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13


 
 

제 5 장

13

 

홀로 남은 홍준걸은 터질듯 한 가슴을 안고 방안을 거닐었다. 흥분이 끓어올라 마음을 안정시킬수 없었다. 그는 침착해지려고 애쓰면서 탁상앞에 방금 김시형이 두고 간 신문장들을 뒤적였으나 기사의 내용에 파고들수가 없었다. 서대석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던것이다. 멀고도 험한 길을 거쳐 사령관동지께서 파견하신 동지가 도착했다는 사실도 그를 흥분시켰다.

신문장들을 천천히 번지면서 제목들만 스쳐보았다.

《도이췰란드군 기계화부대, 민스크에 육박》

《쏘련군 혼란에 빠져 산산 패퇴》

전등불빛에 활자가 얼른거렸다.

《대륙 스피드업 발달, 일, 만, 지를 몇년가을까지 련결할 예정》

(그러니 조선이라는 땅은 일본이라는 개념속에 용해시켜버렸군. 개-자식들.)

그런속에서도 반일의식은 순간적으로 번쩍였다.

《민중은 전시태세를 갖추고 봉공의 적성 다하라. 미나미총독 총독부 국장회의에서 중요지시》, 《4백만 애국반원의 철석의 각오를 환기, 총력련맹리사회에서 미나미총재 열화같은 연설》, 《국어보급운동에 중학생들 총동원》, 《각지에서 청년단결성식 속속 진행》, 《쇠붙이헌납운동활발》···

문기척소리가 난듯 하여 일어서서 복도에 나섰다. 검은 주름치마에 흰 브라우스를 입은 처녀가 려행가방을 들고 들어서는데 크고 길쑴한 눈에서 정찬 웃음이 빛나고있었다.

그리도 낯익고 그리도 애타게 그리워하던 모습이였다. 한걸음을 내짚어 와락 붙안고싶었지만 사령부에서 파견된 공작원이라는 생각에 굳게 손을 잡았다.

《반갑소. 누구든지 오리라고 기대했지만 순정동무가 파견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소.》

려행가방을 받아들고 방안에 들어서면서 홍준걸이 하는 말이였다. 방안을 둘러보던 리순정의 얼굴에서는 상글거리던 웃음이 사라지면서 그윽한 미소가 꿈꾸듯이 어리였다. 떠나온 머나먼 곳을 눈앞에 그려보는 정겨운 모습이였다.

《지금은 우리 혁명군전사들 누구나가 군중공작에 나서야 하는 때이지만 저도 여기에 파견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어요.》

《···》

《지난 가을에 사령관동지께서 우리 밀영병원을 찾아주셨을 때 저를 불러 담화하시던 일을 생각했어요.

동무의 인사를 저에게 전해주시면서 동무들을 서로 만나게 해주고싶었지만 석진동무의 공작임무가 긴박하여 할수 없이 떠나보냈다면서 몹시도 가슴아파하셨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자리여서인지 그때의 감격이 더욱 세차게 북받쳐 고여오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쳤다.

《···》

차석진은 격정을 달래듯 지그시 눈을 감고 말이 없었다.

《저는 파견되여 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사령관동지께서 우리 전사들의 사사로운 인연까지 귀중히 여기며 파견해주셨으니 혁명임무를 더욱 성실하게 수행해야겠다고··· 각오를 다졌어요.》

차석진은 깊은 생각에 잠겨 더 이를 말이냐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엔다오(간도)의 산속에서 사령관동지께 인사를 드리고 백두산에 나오니 대오를 책임지고 온 류경수동지가 어느 마을에 내려가보라고 하더군요.

가보니 거기에 아버지, 어머니가 계셨어요. 정말이지··· 얼마나 행복했던지.

혁명의 길에 나선 저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나 고생하던 아버지가 얼마나 반가와하는지··· 동무의 안부도 묻더군요.

