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5


 
 

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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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색대들이 산비탈을 훑으며 내려간 뒤에도 한나절을 더 견디다가 골짜기에 내려왔다. 한영옥은 부축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무숲속에 앉아 쉴 때에도 슬픔이 가득한 둥실한 눈을 내려깔고 땅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볼뿐이였다. 참변이 벌어졌던 자기 집을 생각하고있었다.

동무들도 굳이 위로하지 않았다. 모두가 기진맥진했던것이다.

김기창은 어깨의 상처를 처치하고 내의를 찢어 처맨 뒤부터는 피가 흐르지 않고 통세도 심하지 않다면서 동무들을 안심시켰다.

지영갑은 눈확이 우묵해지고 볼까지 훌쭉해져서 넓은 이마만 두드러져보였다. 언제나 령리하게 깜박하던 그의 검은 눈은 피발이 서서 흐리터분했다. 그 모습을 여겨본 김기창은 자기 상처보다도 소대장이 괴로와하는것이 더 가슴아팠다.

그날밤 《누가 지휘관이요?!》하는 절망에 찬 부르짖음이 터져나오던 그 긴박한 순간에 자기가 소대장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한것만 같아 지금도 미안하고 죄송스러웠다.

총소리가 울린 그 순간에 한영옥이를 구출해야겠다는 생각을 소대장인들 어째 하지 않았겠는가! 사령부에 보고할 일이며 소조를 모험에 빠뜨려서는 안되겠다는 생각 등으로 마음이 착잡했겠지··· 그런데도 자기는 소대장이 겁을 먹은게라고 제나름으로 속단하고 싸창을 뽑아들고 육박해들어갔던것이다.··· 불의에 뛰여들어 란투를 벌려서 영옥이를 구출한것은 다행이였다. 그리고 나 하나가 부상당한것도 천만다행이였다.

그렇지만 소대장동무는 자기의 권위가 무시당해 저렇게 고민하고있다.

자기가 소대장에게 못할 짓을 한것만 같아 마음이 괴로왔다.

《소대장동무, 기운을 냅시다. 총화는 후에 하기로 하고 빨리 사령부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맥을 놓았다가 아주 쓰러질것 같습니다.》

《···》

지영갑은 고개를 숙이고 응대하지 않았다.

김기창이 웃으며 한 말에 더욱 심각해졌다.

김기창은 한동안 더 기다리다가 소대장이 그냥 앉아있는걸 보고 천천히 일어서서 산나물을 뜯기 시작했다.

《석동무, 우리 풀죽이라도 끓여먹기요.》

석동무도 풀을 뜯자 지영갑이도 움직였다.

풀죽으로 빈속을 달래고나서 다시 길을 떠났다.

밤에 들판을 꿰질러 강을 건너서자 끝없이 펼쳐진 수림속에 들어섰다. 적들이 싸다니지 않는 곳이여서 마음놓고 걸었다.

한낮의 태양은 따뜻한 빛살을 내려쏟고있었으나 나무가지들이 뒤엉킨 수림속은 오히려 서늘했다. 순간 경사를 이룬 산비탈에도 널직하게 펼쳐진 골짜기에도 분비며 가문비, 이깔나무들이 무성하고 참나무, 자작나무가 도간도간 움츠리고있었다. 가시덩굴을 들쓰고 잡초속에 쓰러져있는 진대통을 에돌아걸었다.

수림은 어딘지 낯익어 보였다. 척후로 앞에서 가던 김기창이 뒤를 돌아보며 기다리고있었다. 가까이 가니 헐어빠진 지하족을 내들어보이는것이였다. 바닥도 천도 해여질대로 해여진 신이였는데 젖었던 자리는 썩고있었다.

《우리 동무들이 버린거구만···》

지영갑이 생각없이 중얼거리자 석동무가 반색을 했다.

《기운 자리들을 보니 더는 신을수 없었겠소.》

김기창이 서글프게 웃으며 한마디했다.

《작년에 버린거요.》

그러자 지영갑이 생각난듯 중얼거렸다.

