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벌 33

 

33

 

아침 일찍 일어난 문영숙은 방문이 별로 환해서 날이 다 밝은줄로 생각했다. 그래 덤벼치며 부엌에 나가 문을 열고 내다보니 뜨락에 흰눈이 밤사이에 포근히 내려앉았다. 그 흰눈때문에 방문이 환했었다.

부엌에 불을 지피고 쌀을 씻어 가마에 안친 다음 밖에 나가 눈을 쓸었다. 그러는 동안 시어머니가 깨여나고 아이들이 일어나 세면을 하느라 분주탕을 피웠다. 조반을 먹은 후 설겆이를 하고 가마속에 남아있는 더운물이 아깝기도 했거니와 오늘 수령님을 모시고 진행하는 협의회에 참가하게 되여있어 먼지오른 머리를 감아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대야에 물을 퍼냈다. 머리핀을 뽑아 부뚜막에 놓고 머리카락을 흐트려 더운물에 담그었다. 숱이 많고 칠흑같은 머리카락들이 대야에 가득찼다. 비누를 칠하고 비빈 다음 물로 깨끗이 씻고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말끔히 닦아 말리웠다.

씻은 머리를 틀어올려 머리핀으로 고정하려는데 밖에서 그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계십니까?》

작업반원이 찾아온 모양이다. 무슨 일로 이토록 일찌기 집에 찾아오는것일가?

《예. 좀 있으라요. 방으로 들어가 기다려요.》

문영숙은 이렇게 대답하며 머리핀을 마저 꽂았다. 그런데 밖에서 찾아온 사람이 부엌문을 두드렸다.

(성미두 급하지.)

하며 부엌문을 여는 순간 문영숙은 깜짝 놀랐다. 수령님께서 볼우물을 지으며 환하게 웃고계시지 않는가! 작년 가을 이 암화부락의 탈곡장을 찾으신 그이를 가까이에서 뵙는 영광을 지녔던 문영숙이다. 그날에 그이께서 하신 말씀들이 가슴속에 남아있고 웃으시던 모습이 항시 머리속에 새겨져있었다.

문영숙이 반가운 나머지 떠들썩하게 인사를 드리였다.

《아이, 수상님! 어떻게!··· 어서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괜찮소.》 수령님께서는 문설주를 짚고 부엌안을 살펴보시였다.

《아침에 뭘해 자셨소?》

문영숙이는 그 예쁜 얼굴에 홍조가 피여나 생신한 한송이 꽃처럼 보였다.

《밥을 해먹었습니다.》

《무슨 밥을 해자셨소?》

수령님께서는 여전히 서글서글 웃으며 물으시였다.

《흰쌀밥을 해먹었습니다.》

《아, 그래!》 수령님께서는 대견하여 뒤에 선 사람들을 얼핏 돌아보고 다시 문영숙이에게 말씀하시였다. 《원래 청산리사람들은 밥을 해먹어도 흰쌀밥을 해먹었고 죽을 쑤어먹어도 흰죽을 먹었지!》

부엌문에서 물러선 수령님께서는 문영숙의 시어머니가 기다리고있는 아래방쪽으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그이께서는 시어머니의 인사를 받고 토방에 올라서시여 그와 담화를 하시였다. 두 손녀는 학교 가고 손자가 할머니와 함께 있었다.

낭자를 틀어올려 머리핀으로 고정시킨 머리카락에 유난히 윤기가 흐르는 문영숙이 부엌에서 나와 담화에 참가했다.

《작년에 몇공수 벌었소?》

《480공수를 벌었습니다.》

《많이 하였구만. 남편은 뭘하오?》

문영숙이 머리를 떨구고 전쟁시기 전선에 나가 싸우다 전사했다고 나직이 대답올렸다.

수령님께서는 녀인에 대한 동정을 금치 못하시며 잠시 서계시였다.

《음, 혼자서 고생이 많았겠구만.》 그이께서 책상우의 로력수첩들을 보시며 말씀하시였다. 《거기다가 작업반장사업을 한다니 얼마나 힘이 들겠소?》

문영숙은 좀 부끄러워 상긋이 미소를 지으며 《도움을 받으며 반장사업을 하고있습니다.》하고 대답을 드리였다.

