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5


 
 

제 2 장

5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골짜기의 산비탈에 이끼돋은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바위우에 자라난 구부러든 로송이 앙상한 뿌리를 암벽에 뻗치고있었다. 산비탈에서 엇비듬히 갈라져나간 틈사리로 들어가면 아득한 옛적에 자연의 힘이 조화를 부린 방안같은 커다란 동굴이 나지는데 과연 무장한 대원들 한개중대는 들어앉을만 한 천연밀영이였다.

경위대원들은 그 안에 마른나무가지와 락엽을 깔아 거처를 마련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주변의 지형을 료해하고 나서 어둠속을 천천히 거니시였다.

서울공작원 차석진의 도착을 기다리는 그이의 눈앞엔 끼끗한 키꼴에 미끈하게 생기고 언제나 청신해보이는 청년의 자태가 떠올랐다.

여러해전의 일이지만 그를 처음 알게되여 담화를 하던 때에 《다시는 지방공작에 나가지 않겠습니다.···》 하고 생각에 잠겨 말하던 고뇌가 어린 그의 말도 새삼스럽게 상기되시였다. 그것은 차석진이 국내공작에 파견되기 한해전에 있은 일이였다. 보천보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장백, 린쟝(림강)일대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베이만(북만)에 진출하였던 한 부대가 돌아왔는데 거기에 차석진이라는 대원이 있었다. 단순하다고 여겨지리만큼 선량해보이는 청년이였다. 말은 많지 않았으나 동무들속에서 명랑하게 지내는것 같은데 때로는 인적없는 산비탈에 깍지낀 두손을 베고 번듯하게 누워 먼 하늘을 바라보는 모양이 무슨 사연이 있어보였다.

김일성동지께서 그 중대의 중대장을 불러 차석진에 대해 물으시였더니 정직하고 성실하며 지식수준이 높고 아는것도 많으나 나타내지는 않는다, 단순해보이지만 속이 깊으며 늘 옷차림을 단정히 하는데 몸을 아끼는축이라는것이였다. 중대장의 말만으로는 의혹을 풀수 없었던 그이께서는 정치위원을 불러 료해하시였다.

차석진은 강원도 강릉출신이였다.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반일사상을 품고 지엔다오(간도)에 넘어와 학생운동에 가담했으며 검거를 피해 근거지에 들어온 청년이였다. 둥만(동만)당특위에서 사업하다가 지방공작에 파견되였었다.

옌지(연길)시내에 잡화상점을 꾸리고 청년들을 혁명적으로 교양하여 근거지에 보내는 공작을 수행하였다. 그 과정에 시내의 소학교 교장의 딸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여 약혼까지 했었다. 그가 추천해보낸 청년 두명이 근거지에서 도망쳐간 사건이 발단으로 되여 지방공작에서 소환되였을 때 약혼녀를 데리고 들어왔다. 둥만당특위에서는 그의 공작과정을 총화하고 자산계급출신의 계급적제한성으로 안일에 물젖어 혁명임무를 철저히 수행하지 못했다고 평가했으나 그이상 문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무렵에 야오잉거우(요영구)회의결정으로 유격근거지가 해산되였고 차석진이도 광활한 지역에로 진출하는 유격부대에 편입되여 베이만으로 떠났던것이다.···

김일성동지께서 불러 담화하실 때 차석진은 이렇게 말했었다.

《···저는 처녀에게 반해서 교장선생네 집에 다닌것이 아니였습니다. 공작상 위장을 위해서 또 저의 영향력을 돋구려고 시내에서 인망이 있는 그 선생과 의식적으로 교제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녀학교졸업반인 그 집 딸과 가까와졌고 부모들의 마음에도 들었던 모양입니다. 약혼말이 나왔을 때 결혼에 대해 생각지 않았지만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소문을 퍼뜨리는게 저의 활동에는 유리했기때문입니다. 철수하라는 지시를 받자 처녀를 만나 저의 신분을 밝히면서 량해를 구하고 더 찾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처녀는 자기도 혁명을 동정했는데 이 기회에 따라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저의 공작임무가 청년들을 한사람이라도 더 근거지에 보내는것이였으니 그 처녀의 소원을 물리칠수가 없었습니다.···

처녀가 마음에 들었던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근거지에 돌아온후부터는 그 동무와의 관계를 깨끗이 끊었습니다. 그러지않아도 사랑에 빠져 혁명임무를 소홀히 했다는 판인데··· 버선목이라고 뒤집어보이겠습니까?

