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1


 
 

제 3 장

1

 

김일성동지께서는 눈이 깔린 대도로로 달리는 청회색 승용차 《엠까》의 차창밖으로 원동의 광활한 설원을 내다보고 계시였다.

국경초소에서 필요한 수속을 마치고 함께 온 소부대와 헤여져 회의가 진행될 연해변강중심지로 가시는 길이였다.

무성한 원시림과 백설의 광야를 안고 끝없이 펼쳐진 이 광막한 대지는 그이께서 처음 와보는 생소한 지대이지만 민족의 운명과 더불어, 반일의 피어린 력사와 더불어 인연이 깊은 고장이였다. 학정과 궁핍에 쫓겨 살길을 찾아헤매던 조선사람들이 바람세찬 남의 나라 버림받은 씨비리에 자리잡기 시작한 지난 세기 중엽부터 오늘에 이르는 기간 민족수난의 자욱이 력력히 찍혀진 땅이였다.

세상에서 동떨어진 벽지인 머나먼 이곳에도 《한일합병》의 비통한 소식은 전해졌고 나라잃은 백성들, 구국의 뜻을 품은 지사들과 총을 든 의병들이 찾아들었었다.

얼마나 많은 렬사들과 애국지사들이 망국을 통탄하고 국권수복을 부르짖으며 이 땅에서 기약없는 투쟁의 길에 자기 운명을 던졌던가.···

달리는 차창으로 눈덮인 대지를 바라보시는 김일성동지의 눈앞엔 찬바람부는 이국땅에 애국의 뜨거운 피를 뿌린 수많은 독립운동자들과 열혈지사들의 군상이 우렷이 떠올라 경건해지는것이였다.

총기를 얻으려고 온 사람, 단체를 무으려고 온 사람, 약소민족의 설음을 하소하려고 피눈물을 뿌리며 왔던 사람.···

3.1봉기를 계기로 불타오른 거족적인 반일기세에 고무되여 여기 원동에서 궐기했던 독립군들의 위용도 가슴쓰리게 떠올랐다.···

20여만 인구의 변강도시는 활기에 넘쳐있었다. 고층건물의 지붕에도 공원과 가로수에도 거리의 연도에도 눈이 쌓여 있었으나 해빛에 창문들이 반짝이고 널직이 뻗어간 거리에서는 자동차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찬날씨에도 불구하고 공원에서는 털옷으로 무장하여 새끼곰처럼 동실동실해보이는 아이들이 소리지르며 뛰놀고있었다. 보도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씩씩한 걸음걸이, 스쳐지나가는 자동차들의 경쾌한 경적소리.

국가기관인듯한 청사와 지붕우에서 나붓기는 붉은기, 대통로에 걸려있는 프랑카드.···

생활이 넘치고 힘이 약동하는 도시의 정경은 장근 십여성상 밀림을 헤치고 산줄기만 타고넘으면서 싸워온 그이에겐 별세상처럼 보였고 총성이 들리지 않고 략탈과 주림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 거리를 웃고 이야기하면서 자유롭게 활보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감동과 더불어 선망을 자아내는것이였다.··· 눈앞에 펼쳐진 이 모든것은 혁명투사들의 리상이였다. 그이께서도 바로 우리 인민들에게 이러한 생활을 펼쳐주려고 혈전만리를 헤쳐오신것이다.

자동차가 도시의 중심부를 지나갈 때 곁에 앉아있던 쏘련군관이 광장복판에 우뚝솟은 동상을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저건 원동개척자의 한사람인 하바로브의 동상입니다.···》

광장을 지나 달리는 자동차안에서 그이께서는 개척자나 애국자들의 동상은 고사하고 민족의 자랑인 영웅들과 명인들을 기념하고 추억할만한 비석하나 똑똑히 서있지 않는 도시들을 눈앞에 그려보고계시였다. 요소마다에 경찰관 청사며 총독통치기구의 관청들이 으리으리하게 군림하고 《야마도》의 거짓스러운 신비를 퍼뜨리며 높은 대우에 신사신궁이 솟아있는 도시들, 길가에는 보잘것 없는 상품을 앞에 놓고 보따리장사군들이 늘어앉고 거리마다엔 주린배를 그러안고 노래를 팔고 재주를 파는 방탕가수들과 광대들이 사람들의 눈을 끄는 땅, 걸식하는 아이 어른들이 한끼의 때식을 위해 정처없이 방황하는 조선의 도시들을 생각하면서 좌석의 손잡이를 지그시 틀어쥐시였다.···

도시교외의 봇나무수림속에 콩크리트담장을 둘러친 별장형식의 아담한 단층건물이 있었다. 그 집이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을 위해 마련해놓은 림시거처였다.