그래서 전 동무와 나와의 관계가 어떻게 행복하게 맺어졌으며 아버지가 시난차 촌장질을 하면서 지난 가을에 유격대와의 관계에서 범한 엄중한 실책이 어떤 곡절속에서 너그럽게 처리되였는가, 제가 이렇게 부모님들과 행복하게 만나게 된것이 어찌된 사연인가 한것을 죄다 얘기해드렸어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며 들었어요. 아버지는 오랜 생각끝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 조선사람들이 다 그러하지만 우리 가정은 특히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받들어나가는 길에서 목숨도 서슴없이 바쳐야 한다!>

이제 제가 석진동무에게도 다 얘기하겠어요.

참 홍준걸씨라고 불러야지요.》

리순정이 정차게 건너다 보자 홍준걸은 웃으면서도 엄숙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요. 자기 신분과 공작임무를 한시도 망각하지 말아야 하오.

피곤할텐데 좀 쉬오. 쉬고나서 사업얘기를 합시다.》

《아니예요. 김시형선생댁에서 푹 쉬였어요. 아유-더워··· 날씨가 어찌나 찌물쿠는지··· 한소나기 퍼부을것 같아요.》

비가 쏟아지기전에 당도한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는듯 웃으며 그렇게 말한 리순정은 붕대를 둘러감은 홍준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진중해졌다. 부상당한 사연이며 치료정형은 이미 김시형에게서 들었던것이다.

리순정은 여기까지의 경로를 간단히 말하고나서 사령부의 움직임과 의도, 소부대들의 활동정형을 개괄하여 설명했다.

사령관동지께서 백두산으로 진출하는 로정에서 받으신 비밀통신, 《석진은 앓는다.》 그 통신의 비밀을 보장하며 사령부에 신속정확하게 전달되게 하려고 희생되는 마지막순간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은 3호련락소의 늙은 혁명가부부···

홍준걸은 공작원들의 간단한 사업보고도 그처럼 엄격히 다루며 중시하시는 사령관동지의 영상을눈앞에 그리며 무겁게 머리를 숙이고있었다.

리순정은 사령부에서 하달한 활동방침을 전달했다.

일제가 새 전쟁 준비를 다그치면서 전략물자의 개발과 생산, 수송에 특별히 주목을 돌리는만큼 지하조직들은 태업과 파괴공작으로 적들에게 타격을 주는 동시에 반일기세를 앙양시켜야 한다는것, 일제의 수탈정책이 로골화되는 환경에서 혁명조직들은 도처에서 모든 조건들을 혁명에 유리하게 활용해야 한다는것, 례하면 징용, 징병자들과 로동력으로 끌려가는 청장년들이 많은 조건에서 그들에게 반일투쟁의 불씨를 심어주어 국내국외의 모든 곳들에서 반일의 불길이 세차게 타번지게 해야 한다. 특히 세계정세가 격변하는 환경에서 우리 힘으로 조선혁명을 끝까지 완수하자는 자주정신을 확고히 견지하는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저를 떠나보내면서 서울지구는 철도와 체신망이 집중되여있고 대륙과 련결되는 철도의 중요교차점이기때문에 투쟁을 잘 조직하기만 하면 적들에게 큰 타격을 줄뿐아니라 전국에 큰 영향을 줄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민족운동과 반일투쟁에 나섰던 각종 파벌의 인사들이 많이 활동하는 곳이여서 그런 인물들과의 사업을 잘 벌려나간다면 반일세력을 크게 묶어세우며 광범한 군중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게 될것이라고 가르쳐주셨어요.···》

홍준걸은 한마디도 놓칠세라 귀담아 들으면서 가슴에 새기고있었다. 리순정의 말이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어글어글한 눈에서 내뿜는 광채에 리순정은 가슴이 후드득 뛰면서 얼굴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였다. 열정이 끓어번지고 생기넘치는 모습이였다.

《순정동무, 고맙소. 동무의 말을 들으니 각오가 굳어지고 투쟁의욕이 끓소. 마르고 타들던 가슴에 시원한 백두산샘물을 마신것 같소. 가슴이 후련해지면서 눈이 번쩍 뜨이오!》

그의 말은 얼굴에 그대로 내비쳤다. 리순정은 마음이 흐뭇해져서 상글상글 웃었다.

