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11


 
 

제 5 장

11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서는 사령부로 돌아갈수 없었다. 시내에서 거처를 잡으려면 감옥에 면회왔던 사람네 집이 안전할것이였다.

면회왔던 사람들은 슬픔에 잠겨 맥없이 흩어져가고있었다.

리순정은 한 녀인과 함께 걸으면서 괴로운 심정을 나누었다. 남편이 아편장사를 하다가 검속된 마흔살쯤 되는 녀인이였다.

리순정이 오빠가 징병을 기피해다니다가 잡혀 면회왔는데 권세있는 사람들을 통해 석방운동을 하려고 한다는 말을 했더니 그동안 와있으라고 허락하는것이였다.

구시가의 장거리에 있는 평범한 집이였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는 리순정의 침착하고 생각깊은 거동은 오빠를 석방시키기 위해 마음쓰는 착한 누이의 모습 그대로여서 아낙네는 못내 동정하며 친절을 베푸는것이였다.

저녁무렵에 리순정은 그 집을 나섰다. 유격대공작원과 자기 처남을 감쪽같이 독살하려고 한 천시억을 방임해둘수 없었다. 또한 그의 안해도 이번 일에 공모했는가를 밝히고 싶었다. 그들의 본심을 똑똑히 안 연후게 가능하다면 그 녀인을 통해 그 어떤 연줄을 찾을 생각이였다.

(천시억은 본래 사람을 독살할만큼 독하고 포악한 인간이 아니였다. 엄혹한 환경에서 목숨부지에만 급급하다나니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것이다.)

리순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서무계장네 집에 오니 안주인이 어리둥절해 하였다.

《그 길루 떠난다더니 왔구만.》

《아주머니 동생을 만나본 사연도 알려드리고 아저씨한테 알려줘야 할 일도 있고 해서 왔어요.》

그러자 녀인은 반색했다. 동생의 형편을 알고싶었던것이다.

《그애가 어떻습데? 앓지나 않는지···》

(아무것도 모르고있구나- 공모하지 않았다.) 하고 리순정은 한마음 놓았다.

《몹시 쇠약해지긴 했지만 앓지는 않더군요. 자기가 잘못한 일이 없으니 의젓하게 처신하더군요.》

《한번 잡히기만 하면 살아날길이 없다던데···》

《놈들은 죄없는 조선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잡아가고 닥치는대로 죽이지만 우리가 떳떳하게 맞서나가면 제멋대로 놀아나지 못해요. 맞서서 싸워야 해요.

동생은 감옥안에서 굴복하지 않을거예요. 그러니 밖에서 다른 사람들도 도와나서야 해요. 먹을것도 넣어주고 인정을 베풀면서 고무도 해주고 죄없는 사람을 내놓으라고 항의도 하고···》

《그러다간 오히려 큰 화를 입는다던데···》

《아저씨가 아마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할거예요. 그래서는 안돼요. 고개를 숙이고 웅크리면 웅크릴수록 놈들은 더욱 제멋대로 짓밟고 제멋대로 죽여요. 맞서야 해요. 맞서서 싸워야 해요. 너 죽고 나 죽고 결판을 내자 하는 배심으로 맞받아나가면 아무리 강한 놈이라 해도 기가 질리고 말아요.》

녀인은 불안한 눈길로 문쪽을 돌아보고나서 말머리를 돌렸다.

《순정의 일은 어떻게 됐소?》

《아무 대답도 못들었어요. 나를 믿지 않는것 같아요. 파악이 없는 사람이니 그럴수도 있지요.》

녀인은 생각에 잠겨 방바닥을 들여다 보며 말이 없었다.

메주를 찧어 장을 담그는 일을 거들어주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배급소에서는 일본사람과 조선사람을 구별하느라고 《창씨》 하기전의 낡은 대장까지 뒤져가면서 차별을 계속한다느니, 시내의 잡화점에서 일본인경찰이 외상을 주지 못하겠다는 중국인상점주인을 때려눕혔다느니 하는 범속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리순정은 녀인의 마음속에 서리여있는 반일감정을 느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천시억은 손님이 떠나가지 않은걸 보자 비틀린 웃음을 띄우고 심술궂게 물었다.