자동차는 보초소를 지나 대문안의 넓은 뜨락에서 멎었다.

눈을 깨끗이 쓸어낸 뜨락변두리에는 푸르청청한 전나무들이 서있고 그 아래 장의자들이 놓여있었다.

코수염이 번들거리는 키가 훤칠한 사람이 현관에 나와 두리번거리다가 김일성동지께서 차에서 내리시자

《사령관동지-》

하고 환희에 넘쳐 부르짖으며 마당으로 달려나왔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의 인사를 받으며

《안길동무, 오래간만이구만.》 하고 못내 반가와하시였다.

《온지 여러날 됐습니다. 집을 지키고있습니다.》

《진한장동무, 최현동무들도 다 잘 있소?》

《잘 있습니다. 소부대들을 지휘하면서 싸우고있습니다.··· 저는 방면군 참모장자격으로 회의에 왔습니다.》

《잘됐소. 동무들을 만나고싶었소.》

사령관동지께서는 대견해하시였다. 안길은 기뻐서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들어올 때 최현동무를 만나 회의에 가자고 하니 거기 가서 뭘해, 말다툼질이나 할걸··· 사령관동지 사상이자 자기 사상이니 자기는 가지 않아도 일없다는겁니다.》

그이께서는 언제나 배포유한 최현을 눈앞에 그려보며 빙그레 웃으시였다. 련락군관이 소지품을 방안에 들여왔다. 벽난로의 열기로 훈훈한 넓은 방안에 책상과 안락의자들이 놓이고 가운데에 원탁이 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 자리에 앉자 안길이 이곳 형편을 말씀드렸다.

《사령관동지께서 국경에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사흘전에 들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김책동지가 최석천동지와 함께 찾아와 밤늦게까지 기다리다 돌아갔습니다. 어제두 왔댔구···》

그이께서는 만나본적 없는 베이만(북만)동지들의 성의에 감복하시였다.

《저쪽교외에 있는 무슨 아지트같은 건물에 자리를 잡고 항일련군군장들과 같이 있는 모양입니다.》

《도착한지 여러날 된다오?》

《열흘쯤 된것 같습니다.

이번에 처음 만나봤는데 김책동지는 말을 얼마하지 않습디다. 수더분하고 듬직해보이는데 엄하고 날카로운 사람같습디다.》

《나도 이야기는 들었소.》

《최석천동지도 무뚝뚝하고 입이 무거운분 같은데 이따금 몇마디씩 하는걸 들으니 중국간부들과의 관계에서 더러 의견이 맞지 않는것 같습디다.》

《그 동지들은 다 일찌기 구국의 뜻을 품고나섰지만 옳은 길을 찾지 못해 곡절을 많이 겪어온 사람들이요.》

김일성동지께서는 뜨거운 사랑과 존경을 품고 말씀하셨다.

《김책동무만 해도 젊어서는 만저우(만주)와 연해주를 넘나들며 혁명의 길을 찾았고 조선에 공산당이 생기자 화요파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도 했다오.

지금은 항일련군에서 책임적인 직책을 수행하고있으니 여러가지로 고충이 많을거요.》

그이의 사려깊은 말씀에 한동안 생각을 더듬던 안길이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그래서 더 사령관동지를 안타깝게 기다린것 같습니다. 먼길에 건강을 해치지 않으셨는지··· 하면서 은근히 걱정합디다.》

말하다가 귀를 기울인 안길이 부르짖었다.

《옵니다!》

자동차가 담장밖에서 멎는 소리가 났다. 안길이 서둘러나가자 그뒤로 김일성동지께서 현관밖에 나서시였다.