다시는 지방공작에 나가지 않겠습니다.···

···자산계급출신이라는 말도 제입으로 한 소리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정미업으로 돈을 벌어 화물자동차 한대를 사서 장사군들의 짐을 실어주면서 재산을 불쿠고있으니 큰 부자는 아니라해도 살림은 넉넉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빼앗긴 나라와 도탄에 빠진 겨레들을 위해 혁명의 길에 나섰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의 진정을 믿으시였다. 단순하고 선량해보이는 그의 가슴속에서 의롭고 열렬한 심장이 고동치고있음을 느끼고 감동되시였었다.

그이께서는 근거지시절엔 준비된 간부들이 많지 못한데다 편협한 대국주의자들과 종파분자들이 활개치면서 반《민생단》투쟁도 극좌적으로 진행되였던만큼 매 혁명가들의 심정을 깊이 리해해주지 못한 경우도 있을수 있었다고 해설해주시면서 그의 마음을 풀어주시였다.

그 담화가 있은 이후로 차석진의 생활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부대생활에서 적극적이고 전투에서 자기희생성을 발휘하는 모범적인 대원으로 성장하였던것이다. 이듬해 초가을 국내에서 투쟁하는 혁명조직들을 지도하시기 위해 신흥, 풍산지구로 진출하실 때 김일성동지께서는 차석진을 사령부경위소대장으로 소환하여 함께 데리고나가시였다.

압록강을 건너선 일행이 삼수부근의 청산령을 넘어섰을 때 사령관동지께서는 차석진에게 정찰척후의 임무를 주어 부전호반에 파견하시였다.

부전호주변에는 일본인재벌 노구찌의 별장이며 경찰관주재소가 있어 경계가 심했을뿐더러 적들의 왕래가 빈번했으므로 검색에 걸려들수도 있고 우연하게 적들과 조우할수도 있었다. 차석진은 명승지유람객차림을 하고 떠나서 이틀이 지나 돌아왔는데 그 이틀동안에 후날 그의 운명에 극적인 전변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으며 그것이 계기로 되여 서울공작의 중임을 주어 파견하시였던것이다.···

그렇게 파견되여간 차석진이 3년이 지난 오늘 전혀 예상치 않게 아무런 통고도 없이 돌아왔다니 걱정스러우시였다. 그동안 조직선을 통해 보고를 받군 했는데 지난 여름 이후로는 소식이 없었다. 새로 여러개의 반일조직을 더 꾸렸는지 어학회의 광복회조직을 확대하여 반일활동을 폭넓게 벌리는지 못내 궁금하시였다.

차석진은 안내하러 간 경위대원과 함께 어두워진 뒤에야 나타났다. 감격적인 상봉이 있은 뒤에 사령관동지께서는 오래간만에 만난 공작원을 데리고 대원들이 휴식하는 굴어구를 지나 모닥불이 타고있는 안쪽으로 들어가시였다.

모닥불앞에 앉아 서울을 떠난 이후의 로정이야기를 들으신 그이께서는 적들의 눈을 피해 용케 왔다고 하시면서 오늘밤은 푹 쉬라고 권했으나 선량해보이는 얼굴에 행복한 웃음을 지은 차석진은 쉬려고 하지 않았다.

《피곤하지 않습니다. 아지트라고 하는 자전거수리소의 뒤채에서 푹 쉬였습니다.》

국내공작에 나가서부터 어느 하루도 발편잠을 자지 못했던 그는 꿈결에도 그리던 어버이 계시는 고향집에 돌아온 행복한 심정이였다. 외지에 나가 고생하던 이야기를 어버이앞에 어서 펼쳐놓고싶어 하는 아들처럼 모닥불빛에 불그레해진 얼굴에는 다감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사령관동지, 일제의 폭압이 가혹해지고 기만선전과 갖가지 모략이 우심해지니 심각한 문제들이 많이 제기되는데 투쟁경력도 지하공작경험도 많지 못한 저로서는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판에 만저우(만주)땅에서 반일전의 총소리가 들리지 않고 혁명군이 모두 다른데로 가버렸다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니 그럴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은근히 불안했습니다. 떠난지도 여러해 되니 한번만이라도 사령부에 와보고싶었습니다.···》

차석진은 홍준걸이라는 가명으로 서울에 침투하여 활동해온 정형을 차근차근 말했다.

