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15


 
 

제 5 장

15

 

홍준걸은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워져 고열에 시달리며 앓고있었으나 만저우(만주)에서 《향토시찰단》이 도착한다는 소리를 듣자 병상에서 일어났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어요. 도착하리라는 예고예요.》

간호하고있던 리순정이 그의 건강상태를 걱정하며 안심시키려 했으나 듣지 않았다.

《도착했다면 늦은거요. 만회할수 없는 일이 벌어질수 있소.》

그는 후둘거리는 몸으로 옷을 차려입었다. 리순정은 울상이 되여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석진동무, 도대체 어쩌자는거예요. 그 몸으로 어딜 간다고 그래요!》

《서대석이를 만나야 하오. 진작 그랬어야 하는데··· 다른 일들도 있어서 그럴수가 없었소. 비오는 날 밤에 룡산철도로동자들의 마을로 가면서 내가 말하지 않았소!··· 이젠 순정동무가 왔으니 더는 미룰수 없소.》

《그 이름있는 혁명가가 동무의 말을 듣겠어요?》

《들을거요. 내 다 생각했소.》

리순정은 어질어질해져서 지그시 눈을 감은 동지를 불안하게 쳐다보면서 다가가서 부축해주었다.

《그 사람이 경찰의 감시를 받는다면 어찌겠어요?》

홍준걸은 애써 웃음을 지으면서 선뜻 대답을 못했다. 경찰이 서대석이 같은 사람에겐 2중3중의 감시를 붙였으리란건 짐작하고있었다. 고청민이 같은 풋내기를 붙여놓고 팔짱 끼고있지는 않을것이였다. 서대석이를 만난다는것은 특고경찰이 사방에 늘여놓은 올가미에 걸릴수 있다는걸 그는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사령관동지의 말씀을 듣고도 기회를 보면서 시행하지 못했던 일을 더는 미룰수 없었다. 투쟁방도를 모르는 반일투사를 깨우쳐주고 돌려세우는 일이 절박했을뿐더러 그가 벌리고있는 무모한 활동을 저지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자기때문에 불안해하는 동지를 안심시키려고 대수롭지 않은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이 <보호관찰소>의 통제속에 있는건 사실이지만··· 경찰은 그 사람에 대해 크게 관심하지 않을거요.

그러나 불의의 정황이 생길수도 있으니··· 그런 경우엔 내가 여기로 오지 못할수도 있소.》

처녀는 신경이 팽팽해져서 따졌다.

《오지 않으면 어디로 가요? 불의의 정황이란건 경찰과의 대결이 아닌가요!》

《만일 내 정체가 드러난 경우에는··· 교외에 있는 우리 동지의 염소목장에 숨겠소.》

리순정은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으나 또 물었다.

《공작은 어떻게 하구요?》

《지하에서··· 당분간 못할수도 있지. 순정동무가 많은 일을 해야 하오. <형님>네 집에도 다니고···》

홍준걸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있었으나 리순정은 그의 깊은 마음을 느끼면서 북받치는 설음을 지그시 참고있었다.

《동문 그 인물에게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것 같애요.》

《아니요. 그 사람은 비록 혁명로선에 암둔하지만 반일사상이 뚜렷한 투사고 그것으로 해서 영향력이 큰 사람이요.》

《···》

《털어놓고 말해서 그 사람은 우리 사령관동지께서 혁명활동을 시작하실 때부터 사대주의에 물젖어 혁명에서 장애만 조성하던 인물이요. 그렇지만 사령관동지께서는···

나는 사령관동지의 높은 뜻을 알게 되였을 때 어찌나 감동되였던지··· 나의 모든것을 다 바쳐 그이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나가리라 결심했댔소.》

《···》

리순정은 동지의 뜻을 리해하고 입술을 깨물고있다가 한숨을 지었으나 홍준걸은 빙긋이 웃으면서 힐난하듯 한마디 했다.

《무얼 그다지 심각해서 그러오!》

그리고는 산책에라도 나가듯 문밖에 나섰다.

