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10


 
 

제 2 장

10

 

《···나라의 광복을 위한 투쟁은 온 민족이 한결같이 궐기하여 성취해야 할 위업인만큼 모든 조선사람들이 한마음한뜻으로 굳게 뭉쳐 싸워야 합니다.

노를 저어도 한곳을 향해 저어야 하고 삿대를 배겨도 한곳을 향해 배겨야지 저마다 제나름으로 노를 젓고 삿대를 배긴다면 배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과거의 우리 나라 반일투쟁력사만 더듬어보아도 원쑤를 꺼꾸러뜨리기 위해 뭉칠 생각은 하지 않고 당파와 정견만을 중시하면서 자파세력확장에 광분하다나니 일제를 꺼꾸러뜨리지 못했을뿐더러 강한 타격도 가하지 못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의 취지를 해설하시고나서 일제를 종국적으로 멸망시키기 위한 전민항쟁의 필요성과 수행방도, 반일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들을 조직에 묶어세울 방침에 대해 말씀하시였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선생님을 우리 투쟁대오에 인입하려는건 아닙니다.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은 자기 한몸뿐아니라 온 일가의 운명도 다 바쳐야 하는 생사결단의 싸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준엄한 투쟁에 나서본적이 없는 선생님을 이 길에 나서라고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선생님은 여태까지 하시던 일을 그냥 하십시오. 하지만 고향을 떠나 이국땅에 와서도 고역을 치르며 굶주리는 조선사람들에게 농사를 잘 지으면 배불리 지낼수 있고, 일을 많이 하면 잘살수 있다는 허망한 사상을 고취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일제가 바라는것이고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들이 떠벌이는 선전입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조선사람들을 동정하고 도와주면서도 모든 고통과 불행의 화근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며 일제를 멸망시키고 조국을 광복하기전에는 고통과 불행이 가셔질수 없다는 진리를 깨우쳐주십시오.

애국지성을 지닌 조선의 지식인들은 동포들에게 그 엄연한 진실을 밝혀주어야 합니다.》

고형근은 어째서인지 가슴이 허전했다. 지엔다오(간도)땅에서나마 나라를 위하고 겨레들을 위해 활동한다는 자부를 안고 살아왔으며 이번에 이리로 오는 길에서도 자기로서는 바라지 않고 감당하기도 어려운 일을 맡길가봐 우려했었는데 장군님의 간곡한 말씀을 듣고보니 큰뜻을 품고서도 실속없이 살아온 자기의 인생이 허무해지는것이였다. 지나온 평생이 보람없이 느껴졌고 자기딴에 애써온 일들이 가소롭게 생각되였다. 심란해진 그의 심정을 헤아리시며 장군님께서 말씀을 이으시였다.

《오늘 우리가 선생님에게 드린 당부가 결코 헐한 일은 아닙니다. 가는 곳마다에 일제의 촉수가 뻗쳐있는 세상에서 선생님처럼 사회적직책을 가진분이 사람들에게 진실을 깨우쳐준다는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리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생님의 애국심을 믿고 기대를 가지겠습니다.》

장군님의 진정어린 말씀에 고형근은 가슴이 후더워졌다.

그는 잠겨드는 목을 침을 삼켜 추기고나서 입을 열었다.

《제가 사람이 용렬하다보니 나라와 겨레들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여태 이렇다하게 해놓은 일이 없습니다만 오늘 장군님의 깨우침을 받은 이상 사람들에게 일본놈들이 바라는 말을 떠벌이지 않겠습니다.

제가 보고 깨달은 한에서는 진실을 깨우쳐보겠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대견하여 웃으시였다. 고형근이처럼 명망이 있고 당지의 고관들과 구애없이 상종하면서 그네들이 바라는 활동을 하는 인사가 사람들앞에서 모든 시책의 본질을 밝히거나 암시한다면 반일감정을 고취하는데서 큰 의의를 가질것이였다.

고형근이 그 일을 어떤 방법으로 하겠다고 말은 하지 않았으나 마음을 가다듬은 표정으로 보아 납득이 된것은 명백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반일의 뜻을 품고있으면서도 여태껏 길을 찾지 못해 헤매고있는 이 유산층 지식인에 대한 동정과 더불어 따뜻한 인정미를 느끼시였다. 시작이 중요하고 전환점이 중요한만큼 그도 이제 반일의 길을 더디게나마 착실히 걸어가리라고 믿으시였다.

