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4


 
 

제 5 장

4

 

복지향《개척민》부락까지는 산을 타고 질러간대도 닷새길이 실히 되지만 그들은 밤새워걸어서 나흘째의 아침나절에 토성밖의 산등성이에 도착했다. 품팔이군의 행색을 한 그들은 잎이 돋아

지영갑소조는 산과 들을 휩쓸고 다니는 적《토벌대》와 순찰대들을 피해가면서 산길을 걸어 나흘째 되는 날 밤중에 왕바버즈에 도착했다.

마을이 건너다보이는 산비탈에 자리를 잡고 후면감시를 위해 산등성이에 한명을 매복시켰다. 나무숲에서 새우잠을 자고난 대원들은 추위에 오스스 몸을 떨면서 주변의 동정을 살폈다. 날이 밝아오자 대도로 건너편에 있는 마을집들이 뚜렷하게 보였다. 도로에서 갈라져나간 달구지길이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은 그 마을을 지나 나지막한 언덕너머로 사라져갔다. 집들에서 아침연기가 오르고 물동이를 인 아낙네들이 얼른거렸다.

아침해살이 퍼지기 시작하자 마을에서 아이들이 뛰여다니고 개들이 껑충거리며 감겨돌았다.

가둑나무줄기에 의지하여 마을을 살피고있던 한영옥이 속삭였다.

《우리 집에서 물길러나왔어요. 어머니 같애요.》

오동나무밑에 있는 우물쪽으로 늙은 녀인이 걸어가고있었다.

우물방틀에 동이를 내려놓고 드레박으로 천천히 물을 퍼올리더니 동이를 이고 집쪽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잠시후에 녀인은 물 한동이를 더 길어가지고 돌아갔다.

그들이 숨어있는 산비탈에서는 그집 뒤울안이 엇비듬히 보일뿐이였다.

조반을 치른 마을사람들이 연장을 메고 밭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아낙네들과 아이들도 올망졸망 뒤따랐다.

해가 높이 솟아오르자 한영옥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보이지 않아요!》

《늙은이가 기력이 진해 쉴수도 있지.》

지영갑이 녀대원을 안심시키면서 물었다.

《신호는 이상이 없소?》

《뒤울안 빨래줄에 빨래가 널려있지 않은걸봐서는 위험이 없는것 같은데··· 아버지가 왜 보이지 않을가?···》

한영옥이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디 나들이 갔을수도 있지.》

김기창이 그렇게 말하자 지영갑이도 공감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지 마오. 놈들이 무슨 이런 산간마을에까지 마수를 뻗치겠소!》

한영옥은 가볍게 한숨을 쉬였다.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나 시장기에 대해서는 누구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한낮이 기울무렵에 검스레하게 얼룩진 가마니짐을 실은 자동차들이 남쪽으로 질주해갔다. 이따금 황구령쪽으로 올라가는 차도 있었다.

산간마을의 봄날은 피로와 권태속에 저물어간다.

문득 영옥이네 집에서 어머니가 물동이를 이고 나타나더니 아침녘처럼 물을 두번 긷고는 더 나오지 않았다. 농군들이 밭에서 돌아오고 아낙네들이 우물가에 모여 푸성귀를 헹구다가 사라지군 한다.

한영옥은 불안해하였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도 굶주린 동지들에게 먹을걸 가져오기 위해서도 집에 들려야겠는데 자꾸 속이 떨리는것이였다.

황혼이 찾아들고있었다. 주림을 참으며 산비탈에 박혀있는 그들은 추위에 으슬으슬 떨었다.

《소대장동무, 지내 어둡기전에 내가 내려가서 담배집에 슬쩍 들려볼가요. 아까 지나가던 자동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담배를 사가지고 가는것 같던데···》

김기창이 그렇게 말하자 한영옥은 눈길을 떨구고 입술을 지그시 감빨았다. 자기가 나서야 할 자리인데 다른 동무들이 조급해하니 불안하기도 하고 불만스럽기도 했던것이다. 지영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다가 생각하던바를 입밖에 내였다.

《만약 저 련락소가 적의 감시를 받는다면 저 집과 련결되여있는 지하조직이나 련락선들은 이미 로출되고 파괴되였다는게 아니겠소!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한시바삐 돌아가서 다른 방법으로 련계를 취해야지.》

한영옥은 그 의견에 동감할수 없었다.

《그대로 돌아갈수는 없어요. 사령관동지께서는 지하조직과의 련계를 취하라고 우리를 파견하셨어요.》

《딱하군!》

지영갑은 한숨을 쉬였다. 한영옥이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안전신호는 돼있지만··· 이상해요. 아버지가 앓는다면 문병하러 드나드는 사람들이라도 있을텐데···》

《좌우간 그 집에 무슨 일이 있소. 물동이를 이고 다니는 늙은이의 걸음새가 영 맥이 없더군.》

《···》

한영옥은 입을 다물고있는데 락조의 빛에 또렷이 드러난 처녀의 모습을 여겨본 지영갑은 가슴이 섬찍했다. 귀엽게 동그스름하던 영옥이의 고운 얼굴은 굳어지고 웃음이 넘치던 커다란 눈에는 엄숙한 번뇌가 어려있었다.