차에서 내린 키가 후리후리한 사람이 대문안에 들어서서 현관쪽을 바라다보더니 솜저고리의 깃을 바로잡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셨습니다.》

안길의 말을 스쳐물으며 사령관동지께 이른 그는

《김책입니다.》

인정겹고 소탈하신 그이의 풍모에 감동한 김책이 열정적으로 말했다.

《장군님, 오래전부터 만나뵙고싶었습니다.》

그이께서도 감격에 겨워 잡은 손을 힘주어 틀어쥐시였다.

《동지들이 무척 그리웠습니다.》

그 한마디 말씀에 김책은 가슴이 후련해져서 미소를 지으며 한걸음 비켜섰다. 뒤에 섰던 최석천이와도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신 김일성동지께서는 어깨가 벌어지고 자세가 그쯘한 그의 모습을 대견하게 바라보며

《많은 유격대지휘관들을 키워낸 유능한 군사일군의 풍모가 첫눈에도 알립니다.》

하고 반가와하시였다.

긍지에 넘쳐 웃으시는 김일성동지를 우러러보던 최석천은 거쉬고 흥분된 목소리로 뜨직뜨직 말했다.

《장군님, 오래전부터 만나뵙고싶었습니다. 김책동무도 그랬지만 저도 장군님 계실만한 곳에 통신원을 여러번 띄웠습니다. 재작년에는 기회를 만들어 부대를 이끌고 둔화(돈화)에까지 내려갔다가 끝내 종적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후에 들으니 혁명조직들을 지도하시려 국내에 진출하셨댔다고 합디다.》

자동차에 벗어놓은 래방자들의 회색솜외투를 안고지나가던 안길이 돌아서서 핀잔하듯 뇌였다.

《아-니, 백만 관동군이 온 만저우땅을 에워싸고 돌아쳐도 찾지 못하는 김일성장군님을 어디가서 만난다고 선통도 없이 찾아다닙니까! 참 답답하구만요!》

그 말에 모두들 유쾌하게 웃었으나 김책과 최석천의 눈에는 웃음끝에 감개의 눈물이 어리는것이였다.

《추운 날씨에 모두 이렇게 밖에서 얼겠습니까! 들어들 갑시다. 뜨뜻한 방이 있는데···》

안길이 한마디 더하고 들어가자 김일성동지께서 현관쪽으로 돌아서며 다감하게 말씀하시였다.

《고맙습니다. 나도 베이만에 원정했을 때마다 동지들을 만나보려고 줄을 놓았댔습니다.》

방안에 들어서신 김일성동지께서는 뒤따라온 두사람에게 안락의자를 손짓하며 앉으라고 권하시였다. 허나 김책은 앉지 않고 오히려 정중하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최석천도 역시 그곁에 직립부동의 자세를 취하고섰다.

《장군님, 저희들은 8일전에 이곳에 도착하여 저우바오중(주보중)군장동지와 함께 교외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김책이 정중하게 말씀 리자 김일성동지께서는 가볍게 웃으며

《안길동무에게서 들었습니다. 자 어서들 앉으십시오.》

하고 권하시였다. 김책은 여전한 그 자세로 누구누구들이 함께 들어왔으며 쏘련원동군 대표들과 또 국제당대표와도 만났고 요즘은 베이만에서의 투쟁정형을 종합하여 보고를 작성하면서 회의준비를 하고있는 정형을 말씀드리였다.

김책이 긴 이야기를 하는 동안 김일성동지께서는 두 사람의 맞은편에 단정히 서서 진지하게 들으시였다. 김책은 긴 보고끝에

《···저우바오중군장도 며칠전부터 장군님을 기다리고계십니다.》

하고 말을 맺었다. 그러자 김일성동지께서 온화하게 말씀하시였다.

《잘 알았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내여 저우바오중동지를 만나러가겠습니다.》

《장군님은 여기 계십시오.》

하고 김책이 의견을 드렸다.

《장군님께서 도착하신줄 알면 군장동지도 달려 오실겁니다. 이전에 함께 싸웠다면서 퍼그나 만나고싶어합니다. 이번에도 회의에 오지 않겠다고 하다가 림춘추동무가 전달한 장군님의 권고를 듣고 떠나왔습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나의 각별한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우리는 여기 주인들부터 찾아가 인사를 하고 사업토의도 해야 하니 집안에 앉아만 있을수 없습니다. 그러니 오시게는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찾아가겠습니다. 년세로 보나 동지적의리로 보나 조선의 혁명가들을 수많이 거느리고 키워주는 처지를 보아 우리가 찾아가는것이 옳은 처사입니다.

