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18


 
 

제 5 장

18

 

산우에 달이 떠올랐다.

휘영청 둥근 달은 수림속에 검은 그늘을 던지면서 벽계수의 흐름소리 유정한 골안을 째듯이 밝혔다. 서늘해진 대기속에 분지며 서덕취의 들큰한 향기가 떠돌았다. 뒤산에서 소쩍새가 우는 저녁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심려에 싸여 사령부귀틀집앞을 거닐고계시였다. 포태리쪽의 림산마을에 나간 김정숙동지의 공작조가 예정기일이 지났는데도 도착하지 않았던것이다.

그 마을에는 림산로동자들로 조직된 반일회가 있었는데 김정숙동지께서는 그 조직성원인 림철기관차의 수리기사를 통해 혜산에서 활동하는 지하조직원과 련계를 가지고있었던것이다. 혜산쪽으로 자주 다닌다는 수리기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공작조의 활동과정에 사연이 있는지··· 못내 걱정되시였다.

사색에 잠겨 걸음을 옮기시는 그이의 곁으로 경위대원이 다가왔다.

《사령관동지, 류경수동지가 왔습니다.》

그이께서는 돌아보고 그들쪽으로 걸어가시였다. 갈색의 스뎅저고리에 가랭이가 후렁후렁한 물날은 《국방색》바지를 입은 류경수가 채양이 처진 한팅을 눌러쓰고 싱글벙글 웃고있는데 그옆에는 풋밤송이 같은 맨머리바람에 무명바지저고리를 깡동하게 걸친 김명산이 꼿꼿이 서있었다. 눈에 선 옷차림때문인지 벙글써한 웃음때문인지 억대우같은 류경수는 그답지 않게 얼뜬해보이는 반면에 호리호리한 김명산은 인간세상에 처음나선 아이같이 초롱초롱 야무져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소리없이 웃으시였다.

《비슷하오. 비슷해.

품팔이군이 살림이 거덜난 집에 들렸다가 막내동생까지 데리고 품팔이에 나선 행색이 비슷해.》

그이께서 만족해하시니 류경수도 좋아서 벙글거렸다.

《준비는 다 됐소?》

《예, 다 됐습니다. 지금 떠나려고 합니다.》

《<황국신민서사>는 좀 외워두었소?》

《외우느라 했습니다만··· 외울수록 뭐이 다 헝클어지면서 반발심만 생깁니다. 그걸 외운대서 조선사람이 일본놈이 되겠습니까! 미나미총독이란 놈은 소보다도 더 미욱한 놈입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웃으시였다.

《배심은 좋구만! 이제 혜산역에 나가 순사가 불러서 외우라고 할 때 그렇게 대답해보오. 잘했다고 칭찬하면서 차표 한장을 제꺽 줄거요.》

곁에 있던 동지들이 웃음보를 터뜨리자 류경수도 게면쩍어 씨익- 웃었다.

《좌우간 사람이 못할 못된 짓을 궁리해내는데서는 세상에 일본놈들보다 더한 족속들이 없을겁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미소를 짓고 천천히 거닐다가 말씀하시였다.

《그래도 공작원은 놈들의 법이나 질서에 적응돼야 하오. 하치 않은 일에서 사달이 생길수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오.

특히 명산동무는 조선도 처음이고 정치공작도 처음이니 류경수동무가 데리고다니면서 수시로 일깨워주고 이끌어줘야 하오. 날파람있고 용감한 대원이지만 투쟁경험이 많지 못하고 세상물정을 몰라서 실수할 우려가 있으니 잘 도와주시오.》

류경수는 여태까지와는 다른 엄숙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류경수는 청진지구의 《일본제철회사》의 로동계급들속에 반일조직을 꾸리는 한편 라남과 북경성에 만저우(만주)에서 흘러나간 인연이 있는 의사와 상인을 중심으로 일제 19사단의 움직임을 장악할 비밀공작조를 조직할 과업을 받았던것이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류경수네가 헤쳐나가야 할 험난한 로정을 더듬어보시듯 그들의 어깨너머로 달빛이 어린 수림을 이윽토록 바라보시다가

《그럼 떠나시오.》

하고 한사람한사람 굳게 손을 잡아주시였다.