《그래도 남들보다 곱절 힘들테지.》 그이께서는 토방을 내려서시였다.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는데 여기는 좁으니 리당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어봅시다.》

《예, 수상님!》

문영숙은 그제야 자기가 너무 늦잡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리당사무실에 가있어야 할터인데 수령님께서 먼저 오시지 않았는가.

김일성동지께서는 부부장, 리당위원장, 관리위원장과 함께 삽짝문을 나서시여 리당사무실로 향하시였다. 사무실은 수령님께서 리내의 초급당단체위원장들, 일부 작업반장들과 핵심당원들과 담화하실수 있도록 걸상들을 들여다놓는 등 준비가 되여있었다.

리당위원장의 자리에 앉으신 수령님께서는 지도그루빠가 제출한 담화대상들에 대한 자료, 관리위원회와 조합의 구성, 작물별 생산계획 대 실적자료들을 대충 훑어보시였다. 그이께서는 그러한 문서가 아니라 농민들을 만나시려는것이였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시려는것이였다.

《당원들이 다 어디 있습니까?》

《민주선전실에서 대기중에 있습니다.》

《다들 들어오라고 하시오.》

핵심당원들이 리당위원장의 뒤를 따라 들어오며 수령님께 인사들을 드리였다. 수령님께서는 일어서시여 그들을 맞이했다.

자리들을 정리하고 앉자 그이께서는 머리정돈을 깨끗이 하고 빨아서 다린 새옷들을 입었으나 해볕에 타고 들바람에 그슬어 얼굴들이 하나같이 검실검실한 당원들을 둘러보시였다. 아침에 만나셨던 작업반장(문영숙)도 보였다. 수령님께서는 이 사람들중에 리종수로인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시였으나 그의 듬직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서운하시여 로인의 건강상태가 어떤가고 물으시였다. 유근재가 산보를 하는 정도라고 말씀드리였다.

《다행이요. 그 로인의 아들이 초급당단체위원장을 하고있다는데 여기에 참가했소?》

유근재가 당황해하며 대답을 드리였다.

《아직 사업정지책벌을 벗지 못하고있는 상태여서···》

수령님께서 군당위원장 문성술을 돌아보시였다.

《동무들이 그가 책벌을 빨리 벗도록 잘 도와주지 못한것 같구만? 그가 초급당단체위원장으로서는 하지 못할 란동을 부렸지만 그 동기는 크게 문제시될것이 없지 않소?》

《예. 곧 사업에 착수하도록 하겠습니다.》

문성술이 대답올렸다.

《내가 청산리에 오면 리종수로인을 꼭꼭 만나는데 로인이 앓고있으니 아들이라도 참석해야 할게 아니겠소. 동무들이 리종수로인일가처럼 뿌리깊은 농민일가를 중시해야 하오. 청산리를 떠받들고있는 기둥의 하나란 말이요. 아들을 어서 불러오시오.》

리당위원장 유근재가 나갔다가 곧 들어왔다. 아마 사람을 띄운 모양이다.

《동무들이 과오를 범한 당원들을 처벌하기도 해야 하지만 그가 과오를 씻도록 부단히 도와주는것이 더 중요하다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로인의 아들 이름이 뭐든가?》

《리춘권입니다.》

《그래, 춘권이지. 리춘권이가 책벌을 받은지 언젠데 아직 벗겨주지 않고있나? 리당이나 군당에서 사람들의 운명에 깊은 관심이 없다는것을 말해주오. 동무들이 당원들을 평가하는데서 감정을 앞세우면 안됩니다. 편협해서는 안된단 말입니다. 원칙적이여야 합니다.》

관리위원장이 머리를 숙이는것이 눈에 뜨이였다.

수령님께서 한사람씩 담화를 하시였다.

리당위원장 유근재옆에 얼굴이 둥글고 눈이 억실억실한 녀성이 앉아있었다. 아까 유근재가 그를 녀맹위원장이라고 소개해드리였다.

수령님 ; 리녀맹위원장동무는 식구가 몇명이나 됩니까?

녀맹위원장 ; 세명입니다.

수령님 ; 누구누구 있습니까? 남편은 뭘합니까?

녀맹위원장 ; 남편은 1950년에 놈들에게 붙잡혀 피살되고 지금 어린아이들 둘과 같이 있습니다.

수령님 ; 가정생활에 곤난한 점은 없습니까?