자, 앉읍시다. 앉아서 얘기합시다.》

그이께서 웃으며 앉으신 후에야 김책과 최석천이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아방안을 천천히 돌아본 김책은 품위있는 가구며 장식물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하지 않고 장군님의 안색을 살피다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가까이 마주 대하고보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윽한 회포에 싸여 말씀이 없으시였다 한동안이 지나 김책이 생각에 잠겨 조용히 다시 말했다.

《제가 한가지 사죄부터 해야겠습니다.···

지난 초가을에 샤오하얼(소할바령)바령회의에 참가했다가 돌아온 동무들에게서 새로운 전략방침을 전달받고 저는 진심으로 열렬히 공감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워낙 용렬한데다 직책상 여러가지를 고려하다나니 큰 전투들을 벌려놓고 귀중한 동지들을 잃었습니다.···》

김책이 소리없이 한숨을 쉬고 선뜻 말을 잇지 못하자 최석천이 털어놓고 설명을 가했다.

《중국동지들과의 관계에서 김책동무가 속을 썩입니다. 그 사람들은 항일련군안에서 큰 자리는 다 차지하고앉아 터세까지 쓰면서 베이만혁명을 개척한 조선혁명가들의 말은 듣지를 않습니다. 나중에는 <민족리기주의> 감투까지 씌우려고 듭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너그럽게 웃으시였다.

《동지들,

오늘 저녁에는 오래전부터 만나고싶었던 전우들이 모였는데 사업이야기는 후날에 미루고 회포나 나누는것이 어떻습니까?》

김책도 최석천도 후련한 표정들이였다.

그러자 그이께서는 안길을 돌아보며 웃으시였다.

《무언지 대단하게 마련했다는데 지금같은 때 내놓아야 하지 않겠소!》

안길은 벙글거리며 대답했다.

《글쎄말입니다. 저도 그럴 생각이였는데 사령관동지께서 어쩌시겠는지 몰라서···》

《안길동무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대로 하는거지 누가 감히 반대하겠소!》

모두들 유쾌하게 웃는속에 안길이 문밖에 사라지더니 잠시후에 네모난 나무쟁반에 접시며 가루소금이 든 사기단지며 절인 양배추를 담은 식기 등을 챙겨놓았다.

《로씨야 접대원들의 손을 빌기보다 제손으로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안길이 부르고 쓰고하면서 다시 갔다와서는 커다란 구리남비에 담긴 김이 문문나는 소갈비를 갈라 접시들에 놓았다.

《이만하면 대단하오.》

최석천이 흐뭇해서 중얼거리는동안에 안길은 벽장문을 열고 진보라색으로 어두운 목이 긴 술병들을 량손에 끼고와서 원탁밑에 놓았다.

《이런건 어디서 났소?》

김일성동지께서 물으시니 안길이 설명했다.

《로씨야사람들이 자랑하는 그루지야 꼬냐끄입니다. 사흘전에 숙소준비상태를 돌아보러온 어떤 장령에게 제가 한마디 퉁겨주었습니다. 쏘련공산당원들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더니 과연 그 말이 비슷하구만! 하고 말입니다. 통역관이 어떻게 번져놓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장령이 시물시물 웃으며 돌아가더니 세상자를 보냈습디다. 후에 더 보내겠다면서··· 옆구리 찔러 절을 받은 셈이지요.》

모두들 소리내여 웃었다.

《안길동무가 비위는 떡판 같구만!》

최석천이 빙글거리며 그 술한병을 들어 올리자 김책이 그의 손을 누르며 일어섰다. 일어는 섰으나 랑패한듯 두손을 드리우고 두리번거리자 안길이 눈치채고 말했다.

《귀중품통을 잊어버렸구만요!》

《가지고 떠난것 같은데···》

매사에 침착하고 빈틈이 없는 김책이 난처해하는 모양을 지켜보다가 최석천이 생각난듯 퉁겨주었다.