원동의 기지에 들어가서 만났을 때 그리도 반가와 하던 한영옥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자기가 체류했던 쏘련의 도시와 마을들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눈이 둥실해져서 귀담아 들으면서 아이들처럼 기뻐하던 순진한 모습···

《···쏘련은 고사하고 난 우리 나라에 대해서도 잘 몰라요. 정치학습시간에 우리 나라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내가 무식하다는걸 깨달았어요.》

그때 자기의 무식을 상대방이 웃을가봐 부끄러워 얼굴이 발그레해져서 소심하게 쳐다보던 처녀의 순박함에 그는 오히려 감탄했었다. 동시에 자신을 어린 녀학생앞의 로숙한 교사로 느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녀자에게 무엇을 가르치거나 훈계하는것이 전혀 부질없는 일임을 지영갑은 깨달았다.···

마을쪽에서 된장끓이는 냄새가 구수하게 풍겨왔다. 입안이 말라들고 허기증이 심해져 앉아있기도 지겨웠다.

산비탈에 그냥 배겨있는것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어둠이 짙어가고 하늘에 별들이 가득해졌다. 산등성이에서 철수해 내려온 석동무가 보고했다.

《주변에 적정은 없습니다. 어제 밤이나 같습니다.》

지영갑은 속이 떨렸다.

(아무 일도 없는게 아닐가. 그렇지 않다면··· 여기가 큰 함정일가?) 하지만 불안을 나타내고싶지는 않았다.

그때 한영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대장동무, 제가 내려가보겠습니다.》

지영갑은 수긍도 만류도 할수 없었다. 소조공작에 경험이 없었을뿐더러 정황이 너무도 심각했던것이다.

녀대원은 어둠속에서 치마저고리를 갈아입더니 권총을 품속에 넣고 일어섰다.

지영갑은 (사령부에 돌아가야 하는건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결심품고나서는 녀대원을 멈춰세우지는 못했다. 자기의 공포감을 눈치챌것 같아서였다.

한영옥은 산기슭에 내려가 희벗이 사라진 도로를 살피고나서 속삭였다.

《적정이 없는 이상 총소리는 내지 않겠어요.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조심하오.》

지영갑은 훈계하듯 한마디했으나 말소리는 공허하게 울렸다. 한영옥은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지영갑이 한 말을 생각하는것이 아니라 어둠속을 살폈던것이다.

녀대원은 도로에 나섰다. 심장이 튀여나올듯 두근거렸으나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도로의 기슭을 따라 사뿐사뿐 걸어갔다.

개들이 짖어댔으나 문을 열고 내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우물가에 우중충하게 서있는 오동나무가 류달리 무시무시해 보여서 마음을 사려먹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터슬터슬한 아름드리밑둥에 기대서서 주변을 돌아봤다.

마을에서는 한점두점 등불이 꺼지고있었으나 자기집 정지문에는 불빛이 빤하게 어려있었다.

(아버지가 앓고계시는가?)

주변을 살피면서 집으로 걸어갔다.

부엌문을 열자 등잔불빛이 어스레한 정지간구들에 피투성이되여 쓰러져있는 아버지와 그릇당반밑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는 어머니의 절망적인 표정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골방문을 열고 나오는 낯선 사내를 보고 권총을 드는 순간 부엌안벽에 붙어섰던 자가 덮쳐들었다. 한영옥은 증오에 몸부림치며 방아쇠를 당겼다.

그놈이 쓰러지는 동시에 정지간에 내려온 놈이 허궁 뛰여들면서 부엌바닥에 넘어뜨리고 팔을 비틀었다. 권총이 손에서 떨어지자 두놈이 달려들어 량쪽에서 팔을 잡고 골방쪽으로 끌어갔다. 정지간구들우에서 태질하는 딸을 보고 그릇당반아래 웅크리고있던 어머니가 목놓아 울었다.

《영옥아- 어디 갔다가 이제사 오느냐-》

허나 다음순간 어머니는 넉두리속에서 정신이 든듯 꺼져들어가는 소리로 속삭였다.

《영옥아- 아버지의 담배쌈지···》

처녀를 끌어가던 병정의 군화발에 채여 물독밑에 쓰러져서도 어머니는 속삭였다.

《아버지 쌈지···》

두 병정은 문턱우에 발을 벋디디고 처녀를 골방속에 들어던졌다.

그리고는 따라들어와서 무릎으로 가슴을 누르면서 머리채를 잡아 젖히고 물었다.

《같이 온 놈들이 어디 있어?》

병정 한놈은 방바닥우에서 처녀의 팔목을 잡아 뼈가 튀여나게 비틀며 일본말로 무엇이라고 지껄였다.