그의 보고는 만수툰공작에 대한 지영갑의 보고처럼 분석적으로 론리정연하지는 못했으나 흘러가는 생활처럼 진실하고 생동했다.

차석진과 지영갑은 같은 나이에 지식정도도 경력도 비슷했으나 성격이나 풍모는 판이했다. 지영갑은 명민하고 열정적인 성격이 표정과 거동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또한 자기의 유식함을 곧잘 드러냈으나 차석진은 소박하고 명랑하면서도 은근하고 속이 깊어 사람들의 눈에 잘 뜨이지 않았다. 그는 자기주변의 청년지식인들을 반일조직에 묶어세운 과정을 상세히 이야기하고 나서 어학회공작에 대해 말씀드렸다.

《리극로선생은 전명석동무를 자식처럼 사랑하고 믿었습니다.···

그런 사이였던만큼 전명석이 소개한 저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정중하게 잘 대해주었습니다. 전명석이는 허물없이 친근하게 대했지만 저에 대해서는 꼭 홍선생이라고 불러서 좀 거북했습니다.··· 저는 전명석동무가 떠난 뒤로는 비밀을 지키려고 자주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어학회에는 이미 조직이 꾸려져있고 리극로선생은 믿을수있는분이여서 다른 사업에 더 관심했습니다.···》

그는 나이많은 지식인들과 어울리기가 어색했고 하숙생이 의심스러워 리극로네 가족들과도 사귀지 않았던 사실, 어학회에서 비밀조직을 확대하는 사업이 진척되지 않던 고충 등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그러던 차에 총독부에서 리극로를 끌어당기는 놀음이 벌어졌습니다. 어학회를 보호하고 리극로가 주관하던 조선기념도서출판관에 자금과 설비를 넣어주고 출판허가범위를 넓혀주는 등 〈혜택〉을 베풀기 시작하자 사태가 복잡해졌습니다.···》

차석진은 서대석이며 고형근이 드나든 사실 등을 그대로 말씀드리고 나서 자기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어학회가 <총력련맹>에 가입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자 저는 모든 합법적가능성을 최대한 리용하라는 사령관동지의 말씀에 근거하여 가입해야 한다고 확고하게 주장했으나 리극로나 그밖의 다른 사람들이 우려하거나 반대하기때문에 은근히 불안했습니다. 확신을 가질수가 없었습니다. 그밖에도 심중한 문제들이 제기되고있습니다.···》

밤이 깊어 자정이 가까와지고있었으나 사령관동지께서는 피로도 잊고 들으면서 그동안 투쟁속에서 성장한 차석진을 대견하게 바라보군 하시였다.

《석진동무, 어려울 때에 먼 적후에서 잘 싸웠소. 동무의 판단과 결심이 기본적으로 옳았소. 중요한 문제들을 단독으로 원만하게 처리했소. 물론 앞으로 더 추진시켜야 하겠지만 원칙적인 문제들을 확고하게 견지한것이 잘한 일이요. 동무가 불안해하며 자신을 못가진것은 사령부의 전략방침을 확고히 알지 못했기때문이였소. 우리는 그 지구에 전명석동무를 파견하여 샤오하얼(소할바령)회의사상을 전달하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귀중한 동지가 전사해서··· 지체되게 되였소. 우리는 아직 그 원인도 밝히지 못했소.》

사령관동지의 비통한 목소리로 하여 동지의 희생이 더욱 비장하게 느껴졌다.

사령관동지께서는 괴로움을 누르며 난국에 처한 공작원에게 방도를 제시하고 신심을 북돋아주려고 은근하게 말씀하시였다.