녀맹위원장 ; 없습니다.

수령님 ; 공수는 얼마나 벌었습니까?

녀맹위원장 ; 380공수를 벌었습니다.

수령님 ; 아이들은 공부를 잘합니까?

녀맹위원장 ; 잘하지 못합니다.

수령님 ; 공부를 잘시키시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훌륭한 사람이 되여 장차 조합을 떠메고나가야 할텐데 다 최우등을 하라고 내가 말하더라고 꼭 전하시오.

녀맹위원장 ; 공부를 잘시켜 꼭 아버지의 뒤를 잇게 하겠습니다.

수령님 ; (중년의 듬직한 녀인에게) 동무는 어느 작업반에 있습니까?

작업반장 ; 고일 5작업반에 있습니다.

수령님 ; 가족은 몇명입니까?

작업반장 ; 다섯명입니다. 어린애가 넷입니다.

수령님 ; 남편은 어떻게 되였습니까?

작업반장 ; 남조선에 정치공작대로 나간 후 소식을 모릅니다.

수령님 ; 지금 무슨 책임을 지고있습니까?

작업반장 ; 작업반장을 합니다.

수령님 ; 넷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우며 작업반장을 하자니 헐치 않겠습니다. 녀성들이 수고를 많이 합니다.(문영숙에게) 동무는 1작업반장을 한다고 했지? 동무는 당생활을 몇년이나 하였소?

문영숙 ; 3년 하였습니다.

수령님 ; 여기 오기 전에 어디에 있었습니까?

문영숙 ; 태성리에 있었습니다.

수령님 ; 언제 어떻게 청산리에 오게 되였습니까?

문영숙 ; 16살때 출가해왔습니다.

수령님 ; 열여섯살에? 어떻게 되여 그 어린 나이에 청산리에 출가해오게 되였습니까? 살아온 경력을 한번 말해보시오.

문영숙은 두손을 마주잡고 눈길을 떨구었다. 쓰리고 아팠던 비참한 지난날, 아직 누구에게도 자기가 살아온 경력을 말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누구도 그 녀인에게 살아온 경력을 묻지 않았다. 천대와 멸시속에 살아온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온 과거사였기때문이였을가? 그래서 별로 관심을 돌리지 않았을수 있다. 그저 그 녀인의 당문건에 몇줄 안되는 경력이 적혀있을뿐이였다.

문영숙은 일생에서 처음으로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어버이수령님 앞에서 하게 되였다.

《저는 태성리에서 소작농의 둘째딸로 태여났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불행한 녀자였습니다. 제가 두살때 아버지가 사망했습니다. 집안의 기둥이 무너져 어머니가 슬피 울던 모습이 희미하게 남아있습니다. 어머니의 본가집에서는 어머니혼자 시부모를 모시고 아이들까지 데리고 젊은 나이에 고생하는것을 그냥둘수 없어 시집을 보내주려고 3년상을 치른 후 데려갔습니다. 저와 언니도 따라가려 했으나 조부모님들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곱살난 언니와 네살난 저는 울음속에서 어머니와 생리별을 하였습니다. (녀인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수상님, 이런 얘기를 다 해서 뭘 하겠습니까?》

