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7


 
 

제 2 장

7

 

《어서 들어오게. 자네가 오늘 나한테 요긴한 일이 있는 모양이군.》

방안에 들어선 조봉길은 주인의 말에 속이 띠끔했다. (이 어른이 어떻게 내 속을 이렇게두 신통히 알아맞힐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으나 조봉길은 싱글벙글 웃고있었다. 벼르고 별러서 찾아온 중대한 용건을 들어서자 바람으로 밝힐 생각은 없었다. 워낙 계획을 그렇게 하지 않았던것이다.

《공일이여서 선생님댁에 한번 놀러왔습니다. 제가 경우를 모르고 찾아온게 아닙니까?》

《아닐세, 나두 바쁜 일이 없어 책을 읽던 참이네.》

고형근은 싫지 않은 기색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편안하게 벽에 기대였다. 조봉길은 중절모를 벗어걸고 네다리를 꼬부려앉힌 응접상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

《전번에 위문단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일해보니 더 가까이 지내고싶어집니다.》

《내 하는 일이 자네 비위에는 거슬렸을텐데.···》

고형근은 롱조로 그렇게 말했으나 눈길에는 유쾌한 미소가 떠돌았다. 롱말속에 진담이 있음을 암시하면서도 떠보는 미소였다.

《허허 참, 선생님두···》

조봉길은 당치 않다는듯 중얼거렸으나 (귀신이 왔다가 울구가겠군!) 하고 속으로 혀를 찼다.

《글쎄 내가 잘못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자네는 늘 사람좋게 입을 다물고 내 하는 일에는 참견이 없더군. 참견하면 내 기분을 건드릴테니 먼장을 에돌기만 했겠지···》

조봉길은 속으로 감탄하면서도 딴전을 부리지 않을수 없었다.

《저는 사실 선생님의 청으로 가긴 갔습니다만 마음은 온통 반점에 와있었습니다. 글쎄 제가 없으면 <토벌사령부>의 밑도리들이 자꾸 드나들면서 선심도 아닌 손해가 약차합니다.》

《짐작할수 있네. 하지만 이거야 큰 참사가 아닌가! 숱한 사람들이 죽어가구 불구가 되구하는데··· 일본에서 간또대진재를 겪은 일이 생각나더군. 몸서리치는 참변이였어. 참말이지 그때 조선사람들은 가련하기 그지없는 목숨이였지.···》

고형근은 울분을 느끼면서 한숨을 쉬였다.

《선생님, 제가 한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고형근은 자기 생각에 잠겨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주의를 돌렸다.

《자네 무슨 말을 했나?》

《우리 사람들의 여론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여론이라니?》

《외람되지만 제가 한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선생님은 어째서 시내에 있는 우리 영업자들을 달가와하지 않습니까. 일본사람관리들과도 상종을 하고 농사군들과는 오히려 허물없이 대하면서도 영업자들은 꺼리더군요.》

고형근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한손으로 턱을 쓸면서 돗자리우의 무슨 문양을 여겨보고있는 그의 미간에 랑패한듯 한 어줍음이 그늘져있었다.

《뒤에서들 욕하는 모양이군.》 하고 그는 혼자소리처럼 뇌였다.

《선생님을 어려워하고 눈치를 보면서두 욕은 못합니다. 선생님귀에 들어갈가봐··· 그렇지만 속으로는 고깝게 여깁니다.》

기탄없는 비난에 고형근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꿈꾸는듯 한, 잠이 깨여 아쉬워하는듯 한 웃음이 머물러있는 얼굴을 들지 않고 중얼거렸다.

《내 성미탓이야. 성미가 까다로와서···》

조봉길은 진지한 표정이였다.

《아니올시다. 선생님은 우리 영업자들을 꺼리고 업수이 봅니다.

다같은 조선사람들인데···》

고형근의 얼굴에서 천정에 서리였던 뜬김처럼 미소가 사라져갔다. 얼굴을 들어 상대편을 굳이 보지 않으면서 실토했다.

《자네 말이 옳네. 난 사실 그 사람들을 싫어하네. 돈이나 상품, 수송거래때문에 나를 찾아다니구 인사치레로 무얼 보내거나 술좌석에 청하려고 웃음을 흘리며 다니는, 낯간지러운줄 모르는 그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네. 여기서 운송업이나 정미업을 벌려놓았다해서 그래 내가 영업자이구 장사군인가! 돈벌이군이냐 말일세!

