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1


 
 

제 2 장

1

마차는 콩크리트담장을 둘러친 커다란 집앞에서 멎어섰다.

암회색 제낀 양복에 줄무늬가 간 넥타이를 매고 채양이 짧은 캡을 점잖게 눌러쓴 든든하게 생긴 젊은이가 땅바닥에 내려서자 마차는 오던 때처럼 조용히 떠나갔다.

널판으로 정교하게 짜고 한쪽에는 쪽문까지 달려있는 담갈색 대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넓은 뜨락에는 여름한철 서늘한 그늘을 던지면서 풍치를 돋구었을 포도넝쿨이 청기와를 얹은 지붕처마에까지 뒤엎여있었다. 본채에서 떨어져 한켠으로 들여다보이는 사랑채같은 집에서 구레나룻이 시커먼 사나이가 나오더니 허리굽혀 절을 하고 다가왔다.

오백룡은 양복저고리 안주머니에서 명함장을 꺼내주었다. 그것은 조봉길에게서 받은 한문자로 찍은 관동군 경리부 통역관의 명함장이였다. 그의 거동은 태연하고 침착했으나 마음은 어지간히 긴장되여있었다. 명함장이나 옷차림은 이 방문이 문전거절을 당하지 않기 위한 허울이였다. 주인을 만나서는 어디까지나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

집안에 들어갔던 사나이가 다시 나와 현관으로 안내했다.

산수를 그린 수묵담채화가 벽에 걸린 넓은 방 복판에 짧은 네다리를 꼬부려 앉힌 장방형의 응접상이 놓여있는데 구석쪽 서탁앞에 앉아있던 흰 명주바지저고리를 입은 주인이 천천히 일어서면서 손님을 맞았다.

중키의 단단한 체구, 단정한 얼굴에서 유표하게 드러나는 짧으나 숱좋은 쐐기형의 코수염, 왼골을 타서 갈라붙인 머리가 물결치며 한쪽을 가리운 반듯한 이마밑에서 이쪽을 지켜보는 눈길이 칼끝처럼 날카로왔다.

오백룡이 고개숙여 인사하자 주인은 말없이 건너편 방석을 가리키며 앉기를 권했다. 오백룡은 속으로 (독하게 생겼군.) 하고 생각하면서도 조봉길이 말하던것처럼 범접하기 어려운 사람으로는 보지 않았다. 표정이며 거동에서 겉치레가 없었던것이다.

《다망하신 사장님을 선통도 없이 찾아와 죄송합니다.》

웃음을 지으며 인사말을 건네였다.

《괜찮습니다. 군속에 계시는분 같은데 무슨 볼 일이 있는지···》

군부의 통역관쯤은 대단치 않게 여긴다는듯 인사치레도 없이 대뜸 용건을 건드린다.

《사장님과 긴히 상론할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군부와 관련되는 비밀한 업무에 종사하는분이··· 나 같은 민간인과?··· 허허···》

주인은 당치않은 소리라는듯 허거프게 웃었는데 이쪽을 미심쩍게 여기면서도 여유있게 처신하는 속내가 그 웃음에 나타났다.

오백룡은 자기의 별에 탄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는 미끈한 옷차림이 주인의 의혹을 자아냈으리라 생각하면서 실속없는 치레말을 오래 끌수록 성미가 급해보이는 주인의 부아를 돋구게 되리라고 짐작했다.

산길을 함께 오면서 조봉길이 태평스럽게 늘어놓던 례의범절, 인사를 나누어가면서 천천히 본색을 드러내라던 훈계같은건 다 집어치우고 자기 판단에 따라 목표를 향해 돌진해야겠다고 작정했다.

《저는 명함에 밝혀진 그런 사람이 아니라 조선인민혁명군대원입니다.》

주인은 크게 놀라는 기색이 없이 미간을 찌프리고 이쪽을 지켜보다가 중얼거렸다.