《어서 이야기를 계속하시오.》

《언니와 저는 어려서부터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저는 열살나이에 벌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남의 집 아이보개를 했습니다. 아이를 보아주고 하루 세끼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손녀가 이제는 제밥벌이를 한다며 주름진 얼굴에 흐뭇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이듬해부터는 언니를 따라다니며 조부모님들과 함께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김매기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기억에 깊이 남은것은 종일 밭김을 매던 일입니다. 밭고랑은 왜 그리 길어보이고 해는 왜 그리 천천히 지는지··· 나긋나긋한 손에 호미를 쥐고 김을 매는데 팔목이 아프고 손바닥에 물집이 생겼습니다. 그래두 먹구살아야 하겠기에 호미질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종일 호미를 쥐고 밭김매기를 하느라면 저녁에 손마디들이 굳어져서 풀리지 않아 할아버지가 풀어주군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열어섯살이 된 해에 지주놈이 저의 인물을 탐내여 첩으로 데려가겠다고 강박했습니다. 손녀를 첩으로 주면 돈을 주고 첩으로 내놓지 않으면 소작지를 떼겠다는것이였습니다. 손녀에게 불행을 안겨주지 말아야 하겠다고 결심한 할아버지는 저를 시집보내면 지주가 어쩌지 못하겠지 하고 사방에 줄을 놓았습니다. 하지만 나처럼 가난한 아이를 누가 데려가려 하겠습니까? 마침 고일리에서 아이가 일만 잘하면 된다, 맨몸만 가지고와서 밥 한사발 떠놓고 잔치를 해도 일없다, 이렇게 제기하는 집이 나섰습니다. 그 집도 가난해서 잔치를 할 형편도, 색시 첫날옷을 해줄 형편도 못되였던것입니다. 지주의 첩으로 끌려가지 않는것이 급한것이여서 할아버지도 저도 승인하고 명색이 시집이라고 고일에 갔습니다. 그후 할아버지는 소작지를 떼우고 당장 한지에 나앉게 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더는 살아갈수 없어 산에 올라가 나무에 목매달아 한많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할머니는 거지가 되여 먼저 시집간 언니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아직까지도 저는 어머니, 언니, 할머니를 그후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고 소식조차 모릅니다. 우리 집은 이렇게 풍지박산나고말았습니다.···

시집이란데가 어찌도 가난한지 제가 시어머니의 옷을 빨아드리려 해도 갈아입을 옷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집에서 새로운 고생살이가 시작되였습니다. 시아버지는 타락해서 농사일과 살림살이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밤낮 술만 마시며 세상을 한탄하다가 해방되기전에 사망했습니다. 시어머니 혼자 국수를 눌러 팔아서 살아가는데 시아버지의 성화에 가슴에 재만 남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을적에 별로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원망하며 또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통곡을 했습니다. 남편은 보기가 드물었습니다. 열세살때부터 품팔이를 떠나 다녔던것입니다. 저보다 나이가 네살이나 우인데 그래도 이 남편의 극진한 보살핌이 있어 고달픈 시집살이를 이겨낼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성미가 칼날같고 왜놈이라 하면 이를 가는 사람인데 아버지가 살림살이를 망치고있는 집에 제가 있는것이 아마 마음의 위로가 된것 같았습니다. 가난속에서도 저희들 부부는 서로 마음을 의지해 살아갔습니다.

제가 스무살되던 해에 시외삼촌의 주선으로 지주의 땅을 소작으로 부치게 되였는데 소작지이긴 해도 농사지을 땅이 생기니 얼마나 기뻤던지! 그러나 지주놈이 어찌나 악착했던지 벼농사를 지었건만 흰쌀밥을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지주와 싸운것으로 하여 징용에 걸렸습니다. 남편은 도주하여 화학공장에 들어갔습니다. 지금의 기양기계공장입니다. 그뒤 시어머니와 고생하던 이야기는 더 하지 않겠습니다.

해방후에 남편은 고일마을로 돌아와 토지개혁에 참가했고 동진면당 조직부장을 했습니다. 이 시기 지주족속들과 종교쟁이들의 음모책동이 우심해서 남편은 발편잠을 못 잤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남포에 있는 도당학교에서 공부하던 남편이 급히 왔는데 원쑤치러 전선에 나간다고 하며 어머니를 잘 모시라고 부탁했습니다. 남편은 외아들이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내가 임신중이여서 아이가 곧 세명이 될 형편이였는데 아이들을 잘 키우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땅을 준 나라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자기는 전선에서, 저는 후방에서 잘 싸우자고 하며 우리 공화국은 이긴다, 어떤 역경에 처하더라도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한 이긴다, 그러니까 가장 어려운 시기가 와도 이 신념만은 변치 말라고 부탁하고 떠나갔습니다.