그는 거리의 상점에 들려 술 한병과 비스케트봉지를 꾸레미에 싸들고 친구네 집에 놀러가는 사람처럼 시름없이 걸어갔다.

좁은 거리의 량쪽엔 기와집들이 늘어앉고 도간도간 색스러운 타일을 번들거리며 2층, 3층집들이 뽐내듯이 솟아있다.

양식으로 꾸린 상점앞에서는 일본식나막신을 신은 청년들이 무리지어 말다툼질하고있었다. 작은 음식점들을 지나 사이길에 들어선 그는 김시형이 그려준 략도를 상기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벽돌담장우에 박아놓은 유리쪼박들에서 기울어진 여름해빛이 반사되고있었다. 전당포앞에서 오른편 골목에 굽어드니 목적한 집이 나타났다. 대문안뜨락에는 인적이 없고 빗장은 헐겁게 걸려있었다.

널대문을 가볍게 흔들어 빗장을 떨구고 뜨락에 들어섰다.

무슨 기척으로 알았던지 부엌방에서 행주치마를 두른 중년녀인이 나오더니 물 묻은 손을 드리운채 노엽게 쏘아본다.

《누구세요?》

잔주름이 덮인 녀인의 얼굴에서 아름다움이 간직되여있는 두눈이 악에 받쳐 컴컴해지는것을 보고 진심으로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저는 홍준걸이라고 합니다. 서대석선생과 긴하게 의논할 일이 있어 찾아왔는데 대문밖에서 떠들고싶지 않아 허락없이 들어섰습니다.》

《주인은 계시지 않아요.》

그는 얼떠름해졌다. 반드시 집에 있으리라는 시간을 맞추어 찾아왔는데 없다고 하니 난처했던것이다. 돌아설수는 없었다.

《저는 선생님과 관계되는 중요한 일때문에 찾아왔습니다. 갔다가 다시 올수가 없으니 선생이 돌아오실 때까지 집안에서 기다리게 해주십시오.》

녀인은 맥고모를 쓴 손님의 병색짙은 얼굴을 여겨보면서 망설이였다. 대문을 돌아보는 거동마저 심중하게 느껴졌던지 마지못해 대청쪽으로 걸어갔다. 마루에 올라 대청미닫이를 열고 손님을 들여보낸 뒤 부엌문쪽으로 사라졌다.

크지 않은 마루방엔 낡은 돗자리우에 바둑판이 놓여있을뿐 아무것도 없었다. 뒤벽에 난 작은 뙤창으로 담장에 막힌 뒤집과의 골목이 내다보였다.

그는 방가운데에 서서 얼기설기 종이로 오려붙인 미닫이문유리를 통해 좁은 뜰을 살폈다. 녀인이 함지를 들고 수도가에 나오더니 푸성귀를 헹구기 시작했다.

그는 초조해졌다. 이대로 기다려야 하는가.···

갑자기 사이문이 열리더니 독이 오른 눈길로 이쪽을 쏘아보며 서대석이 들어섰다. 후렁후렁한 엷은 바지우에 소매짧은 격자직 여름샤쯔를 드리우고 헤쳐놓은 깃사이로 털이 부르르한 가슴을 드러낸 그의 얼굴에는 이지러진 미소가 굳어져있었다.

《당신은 무슨 권리로 남의 집에 무단침입을 하오?》

주인의 도고한 태도가 오히려 마음을 진정시켰다.

《죄송합니다. 저는 량정중학교의 서무계에서 일하는 홍준걸이라고 합니다. 지난 초봄에 대전에 갔다오다가 기차칸에서 단파수신기를 가지고오는 선생의 녀동생과 사귀였던 사람입니다. 그 일로 하여 선생이 친히 저를 초청했었지만 그때엔 사정이 있어 오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꼭 만날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남들의 주의를 끌지 않으려고 주인을 찾지 않았으니···량해해주십시오.》

《량해할것도 없고 말할것도 없소. 난 당신을 알지 못하며 알고싶지도 않소. 나는 주인으로서 불청객인 당신에게 요구하는거요.