《그런즉?···》

아마 그 군명이 생소했던 모양이다.

김일성장군님유격대입니다.》

주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눈빛은 속내를 알수 없이 침침해지는것이였다.

《산에서 싸운다는 공산군이구만. 헐벗고 굶주리면서 연명해간다는···》

《일본놈들이 공산군이요, 공비단이요 하고 악담을 퍼붓지요.》

《그러니··· 쏘련으로 넘어가지 않구 그냥들 있었구만.》

《우리는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고있습니다. 조선과 만저우(만주)의 넓은 천지에서···》

고형근은 반응없이 뒤말을 기다리다가 물었다.

《하다면 나를 찾아온 용건은 뭐요?》

오백룡은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산에서 내려올 때 조봉길이 권연 한곽을 넣어주면서 마주앉아 얘기하다가 대답이 궁하거나 생각을 더듬어야 할 경우에 한대 권하면서 자기도 피워물고 천천히 엮어가라던 충고가 떠올랐으나 겉치레를 모르는 그에게는 틀을 차리는 놀음이 귀찮았다. 하지만 고형근의 활동과 관련한 기본문제에 들어가기전에 전명석이와의 관계를 여유있게 알아보라고 하시던 사령관동지의 말씀을 명심하고있었다. 더군다나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는 물음을 받았으니 그 일로부터 시작을 해야 했다.

《사장선생은 전명석이라는 젊은 상인을 아십니까?》

《···》

주인은 침묵을 끌뿐이였다.

《우리가 알기엔 사장선생과 가까운 사이였다던데요?》

《한데···그건 어째서 묻소?》

《얼마전에 그 사람이 운송회사에 짐 찾으러 갔다가 잘못됐습니다. 사장선생도 아마 알고 계실겁니다.》

《···》

주인의 눈에 고뇌가 스쳐간것을 감촉한 오백룡은 선의를 품고 허심하게 털어놓았다.

《그 사람이 무슨 일로 잘못됐는지 알아보고싶습니다.》

허나 고형근은 오히려 랭담해지는것이였다.

《나는 그런 사람을 모르오. 그런 일이 있었다는것도 금시초문이요.》

조금전과는 전혀 다른 완고한 태도에 오백룡은 아연해졌으나 주인은 눈길을 구석쪽에 돌리고 까딱하지 않았다. 쐐기형의 새까만 코수염밑에서 꾹 다문 입이며 태연한 자세가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을상 싶었다. 주인의 팽팽해진 모양을 보면서 오백룡은 자기가 속을 털어놓은걸 후회했다. 그런대로 그의 마음을 움직여보려고 허심하게 말했다.

《우리는 선생님이 이 지방에서 조선사람들의 생활을 여러모로 돌보아주고 농사군네 아이들을 공부까지 시키려고 가산을 털어넣으며 수고한다는걸 압니다. 또 이전에 조선에 계실 때부터 나라의 광복을 위해서 활동했다는 사실도 알고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선생님을 믿고 존경하기때문에 도움을 받으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

《우리는 전명석이 선생님앞에 잘못을 저질렀거나 어떤 오해를 받아 그런 일이 빚어졌을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막을 모르겠지만 선생님의 잘못으로 그 사람이 잘못됐다 해도 사실대로만 알려주신다면 선생님의 처지를 리해하고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고형근의 두눈에 조소의 빛이 스쳐갔을뿐 표정은 여전히 랭담했다.

《당신이 변장까지 하고 내 집에 들어왔으니 나를 묶어갈수도 있고 죽일수도 있을거요. 그렇지만 나는 그런 사람을 모르오. 자살이고 뭐고 들으니 처음이요.》

담벽처럼 버티고 나서는 잡도리가 만만치 않았다. 대답을 들을수 없으리라는걸 깨닫자 오백룡의 가슴에 의분이 끓어올랐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으나 상대방에게 권할것도 잊고 한대 붙여물었다. 천천히 들이긋고 내불면서 마음을 갈앉혔다. 이쪽의 흥분을 느껴서인지 눈길이 꼿꼿해진 주인의 표정을 스쳐본 오백룡은 연기를 길게 내불면서 담배불을 껐다.

