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1


 
 

제 4 장

1

 

렬차는 경성을 향해 달리고있었다.

쌀랑하니 추위가 떠도는 3등차칸엔 손님들이 많지 않았다. 홍준걸은 좌석의 등받이에 의지하고 맞은켠에 앉은 커다란 눈에 열정이 넘치는 처녀의 말을 들으면서 만저우(만주)의 밀림속에서 혁명의 길을 걷고있을 리순정이를 생각했다. 자주색 띠를 두른 둥그스름한 흑곤색모자를 쓰고 검은 모직외투를 입은 그 처녀는 처음엔 잘 사는 집 딸같이 보였으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세히 관찰하니 가난한 집 처녀였다.

여러해를 입어 낡아버린 외투며 소매밑에서 이따금 드러나는 조선저고리의 자주색 끝동이며가 도시의 류행을 따라가기 어려워하는 형편을 나타내고있었다. 고등녀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제국대학 도서실에서 사서로 일하는데 늙은 부모님들을 모시고 살아가기 어렵다는 처녀의 솔직한 말에 홍준걸은 은근히 동정을 품었다. 젊은 청년의 깨끗한 심정을 보여주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이 자그마한 동정심이 후날 그의 공작에 엄중한 파국을 가져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홍준걸은 지금 대전에 있는 리극로의 각근한 친우인 한 어학자를 만나고오는 걸음이였다.

지엔다오(간도)의 전구에 찾아가 사령관동지를 만나뵙고 자기 활동에 절실히 필요한 가르침을 받아안고 돌아온 후로 그의 공작은 더욱 활기있게 벌어졌다.

샤오하얼바령(소할바령)회의에서 제시된 새로운 전략로선과 서대석에 대한 사령관동지의 생생한 회상이며 그런 사람들을 아량있게 포섭하여 반일의 길에 묶어세워야 한다는 간곡한 가르침을 이야기했을 때 리극로는 그이의 원대한 구상과 뜨거운 포옹력에 새삼스럽게 감탄했으며 드디여 그를 전적으로 신임하게 되였던것이다. 허나 비밀조직을 확대하는데서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총독부의 긴급의뢰로 리극로가 주관하는 조선기념도서 출판관에서 《전시하 시국인식과 진충보국의 열의를 환기》시키는 어용선전자료를 인쇄배포한것이 민중의 물의를 일으키던 때에 경성부민관에서 미나미총독의 참석하에 경향각지의 지식인들을 모여놓고 《전조선유림대회》라는 관제행사가 열리였다. 어쩔수 없이 리극로도 불리여나간 그 회의에서는 조선의 유식자들이 일제가 부르짖는 《국민정신 총동원운동》에 협력하겠다는 선언문이 결의되였다. 이틀에 걸친 회의가 끝나는 저녁무렵에 한무리의 젊은 청년학생들이 어학회 마당에 나타나 돌총질로 창문들을 까부신후 2층에서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두명의 중년어학자들을 때려눕히고 사라졌다. 그네들은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 한창인 때에 조선어학회라는것이 무슨 도깨비감투냐!》, 《어학회에 드나드는 놈들은 국민을 배반한 나쁜 놈들이다.》 하고 떠들며 난탕을 쳤던것이다.

그것은 분명 《조선어학회를 해산하더라도 일제의 관제기구인 총력련맹에는 들지 말아야 한다.》는 권고와 강박이 무시당하자 푸르딩딩해서 돌아가버린 서대석이 조작한 란동이였으나 피해자들은 하샤오하얼(소할바령)데가 없었다. 홍준걸은 서대석이를 만나 진지하게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총독부 직할 보호관찰소의 통제하에 있으며 경찰의 미행도 따르고있을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접촉의 기회를 고려하고있었다.