그런 사람들과 거래하고 나면 내 인생이 허무해지고 가슴에 눈물이 고이네. 자네두 역시 그런 사람이지만··· 이번에 내가 자네를 끌어들인것은 영업자들도 위문단에 한두사람은 끼워야 할거고 또 깊이 사귀지를 않아 잘 모르기는 하네만 자네가 구차스럽게 굴지 않고 씨먹은데가 있어보여 같이 지내기가 정 고달프지는 않을것 같아서였네.···》

조봉길은 빙그레 웃고있었다.

《자, 이런 공연한 소리를 거두고 우리 장기나 한판두세. 시내에 장기에서는 자네를 당하는 사람이 없다며?》

《괜한 소립니다.》

조봉길은 장기 둘 생각은 전혀 없었으나 마다할수도 없었다.

조봉길은 워낙 장기와 바둑을 잘 두었다. 이전에 만수툰에서 광주의 서기노릇을 할 때엔 장기판을 벌려놓고 감독들과도 로동자들과도 잘 어울리였고 일본인 실업가들이나 관리들과는 바둑을 두면서 사귀였었다. 시내에 들어와 반점을 넘겨받아 영업을 하면서도 제방에 장기와 바둑판을 건사해두고 사람들과의 거래를 한결 자연스럽게 엮어가는터이지만 고형근이와 장기 둘 생각을 한적은 없었다. 오늘 이리로 오면서 갖가지 경우를 예상해보았지만 그런 놀음이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었다. 하지만 판을 벌려놓고보니 두지 않을수 없었다.

고형근이 량귀마를 놓고 틀에 박힌 전법을 펼쳐가자 조봉길은 벌써 몇수 더 내다보면서 면상장기에 쌍포질로 궁을 노렸다. 고형근이 말잡기에 골똘하여 한참씩이나 궁리하다 한수를 쓰면 이쪽은 잇달아 대척하고, 심중한 생각끝에 이쪽 말을 잡으면 보지도 않고 제꺽 다음밭으로 넘어갔다.

《선생님, 제 담배 한대 태우겠습니다.》

《어서 그러게. 거기 상우의 갑에 있는게 미도리야.》

고형근은 말잡는 재미에 끌려 장기판에서 눈도 떼지 않았다.

조봉길은 한대 붙여물고 담배연기를 흘리며 한쪽눈을 쪼프리고 다른쪽눈으로 장기판을 여겨보며 이제 서너수면 통장훈을 부르리라 작정했다. 반면에 고형근은 쪽을 많이 먹었으니 이기게 된줄로 알았던 형세가 엄중해진것을 들여다보면서 오래도록 머리를 짜고있었다. 조봉길은 다 피운 담배불을 재털이에 끄면서 어른이 대바르고 속이 깊으면서도 아이들같이 단순한데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자··· 썼네!》

드디여 고형근이 쪽을 한걸음 옮겨놓자 조봉길은 여태껏 움직이지 않았던 면상을 훌쩍 집어서 딱- 소리나게 옮겨놓으면서 시무룩이 웃었다. 고형근은 또다시 구부리고 앉아 판을 들여다보면서 연구에 들어갔다.

《선생님은 저를 잘 모르십니다.》

하고 조봉길은 아까하던 이야기를 흔연하게 끌어내면서 시물거렸다.

《자, 썼네.》

고형근은 아끼던 차를 내몰아 상대편의 궁을 위협하면서 건성으로 물었다.

《그래 자네는 어떤 사람인가?》

조봉길은 방비가 위태롭게 된것을 보고 중포를 넘겨놓으면서

《초렴 장기에서만은 선생님이 이길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자 딱- 소리와 함께 통장훈을 겨누었던 그의 면상이 떨어져나갔다.

《그렇겠지- 암 그렇다마다. 자네 일수불통이야! 일수불통···》

고형근은 잡은 쪽을 줌에 쥐고 절컥거리면서 턱을 쳐들고 깨고소해하였다.

랑패한 조봉길이 허리를 굽히고 장기판을 들여다보았으나 외통수를 노리던 주력이 분쇄되고 보니 방도가 없었다. 그는 마른 입을 다시면서 등한했던 자신을 후회했다. 처음으로 조용히 마주앉은 자리에서 솜씨를 보여주지 못한것이 유감스러웠던것이다.