《작년 여름에 우리가 이 근처를 지나갔지.》

김기창은 손에 들었던 물건을 던지고 다시 앞에서 걸어갔다. 지영갑은 처져 걸으면서 소리없이 한숨을 지었다.

그렇다! 이곳은 작년 여름에 그들이 대오를 지어 활개를 치면서 행군해간 처창즈의 수림이였다.

지금 그들이 가는 쪽과는 정반대인 샤오하얼바령(소할바령)쪽으로 행군했었다. 그때엔 적의 추격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배고픈 고생도 없었으니 무장장비도 그쯘한 8련대의 전투서렬이 기세를 떨치며 걸었고 배낭에는 식량이 가득했었다.

그때 바로 이 수림속에서 사령부와 함께 기동하는 7련대와도 감격에 넘쳐 상봉했었다. 포위를 뚫고나와 놈들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짓조기고 오는 길이라는 신이 나는 소식도 들으면서 기쁨에 넘쳐 얼싸안고 돌아갔었다. 푸짐하게 차려놓은 야전식 들식탁에 둘러앉아 즐겁게 이야기도 하고 수림을 붉게 물들인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흥겹게 노래도 불렀었다.

장엄하고 씩씩한 《유격대행진곡》도 불렀고 다른 노래도 불렀었다. 경쾌한 무도곡도 불렀으며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혁명군을 맞이하던 근거지 아동단원들의 명랑한 가요도 화창했었다.

근거지에서부터 유격대생활을 시작했던 지영갑은 대부대들이 기동하며 종횡무진으로 적들을 족쳐대던 그 나날들에 혁명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것 같은 희열과 격동을 체험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의감에 불타고 영웅심에 들떠 학생운동에 나섰던 때와 같은 열정과 흥분이였고 3~4년만 잘 싸우면 지엔다오(간도)와 온 조선이 유격근거지와 같은 자유천지가 되리라고 믿었던, 세상을 모르고 혈기에 넘쳐 뛰여다니던 시절의 단순한 감정, 협애한 견해였다.

마을마다에 주둔한 《토벌대》, 산간오지에까지 뻗어가는 신작로와 전화선,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는 자동차들에 빼곡이 들어앉은 무장한 병정들, 하늘을 썰며 날아드는 비행대···

이즈음 유격대를 압살하려고 밀려다니는 적의 대부대들은 여러해전에 근거지를 도륙내려고 밀려들던 적군의 중대나 대대 정도가 아니였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관동군의 부대와 련합부대들이였고 세계를 제패하려는 일본제국이 마음먹고 벌리는 《성전》이였다.

샤오하얼바령(소할바령)회의에서 제시된 방침은 뚜렷한 신심을 주었으나 소부대활동은 몹시도 고적했다.

게다가 완서우툰(만수툰)에서 광산로동자들의 형편을 료해하면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조직에 묶어세우고 항쟁에 궐기시킨다는것이 쉽게 이루어질 일이 아님을 느끼였었다.

이번에는 평온하고 작은 왕바버즈마을에 파놓은 함정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며 어쩔새없이 마수에 걸려들번 했었다.

그때 그는 겁이 났었다.

죽음의 함정에 뛰여들 생각은 하지도 않았었다. 매복이 기다리고있을 그 마을에서 멀리 뛰려고만 생각했었다. 김기창이 싸창을 빼들고 함정을 향해 육박해갈 때 그는 사실로 산비탈을 타고 도망쳤었다. 소란하던 총소리가 뚝 그치자 그는 뛰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었다. 우둔한 놈이 범을 잡는다고 대원들이 무사히 돌아오는 소리를 듣자 그는 다시 산기슭으로 어정어정 내려갔었다.

어두웠으므로 그의 행동은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한영옥이를 업고 철수하면서 은근히 눈치를 살폈고 대원들이 무슨 기미를 채지 않았을가 불안해하였다.

총화는 후에 하더라도 사령부에 빨리 가자던 김기창의 말도 소대장의 잘못을 발가놓겠다는 소리처럼 들려 몹시도 께름했다.

