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8


 
 

제 1 장

8

 

《무슨 일로 갑자기 이렇게 나타났나?》

리극로가 물었으나 고형근은 선뜻 대답하지 않고 방안에 들어가 의자에 앉아서야 시답지 않게 한마디했다.

《고향에 두루 볼일이 있어서···》

《이사람, 코트를 벗게나.》

리극로는 웃으며 권했으나 고형근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고 그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아니 그럴새가 없어. 바쁜 일이 있어서···》

리극로는 그의 기분상태며 찾아온 까닭을 비슷이 짐작하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자리에 와서 앉는 주인의 기색을 살피다가 고형근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공산당왈패들과도 가까이 지내는군!》

리극로는 방금전에 자기눈앞에서 벌어진 상서롭지 못한 상면을 통해 그들의 관계를 짐작할수 있었으므로 난처해서 중얼거렸다.

《글쎄 어쩌겠나. 찾아오는 손님을 마다할수야 없지 않은가?》

《하긴··· 공산당왈패하고 만나건 조선총독님과 만나건 내가 관여할바가 아니지···.》

고형근이 공산당에 반감을 품고있음을 잘 알고있는 리극로에게는 만나면 서로 씨명대신에 호로써 부르며 뜻을 같이 하던 옛친구를 만난 이 자리가 이중의 압박감을 받는 거북한 자리였다. 게다가 보전보전투의 소식이 전해진 후부터는 김일성장군님을 우러러 경모하고 공산주의리념에도 깊이 동조하던 그로서는 마음이 번거로왔다.

숱진 눈섭아래에 매눈같은 눈으로 집주인을 지그시 지켜보고있던 고형근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11년전에 우리가 수원농사시험장부지에 갔다가 관병식 초청에 사절했던 일을 잊지 않았겠지?》

《···》

《그런 얼림수에 넘어가 일본놈들과 붙어다니면 조선사람들의 반일의식에 어두운 그늘을 던진다고 말한건 자네였지?》

《나였지, 청송! 이 사람, 자네의 말뜻을 알만 하네. 총독접견이고 뭐고 하는건 어용신문이 늘 하는 허풍이네. 총독이 만나겠다고 출두하라 해서 할수 없이 갔더니 다른 사람이 나타났더군.》

《총독이건 대리인이건 같은 놀음이지.》

《내가 이번에 총독부에 간것은 어학회를 살리자는 그 하나의 취지였네···》

거기까지는 버젓이 말했으나 그 리면에서 조국광복회의 하부조직을 보호하면서 반일활동을 하려고 했다는 말은 입밖에 낼수 없었다. 착잡한 심정을 가리우며 묵묵히 앉아있다가 변명이라도 하듯 한마디 보탰다.

《총독부에서 호출하면 안나가는 수가 있나! 생사여탈권을 다 틀어쥔 권력의 중추인데···》

고형근은 그의 어수선한 표정을 지켜보고있었다. 지엔다오(간도)에 살면서도 조선의 실정에 늘 마음쓰던 그는 얼마전에 그 신문을 보고 격노했었다. 접견이라는 사실자체도 놀라왔으나 그렇게 시작되는 총독부의 관심과 롱락, 거기에 수긍하고 추종하게 될 리극로의 립장을 묵인할수 없었다. 하여 그는 만사를 제치고 그날로 떠났던이다. 기차칸에 앉아오면서도 생각이 많았다.

자기는 만저우(만주)땅에 가있으면서도 모든 꿈을 묻어버리고 겨레들을 위해 동분서주하는데 국내에서 한때 뜻을 같이 했던 지기들은 시국의 된바람을 견디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명사》라는 영예를 인생과 더불어 묻어버리기가 아쉬워서인지 신문잡지에 일본글을 써내고 시국강연에 출연하고··· 하는것이 분하고 한스러웠다.

(리극로마저 휘여들다니!)

살림에 쪼들려 그렇게 되였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시세에 따르는거지ㅡ) 하고 통분하게 여기면서도 만나서 알아보리라ㅡ 하는 속심으로 차에서 내리자 바람으로 그를 찾아왔던것이다.

그리고 지금 마지 못해 대답을 하면서도 선밥에 얹힌 사람처럼 거북해하는 리극로의 태도를 보고 피차에 구차한 말을 더 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고루,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지엔다오에서 기업인이 되였네.

운송업을 하면서 그밖에 자질구레한 사업을 하다나니 자금이 딸려 저당잡혔던 부동산을 매각해버리기로 했네. 그러다나니 어학회를 후원하던 얼마안되는 자금도 이달부터는 넣어줄수 없게 되였네그려. 량해해주게.