《뜻있는 분을 만나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를 하고 마음이 통하니 더욱 힘이 생깁니다. 선생님을 며칠간이라도 여기서 쉬게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싶습니다만 늦어지면 적들의 의혹을 살수 있으니 더 지체시키지 않겠습니다.》

고형근은 아무 반응없이 묵묵히 앉아있다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장군님, 털어놓고 말씀드리면 ··· 제가 여기로 떠나올적엔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던 끝에 죽으면 한번 죽지 두번 죽겠느냐 하고 강심을 먹고 나섰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어리석기 그지없는 생각이였습니다만 용렬하다보니 목숨걱정을 앞세웠던것 같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장군님 말씀처럼 걱정되는바가 있지만 그 처리는 저에게 맡기시고 하루밤만 더 묵어가게 해주십시오. 로독도 로독이지만 장군님의 말씀을 들으니 생각되는바가 많아서 머리를 식히고 마음을 갈앉힌 연후에 이야기를 더 나누고싶습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바라신다면 우리는 기쁘게 응하겠습니다. 선생님의 신변에 대한 걱정만 없다면 하루가 아니라 한달이라도 체류할수 있습니다. 변변히 대접할것은 없습니다만···》

이야기에 심취되여 시간가는줄 몰랐는데 좁은 골짜기우에서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지고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피곤하실텐데 오늘은 이만하고 쉬라고 권고하시였고 고형근이도 선선히 응하였다.

초막을 나서서 걸음을 옮기던 고형근은 나란히 걸으시는 장군님쪽으로 돌아섰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한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어서 물으십시오.》

《한데 어째 군사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저의 미천한 소견으로도 사령부에 이렇게까지 군사가 없을수는 없을것 같습니다.》

그이께서는 너그럽게 웃으시였다.

《우리 군사들은 다 모인다 해도 일제의 대군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적은 력량입니다. 그러기에 여태까지 유격전을 해왔습니다. 지금 일제가 우리를 완전소탕하려고 대부대들을 들여미는 형세에서 우리 군사들은 불리한 도전을 피해 조선과 만저우(만주)의 넓은 천지에 물방울처럼 잦아들었습니다. 아까 말씀한바와 같이 인민들을 반일항전에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때가 되면 샘줄기가 흘러 개울이 되고 개울이 합쳐 강을 이루듯이 노호하는 항일의 대하를 이루어 원쑤의 아성을 들부실것입니다.》

그이께서는 신심에 넘쳐 말씀하시였고 고형근은 귀담아 들으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개울건너에서 녀대원들이 나직이 노래를 부르며 싸리배짜리우에 무슨 풀뿌리를 널고있는데 녀대원 한명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물속에 들어서서 소랭이에 담은 풀뿌리를 헹구고있었다. 물에 들어서서 일하는 녀대원의 모습을 여겨보던 고형근이 장군님을 돌아보며

《저 녀성이, 아까 명사수라고 하던 그···》

하고 관심을 보였다.

《옳습니다. 그 동무입니다.》

고형근이 개울쪽으로 다가가자 허리를 펴고 돌아보시던 김정숙동지께서 인사를 차려 기슭으로 나오시였다. 고형근은 미안쩍어하며 물었다.

《다름이 아니라 ··· 어떻게 그처럼 이름난 명사수로 되였는지 알고싶습니다.》

겸양의 미소를 지은 김정숙동지께서는 눈길을 숙이고 잔잔하게 대답하시였다.

《제가 목표물을 빗맞히지 않았다면 원쑤놈들에 대한 증오심이 눈을 똑바로 뜨게 했기때문이겠지요.》

단순하면서도 뜻이 깊은 대답에 기 가눌린 고형근은 걸음을 돌리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에게 설명하시였다.

《저 김정숙동무의 아버지는 일찌기 왜놈들을 반대하는 투쟁에 나섰다가 전사했습니다. 그후에 가족들이 살길을 찾아 지엔다오(간도)에 들어왔는데 어머니와 올케는 일본군의 <토벌>에 학살당하고 오빠와 손아래 동생은 혁명을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온 가족이 일본놈들을 반대해서 싸우다가 희생되였습니다.》

《···》

고형근은 생각에 잠겨 한숨을 지었다. 개울건너편에서 녀대원들이 부르는 서정짙은 민요의 곡조가 가슴이 쓰리게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자아내는것이였다.