《또 무슨 공작을 하자고 왔소?》

자기의 모략이 실패했음을 알고온 기색이였다.

《아저씨에게 꼭 하고싶은 말이 있어 떠나지 않았어요.》

《흥! 어쨌든 잘 왔소. 그렇지 않아 나두 순정이에게 하구 싶은 말이 있소.》

손끝으로 안경을 추켜올리고나서 그렇게 말한 천시억은 저녁상을 챙기려다가 불안에 싸여 두리번거리는 안해를 누가 오지 않나 살피라고 밖에 내보냈다.

리순정은 침착하게 앉아있었으나 천시억의 눈길은 분노에 번뜩이고있었다.

《어째 이 집을 온통 도륙내고 싶어서 이러오! 엉?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원쑤같애 보이오! 어째 이렇게 소란을 피우냐말이요!》

리순정은 흥분을 누르고 담담하게 말했다.

《난 아저씨가 면회를 하도록 조처해주고 차입할 음식을 준비하라고 했을 때 퍽 고맙게 생각했어요. 오늘 아침에 꾸레미를 싸들구 면회장소에까지 데려다 주었을 때 은근히 감심했댔어요.

하지만 음식에 독약을 쳤다는걸 알았을 때 눈앞이 아찔해졌댔어요. 격분했어요.

아저씨는 량심도 없고 인정머리도 없는 사람이 되였어요. 나를 죽이고 자기 처남까지 독살하려고 했으니 그 다음엔 또 누구를 죽이겠나요?

나를 죽이고 처남을 죽이면 일이 무사히 끝날것 같아요?! 우리 혁명군이나 혁명조직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을줄 알았어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원인을 밝히고 대책을 세우며 용서하지 않을거예요.···

참말이지 나는 격분했댔어요. 복수심이 끓어올랐어요. 나에게는 복수할수 있는 수단도 있어요.

그렇지만··· 아저씨가 원래부터 나쁜 사람이 아니였기때문에, 이전날 일제를 미워하면서 혁명사업을 도와준 일이 있기때문에 그리고 지금도 나나 처남을 피맺힌 원쑤로 여겨서가 아니라 단지 제 한 목숨을 보존하려는 짧은 생각에 옴하다나니 그런 지경에 이르렀으리라고 리해하면서 모진 마음을 늦추었어요.》

《···》

《아저씨는 지금 제 정신으로 사는게 아니라 남의 정신으로 살고있어요. 아저씨의 원쑤는 나나 아저씨의 처남이 아니라 아저씨를 억누르고 조선사람으로서의 넋까지 빼앗아내는 일제라는걸 똑똑히 알아야 해요.

일제의 학정에 억눌려 살아도 정신만은 잃지 말고 조선사람의 정신으로 사십시오.

일본놈들이 두렵다고 겁부터 먹을것이 아니라 자기 힘을 믿고 또 힘을 합치면 때려눕힐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십시오. 열번을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고 그놈들도 찍고찍으면 꺼꾸러지기 마련입니다. 이제 우리 인민이 단결된 힘으로 일제를 꺼꾸러뜨릴 날은 기어코 옵니다. 그때 가선 친일파로 된걸 후회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조선사람의 량심을 가지고 반일투쟁에 나서십시오!》

천시억은 고개를 숙인채 잠자코있었다.

《이건 아저씨에게 꼭 하고싶었던 말입니다. 할 말을 다 했으니 이젠 돌아가겠습니다.》

천시억은 고개를 수그리고 굳어진채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리순정이 구럭을 들고나가려고 할 때 방문이 열리더니 두눈에 열기를 번뜩이며 안주인이 들어섰다. 한손으로 리순정의 팔소매를 잡았으나 이글거리는 눈길은 남편을 쏘아보고있었다. 흥분으로 숨을 거칠게 쉬면서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고 안타깝게 묻는것이였다.