《어학회를 상대하는 공작에서는 석진동무가 신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못한게 결함이였던것 같소. 상대가 모두 나이많고 이름있는 학자들이라고 해서 교제하기 거북하다고 리극로와 실무적으로만 접촉한것 같소.》

《사실··· 그랬습니다.》

《그런 방법은 혁명군의 군중정치공작이 아니라 자기 망을 꾸리고 확대해가는 첩보활동이요.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되오.

조선어발전에 관심하는 청년지식인으로서 선배학자들과 접촉하고 친근하게 지내면서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세상형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오. 그들의 생활도 깊이 료해하고 일제의 파쑈적식민지정책에 대한 자기 견해도 밝히면서 혁명군전사의 사상의식수준을 보여주어야 하오.

우리가 벌리고있는 무장투쟁이야기같은걸 실감있게 들려주면 깨닫고 생각하는바도 많을것이고 동무를 믿고 존경하게 될거요.

그 집에 하숙하는 청년이 의심스럽다고 경계만 할것이 아니라 리극로의 가족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면서 하숙생이 어떤 사람인가 알아볼수도 있고 필요하면 혁명적인 영향을 줄수도 있었을거요.

석진동무는 자기 정체가 드러날가봐 너무 웅크리고 지낸것 같소. 그 문제에 대해서도 더 토론해보기요.》

《···》

《밤이 늦었는데 이젠 좀 쉬오. 래일은 동무에게 샤오하얼회의에서 제시된 새 전략과 그 수행방도를 상세히 알려주겠소.》

사령관동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나 자기 임무수행에 대해 생각이 많았던 차석진은 가슴속에 품었던 사연을 다 털어놓고 싶어했다.

《사령관동지,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하고 그는 죄송스러워하며 그이의 안색을 살피였다. 사령관동지께서 피로해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너그럽게

《어서 말하오.》 하고 고무하시자 차석진은 생각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아까 말씀드린것처럼 대혁명가라고 소문이난 서대석이라는 사람이 저의 공작을 결정적으로 방해했을뿐더러 앞으로도 크게 방해할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소?》

사령관동지께서 온화하게 물으시자 차석진은 기억에 생생한 용모를 그리며 자기 견해를 피력했다.

《키는 작고 앙바틈하지만 머리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하고 목소리가 걸걸한 사람이였습니다.》

《···》

사령관동지께서는 지나온 먼 행로를 더듬어보시는듯 불빛이 너울너울 어리는 바위굴 한구석에 그윽한 눈길을 두고 명상에 잠기시였다.

《사령관동지와 어떤 인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5. 30폭동때 란동을 부렸다는걸 보니 좌경모험주의자였던 모양입니다. 자기 위신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떤 권위도 도용하며 자기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제멋대로 허풍도 칠수 있는, 허세가 체질화된 인물같습니다.···》

그 인물로 하여 피해를 입었던 차석진은 반감을 그대로 털어놓다가 문득 사령관동지께서 잠자코 계심을 깨닫고 하던 말을 중둥무이했다. 늦게나마 자기가 주제넘었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사령관동지, 그런 사람을 아십니까?》

《잘 아는 사람이요.》

그이의 흔연한 대답에 차석진은 아연해졌다.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어색해진 그는 사위여가는 불무지에 나무가지를 조심스럽게 꺾어넣었다.

사령관동지께서 오래전의 일을 더듬으며 천천히 말씀하시였다.

《내가 지린(길림)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하숙을 정한 뚱다탄(동대탄)에 있는 독립군중대장네 집 이웃에 서가성을 가진 조선에서 들어온 형제가 살고있었는데 몸이 다부지고 어깨가 벌어진 형의 이름이 대석이였소. 그 사람은 그때 벌써 소문난 공산주의자였고 조선공산당 재건파에 속해있었소.

그 사람들은 자파세력확장에 광분하면서 우리들, 새 세대청년들에게 영향력을 뻗치려고 접근했댔소. 서대석이라는 사람과 더불어 론쟁도 많이 했소.···

공산주의학설에 해박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였소. 론쟁을 하다가 말이 막히면 눈이 번쩍거리고 볼이 떨렸소.