당장 나가시오.》

홍준걸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서선생, 남들이 듣겠습니다. 좀 더 구석진 자리로 옮길수 없겠습니까?》

《필요없소. 난 당신과는 할 말이 없소. 할 말이 있으면 여기서 하구려.》

홍준걸은 미닫이유리너머로 마당을 내다보고 고개를 들어 뒤골목을 살폈다. 그리고는

《좀 앉지 않겠습니까?》

하고 온화하게 사정했다. 상처가 쑤시는듯 아프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던것이다. 하지만 집주인은 못들은척 했다. 싸늘한 증오가 가슴에 서려올랐으나 소리없는 한숨속에 삭여버렸다.

《선생이 나를 모른다고 하신것은 지당한 말씀입니다. 기회가 생기지 않아 신분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선생을 여러모로 알고있습니다.

선생의 투철한 반일사상과 감옥도 단두대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잘 알고있기때문에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선생을 믿고 존경하기때문에 지금 벌리고있는 활동에 대해 의논해보자고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자기 소개부터 똑똑히 하시오.》

《저 역시 혁명하는 사람입니다. 조국광복을 위해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는 사람입니다.》

《허어, 그렇다아! 량정중학교에 배겨서 여기저기에 줄을 놓아 리극로선생을 부추기면서 이따금 경무국 고등과장네 집에 드나드는 인물이겠지. 물론 경찰의 밀정은 아니고!···》

입가에 멸시에 찬 조소가 어리고 이쪽을 쏘아보는 부리부리한 눈에서는 분노가 이글거렸다.

《경무국 고등과장과 관계가 있다해서 밀정이라고 단정한다면 오산입니다.》

하고 홍준걸은 갈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사람이 저를 죽이려고 했지만 저는 그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았을뿐더러 여전히 그 사람을 믿고 존경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오해했거나 인식이 짧았다는걸 의미하지 않을가요.··· 하긴 중요치 않은 이런 얘기는 후에 합시다.》

서대석은 저으기 찌뿌둥해져서 눈길을 피했으나 어조는 여전히 거드름스러웠다.

《백사불문하고 나의 활동에 대해서는 당신이 간참할 필요가 없고 나도 굳이 당신과 의논할 일이 없소.》

《···》

홍준걸은 머리가 쏘아나고 피로감에 견디기 어려웠으나 지그시 버티고 서있었다. 서대석이도 달갑지 않은 대화를 어서 끝내려는듯 무뚝뚝하게 아퀴를 지었다.

《당신이 정녕 일제를 반대해서 싸우는 사람이고 손잡고 투쟁할 의향이 있다면 자기가 하고있는 일을 내앞에서 털어놓소. 그런 연후에 무슨 의논을 해도 하잔 말이요.》

《저는 선생과 손 잡고 투쟁하기를 열렬히 희망합니다. 하지만 선생이 지금 하는것 같은, 목적도 방도도 뚜렷하지 못한 운동이나 투쟁은 하고싶지 않습니다.》

《목적도 뚜렷하고 방도도 뚜렷하오. 우리는 로동계급을 비롯한 조선무산대중의 계급해방과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공산주의자로서 그 투쟁을 령도할수 있는 계급의 전위대인 당을 창건하자는거요.

지난 기간 란립하여 서로 다투기도 하고 일제의 탄압을 받아 이루지 못한 그 엄숙한 과제를 수행하자는거요. 선행자들의 전철을 벗어나 로농대중과 지식청년들속에 조직을 꾸리고 반일투쟁을 하면서 간고하게 나가고있소.

이 대사를 성사시키려고 국내의 이름있는 혁명가들이 움직이고 해외의 인사들도 숨어들어오고있으며 믿음직한 련계들을 가지고있소.》

《···》

《물론 이 일이 헐치는 않소. 지난 날에도 많은 오유들이 있었고 헤아릴수 없는 고초와 희생도 있었소. 하지만 우리는 기어코 성취하고야 말거요. 전위부대가 없는 반일투쟁은 승산없는 싸움이고 무의미한 희생의 련속이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당은 이미 존재하고있습니다!》 하고 홍준걸은 정중하고 명백하게 말했으나 서대석은 조소를 띄웠다.

