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7


 
 

제 3 장

7

 

양지쪽에서 눈이 녹아 땅이 거멓게 드러나는 무렵의 어느날 박중돈은 대원 한명을 데리고 장새촌을 향해 떠났다. 겨울동안 목재채벌장에서 품을 팔다가 돌아가는 계절인부의 차림을 한 그들은 량식도 얼마간 등짐속에 꾸려지고 산길을 걸어갔다.

마을에 들어가 어느 한 집에 거처를 정하고 형편을 료해하면서 정미소주인과 접선하고 반일조직과도 련계를 가지면서 적극적인 공작을 벌리자는것이였다.

겨우내 상처를 치료받으면서 사령관동지로부터 받은 임무수행방도에 대해 생각이 많았던 그는 오백룡련대장에게서 자료를 받은 후부터는 마음을 가다듬고 이날을 준비했다. 주민지대의 형편을 료해하기 위해 밀영병원의 경비성원으로 남았던 《홍대포》를 데리고 지난 가을에 다녀온적이 있는 복지향 《개척민》부락쪽에 나가보기도 했다.

허나 토성안에 들어가지도 못했을뿐더러 사람들과 만나지도 못했다. 철이 일러서인지 성밖에 나와 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것이다. 집단부락근처의 산속에서 겨울에 찍어두었던 전주대감을 다듬어 마을로 끌고가는 사람들은 보았으나 그네들의 곁에는 총을 멘 사람 두세명이 늘 함께 다니고있었다.

농민들과 다름없는 옷차림으로 보아 《개척민》부락의 《청년의용대원》들일것이였다. 원주민들이 사는 부락과는 달리 총독부에서 때려 모는대로만 살아가는 《개척민》들의 정상을 바라보면서 박중돈은 복지향에서 그나마 낯을 익혔던 원로인과 그 집 맏아들을 생각했다.

좁은 이마밑에서 코마루가 덩실하고 눈길이 꼿꼿하던 젊은이, 제딴으로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으나 도사린 몰골이 벌써 미타하게 느껴지던 《청년의용대장》, 늙은 아버지는 고정하면서도 어질고 인정이 있어 길손들에게 잠자리를 주선해주려고 걱정하는데 그 녀석은 걱정은 커녕 오히려 수비대에 알려 잡으려고 날치던 일을 잊을수 없었던것이다.···

밀영을 떠난지 나흘째되는 오후에 마을들이 바라보이는 산등성이에 이르렀다. 도로에는 행인들이 동안뜨게 움직이고있었다.

만저우(만주)땅에서는 이 무렵이 되면 채벌장에서 돌아가는 품팔이군들이 로상에 뜨문했으므로 길 다니기는 한결 편안했다.

농가들에서 땔나무를 끌어내린 발구길을 따라 골짜기를 내려간 그들은 인적이 뜨음할 때 행길에 올랐다.

산굽이를 돌아가니 마주오던 농사군들의 한 무리가 누군가를 욕질하고 두덜거리면서 지나갔다. 그 사람들이 멀어져가자 곡식마대를 실은 소달구지들이 가까와졌다. 정미소에 쌀찧으러갔다오는 사람들이였다.

앞에 오는 달구지군은 고삐쥔 손을 팔소매에 찌르고 길바닥을 바라보며 느적느적 걸었고 뒤에서는 달구지앞채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장정이 얼근해진 목소리로 신세타령을 하고있었다.

문전옥답은 어데두고

타향살이가 웬말이냐

···

···

울화와 설음을 망각하려는듯 제빠듬히 흔들거리며 흥얼대는 태평스러운 모양이 서글프면서도 우스웠다.

《그 량반 팔자 좋구만!》

《홍대포》가 반죽좋게 한마디하자 따라가는 농군도 누런 이발을 드러내며 벙글써 웃는다. 허나 그뒤에 섰던 달구지군은

《흥!》

하고 코방귀를 뀌였다.

《정미소마당에서 사흘이나 너털었수다- 팔자가 좋다는게 뭐요.》

《홍대포》는 돌아보며 웃다가 그들이 지나가자 중얼거렸다.