《전명석의 희생은 우리에게 큰 손실입니다만 선생님이 모른다고 하니 더 묻지 않겠습니다.》

하고 단호하게 아퀴를 지은 오백룡은 짤막히 한숨을 짓고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선생님이 이역땅에 와서 고생하는 조선사람들을 여러 모로 도와준다는걸 알고 존경하고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그런 활동은 나라잃은 겨레들을 위한 좋은 활동이 아니며 일제를 반대해 싸우고있는 우리의 투쟁에는 방해가 되는 활동입니다.》

《방해가 되는 활동을 한다?··· 내가 무슨 활동을 하기에?》

고형근은 저으기 놀라와하며 한편 흥미가 있다는듯 이쪽을 건너다 본다. 굳어졌던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눈길에 또다시 조소가 어리였다가 사라진다. 오백룡은 속이 불끈해졌으나 참았다.

《선생님은 지금 많은 활동을 벌려놓고있습니다.

시내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농촌들에 간이학교를 세우고 조선에서 들어오는 <개척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농사를 잘 짓게 여러가지로 도와주고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일들이 동포들을 잘살게 하고 민족의식을 높여주는 활동으로 인식하는것 같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일제가 조선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려먹기 위해 떠드는 개나발을 앞장에 서서 실천하는 활동입니다.》

젖히고 앉아 오백룡을 쏘아보는 고형근의 눈에는 반감과 조소가 이글거렸다. 오백룡은 속이 뜬뜬해서 견결하게 말했다.

《선생님이 자기딴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불쌍한 동포들을 위해 뛰여다닌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보기엔 선생님이 가산을 기울여가면서 일본놈들을 도와주고있습니다.》

고형근은 방바닥에 제빠듬히 젖히고 앉았으나 눈길을 벽쪽에 돌리는데 쐐기형코수염아래의 량입귀엔 비틀린 조소가 남아있었다.

그는 지금 자기앞에 앉아있는, 신사복으로 미끈하게 몸을 가리웠으나 얼굴이 볕에 그슬고 손이 북두갈구리 같은 젊은이의 말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듯 한 태도를 보이고있었다. 하지만 젊은이의 말은 며칠째 번거로운 생각에 뒤척이는 고형근의 마음을 아프게 건드렸다.

미나미총독이 리극로를 접견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서울로 떠날 때에는 가증스러운 원쑤의 회유에 끌려들어가는 벗의 행위에 격분했었다.

그의 집에 찾아갔을 때 자기의 신랄한 규탄에 변명도 못하고 거북해하는 리극로를 보면서 실망과 더불어 환멸을 느꼈었다. 했으나 절교를 선언하고 돌아오는 길에서는 마음이 무겁고 생각이 번거로왔다. 어색해하면서도 너그럽게 웃어버리던 리극로의 둥그스름한 농민형의 얼굴이 떠올랐고 소매끝에 실밥이 드러나보이던 청회색의 낡은 양복이 눈앞에 얼른거렸다.

그 옷은 리극로가 귀국할 때 입었던것이였다. 그때에는 훌륭하고 지어는 서유럽형의 신식양복으로 그무렵의 조선에서는 이채롭기까지 했었다. 리극로는 그 옷을 아껴입었는데 자기가 만저우로 솔가하여 떠날 때에도 그 옷을 입고 경성역에 전송하러 나왔었다.···

어찌하여 자기는 생활에 쪼들리는 의로운 벗을 버렸는가··· 하고 괴로와하다가도 아니다, 그는 벗이 아니라 친일로 기울어진 저속한 지식인이다, 뜻은 있었으나 지조가 없는 사람이다 하면서 량심을 위안했었다. (그렇다면 만저우땅의 한구석에서나마 일본고관들과 상종하면서 편안한 생활을 누려가는 너는 어떤 사람이냐?)