《과연 당신이 인물은 인물이요.

당재건을 위해 십여년이나 뛰여다니고 감옥에 갇히고 한 나도 모르는 일을 알고있으니···》

그리고는 기가 막혀 껄껄 웃었다.

《제가 인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선생이 소견이 좁으것만은 확실합니다.》

홍준걸의 반박에 서대석은 화를 냈다.

《그래 그런 당이 어디에 있소? 서푼짜리 혁명가들이나 제국대학중퇴생들이 어느 뒤골방에 모여앉아 쑥덕거리면서 만들어낸 당이 아니라면 그런 당이 어디 있는가 말이요!》

서대석은 멸시에 찬 눈길로 이쪽을 쏘아보고있었으나 동통으로 하여 얼굴이 창백해진 홍준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했다.

《오늘날까지 조선에서는 공산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계급해방, 민족해방을 부르짖으면서도 일제를 반대하여 이렇다하게 투쟁도 하지 않고 인민들과의 련계도 없이 큰 나라 당들의 지지를 받고 국제당의 인정을 받아 <공산당>간판을 내걸려고 동분서주했습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이라는 간판은 아직 내걸지 않았지만 인민들의 광범한 지지를 받으면서 만저우의 산야에서 십여년의 피어린 무장투쟁으로 일제를 소탕전률케 하고 세상에 명성을 떨치여 국제당과 이웃나라 당들의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조직된 대오는 이미 존재하고있습니다.

그 대오는 투쟁속에서 육성되고 단련된 로동자, 농민, 근로인테리출신의 공산주의적핵심들을 골간으로 하고 자주정신을 조선혁명의 지도리념으로 하는 반석같은 조직사상적기초를 다지고 <조국광복회>와 같은 위력한 반일민족통일전선체에 의거하여 나라의 독립과 인민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령도하고있습니다.

그 당의 중앙지도부는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이며 당의 수반은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이신 김일성동지이십니다.》

《···》

《나도 그 조직에 속한 당원으로 이 지구에 파견되여 공작하고있습니다.》

서대석은 긴장되여있었다. 홍준걸의 열렬한 론거에 위협을 느끼며 움츠리였던 그는 김일성장군이라는말이 나오자 저으기 엄숙해지는것이였다. 속심을 꿰뚫을듯 지그시 쏘아보는 시커먼 눈이 다물었던 입술과 한나름으로 찡그려지면서 트집스러운 얼굴에 불신과 조소의 빛이 스쳐갔다.

《그러니··· 당신이··· 김일성장군유격대의 대원이란 말이요?》

《그렇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전사입니다.》

홍준걸은 순진하게, 버젓하게 대답했다. 서대석의 둥실한 눈과 두루무레한 입술에 가벼운 웃음이 떠돌았다.4

《유격대는 만저우에서 싸울텐데··· 지금쯤은 쏘련경내에 들어갔을거고··· 한데 당신은 여기서 공작한단 말이지요.···》

홍준걸은 혼자소리처럼 뇌이는 그의 말뜻을 간파했으나 언제나처럼 성실하게 대답했다.

《우리 혁명군은 조선과 만저우의 도처에 흩어져 일제와의 결전을 마련하기 위해 모든 조선사람들을 반일전선에 묶어세우라는 김일성장군님의 전략로선을 관철하고있습니다.》

《흐음- 그렇다면 ··· 당신은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온적이 있겠구만···.》

《만나뵈온적이 있는것이 아니라··· 그이의 믿음과 사랑속에서 혁명가로 자라난 사람입니다.》

《···》

《장군님께서는 선생에 대해서도 잘 알고계십니다.》

《나를··· 기억하신단 말이요?》

《지린(길림)의 뚱다탄(동대탄)에서 이웃에 지내실 때부터 선생네 형제는 직업적인 혁명가들이였다고 하셨습니다. 서대석선생과는 공산주의운동과 조선혁명에 대해 토론도 많이 했고 격렬한 론쟁끝에 한턱 내기도 하는 호방한분이였다고 감회깊게 회상하시였습니다.