그들과 함께 골안 아래쪽으로 내려가신 그이께서는 골안 갈림길에서 등성이를 넘어가는 두 대원을 바래우며 오래도록 묵묵히 그 자리에 서계시였다.

《사령관동지, 밤이 깊었는데 돌아가십시다.》

경위대원 김철한이 말씀드리자 비로소 현실로 돌아오신듯 《포태쪽에 나간 동무들이 올 때가 되였는데···》

하고 걱정스럽게 외우시였다.

《제가 우리 동무들을 두어명 데리고 내려가보겠으니 사령관동지께서는 올라가서 좀 쉬십시오.》

김철한이 은근하게 다시 권하자 그이께서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시였다.

《오늘도 공작조들이 떠나갔는데 이 일대에서 움직임이 많아서는 안되겠소. 더 기다려봅시다.》

그러시고는 소백수가 수얼거리며 흘러가는 넓은 골안 아래쪽으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달빛은 하늘에 가득찼으나 수림속은 우중충했다. 릉선우에서는 남쪽으로 환하게 트인 지세가 멀리까지 한눈에 바라보였다. 바람없는 밤이여서 눈길이 미치는 어디에서나 나무그루며 수풀의 검은 그림자까지 선명하게 두드러져보였다. 허나 사람들의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고 두견새의 울음소리만 처량하게 울려퍼졌다.

(오늘도 못오는가. ··· 무슨 일이 생겼을가?)

그이께서는 심려에 싸여 남쪽 멀리까지를 오래도록 바라보시다가 걸음을 돌리시였다.

사령부귀틀집에 돌아오시자 따라온 경위대원들에게 말씀하셨다.

《새날이 시작된것 같은데 돌아가서들 쉬오. 나도 좀 쉬겠소.》

경위대원들이 돌아간 뒤 그이께서는 집안에 들어와 낮은 책상앞에 앉으시였다. 책상우에 펼쳐놓은대로 중문판으로 된 《청일전쟁사》를 보시다가 문득 일본군병영을 대상하여 공작하고있을 조봉길이 떠올라 생각에 잠기시였다.

지난번에 간백산회의참가자들이 돌아갈 때 조봉길에게 조선주둔군 일본부대들에 반일조직을 꾸릴 과업을 주어 국내에 침투시켰었다. 일제에게 총부리를 돌려댈 무장세력을 확대해나갈 구상의 한 고리였다.

처음 공작임무를 주었을 때 조봉길은 어리둥절해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회와 유리되였을뿐더러 병영으로 둘러싸인 일본군부대안에 반일조직을 꾸릴수 있다고는 상상해본적이 없었던때문이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그때 놀라고 당황해하는 조봉길에게 임무를 수행할 방도에 대해 차근차근 가르쳐주시였다.

조선에 나가 친척이나 친우들을 통해 반일사상을 가진 청년들을 사귄후 그들이 징병에 걸려 군대에 나가면 주둔지나 병영을 알아가지고 찾아가 면회를 하거나 그밖의 여러가지 방법으로 자주 접촉하면서 혁명적인 영향을 주어야 한다. 일본군대안에서 사병들, 특히 조선인병사들에 대한 멸시와 학대가 가혹하고 야수적이기때문에 청년들의 가슴에서 반일감정이 끓어번질것이다. 거기에 불씨를 심어주어 조직을 꾸리게 하고 유격대와 련계를 지어주면 되는것이다.···

사령관동지의 세심한 가르치심을 받은 조봉길은 깊이 탄복하고 신심이 생겨 명령을 책임적으로 수행하겠다는 결의를 가다듬고 떠났던것이다.···

그이께서는 지금 조봉길의 공작을 도와주면서 사령부와의 련계를 보장하자면 가까운 시일안에 방조자 한명을 더 보내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시였다.

밤이 지새고있음을 느낀 그이께서는 피로를 풀려고 침상에 오르자 곧 잠이 드시였다.···

꿈에 낮은 산기슭에 펼쳐진 무연한 들판을 보시였다. 지평선쪽으로 황금이삭이 물결치는 풍요한 전야가 바라보이는 잡초 우거진 그 들판으로 군복입은 녀대원이 걸어가고있었다. 바람은 군복자락을 잡아제치고 단발머리를 흩날리며 마주 불어오는데 녀전사는 풍랑이는 바다처럼 설레이는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만 나가는것이였다. 산우에서 바라보니 몹시도 낯익은 모습이였다. 그이께서는 소리쳐 부르시였다.