《그 사람들 속이 잔뜩 뒤틀렸군!》

박중돈은 달구지군들이 멀리 가버리자 《홍대포》를 돌아보며 충고했다.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라구. 하치 않은 일이 부스럼이 될수 있소.》

《난 그저 천연스럽게 보이려구 그랬습니다.》

《홍대포》의 발명에 수긍되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매사에 조심해야 하오.》

마을이 눈앞에 보이자 걸으면서 행동방향을 정했다.

검문소가 마을 저편 동구에 있다는걸 알고있었으나 안전을 위해 행길을 벗어나 산비탈쪽으로 에돌았다. 넘어가는 저녁해가 재빛지붕들너머로 솟아있는 정미소의 판자벽을 누렇게 비치고있었다.

배추잎들이 널려있는 눈녹은 터밭을 지나 울타리를 친 집들사이를 지나가는데 앞쪽에서 왁짜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싸움이 붙었다- 싸움이 붙었다-》

밀려가는 사람들을 헤치고 팽이채를 쥔 소년이 달려오면서 소리소리 지르는것이였다.

《하촌사람들과 남도패들이 붙었소- 쌀가마니를 내던지는 바람에-》

정미소주변이 떠들썩했다. 박중돈은 《홍대포》를 돌아봤다.

마주치는 눈길들에서 놀라움과 실망이 허둥거렸다. 예상치 않은 사태에 당황했던것이다.

《까짓거, 가보기요.》

박중돈은 그렇게 뇌이면서 밀려가는 사람들속에 휩쓸렸다.

정미소마당에서는 터진 가마니들에서 쏟아진 벼알들이 모래처럼 밟히는데 그우에서 딩굴고 뛰여넘고 엎어지면서 발길질, 주먹질에 싸움판이 왁자했다. 젊은축들이 진을 치듯 버티고서서 달려드는자들을 치고받고 때려눕혔다. 그러자 울타리께로 쫓겼던 패들이 몽둥이며 각목을 뽑아들고 눈에 피발이 서서 달려들면서 휘두르고 차고 두들겼다.

경찰도 자위단원도 없는 마당에서 농군들끼리 눈이 뒤집혀 싸우는 광경에 박중돈은 어리둥절해졌다.

(사람들의 눈에 뜨이게 중뿔나게 행동해서는 안된다. 구경군들속에 끼워돌아가면서 이 마을에 거접할수 있는 집주인부터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는 그 사람의 편역을 같이 들어주면서 낯을 익히고 마음을 통해 믿는 사이가 돼야 한다. 마을에 발을 붙이기에는 오히려 좋은 기회다.)공작원으로서의 의식에 사로잡혀 싸움판을 바라보면서 흥분을 지그시 눌렀다.

패싸움은 치렬해지고있었다.

박중돈은 구경군들사이에 끼워들면서도 싸움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터진 벼가마니우에서 저희패를 부르며 저항하던 젊은이가 날아드는 뭇매를 당하지 못해 벼알이 흩어진 진창속에 나딩구는데 코에서는 검붉은 피가 터져내렸다. 울부짖으며 버둥치는 젊은이의 몸에 몽둥이들이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잘한다 잘해!》

《소탄 개처럼 우쭐대더니 맞아 싸지.》

《관청을 등대고 세도 쓰던 놈들··· 맛을 보라지!》

《그놈을 아예 물고를 내라 ! 개똥쇠 같은것들···》

마을사람들인듯 한 구경군들이 왁자하게 떠들었다. 찢어진 팔소매로 코피를 훔치면서 휘청휘청 일어서는 피매닥질된 좁은 이마밑에서 코마루가 덩실한 청년의 모습이 박중돈에게는 퍼그나 낯익었다.

복지향집단부락의 토성밖 산밭머리에서 이야기를 나눈적있는 《개척민》로인과 그 아들이 떠올랐던것이다. 량식을 가져오겠다 하고는 수비대를 끌고왔던 《청년의용대 대장》.