집주인은 즐겁게 싱글거리며 말했다.

《그쪽이 방심하면 이쪽이 진력한다! 세상리치가 이렇네.》

《제가 언행이 일치하지 않았으니 면목이 없소이다만 후일에 기회가 생긴다면 오늘처럼은 되지 않을겁니다. 경적필패의 교훈이였습니다. 이렇게 말해서 죄송합니다만.》

《괜찮네. 놀음인데 뭘··· 자네 수가 이만저만치 않다는게 알려.···》

그렇게 말한 고형근은 여전히 미소어린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은근하고 진지하게 묻는것이였다.

《그래 자네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조봉길의 너부죽한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가 떠돌고있었으나 마음은 짐짓 도사린터이였다.

《제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걸 아시게 되면 선생님은 저를 대문안에 들여놓지 않을겁니다.》

《설마···》

《저는 선생님을 몹시 미워하던 사람입니다.》

《흐음- 연고가 있는 소리같군!》

생각이 깊어지는 어조였다.

《···》

《미워한 까닭이 있을테지?》

하고 고형근은 심중하게 물었다.

《있습니다. 많은 말을 할수 있지만 제가 당한 일만을 가지고도 말할수 있습니다.···

제가 만수툰에서 광주의 서기로 있을 때 ··· 여러해전 일입니다만 선생님이 현공소의 관리들과 거기 오셨던 일이 있습니다. 광부들의 함바에 병자들이 많은걸 보고 광주더러 병원을 못 꾸린다 해도 치료소같은거라도 꾸려놓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했지만 광주가 그럴만 한 재력이 없다면서 응하지 않는 바람에 이야기가 흐리마리돼버렸습니다.》

고형근은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듣고있었다.

《선생님이 돌아간 뒤에 광부들이 그 소리를 전해듣고 뭐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허 그 량반이 병원을 꾸려놓구 우리들을 쫄가낼 생각이 있었던게군! ··· 그렇게들 생각했습니다.

물론 병원이 있으면 좋을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광부들이 어째서 병에 걸립니까? 먹을걸 변변히 먹지 못하고 숨쉬기도 바쁜 마구리에서 14시간, 16시간씩이나 일을 하는데 무쇠로 만든 사람이라 해도 탈이 생기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병을 치료할 대책을 세우기전에 병에 걸리지 않을 대책을 세워야 할텐데. 지금같은 세상에서 그게 될상 싶습니까!

선생님은 이 근년에 <개척민후원회>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개척민>들을 많이 돌봐주고있습니다. 작년 초여름에 시내의 영업자들이 조선에 나가 해산물을 실어오겠으니 자동차를 임대해달라고 신청했지만 선생님은 그걸 거절하고 돈도 받지 않으면서 <개척민>들의 짐을 실어주고 집재목을 날라주었습니다. 물론 영업자들은 돈을 벌자고 그랬고 선생님은 이국땅에 온 동포들을 도와주느라고 선행을 베풀었다는걸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렇게 도와주어서 지은 농사가 다 <개척민>들의 입으로 들어갑니까!

선참 들어가는데가 공출이고 <토벌대>에 제공하는 군량이 아닙니까!

그렇게 지은 쌀을 처먹은 일본군대가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유격대들을 <토벌>하러 다닙니다. 이게 얼마나 원통합니까!

지난 여름에 우리 <지엔다오(간도)반점>에 젊은 농민들 7∼8명이 들려 점심을 먹고 그냥 나가기에 접대부가 점심값을 청산하라고 하니 총독부에서 발급한 이주민증을 내보이더랍니다.

날더러 어쩌라는가 하고 묻기에 돈이 없어 그랬을줄 알고 그냥 돌려보내려다가 좀 깨우쳐줘야겠다고 생각하고 타일렀습니다.

너희들이 무슨 특혜를 받아서 온게 아니라 살길이 없어서 이국땅에 온거다, 총독부에서 농사를 지으라고 끌어온거다, 이 고장에 이전부터 있던 조선사람들과 처지가 같은 사람들이다, 소탄 개처럼 우쭐대지 말아라 하고 단단히 오금을 박아서 돌려보냈습니다.

1그 녀석들도 자기네 처지를 모르지는 않으면서도 괜히 쓸데없이 흰 목을 보인단 말입니다.