《아까 숙소에서 들고나오지 않았습니까!》

《아하! 자동차에 두고내렸구만.···》

김책의 혼자소리가 끝나기도전에 안길이 뚜벅뚜벅 나가더니 쎄르판지로 덧포장한 두어뽐 높이의 네모난 곽을 안고 들어왔다. 김책은 포장을 벗기고 비취색 도자기병을 꺼내 두손에 들고와서 정중하게 말했다.

《장군님께 부어드리려고 제가 간수해두었던 베이만에서 이름난 <신선주>입니다.》

공 들여 봉한 코르크마개를 뽑고 장군님앞에 놓인 유리잔에 정성담아 붓고나서 차례를 따라 다른 잔들에도 부었다.

김일성동지께서 잔을 들고 동지들을 둘러보며 말씀하시였다.

《동무들, 우리가 몸바쳐 싸우는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해 듭시다.》

엄숙하게 잔들을 찧고 마셨다.

다시 순배가 돌아가는 동안 김책은 만면에 웃음을 띄운 장군님의 모습을 우러러보면서 떠나기전에 저우바오중군장이 하던 말을 상기했다.

김일성동지께서 참가하신다니 이번 회의에서는 쏘련사람들의 고집을 꺾을수 있을것 같소. 김사령은 원래 반일무장투쟁을 시작하면서부터 조선혁명로선을 내세웠소. 둥만(동만)의 유격근거지들에서 <조선인간도자치설>이 떠돌아 반혁명종파분자들이 요언을 퍼뜨린다고 소란하던 때에도 당당하게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해서 백두산으로 나갔으니 지금에 와서 강성해진 무력을 이끌고 쏘련군 지휘체계에 들어가지 않을건 뻔하오!》

술기운에 흥이 오른 안길이 최석천이 붓고있는 술병을 지켜보다가 《거 조금씩 부어야지 <신선주>가 더 차례지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한마디하자 김일성동지께서 유쾌하게 응수하시였다.

《안길동무가 신선이 못될가봐 걱정하는데 그 잔에 많이 부으시오.》

명랑하게들 웃으며 잔을 들어 마셨다.

최석천은 장군님께서 부어주신 술잔을 들고 깊은 생각에 잠겨 오래도록 들여다보다가 음미하듯 천천히 잔을 비우고나서 큰 시름이라도 놓은듯 긴숨을 내쉬며 혼자소리로 뇌였다.

《혁명의 길에 이런 밤도 있구만! 꿈같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당부하시였다.

《곡절을 많이 겪었다던데 혁명의 길을 걸어온 얘기를 들어봅시다.》

《장군님께서 말씀하시니 얘기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흉금을 털어놓고싶었습니다. 제 경우엔 혁명의 길이라기보다 인생의 길이라고 해야 할것 같습니다.》

《조선을 위한 인생길이지요.》

장군님께서 정정하시자 최석천은 게면쩍게 웃었다.

《그건 좀 과분합니다만 어쨌든 조선을 위한 길을 찾아헤메다가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의 곡절을 말하고싶습니다.》

저녁어둠이 드리운 창문밖을 바라보는 최석천의 초점잃은 눈길은 떠나온 인생의 먼 기슭을 찾고있는상 싶었다. 방안의 정적속에서 차츰 상념이 그 기슭에 내려앉은듯 잔을 더듬어 한모금 추기고는 추억의 돛을 올렸다.

《내가 철이 들어 소학교를 다닐 때는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직후여서 조선사람들속에서 민족의식이 높아지던 시기였습니다. 나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아 일찍부터 민족의식이 싹텄습니다. 조선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지···

평안북도 선천에서 미국선교사가 경영하는 중학교를 다니다가 조선학생들을 멸시하는 교장을 반대하여 동맹휴학을 조직한 <죄>로 퇴학당했습니다. 정주의 오산중학교에 전학했는데 3.1봉기가 터지가 시위대렬을 무어 궐기했습니다.

