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12


 
 

제 5 장

12

 

총독부가 자리잡은 광화문통에서 멀지 않은 가회동의 뒤거리에 지은지 몇해되지 않는 일본식벽돌집 다섯채가 있었다. 집구조가 별스러워 팔리지 않던 그 집들의 마지막채에는 기왕에 량반댁마님이였던 칠순에 나는 로파가 사는데 홍준걸이 그 웃방에 거접하고있었다.

홀로 사는 로파는 큰방 두칸이 소용없어 아이없는 세방살이군을 두려고 했으나 사이문을 막아버리면 출입문이라고는 도로에 면한 현관문밖에 없는 방이여서 신청자가 없었다. 웃방에서는 마당에 나갈수도 없게 되여 생활에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그 집이 뒤벽에 창문까지 없었으므로 비밀활동에는 더없이 유리했다. 집세만 제대로 물면 사람을 싫어하는 주인로파와 마주칠 일이 없었고 또한 그 집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홍준걸은 봉변을 당한 이튿날 그 방에 옮겨와 자신이 상처를 치료하면서 공작을 계속했었다. 그의 아지트를 아는 사람은 같은 학교의 력사교원인 김시형이뿐이였다.

상처는 더디게나마 나아가고있었으나 타박의 후유증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런 몸으로도 그는 광산기계공장이며 룡산역보신구의 철도로동자들을 은밀히 찾아다니면서 투쟁을 지도했고 이따금 아지트에 찾아오는 김시형과 더불어 지식인들속에서의 공작을 진척시켰다.

《일쏘중립조약》체결에 따르는 일본의 강대성선전의 소란속에서 미나미총독은 《대일본제국》의 천하가 영원할것처럼 조선사람들에게 《황국신민》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라고 몰아대고있었다. 허장성세하는 일제어용선전의 광풍에 우국지사연하던 자들의 변질된 떠지껄임까지 몰아쳐 반일감정을 품고있는 사람들조차 기가 죽어 우왕좌왕하는 형세였다.

(이런 형편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홍준걸은 머리상처가 쏘아 신음하면서도 자기 할 일을 다하지 못하는것만 같아 괴로와 했다.

6월의 무더운 저녁에 홍준걸이 차광막을 내린 방안에서 총독부관보를 연구하고있는데 문기척소리가 났다. 김시형의 신호였다. 력사교원은 홍준걸을 따라 방안에 들어서자 나직이 말했다.

《쏘도전이 터졌네.》

《···》

《22일 새벽에 히틀러군이 쏘련 서부국경에서 일제히 포문을 열었네. 비행기의 대편대들은 국경부근의 비행장, 해군기지, 철도교차점, 기타 군사시설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하고 지상군부대들은 국경을 돌파하여 동쪽으로 진격하고있네.》

《드디여 시작됐군!》

홍준걸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쏘련군패퇴의 소식에 기분이 흐려졌던것이다.

《한데 자네는 무엇이 좋아서 웃고있는가?》 하고 그는 력사교원을 쳐다보고 물었다.

《쏘도개전은 글쎄 며칠전 일이구···》

김시형은 과일구럭을 방바닥에 놓고 말했다.

《우리 생활이라구 왜 좋은 일이 없겠나.》

《?》

《마침 길에 사람이 없어 다행이였구 자네 얼굴에서 병색이 훨씬 가신걸 보니 기분이 좋았어. 그리구 또···》 하던 말을 끌면서 홍준걸이를 마주보고 싱긋이 웃었다.

《···우리 집에 귀중한 손님이 왔네.》

《···》

홍준걸은 심중해져서 기다렸다.

《날씬한 몸매에 눈이 길쑴하게 생긴 처년데 심양에서 학교다닐 때부터 자네와 아는 사이라더군. 리순정이라구···》

홍준걸은 심장이 세차게 뛰놀고 가슴이 콱 막혀 말을 못했다.