리극로의 편지를 받고 상경했던 해주와 대전의 어학자들은 봉변을 당하고 돌아간뒤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로 말하면 어학회의 핵심적인 성원들이였고 반일사상도 어느 누구보다 투철한 인사들이였는데 어학회의 최근 동향에 실망과 의혹을 품고 련계를 끊어버린것이다.

그들을 제외하고 조직을 확대할수도 있었으나 리극로가 주저했고 홍준걸이도 심사숙고했다. 도리로 보나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으로 보나 온당치 않았을뿐더러 지식인들 호상간에 의혹과 불신을 조장할수 있었다. 게다가 매 조직원들을 통해 각지에 비밀조직을 확대하려고 하는 홍준걸에게는 방임할수 없는 심중한 문제였다. 하여 그는 리극로의 소개신을 가지고 그 인사들을 직접 만나보려고 대전부터 다녀오는 길이였다.

대전시내 뒤거리의 작은 단칸집에서 사는 중학교 《국어》교원인 그 어학자는 병들어 누워있었다. 희망없는 생활에 지치고 살림에 쪼들려 앓으면서도 조선어학자인 자기가 일본어로 된 《국어》과목교원으로 그냥 종사해야 하는가, 아니면 구차스러운 교원노릇을 그만두고 거리에 나가 지게군노릇이라도 하면서 연명하는것이 옳은 처사가 아니겠는가 하고 고민하고있었다.

홍준걸은 그에게 김일성장군님의 조국광복로선을 해설해주면서 비밀활동을 위장하기 위해 싫더라도 교원생활을 하는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주었고 완쾌되면 어학회에 자주 다니겠다는 결심까지 듣고 돌아오는 길이였다. 피로감을 느끼면서 좌석의 등받이에 기대고 앉아있던 홍준걸은 차장이 다가오는것을 보고 주머니에서 차표를 꺼냈다. 처녀는 책을 읽고있었다.

그들의 옆에 와서 차표를 찍은 차장이 처녀쪽에 손을 내밀었으나 그 녀자는 책읽기에 열중하여 고개도 들지 않았다. 곁에 앉은 늙은이가 일깨워서야 쳐다보고 작은 손가방을 찾아들었다.

《미리 준비하고있을거지.》

불만스럽게 뇌까린 차장은 받아쥔 차표를 찍고나서 거칠게 물었다.

《무슨 책을 읽는거야?》

처녀는 무릎우에 펼쳐놓았던 책을 닫아 손가방안에 넣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별거 아니예요.》

그러나 차장은 차표를 돌려주지 않고 눈을 흘겼다.

《누가 차칸에서 조선책을 읽으랬어!》

《이건 소설이예요. <봄>이라는···》

《소설이건 뭐건 조선글을 읽으면 안된다는걸 몰라?!》

《심심해서 좀 읽었는데 뭘 그러세요!》

처녀가 기분이 상해 얼굴을 돌려버리자 차장은 부아를 누르며 코웃음쳤다.

《흥! 제사 잘한것 같군··· 짐을 가지고 차장실로 와!》

쏘아보며 을르고 다음 좌석으로 옮겨가자 처녀는 불안에 싸여 홍준걸을 쳐다보는것이였다.

《최근의 총독부훈령에 의하면 렬차안에서는 차장도 사법권을 행사하게 되였소.》

하고 홍준걸이 조용히 일러주니 처녀의 얼굴이 창백해지는것이였다.

차장이 차칸을 나서면서 따라오라고 오금박자 처녀는 풀이 죽어 천천히 일어섰다. 당반우에 놓았던 크지 않은 려행가방을 내려들고 애원하는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면서 따라나갔다.

구원을 바라는 처녀의 눈길에 홍준걸은 마음이 괴로와졌다. 가난한 살림을 엮어간다는 처녀가 생으로 벌금을 물게 된것이 애처로왔다.