그후에 조선독립을 위해 싸워보자고 서울에 나가 활동하던중에 <상하이(상해)림정>에서 파견되여 온 사람과 만나 그의 부탁으로 독립자금을 얻기 위한 공채를 팔러다니다가 일본놈들한테 체포되여 신의주감옥에서 이태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출옥후 20여명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상하이로 갔는데 거기 <림시정부>안에서 각이한 파벌들이 우리를 서로 제편에 끌려고 암투하는걸 보고 환멸을 느꼈습니다. 거기엔 민족을 이끌어갈 진정한 령도자가 없었습니다.···

지사들을 찾아헤매다가 중국 윈난성(운남성)에 흘러가서 사관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시절에 잊혀지지 않는것은 어떤 중국인학생이 날보고 조선놈의 종자라고 멸시하길래 그 자리에서 그녀석을 깔고앉아 주둥이를 비틀어놓은 일입니다. 피가 흐르고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교장이 나를 불러 따지기에 앞으로도 조선사람을 모욕하는 자가 있으면 그렇게 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했더니 찍소리 못하더군요.···》

듣고있던분들이 싱글벙글 웃자 최석천이도 빙긋이 웃고나서 계속했다.

《분별없이 의분에 들떠 돌아치던 시절이였습니다. 그 학교에서 맑스주의서적을 읽기 시작하고 공산주의사상에 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학교를 졸업하고 황부(황포)군관학교 전술학주임교관으로 배치받아 일했습니다. 그때로 말하면 중국의 신흥혁명세력인 국민당안에서 국공합작이 아직 결렬되지 않았고 국민혁명정부는 북벌전쟁을 준비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몹시 어리석었습니다. 국민당이 북벌전쟁으로 동북지방까지 다 평정하면 그 힘으로 조선에 진군하여 일본놈들을 내쫓을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개 중대를 지휘하여 공적도 여러번 세웠습니다. 표창도 받았고 북벌군 총사령인 장개석이 베푼 연회에도 초대되였댔습니다. 하지만 그후에 장개석이 구테타를 일으켜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자 나는 공산주의자들의 편에 서서 국민당 군벌들과 싸웠습니다.

난창(남창)폭동이후에 다시 광주무장폭동에도 참가했습니다. 광주폭동이 3일천하로 실패하고 거기 참가했던 조선청년 200여명중에 150명이나 희생된걸 보고는 땅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조선과는 너무나 인연이 먼 그 땅에서 피의 교훈을 찾았습니다.

조선이 그리웠습니다. 그렇지만 일본놈들의 세상이 된 조선에 돌아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같이 싸우다가 전사한 조선청년들을 생각하니 더욱 돌아갈수가 없었습니다. 의리를 저버릴수 없었던겁니다.

그후에 조선혁명의 기운이 대통하는 동북에 들어와 베이만에서 활동했습니다. 독립군들과도 련계를 가져보고 무관학교도 설립해보고 각 지방을 다니면서 반일기세도 고취했습니다.

일제가 만저우에 쳐들어온 이듬해 봄에 김일성동지께서 안투(안도)를 중심으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했다는 소식에 고무되여 저도 요하에서 반일유격대를 조직했습니다. 다른 지방들에서도 유격대들이 조직되기 시작했습니다.···》

창문에 눈길을 두고 지난 날을 더듬어보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부대들을 편성하고 확대하면서 전투도 많이 했습니다.···

36년의 이른봄에 둥만유격대의 끌끌한 대원들이 베이만에 들어와 난후터우(남호두)에서 진행된 군정간부회의소식을 전하면서 장군님께서 조선혁명의 주체적로선을 제시하고 부대를 인솔하여 백두산으로 나가셨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을 때 우리는 모두 흥분하여 며칠밤을 내처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조선혁명의 주체적로선! 우리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때 김책동무랑 한자리에 모여앉아 감격해서 소리쳤습니다.

<조선의 하늘이 펼쳐졌구나.>

조국광복회창립에 대한 소식! 보천보전투!

베이만에서 싸우는 조선의 혁명가들은 모두 백두산쪽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압록강, 두만강변에서 벌어지는 전투소식을 들을 때마다 모두들 감격하여 장군님 싸우는 곳에 나가고싶어했습니다.

장군님을 직접 만나보고싶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감동하여 잠자코 계시다가 조용히 말씀을 떼시였다.

《나도 동지들을 만나보고싶었습니다.