수림속에는 흩날리던 락엽인양 삐라들이 희끗희끗 눈에 띄였다. 지난해 여름 유격대의 대부대가 행군해갈 때 밀림우에서 선회하던 적기들이 살포한것들인데 눈비에 젖고 봄볕에 마르면서 쭈그러들고 흙먼지를 들쓴채 수풀속에 널려있다. 간혹 행군하는 대원들이 짓밟고 간 신발자국도 찍혀있다.

그때 그는 삐라엔 주의도 돌리지 않았다.

《개놈들이 개수작하지!》

하며 동무들앞에서 기염을 토했었다. 한데 지금은··· 만사가 시들했다. 휘청거리는 다리를 벋디디고 걸으면서 (쓰러지지 말자. 쓰러지면 끝장이다.) 하고 속으로 자신을 다잡았다. 벌써 나흘째 낟알구경을 못하고 산나물만 끓여먹고있다. 매복지대에서는 그것도 없이 꼬박 굶었으니 기력은 진할대로 진했다. 눈앞에 드리운 나무가지들을 헤치며 나가기도 조련치않았다. 문뜩 풀섶에 내려앉은 무슨 사진이 찍혀진 하얀 종이한장이 해빛을 반사하며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흙먼지에 덞어진 지난해의 삐라가 아니라 이봄에 살포한 생생한것이였다.

호기심에 끌려 집어들어보았다 주머니 네개가 밖으로 두드러지고 목깃까지 단추를 채운 상의에 승마바지를 입고 장화를 신은 코밑수염이 희슥희슥한 다부진 사람과 볼이 둥실한 얼굴에 안경을 건 중키의 신사가 팔을 끼고 서서 미소하는 사진인데 그밑에는 설명문이 찍혀있었다.

《마쯔오까와상, 크레믈리에서 이오시프 쓰딸린과 회견, 일쏘중립조약체결!》

지영갑은 가슴이 후두두 떨렸다. 뒤면에서는 무슨 글귀가 가득차있었으나 읽지 못했다. 뒤에 오는 대원이 보는것만 같아 얼른 바지주머니에 쑤셔넣고 후들후들 걸었다.

(《일쏘중립조약체결》?!···)

그것은 청천벽력이였다. 눈앞이 어질어질해지면서 욕지기가 일었다. 머리속이 윙ㅡ 했다. 무슨 갈래판인지 종잡을수가 없다. 그 선명한 사진만 없다면 믿지도 않을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였다.···

쏘련이 일본놈들과 손을 잡다니. 지주, 자본가들을 때려엎고 로동자, 농민이 주권을 잡은 쏘련이! 자본계급과 자본주의국가들을 쳐부시고 세계혁명을 위해 매진하는 위대한 사회주의국가인 쏘련이···

위대한 사회주의10월혁명, 로동자, 농민의 국가이며 세계무산계급의 희망의 등대이고 혁명의 성새인 쎗쎗쎄르, 위대한 레닌과 쓰딸린. 그것은 그가 청년학생시절부터 너무나도 잘 아는 귀중한 이름들이고 그의 리념의 상징이였다. 그들은 근거지시절부터 그 리상을 위해 싸웠고 그 리상에서 힘을 얻고 고무를 받았었다. 그러기에 간고한 투쟁의 나날에 일제가 쏘련침공의 기도를 드러낼 때마다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자!》는 구호에 호응하여 배후교란작전으로 강력하게 지원했었다. 일제의 증대되는 무장《토벌》, 조여드는 경제봉쇄, 량도차단··· 갖가지 공세속에서도 은근히 쏘련을 믿으며 싸우는 터이다. 조선독립, 공산사회건설을 목적하는 혁명에서 쏘련은 리상의 나라였고 큰집이였다. 그 큰집이 적들과 화해하고 손을 잡았으니 이제는 누구를 믿고 어디에 의지한단 말인가?···

지영갑은 속이 메슥메슥하고 눈앞에서 파랗고 빨간 동그라미들이 어지럽게 맴돌아 향방없이 비칠거렸다. 뒤를 돌아보며 기다리던 김기창이 달려와 부축해주면서 걱정했다.

《소대장동무, 몸이 말짼 모양이구만.》

지영갑은 숨이 가빠하면서 한마디했다.

