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3


 
 

제 2 장

3

 

그들은 나흘째 되는날 점심무렵에 사령부밀영에 도착했다.

풀밭에서 총을 닦던 대원들이 달려오고 초막에서 쉬고있던 동무들도 뛰여나왔다. 반갑게 맞아주는 동무들의 등뒤에서 발그레해진 얼굴에 어색한 웃음을 지은 한영옥의 모습을 띠여본 박중돈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태전에 후방밀영이 자리잡은 수림변두리의 잎떨어진 황철나무밑에서 실망과 고통을 안고 헤여진 뒤로 원망도 하면서 애끓게 자주 그려보던 모습이였다.

기지로 행군해가면서 그 길이 아무리 마음싸지 않았다 해도 한영옥이를 만나지 않게 되리라는 사실이 하나의 위안이였었다.

가다가 중도에서 돌아오니 거기에 한영옥이 있었지만 굳이 만나지 않았었다. 각을 뜬 메돼지 한마리를 지고 사령부를 향해 돌아오던 때 한영옥의 생각같은건 하지도 않았으니 그 점에서 사소한 오해라도 받고싶지 않았던것이다.···

동무들에게 둘러싸여 초막으로 올라가느라니 농촌공작에 다녀오면서 량식을 지고오지 못한것이 죄스러웠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밀영에 계시지 않았다. 두만강류역지구 소부대들의 전투정황을 지도하러나가셨는데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던것이다.

식당초막에 들려 도토리가루를 풀어넣고 쑨 더덕죽을 먹느라니 공작의 실패가 더욱 가슴아프게 느껴졌다.

(사령관동지를 대할 면목이 없구나-)

오는 길에서도 내내 걱정이였는데 지금 계시지 않으니 마음이 더욱 무거워지는것이였다. 옆구리에 난 상처도 뜨금뜨금 쏘지만 그런건 오히려 참을수가 있었다.

식사를 마친 두 동무가 병실로 내려갈 때 박중돈은 담배를 붙여물고 초막밖에 나와 갈데를 잊은 사람마냥 수림속을 초점없이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싸리로 엮은 배짜리우에서 도토리알들이 부옇게 말라가는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개울가에 앉아있는 녀대원을 보았다. 자갈밭에 쪼그리고 앉아 방치질을 하는것이 한영옥이였다. 얼굴을 알아보기전에 고개숙인 동그스름한 앉음새며 방치질하는 자즘자즘한 팔놀림에 가슴굽이 쩌릿해졌다.

들판우에 널어놓은 더덕뿌리를 짓쫏는데 단조로운 방치질과 움직임이 없는 눈길, 옹송그린 자세에 내심의 긴장이 어리여있었다.

(내가 내려오는걸 봤구나-) 하고 생각하니 저도모르게 서글펐으나 웃으며 앞에 가서 멎어섰다.

《영옥동무, 오래간만이구만.》

처녀는 일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가 흐려진 눈길을 숙이며 다정하게 대답하는것이였다.

《안녕하셨어요?》

자세는 굳어지고 목소리가 떨렸다. 군모의 채양에 반쯤 가리워진 빨갛게 달아오른 처녀의 동그스름한 얼굴을 굽어보는 박중돈의 눈앞엔 만나면 상글거리던 모습, 고개길에서 힘겨워하는 그 녀자에게로 다가가 총이나 배낭을 메여다주려고 하면 《됐어요. 창피하게···》 하면서 꾸짖듯이 곱게 흘기던 이전날의 자태가 떠올라 가슴이 쓰렸다.

(다 내탓이였지···)

하고 그는 자신을 뉘우쳤다. 지금도 심정이 우러나는대로 행동하던 이전날처럼

《영옥이- 그동안 잘 있었어? 보구싶었다야-》 하고 허물없이 대했더면 처녀의 가슴에 엉키였던 설음도 풀리여 두사람의 마음은 뜨겁게 융합되였으리라-

하지만 박중돈은 동무들이 웃건말건 한영옥에게 마음이 끌려 더펄거리던 오래전의 그가 아니였다. 다른 사람은 다 믿지 않아도 동무만은 믿어달라고 하소연했으나 비난과 원망을 듣고 돌아선 뒤로는 가까이서 지내면서도 다시 찾아가지 않았으며 자기를 피나게 닥달하면서 굳세여진 대원이였다. 부대를 따라 머나먼 다른 전구에 가서도 자기를 믿어주고 살틀하게 이끌어주시던 사령관동지를 그리워하고 치욕을 남긴 전구를 못잊어하면서도 가슴속에 따뜻이 떠오르는 처녀의 자태는 쓸쓸한 웃음으로 덮어버리였었다. 그러다가 지금 다시 사령관동지를 가까이 모시고 싸우면서는 자기를 더 무섭게 다잡아가고있는 터이였다. 게다가 오늘은 군중공작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마음이 편치도 않았다.