《별치 않은 일로 욕을 보게 됐군.》

《사정만 잘했더면 아무 탈 없었을걸.》

옆에서들 동정하는 소리를 듣고 홍준걸은 처녀를 뒤따라나갔다. 차장이 련결대를 지나 다음차칸에 옮겨선걸 보고 조용히 부르며 다가갔다. 그는 차장님의 물음에 겸손하게 대하지 않은 처녀를 엄하게 책망한 뒤에 너그럽게 보아주라고 은근하게 당부했다.

《당신도 조선사람인데 녀학생의 잘못을 한번만 용서해주기 바라오. 나는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옆에서 보기가 딱해서 부탁하는거요. 잘 생각해주오.》

그의 절절한 당부에 차장도 마음이 누그러져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면서 처녀에게 차표를 돌려주었다.···

경성역에 도착할 때까지 처녀는 말없이 조용히 앉아있을 뿐이였다. 차에서 내린 홍준걸이 대합실을 나서자 따라온 그 처녀가 오늘 일을 고마와하면서 후날에라도 인사를 하겠으니 주소와 성명을 알려달라고 졸랐다. 그는 좋은 말로 사양하고 헤여져 곧장 학교로 나갔다. 그리고는 그 일에 대해 망각해버렸다.

닷새가 지난 저녁무렵에 퇴근하여 거리에 나가다가 그 처녀를 만나게 된 홍준걸은 어지간히 놀랐다. 처녀의 뒤에 멀찍이 떨어져서 한 청년이 서있었다. 처녀는 인사를 하며 다가와 며칠전 차칸에서 있었던 일에 새삼스러운 사의를 표하면서 자기와 함께 신설동에 있는 사촌오빠네 집으로 가자는것이였다.

《사실은 그때 제가 오빠의 심부름을 다녀오던 길이여서 우리 오빠도 선생님에 대해 대단히 고맙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기어코 선생님을 모셔오라고 우리를 우정 보냈습니다. 저 청년은 믿을수 있는 나의 동무입니다.》

홍준걸에게는 동떨어져 서있는 청년이 낯익었다. 지난 가을 비오는 날에 리극로의 집에 찾아갔을 때 본 일이 있는 그 집 하숙생이던 고형근의 아들이였다. 아마도 처녀가 혼자 오는것이 오해를 일으킬기봐 따라보낸 모양이였다.

홍준걸은 저으기 놀라왔으나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만한 일을 가지고 거듭 인사를 하니 내가 외려 딱해지누만. 한데 오빠는 무슨 일을 하시오?》

처녀는 그를 찬찬히 여겨보겨 대답하는것이였다.

《전 선생님이 좋은 분이란걸 알고 말씀드립니다. 저의 오빠는 동기라기보다 우리들을 이끌어주는 스승입니다. 만저우에 가서 반일투쟁을 하다가 일제의 순경들에게 잡혀 10년동안 옥고를 치르고나온 대혁명가입니다.

선생님도 혹시 아실는지··· 서대석이라고··· 지식이 많고 의지가 강한 공산주의자입니다.》

홍준걸은 놀랐다. 자기가 기어코 만나려고 하던 인물과 이렇게 마주치다니! 그렇지만 차칸에서 우연히 알게 된 처녀가 자기를 찾아와 혁명가를 존경하고 어쩌고 하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것이 몹시도 거슬리고 또한 불안했다.

이 처녀에게는 자기가 그런 말을 받아줄수 있는 인물로 비치였던것일가. 아니면 서대석이 자기에 대해 알아보았을가? 불안에 싸여 생각을 더듬는 홍준걸에게 처녀가 한마디 보태였다.