《나에게 고맙다고 할건 없어요. 방금 전한건 내 말이 아니라 사령관동지 말씀이예요. 그리고 가슴을 시원하게 추겨주는것은 백두산샘물이 아니라 백두산천지의 용용수예요!》

《물론··· 거야 뭐 더 말할것 있소! 어쨌든 정말 고맙소. 동문 내가 지금 어쩔바를 모르고 열병에 걸려 신음하는걸 알고 찾아온것 같다니까!》

《또 그 소리! 내가 찾아온게 아니라 사령관동지께서 저를 파견하신거예요.》

《물론!··· 물론이요···.》

두사람은 마음이 후련해져서 행복하게 웃었다.

《참말이지 난 아까 김시형이 왔을 때까지만 해도 벌어지는 사태를 들으면서 어쩔바를 몰라 안타까와 했소.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구름처럼 떠오르오. 당장 해야 할 일들이 많소. 그렇지만 ··· 좌우간 식사는 하고 봅시다.》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구을러가면서 귀따갑게 번개가 치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도시의 상공에 먹장구름이 몰려있는듯 밖에서는 쏟아져내리는 비소리가 소란했지만 차광막을 내린 불빛밝은 방안에서는 두사람이 정답게 도란거렸다.

《좋은건 없지만 밥과 반찬은 제꺽 만들수 있소.》

홍준걸이 일어서자 처녀도 따라 일어섰다.

《저녁밥은 짓지 않아도 돼요. 제가 거리에서 무얼 좀 사가지고 왔어요.》

그리고는 개다리소반우에 호떡과 만두, 마른명태와 고기통졸임 한통을 꺼내놓았다.

《중국료리점에 들렸댔구만···.》

《그래요. 저녁겸··· 같이 먹으려고···》

그리고는 저가락을 잡고 만두 한개를 집으려다가 무슨 생각이 나서 방긋이 웃었다.

《생각나요? 석진동무가 옌지(연길)시내에서 장사군행세를 할 때··· 우리가 서로 가까와졌을 때 말이예요. 저녁에 거기 중국반점에 가서 만두를 사놓고 함께 먹던 일 말이예요.》

홍준걸은 눈길이 그윽해져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5∼6년전에 있었던 일이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던것이다.

식사를 하면서 리순정이 말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공작상 필요에 따라··· 위장을 위해, 현지조건을 보아서··· 우리 둘이 련애하는 청춘남녀로 가장할수도 있고 또 두사람의 의사에 따라 결혼생활을 하면서 임무를 수행해도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

홍준걸의 얼굴에 웃음이 피여났으나 대답은 없었다. 그는 안개인듯 한 눈길을 상머리에 멈추고 천천히 먹었다. 그의 표정이 서먹하게 느껴져 리순정은 식사하는 동안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을 거두고났을 때 홍준걸이 입을 열었다.

《낮에 김시형이 동무가 왔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난 속으로 동무를 얼마간 그 집에 머물게 하면서 차츰 거처도 잡아주고 일자리도 얻어주려고 했댔소. 그렇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것 같소.

우린 당장 해야 할 일이 많소. 난 이제 룡산구 막바지에 있는 철도보선구 로동자마을에 갔다와야겠소.》

《아니 하필이면 비가 이렇게 오는 때에··· 그 몸을 가지고 어떻게 간다고 그래요. 상처에 물이 들어가면 화농할텐데···》

《상처는 별일 없소. 붕대를 풀어버리고 비옷을 입으면 되오.》

《웬만하면 후에 가세요. 비가 오지 않을 때》

《비가 퍼붓기때문에 이 밤에 가자는거요.

지금 시내에서는 경찰들이 나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여 날뛸거요.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람이 종적없이 사라졌으니까.