《김정숙동무- 정숙이-》

불어오는 바람때문인지 앞길에만 마음쓰는때문인지 녀전사는 듣지 못하고 앞으로만 나가는것이였다. 그이께서는 비탈을 내려와 따라가면서 소리치시였다.

《정숙이- 정숙동무-》

그래도 녀전사는 황금이삭이 물결치는 전야를 바라보며 풀숲을 헤치고 전진하는것이였다.

그이께서는 녀전사의 그 기개가 마음에 들어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꿈속에서도 생시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녀전사가 더욱 미덥고 사랑스러우시였다.

원동의 기지에서 전구로 진출하실 때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번 길은 전에 없이 위험하므로 녀대원들은 대오에 편성하지 않으려고 생각하시였다. 했으나 김정숙동지께서는 사령관동지께서 백두산으로 진출하시는데 제가 어찌 따라가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위험한 길이라면 더욱 가야 하겠습니다 하고 끝까지 주장하여 할수 없이 허락하셨던것이다.···

《사령관동지, 공작조가 돌아왔습니다.》

밖에서 경위대원이 그이의 쪽잠마저 깨우게 됨을 미안쩍어하며 나직이 부르는 소리에 꿈에서 깨여나시였다. 창문이 환해진 새벽이였다.

사령관동지께서 밖에 나서니 방금전 꿈속에서 부르는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앞으로만 걸어가던 녀전사가 기쁨과 행복감에 얼굴을 빛내며 마주오는것이였다. 그이께서는 대견하여 웃으며 그쪽으로 걸어가시였다.

《사령관동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혜산동지들과는 련계가 맺어졌습니다. 이제 자세한 사연을 드리겠습니다.》

《왜 이렇게 늦었소?》

하고 사령관동지께서 물으시였다.

《련락원이 혜산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 만저우에서 <향토시찰단>으로 나와 보천보구경을 오는 한 어른과 함께 협궤차를 타고 같이 왔다는 말을 하기에 인상을 자세히 물으니 고형근선생 같았습니다.

그 어른이 보천보에서 묵어가리라는 소리를 듣고 수리기사를 그리로 보냈습니다. 보천보를 구경하겠다고 오신걸 보니 뜻이 있는분 같은데 함께 온 인연으로 잘 안내해드리고 고형근이라는분이라면 돌아갈 때 저의 인사를 전해달라고 했더니 글쎄 선생이 부득부득 따라오시더랍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까지 모시고왔습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방긋이 웃으며 비켜서서 돌아보시였다.

김정숙동지를 따라온 한영옥이 웃으며 다가오는데 그뒤로 수림속에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배낭이며 려행가방을 든 대원들이 밀려오고 낯선 모습이 언뜻거렸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그들을 향해 마주 가시다가 한영옥이앞에서 걸음을 멈추며

《영옥동무, 사자골에 박중돈동무가 와있소.》 하고 알려주시였다. 녀대원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두눈에 그리움이 층층 어리는 모습을 여겨보시다가 다정하게 이르시였다.

《어서 넘어가 보오. 동무를 기다릴거요.》

녀대원이 흥분하여 종종걸음으로 지나가자 그윽한 미소를 짓고 가던 길을 걸으시였다.

대원들에게 둘러싸여 걸어오는 사민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사령관동지께서 다가가시자 그 사람은 짚고오던 지팽이를 버리고 옷깃을 여미면서 파나마모를 벗었다. 삭발하여 별스럽게 단순해보이는 얼굴에 새까만 코수염이 유표한 그 사람은 앞에 와서 허리숙여 절하는것이였다. 고형근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의 손을 꽉 잡으시였다.

《선생님, 여기가 어디라고 이렇게 오셨습니까!》

고형근의 얼굴에도 감개가 어렸다.

《장군님,

저에게 이런 행운이 차례진걸 보니 하늘이 굽어살핀것 같습니다.

시찰단원들이 명승고적편답을 신청할 때 백두산탐승을 요망했지만 장군님을 만나뵙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하늘이 굽어살핀게 아니라 선생님의 애국지정이 지극해서 이런 자리가 마련된것 같습니다.

어서 모자를 쓰십시오.