류허(류하)의 <반제청년동맹>지부가 공산주의자들의 한 파벌에 의해 파괴되였다는 소식을 듣고나가셨을 때 거기서 선생과 만났으며 그것이 마지막해후였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

서대석은 쓸쓸하게 방바닥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그렇지만··· 옳은 지도를 받지 못했던탓으로 파쟁에 휩쓸렸던 사람들을 불미한 경력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배척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쳐주시였습니다. 더군다나 일제의 감옥에 갇혀 고초를 겪으면서도 지조를 꿋꿋이 지켜온 서대석선생 같은 애국자를 배척하고 제거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통탄할 일인가고 가슴아파하시였습니다.

지난날 민족주의운동자들과 반일투사들이 패당을 무어 서로 배척하고 제거하면서 테로행위까지 서슴지 않던 땅에서 우리까지 그런 길을 걷는다면 조선사람들을 어떻게 단합시키고 조국광복은 언제 이룩하겠는가고 심각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서대석은 고개를 무겁게 숙이고있을뿐이였다.

《그런데···》

하고 홍준걸이 흥분을 누르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장군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제가 선생과 상종하기 위해 대담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일제경찰이 선생을 2중3중으로 경계하고 감시하리라는걸 고려하며 주저했습니다. 게다가 저의 생활에서도 뜻하지 않은 장애가 겹치는 바람에 오늘에야 겨우 찾아왔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엄숙하게 굳어져있던 서대석이 눈길을 들어 홍준걸을 죄송스럽게 쳐다보았다. 관자노리의 아물지 않은 상처아래로 볼이 푹 꺼지고 창백해진 그의 모습에 가슴이 찔린듯 걱정에 싸여 말했다.

《몹시 피곤하실텐데··· 웃방에 올라가 앉읍시다.》

사이문을 열고 이쪽을 부축하려다가 그러지는 못하고 어색해하며 앞에서 안내했다.

ㄱ자형건물의 날개쪽인 크지 않은 그 방엔 뜨락으로 통하는 문이 하나뿐이고 창문은 없었다. 두툼한 책들이 꽂혀있는 크지 않은 서자가 한쪽 벽에 서있고 서탁이 놓여있는 맞은쪽벽엔 대나무를 몰골친 긴 족자가 걸려있었다.

주인은 초물방석을 권하고 어색해하며 손님과 마주 앉았다. 담배통을 꺼내놓았으나 아무도 피우지 않았다. 서대석은 한숨을 쉬고 게면쩍은 미소를 띄웠다.

《괜히 허세만 부리면서··· 집주인구실조차 제대로 못했습니다.··· 안목이 밭다나니 실책이 많았는데 량해해주시오.》

《사실은 선생님께 정중히 부탁할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어서 말씀하시오. 내가 할수 있는 일이라면···》

뜨락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리자 집주인이 일어서서 문틈으로 내다보았다. 대청마루쪽으로 가까와지는 발자욱소리에 귀기울이며 홍준걸이 일어서려고 할 때 주인은 등뒤로 손을 들어 안심하라고 제지시켰다.

《일없소. 내 사람이요!》

하고 그는 돌아서면서 속삭이고 비죽이 웃었다.

《일본경찰이 나한테 밀정을 붙여두었지만 내가 그 사람을 망원으로 포섭했소. 감옥에서 간수들도 필요하면 포섭했댔으니까···》

유쾌한 말투에서 자기과신이 울렸다.

《선생님!》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서대석은 사이문을 열고 대청방으로 내려갔다. 바깥문이 여닫기는 소리에 뒤이어 누군가가 들어선듯.