조선을 위해 싸우는 혁명가들끼리 서로 만나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며 뜻을 모으고 힘을 합치고 싶은 심정은 동지들과 같았습니다.

베이만은 우리의 린접이고 배후여서 우리는 한전선에 서있으며 다같이 조선혁명을 하고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우리는 그래도 꼭 장군님밑에서 싸우고싶습니다.

이번에도 이곳에 들어오면서 생각이 많았습니다. 동북지방에서 싸우는 조선과 중국의 항일혁명군들이 쏘련의 원동군에 속하게 될것 같다는 말이 있는데 그게 과연 조선혁명을 위한 길인가.··· 우리가 속해있는 중국인군장들은 그런 제안을 한사코 반대하는데 그게 옳은 처사가 아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장군님께서 들어오신다고 하니 베이만을 떠나 들어오면서도 이래저래 생각이 많았습니다.

저는 지금이라도 장군님을 따라 백두산에 나가 싸우고싶습니다. 전사로도 좋으니 장군님밑에서 싸우게 해주십시오.》

무거워진 분위기속에서 김책이 약간의 해명을 드렸다.

《로선문제는 그렇다 하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부대활동과 관련하여 중국인간부동지들과의 관계에서 속을 썩여야 할 일들도 있습니다. 그러다나니 최동무는 이번 회의에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리해할만 하다는듯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회포를 나누는 기분들이 지내 무거워지는것 같습니다. 좀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 웃으며 말씀하시고 일어서려고 하자 그이의 의도를 깨달은 안길이 얼른 몸을 일으켜 벽장쪽에 갔다오면서 커다란 술병을 들고왔다. 조선의 농촌들에서 흔하게 쓰이는 커다란 대두병인데 보기에도 묵직했다. 그이께서는 그 병을 두손으로 들고 설명하시였다.

《이건 우리 유격대원들을 진심으로 원호해주는 한 로인이 몸보신에 써달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준 깊은 사연이 깃들어있는 귀중한 술입니다. 로인은 자기가 손수 캔 삼십년묵은 산삼을 제손으로 고은 독한 술에 담그어 여러해동안 보관해두었다가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로인의 진정이 넘치는 이 술을 뜻깊은 이 자리에서 마십시다.》

술병안에서는 두가닥뿌리에 지근까지 실실이 드리운 묵직한 산삼이 전등불빛에 두드러져 보였다. 김책은 손을 들어 제지하고 안길을 돌아보며 나무랬다.

《장군님의 건강을 념려해서 드린 보약인데 이렇게 쓰면 어떡하겠소? 다른 술도 있는데.》

안길이 딱한듯 마주보고있는 사이에 최석천이 앗으려고 일어섰으나 김일성동지께서는 벌써 그의 잔에 따르시였다.

《우리 혁명가들을 친혈육처럼 아끼며 도와주는 로인의 진정이 가슴에 흘러들면 훨씬 더 의의가 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 은근하게 하신 말씀에 최석천은 부어놓은 술잔을 부둥켜잡았고 김책은 빈잔을 정중히 받쳐 들었다.···

김일성동지께서도 부어놓은 술잔을 바라보며 오로인을 생각하시였다. 가슴이 쓰라렸으나 굳이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 잔을 들어 경건하게 기울이시였다. 그 술에 담긴 깊은 사연을 알수 없는 안길은 다 마시고 나서 탄성을 질렀다.

《대단한 술입니다. 일본놈 총독도 아마 이런 술을 맛보지 못했을겁니다. 쏘련사람들의 고급꼬냐끄는 울고가겠습니다.》

모두들 술맛을 찬탄하는 속에서 김일성동지만이 쓸쓸한 미소를 띄우고 계시였다. 벽난로의 열기로 하여 방안은 훈훈했으나 그이께서는 술잔을 바라보며 눈보라가 회오리치는 그날 밤 얼어붙은 눈길을 허위단심 올라와 혁명가의 언몸을 녹여주려고 자기의 단벌 덧저고리를 벗으려 하던 전사한 동지의 아버지를 생각하고 계시였다.

창문밖 이국의 밤하늘엔 별들이 찬란했으나 방안에 둘러앉은 조선의 투사들은 고국을 그리며 싸워온 이야기를 이어가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