《그 음식은 어떻게 했소? 밖에서 다 들었소.》

《들고간 물건이여서 할수 없이 차입했어요. 그렇지만 음식에 독약을 쳤으니 먹어서는 안된다고 귀띔했어요.》

녀인은 온몸이 나른해져서 문턱아래 스르르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니 동생은 내가 저를 죽이자고 한줄루 생각하겠구만.··· 집에서 쫓아내더니 나중엔 죽이자구까지 했다구···》

리순정은 절망에 싸인 녀인을 안심시켰다.

《아무러면 내가 동생이 그런 무서운 생각을 가지게 했겠어요? 경찰이 차입품을 검사하면서 못된짓을 한것 같다고 똑똑히 말했어요.》

녀인의 얼굴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소리없이 조용히 흐느끼면서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나두 이젠 더 견디지 못하겠소.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집에서 내보낼 때에두 가슴이 터지는걸 참았소. 저 잘난걸 남편이라구 떠받들면서 억울한 일을 참았구 목숨부지하려구 견디여왔지만 이렇게 살다간 제 명두 건지지 못하겠소. 사람이 이렇게 살아서는 뭘하겠소. 빌어먹어두 일없으니 오늘루 이 집에서 나가겠소.》

목소리가 떨리면서 강심이 마디마디에서 울렸다. 천시억은 깊이 한숨을 지었을뿐 말이 없었다. 리순정은 문옆에 서있었다. 나가지는 못했다.

《아주머니,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이 집에서 불화가 생기고 반목이 생겨 생리별하는걸 바라지 않습니다. 이게 모두 일제의 학정때문에 빚어지는 페단이니 우리는 서로 리해할것은 리해하고 용서할것은 용서도 하면서 돕고 깨우치면서 뜻을 합쳐 가야 합니다. 집안에서도, 이웃들과의 사이에서도 서로 뜻을 같이 하고 단합하여 일제를 반대해야 합니다. 그러니 아주머니도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고 가정의 화목을 도모하면서 동생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하고싶은 말은 많지만 갈 길이 바빠서 가보겠습니다. 부디 안녕히들 계십시오.》

밖은 벌써 어두웠다. 불빛이 흘러나오는 뜨락을 지나 훤하게 트인 마을길에 나섰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따라오고있었다. 천시억의 처였다. 녀인은 숨을 할딱거리며 리순정의 옷깃을 잡았다.

《저녁도 안 잡숫구 이 밤에 어디루 간다구 그래요? 반가와 할 집도 없을텐데··· 우리 집에 가서 쉬구 래일아침에 떠나오.···남편인지 뭔지 하는 사람두 량심이 찔렸던지 그렇게 당부하던데···》

《아주머니, 고맙습니다만 그럴 시간이 없어요. 난 지금 꼭 가야 할데가 있어서 그러니 량해해주세요.》

《정 그렇다면 이것만이라두 받아주오.》 하면서 녀인은 한쪽손에 들고있던 지전을 손에 쥐여주는것이였다.

《얼마안되는 돈이지만 로자로 쓰게 꼭 드리라고 주인이 부탁하더구만.》

리순정은 마지못해 받았다.

《아저씨가 주는것이니 고맙게 받겠어요.···

아주머니, 아주머니의 동생은 훌륭한 사람이예요. 앞으로 집의 아저씨가 그 동생을 옳바르게 알고 잘 도와주게끔 아주머니가 옆에서 은근히 타일러주어야 해요.》

녀인은 격정이 끓어올라 순정의 손을 꼭 감싸쥐는것이였다.

《순정이, 난 순정이가 이 밤에 어디루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동생과 친하게 지내던 사람을 알려주겠소. 여기 철공소에서 일하는 철공인데 부모들을 모시고 사는 젊은이요. 현공소를 지나 올라가면 밤에도 불을 환히 켜고 일하는 철공소가 있는데 그옆에 있는 작은 단칸집이 그 사람네 집이요. 그 사람을 만나겠다면 내가 같이 가겠소. 내막은 모르겠지만 내 동생과 가깝게 지내는 좋은 사람이요.》

리순정은 녀인의 말을 명심하여 들으면서 기억해두었다.