《지금 쉬고있네. 우리 어머니는 웬 녀자손님인가 해서 얼떨떨해졌네. 경성역에서 내려 역전서점에서 시내안내도를 사들고 우리 집까지 찾아왔더군.···

자네 안부를 묻고 만나게 해달라더군. 다른 말은 없었네. 친척집에 놀러온 아가씨처럼 삽삽하게 구는데··· 침착하고 정중하고··· 조련치 않은 녀자더군.》

《사령부에서 파견된 동지일걸세.》

《난 자네에게 선통을 하구 데려올 생각이였는데··· 어쩔가. 지금 가서 보낼가? 비가 올것 같구만.》

《아니, 어두워진 뒤에 움직이지.··· 그동안의 소식이나 알려주게.》

홍준걸은 한시바삐 만나고싶었으나 마음을 늦추면서 자리에 앉았다. 김시형은 맞은켠에 앉자 울분을 털어놓았다.

《소식이라는게 늘 분통이 터질 일뿐이라니까. 히틀러의 전격전, 파죽지세로 동진, 쏘련군 패퇴··· 그러루한 보도를 요란하게 내돌리면서 일본놈들이 마치도 저희네가 이긴것처럼 기세를 올리는군. 그러면서 조선사람들을 사정없이 때려몬단 말이야.

요즘은 <조선농업보국청년부대>라는걸 무어가지고 일본에 보낸다네. 소학교, 중학교를 방금 졸업한 애숭이들을 포함해서 조선청년들 수천명이 일본에 건너가 전몰장병유가족과 징병나간 농가들에서 농번기의 머슴질을 하게 된다네. <개척청년단>이요, <의용대>요 해서 만저우(만주)에 보내구 제놈들의 머슴질을 시키려고 일본에 보내구 대포밥으로 중국전선에 끌어가구···

하는짓들을 보고있노라면 속이 부글거려 못견디겠다니까!》

력사교원은 부드득 이를 갈면서 분을 삭이지 못해 씨근거리고 홍준걸은 한숨을 쉬였다.

《나라를 빼앗긴 백성이 무슨 굴욕인들 당하지 않겠나! 민족재생의 길은 우리가 마련하는 전민항쟁에 있으니 쇠쇠한 일에 지내 신경을 쓰지 말구 대사를 위해 공작을 추진시켜야 하네.》

《나도 모르지 않네.》

김시형은 맥빠진듯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놈들이 소란을 피우면서 발광하는 판이니 우리도 한바탕 소란을 피워보구싶네. 분김에 하는 소리가 아니야!··· 복통이 터질 지경이네. 여기 끌려가구 저리 끌려가구 쪽발이들의 머슴질에까지 끌려가고나면 남는것들이란 우리 같은 훈장나부랭이들이거나 코흘리개들, 일제의 억압통치가 빚어낸 기형아들이지. 우리 학교 젊은 리공과 교원 같은 자들 말이네···.》

《···》

《참 그 리공과 교원인 젊은이가 요전에 어쨌는지 아나?》

《···》

홍준걸은 김시형의 푸념을 들으면서 가슴이 답답했으므로 리공과 교원이 어쩌고 하는 말은 흘려듣고있었다.

《그 숙맥 같은 친구가 일전에 나보구 이런 말을 묻더군. 지금 <징병>에 나가는 조선청년들이 전장에서 <조선광복군>에 들어간다는데 사실인가요?··· 하고 말이네. 내가 그런건 전혀 모른다고 했더니 자기 친구가 중경방송을 듣는다면서 그런 말 누구에게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더군.》

《반일감정은 반일감정인데···》

하고 홍준걸이 주의를 가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숙맥이야. 류치장에 집어넣고 서너대 먹이면 젖 먹은것까지 다 토할거야.》

김시형의 비양조에 홍준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청년들에게도 관심을 돌려야겠네. 영향을 잘 주어 반일전선에 묶어세워야겠어. 한데··· 그 청년이 지금 얼빤한 영향을 받는것 같은데··· 중경방송이라··· 애매하단 말이야.》

《그 친구는 서대석의 누이동생과 단짝인 고청민의 동창생이라네.

왜, 자네를 뒤따르는 녀석있잖은가. 서대석의 영향하에 있는···》

《나도 지금 그 생각이네.》

홍준걸은 량미간을 모으고 방바닥을 굽어보며 중얼거렸다.

사령관동지에게서 받은 중요한 과업하나를 아직도 수행하지 못해 마음이 무거웠던것이다.