《우리 혁명군에는 녀대원들도 적지 않습니다. 고향도 다르고 생활경위나 지식정도도 각이하지만 반일사상만은 한결같이 투철한 동무들입니다.》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그 한마디한마디가 고형근의 가슴을 무겁게 울리며 깊은 생각을 자아내는것이였다.

대원들의 그 투철한 반일사상은 생활의 걸음마다에서 보고느낀 일제에 대한 증오와 원한에 바탕을 두었으리라··· 하고 생각했다.

묵묵히 걸어가던 고형근은 개울가에서 절구질을 하는 녀대원에게로 다가가서 일하는 모양을 기웃이 넘겨다보았다. 초막에 올라와 식탁을 챙기던, 몸이 통통한 낯익은 처녀였다.

절구호박에는 마른 흙부스러기 같은 짓찧어진 암갈색 도토리알갱이들이 그득했다.

녀대원은 공이를 놓고 물러서서 발그레해진 볼우에 드리운 머리칼을 손등으로 쓸어올리며 상긋이 웃었다. 아침에 초막에서도 그랬지만 동그스름한 얼굴에 애티가 흐르는 처녀의 모습을 여겨보면서 고형근은 시집간 딸애의 처녀때를 상기했다.

《이걸 우려서 무얼 만드오?》

그는 호기심을 품고 물었다.

《낟알이나 더덕을 넣고 죽을 쑵니다. 묵도 만들고··· 떡도 만들지만 죽이 제일 분한이 있습니다. 먹기도 좋고···》

고형근은 명랑한 대답을 들으며 가슴이 어두워졌다. 입에 대기도 바쁜 도토리가루마저 아껴서 먹는 정상이 가긍했던것이다.

《하루삼시 이것만 먹고 견디겠구만.···》

《하루에 두끼 혹은 한끼로 에우는 때도 있습니다.》

녀대원은 미소가 꺼져가는 커다란 눈을 들어 낯선 손님을 여겨보면서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싸움터에 나가봤소?》

녀대원은 입가에 피여나는 웃음을 손등으로 가리우고 눈길을 내리깔면서 대답했다.

《우리가 다니는곳이 그대로 싸움터인걸요.》

고형근은 어린 녀대원을 기특하게 여겨보면서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러니 아슬아슬한 격전을 수없이 치르었을터이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부모님들은 계시오?》

《예, 있습니다.》

《고향은 어디요. 어디서 사는 뉘집 딸이요?》

동정심이 우러나 그렇게 물었다. 기억해두었다가 혹시 그 부모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안부도 전할겸 치하하고싶었다. 하지만 녀대원은 미소어린 얼굴을 들고 의젓이 대답하는것이였다.

《선생님, 그런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기로 되여있습니다.》

하고는 손님이 무안해할가봐 깍듯이 덧붙였다.

《생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옳거니ㅡ》

그는 허거프게 웃었다. 얼굴이 뜨거워져서 천천히 돌아섰다.

장군님께서는 개울가의 마른 풀밭을 천천히 걷고계시였다.

고형근은 늦가을추위속에 얇은 홑옷을 입고있는 그 어린 처녀를 동정했던 일을 생각하느라니 입술을 깨물고싶도록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너렁청하고 뜨뜻한 방안에서 호의호식하고 편안히 살면서 기울어지는 시국을 통탄이나 하던 사람이 나라를 찾으려고 청춘을 바쳐 피흘리며 싸우는 용사를 다만 한가지, 배를 곯고 헐벗었다는것으로 하여 측은하게 여기다니···

얼마나 저속하고 비렬한짓인가!

그러자 문득 아까 장군님께서 불쌍한 동포들을 동정하고 민족의 실력배양을 떠들면서 다니는 사람들의 본의는 어떻든 그것이 소극적인 반항이고 침략자와의 타협이고 무저항주의라고 말씀하시던 일이 떠올랐다.