《아주머니, 고마와요. 도움받을 일이 생기면 래일이라도 아주머니를 다시 찾아가겠으니 지금은 집에 돌아가세요. 아저씨가 기다릴거예요. 아저씨도 원래는 좋은 사람이였어요. 그러니 집에서 불화를 일으키지 말고 아저씨를 잘 타일러 동생을 도와주게 하세요.》

녀인과 헤여져 어둠속을 총총히 걸어갔다. 음식점들이 늘어앉은 행길에 나서게 되였을 때 뒤따르던 두 사람이 량옆에 붙어서며 팔을 틀어잡았다.

《이게 무슨짓이예요!》

나직이 맵짜게 꾸짖었으나 그자들은 앞으로 떠밀면서 대수롭지 않게 뇌까렸다.

《자위단 순찰대다. 걸어라.》

《난 여기 서무계장네 집에 온 친척이요. 그 집에 가면 내 신분을 확인할수 있소.》

당당하게 맞섰지만 자위단원들은 끔쩍도 하지 않았다.

《잔말 말아! 본부에 가면 다 밝혀지겠으니···》

항거해야 소용없음을 깨닫고 묵묵히 걸었다. 길가에 게시판이 서있는 갈림목에서 오른편으로 꺾어져 올라갔다.

리순정은 터질듯 한 가슴을 부여안고 닥쳐올 일들을 생각했다. 놈들의 본부에 가면 탈출할수 있는 기회는 더욱 없을것이였다. 틈을 보아 품속에 지닌 극약을 삼킬수는 있을것이다.··· 죽는것은 두렵지 않으나 지하조직과의 련계를 맺지 못하는것이 원통했다.

사령관동지께서 그처럼 심려하시는 중요한 문제를 풀지 못하고 원쑤들의 손에 걸려든것이 고통스러웠다.

자위단원들은 대도로에서 벗어져 사이길을 좀더 가서 커다란 단층집의 열려진 대문안에 들어섰다. 정면현관에는 길다란 현관이 붙어있고 불빛이 환한 창문을 통해 넓은 방에 세워놓은 자전거들이 눈에 띄였다. 자위단원들은 현관을 거쳐 뒤마당에 나가더니 자그마한 딴채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널마루를 깐 방안에 완장두른 자위단원 한명이 앉아있다가 고개를 들어 긴장하게 지켜보는것이였다.

《자, 여기서 말해보시오.》

함께 온 사나이가 앞에 마주서며 물었다.

《어디 사는 사람이고 어떻게 되여 현성에 왔소?》

《난 동신평에서 살아요. 현공소 서무계장님의 친척인데 외가켠언니와 동생을 만나보러왔댔어요. 헤여진지가 너무 오래서···》

자위단원들은 더 묻지 않았다.

옆방문이 열리고 의젓하게 생긴 풍채좋은 사나이가 들어섰다.

들어서면서 찬찬히 여겨보고있었다.

《내가 조봉길입니다. 암호는 있습니까?》

리순정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령관동지께서 알려주신 암호를 부르고 덧붙여 말했다.

《전 리순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선생으로 있던···》

그러자 조봉길이 엄숙하게 말했다.

《잘 알고있습니다.··· 동무들, 이 동무는 사령부에서 파견한 공작원동지요.》

리순정의 눈에 감격의 눈물이 어렸다.

두사람은 감격에 겨워 뜨겁게 손을 잡았다.

《꼬리가 드러나 피해다니다가 놈들의 코밑인 이 자전거수리소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오늘 오후에 간수들속에 있는 우리 사람이 정체를 알수 없는 녀자가 누이네 집에 들렸다가 면회하러왔더라는 감방안의 통신을 전하기에 사람들을 내세워 찾던중입니다.》

《사령관동지께서 여기 조직과의 련계가 끊어져 몹시 심려하십니다.》

《그럼 장군님께서 전구에 나와 계십니까?》 하고 조봉길이 놀라서 물었다.

《가까운 곳에서 활동하십니다.》

조봉길은 깊이 감탄하면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요즘 적들의 <토벌>과 수색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이윽고 조봉길은 옆문으로 통하는 밀실에 리순정을 안내하여 조직의 형편을 보고했다. 적들의 탄압이 우심해지지만 조직은 믿음직하게 보호되고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하여 자기가 추격을 당하다나니 왕래가 잦았던 왕바버즈의 《담배집》도 놈들의 의심을 사게 된 실정을 털어놓았다.