론쟁을 하고나서는 빈번히 한턱내기도 했소. 성미가 호방한 인물이였소. 큰 잔에 술을 부어 단숨에 주욱- 들이키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간단치 않아- 간단치 않아- 하고 혼자 중얼거리군 했소.···》

그이의 어조는 부드러워지고 불빛이 어린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가 떠돌았다. 차석진은 불꼬쟁이를 손에 들고 가장자리의 타다남은 가지들을 불무지속에 끌어넣으면서 그이의 말씀에 귀기울이였다.

《서대석은 그후에 자기네 상급의 지령에 따라 청년학생들속에 세력을 뻗치려고 류허(류하)지방에 나가 교원으로 있었소. 우리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도 광활한 지대에 혁명의 씨앗을 뿌려가면서 반일조직을 확대하기 위해 맹렬하게 활동하던 때였소.

류허지방에서 우리가 조직한 <반제청년동맹>이 <공산당재건파>의 습격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통보를 받고 현지에 나갔던 일이 있소.

<반제청년동맹>에는 각계각층의 반일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망라되여있었는데 <재건파>의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과의 단합을 이루고있다고 트집을 잡으면서 우리를 반대했댔소. 만저우땅에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자들과 단합하면 중국의 로동자, 농민, 공산주의자들과의 사이에 알륵이 생기고 민족적리간이 조장될뿐아니라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리념에도 모순된다는것이였소. 우리는 나라의 광복을 이룩하자면 모든 조선사람들이 반일의 기치하에 튼튼히 단결해야 한다는 목표를 내세우고 대오를 확대해갔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류허지방에서는 <공산당재건파>들이 몽둥이와 총기까지 들고 <반제청년동맹>지부를 습격했던거요.

그때는 중국에서 국민당우파가 쿠테타를 일으켜 공산당이 제창한 <국공합작>로선이 파탄되고 북벌군의 령도권을 장악한 장개석이 공산당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바람에 국제당에서도 각국의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자들과의 통일전선로선을 심중히 검토해야 한다는 테제까지 내놓았던 시기였소.

<공산당재건파>도 그런 풍조에 물이 들어서 민족주의자들과의 단합을 극력 반대했던거요.

류허에 도착하여 사건현장에 가보니 조그마한 <반제청년동맹>지부 사무실은 유리창이 온통 떨어져나가고 주변에는 부서진 책걸상의 <파편>들이 널려져있는데 그 방안에는 <공산당재건파>인물들이 하는 일도 없이 틀고앉아있더군

우리가 방안에 들어서니 다른 사람들은 비실비실 나가버리는데 서대석이만은 나가지 않았소. 나의 인사는 받지도 않고 <국제당에서 내놓은 테제내용을 알겠는데 아직도 민족주의자들과 엉켜돌아가오?> 하고 푸념을 하더구만. 내가 억이 막히고 분해서 한참 지켜보고있으니 자기도 거북해져서 슬그머니 나가버리더군.···

그렇게 헤여지고는 다시 만나보지 못했소.···》

어조는 담담했으나 꺼져가는 불길을 굽어보시는 사령관동지의 눈길에는 멀리 흘러가버린 지난날을 더듬는 그윽한 감회가 어리여있었다.

추억담의 서글픈 여운에 귀를 기울이고있던 차석진의 가슴에서 봄빛을 받은 들판에서처럼 생기가 약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띄우고 불무지에 나무가지를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저도 그러루한 인물로 생각했댔습니다.

좌경모험주의에 치우쳐 폭동이나 일으키고··· 그러다가 감옥에까지 갇혀있었으니 혁명정세나 전략전술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아직도 기가 꺾이지 않고 호기는 부리지만 속은 텅 비여있는 사람이였습니다.》

차석진은 공작에서 애먹던 울분이 되살아나 격해지는 마음을 눅잦히며 침착하게 말을 맺었다.

《이젠 알겠습니다. 자신이 생깁니다.》

결심을 가다듬는 차석진의 모습을 묵묵히 보고계시던 사령관동지께서 나직이 물으시였다.

《석진동무, 무얼 알았다는거요?》

《사령관동지와는 동지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정당한 로선을 반대하면서 혁명에 장애만 조성하던 파쟁분자라는걸 똑똑히 알았습니다. 그 사실으로도 그 사람을 제낄수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되오.》 하고 그이께서는 타이르듯 나직이 말씀하시였다.