그러자 그는 성수가 나서 떠들어대는 구경군들의 심정이 리해되였고 이 패싸움이 특세를 뻐기는 《개척민》들과 갖가지 원한을 터뜨릴데 없었던 이 고장 사람들의 쌓여오던 분노의 폭발임을 깨달았다.

피매닥질된 청년을 보며 가슴속에서 일렁이던 련민이 갈앉으면서 마을사람들에 대한 공감이 떠올랐다.

《맞아 싸지, 싸!》

허나 다음순간 그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일제는 조선사람들사이에 알륵과 대립을 조장하면서 리간시키고 분렬시켜 자기들의 통치지반을 안전하게 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군중속에 깊이 들어가 모든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 일제의 조선강점에 있다는 진실을 깨우쳐주면서 사람들을 단합시켜 반일의 길에 튼튼히 묶어세워야 한다!》고 가르치신 사령관동지의 말씀이 가슴을 쳤던것이다. 박중돈은 구경군들사이를 헤치고나갔다.

뒤따르던 《홍대포》가 팔소매를 잡아끌며 만류하려했으나 자기 의도를 알려줄 경황이 없었으므로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는 정신없이 날치는 싸움군들속에 뛰여들었다. 휘두르는 몽둥이를 뺏아들고 한편 얻어맞으면서 코피가 흐르고 머리까지 터진 청년을 막아서서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들이요! 생사람을 죽이겠소? 왜들 이러오. 그만두시오. 여러분!···》

가죽외투를 입은 낯선 사람의 성난 부르짖음에 날치던 사람들이 주춤했다. 그 순간 박중돈은 뺏아들었던 몽둥이를 던지면서 벼가마니더미우에 올라서서 가슴을 움켜잡고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여러분, 이게 무슨 짓들이요. 조선사람들끼리, 농사군들끼리 왜들 이렇게 싸우오. 고향을 떠나 만리타향, 다른 나라땅에 와서 고달프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죽일내기로 싸워서야 되겠소!》

소란하던 마당안이 천둥우뢰가 지나간 뒤처럼 조용해졌다.

《싸우지들 마시오. 어서 흩어지시오.》

박중돈은 머리가 터진 청년쪽으로 돌아서면서

《이사람을 빨리 데리고가서 치료해주시오. 상한 사람들을 빨리 치료해주시오. 도대체 이게 무슨 짓들이요!》 하고 엄하게 소리쳤다.

그의 웨치는 소리가 하도 엄하고 절절했으므로 잠잠해졌던 사람들이 움직였다.

얻어맞던 젊은 축들이 모여들어 상처를 싸매주고 업으면서 떠나려고 할 때 박중돈은 《홍대포》더러 도와주라고 눈짓했다.

이쪽에서 술렁거리니 잠자코있던 저쪽에서 소리가 터져나왔다.

《당신은 누구요. 왜 저 사람들 편역을 드오?》

《저 <개척민>놈들이 간데마다에서 우쭐렁거리는데···》

《당신은 도대체 뭐요?》

《저놈들을 그냥 둬?》

소리치며 분위기가 다시 험악해지자 군중속에 끼여들던 박중돈이 돌아섰다.

《난 관청에서 나온 사람이요!》

하고 그는 짙은 눈섭을 찌프리고 의분에 떨며 소리쳤다. 그의 기세가 하도 도도했으므로 누구도 범접을 못했다.

《나는 저 사람들편을 드는것도 아니고 당신들 편역도 들지 않소. 저 사람들도 당신들처럼 고향을 떠나 살길을 찾아온 사람들이요. <개척민>이라고 특세나 가진것처럼 우쭐댄것은 저 사람들의 잘못이지만 사람들이 나쁘고 악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모르고 무지해서 그런거요.

당신들을 못살게 만든것이 저 사람들이 아니고 저 사람들을 못살게 군것이 당신들이 아닌데 어째서 원쑤처럼 피투성이되여 싸우는가 말이요!