저는 전쟁전부터 녀맹위원장을 하였습니다. 일시적후퇴가 시작되자 아직 미국놈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반동들이 〈해방〉됐다면서 공민증을 길바닥에 버리고 〈태극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는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지주놈들과 그 아들, 손자들이 나타나서 〈치안대〉를 조직하고 숱한 당원들을 학살하였습니다. 저는 보산리로 피난갔습니다. 거기에 박정한 먼 친척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서는 저와 아이들, 시어머니가 찾아들어가자 처음부터 시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였습니다. 그런데다가 제가 거기서 막내를 낳았습니다. 산모로 남의 집에 누워있는것도 미안한데 애기가 젖이 나오지 않는다고 밤새 울어대니 제가 고달픈것은 둘째치고 주인집사람들 보기가 정말 괴로웠습니다. 숱한 입이 쌀을 축내는데다가 애기가 귀아프게 울어대니 주인집에서는 친척간의 사정 같은것은 념두에 두지 않고 로골적으로 떠날것을 요구했습니다. 주인집에서는 빨갱이 집 사람들을 숨겨두고있다가 발각되면 죽는다느니, 먹을것이 떨어졌다느니 하며 증을 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시어머니마저 앓아눕게 되였습니다. 남편이 부탁한 시어머니였습니다. 그러자 주인집에서는 송장을 치를수 없다며 당장 떠나라고 독촉을 하였습니다. 저는 갓난애기를 업고 앓는 시어머니를 부축하고 두 자식을 걸리우면서 그 집을 나와 눈보라치는 행길을 걸어가는데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는것 같았습니다. 다리가 막 떨려 더 걷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우리모두가 길바닥에서 얼어죽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재진격하는 인민군대를 만났습니다. 인민군대병사들은 저희들을 솜옷으로 감싸주고 밥을 해먹여주었습니다. 인민군대의 품에 안겨 김이 문문 나는 더운 밥을 먹고있는 두 어린것과 시어머니를 보느라니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내렸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인민군대입니까. 저희들은 이렇게 살아났습니다.

고일마을로 돌아와서 전시식량생산을 위해 농사를 짓는 한편 녀맹사업을 하며 다섯집씩 조를 무어 전선에 보낼 군복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전선에서 남편의 소식이 왔습니다. 전사했다는 통지서였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전쟁을 승리하고 서로 다시 만나 슬픔과 곤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고향땅과 조국을 지켜낸 이야기를 하며 새생활을 꾸려나가려 했던 희망이,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그것이 일시에 와르르 무너져내렸습니다. 이렇게 저도 어머니처럼 남편을 일찌기 잃었습니다. 이것이 다 지주나 침략자들때문이 아닙니까. 저는 이를 사려물고 일어섰습니다.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바느질을 하며 군복을 만들었습니다. 남편의 원쑤를 갚고 조국을 사수하는 길이 그것이였기때문입니다. 이 시기에도 반동들이 날치였습니다. 한번은 저의 집에 원쑤들이 밤중에 달려들어 식량을 빼앗고 짓고있던 군복을 다 찢어버리면서 악질빨갱이년을 칼탕쳐죽이겠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무서워 우는통에 옆집에서 자위대에 련락을 해서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전쟁이 승리한 후에는 협동조합을 조직하는 일에 나섰습니다. 전사자, 피살자유가족들은 자발적으로 조합에 들었으나 〈치안대〉가담자, 만행도주한자의 가족, 부농들은 조합에 들지 않았을뿐아니라 나쁜 여론을 돌리였고 숨은 반동놈들은 소를 죽인다, 랭상모를 죽인다 하며 책동했습니다. 남편이 전사한 저에게는 반동단체가담자나 처단자가족들이 한동네사람으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정책이 그들을 포섭해야 한다고 하며 미운것들을 찾아다니며 설복하여 조합에 넣었습니다. 농사짓기보다 이런 애군들을 다루는 일이 더 힘들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수상님만 믿고 고난을 박차며 오늘까지 살아왔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손에 쥐신 만년필을 굴리시며 한 녀성당원이 살아온 경력을 들으시였다. 녀인의 이야기에는 청산리농민들이 살아온 비참한 생활과 간고한 투쟁 그리고 시련을 이겨낸 승리의 기록이 담겨져있었다.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눈물이 나서 겨우 들었습니다. 동시에 투쟁을 잘했습니다. 시련을 이겨낸 굳세고 의지가 강한 녀성당원입니다.》

수령님께서 이와 같이 평가해주시였다.

《각계각층 군중을 묶어세우기 위해 노력한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듣자니 리춘권동무는 이 사업을 잘하지 못했다고 하던데··· 초급당단체위원장사업을 부담으로 여기면서 말이요. 리종수로인도 나한테 걱정스러운 말을 했댔소. 리춘권이를 불렀소?》

유근재가 안절부절하며 곧 올것이라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