《그 사람이 파쟁분자였던건 사실이지만 사람들을 함부로 배척하거나 제거해서는 안되오.》

그이의 말씀은 조용했으나 바위굴안을 무겁게 울리는듯 했다.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에는 파벌도 여러 갈래고 거기에 가담한 사람들도 많았소. 자파세력확장과 령도권쟁탈을 위해 분별을 잃고 서로 싸운 사람들속에서 주동분자들은 대체로 권력과 직위를 탐내는 야심가들이였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 주견이 없이 옳은 지도를 받지 못했던 탓으로 파쟁에 휩쓸려들었댔소.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의 제한성이 빚어낸 후과였소.

이런 형편에서 지난날 종파에 가담했다 해서 덮어놓고 배척하거나 제거해서는 안되오.

더군다나 서대석이 같은 사람은 오래동안 일제의 감옥에 갇혀 고초를 겪으면서도 반일의 지조를 지켜왔는데 우리의 로선을 모르고 방해가 된다고 해서 배척하고 제거해버린다면 그 사람이 어디로 가며 그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소!

얼마나 억울하고 통탄할 일이요! 혁명력량을 확대하는데서도 손실이 되고··· 좋아할건 일본놈들뿐이요.

지난날 반일투쟁을 한다는, 선각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정견과 당파관념에 사로잡혀 패패 갈라져 다투던 곳에서, 서로 시비중상하고 배척하고 제거하면서 테로행위까지 서슴지 않아 일제의 군경들에게 어부지리를 던져주던 그 땅에서 우리까지 그 전철을 밟아 조선사람들을 반일의 길에 묶어세우지 못한다면 일제를 언제 멸망시키고 나라의 광복을 어떻게 이룩하겠소.

물론 석진동무가 말하듯이 명망도 없고 투쟁경험도 많지 못한 젊은 혁명가가 공산주의자로 소문난 서대석이 같은 인물을 설복하거나 포섭한다는게 간단한 일이 아니요.

말로 당하기 어려울뿐더러 영향력을 휘둘러 내려누르는 힘을 견디기 어려울거요.》

《···》

《그렇지만 우리는 그 일을 해야 하오. 동무가 못하면 다른 동지가 하고, 한 사람이 못하면 다섯사람··· 열사람이 투신해서라도 그 일을 해야 하오.》

모닥불은 다시 사그러지고있었으나 불꼬챙이를 손에 쥔 차석진은 잉걸불을 긁어모으거나 나무가지를 꺾어넣을 생각을 잊어버리고 굳어진듯 앉아있을뿐이였다.

그이의 말씀을 귀담아듣고난 지금 그는 가없이 굽이쳐간 구릉선을 바라보며 언덕우에 서있는 기분이였다. 가야 할 길은 멀고 올리막도 내리막도 있을것이지만 눈앞이 환히 트이고 가슴에서는 열의가 서서히 끓어올랐다. 아직은 모든것이 뚜렷치 않았지만 신심이 생기고 힘이 생겼다.

《사령관동지, 잘 알았습니다.》 하고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다시 공작지로 나가겠습니다.》

그이께서 아무 말씀도 없으시자 차석진은 자기가 생각없이 한말이 아니였음을 정중하게 밝히였다.

《제가 조직을 꾸리고 확대하면서 여러가지 일을 벌려놓고 매듭을 짓지 못했으니 비밀이 루설될수도 있고 뒤일이 몹시 걱정됩니다.

서대석이라는 사람도 소란하게 돌아치면서 무슨 소동을 벌릴것 같은게··· 불안합니다. 공작지로 빨리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김일성동지께서는 차석진을 보면서 갈린 음성으로 나직이 이르시였다.

《날이 새겠는데··· 이젠 좀 눈을 붙이오.》

사양하는 차석진에게로 다가가 팔을 잡아 이끌어 바위굴 한쪽에 마련해놓은, 마른 가지와 락엽을 깐 잠자리에 눕히시였다.