(내 체면을 보아 더 험하게는 말씀하시지 않으셨겠지.···

나자신도 조상전래의 성을 뺏기고 《센징》이라고 멸시당하는 주제에 다만 재산이 있고 학벌이 높다는것으로 하여 강도배들의 호감을 사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고 적선하다니.···

진정으로 의롭고 용감한 사람이라면 동정하고 적선할것이 아니라 그네들을 궐기시키고 앞장에 서서 강도배들을 때려부셔야 하지 않는가!)

전에는 결코 떠오른적 없는 이러한 생각에 옴하여 고형근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니 《개척민》부락들이나 농촌마을에 나갔을 때 거기 사는 사람들이 나를 만나면 허리굽혀 존대하는것이 내 인격이 높아서거나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라 해서가 아니다. 내가 자기들을 동정하고 얼마간의 적선을 하는것이 고마와서이고 또한 그만큼 그네들이 자기 존엄에 대한 의식이 박약하기때문이다.)

고형근은 《위문단》을 이끌고 재해가 생긴 만수툰광산에 가서 돌아다닐 때 람루한 옷을 걸친 광부들이 지나가는 자기에게 멸시에 찬 시선을 던지던 일도 상기했다. 그때 그는 그 광부들에 대해 속으로 (부랑배들이야. 제몸 하나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알부랑배들이지.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구 저희들을 위해 뛰여다니는 사람인줄을 알면서도 버릇없이 사납게 군단말이야.···) 하고 분하게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광부들이야말로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고 또 시중군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먹을것도 나누어주는 좋은 옷을 입은 조선사람이 얼마나 저속하고 비렬한 인간인가 하는걸 꿰뚫어본것만 같았다.···

자기 행위를 파고드니 마음이 번거롭고 불안했다.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이 불만스러웠다. 장군님앞에 큰 죄를 지은것 같고 나어린 녀대원에게도 죄를 지은것만 같았다.

고형근은 장군님곁에 다가가서 방금전에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제가 군률도 모르고 어린 처녀가 기특하다는 생각으로 고향과 부모님들에 대해 물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너그럽게 웃으시였다.

《선생님의 심정을 리해할수 있습니다. 모든 대원들이 외부사람들에게 자기 고향이나 부모님들에 대해 말해서는 안되지만 저 한영옥에게는 더 남다른 사정이 있습니다.···》

《···》

《우리가 몇해전에 린쟝(림강), 푸쑹(무송) 등지에서 싸울 때 한번은 산속을 행군해가는데 골짜기에 거두지 않은채로 두어둔 강냉이밭이 있었습니다. 량식이 떨어진 때여서 강냉이를 사려고 밭주인을 찾았더니 원주인은 양삼포전이 있는 10리밖에 산다면서 농막을 지키는 로인이 나타났습니다. 원주인에게 구매교섭을 하도록 사람을 띄우고 기다리는동안 로인이 청하는대로 농막안에 들어가 쉬려고 하였습니다. 농막지기로인은 다리를 저는 사람이였습니다. 우리가 인민혁명군이라는것을 알고 그 로인이 자기의 과거사를 이야기했습니다. 고향을 떠나 만저우(만주)에 와서 훈춘쪽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3. 1운동이 있었던 이듬해에 일본군대들이 동만일대를 <토벌>하여 조선사람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할 때 처자들은 다 죽고 밭에 나가있던 자기만이 겨우 살았답니다. 처자들의 시신을 겨우 거두고나서 총탄에 맞은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마을에서 빠져나가는데 죽은 녀인의 품에서 울고있는 애기가 있더랍니다. 너무 가엾어서 그애를 안고 그곳을 떠나 동포들이 숨어사는 산속을 찾아다니면서 겨우 연명을 하다가 자기와 같은 처지의 녀인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몸서리치는 참변이 벌어졌던 그 고장을 떠나 시지엔다오(서간도)에 왔답니다.