일본놈들이 잔뜩 허튼 소리를 불어넣고 거기다가 <개척민후원회>같은데서 어루만져주고 하니 관청의 힘을 타구 어째볼가 한단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상이 없을뿐더러 의식이 트이지 못해 약간이라도 적선을 해주면 일본사람이건 누구건 가리지 않고 돌아가며 머리를 조아립니다.

일본사람들은 모든 조선사람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선생님은 무지한 사람들의 눈을 틔워줄 대신에 불쌍하다고 어루만지기만 하니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선생님을 좋지 않게 여겼댔습니다. 선생님이 일본에 가서 대학까지 다녔다고 하니 친일에 기울어진 사람이라고 미워하면서 규탄하고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고명한분이 저에게 타이르기를 사람들을 편협하게 제멋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들은 큰 뜻을 지니고있으면서도 그 뜻을 펼쳐갈 길을 찾지 못했거나 혹은 길을 안다해도 신념이 뚜렷하지 못하다나니 험한 길에서 자기개인의 운명이 위태로와질가봐 나서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길을 모르거나 나서기를 두려워하면서도 뜻을 버릴수 없고 인생을 허망하게 보낼수가 없어 자기나름으로 이러저런 일을 벌려놓을수 있는데 그걸 리해하지 못하고 편협하게 대한다면 그 사람이 얼마나 억울하고 또 그러는것이 누구에게 리익이 되겠는가?··· 하고 일깨워주십디다. 그분의 훈계를 듣고 저도 깨달아지는바가 있어서 선생님을 더 깊이 리해하게 되였고 존경하게 되였습니다.》

《···》

고형근은 미간을 찌프린 얼굴을 비스듬히 돌리고 앉아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이즈음 와서 이따금 띠끔거리는 가슴속이 아픈데를 마구 쑤셔대는 조봉길의 말을 괴롭게 들으면서 언젠가 자기를 찾아왔던 신사복차림의 혁명군공작원을 생각했다.

그 젊은이도 이러루한 말을 했었다. 그때 그는 불청객이 던지는 당돌한 비난에 쓰겁게 반발했었다. 반발은 했으나 무시할수 없는 비난의 진실은 가슴에 남아 은근히 그를 괴롭혔었다. 그런데 지금 조봉길이 그 아픈데를 대수롭지 않게 쑤셔놓고나서 아량을 가지고 쓰다듬어주는것이다.

《자네가 훈계를 받았다는 그 고명한분은 어디서 무얼하시는 어른이요?》

《존함을 들으면 선생님도 아실분입니다.》

고형근은 생각을 더듬으며 이리저리 짐작해보다가 아무리해도 짚이지 않아서 조봉길이쪽에 얼굴을 돌리고 설명을 기다렸다. 조봉길은 무겁게 입을 다물고있다가 정중하게 말했다.

《저는 오늘 한가지 중요한 문제를 말씀드리려고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어떤 문제인데?》

김일성장군님께서 친히 선생님을 만나시겠답니다.》

고형근은 고개를 들고 말뜻을 깨달으려는듯 상대편을 엄숙하게 지켜보고있었다. 그의 온 심혼이 쏠리는듯 한 심각해진 눈길에 대답하듯 조봉길이 침착하게 말했다.

《저는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나가는 사람으로서 친히 그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어떻게 나를 아시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만저우(만주)땅과 조선을 주름잡아 넘나들며 십여성상 일본군과 싸우면서도 세계의 움직임과 조선의 실정, 항간의 민심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헤아리는데 지엔다오(간도)땅에서 크게 활약하는 선생님을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아까 제가 훈계를 받았다는 그 고명한분이 바로 김일성장군님이십니다.》

고형근은 놀라운듯 의아해서 조봉길을 오래도록 주시하고있다가 엄숙하게 물었다.

《자네는 대관절··· 어떤 사람이요?》

《이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김일성장군님의 높은 뜻을 받들고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는 조선인민혁명군 대원입니다. 이 지방에서 오래전부터 지하공작임무를 수행하고있습니다.》

침착하고 의젓한 대답에 표정이 굳어진 고형근은 상대방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있다가 슬며시 고개를 돌리였다. 그리고도 오래도록 생각을 더듬다가 한풀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분이 나를 만나자는 소이는 무엇이요?》

《저로서는 딱히 알수 없습니다만, 모름지기 구국성업과 관련되는 일들을 의논하시기 위해서일겁니다.》

고형근은 지그시 눈을 감고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충격이 너무도 컸으므로 머리속이 번거로왔던것이다.