자기들을 못살게 구는 원쑤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눈앞에 띄운 하치 않은 일로 아귀다툼질하면서 가난한 농사군들끼리 피투성이가 되여 싸우니 당신들도 저 사람들 못지 않게 무지몽매하오. 어서 돌아들 가시오. 이후엔 이런 일이 다시 없도록 하시오.》

둘러선 사람들은 홍두깨에 얻어맞은것처럼 뻥-하니 서있었다. 박중돈은 상한 사람들을 거들어 사라지는 젊은 축들의 뒤를 따라갔다.

땅거미가 퍼지고있었다. 행길을 건너서니 초가집 울타리밑에 멍에채를 내려놓은 달구지들이 눈에 띄였다. 마을길이 끝나는 변두리에 버들바자를 둘러친 덩실한 초가집이 있었다. 불빛이 흘러나오는 마당에서 사람들이 어물거리고 문이 열려진 방안에서 상처를 처치하는 모습이 눈에 띄였다.

터진 자리에 된장을 붙이고 싸매는 판이였다.

박중돈이 방안에 들어서니 원덕천은 유심히 여겨보다가 말없이 눈길을 떨구었다. 싸움판에 뛰여들어 자기를 감싸고 죽을 고비를 막아준 사람이 지난 가을에 수비대가 떨쳐나서서 잡으려고 했던 《공산비적》임을 알아보았던것이다. 알아보고는 피져서 흐리터분해진 눈을 지그시 감아버렸다. 영문을 알수 없었고 후환이 두려웠던것이다.

원덕천은 머리며 손이 피투성이 되고 온몸이 못견디게 쑤시고 아팠으나 의식은 분명했다. 이리로 업혀오는 동안에도 그 사람과 관계되는 일들이며 근자에 겪고있는 생활이 불안속에 언뜻언뜻 떠올랐다. 어질고 가난한 사람들을 비적으로 치부한다며 은근히 못마땅해하던 아버지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 일로 하여 상이라고 내려진 수수쌀을 타가라고 했을 때에도 아버지는 끝내 동하지 않았다. 《이날이때꺼정 남을 해친적이 없고 경우에 어긋나게 재물을 얻은적 없다! 이즘 마실방에서 최도끼랑 우리 집 숭을 적게 볼줄 아늬···》

이래저래 화만 났던 그는 아버지더러 세상물정 모른다고 두덜거리면서 와락와락 밸을 썼으나 밖에 나가면 여전히 마을 젊은이들을 휘동하여 당국의 시책을 고분고분 받들었다.

《최도끼》란 대바르고 입심이 세여 향장은 꺼려하고 원덕천은 어렵게 대하는 한고향에서 이사해온 장정이였다. 늦가을에 공출독촉이 심할적엔 《<개척민>은 3년동안 세금을 면제한닥하더니 웬일이여?》 하고 최도끼가 동티를 내는 바람에 마을에 여론이 분분했고, 언땅에 구뎅이파고 전주를 세울 때도 수비대병실에 땔나무를 끌어내릴 때에도 그 아저씨가 병피탈하면서 나오지 않는 바람에 두루두루 제끼는 축들이 있어서 원덕천이 애꿎은 젊은이 몇몇을 데리고 손발을 얼쿠면서 고생했었다. 관청에서 내려먹이는 부담이나 부역에는 시비를 캐면서 드살을 피우지만 이웃의 불행이나 고통에 외면을 하지 않는 농군이였다. 오늘도 말다툼이 시작되자 뜯어말리고 갈라놓느라 애썼지만 주먹다짐이 나오고 《개척촌 》패들이 몰리게 되자 싸움판에 뛰여들어 한편이 되여 대척했다. 평소에 덕천이와는 아버지를 보아 참는다며 소 닭 보듯이 지내던 터이지만 피투성이되여 쓰러진 마당에서는 둘쳐업고 복새통을 빠져나왔으며 지금도 옆에 붙어 피칠갑을 닦아내며 상처를 싸매주고있다.