량심이 눈을 뜨고 그렇게 물을 때면 (나는 조선의 민중들앞에서 일본놈들에게 굽신거린적이 없으며 그놈들의 기발을 들고다니면서 신사참배를 한적도 없다, 일본놈고관들과 상종하는것은 겉치레고 내 진속은 어디까지나 나라의 광복을 념원하며 나의 모든 활동도 겨레들을 위해 바쳐지고있다.) 하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너의 활동이 만몽의 대륙에 《왕도락토》를 건설한다는 일본사람들의 거짓스러운 말과 무엇이 다르냐?···) 하는 의식의 반발에 대답이 궁했으나···

(그렇게라도 이 험악한 세월에 사는 동포들을 도와줘야 한다. 나는 불쌍한 조선사람들을 도와주는것이지 일본사람들을 돕는게 아니다. 그렇게라도 조선사람들을 깨우치고 돌봐주어야지 시운이 기울어진 조선을 위해 인생도 저물기 시작하는 내 나이에 따로 무슨 일을 할수야 없지 않느냐!) 하고 자기를 변명하며 위안했었다.

변명은 그렇게 했으나 마음은 편안치않았다. 하여 그는 량심을 아프게 하는 그 의혹을 생활의 항다반사로 덮어버리면서 지난날의 타성에 따라 하루하루를 엮어나가는터이였다.

그런데 지금 산에서 내려온듯 한 이 불청객이 아물어가는 그 자리를 아프게 건드렸다.

고형근은 마음이 괴로왔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생면부지의 불청객의 말에 괴로와하거나 당황해하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너무도 강했고 학벌이며 지체가 너무도 높았던것이다.

고형근은 조소어린 얼굴을 돌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살길을 잃고 이국땅에 와서 헤매는 우리 겨레들이 헐벗고 굶주리며 무지몽매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오?》

오백룡은 버젓이 대답했다.

《우리는 헐벗고 굶주리는 조선사람들이 침략자의 채찍밑에서 배부르고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는것이 아니라 한마음한뜻으로 굳게 뭉쳐일어나 침략자를 때려부시고 광복된 제나라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굳게 뭉쳐일어나 침략자를 때려부신다- 듣기 좋은 슬로간이지만 꿈같은 소리요!》

그의 얼굴에서 조소의 빛은 서글픔으로 번져가고있었다.

오백룡이 반박하려고 하자 고형근은 주의도 돌리지 않고 혼자말처럼 뇌였다.

《망국노가 된지 30여년··· 그래 당신네 말고는 조선에 애국지사들이 없었구 구국용사들이 없었던것 같소?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뿐아니라 그러루한 말과 행위는 이에 신물이 나게 듣구 보았소. 그만하기요.》

《선생님은 우리를 전혀 모릅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조선독립군이나 동북의 반일구국군과는 전혀 다른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조선인민혁명군입니다. 우리는 강철같이 조직된 대오로 지난 십여년동안 인민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일제와 싸웠고 앞으로도 인민들의 힘에 의거하여, 인민들을 반일전선에 묶어세워 일제를 꺼꾸러뜨리려고 합니다.》

《일제를 꺼꾸려뜨린단 말이지! 거 참 통쾌하오.》

고형근은 비로소 입을 벌리고 벙긋이 웃었는데 눈에도 명랑한 빛이 어리여 마치도 당신같이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것이 유쾌하긴 하오 하고 말하는상 싶었다. 오백룡은 집주인의 그러한 표정에 모욕감을 느꼈다.

자기가 그를 설복할만 한 뜻이 깊은 말을 조리있게 하지 못했음을 후회하던터이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명주바지저고리를 입고 틀지게 앉아있는 사람에 대한 강렬한 반감을 느꼈다. 고형근은 이쪽의 기분상태에는 아랑곳없이 웃으며 묻는것이였다.