《사실은 그날 제가 들고오던 려행가방속에는 단파수신기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날 차장이 저를 렬차순경에게 넘겼더라면 큰 경을 칠번 했습니다. 선생님이 정말 고마왔습니다. 그래서 오빠도 선생님을 꼭 만나보겠다고 합니다.》

홍준걸은 심각해졌다. 서대석이라는 사람이 더욱 미덥지 않았다. 굳세여서인지 자만해서인지 청년들을 시켜 단파수신기를 끌어들이고 청년들에게 대혁명가라는 환상이나 조장하면서 비밀조직을 늘이기 위해 분별없이 활동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홍준걸은 서대석이 같은 사람들을 반일전선에 묶어세워야 한다고 하신 사령관동지의 말씀을 명심하고있었다. 더군다나 그이와 연고관계가 있는 인물이여서 꼭 만날 작정이였다. 만나서 진지하게 해설하고 설복하여 동지로 포섭하려고 했다. 이 문제를 김시형과도 토론했으며 서대석의 집에 찾아갈것이 아니라 그를 안전한 장소인 교외의 염소목장에 안내해올 계획까지 세웠었다. 한데 그 염소목장이 확장공사를 하는 중이여서 그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지금껏 진척시켜오던 어학회의 비밀조직확대때문에 뛰여다니는 터이였다.

《나를 이렇게까지 깊이 믿어주니 진정 고맙소. 고명한 서대석선생이 친히 청해준데 대해서 특히 고맙게 생각하오.

그런데 요즘은 월말과 분기말 결산이 겹치고 새 학년도 준비까지 해야 하니 몸을 뺄수 없는 형편이요.

바쁜 일들을 치르고는 꼭 선생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니 주소를 대줄수 없겠소?》

처녀는 실망에 싸여 망설이다가 내키지 않아 하며 신설동의 번지를 알려주었다. 김시형에게서 들은 그 주소였다.

《고맙소. 후에 꼭 찾아가겠으니 선생에게 그렇게 전해주오. 옥고를 치른 선생이 정양을 잘해서 건강해지기를 바란다는 나의 충심으로부터의 인사도 전해주시오.》

처녀는 못내 서운해했으나 홍준걸은 웃으며 인사를 남기고 헤여졌다.

그후 어학회의 비밀조직에 두명의 지방학자들을 가입시키고는 염소목장확장공사를 빨리 끝내라고 김시형을 통해 재촉했다.

4월초의 어느날 홍준걸은 지난달의 경리운영을 총화하러 오라는 통고를 받고 교장실에 갔다가 전혀 뜻밖에도 징용령장을 받아들고 아찔해졌다. 이런 일을 당할가봐 교장과도 관계를 잘 가지면서 신임을 얻었건만 보람을 보지 못한것이다.

《앞으로는 교원들도 징병, 징용에 나가야 할 형편이니 나로서도 어쩔수 없소. 부청에서 발급한 령장이니까.》

교장도 난처하여 중얼거리는것이였다.

징용에 나간다면 도중에서 도망친다 해도 이리로는 돌아오지 못하며 따라서 공작임무는 수행할수 없는것이다.

사무실에 돌아와 골똘하게 생각하던 홍준걸은 자기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한적이 있는 총독부 경무국의 미우라 고등과장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로 작정했다. 징용령장을 받고도 돈이나 권세만 있으면 다른 사람을 보낼수도, 제명될수도 있는 판인데 미우라가 힘써주기만 한다면 일이 쉽게 풀릴것이다.

미우라와는 여러해전에 우연히 인연이 맺어졌었다.···

사령관동지를 모시고 압록강을 건너 신흥지구로 진출하던 때 적들의 삼엄한 경비진을 고려하여 경계척후들을 파견했었다. 차석진은 그때 유람객으로 변장하고 부전호반에 나갔었다.

짧은 협궤철도의 종점인 작은 역마을에 아담한 려관이 있었으므로 거기서 하루밤을 묵으면서 적들의 경비상태를 정찰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곳은 경찰관주재소와 노구찌의 별장지대였으므로 언제구경을 구실삼아 대안으로 건너가야 했다. 기차역에서 호수가까이 량식을 실어나르는 달구지군과 사귀였더니 대안에서 배가 오면 태워주겠노라고 장담하는것이였다.

찌뿌둥하게 흐린 날씨에 바람이 불었다.