《좀 쉬기요.》

《그럽시다. 여기 그늘에 누우십시요. 내 제꺽 무얼 좀 끓이겠습니다.》

김기창은 그늘밑에서 락엽을 깔고 소대장과 한영옥이를 편안하게 눕혔다. 지영갑은 눈을 감고 죽은 사람마냥 활개를 던진채 까딱하지 않았다.

대원들은 산나물을 캐고 밥통에 물을 길어다 끓이기 시작했다. 한숨쉬고난 지영갑은 풀삶는 냄세에 내장이 뒤집히는듯 하여 코살을 찡기면서 느슨히 일어나 앉았다.

《누워있으십시오. 좀 더 우려야 합니다.》

하고 석동무가 말했다. 지영갑은 타고있는 모닥불을 보면서 《담배나 한대 있으면 좋겠구만.》하고 혼자소리를 했다.

《담배요? 나한테 비슷한게 있습니다.》

김기창은 꾀바르게 생긴 작은 눈에 웃음을 띠우고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푸릿하게 마른 나무잎사귀를 손바닥에 놓고 부스렸다.

《요전날 산뽕나무잎을 뜯어 건사했더니 담배비슷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종이에 말아 권하는것이였다.

지영갑은 쓸쓸하게 한숨을 쉬고 엽초를 붙여물었다.

《릉선을 넘으면서 보니 녹쓴 탄피가 널려있더군. 작년 여름에 7련대가 싸운 지역같소. 이 근처 어디에 일본놈들이 팡가치고 간 물건들이 있을수 있소. 그놈들이 전투후에 시체나 겨우 끌어가니까.》

김기창이 반색을 하자 석동무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서 먹을거나 있는가 찾아보겠소.》

지영갑이 일어서자 김기창이 만류했다.

《소대장동무, 누워쉬시오. 내가 갔다 오겠습니다.》

《아니요. 동무들이 쉬라구.》

지영갑이 부득부득 일어나서 걸어가니 대원들은 마지 못해 남았다.

《소대장동무가 지내 락심했어. 우리가 제멋대로 행동한것때문에 기분이 몹시 상했어.》

김기창이 우울하게 말하자 이쪽은 한숨을 쉬였다.

《그래두 영옥동무를 구출했으니 그 일은 괜찮은 셈이야.

그보다 3호련락소가 파괴되고 영옥동무의 부모님들이 희생됐으니···

가슴아픈일이지. 시내조직과 련계도 맺지 못하고···

사령관동지께서 실패한 보고를 드려야 하겠으니 소대장이 오죽 괴롭겠는가!》

그들은 풀밭에 누워쉬고있는 한영옥에게 들리지 않게 소곤소곤 말했다.

《놈들이 도처에서 발악한단 말이야ㅡ》

김기창이 심각하게 중얼거렸으나 이쪽은 끓고있는 밥통을 지켜보다가 바삐 뚜껑을 열어젖혔다.

《넘어나는군!》

혼자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생나물냄새에 코살을 찡그렸다.

《여기다 된장 한숟갈만 넣으면 기가 막힌데···》

《된장을 두구 감자 두알만 썰어넣으면 고기국이상이지. 난 감자장을 좋아했어. 어려서부터···》

저쪽켠에 비스듬히 누운 한영옥은 그들의 이야기엘 이랑곳없이 한손으로 가슴을 잡고 푸른 하늘을 멀거니 쳐다보고있었다.

지영갑은 반시간이 실히 지나서 돌아왔다. 쇠고리들이 벌겋게 녹쓴 잡낭 두개와 일본군대의 소가죽배낭을 잔디풀우에 던지고는 눈길을 피하면서 중얼거렸다.

《먹을건 없더군.》

김기창은 기관총 예비탄띠가 들어있는 배낭과 털양말이며 군가를 베껴쓴 수첩따위가 너저분한 잡낭을 뒤져보고 훌 던지면서 두덜거렸다.

《그놈들두 아마 량식이 떨어졌던 모양이지.》

《그아래에 실개울이 있는데 가재들이 많더군.》

《가재요?》하고 김기창이 반색하며 되물었다.

《가재를 구워먹으면 기운이 나지.》

석동무는 호기심을 품고 중얼거렸다.