처치가 끝났을 때

《상처가 심하오?》

하고 물은것은 양피외투를 입은 그 사람이다. 원덕천은 여전히 눈을 감고있었다. 옆에서 최도끼가 사뭇 어려워하며 대답한다.

《머리가 터졌슴다만 ··· 크게 고생하진 않겠심다.》

양피외투가 한마음 놓이는듯 옆에서들 잘 돌봐주라고 이른다.

《···터진 자리에 랭독이 들지 않게 두툼하게 더 싸매주고 털모자 같은걸 푹 씌워주오. 랭독이 들면 고생하오.》

동정어린 조언에 원덕천은 가슴이 찌르르해졌지만 눈을 뜨지 못했다. 괜히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제편이나 생긴듯 떠들었다.

《장새촌놈들 언제보나 고약하단께. 관청에서두 <개척민>부락은 먼저 해주락고 통지꺼정 내려보냈다는데두 즈희가 정미소 인부들과 짜구선 우리를 밀어놓았단께. 쑥덕거리문서···》

《그전날 신청했닥하문서 낼두 안된다니께 우리 먼데 사람들이 어떻게 사흘나흘 지체한단 말이요!》

그들은 아마도 《양피외투》를 자기네 편역을 들어주는 관청에서 나온 관리로 아는 모양이다. 그러자 바로 그 사람이 무뚝뚝하게 책망한다.

《<개척민>이 무슨 특별한 사람들이라구 코대를 세우는가 말이요! 다같은 조선사람들이구 다같은 농사군들인데··· 당신들이 특세를 쓰자고 하니 원주민들이 부아가 나지 않겠소!》

그리고는 일어선다. 가려는 눈치를 알고 옆에서들 만류한다.

《앗따, 어두웠는데 저녁상이나 받구 가이소.》

《참말루 고마운분인데··· 별식은 마련하지 못했지만 잠간만 앉아계시기요.》

《양피외투》는 후에 다시 들리겠다면서 방에서 나간다.

그가 나가버리자 방안이 한동안 조용해졌다.

(공산비적이 틀림없다. 서둘러 사라지는걸 보니께!) 하고 원덕천은 눈을 감고 누워서 혼자 생각했다.

《그 참 별사람이다- 어느 관청에서 나왔당기요?》

누군가가 한마디 미심쩍어 하니 어숨푸레 떠들던 의혹을 이쪽저쪽에서 털어놓는다.

《하는 말은 점잖더라만··· 행색이 별나터라.》

《덧옷은 그럴상한데 ··· 찌까다비 신었더라- 웬 사람일가?》

《그 사람 기상이 만만치 않아뵈더라. 아께 싸움판에서 연설하는걸 보니···》

이야기가 별스럽게 돌아가는 때에 듣고만있던 최도끼가 한마디 했다.

《어느 관청에서 나왔건 무슨 상관이야. 매맞아죽는 사람을 건져냈으니 장한 일이지. 그 사람 하는 말이 백번두 옳더라야-》

그러자 그 사람 말은 다시 꺼내지 않고 쌀찧을 차례얘기, 장새촌사람들과 시비를 가를 의논 등으로 말소리들이 잦아들었다.···

그 집에서 나온 박중돈은 밖에서 망을 보던 대원과 함께 불빛이 어린 사립문을 지나 울타리밖을 걸어갔다. 그때 뒤에서 따라오던 사람이 그의 곁에 다가서면서 팔소매를 잡는것이였다. 깜짝 놀라 뿌리치려했으나 저쪽은 억센 손으로 틀어잡고 이끌어가면서 묻는것이였다.

《박중돈이 아니요?》

이쪽은 그 사람을 여겨보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박창술이요··· 어째, 모르겠소?》

박중돈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자기 팔소매를 잡고있는 거쿨진 농사군의 손을 와락 움켜잡았다. 짙어가는 황혼속에도 그의 모습을 알아볼수 있었다.

《창술형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대답도 듣지 않고 《홍대포》에게 망을 보라 이르고는 거밋거밋하게 눈이 녹은 터밭기슭으로 이끌어가서 쭈크리고앉았다.