《내가 서대석선생을 진작 찾아갔어야 하는건데··· 용단을 내리지 못했어.》

《아니 자기를 죽이려고 노리는 사람을 찾아가서 화해를 청하겠는가. 더군다나 터진 머리가 아직 낫지도 못했는데···》

김시형의 반박에 홍준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도 그런 감정이 없지 않았어. 혁명가가 아니라 속물이였지.

사령관동지의 높은 뜻을 받들어나가는 길에서는 개인적인 고통이나 불만을 무시하고 높은 경지에 서서 헌신성과 희생성을 발휘해야 하네. 한데 내가 그러지 못했으니 서대석선생은 아직도 뒤골방에 들어박혀 단파수신기로 외국방송이나 들으면서 청년들을 제멋대로 혼란시키고 뛰뛰한 잡소리를 퍼뜨리거든.

내 잘못이야-》

김시형은 과일구럭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다가앉으면서 심중하게 말했다.

《말이 나서가 아니라 내가 오늘 자네에게 보고하려는 중요한 문제가 바로 서대석이네.

며칠전에 어학회에 들렸더니 리극로선생이 안타까운 소리를 하더군.

···총독부의 총독관방실에서 한 관리가 리극로선생을 불러놓고 하는 소리가 이제 만저우(만주)에서 조선사람들의 <향토시찰단>이 오는데 경성에 있는 조선인인사들이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통고하더라네.

<사찰단>이 경성시내를 비롯하여 여러 지방을 찾아다니면서 반도사람들이 <국가총력제제>하에서 <대동아공영권>확립을 위해 어떻게 분투하는가를 목격한다는거네. 소원에 따라 명승지들도 참관하고 고향에도 다녀오게 되는데 모든 편의를 총독부에서 맡아 도모하겠지만 영접과 환송의 의례행사에 참여할 준비를 하라고 하더라네.···

그런데 어느 날 서대석이 거리에서 리극로선생을 불러세우고 하는 말이 그 <사찰단>이라는건 총독놈의 <필생의 대업>인 <내선일체>, <선만일여>를 세상에 시위하자고 꾸민 꼭두각시놀음인데 선생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놈의 얼림수에 놀아나는가, 여러차례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총독놈의 장단에 춤을 추며 돌아가다간 재미없소!

이 나라에 리재명이나 윤봉길이 같은 애국자들이 더는 없을줄 아시오! 하고 비틀린 웃음을 웃으며 가더라는군.

리극로선생은 나약한 선비가 아닌데 요즘엔 영 사색이 되여 지내네. 어쨌으면 좋을지 모르겠다면서 자네를 만났으면 하더군. 만날 형편이 못되면 그런 사정을 말하고 방도를 알려달라고 부탁하네.》

홍준걸은 고개를 무겁게 숙이고 대답하지 못했다. 부상당한 이후로는 리극로를 만나지 못했었다. 경찰도 문제였지만 서대석이네 패거리에 걸리면 어느쪽이든 화를 면하기 어려울것 같아서였다.

서대석이 민족반역자들의 처단에 나섰던 리재명이나 일제의 고관들이 렬석한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윤봉길렬사 등의 이름을 걸고 리극로를 협박했다는 사실은 결코 등한하게 여길 일이 아니였다.

《향토시찰단》을 맞이하는 자리나 환영연회장에 폭탄공격을 할수도 있는 일이였다.

《일본경찰이 왜 그자는 잡아가지 않을가? 그<대혁명가>야말로 경찰의 밀정이 아닐가, 엉? 감옥에서 나올 때 그러루한 임무를 받았을수도 있지. 혁명가의 가면을 쓴 밀정···

있을수 있는 일이야.··· 어때? 이번 기회에 아예 그자를 없애버리지 않겠나?》

긴장한 사색을 더듬다가 홍준걸이 입을 열었다.

《아닐세.

그 사람이 밀정이였다면 나를 암살하려고는 하지 않았을거네.》

《하긴 그렇군.··· 그러나··· 자네에 대한 암살에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리극로선생이나 <향토시찰단>공격에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거네. 2층건물의 창문들을 모조리 까부시는 돌총명수들까지 거느리고있으니까···

그럼 ··· 도대체 어쩌자는건가?》

《좀 더 생각해보고 결정적인 대책을 세우겠네. 무엇보다 나를 찾아온 손님을 만나야겠네. 그런 후에 내 결심을 자네에게 알려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