《어찌된 일이야?》

하는 낮으나 준절한 물음에 숨이 막힐듯 한 침묵이 흘렀다.

《왜 말 못해. 어떻게 됐어?》

《선생님, 아버지가 여기 오신다는 전보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향토시찰단>인것 같습니다.》

《그래서?··· 단념했는가?》

《우리 아버진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선생님, 제가 어찌 아버지 있는 자리에 이걸 던지겠습니까?···》

목소리는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은 홍준걸은 심상치 않은 내막을 직감했다.

《목숨바쳐나서겠다고 한건 언젠데··· 그리고도 혁명을 하겠다구! 애국자, 렬사라는 명예가 쉽게 얻어지는줄 아는가.···》

홍준걸이 조용히 사이문을 열었을 때 문을 등진 서대석은 허리를 짚고 틀지게 서있었으나 그의 어깨너머로 이쪽을 바라본 젊은이의 눈길은 겁에 질려 휘둥그래졌다.

홍준걸은 지난봄에 처녀와 함께 자기를 청하러왔던 고청민을 알아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쪽의 온화한 표정에 마음이 찔린듯 청년이 흥분하여 부르짖었다.

《선생님, 용서해주십시오.》

서대석이 막아서려 했으나 청년은 벌써 웃방에 올라와 한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이며 속삭였다.

《선생님, 용서해주십시오. 전 일본경찰의 밀정으로 리용됐습니다만 나쁜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점은 서대석선생도 보증할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에겐···》

청년은 말끝을 맺지 못했다. 홍준걸은 더 묻지 않았다.

《고형근선생의 아들이지? ··· 일어서오.》

홍준걸이 다정하게 말하자 청년은 《으흐흑-》 흐느끼면서 한 손에 들고있던 밥곽모양의 무거운 폭탄을 구석에 놓고 여름사쯔의 주머니를 뒤져 명함장만 한 사진을 꺼내는것이였다.

《경찰은 지금 선생님을 찾고있습니다. 전국에 수사망이 펼쳐진지가 한달 넘습니다. 저도 전혀 모르고있다가 한달전에 종로경찰서에서 이걸 받았습니다. 만저우에서부터 지하활동을 하던 김일성공산군의 공작원 차석진이라는 자인데 홍준걸이라는 가명으로 서울에 침투해있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찾아내라는 경시청의 특별명령이 있었답니다. 미우라가 만저우에 가있으면서 전화로는 그전에 지령이 떨어져있었답니다.》

사진을 들여다본 서대석은 미간을 찌프리고 숨결마저 거칠어졌으나 홍준걸은 한번 스쳐보고 사진을 돌려주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차석진이요. 청민이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김일성장군님께서도 크게 믿으시는 애국자요. 그러니 청민이도 마음을 든든히 가지고 반일의 길을 가야 하오. 하지만 지금은 빨리 가있어야 할 곳으로 가오.

아니, 곧바로 종로경찰서로 가오. 거기 가서 서대석선생네 집에 놀러갔다가 나를 봤다고 사실대로 말하오.

서대석선생과 무슨 말다툼질하길래 그냥 돌아서왔다고···

그후엔 될수록 빨리 놈들의 손아귀에서 벗어져야 하오. 어느 탄광이나 광산같은데 가 일하면서 뜻이 맞는 청년들과 함께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을 벌려야 하오. 자, 마음을 크게 먹구 태연하게 행동하라구.··· 우리 걱정은 말구··· 어서···》

고청민이 나가버리자 두사람은 말없이 마주섰다. 감옥을 제집 웃방처럼 여긴다는 서대석이도 몹시 당황해 했다.

《우리도 빨리 피신해야 하지 않을가?》

그가 초조하게 말했지만 차석진은 태연했다.

《일본고등경찰이 고청민이나 믿고 앉아있지는 않을겁니다. 무슨 사변이 예견될 때엔 <보호관찰소>가 아니라 경찰이 선생님을 감시할겁니다.》

《우리 집 부엌아궁이밑에 비밀굴이 있으니 당신은 거기 숨소. 뒤처리는 내가 할테니···》 차석진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면서 천천히 도리를 저었다.