《일본군대는 청나라나 로씨야를 꺾었고 지금은 세계적인 강군인데··· 당신네 병력은 얼마쯤이나 되오?》

《군사비밀이지만 선생님에게만은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이제 불원간에 천만은 못되여도 7, 8백만명쯤으로 불어날겁니다.》

고형근은 고개를 쳐들고 몸을 젖히면서 소리없이 유쾌하게 웃었다. 비웃음도 의혹도 없는 그 웃음에 오백룡은 더욱 격해져서 전민항쟁방침을 설명하려고 했으나 기회를 얻을수 없었다.

유쾌한 웃음끝에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고 나서 주인이 묻는것이였다.

《당신은 대체 어디서 떠나 어떻게 여기까지 왔소? 하긴 이런것도 비밀이여서 물어서는 안되겠지.···》

《안될것도 없습니다. 밀영에서 떠나 산길을 오다가 도로에서 지나가는 마차를 얻어타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니 아침도 점심도 건넸겠구만.》

성시공작에 대한 강습을 줄 때 조봉길은 여러가지 경우를 예상하여 여유작작한 그의 성미와는 전혀 달리 자질구레한 갈래를 쳐가면서 잔소리같은 《강의》를 끈덕지게 엮어댔었다. 하지만 지금 두사람의 대화는 조봉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왕청같은 곬으로 훌떡훌떡 번져가고있었다.

오백룡은 배심이 든든해서 기탄없이 대답했다.

《남의 집에 손님으로 가면서 굶어다닐수야 없지요.

더덕죽과 이삭강냉이 구운것으로 끼니를 제대로 에웠습니다.》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는데 상념이 짙어가는 눈길에는 감동의 빛이 어리여있었다. 솔직하고 떳떳한 젊은이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던것이다.

몸을 일으킨 주인이 구석쪽에 붙인 초인종의 단추를 누르자 뒤뜰로 통한 문이 열리고 구레나룻의 사나이가 나타났다.

《찾으셨습니까?》

《<지엔다오(간도)반점>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2층귀빈실에 두사람분의 료리를 준비하도록 하오. 이제 내가 손님을 모시고 가겠으니 마차도 준비하고.》

사나이가 나가자 주인은 자리에 앉았다. 불쾌한 면담을 더 끌지 않으려는듯 웃으며 너그럽게 말했다.

《산속에서 보급받는 물자도 없이 살아가기도 어려울텐데 일본군대를 대항해 싸우고있으니··· 결과는 여하튼간에 기백이 장하오.》

《어렵지만 견디여 냅니다. 목적이 뚜렷한 사람에게는 기백도 중요하지만 결과가 더 중요하지요.》

《···》

《결과를 믿지 않았다면 한두해도 아닌 십년세월 우리가 어떻게 싸웠겠습니까!》

주인은 감탄한듯 상대방을 정겹게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이때 문기척소리가 나고 구레나룻의 사나이가 다시 나타났다.

《장새촌사람들이 주인님을 만나겠닥고 찾아왔심다.》

《무슨 일이요?》

《당장 겨울김장을 해얄텐데 소금이 없어서··· 주인님이 <개척민>부락 사람들에게 알선해준것처럼 저네들께도 배당되게 해달락고··· 소청임다.》

《내가 뭐 소금장사군이요!》

주인은 불쾌해하면서 꺼질듯 한숨을 쉬고는 온화하게 일렀다.

《필요한 량을 현공소의 서무계에 신청해두라고 하오. 후에 교섭해보겠으니···》

그리고는 공허를 느끼는듯 닫긴 문쪽을 물끄러미 보고있다가 개탄했다.

《우리 조선사람들이 배운것 없이 살림에 쪼들리다나니 이웃을 아끼며 사랑하는 마음이 이다지도 없소그려.