《가재를 잡으려다가 동무들이 기다릴것 같아서 왔소.》

지영갑의 말에 김기창은 싱글벙글 웃고있었다.

《소대장동무, 재작년 가을 둔화(돈화)원정때 여러날 굶다가 가재잡이를 하던 일이 생각납니까?

사령관동지께서도 개울에 들어서서 가재를 잡았지요. 온 부대가 골안에 널려서 첨버덩거리며 가재잡이를 하지 않았습니까. 웃고떠들며 첨벙거리구··· 신비람이 났댔지요.》

《그래··· 생각나··· 참 흥성흥성 했댔어.》

석동무가 맞장구치자 지영갑은 만족한듯 웃었다.

《정말이지. 가재라도 잡았으면 좋겠소.》

《가재쯤이야 뭐. 석동무, 우리 가자구.》

김기창의 선도에 석동무가 따라가자 지영갑은 미타해하며 뇌였다.

《기창동무가··· 그 몸으로 어떻게 잡소.》

《일없습니다. 소대장동무, 가재는 한손으로도 얼마든지 잡습니다.》

《그렇다면··· 잡아오우. 여기서 푹쉬고 갑시다.》

두 대원이 사라져간뒤 지영갑은 산나물을 끓이던 밥통을 내려놓고 사위여가는 불을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수림속은 고요했다. 바람에 가랑잎들이 사락거렸다.

이번에는 누워있는 한영옥에게로 걸어가 한참이나 굽어보았다.

《영옥이, 무얼 그리 생각해!··· 눈물을 흘린대서 희생된 사람들이 살아나겠어?!》

《···》

《일어나라구. 일어서서 기운을 내라구··· 걸을만해?》

한영옥이는 천천히 일어나 앉아 머리를 비다듬었다.

《걸을만해요. 가재랑 구워먹으면 기운이 날것 같애요.》

한영옥이는 이전날을 그리듯 명상에 잠겨 웃으려 했으나 미소는 말라든 입술을 어설프게 일그렸을뿐이였다.

《가재야 무슨··· 까짓거.》

지영갑은 가까이에 앉더니 주머니에서 접은 종이를 꺼내 한영옥에게 주었다.

《이걸 보오.》

한영옥은 그것을 펼쳐 커다랗게 찍힌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글줄을 읽었다. 미간을 찌프리고 다시 한번 보더니 고개를 쳐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이게 사실이예요?··· <일쏘중립조약>이란게···》

언제나 선량하던 둥실한 눈에 의혹과 절망이 엉키고 말라터진 입술이 구원이라도 청할듯 떨리고있었다.

《···》

지영갑은 땅바닥을 굽어보며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말하기조차 두려운 사실을 확인하는상 싶었다.

《더러운것들!》

누구랄것없이 그렇게 지탄한 한영옥은 악에 받쳐 입술을 깨물더니 삐라장을 마구 구겨서 풀밭에 던졌다.

지영갑은 그것을 집어 반듯하게 펴면서 한숨을 쉬였다.

종이장이 구겨진걸 아쉬워하는듯 한 한숨이였다.

한영옥이는 그쪽을 외면한채 쌀쌀하게 앉아있었다. 서로의 심정을 맥짚어보는 그들의 머리우로 바람이 설렁거리며 불어지났다.

《세상일이 더럽게 돼가오. 믿자니 기가 막히고 믿지 않자니 안믿을수도 없고···》

《···》

《쏘련과 일본은 계급적원쑤여서 언제든지 전쟁이 터진다.

그런 기회에 우리도 일본놈들을 꺼꾸러뜨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때가 오기는 코집이 틀렸어.》

지영갑이 털어놓는 말에 한영옥은 고개를 숙이고 응대가 없었다.

《대세가 기울어졌으니 별도리가 없소.
사람이 한평생을 명대로 살아도 곡절이 많은데 남다른 고생길에 들어서서 지금같이 그냥 가다가는 왕바버즈에서처럼 함정에 빠지거나 박중돈이처럼 종적도 모르게 죽을거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소! 이젠 진저리나오. 고생길을 그냥 걸을게 아니라 어느 산속에 들어가 땅을 뚜져먹으면서라도 편안히 살아야지.》

한영옥은 고개를 쳐들고 의아하게 마주보다가 타이르듯 말했다.