그동안 우리 청민이두 자네 신세를 많이 졌지···》

리극로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것은 절교의 선언이였다. 게다가 이달부터는 당장 먹고살길이 막혀버린것이다. 자기는 물론이고 상무로 일하는 동료들에게도 지급할 밑천이 없는것이다. 곧은 성미에 동정심이 많은 자기 벗이 어째서 이런 결단을 내렸는지를 짐작하고있었지만 구구하게 딴말을 하지 않고 오히려 웃으면서 너그럽게 넘겨버렸다.

《자네 사정이 딱해진 모양이구만!···

오래간만에 왔는데 그곳 소식이나 좀 얘기하게나.》

고형근은 마음싸지 않아서 몇마디 했다.

《소식이라는것두 뻔하네. 만저우도 일본놈의 천하가 되였으니 만사가 다 한나름이네.》

《사회형편이야 그렇겠지. 난 그게 아니라 반일항쟁부대들의 무장투쟁소식을 알고싶었네.》

《그것도 별거 없네. <토벌>대군이 밀려드니 총소리도 없어졌어. 공산군들도 견디지 못해 쏘만국경을 넘어 아라사에 들어갔다구들 하더군!》

시답지 않게 대답한 고형근은 놀라와하는 리극로의 표정을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용건을 아퀴지었다.

《오래간만에 만나 안되였네만 난 사실 그 일때문에 여기 들렸네.》

그리고는 지고온 시름을 덜지 못한 사람마냥 무겁게 일어섰다.

닥쳐온 고충보다도 만저우의 무장부대소식에 얼떠름해져서 앉아있던 리극로도 마지 못해 따라일어섰다. 고형근은 주인이 따라서는 기미를 느끼면서 방을 나서서 층계를 내려갔다. 찌그러진 널층계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소매깃이 닳아 실밥이 드러난 친구의 낡아빠진 양복저고리를 눈앞에 떠올려 가슴굽이 저렸으나 뒤돌아보는 일도 없이 현관을 나섰다. 밖에서는 여전히 보슬비가 내리고있었다. 하숙방의 짐을 꾸려들고 기다리던 아들이 따라서면서 우산을 씌워주었으나 그것도 깨닫지 못하면서 뚜벅뚜벅 마당을 지나갔다. 길지도 않은 한평생이 저물어가는 나이에 고매한 뜻으로 맺어져 만리타향에서도 가슴에 그득하던 귀중한 벗과 영영 갈라졌다는 생각으로 하여 망국민의 설음이 밀물처럼 고여오르고 살아가는 인생이 더없이 구슬펐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모질게 다잡고 좁은 골목길을 내다보며 꼿꼿이 걸어갔다.

리극로는 쓰개도 없이 대문앞에 서서 뒤돌아보지도 않는 벗을 바래우며 하염없이 서있었다.

지척지척 마당을 지나 현관에 들어선 리극로는 웃층에서 기다리고있는 홍준걸을 망각해버리고 방안에 들어섰다. 방금전에 하숙생이 짐을 꾸려들고 가버린 방안에는 뚜껑을 닫지 않은 잉크병이 책상우에 남아있을뿐이였다.

사이문을 열고 올라온 안해는 집안의 분위기를 어렴풋이 느끼고있은듯 공손한 눈길로 남편을 쳐다보며 무슨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리극로는 눈길을 숙이고 우두커니 서있을뿐 입을 열지 않았다.

《고선생이 오시는것 같드니··· 어찌 그렇게 훌쩍 떠나셨는가요?》

안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향에 나왔던길에 잠간 들렸다면서··· 자기 사정이 딱해 어학회에 주던 자금도 더는 내지 못하겠다더구만. 청민이도 데려갔소. 우리 집에 부담을 끼친다고···》

말이 부담이지 실상은 덕을 보는 처지였다. 친구의 곤궁을 잘 아는 고형근이 아들의 하숙비라는 명목으로 안주인에게 푼푼한 생활비를 꼬박꼬박 보내주었던것이다.

《그러니 사전편찬이 더 어렵게 되였군요.》

하고 녀인은 걱정스럽게 말했다.

《사전편찬이 다 뭐요. 당장 끼니를 이어댈 방도가 없는터에··· 저당잡힐 물건도 더 없지 않소!》

리극로는 기가 막혀 웃었으나 안해는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팥죽장사라도 하겠으니 당신은 살림걱정 마시고 하던 일을 계속 하세요.》

리극로는 껄껄 웃다가 갑자기 눈굽이 달아올라 등을 돌리고 창문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팥죽장사를 하면 쌀되박이라도 벌것 같소? 밥벌이가 그렇게 쉬울것같으면 서울장안에 굶어지내는 사람이나 밥 빌러다니는 사람들이 없어진지 오랬을거요.》

현관쪽문이 빠끔히 열리고 조심스러워 하는 홍준걸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오늘은 이만 실례하고 후날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의 존재를 잊고있던 리극로가 망설이다가 선선히 수긍했다.

《홍선생, 이거 안됐소이다.》

인사는 깍듯했으나 굳이 내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만사가 번거롭고 종잡을수 없었던것이다.