로인은 가슴아픈 사연을 다 말하고나서 우리더러 평생소원을 풀어달라고 간청하는것이였습니다. 소원이 무어냐고 물으니 악귀같은 일본놈들에게 원쑤를 갚지 않고는 죽어도 눈을 감을수 없으니 저희 세식솔을 다 혁명군에 받아달라는것이였습니다. 소원이 하도 절절하여 거절할수가 없었습니다. 꼭 풀어주겠다고 다짐을 하고 일단 그곳을 떠났습니다. 싸움터에서도 행군과정에도 그 로인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반년쯤 지나서 그 산속에 련락원을 띄워 처녀는 혁명군에 입대시키고 늙은이 량주는 다른 고장에 이주시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게 하였습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농사군이지만 실상은 혁명군을 은근히 크게 도와주고있습니다.》

(농촌에 파묻혀 비밀사업을 하는 모양이구나.)

하고 고형근은 미루어 짐작했다.

《골수에 사무친 조선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자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깊은 사색과 뚜렷한 지향이 울리는 그이의 말씀에 고형근은 가슴이 뜨끔했다.

(일제의 폭정에 시달리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 동포들의 소원을 풀어주자면 일제를 때려부시는 길밖에 다른 길이 있을수 없다.

그런데 나는 동포들을 동정이나 하고있으니···)

개울을 따라 내려가다가 수림쪽으로 꺾어져들어설 때 아래켠 수풀속에서 사복차림을 한 장정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고형근은 우뚝 멎어섰다. 허나 장군님께서 천천히 걸으시기에 따라서면서 그이의 표정을 살피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긴장해진 그의 심정을 리해하고 미소를 지으시였다.

《안심하십시오. 이 근처에는 적의 밀정이나 암해분자들이 얼씬 거리지 못합니다. 다 우리 사람들입니다.》

고형근은 말없이 따라섰으나 발앞을 굽어보는 눈에는 그늘이 어려있었다.

사복차림의 그 사람들은 평안도지방에서 활동하는 지하조직의 책임자들이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사흘전에 도착한 그들의 활동정형을 료해하시다가 고형근이 도착하자 그들과의 사업을 잠시 미루시였던것이다. 게다가 며칠후이면 경상도일대에서 활동하는 유격대공작원들이 도착하게 되여있어 무척 다망한 형편이였으나 그이께서는 총망한 기색은 추호도 나타내지 않으시면서 오히려 고형근의 마음속에 떠도는 의혹을 풀어주려고 마음쓰시였다.

《이 밀영에서는 국내와 동북의 여러 지역에서 비밀활동을 하는 대표들이 자주 찾아옵니다.

선생님께 참고삼아 알려드립니다.》

(나를 이렇게까지 믿어주시다니···)

고형근은 고개를 숙이고 송구스러워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장군님께서 계시는 산간이 조선의 민심이 쏠리고 민족의 념원이 뻗어있는 구국항전의 구심점이구나!-)

고형근은 이날밤 잉걸불로 훈훈하게 덥혀진 초막에 누워 허무하게 지낸 지난날을 뉘우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사령부초막에 올라간 그는 장군님과 마주앉자 여태껏 량심을 괴롭히던 비밀부터 털어놓기 시작했다.

《전명석군의 사건에 대해서는 사실 제가 어렴풋이 짐작하고있었습니다.···》

그렇게 허두를 뗀 고형근은 군기헌납에 대해 의논하고 싶다는 호출을 받고 경찰청장실에 들렸던 사연을 상세하게 말씀드렸다.

《경찰청장의 책상우에 우리 회사 화물대장이 놓여있는걸 보고 의아했댔습니다. 경찰청장은 대장을 번지고 전명석의 이름을 짚더니 이 사람이 어디서 사는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대장에 기입된 주소밖에 모른다고 대답하니 고개만 끄덕이다가 이 사람이 짐 찾으려오는가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때 짐이 도착했으니 찾아가겠지요 하고 심상하게 대답했습니다.

경찰청장과의 이야기는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전명석군은 상품구입하러 가면서 저한테서 돈을 취해갔으니 언제건 꼭 올터인데 저는 사실 그 사람이 나타나지 말기를 바랬습니다.

그렇지만 전명석군은 십여일후에 화물찾으러 왔습니다. 저는 몹시 불안했습니다. 출고전표를 떼면서 경찰청장이 묻던 말을 넌지시 귀띔했습니다.