도처에 밀정들이 눈을 밝히고있으니 절대로 안심할수 없소. 그러기에 나는 공작상 필요에 따라 움직여도 반드시 비오거나 날씨궂은 밤에만 나다녔소. 오늘 같은 밤이 나에게는 유리하오.

피곤할테지만 순정동무도 함게 갔다와야겠소. 련애하는 청춘남녀처럼···》

《그렇게 급한 일인가요?》

《급하오. 급하고 중요한 일이요.》

《···》

《지난 봄에 거기 철도기관구에서는 로동자들이 여러명 해고됐소. 그중에는 우리 동지들도 있었소. 그때 거기 로동자들은 파업을 하든지 렬차사고를 일으켜 복수하겠다고 끓어번졌소. 나는 거기 조직책임자를 만나 로동자들을 진정시키라고 의견을 주었댔소. 단서가 명백하게 드러날 그런 소동을 벌려서는 안된다고 했소. 물론 그때로서는 그렇게 한것이 옳았다고 생각하오. 그렇지만 사령관동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활동방향을 받고 보니 적극적인 투쟁을 벌려야겠다는 생각이 뚜렷해지오. 대륙으로 넘어가는 군수물자를 실은 렬차를 전복시키자는거요. 놈들에게 타격을 주고 인민들의 반일기세를 북돋기 위해서···》

《···》

《갔다가 오늘밤중으로 돌아와야 하오. 돌아오는 길에 순정동무는 김시형이네 집에 들리게 되오. 김시형동무를 만나서 나의 말을 전하시오.

<리극로선생은 총독부에서 요구하는대로 행동해야 한다. 장차 선생의 신변안전에 대해서는 홍준걸이 전적으로 책임질것이다.> 리해할만 하오?》

《···》

리순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벌써 만류하거나 의논할 여지가 없는 공작원의 전투지시임을 느꼈던것이다.

홍준걸이 계속했다.

《순정동무는 그 집에서 쉬고 만저우(만주)에서 오는 <향토시찰단>이 언제 도착하는가 하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래일 밤까지 여기에 오시오.》

《알겠어요.》

하고 리순정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두사람은 폭우가 쏟아지는 밤거리에 나섰다.

시내의 중심거리들에선 사람들의 왕래가 덜했지만 룡산구 막바지의 철도로동자들의 단층주택마을은 오수도랑이 범람하는 바람에 자다가 일어나 나온 남정들과 녀인들이 소란하게 뛰여다니고있었다. 넘쳐나는 물들이 집집들의 마당에 밀려들면서 낮은 토방과 변변치 못한 담벽을 위협했던것이다. 부엌마당에 물이 찬다고 아우성치는 아낙네의 목소리를 누르며 입환하는 기관차의 거쉰 기적소리가 내려앉은 밤하늘아래에 웅글게 울려퍼졌다.

마당에 나와 물도랑을 치고있던 《형님》이 홍준걸을 알아보고 집안으로 안내했다. 천정에서 새는 비물이 방바닥에 놓은 소랭이에 뚤렁뚤렁 떨어지고있었다.

좁은 웃방에 마주앉은 홍준걸이 함께 온 리순정이부터 소개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파견하신 공작원이라는 말에 30대의 장년인 《형님》은 머리를 깊이 숙이고 인사를 하는것이였다.

이날밤 홍준걸은 사령부의 전략방침을 관철하기 위해 철도로동자들속에서 태업과 파괴, 렬차전복 등의 적극적인 투쟁을 벌릴 구체적인 계획을 진지하게 토의하고 조직사업도 했다.

새날이 잡혀 헤여질 때 리순정은

《투쟁을 하면서 더 깊이 사귑시다.》

하고 소박하게 웃었고 《형님》은 그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열렬한 호응을 나타냈다.

날 밝을무렵에 홍준걸은 뼈속까지 젖어 술취한 사람마냥 비칠거리며 가까스로 아지트에 들어섰다. 밤잠을 자지 못하고 지친데다 나아가던 상처에 물이 들어가서인지 열이 올라 떨면서 방바닥에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