《여긴 더덕이 많구만.》

짓찧어놓은 더덕무지를 보며 요긴하지도 않은 말을 한 박중돈은 미간을 찌프렸다. 오래간만에 만난 처녀앞에서 정겨운 말을 한마디도 번지지 못한 자기가 불만스러워서였다.

《더덕이 많아요. 많이 캤어요.》

하고 한영옥이도 얼굴에 가까스로 웃음을 지으면서 속으로는 한숨을 지었다. 만나면 할 얘기가 많아 하고싶은 말도 다 못하던 그들사이에 오래간만에 만난 이 자리에서 할 말이 없는것이 한스러웠다. 침묵은 더 고통스러웠다.

《오래간만에 먹으니 더덕죽도 맛있더구만.》

그렇게 번져놓은 박중돈은 (더덕죽이 무슨 대수야!) 하고 씁쓸하게 생각했다.

《입안이 떫고 목이 깔깔한데 무슨 맛이 있겠어요!》

《···》

《그렇지만 사령관동지께선 언제나 달게 잡수시고 우리더러 맛있다고 칭찬하셔요.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사령관동지께 더덕죽밖에 대접하지 못하는게 가슴아파요.》

마음을 갈앉힌 처녀가 담담하게 하는 소리에 박중돈의 마음도 진정되였다. 사령관동지께 밥을 지어 대접할만 한 량식조차 가져오지 못했다는 생각에 더 할 말이 없어진 박중돈은

《홍동무랑 어디갔는지 모르겠소?》 하고 건성으로 물었다. 그냥 떠나기가 멋적었던것이다.

《병실로 갔어요. 조금전에···》

대답이 떨어지자 걸음을 옮겨놓았다. 비탈길을 한참 내려왔을 때에야 등뒤에서 방치질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영옥은 그사이에 터질듯 한 가슴을 부여안고 내려가는 박중돈의 뒤모습을 바라보았다.

(말하기를 꺼리는구나- 하긴 그때 밀영병원에서 동정을 바라고 찾아온 저 사람에게 나는 자기 괴로움과 울분을 터뜨렸었지.···)

방치를 들고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이태전의 그때를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믿지 않는다 해도 영옥이만은 자기를 믿어달라고 하소연했을 때 북받쳐오르는 설음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원망하고 비난했었다. 말달구지에 실려가던 실정에 대한 깊은 고려도 없이, 당자의 심정을 헤아려볼 여유도 없이 분한김에 쏘아붙인 말에 박중돈은 고개를 떨구고 한숨만 쉬다가 돌아섰고 터벅터벅 멀어져가는 그의 뒤모습을 바라보는 영옥의 가슴은 찢어질듯 쓰리고 아팠었다.

그후 부대에 돌아오신 사령관동지께서 지휘관들을 책망하며 험난한 혁명의 길을 함께 걸어오면서도 어쩌면 동지들을 그다지도 알지 못하는가, 박중돈이 변절하여 도주할 사람인가, 배신자가 되여 혁명가의 탈을 쓰고 대오에 기여들 사람인가, 자신께서는 박중돈을 믿는다고, 성미가 거칠고 혁명적인 세련이 부족하지만 원쑤의 개가 되여 동지들을 해칠 사람이 아니라는걸 확신한다고 하신 말씀을 전해듣고는 해저무는 눈덮인 개울가에 앉아 흐느껴울었었다.

사령관동지의 웅심깊은 믿음과 뜨거운 인정에 목이 메여 울었고 곤경을 겪는 그에게 믿음도 주지 못했던, 소갈머리없고 랭담한 자신을 뉘우치며 울었다. 기력이 진하도록 흐느껴 울고나서 얼음장밑에서 쑤얼거리며 흐르는 개울물소리를 듣다가 한숨을 지었다. 계절의 힘에 눌려 두텁게 얼어붙은 얼음장밑에서도 갈길을 잃지 않고 소리치며 흐르는 개울이 부러웠고 주위의 분위기에 축잡혀 몸을 움츠리고 속마저 얼어버린 자기가 스스로도 가엾었다.

젖먹던 시절부터 양부모의 살틀한 보살핌속에서 자랐고 혁명군에 입대한 후로는 동지들의 사랑과 도움만을 받아오던 처녀에게는 과오를 범하고 위축되여 번민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감싸주고 품어줄만 한 너그러운 아량이 없었고 뜨거운 심장이 없었던것이다.···

방치질을 하면서도 그날저녁 초막안의 잠자리에 누워서도 의젓하고 생각이 많던 박중돈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며 한숨을 지었다.

앞으로도 박중돈이 자기를 찾아다니며 화해를 바라지는 않을것이며 그렇다고 제쪽에서 용서를 바랄수도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쓸쓸해지면서 눈물이 고여오르는것이였다.

(내가 투쟁속에서 어엿한 녀전사로 자라난 뒤에, 속이 깊고 아량있고 기개높은 녀전사가 된 뒤에 그 동무를 찾아가 내 심정을 털어놓겠어.) 하고 처녀는 속으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