《아아-》

한영옥은 비명을 질렀다. 머리채를 잡은 놈은 한손으로 턱을 으스러지게 비틀며 따지고 들었다.

《같이 온 놈들이 어디 있어?》

한영옥은 뼈가 부서져나가는 아픔을 견디여내면서도 흐리여지는 의식속에서 아버지의 담배쌈지와 함께 중요한 자료가 섞여있음을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사지를 비틀리는 판에서는 어쩌는 수가 없었다.···

총소리가 울린 순간 지영갑이 부르짖었다.

《함정이요!》

《갑시다. 소대장동무.》

김기창이 어둠속에 나서면서 재촉했다.

《뒤마당으로 뛰여듭시다.》

지영갑은 움직이지 않았다.

《매복이··· 쫙 깔렸을거요.

사령부에 실태를 보고 못하면··· 다른 동무들이 또 우리 꼴이 되오.》

《일없소, 있으면 있었지!》

석동무가 따라서며 속삭이자 김기창이 뒤돌아보고 말했다.

《소대장동문 여기서 엄호하다가 사령부에··· 보고해주시오.》

《누가 지휘관이요?》

지영갑이 뒤에서 화를 냈을 때 김기창은 벌써 밭고랑을 타고넘으면서 달리고있었다. 엉성한 울바자밑에 가서 석동무를 기다리다가 둘이서 뒤울안에 뛰여들었다. 골방문을 열어제끼자 너울거리는 불빛아래 레시바를 낀 무전수를 쏴제끼고 쓰러진 녀대원을 주리틀고있던 병정을 쏘았다. 그때 열려진 사이문 저쪽에서 대항하던 놈이 뒤통수를 방치에 얻어맞았다. 그자는 비칠거리다가 돌아서며 방치를 휘두른 녀인을 쏘았다. 김기창은 한쪽 어깨에 총탄을 맞고도 쓰러지지 않았다. 석동무가 부엌바닥에 뛰여들어 격투하는걸 돕다가 소리쳤다.

《빨리 영옥이를 업고 철수하라. 내가 엄호하겠소.》

석동무가 한영옥이를 업었을 때 처녀는 버둥거리며 속삭였다.

《석동무, 잠간만···》

그는 무엇인가를 느끼고 녀대원을 방바닥에 내려놓으면서 사이문으로 들어서는 놈을 쏴눕혔다.

캄캄한 집안에서 정지간에 기여나간 한영옥은 아버지가 누웠던 자리를 더듬어 토스레저고리의 커다란 주머니에서 담배쌈지를 잡았다. 그러자 죽은줄로만 알았던 로인의 손이 주머니밖으로 손목을 누르는것이였다.

《아버지, 저예요. 영옥입니다-》

그 말을 들어서인지, 아니면 기맥이 이미 진해서인지 뼈마디가 앙상한 로인의 손은 스스로 미끄러 떨어져서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영옥동무!》

석동무가 어둠속에서 한영옥이를 찾아 둘쳐업고 뛰여나가기까지는 실로 몇순간이 흘렀을뿐이다.

총소리는 사방에서 울렸으나 이웃집에 매복해있던 놈들도 들어오지는 못했다. 먼데서 자동차의 동음이 가까와지자 김기창은 상처를 더듬어 볼새도 없이 그 집에서 빠져나와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숨어있던 산비탈에 왔을 때 지영갑이 황급하게 뇌였다.

《빨리 빠지기요. 큰 함정이였구만!》

전조등을 우줄거리며 질주해온 자동차가 갈림길에서 꺾어져 마을에 들어서고있었다. 적재함에 타고온 병정들이 후둑후둑 길바닥에 뛰여내리는 모습이 전조등빛의 후광속에서 우줄우줄 바라보였다.

다행하게도 칠흑같은 어둠이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가는 유격대원들의 모습을 가리워주었다.

기진하여 헐떡거리면서 두번째 고개를 넘어서니 푸르무레하게 먼동이 터오고있었다. 골짜기에 내려서자 풀밭에 한영옥이를 내려놓았다. 녀대원은 기진하여 쓰러졌으나 정신은 맑아 지고있었다.

《나를 고문하던 놈은 조선사람 같았어요··· 같이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서 턱을 비틀고 우악스레 목을 졸랐어요. 당장 죽일것처럼··· 어머니!》

처녀는 소리없이 울면서 품속에 넣은 아버지의 담배쌈지를 저고리우로 더듬었다.

《···》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한영옥은 맥없이 눈을 감고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한동안이 지나서 지영갑이 시름겨운듯 한숨을 쉬였다.

《혼란통에 다들 빠져나왔으니 그런대로 다행이요. 빨리 풀속으로 들어가서 숨어야겠소. 이제 날이 밝으면 적들이 이 일대를 참빗질할거요.》

그들은 기진맥진한 몸을 일으켜 다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