《선생님의 신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군님의 말씀은 선생님의 신변안전에 대한 담보로 됩니다.》

《···》

《선생님도 벌써 짐작하셨겠지만 이런 말씀을 드리는것이 저로서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제 한사람의 운명만이 아니라 혁명군에서 받은 저의 사명이 파탄될수도 있습니다.》

고형근은 눈을 뜨고 격해서 쏘아보고있었다.

《자네는···》

말을 떼다가 시정하면서 분노를 터뜨렸다.

《당신은··· 내가 미덥지 않아 그러오, 아니면 위협하는거요?》

조봉길은 너부죽한 얼굴에 온화한 웃음을 띠우고 게면쩍어했다.

《선생님이 어떤분이라는걸 잘 아는 제가 어찌 그럴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을 믿기에 저의 정체를 다 드러냈습니다.》

진실이 안겨오는 그의 거동에 고형근은 너누룩해졌다. 괜히 울컥했구나 하고 후회했다. 잠자코 마음을 가라앉히느라니 신사복을 입고 불청객으로 나타났던 유격대공작원이 또다시 떠올랐다.

일본군을 쳐부시려고 한다던 말이며 조선사람들을 반일전선에 하나로 묶어세우려고 한다는 주장에 쓸쓸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그네들의 정상을 동정하여 군자금을 내놓았을 때 지전뭉치는 보지도 않고 쏟아놓던 울분이며 도도한 자태가 느닷없이 떠올라 감동과 더불어 애정을 자아냈었다.··· 무례한 접대에 모욕감을 참을수 없지만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참고 돌아간다던 의젓한 모습, 말은 비록 투박했지만 정신은 떳떳하고 고결하던 젊은이의 거동···

그를 생각할 때마다 그런 부하들을 거느린 김일성장군은 과연 어떤분일가 하고 생각했었다.

오늘 뜻밖에 조봉길에게서도 그 젊은이와 상통하는 자질을 보았고 그에게 하셨다는 훈계를 통해 웅심깊고 예리하며 도량이 큰 김일성장군의 풍모를 느꼈던것이다.

한번도 만나뵈인적 없는 그분이 뜻을 버릴수가 없고 인생을 허송할수가 없어 겨레들을 위해 뛰여다니는 자기의 심정까지 어찌 그렇게도 환히 알고계실가.···

고형근은 여러해전부터 출판물이나 풍문을 통해 일제군경들을 쳐부시며 민심에 떠받들리는 김일성장군의 비범한 투쟁정형을 알고있었다. 하지만 그 군대는 자기가 원한을 품고있는 공산주의자들의 군대였다. 게다가 대일본제국이 전멸을 노리는 반일군이여서 관심하지를 않았었다. 하지만 범속한 인간인 자기의 처지와 심정까지를 그처럼 너그럽게 헤아려주시면서 청하는 마당에서는 물러설수가 없었다.

김일성장군에 대한 호기심도 강렬했다. 그것은 조선을 사랑하고 나라의 광복을 바라는 뜻있는 조선사람으로서의 심정이였고 또한 반일투쟁의 갖가지 조류에 휩쓸려보았던 우국지사로서의 호기심이였다.

하여 그는 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공산군의 진중에 간다는것도 막연한 일이였다.

《가는 곳마다에 <토벌대>와 경찰들이 널려있는 판에 어디로 어떻게 간단말이요?》

《그 일은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다만 마부의 입에서 말이 샐수 있으니 마차는 제가 따로 마련하겠습니다.》

고형근의 가까이에 밀정을 박아두었을수 있다고 하신 사령관동지의 말씀을 명심하고있던 조봉길이 그렇게 말했으나 운송회사 사장은 단마디로 거절했다.

《마부는 고향에서부터 내가 돌봐주는 사람이요. 화물자동차와 수송마차 여러대를 가지고있는 내가 남의 마차를 타고다니다니!》

그 말에는 조봉길이도 응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여 그는 고형근이 현경지대의 《개척민》부락들에 나갔다가 안도를 거쳐 돌아오는 출장로정을 꾸미고 그 구간에서 만나 행동하기로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