《내 글쎄 아까 싸움판에 뛰여든 사람이 별루 낯이 익다해서 찬찬히 여겨봤다니까. 말을 들으면서두 아우님이 언제 관청에 들어갔을가 하구 이상하게 여기다가 마을사람들을 흩어지게 하고 슬금슬금 따라왔댔소.》 하고 박창술이 어둠속에서 속삭였다.

《창술형님! 여기 계셨구만 ···그래 아주머니랑 아이들은 다 어떻게 지내오?》

《이 아래 하촌에서 땅을 얻어부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지.》

《그래 형님두 아까 싸움판에서 몽둥이를 휘둘렀소?》

《휘둘렀지 ··· 저 남도놈들이 언제보나 괘씸하게 군다니까. 일본놈들의 개질하면서 ···하긴 아까 아우님이 하던 말이 옳기사 옳지!》

《창술형님, 우리 조선사람들끼리 싸워서는 안되오. 하찮은 리해관계를 따지면서 티각태각할것이 아니라 근본을 생각해야 하오. 우리 조선사람들은 한덩어리로 뭉쳐서 일본놈들을 반대해서 싸워야 하오. 이건 김일성장군님의 뜻이고 조선을 광복하기 위한 근본방침이요!···》

《으음!-》

박창술은 생각되는 바가 있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박중돈의 말에 새삼스럽게 감동했을뿐더러 그의 신분이 짐작하던바와 틀림이 없음을 기뻐하는것이였다. 박창술은 추운데 앉아있지 말고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 잡아끌었다.

《···멀지 않네. 아래마을이야-》

박중돈은 사양했다. 자기를 지금 경찰이나 자위단이 찾고있을지도 모른다면서 지난 가을에 그를 만나보자고 이전에 살던 곳에 찾아갔다가 바로 저 《개척민》부락사람들을 만나 봉변을 당했던 일까지 서둘러 말했다.

《내가 창술형님을 찾으려고 했던건 만나서 회포나 나누자고 해서가 아니요. 혁명을 위해 창술형님과도 손을 잡으려고 했댔소. 지금 어떻게 지내시오. 몇해전에 만났을 때 처자만 아니면 나를 따라 혁명에 나서고싶다던 말은 다 잊어버렸소?!》

박창술은 고개를 숙이고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잊었겠소! 나뿐아니라 우리 마을에도 일본놈들의 학정에 원한을 품고 이를 가는 사람들이 많소. 그래 우리도 여기서 사람들 모르게 반일조직을 꾸렸소.》

박중돈은 너무 기뻐 그의 손을 덥석잡고 으스러지게 틀어쥐였다.

자기들이 목적하고 온 공작이 이미 이루어져있는것이였다.

《정말 잘했소. 대단하오. 나도 바로 그런 일때문에 여기에 찾아왔댔소. 조직성원은 몇이나 되고 누구의 지도를 받소?》

《비밀한 일이다나니 성원은 많지 않소. 겨우 일곱명이요.》

박중돈은 흥분했다.

《일없소. 일곱이면 적지 않소. 시작이 절반이라구 이제 차츰 조직을 확대해갑시다. 형님이 조직했소?》

《아니, 조직한건 여기 정미소책임자인 신덕환이라는 사람이요.》

《흐음, 역시 그 사람이군!》

하고 박중돈은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목적하고 온 사람이 틀림없다는것으로 하여 안도감을 느꼈고 은근히 기뻤다.

《그 사람이 어떻소?》

《인물이지. 눈치빠르고 씨원씨원하고 경우가 밝은 사람이요. 지식도 있고 리론도 상당하오.

겉으로는 일본놈들과 얼렁뚱당 친하게 지내는것 같지만 속은 우리편이요. 조선에서두 사상객으루 투쟁을 했다는데 지엔다오(간도)에 들어와서는 줄을 찾지 못해 밥벌이군 노릇이나 한다면서 한탄하군 했소.

