을 먹었습니다. 거기다 조미회담에서 합의된 경수로까지 받아내면 전력문제를 능히 해결할수 있다고 보았지요. 그런데 문건을 올린지 열흘이 지났지만 아무런 결론의 말씀도 없으시여서 속이 새까매 있는중입니다··· 정말 가슴이 탑니다.》

《음···》

태혁은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목석처럼 앉아있었다. 말이 더 나가지 않았다. 남의 사정은 안중에도 없이 찾아와서 전력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한 자신이 어쩐지 민망스럽게 생각되였다. 전력공업부 일군들이 안타까운 나날을 보낸다지만 그들의 문건을 받아보시고 결론을 주지 못하시는 장군님의 심정인들 오죽하시랴 싶었다.

《부부장동무, 괜히 괴롭혀서 미안하오.》

태혁이 쏘파에서 육중한 몸을 일으키자 뒤따라 리성하도 천천히 일어났다.

《뭐, 도와드린게 없어 안됐습니다. 며칠째 우리 전력공업부건물안은 이렇게 조용합니다. 어느 방에 들어가봐도 모두들 근심에 잠겨 컴컴한 얼굴로 앉아있지요. 이젠 퇴근시간이 지났는데 우리 집에나 함께 갑시다.》

《아니, 아니··· 난 가야 하오.》

태혁은 그만 손을 내저어보인 후 리성하와 황황히 작별인사를 나누고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리성하가 송구스런 낯빛을 띠고 복도로 따라 나오며 친절히 바래워주었지만 태혁은 무거운 마음에 잠겨 경황없이 걷느라 그런줄도 몰랐다. 잠시후 전력공업부 마당으로 나가 승용차에 오른 때에도 태혁은 앞이 막막하여 의자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책임비서동지, 어디로 가시렵니까?》

《돌아가기요.》

태혁은 힘없이 말하고 두눈을 조용히 감았다.

전천탄광 지배인실에서 장군님께 자강도의 전력사정을 보고드리려고 수화기를 들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 수화기를 놓기를 잘했어··· 장군님께서도 나라의 긴장한 전력문제때문에 고심이 많으신데 무턱대고 전력공업부로 찾아온 내가 어리석었지. 너무도 심중이 복잡하여 그는 차가 달리는지 서있는지도 분간할수 없었다.

운전사도 그의 울적한 기분을 감촉하고 승용차를 조심히 몰았다.

그러나 이날 태혁은 자기가 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리라는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