량식실으러 온 배사공들은 풍랑이 심해 고생했다고 하면서도 동료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들이 밀가루 30포대를 다 실었을 때 갈대가 설렁거리는 오솔길로 에돌아 말탄 사나이가 나타났다.

《이 배가 상대리에나 가는가?》

조선말이 서툴었으나 위엄이 풍겼다.

《그렇소이다.》

늙은 사공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호수 건너가는게 몇시간 걸리는가?》

《풍랑때문에··· 한시간은 좋이 걸립네다.》

일본인인듯 한 그 사나이는 잠시 생각하고 잔디밭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있는 달구지군을 불렀다. 안장주머니에서 작은 서류가방을 꺼내들고는 말고삐와 채찍을 넘겨주었다.

《말··· 이것 다 영림서장네 집에 맡기라.》

그렇게 분부하고 암갈색 중절모를 밀어올리면서 손수건으로 이마전을 훔쳤다.

《빨리 떠나지 않는가?》

달아맨 스뎅복의 목단추를 끌러놓으면서 사나이가 물었다. 난감한듯 서로 쳐다보고있던 사공들은 눈길을 떨구고 내키지 않아 하며 배에 올랐다. 늙은축이 선창을 굽어보며 닻줄을 잡으려 할 때 장정이 눈길을 피하면서 분명하게 말했다.

《짐이 많은데다 풍랑까지 일어 어려울것 같수다.》

사나이는 낮은 잔교에서 돛배에 내려서며 비죽 웃었다.

《산골호수에서 무슨 풍랑인가!》

배는 기슭을 떠났다. 사나이는 외모가 두드러지는 차석진이더러 어디에 있으며 무엇하러 가느냐고 묻더니

《사공들을 도와주라.》 하고 분부하는것이였다. 바람을 헤치며 저어가는 배우에서 차석진은 생각이 번거로왔다. 옷차림이나 말투, 거동으로 보아 이 사나이가 군인이나 경찰관으로 높은 급의 인물이며 말에서 뛰여내릴 때 옆구리를 얼핏 수습하는걸 보고 직감한대로 권총을 휴대했으며 말안장주머니에서 꺼낸뒤로 손에서 놓지 않는 서류가방에 비밀문건이 들어있으리라고 확신했다.

(웬놈일가? 어째서 이 호반에 와 돌아치는것일가?)

바람이 불어치면서 물결은 더욱 거세여졌다. 배는 선수를 쳐들고 물이랑을 넘으며 재롱이라도 부리듯 기우뚱거렸다. 이물을 차지하고 앉았던 사나이는 밀가루포대를 꽉 붙잡고 부릅뜬 눈으로 사공들을 지켜보며 소리쳤다.

《배 돌려라, 배 돌려!··· 나 경무국의 경부다. 배 돌려!》

허나 사공들은 정신없이 노를 배길뿐이다.

(경무국의 경부가 왜 여기 나타났을가? <비밀회의>정보를 받고 검거작전을 지휘하러 온걸가?··· 그렇다면 이놈을 복새통에 여기서 수장해버려야 한다. 그렇지만 이놈 하나뿐이 아니라면?)

돛대를 안고 뒤치락거리면서도 차석진은 그 생각뿐이였다. 배는 가랑잎처럼 뒤척이면서 힘겨웁게 저어갔다. 배머리를 돌릴수 없음을 깨달은 경부는 아슬아슬한 이물을 떠나 차석진이 버티고 서있는 돛대쪽으로 움직여왔다.

《뒤집힌다아-》

젊은 사공의 부르짖음은 바람소리와 철썩거리는 물소리에 휩쓸려 비명처럼 처절했다. 경부는 황겁하게 다가와 바람때문에 내려놓은 돛폭을 끌어안으며

《아이고-》 하고 비명을 질렀다.