《그 비밀굴은 선생이 후에 쓰십시오. 오늘은 그냥 집에 계시다가 경찰이 오면 고이 잡히십시오.

선생에게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저와는 만저우에서부터 파벌관계로 원쑤였다고 하십시오. 선생이 류허에서 <반제청년동맹>지부를 기습할 때 제가 그 지부성원이였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만저우에서 원쑤진 일로 하여 나를 암살하려 했고 그후에도 은근히 찾았으며 오늘 내가 나타나 화해를 청하며 술병을 내놓았으나 독약을 쳤을가봐 마시지 않았다고 하십시오. 이런 취지에서 적당히 꾸며대십시오. 모든걸 나한테 들씌우십시오.》

《당신은 어떡하겠소?》

서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차석진은 맥고모를 집어쓰고 방구석에 놓인 밥곽모양의 무거운 물건을 집어들더니 이쪽을 돌아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제가 부탁하려던건 확실한 원쑤가 아닌 이상 이런 물건을 조선사람들을 향해 던지지 말아 달라는겁니다. 일본놈들의 <신사>에 참배를 하고 총력련맹기발을 들고 다닌다해서 다 원쑤로 치부하지는 마십시오. 그런 사람들속에도 나라의 광복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혁명로선을 모르고 앞을 내다보지 못하면 소경 제 닭 잡아먹듯이 자기 편 사람들을 희생시킬수도 있습니다.··· 그럼 전 돌아가겠습니다.》

차석진이 밥곽형폭탄을 몸에 찌르고 나가려하자 서대석이 그의 팔을 잡으며 만류했다.

《지금 어떻게 돌아간단 말이요. 당신이 아까 제 입으로 일본고등경찰이 만만치 않다는 말을 하고도 그러오?》

차석진은 얼굴에 비장한 웃음을 띄우고 의젓하게 말했다.

《내가 그놈들에게 호락호락 잡힐 사람 같습니까!

김일성장군님께서 사랑하고 믿어주시는 대원이라고 ···제가 말씀드렸지요.》

창졸간에 떠오른 생각을 입밖에 낸 그는 느닷없이 솟구쳐오르는 뜨거운 격정에 목이 메여 말끝을 가까스로 맺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방문을 나섰다. 심각해진 그의 얼굴에 아침이슬처럼 맑게 고이는 눈물을 띠여본 서대석은 무어라 말할수 없는 깊은 감명을 받고 움직이지 못했다.

뜨락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문께서 잠시 바깥동정을 살핀 차석진은 밖에 나서자 주변을 돌아보고 행길로 향했다. 그의 뒤에서 술취한 나그네가 담배를 피우며 휘청휘청 걸어오고 맞은켠 전당포에서 나온 가방 든 장정이 후줄근해서 행길에 내려섰다. 큰 거리쪽으로 꺾어져 걸어가던 차석진은 술취한 나그네가 자기 어깨에 손을 걸치는 순간 코웃음치며 돌아서서 떠박지르고 가방 든 장정이 앞으로 덤벼들자 권총을 꺼내 쏘아넘겼다. 총소리에 이어 호각소리가 났다.

차석진은 땅바닥에 나딩굴던 《주정뱅이》가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는 순간 단방에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사방에서 달려드는 형사들을 침착하게 쏴넘기다가 탄창이 거덜나자 권총을 땅바닥에 던지고 쓰러진 형사에게로 걸어갔다. 둘러싸고 다가오던 경찰들이 확 밀려왔을 때 그는 품속에 손을 넣어 밥곽폭탄을 터뜨렸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경찰일당이 너저분하게 나딩굴었다.

포석우에 번듯하게 쓰러진 차석진은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머리우에 펼쳐진 쪽빛으로 푸른 조선의 하늘이 움직임이 없는, 선량하던 그의 눈동자에 선명하게 비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