그러시고는 대원들이 코를 골며 자고있는 굴어구를 지나 밖으로 나가시였다.

하늘에는 구름장이 무겁게 덮이고 산속에서는 추위가 설렁거렸다. 날새기전의 칠흑같은 어둠에 덮인 우중충한 산발을 바라보느라니 떠나온 만수툰광산이 떠오르고 무너져내린 암석층에 깔린 광부들의 처참한 모습이 련상되시였다. 또한 그 인간생지옥을 만천하에 고발하여 반일사상을 고취하려고 하는 조봉길의 혁명가다운 립장과는 다르게 그 시신들을 어딘가에 합장하여 민심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한다는 고형근의 절충행위가 의분을 자아냈다.

《고형근이라는 사람을 꼭 만나야겠군.》

갑자기 서울에 나타나 어학회에 주던 얼마간의 돈줄까지 짤랐다는 말을 들을 때에 고개들던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구름장이 두텁게 깔린 남쪽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시였다. 이제 다시 그쪽에 나가 공작을 수행해야 할 차석진이 걸어야 할 길을 더듬어보시는것이였다.

날샐녘의 바람이 설렁거리고 검은 구름장틈으로 푸르무레한 새벽빛이 스며나오고있었다.

《사령관동지!》

어둠속에서 나직이 울린것은 차석진의 목소리였다. 다가오는 발자욱소리가 들리더니 등뒤에서 멎었다.

《왜 자지 않고 나왔소?》

정겹게 물으면서도 돌아서지는 않으시였다. 그이께서도 지금 다시금 머나먼 적구로 보내야 할 사랑하는 대원에 대해 생각하시였고 그와 더불어 더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고싶던 참이였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사령관동지,

자리에 누우니 이제 다시 나가서 해야 할 일들이 구름처럼 떠오르면서 마음이 진정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할 일들을 마치고는 하루빨리 떠나겠습니다.》

움직임이 없는 한동안이 지나 그이께서 여전히 돌아보지 않고 물으시였다.

《석진동무··· 리순정이를 잊지 않았소?》

차석진은 불시에 가슴이 찌르르해지면서 눈물이 고여올라 대답하지 못했다. 그이께서 기다리고계심을 느끼고는 마음을 다잡아 입을 열었다.

《잊지 않았습니다.··· 사령관동지, 잊지 못하겠습니다.》

깊은 호심에서 솟아올라 고요하던 수면에 세찬 파문을 일으키면서 멀리까지 퍼져가는듯 한 열정어린 고백에 심취되여계시던 사령관동지께서는 천천히 돌아서서 그의 앞으로 다가서시였다.

《순정동무는 지금 황거우령(황구령)아래의 밀영병원에서 부상당한 동지들을 치료하고있소. 나는 언제든지 석진이가 돌아오면 의향을 알아보고 동무들의 사랑을 맺어주고싶었소.

벌써 몇해가 지났소! 혁명의 길에서 사귀여 서로 사랑하면서도 혁명임무때문에 갈라져 만나지도 못하던 동무들이 그립던 정을 나누게 같이 있을 기회를 마련해주고싶었소.

그런데 석진동무도 말했지만 비밀사업을 벌려놓고 매듭을 짓지 못했으니 시간이 흐르면 무슨 사달이 생길수 있소. 그러니 동무는 하루빨리 공작지에 가야겠소.

이 말을 하자니 나도 괴롭소.···》

《사령관동지!-》

감격하여 부르짖은 차석진은 더 말을 못했다. 가슴에 쓰라리게 남은 오래전의 일을 지금껏 잊지 않고 그토록 마음쓰시는 뜨거운 인정에 고개가 숙어지고 눈물이 솟구쳐올랐던것이다. 그는 가슴속의 열기를 후련하게 내쉬고는 눈물어린 눈을 슴벅거리고 말했다.

《사령관동지께서 알아주시니 더 바랄것이 없습니다. 순정동무를 만나시면 저의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저는··· 지금의 행복한 심정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동터오는 새벽빛발속에 묵묵히 서계시는 사령관동지의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어리고있었다. 차석진의 소박한 진정에 감동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한 그를 적후 멀리로 떠나보내야 하는 심정이 쓰라렸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