차석진은 《뒤집힌다》는것이 한쪽으로 쏠린다는 부르짖음임을 깨닫고 오히려 경부가 앉았던 배머리로 나갔다. 자기 발에 밟히는 경부의 가방을 띄여본 순간 차석진의 뇌리에 충격이 번개쳤다. 그것은 막연하던 출로를 비친 섬광이였다. 여차하면 물에 뛰여내릴듯 한 사공들의 거동에 경부는 절망에 싸여 부르짖었다.

《내리지 말라- 내리지 말라-》

살자면 어차피 뛰여내려야 했다. 뛰여내려 기슭에까지 헤염쳐가야 했다. 하지만 차석진은 자기 임무를 망각하지 않았다. 경부가 무엇하려 여기 나타났는가를 알아야만 했다.

그것을 알지 않고서는 죽을 권리도 그에게는 없는것이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경부를 살려야 하고 경부의 믿음을 사야 한다!

배머리는 또다시 풍랑속에서 솟아올랐으나 반남아 물에 잠긴 선체를 드러내지 못한채 서서히 갈앉기 시작했다.

젊은 사공이 물속에 첨벙 뛰여드는 순간 배전이 흠칠 떠오르는것을 본 차석진은 번쩍 정신이 들어 밀가루포대를 들어 물속에 던지고 또 한포대를 들어던졌다.

《배에서 내리지 말고 밀가루포대를 던져라. 밀가루포대를 던져라- 빨리 던져라-》

그가 연방 집어던지면서 소리소리 지르자 뛰여내리려던 사공들이 이물쪽으로 달려와 던지기 시작했다.

밀가루포대가 삽시간에 줄어들고 무게를 던 배가 반쯤 떠오르자 경부도 어정거리며 다가와 던지기 시작했다. 차석진은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만 질렀다.

《빨리 던져라, 빨리. 경부님을 구원해야 한다. 포대를 던져라-》

밀가루포대를 다 던졌으나 선창엔 물이 가득차 있었다. 차석진은 자기의 맥고모를 벗어들고 물을 퍼던지면서 또 소리를 질렀다.

《물을 퍼라, 빨리빨리 퍼라- 물을 퍼라-》

사공들이 바가지로 물을 퍼내기 시작하자 퀭해진 눈으로 그 모양을 보고있던 경부도 중절모를 벗어 물을 푸기 시작했다.

마침내 배는 가벼워지면서 서서히 물우에 떠올라 풍랑에 부대끼며 흘러갔다. 물속을 헤염치던 젊은 사공이 배우에 오르느라 법석댔으나 경부는 돛폭우에 풀썩 주저앉더니 심신이 노그라져 쓰러지고 말았다. 배는 무난히 흘러갔으나 사공들은 배전을 잡고 비통하게 탄식했다.

《숱한 식솔들이 먹을 량식인데 다 버렸으니 어쩐단 말이요-》

늙은 사공의 얼굴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데 장정은 고개를 떨구고 말이 없었다. 차석진이 그들에게 소리쳤다.

《사람이 살았는데 무슨 우는 소리들이요! 량식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노를 저으시오.》

이제와선 사공들도 그의 말에 순종했다.

기슭에서는 세명의 순경이 말까지 끌고나와 기다리고있었다. 경부는 배에 오른 순경의 부축을 받으며 말께로 걸어갔다.

차석진은 경부의 가방을 들고내리면서 사공들에게 일렀다.

《빨리 가서 밀가루포대들을 건지시오.》

《벌써 갈앉았을텐데 무얼 건진단 말이요!》

사공 한사람이 탄식하며 중얼거리는 소리에 차석진이 돌아보며 말했다.

《포대들이 물우에 떠오르는걸 내가 봤소. 빨리 가서 건지시오.》

확정적인 그의 말에 사공들은 배머리를 돌려 호심을 향해 저어갔다.

풀밭에 앉아 숨을 돌리며 담배를 꺼내고있는 경부에게로 다가간 차석진은 일본말로 깍듯이

《경부님, 이걸···》

하면서 서류가방을 내밀었다. 경부는 흠칠 놀라 가방을 받아든채 차석진을 얼없이 쳐다보는것이였다.