모연공작하러온 유격대원을 집에서 쫓아내고 사살했다는 소문이 시내에 퍼져 고형근을 악질적인 친일파로 치부하고있었다. 그 문제에 대해 리순정이 의견을 말했다.

《모연공작하러갔다는 유격대원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진상을 더 알아봐야 하겠습니다. 혹시 그자가 대오에서 변절도주한 고형근선생의 조카가 아닌지···》

그러자 조봉길은 두주먹을 틀어쥐고 흥분하여 부르짖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글쎄 고선생이 그럴 사람 같지 않았는데···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이튿날 밤 리순정은 조봉길이 소개한 한 지하조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시내의 뒤거리에 있는 다른 아지트의 방에 들어섰다. 기다리고있던 고형근은 일어서서 두손잡고 반기며 감격하여 말하는것이였다.

《장군님께서 건재하시여 싸움을 이끌어가신다니 한량없이 기뻤습니다. 다만 험지에 계시는 장군님의 신변에 무슨 불상사라도 생길기봐 불안하기 그지 없습니다.》

리순정은 진심이 넘치는 고형근의 말에 사의를 표하면서 동지들이 믿음직하게 호위하고있으니 다른 일은 없을것이라고 안심시켰다.

《장군님께서는 우리 혁명군을 적극 지지하며 성원해주시는 선생님이 일제군경들의 의심을 사고 탄압을 받는 일이 없게끔 각방으로 도와드려야 한다고 간곡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고형근은 지난 날을 더듬으며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장군님을 만나뵈온 후부터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깨우쳐줘야 한다는 말씀을 명심하고 마음 써왔습니다만··· 조선사람들의 면전에서 그놈들의 장단에 춤을 추게 되는 때엔 참말이지 괴롭기 그지없습니다.》

리순정은 다정하게 웃었다.

《장군님께서는 선생님의 그러한 심정을 헤아리시고 선생님의 동의를 받아 조직적련계를 지어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선생님을 조국광복회 옌지(연길)지구위원회 특수회원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고형근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서 정중하게 말했다.

《저한테 그만한 자격이 있겠는지 모르겠지만 장군님께서 의도하시는바라면 목숨걸고 받들겠습니다.···

한데 그런 명의를 지니고는 일본사람들과 종전처럼 상종하지 말아야 할텐데- 저놈들이 눈치채지 않을가 두렵습니다.

요즘은 경찰청장이라는 자가 한결 더 친절을 베풀면서 재만조선인들의 <향토시찰단>을 무어 조선에 다녀오라고 권하는데··· 꼭두각시놀음하기가 께름합니다. 저번에 총독놈이 여기 왔을 때 그런 초청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편히 앉으십시오. 앉아서 이야기하십시다.》

겸허하게 일어서서 듣던 리순정은 고형근이 자리에 앉자 다시 맞은켠에 앉으며 말했다.

《선생님의 애국지정은 장군님께서 알고계십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마시고 <향토시찰단>에 나가십시오. 총독이 청하면 접견에도 연회에도 참가하시고 고향도 돌아보고 명승지도 유람하고··· 그놈들이 하라는대로 자유롭게 활동하십시오. 그 모든 활동에서 조국광복회 회원이라는 자각만 간직하면 됩니다. 선생님의 비밀활동은 일정한 기간 사령부와만 련결되여있어야 합니다.》

고형근은 심중한 표정이였다.

《오늘에 와서야 제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참다운 일을 하게 되였습니다. 이게 다 장군님의 덕분입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리순정은 이날 밤 조봉길을 만나 사령관동지께서 제시하신 시내지하조직의 활동방향을 전달했으며 지하조직을 다른 동지에게 책임지게 하고 국내에 공작지를 옮길 준비를 하여 가지고 백두산밀영으로 나오라는 지시도 전했다.

그리고는 동트기전의 새벽이슬을 헤치며 시내를 벗어나 사령관동지께서 기다리고계실 밀영을 향해 산길을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