젊은이는 심중해지더니 한참후에 나한테서 취해간 돈을 쉬히 돌려드리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합디다. 나는 돈받을 생각같은건 하지도 않으니 일이 무사하게 되도록 잘 처리하라고 타일렀습니다. 나는 전명석군이 돈벌이나 하는 장사군이 아니라는걸 느꼈기때문에 그 사람의 부탁이면 다 들어주었습니다.

전명석군은 출고수속을 하겠다고 일어서서도 선뜻 나가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오로지 화물을 기다릴 어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지 못할가봐 그 한가지가 마음에 걸린다면서 망연히 서있다가 여러가지로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하고 전에 없이 정중하게 인사를 합디다. 그때 젊은이의 얼굴에는 쓸쓸한 미소가 떠돌았으나 눈에는 비장한 결기가 어려있었습니다.

사무실을 나서자 형사들이 다가오는걸 보고 전명석군이 무슨 약을 입에 넣어 삼키는걸 창문을 통해 제가 똑똑히 봤습니다. 한동안 격투를 벌리더니 전명석군이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오래도록 말씀이 없으시였다. 사랑하는 전사의 희생을 가슴아파하면서 사건의 전말을 추리해보시고 비감에 싸여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선생님의 주변에 밀정이 있습니다. 그놈이 명석동무의 뒤를 캐다가 경찰에 밀고하여 그의 화물을 비밀리에 조사한것 같습니다. 귀중한 동지였는데···

선생님이 사실대로 말씀해주어 진상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선생님이 공작원과 련결되여있지 않다는 사실이 증명되였으니 경찰도 선생님을 의심하지는 않을겁니다.》

고형근은 침울하게 앉아있다가 경찰과 《토벌대》의 움직임, 시내의 형편 등을 뜨직뜨직 이야기했다. 한낮때가 되여 하직을 고했다.

《이번 걸음에 많은걸 배우고 많은걸 느꼈습니다. 제가 깨달은만큼은 실천하겠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대견해하시였다.

《선생님같은 애국지사들이 반일의 길에 적극 나선다면 광복의 날도 앞당겨질것입니다.》

고형근은 헤여지기가 아쉬워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초막으로 내려왔다. 떠나기를 서둘지 않고 담배를 태우고있는데 조봉길이 나타났다. 감개가 어린 너부죽한 얼굴을 숙이고 가까이에 와서 앉더니 초막앞의 마른 풀밭을 망연히 내다보며 진중하게 말했다.

《장군님께서 전명석동무가 선생님에게서 취해 쓴 돈을 군자금으로 갚아드리라고 저에게 말씀하셨는데 액수가 얼마나 됩니까?》

고형근은 의아하게 돌아보다가 한숨을 쉬고 중얼거렸다.

《아까 이야기하는 과정에 내가 실언을 했소. 전명석군과의 관계를 보아서도 받으려고 생각지 않았던 돈인데 이제와서 그 돈을 받는다면 내가 무슨 사람값에 나가는 사람이겠소.》

그리고는 피우던 담배를 뻐금뻐금 빨다가 훌 내불고 담배불을 껐다.

《장군님 같은 령수를 모시고 싸웠으니 전명석군은 짧은 한생을 영광스럽게 보낸 사람이요.》

그리고는 말없이 오래동안 앉아있다가 고개숙이고있는 조봉길을 돌아보며 불렀다.

《이 사람, 봉길이.》

《예-》

《내가 사람이 변변치 못하다보니 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아무런 마련없이 왔소구려. 믿어주신 뜻이 고마울뿐더러 내 진정을 달리 나타낼길이 없어··· 장군님께 작은 도움이나마 드리고싶어··· 얼마간의 물자를 보내드리려고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떻소?》

고형근이 주저하며 말했으나 조봉길은 언제나처럼 선선히 대답했다.

《장군님께서 기뻐하실겁니다. 혁명군을 지원하여 보내는 물품이면 품종이나 수량에 관계없이 고맙게 받으라는것이 장군님의 뜻입니다.》

《흐음-》

고형근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인도서나 령수관계는 경제경찰에 걸리지 않게 제가 마련하겠으니 사장님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이번에 내가 명월구의 <청곡상회>에 들렸다가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 싣고가겠으니 자네가 앞뒤일을 잘 아귀맞춰주게.》

《고맙습니다. 장군님께 죄다 말씀드리겠습니다.》

하고 조봉길이도 마음이 후련해져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