《군은 내 생명의 은인이요!》

경부는 그렇게 뇌이면서 감동과 친근감이 어린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날 밤 차석진은 함석지붕을 씌운 주재소장 사택의 아담한 웃방에서 륭숭한 대접을 받았다. 두사람만이 있는 자리에서 경부가 경력이며 직업을 물었을 때 차석진은 그럴듯이 꾸며붙였다. 고향인 풍산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만저우국》 선양(심양)에 가서 전문학교까지 졸업했으나 마땅한 직업이 없어 떠돌다가 작년부터 흥남에 있는 친척집에 거접하면서 밥벌이를 하는 한편 좋은 일자리가 없나해서 수소문하는 중이라고···

《훌륭한 청년이 일자리때문에 고생하는군.》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한 경부는 얇은 입귀를 삐죽하고 웃었다.

《군이 소원한다면 경성에 올라오게. 내가 돌봐줄테니···》

그러면서 안주머니에서 명함 한장을 꺼내주었다.

《내 명함은 아무에게나 주는것이 아니여-》

차석진은 공손하게 받아들고 보았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경찰과 경부

미우라 다께시

경성부··· 구···정···번지>

《기념으로 주는것이니 잘 간수하게. 경성에 올 형편이 못되면 나한테 편지를 띄우게. 함흥에 있는 유력자들에게 부탁해줄테니.》

《고맙습니다.》 하고는 그는 사의를 표했다.

주재소장까지 앉은 자리에서 술잔을 나누며 건네는 말을 통해 미우라가 이곳에 온 목적을 비슷이 알게 되였다.

북부국경지대에서의 경비력의 확충, 고등사찰의 강화, 주민들에 대한 전면적인 감시, 통제, 정화공작을 위한 실정조사차로 파견되였다는것이였다. 하지만 그것은 미우라의 말이였고 실상은 북부국경지대와 지엔다오(간도)지방에 침투시킨 밀정들을 지도하기 위해서였다.

미우라가 끼고다니는 서류가방속에 사령관동지의 국내진출과 관련된 자료는 있을수 없다고 확신한 차석진은 이튿날 아침 하직을 고하고 《유람》의 길을 이어갔다.···

그때 그의 보고를 들으신 사령관동지께서는 활동을 잘했다고 치하하시면서 《좋은 친구를 사귀였구만.》 하고 의미심장하게 웃으시였다.

그러시고는 그후에 차석진을 서울공작원으로 파견하시였던것이다.

그는 홍준걸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뒤에 인사차로 한번 미우라의 집에 찾아갔었다. 미우라는 반가와하면서 부전호반을 회상했고 주안상을 차려드려온 녀주인은 사연을 들었다면서 못내 고마와했었다. 그후에는 그 집에 다시 가지 않았다. 경무국 경부네 집에 드나들 필요가 없었을뿐더러 일본식주택의 방안에 슴배인 섬나라사람들의 풍속과 체취가 비위에 거슬렸던것이다.

작년 초봄에 거리에서 우연히 만났었는데 사복차림을 한 미우라가 반가와하기에 그도 흡족했었다.

미우라는 자기가 고등과장이 되였다는 말로써 처지가 훨씬 달라졌음을 틀지게 보여주면서 겉발림으로나마 친절을 베풀었었다.

《일하기가 어떤가?··· 응, 마음에 든다니 나도 기쁘네. 아무쪼록 당국의 시책에 솔선 나서라구.》

그리고는 걸음을 떼면서 호협하게 덧붙였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집에 찾아오라구.》

미소지은 얼굴이며 뚜벅뚜벅 옮겨놓는 걸음걸이가 과시 이 땅의 주인이다싶게 도도했었다.

홍준걸은 생각을 거듭하던 끝에 일요일을 기해 미우라를 찾아가려고 작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