여기는 새벽날씨가 몹시 찹니다. 삭발까지 하셨는데 감기드시겠습니다.》

고형근은 모자 쓸 생각은 하지 않고 서글프게 웃었다.

《이번에 조선에 나오면서 일본놈들이 강요하는대로 머리를 깎았습니다.

예로부터 두상장발은 인간상모라고 하지만··· 인간다운 생활이 없는 세상에서 그까짓 머리쯤 깎는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그런 쇠쇠한 일로 짐승같은 놈들의 비위를 거슬릴게 뭐냐! 하는 배심이였습니다.

장군님의 믿음을 가슴에 간직하고 보니 배심도 저절로 생깁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환하게 웃으시였다.

《선생님, 고향에 가서 농민들의 생활도 돌아보셨습니까?》

《예- 똑똑히 보고 깊이 알게 되였습니다.》

《서울에 있는 리극로선생이랑 다 무고하십니까?》

《예- 무고합니다.···》

고형근은 눈시울이 뜨거워져 뒤말을 잇지 못했다. 백두산에 계시면서도 충청도의 농민들이며 서울에 있는 지식인들의 생활까지를 다 헤아리시는 장군님을 생각하느라니 그이의 심정이 이렇듯 너그럽고 그이의 품이 이렇듯 넓고 후더웁기에 자기 같은 인간도 애국의 대로에 나서게 되였구나 하는 무량한 감개가 차오르면서 백두산천지와 같은 웅심깊은 품을 지닌 민족의 거룩한 령수를 가까이 모시게 된 행복감이 가슴에 넘치는것이였다.

고형근은 장군님앞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싶었다. 무엇보다 지난 봄 미나미총독이 지엔다오(간도)를 떠나간 며칠후에 옌지(연길)시내의 태화국민학교 강당에서 거행된 《일만토벌장병전몰자위령제》에 참석했던 감상을 말씀드리고싶었다. 항일유격대에 의해 녹아난 놈들의 령혼을 위로한다는 그 제사판에는 관동군사령관이며 《만저우국》총리를 비롯한 고위장성고관들이 다 모여 만장을 이루고 비애에 젖어 조사를 외웠는데 일본놈들이 비통해하는 강당에서 고형근은 《김일성장군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고싶었던것이다.

억눌려오던 망국민의 가슴에서 환희와 격동이 끓어번지던 그때, 그날을 평생 잊지 못할것이며 가는곳마다에서 터뜨리고싶었다.

허나 지금은 그럴 경황이 아니였다.

가슴에 넘치는 천만가지 생각을 밀어놓고 경건하게 깊은 심정을 헤쳐뵈고싶었다.

《장군님,

저는 오래전부터 이 나라 온 강토에 줄기를 뻗친 조종의 산이고 동방의 성산인 이 백두산을 탐승하고싶었습니다.

예로부터 이 나라의 뜻있는 사람들이 하늘을 만질듯이 장엄하게 솟은 백두산정에 올라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지를 탄상하고 남긴 글들도 많습니다.

더군다나 근년엔 장군님께서 백두산을 타고앉아 왜적들을 쳐부시는 진상을 알게 되여 한번 꼭 와보고싶었습니다.》

미소어린 사령관동지의 얼굴에 사색의 빛이 짙어지고있었다.

《우리가 백두산을 조선혁명의 책원지로 정한것은 지대적특성이 유리했을뿐더러 백두산에 깃들어있는 민족의 얼을 중시하였기때문이였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백두산은 조종의 산으로 조선의 상징이며 민족사의 발상지가 아닙니까!

민족의 념원을 지니고 싸우는 우리들의 백두산에 대한 승상은 그대로 조선에 대한 숭상이였고 백두산에 대한 사랑은 조국에 대한 사랑이였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벌리는 유격전쟁을 확대하는데서는 백두산보다 더 좋은 기지가 없었고 백두산이야말로 자연지리적으로나 사회정치적으로나 우리 혁명군이 의거해야 할 훌륭한 보루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백두산을 타고앉아야 민족의 모든 력량을 항쟁의 마당에 불러낼수 있고 항쟁의 종국적승리를 이룩할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게 되였습니다.》

고형근은 눈길을 들어 하늘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장군님의 천리혜안이였습니다.···