저 사람들에게도 소금이 배정되지 않은게 아니요.

고향을 떠나 낯선 고장에 와서 살림살이를 펴놓은 불쌍한 <개척민>들에게 약간한 선심을 썼다해서 저희들은 왜 그렇게 보아주지 않느냐고 시비를 캐고 드니··· 한고장에 살면서도 어찌 화목이 이루어지겠소!

조선사람들을 하나같이 묶어세운다는건 꿈같은 소리지.···》

그러자 오백룡이 말했다.

《차별하고 하대하면 감정이 상하고 격분하게 되는게 사람입니다. 더구나 일제의 기만선전에 속아 끌려온 <개척민>들을 우대하고 오래전부터 이국살이에 쪼들리고있는 원주민들을 박대하니 반감이 생기지 않을수 없지요.

그렇지만 생활적인 리해관계나 정견과 신앙에서 차이와 알륵이 있다 해도 만사람의 운명이 하나로 엉켜있는 민족의 존망이 판가리되는 마당에서는 일제를 반대해서 한덩어리로 뭉칠수 있습니다.》

《나도 산전수전을 다 겪어보고 내딴의 길을 걷고있소.

지금 형편에서 조선사람들을 반일전선에 한덩어리로 묶어세운다는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요. 공산주의자들속에만도 파벌이 얼마나 많았소!》

오백룡이 반박하려고 하자 주인이 앞을 질렀다.

《우리 서로의 뜻을 잘 알았으니 쟁론하지 말고 리해하고 존중합시다. 자기 의사를 남에게 강요하지 맙시다.》

그리고는 일어서더니 아래방으로 내려갔다. 오백룡은 무시당한 사람의 분노를 참고있었다. 공작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음을 느끼자 더욱 울분이 끓어오르는것이였다.

잠시후에 나들이옷으로 갈아입은 주인이 미닫이를 열고 올라왔다.

《이렇건저렇건 구국의 뜻을 품고 피를 흘리면서 고생하는 분들인데··· 약소하나마 군자금으로 써주시오.》

그러면서 손때도 묻지 않은 지페뭉치를 응접상우에 정중하게 놓았다.

오백룡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페뭉치에는 눈길도 돌리지 않고 지그시 앞을 쏘아보며 모욕감에 치를 떨었다.

《나는 어느 반점에 가서 대접이나 잘 받자고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로 온게 아닙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겨레를 사랑하는 선생님에게서 도움을 받고 또 선생님이 하시는 일에 도움을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나하구 이야기하기를 달가와하지 않는구만요. 음식대접이나 하고 돈푼이나 주어 돌려보내려고 서두릅니다.

나는 례절에 어긋나는 이러한 모욕을 참을수 없고 용서할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사령관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고형근선생은 애국지정이 두텁고 구국의 뜻을 안고살아온 귀중한분이니 신변의 안전에 거슬리거나 적들의 의심을 살수 있는 사소한 일도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엄하게 말씀하셨기때문에 참고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는 의젓이 일어서서 덧붙였다.

《우리는 후방이 없는 전쟁을 하다나니 먹을것도 못먹고 입을것도 못입고 어떤때엔 나무열매나 풀뿌리로 끼니를 에우며 싸웁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투쟁을 지지하고 성원하는 사람들이 지원하는것이면 낟알 한되박이나 푼전 한잎이라 해도 고맙게 받아서 귀중하게 씁니다.

하지만 우리 혁명군을 리해하지도 못하고 우리의 투쟁을 지지하지도 않으면서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이라고 동정해서 주는 돈은 백만금이라도 받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가 나가버리자 주인은 어리벙하게 서있다가 따라나갔다. 마당에는 쌍두마를 메운 유개마차가 서있었다.

《손님을 요구하는데까지 모셔다 드리오.》

주인이 마부에게 이르고 오백룡이 오르자 마차는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