그런데 요전에는 우리하구 만난 자리에서 하는 소리가 유격대와 손을 잡았다고 했소. 앞으로 긴밀한 련계를 가지게 된다면서 <개척민>놈들은 유격대가 량식구하러 오면 수비대에 알려서 잡으려고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그럴수 없을뿐더러 유격대가 요구한다면 쌀이건 천이건 마련해서 유격대동지들이 있는곳에 져다주어야 한다, 이런 정신으로 싸워야 한다고 했소.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댔소.》

《거 참, 진짜 혁명가구만!》

박중돈은 만족하여 싱글벙글 웃었다.

《한데··· 사람이 어떻소. 진실하오? 믿을수 있는 사람이요?》

《믿다마다. 나하구는 이전부터 같이 고생하던 사람이지. 참 거 왜··· 작년 그러께던가? 아우님이 동무하나를 데리고 식량공작하러 왔던 일이 있지··· 우리가 처음 자리를 잡았던 골안에 말이요?》

《그런 일이 있었지요.》

《그때 우리 집에 놀러왔던 사람이 생각나오?》

박중돈은 불안한 예감에 긴장해졌다.

《생각나구말구요. 시꺼먼 눈이 번들거리던, 서른나문살 되는 사람말이지요.》

《옳소. 그 사람이요. 그 사람!》

박창술은 신이 나서 말을 이었으나 박중돈은 가슴이 싸늘해져서 귀를 기울였다.

《그 마을에 <개척민>들이 들어와 토성을 쌓기 시작하자 거기 살던 사람들이 모두 장새촌에 넘어왔소.

그 사람은 푸접이 좋구 활동을 잘해서 정미소주인자리를 얻었소. 관청사람들과 붙어돌아가는것 같지만 속은 우리편이요.

오늘 아침에두 당국에서는 아무 일에서나 <개척민>들의 편의부터 보아주라고 하지만 쌀찧는데서까지 그럴 필요있는가 하면서 자기는 볼일이 있어 시내에 들어가겠으니 기계인부들과 짜구 하촌사람들부터 받아주라고 해서 이런 싸움이 터진거요. 장새촌사람들의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이요.

겨우내 <토벌대>들이 먹을 쌀을 찧느라구 농사군들은 정미소신세를 지지 못했지.···》

정미소주변에 경찰들이 없은것도 이상한 일이다. 박중돈은 불안해하였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초조해졌다.

(성실하고 단순한 사람들을 속여 가짜조직을 꾸려놓고 유격대의 거처를 탐지하며 사령부의 소재를 알아내려고 꾀하는 밀정이 아닐가.) 하고 경각성을 높였다.

《창술형님, 그 신덕환이라는 사람은 좀 더 알아봐야겠소. 그 사람의 활동이 좀 의심스럽소. 그때 형님네 집에서 량식을 지고나온 우리는 적들에게 추격을 당했소. 같이 갔던 동지는 희생되고···》

박창술은 어리둥절해서 눈을 슴벅거리기만 했으나 유격대원은 촉박한 시간에 긴 말을 할수가 없어 요긴한 대책부터 세웠다.

《창술형님은 다른 기색을 조금도 나타내지 말고 그 사람의 행위를 잘 살펴보시오. 나를 만났다는 소리도 하지 말아야 하오. 심중한 문제요. 형님은 여태까지 하던대로, 그 사람이 하자는대로 하시오.》

큰 길쪽에서 술렁거리는 소리들이 들렸으므로 박중돈은 마음을 조이면서 요긴한 말을 했다.

《앞으로 련계는 나하구만 가집시다. 내가 오지 못하는 경우에는 내 이름을 대고 나타나는 사람을 만나되 우리가 두만강변에서 만나던 사연을 말하면 련락원으로 믿으시오. 빨리 집으로 가시오.》

어리둥절해진 박창술은 헤여지기를 아쉬워했으나 박중돈은 등을 떠밀어보냈다. 그리고는 대원과 함께 마을에서 벗어났다. 갈곳이 없었고 장차 할 일이 막연했으나 당장은 적들의 수색에서 벗어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