《소대장동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다른 사람두 아니구···》

《세상일을 다 아는 사람이니 이런 말을 하는거요.

영옥이도 인제 이 세상에 누가 있나? 부모들이 있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나? 죽어도 아수해할 사람이 없는 제 한몸뿐인데. 고생을 사서 하지 말고 나하구 같이 가자. 내가 간다고 해서 일본놈들의 발밑에 기여들줄 아니?! 아니다. 산속에 들어가서 둘이 서로 의지하면서 살면 되는거다. 부대기를 일구어서라도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얼마든지 살아갈수 있다. 죽을 길에 들어서서 고생하지 말구 나하구 같이 가자.》

지영갑이 다정하게 말했으나 한영옥은 고개를 숙이고 응대하지 않았다. 그러자 지영갑은 처녀의 팔을 잡아 일으켜세우려고 하면서 재촉했다.

《일어서서 떠나면 된다.

가는 길에 먹을건 내 배낭속에 있다. 일본군의 배낭에서 꺼낸 고기통졸임이랑··· 우리 둘이 먹을건 충분하다!》

처녀는 굳어진듯 응하지 않았다. 수림속을 둘러보던 지영갑은 그제사 깨달아지는바있어 목갑에서 싸창을 뽑아들고 을렀다.

《으음- 너 지금 기창이랑 오기를 기다리는구나!

어림도 없어! 그 친구들은 가재잡이에 정신이 팔려 한시간안으로 못와. 가자! 나하구 같이 가면 살길이 생겨. 후회하지 않을거다.》

한영옥은 고개를 들었다. 불꽃이 튀는 눈길로 지영갑을 쏘아보면서 버티고 일어섰다. 비실비실 뒤걸음치는 그자를 향해 한발작 두발작 옮겨놓다가 소리내여 침을 뱉었다.

《퉤! 네놈이 그런 작자였구나 개-같은 자식!

쏴라! 나를 쏘아. 네놈을 따라가서 짐승처럼 살기보다는 이 자리에서 변절자의 총에 맞아죽는게 오히려 떳떳하다.

쏴라. 개자식아!

나한테 부모도 없고 애인도 없고 울어줄 사람도 없다고? 흥, 개같은 네놈도 잘 알거다.

우리를 혁명가로 키워주면서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친부모보다 더 귀중한 김일성장군님이 계신다.

친형제보다 더 살뜰한 동지들이 있다.

나는 죽는 길이라 해도 김일성장군님이 이끄시는 길을 따라가지 너같은 배신자를 따라가지 않는다.

비렬한 배신자! 쏠테면 쏘고 갈테면 가라! 짐승보다 못한 놈!》

한영옥의 규탄에 기가 꺾인 지영갑은 음험한 눈으로 이쪽을 견제하면서도 화해라도 바라듯 움츠러든 목소리로 뇌까렸다.

《나도 나쁜 사람이 아니다. 리상도 높고 포부도 크고··· 의로운 마음으로 혁명에 나섰던 사람이다.

고생도 고생이지만 형세가 기울어지고 희망이 무너지니 떠나는거다. 나를 원쑤로 여기진 말어라.》

그리고는 흘금흘금 뒤돌아보며 숲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한영옥은 그자가 사라진쪽을 쏘아보면서 굳어진듯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개울쪽에서 동무들이 오는 인적기가 들렸을 때에도 처녀는 신성한 그 자리를 지키려는듯 까딱하지 않았다.

《소대장동무 – 가재를 한자루나 잡았소.》

《넷이서 사흘은 넉넉히 먹을거요.》

명랑하게 소리치며 달려온 동무들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영옥에게로 다가왔다.

《소대장동문 어디 갔소?》

《소대장이 왜 보이지 않소.》

잠이라도 깨우듯 동무들이 잡아흔들자 한영옥은 《으흐흑ㅡ》 흐느끼면서 동지들을 부여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참고참아오던 분노와 설음이 일시에 북받쳐올라 오열에 떨면서 서럽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