력사를 더듬어보면 고구려 령토확장시대의 을두지나 부분노도 백두산에 의거하여 왜적을 쳐부셨고 고려의 윤관이나 리조의 김종서도 백두산을 타고앉아 보국개척의 중임을 다했지요. 남이장군도 백두산부석우에서 천하를 평정할 웅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조선사람 누구나가 알고있어야 할 좋은 이야기입니다.···

선생님, 피곤하실텐데 쉬셔야겠습니다. 푹 쉬시고 이야기를 나눕시다.》

고형근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몸이 변변치 못하다나니 이틀길을 걷고 발탈이 났습니다그려. 장군님께 말씀드릴 사연도 많고 알려드릴 소식도 많습니다.···》

고형근은 《향토시찰단》으로 나와서 보고느낀 국내의 형편이며 흉흉한 민심, 서울장안 반일인사들의 움직임과 일제의 책동, 차석진의 장렬한 최후와 서대석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대혁명가인것이 아니라 차석진이야말로 대혁명가라고 했다는 실토정, 아들의 실종··· 등 사연들을 장군님께 말씀드리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감개가 깊어지는 이 자리에서는 그런 모든 일들이 조선의 어느 한 귀퉁이에서 벌어진 크지 않은 일같이 생각되였다. 지금은 오로지 혁명군의 거점인 백두산에 계시는 김일성장군님을 우러르는 자기의 심정, 위인의 도량에 이끌리여 비로소 애국의 길을 걷게 된 회개자로서가 아니라 이 나라의 력사와 풍토를 알고 오늘의 비운을 통탄하며 광명한 래일을 바라는 백성의 심정을 피력하고싶었다.

《장군님, 집에 들어가도 쉴것 같지 못합니다. 지금은 쉬고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여기서 산천을 탄상하고싶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걸음을 멈추시였다. 엇비듬히 돌아서서 따라오던 대원들더러 기다렸다가 가자고 미소를 보내시였다.

그이께서는 할 일이 많으시였다. 하지만 하려던 일을 뒤로 미루면서라도 뜻깊은 상봉의 자리를 지켜주고싶으시였다.

《장군님, 감개가 무량합니다.···

금세기 초에 나라의 위기를 예감한 종교계의 천화도인이 백두산에 올라 천지가 펼쳐진 장군봉밑의 바위비석에 <대태백 대택수 룡신비각>이라는 글을 새겼습니다. 백두산천지의 룡신이 이 나라 백성들을 무궁토록 보살펴달라는 기원이였습니다.

그후로 이 나라의 뜻있는 사람들이 백두산에 올라 천지에 치성을 드리면서 백두의 정기를 탄 위인이 나타나 강토와 백성들을 천세만세 보호해주기를 빌었습니다. 겨레의 념원이고 지성이였습니다.···

저는 이번 길에 산정에 오르면 천지의 기슭에 엎드려 백두산을 타고앉아 구국항전을 이끌어가시는 장군님의 위업이 이루어지고 이 나라에 무궁한 번영이 펼쳐지기를 축원하겠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너그럽게 웃으시였다.

《치성을 드리고 축원하는것을 만류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인민의 념원을 힘으로 묶어세워 광복위업을 성취하는것이 절박한 일입니다.》

고형근이도 둘러서있는 대원들도 장군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수림너머로 멀리 조국땅이 펼쳐져있을 남쪽을 바라보고있었다. 그 하늘아래를 바라보는 김일성동지의 사색에 잠긴 시선에는 광복의 날까지 해쳐가야 할 시련도 희생도 만난을 극복하고 초지를 관철해가리라는 의지도 신심도 차분히 어리여있었다.···

솟아오른 아침해가 소백수골에 황금해살을 드리우며 창공높이 거연한 자태를 드러낸 백두산정을 비치고있었다.

하늘을 이고 높이 솟아 멀리로 청일색의 선양(심양), 랴오동벌(료동벌)과 녕고탑 너머로는 아득히 씨비리의 황야를 둘러본 백두산은 대양을 향해 뻗어내린 반도삼천리에 다감한 미소를 보내고있었다.

기암절벽으로 병풍을 두른 산정의 넓은 천지는 하늘을 담아안고 수면이 고요한데 강토를 적시여 갈 물줄기를 터치면서 천길호심에서 폭포소리가 장엄하게 쿵ㅡ 쿵ㅡ 울리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